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를 기리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찍이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라 말했으며, 최근까지도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와 챈들러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저서에서 챈들러를 읽으며 문체를 공부했다고 언급했다. 그 외 폴 오스터, 마이클 코널리, 하라 료 등 수많은 작가들과 마틴 스콜세지, 코언 형제 등 유명 감독들이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정유정 작가는 문체나 문장에서 챈들러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했고, 정이현 작가는 “가장 내 타입인 탐정은 필립 말로”라고 했으며, 류승완 감독은 평소 챈들러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10
이 책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유롭게 쓴 편지를 발췌, 편집한 서간집이다. 10
이야기라는 방패를 집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챈들러는 신랄하지만 정의롭고, 까다롭지만 합리적이며, 지적이지만 낭만적인 사람이고, 그런 챈들러는, 자신이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보다 더 매력적이라 단언하겠다. 11
챈들러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문구를 인용하며,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로 한 남자는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두려움도 없는 채로, (……) 마일 그 같은 사람이 많다면, 이 세계는 지나치게 따분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기에 아주 안전한 공간이 되리라.” - <심플 아트 오브 머더>중에서
챈들러의 이상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사회가 타락한다 한들, 누군가는 그 안에서 개인적인 양심을 수호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런 인물이 있는 한 어쩌면 세상에는 일말의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 이상적인 인물은 얼핏 챈들러 자신과도 닮았다. 17
제1장 작품론
등장인물의 감정을 배체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불리며, 문학적으로는 헤밍웨이가 구축했고, 대실 해밋을 통해 추리소설에 접목되면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낳게 된다. 23
펄프 소설 - 192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펄프 잡지(Pulp Magazine)에 실린 소설들을 말한다. 저렴한 펄프지에 인쇄한 이 잡지들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들의 모태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잡지는 챈들러의 데뷔작을 게재하기도 한 <블랙 마스크>로, 편집장 조셉 쇼(혹은 조 쇼)는 특히 대실 해밋을 아꼈으며, 이후 챈들러를 비롯한 펄프 작가들에게 해밋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모든 수사를 재베하고 ‘행동’만을 우선하는 글쓰기를 요구했다. 40
저명한 시인이자 평론가인 위스턴 오든(Wystan Auden, 1907~1973)이 <하퍼스 매거진> 1948년 5월호에 발표한 에세이.. 이 글에서 오든은 탐정소설에 대한 챈들러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았지만, 챈들러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가 볼 때 챈들러는 탐정소설이 아니라 범죄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쓰는 데 관심이 있다. 강렬하지만 극도로 우울한 그의 작품들은 도피 문학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읽혀야만 한다”고 평했다. 43
하드보일드 소설은 내가 고안한 게 아닙니다. 해밋이 공(公)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가져가야 한다는 내 생각을 숨긴 적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시작할 때는 모방을 하죠. 스티븐슨이 말하길, “노력하는 유인원”(<지킬 작사와 하이드 씨>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자신의 에세이에서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유인원 행위(Ssdulous ape)를 통해 글을 배웠다”고 쓴 이후 이 표현 자체가 ‘모방하다’는 의미로 굳어졌다.)이라고 했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가 개인적인 기교, 자신의 글쓰는 수완, 자기만의 표현 수법, 소재에 대한 접근 방식을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가다 보면 표절이라는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45
추리소설에는 아주 강한 환상적 요소가 있죠. 어떤 종류의 글이든 그 안에는 적절한 공식 내에서 움직이는 요소가 있어요. 추리소설가의 재료는 멜로드라마입니다. 사람이 실제 삶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폭력과 두려움을 과장하는 겁니다. (나는 일반적이라고 했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을 일반화하는 작가는 없습니다.) 52-53
매일 무얼하며 지내냐고요? 쓸 수 있을 때는 쓰고, 쓸 수 없을 때는 안 쓰죠. 대개 아침이나 이른 오후 무렵에 글을 씁니다. 밤이면 무척 현란한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지속은 안 돼요. 오래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죠. 55
나로 말하자면, 나는 영감을 기다리는 편입니다. 굳이 영감이라고 명명할 필요는 없지만요. 생명력을 지닌 글은 모두 가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대단히 피곤하고 지칠 수도 있는 고된 일이지요. 의도적인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일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아요.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것도 안 돼요.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하죠. 이게 효과가 있답니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이에요.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55-57
탐정은 완전한 존재로 어떤 사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탐정은 탐정으로서 이야기 밖에, 이야기 너머에 있고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자고 자기 옷을 보관할 장소를 소유하는 것 외에, 탐정은 연애를 하지도 않고, 결혼을 하지도 않고, 어떤 사생활을 누리지도 못하는 겁니다. 탐정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힘은 보수 외에는 얻는 게 없는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무고한 자들을 보호하고, 약자를 수호하며 악당을 쳐부술 것이라는데서 나옵니다. .. 프로는 도시 문명이 가하는 모든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 모든 압박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법이 아니라 정의를 대변하기 때문에 때로는 법을 무시하거나 어겨야만 하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를 입거나 기만당하거나 속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탐정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물론 이런 탐정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죠. ..
탐정소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탐정에 대한 소설은 아닐 겁니다. 탐정은 오로지 촉매제로 이야기에 첨가될 뿐입니다. 58-59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내 경험을 바탕으로 경고하자면 스스로 터득할 수 없는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 분석하고 모방해 봐요. 다른 교육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해요. 때로는 필수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걸 위해 돈을 내야 한다면 대체로 수상쩍은 겁니다. ..
글을 쓰기 전에 아주 세세하게 플롯을 구상하는 작가들이 있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작가가 아닙니다. 70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소설. .. 구만이천 단어 정도예요. ..
어쨌거나 이번 이야기는 쓰고 싶었던 대로 썼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쓸 수 있으니까요. 미스터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상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신경을 썼지요. 그리고 정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결국에는 어떻게 감상적으로, 내지는 더 없는 바보로 보이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72-73
우리 중 최고의 작가들도 새 책을 쓸 때 매번 바닥부터 시작해요. 돈벌이로 글을 쓰는 작가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줄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기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죠. 내가 만난 어떤 추리소설가도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좀 더 잘 쓸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나는 어쩌다 운이 좋은 사람들 쪽에 서게 되었는데, 정말이라니까요, 이 일에는 운이 필요하답니다. 76
과거에 이룬 성과가 무엇이든, 작가는 지금 현재 하려고 하는 일 앞에서 다시 아이가 됩니다. 아무리 상투적인 기교를 많이 익혔다 한들, 작가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은 열정과 겸손함뿐입니다. 78
페리 메이슨 시리즈로 큰 인기를 누렸던 얼 스탠리 가드너(Earl Stanley Gardner, 1889~1970)는 당시 작품량이나 판매량에서 해밋이나 챈들러를 압도하는 작가엿다. 챈들러는 가드너의 소설을 읽으며 글 쓰는 법을 연구했다고 여러 번 언급했으며, 가드너에게 직접 “나는 당신 이야기의 시놉시스를 아주 세밀하게 정리해서 그걸 다시 글로 쓰고, 그런 다음 내가 쓴 것과 당신 작품을 비교해 보고 고치고 다시 좀 더 쓰고 그렇게 계속 반복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1939. 5. 5.)
제4장 필립 말로
필립 말로에게 사회적 양심이라고는 말(馬)이 가진 것만큼이나 없어요. 다만 개인적 양심이 있을 뿐이죠. ..
필립 말로는 대통령이 누군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요. .. 필립 말로와 나는 상류층 사람들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168-169
그에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많은 기회가 마땅히 있다고 가정할 때, 그는 왜 턱없이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이 이 전체 이야기입니다. .. 정직한 사람이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싸움이죠. 이길 수는 없어요. 그는 가난하고 고통스러워지고, 농담과 사소한 불법으로 무마해 가며 살거나, 혹은 할리우드 제작자처럼 타락하고 사교적이며 무례해질 수 있겠지요.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전문직 두세 종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한 남자가 어느 정도 타락하지 않고,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죠. 170-171
말로는 커피를 잘 끓이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커피를 잘 끓입니다. .. 그는 자기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지만 우유는 넣지 않아요. 때로는 설탕 없이 블랙으로 마시기도 하죠. 아침 식사는 스스로 만들어 먹지만 다른 끼니는 직접 하지 않습니다. 늦잠을 자는 편이지만, 필요할 때면 일찍 일어나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 그렇잖아요? 175
타락한 사회에 반항하는 것이 미숙한 것이라면, 필립 말로는 극단적으로 미성숙하지요. 더러운 면을 더럽다고 보는 것이 사회적 부적응이라면, 필립 말로는 사회 부적응자입니다. 물론 말로는 실패자이고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어요. 그가 실패자인 이유는 가진 돈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장애가 없는데도 괜찮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실패자이기 마련이고 대개는 도덕적인 실패자이죠. 하지만 아주 훌륭한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자옷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자면 우리는 모두 실패자일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런 식이 되지는 않았겠죠. 182-183
제5장 일상
(여기서 조금 냉정해지자면) 결혼이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만 하는 것임을 알기를. 결혼 생황에는 언제나 훈련이 필요함을 알기를. 신혼 생활이 아무리 완벽해도, 언제든 그런 때가 올 것이니,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바랄 날이 올 것임을 알기를, 아내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시간만 준다면 그런 감정도 지나가는 법. 237
사랑해야만 하는, 혹은 증오해야만 하는, 혹은 그 둘 다 번갈아 해야 하는 장소에 대해 쓴다는 것은 대개는 마치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죠. 240-241
여자를 사랑하는 법
나는 항상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 주고, 타에 타도록 도왔지요. 한 버ㄴ도 그녀에게 무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내가 가져다주었죠. 나는 한 번도 그녀보다 먼저 문을 나서거나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어요. 노크 없이 그녀의 침실에 들어간 적도 없고. 이런 일들은 다 사소한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꽃을 계속 보내거나, 그녀의 생일엔 항상 일곱 가지 다른 선물들을 준비하고, 기념일에는 항상 샴페인을 마시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한편으론 작은 일이지만, 여자란 아주 부드럽고 사려 깊게 대해야만 하지요. 왜냐하면 여자니까요. 245
'밑줄여행 > 인문,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백산맥 1 - 조정래 해냄 2020개정판(제5판) (1) | 2022.11.21 |
---|---|
전쟁일기(우크라이나의눈물) - 올가 그레벤니크 이야기장수 2022 03890 (0) | 2022.11.07 |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 제임스 M. 케인 민음사 2009 04800 (0) | 2022.10.24 |
예언자 - 칼릴 지브란 더클래식 2012 14740 (0) | 2022.10.17 |
요리코를 위해 - 노리즈키 린타로 모모 2020 05830 e-book (0) | 2022.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