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서 그녀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비행기를 탔다.  6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8


첫눈에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라고 느꼈다.  12


언제나 첫인상만큼 믿지 못할 것도 없다.  13


마음의 문을 닫고 고집스럽게 칸나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홍이의 존재는 정말이지 내게 성모 그 자체였다.  30


한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탓에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자라고 말았다.  36


시집을 발견한 나는 엎드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펼쳤다.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거기서 홍이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47


둘 사이에는 한 장의 천도, 둘 사이의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67


바다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저녁이면 대개 혼자서 몰래 울었다. 

"같이 있는데 뭐가 쓸쓸해?"

나는 그녀가 몰래 울 때마다 그렇게 물었다. 홍이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말했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77


"글쎄, 엄마가 일본 사람하고는 결혼 못한다잖아."

그래도 그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132


사소한 한마디, 별 뜻 없이 한 말이 그 틈에 커다란 균열을 만들어 버리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을 모른다. 병을 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161


"일본도 마찬가지야! 나도 케이크만 시킬 때가 있다고!"

"누가 준고 생각을 물었어? 난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과 일본은 문화가 다르다고 한 것뿐이야."

"그렇지만 네가 문제를 비약시키잖아. 케이크와 음료가..."

우리는 녹초가 될 때까지 그런 바보스런 논쟁을 되풀이하다 결국엔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홍이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고, 부탁이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줘. 부탁이니 무조건 날 지켜 줘. 준고, 부탁이야. 무슨 일이든 내 편만 들어 줘'

그런데도 나는 홍이의 고독한 마음을 받아 주기는 커녕 내치려 했다. 왜 홍이가 조바심을 내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했다면, 홍이가 마리코와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빵집 마리코 탓이 아니었다. 그건 전부 내 탓이었다.  173


"잘못했다고 하면 되잖아. 사과하면 누가 벌이라도 줘? 너희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야?"  178


"엄마가 왜 일본 사람하고 결혼 못하게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가 말했었지. 기억 나? 나는 외국 사람하고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어째서 무책임하게 결혼하자는 말을 했어? 나를 외톨이로 내버려 둘 거면서. 제대로 사과도 안할 거면서."  179


나는 칸나 덕분에 확실히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203


만약 내가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하고 레코드 가게를 나오며 생각한다. 나는 일본을 미워했을까, 아니면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을까.  224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상대방의 마음을 제멋대로 거짓으로 꾸미는 게 보통이에요.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40


"난 그때 너와 함께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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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니였다면 나는 지난 일 같은 건 그냥 아름답게 간직해 버리고 말 거야. 노래방 같은 데서 노래 부를 때만 조금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릴 거라고."

"잊는다고?"

내가 물었을 때 록이는 맥주잔을 들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잊는 거, 잊어버리는 거 말이야."

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잊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내 자신이었다.  26


그때 나는 그의 곁에 있느 모든 여자를 질투했었다. 칸나라는 여자는 물론이고, 그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있던 뚱뚱한 아주머니까지. 공원을 걷다가 그가 일으켜 세워 주었던, 넘어진 열 살짜리 꼬마 아이까지. 그게 누구든 그가 나 이외의 모든 여자에게는 찡그린 표정만 보여 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그게 터무니 있든 없든 그랬다. 나는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살고 싶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가끔 그의 손이 내가 살고 있는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면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잠들고 싶었다. 어릴 때 피아노 뚜껑을 덮어 버려서 흉터가 남은 그의 손가락에 내 얼굴을 대고 싶었다. 

"그건 사라잉 아니라 스토킹이야. 집착일 뿐이라고."

나중에 내가 그 이야기를 해주자 친구 지희가 말했었다.  29


그는 부지런했다. 그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엇다. 나주엥 생각한 일이지만 그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슬픔이라는 점령군에게 마음의 영토를 다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던 것도 같았다.  33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언젠가 너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

준고는 무슨 말이든지 하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눈가로 몰려왔다. 피가 얼굴 앞ㅉ고이로 몰려드는 것처럼 아주 무거운 기분이었다.  

담담하고 당당하게 말하려고 햇는데 나는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지난 칠 년을,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내려 앉았던 빨간 심장을 다 토해 버릴 것만 같았다. 

기다렸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 휴대전화를 장만하고 나서 그가 당연히 내 전화번호가 바뀌고, 한국의 전화번호는 세 자리 국번에서 네 자리 국번으로 바뀌어 버렸는데도 심장은 내 머리를 비웃으며 그렇게 덜컥거렸다. 사무실에서든 집에서든 전화를 받아 들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여보세요. 하기까지 전화벨은 고통이 시작되는 신호였다. 그렇게 혹시라도 기적처럼 그가 전화를 걸어 와 베니, 넌 잘 있니? 하고 물으면, 그러면 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응, 잘 있어. 나는 최홍이고, 나는 씩씩한 여자고, 나는 잘 있어. 준고. 어쩔 수 없이. 안간힘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그렇게 잘 있단다.'

그리고 나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 나를 내버려 두었니? 왜 붙잡지 않았니? 잡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그리고 왜 이제야 여기에 온 거니?'  45


아침에 좀 더 신경을 쓰고 나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도 머리도 좀 더 예쁘게 하고 옷도 좀 더 화사하게 입고 올골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아무런 반짝거림도 없이 그저 시들어 가는 노처녀처럼 보였던 것은 아닐까. 내 자신이 싫어졌다. 더도 덜도 아니고 그가 가슴 아플 만큼만, 그가 후회할 만큼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이건 민준을 만나면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다.  51-52


준고는 늘 바빴다.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나 한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까 어떤 때는 임시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래야 학비를 번다니. 

"너희 아버지는 뭐 하셔? 너 혹시 고아 아니니?" 나는 물었다.

"아버지는 첼리스트야, 가난한..." 그가 말했다. 

"혹시 가짜 부모님?"

내가 묻자 그가 하하. 하고 웃었다.  66


"베니, 네 얼굴은 늘 이상한 생기로 가득 차 있어. 일이 힘들어지면 나는 늘 네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을 기억해." 

그건 준고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이가 든 필자 선생님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었다. 

"최홍 씨는 가끔 참 어두워. 세상을 다 살아 버린 사람 같아." 그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

"선생님에게는 독한 추억이 있나요?"

나는 조금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시비 걸듯이 대꾸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몸을 씻어도 아무리 딴 생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취기 같은, 그런 독한 기억이 있느냐고요?"  76


"엄마는 아빠를 아직도 사랑해?" 내가 물었다. 내가 뺨을 대고 있는 엄머의 등이 잠시 굳어졌다.

"... 사랑은, 하지. 그런데 좋아하지는 않아."  77


"사람이 사는데, 꼭 나쁘다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더구나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건 말이야,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거, 그냥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니?"(민준의 말)  87


엄마는 말이 없어진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지. 결혼은 좋은 사람하고 하는 거야."  91


혼자서 그의 집을 나오던 그날 밤, 공원 길을 걸어 기치조지역을 향해가면서 나는 중얼거렸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진한 눈으로 그렇게 묻지는 마... 내가 너보다 많이 슬펐고, 내가 너보다 많이 기다렸고, 내가 너 보다 많은 걸 걸었으니까. 그러니 이제 나를 잊어. 칸나를 잊듯이. 벚꽃이 일제히 지듯이 그렇게... 더 많이 사랑햇던 사람하고, 더 아팠던 사람하고, 정말 처음이었던 사람들이 이미 불행하기로 되어 있었던 걸 너는 모르겠지. 영영 그렇게 모르겠지. 그러니 잊어. 하나도 남김없이 잊어."

그러면서 나는 아마도 뒤돌아보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실은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인 줄도 모르고 이제 그를 떠나야 한다는 결심과 제발 그가 다가와 날 붙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는 것을 느끼며 그곳을 떠나왔던 것이다.  101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없다는 것.  109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111


"그런데 지희야, 혹시 사람에겐 일생 동안 쏟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난 그걸 그 사람한테 다 쏟아 버린 거 같아... 그리고 내 표정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앞으로도 늘 이렇게 말해 줘.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 줘. 부탁이야!"  119


이 호숫가는 적어도 그가 없었던 공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추억이 없으니까. 여기에는 처음부터 나 혼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가 여기 들어섬으로써 나는 기억을 갖게 되어 버렸다. 그러자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칠 년 동안 나를 기다리게 해 놓고. 뭐 딱히 그가 나보고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놓고 겨우 내가 한 바퀴를 도응 동안도 더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125-126


가끔은 하늘도 마음을 못 잡고 비가 오다 개다 우박 뿌리다가 하며 몸부림치는데 네 작은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해도 괴로워 마.(지희의 메일 내용중에서)  130


"..모범 답안으로만 살명 진짜 무엇인 옳은지 모르는 거야."  132


언제나 어린 동생처럼 보였는데 록이가 훌쩍 큰 듯 느껴졌던 것은 아마 내 마음이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34


그가 나를 위해 힘겨운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씩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비싼 음식들을 먹으로 가자고 졸랐던 것은 그의 짐작대로 내가 돈 걱정 없이 자라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멋진 남자와 사랑할 때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 그러니까 좀 더 쾌적하고 로맨틱한 장소에 그와 나의 사랑이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부도 직전의 출판사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자장면만 먹으며 일할 때 나는 준고를 생각했었다.

차비 한 푼도 힘겹던 시간이었다. 지희가 남자 친구를 데려와 소개했을 때 이차로 마신 생맥주 값을 나보고 내라고할까 봐 잊어버린 일이 있는 듯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준고를 생각했었다. 내가 로맨틱한 카페에 가서 프랑스스기 음식을 먹자고 조를 때 그의 눈에 비치던 그 곤혹스러움..., 그가 캔 커피를 사서 공원에서 마시자고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는 것도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철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버린 뒤였다.  137


'최홍. 너, 여기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거니?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암전되어 버린 것처럼 아찔해졌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거역할 수 없는 물음이 들려왔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겟다던 너는,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마취에서 깨어난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왔다. 가슴 한구석이 갈라지는 듯했다.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보았다. 검은 장막이 서서히 걷히며 어렴풋이 사물들의 윤곽이 보였다. 이곳은 좁은 욕실, 준고의 아파트였다. 도쿄였고 일본이었다. 나는 여기서 오전에는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준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196-197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결심을 해야 했다. 나는 준고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할 셈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리자고 하고 싶었다. 내가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 인사했듯이 그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내가 할아버지 이 사람은 좋은 일본인이에요. 하면 할아버지도 빙그레 웃어 주실 것 같았다.


그날 역시 늦게 돌아온 준고는 피곤하다는 듯이 물을 한 잔 마시더니, 자자. 하고 자리에 누웠다.

"할 이야기가 있어."

내가 말을 꺼내자 그는 돌아누우며 제니 내일. 하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대체 너에게 나는 누구니?"

등을 돌리고 누운 준고의 뒷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너에게 나는 무슨 의미인 거냐고!"

그가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바다 위에 내리치는 번개처럼 밤새 내 망막에 푸른빛으로 번쩍번쩍했다.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은 시간이 나니까, 홍. 우리 맛있는 거 먹으로 가자."

아침이 되자 미안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그래, 그럴게. 했다.  198-199


내 생애의 첫 사람인 그..

'하느님 준고를 살려주세요.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에요.' 격정적인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두 손을 모은 채 얼마가 지났을까. 마음이 싸늘히 식어 내리면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다시 한 번 다짐했었다. 준고는 약속을 그렇게 허투루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뒤에 순간이었지만 만일 그런 사람이 약속을 어긴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02


"끝내자, 준고." 내가 말했다.

준고는 마치 낯선 외국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실은 나는 그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랬을 것이다. 우리 지금은 힘든 시간이니까 조금만 이 고비를 넘겨 보자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서투른 동거와 이국 생활의 외로움에 나는 지쳐 가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다정하게 흥, 이야기를 해봐, 하고 말한다 해도 나는 떼를 쓰듯 우겼을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갈래, 한국으로 갈래, 하고. 그때 나는 생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냉정하게 모든 행위에 대해 해명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물둘이었다.

'준고, 함께 한국에 가자. 가서 할아버지께, 일본 여자랑 결혼하려던 아빠를 반대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처럼 좋은 일본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자. 우리 세대는 다르다고 말하자. 응?'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았다.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그의 눈빛이 침묵 속에서 비수처럼 나를 찌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슬픈 얼굴이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204-205


"그래 그럴게. 행복해라..."

그가 말했다. 응, 너도. 라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착한 여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자신이 싫을 것 같았다.  219


"그래, 정말로 달렸어. 그것밖엔 할 수가 없었거든. 말로 분명하게 설명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지만 계속 달렸기 때문에 그때 네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었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넌 혼자서 달렸다는 걸... 난 그때 너와 함게 달렸어야 했다. 난 너에 대해 뭐든 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던 거야. 내가 생각이 모자랐어. 미안해. 내가 나빴다... 내가 나빴어. 널 외롭게 해서."  235



지은이 후기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라는 이야기고 살아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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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사랑이 뭐야?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느낌표라고 대답했다. 꼿꼿하게 허리를 곧추세운! 두 해 전 일이다.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그렇게 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2012년 봄, 사랑을 위한 문장부호로 나는 느낌표 대신 말줄임표를 고르겠다. 지난 이 년 동안 내 마음은 어디론가 천천히 이동했다. 그 길 위에서 이 소설을 썼다.  6

내가 사랑에 대해 조금쯤 더 알게 되었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오로지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깊이 사랑할 것이다.  7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괴상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차라리 지하철 같은 칸에 탄 아가씨와 사귀게 되는 일이 쉬울 것 같았다.  15

"아휴, 좋을 때다. 근데 젊은 아가씨들은 잘 모르겠지만 착한 남자가 최고예요. 언뜻 봐서는 별 매력 없더라도 알수록 진국인 남자, 딱 한 여자밖에 모르는 남자. 요즘 아가씨들 겉으론 똑똑한 거 같아도 그 당연한 걸 잘 놓치더라고요."(미장원 아주머니의 말)  19


연예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찬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78


메뉴판이 왔다. 그들은 개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조심스럽게 저녁식사 음식을 골랐다. 그들은 준호의 제안으로 샐러드를 주문해 나누어 먹었다. 민아는 이 남자가 관대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고, 준호는 이 여자가 소탈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함께한 첫번째 끼니였다.  98


사랑의 초기에 그들은 함께 들어선 이 성스러운 오솔길의 입구를 즐거이 복기하곤 했다. 입구에서 이미 한참이나 지나왔다는, 다시 입구까지 쭉 미끄러지는 퇴행은 없을 거라는 무언의 합의가 둘 사이를 팽팽히 조이고 있어야만 가능한 유희였다. 출구까지의 남은 거리에 관해서는. 아니,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 끝에 필연적으로 놓여 있을 출구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예 떠올리지 않았다.  109  


준호가 가만히 민아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잡은 채 밤길을 걸었다. 누가 왼손이고 누가 오른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111


왜 군대 이야기는 하지 않느냐고 언젠가 그녀가 물은 적이 있다. 준호는 그 말을 듣고야 제가 그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하고는 좋은 것만 나누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터였다. 

"말했잖아. 육군 보병이었다고, 병장 만기제대."

"그런 거 말고."

"그럼?"

"혼자 울었던 밤 같은 것."

"음.... 손톱?"

"손톱이라고?"

"아무한테도 얘기한 적 없는데, 나 어릴 때부터 손톱을 아주 바짝 깎아. 그러지 않으면 물어뜯으니까. 긴장하거나 불편하면 나도 모르게 손톱을 씹는 버릇이 있었거든."

"미안해, 난 몰랐어."

"바보, 자기가 왜 미안해? 막 일병 달았을 때쯤 행군을 나갔어. 장마철이었는데 길에 앉아 점심을 먹었지. 식판에 막 빗물이 들이쳤어. 그때 무심코 내 손을 보게 됐는데 손톱이 어느 틈엔가 이만큼 길어버렸더라. 그 밑에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었어. 물어 뜯을 정신도 없이 살고 있었던 거야. 조금 눈물이 났어. 입대하고 처음으로... 그게 내 군대 얘기야."

다음번 만났을 때 민아는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손톱깎이가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 제품 중에선 제일 좋은 거래. 인터넷 다 뒤져서 찾아낸 거야."

민아가 어깨를 으쓱대는 시늉을 했다. 준호가 그녀의 코를 손가락 끝으로 꼬집었다. 그는 여자친구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보았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구불구불한 웨이브 대신 언제나 간편하게 포니테일로 묶고 다녔다. 소박했지만 그의 눈에는 처음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준호의 가슴속에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꿈이 한 톨 피어 올랐다. 이 사람에게라면, 곧 더 깊은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을지 몰랐다.  117


할머니에 대해서 준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직장 다니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날 다 키워준 거나 마찬가지야, 라고 했을 것이다. 그는 "그래서 민아가 그렇게 따뜻하구나"라고 했으나 "살아계셔?"라고 묻지는 않았다. "건강하시지?" 라고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순간을 넘겼지만 사실은 서운했다. 준호의 관심이 그저 '박민아'의 내부에 머물로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건 바꿔 말하면 박민아의 바깥, 박민아라는 섬을 둘러싼 주변에는 별 관심 없다는 의미였다.  134


출국카드의 직업란에 회사원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쉼표 하나를 그려넣으면서도, 종아리를 쭉 펴기도 힘든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열두 시간 동안 항공기 꼬리 날개를 내다보면서도, 히스로 공항의 외국인 전용 입국심사대 맨 뒷줄에 서서도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원래 내 방식이야. 먼저 떠나는 것, 혼자 남겨지지 않는 것. 차라리 먼저 혼자가 되어버리는 것. 그럼에도, 그녀를 붙잡겠다는 어떤 거짓 제스처조차 취하지 않은 준호에 대한 섭섭함이 마음 한구석에 딱딱하게 응어리져 있었다.  

왜 런던이야? 준호가 물었을 때 민아가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때까지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심지어 모든 것은 그녀가 그에게 '떠난다'는 표현을 입 밖에 내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185


보름은 전혀 모르던 두 남녀가 몸부림치는 사랑의 환희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운명임을 확인하고도 남을 시간이고, 한때 열렬히 사랑한 적 있던 두 남녀가 처음부터 타인이었던 것처럼 냉담 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192


"내가 겪어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는 역시 자상하고 다정한 남자가 최고예요. 지 혼자 속으로 진국이면 뭐해, 표현안 하면 그걸 누가 아나."(미장원 아주머니의 말)

미용사가 언젠가 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앗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였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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