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를 기리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찍이 “챈들러는 나의 영웅”이라 말했으며, 최근까지도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와 챈들러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저서에서 챈들러를 읽으며 문체를 공부했다고 언급했다. 그 외 폴 오스터, 마이클 코널리, 하라 료 등 수많은 작가들과 마틴 스콜세지, 코언 형제 등 유명 감독들이 챈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정유정 작가는 문체나 문장에서 챈들러를 스승으로 삼았다고 했고, 정이현 작가는 “가장 내 타입인 탐정은 필립 말로”라고 했으며, 류승완 감독은 평소 챈들러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10

이 책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자유롭게 쓴 편지를 발췌, 편집한 서간집이다.  10

이야기라는 방패를 집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챈들러는 신랄하지만 정의롭고, 까다롭지만 합리적이며, 지적이지만 낭만적인 사람이고, 그런 챈들러는,  자신이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보다 더 매력적이라 단언하겠다.  11

챈들러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문구를 인용하며,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로 한 남자는 걸어가야 한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으며, 두려움도 없는 채로, (……) 마일 그 같은 사람이 많다면, 이 세계는 지나치게 따분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기에 아주 안전한 공간이 되리라.” - <심플 아트 오브 머더>중에서

챈들러의 이상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난다. 아무리 사회가 타락한다 한들, 누군가는 그 안에서 개인적인 양심을 수호하며 살아야만 한다. 그런 인물이 있는 한 어쩌면 세상에는 일말의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 이상적인 인물은 얼핏 챈들러 자신과도 닮았다.  17



제1장 작품론

등장인물의 감정을 배체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불리며, 문학적으로는 헤밍웨이가 구축했고, 대실 해밋을 통해 추리소설에 접목되면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낳게 된다.  23

펄프 소설 - 192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펄프 잡지(Pulp Magazine)에 실린 소설들을 말한다. 저렴한 펄프지에 인쇄한 이 잡지들은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들의 모태가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잡지는 챈들러의 데뷔작을 게재하기도 한 <블랙 마스크>로, 편집장 조셉 쇼(혹은 조 쇼)는 특히 대실 해밋을 아꼈으며, 이후 챈들러를 비롯한 펄프 작가들에게 해밋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모든 수사를 재베하고 ‘행동’만을 우선하는 글쓰기를 요구했다.  40

저명한 시인이자 평론가인 위스턴 오든(Wystan Auden, 1907~1973)이 <하퍼스 매거진> 1948년 5월호에 발표한 에세이.. 이 글에서 오든은 탐정소설에 대한 챈들러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았지만, 챈들러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가 볼 때 챈들러는 탐정소설이 아니라 범죄 환경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쓰는 데 관심이 있다. 강렬하지만 극도로 우울한 그의 작품들은 도피 문학이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읽혀야만 한다”고 평했다.  43

하드보일드 소설은 내가 고안한 게 아닙니다. 해밋이 공(公)의 대부분, 혹은 전부를 가져가야 한다는 내 생각을 숨긴 적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시작할 때는 모방을 하죠. 스티븐슨이 말하길, “노력하는 유인원”(<지킬 작사와 하이드 씨>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자신의 에세이에서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유인원 행위(Ssdulous ape)를 통해 글을 배웠다”고 쓴 이후 이 표현 자체가 ‘모방하다’는 의미로 굳어졌다.)이라고 했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작가가 개인적인 기교, 자신의 글쓰는 수완, 자기만의 표현 수법, 소재에 대한 접근 방식을 향상시키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가다 보면 표절이라는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45

추리소설에는 아주 강한 환상적 요소가 있죠. 어떤 종류의 글이든 그 안에는 적절한 공식 내에서 움직이는 요소가 있어요. 추리소설가의 재료는 멜로드라마입니다. 사람이 실제 삶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폭력과 두려움을 과장하는 겁니다. (나는 일반적이라고 했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을 일반화하는 작가는 없습니다.)  52-53

매일 무얼하며 지내냐고요? 쓸 수 있을 때는 쓰고, 쓸 수 없을 때는 안 쓰죠. 대개 아침이나 이른 오후 무렵에 글을 씁니다. 밤이면 무척 현란한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지속은 안 돼요. 오래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죠.  55

나로 말하자면, 나는 영감을 기다리는 편입니다. 굳이 영감이라고 명명할 필요는 없지만요. 생명력을 지닌 글은 모두 가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대단히 피곤하고 지칠 수도 있는 고된 일이지요. 의도적인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일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어요.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아요.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것도 안 돼요.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하죠. 이게 효과가 있답니다.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이에요.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55-57

탐정은 완전한 존재로 어떤 사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탐정은 탐정으로서 이야기 밖에, 이야기 너머에 있고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자고 자기 옷을 보관할 장소를 소유하는 것 외에, 탐정은 연애를 하지도 않고, 결혼을 하지도 않고, 어떤 사생활을 누리지도 못하는 겁니다. 탐정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힘은 보수 외에는 얻는 게 없는데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무고한 자들을 보호하고, 약자를 수호하며 악당을 쳐부술 것이라는데서 나옵니다. .. 프로는 도시 문명이 가하는 모든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 모든 압박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법이 아니라 정의를 대변하기 때문에 때로는 법을 무시하거나 어겨야만 하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를 입거나 기만당하거나 속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필요하다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탐정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물론 이런 탐정이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죠. ..
탐정소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탐정에 대한 소설은 아닐 겁니다. 탐정은 오로지 촉매제로 이야기에 첨가될 뿐입니다.  58-59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내 경험을 바탕으로 경고하자면 스스로 터득할 수 없는 작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 분석하고 모방해 봐요. 다른 교육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해요. 때로는 필수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걸 위해 돈을 내야 한다면 대체로 수상쩍은 겁니다. ..
글을 쓰기 전에 아주 세세하게 플롯을 구상하는 작가들이 있지요. 하지만 나는 그런 작가가 아닙니다.  70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소설. .. 구만이천 단어 정도예요. ..
어쨌거나 이번 이야기는 쓰고 싶었던 대로 썼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쓸 수 있으니까요. 미스터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상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신경을 썼지요. 그리고 정직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결국에는 어떻게 감상적으로, 내지는 더 없는 바보로 보이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도. 72-73

우리 중 최고의 작가들도 새 책을 쓸 때 매번 바닥부터 시작해요. 돈벌이로 글을 쓰는 작가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줄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기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죠. 내가 만난 어떤 추리소설가도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좀 더 잘 쓸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나는 어쩌다 운이 좋은 사람들 쪽에 서게 되었는데, 정말이라니까요, 이 일에는 운이 필요하답니다.  76

과거에 이룬 성과가 무엇이든, 작가는 지금 현재 하려고 하는 일 앞에서 다시 아이가 됩니다. 아무리 상투적인 기교를 많이 익혔다 한들, 작가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은 열정과 겸손함뿐입니다.  78

페리 메이슨 시리즈로 큰 인기를 누렸던 얼 스탠리 가드너(Earl Stanley Gardner, 1889~1970)는 당시 작품량이나 판매량에서 해밋이나 챈들러를 압도하는 작가엿다. 챈들러는 가드너의 소설을 읽으며 글 쓰는 법을 연구했다고 여러 번 언급했으며, 가드너에게 직접 “나는 당신 이야기의 시놉시스를 아주 세밀하게 정리해서 그걸 다시 글로 쓰고, 그런 다음 내가 쓴 것과 당신 작품을 비교해 보고 고치고 다시 좀 더 쓰고 그렇게 계속 반복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1939. 5. 5.)



제4장 필립 말로

필립 말로에게 사회적 양심이라고는 말(馬)이 가진 것만큼이나 없어요. 다만 개인적 양심이 있을 뿐이죠. ..
필립 말로는 대통령이 누군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요. .. 필립 말로와 나는 상류층 사람들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돈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선적이기 때문입니다.  168-169

그에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많은 기회가 마땅히 있다고 가정할 때, 그는 왜 턱없이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이 이 전체 이야기입니다. .. 정직한 사람이 타락한 사회에서 괜찮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 불가능한 싸움이죠. 이길 수는 없어요. 그는 가난하고 고통스러워지고, 농담과 사소한 불법으로 무마해 가며 살거나, 혹은 할리우드 제작자처럼 타락하고 사교적이며 무례해질 수 있겠지요.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전문직 두세 종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한 남자가 어느 정도 타락하지 않고,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죠.  170-171

말로는 커피를 잘 끓이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커피를 잘 끓입니다. .. 그는 자기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지만 우유는 넣지 않아요. 때로는 설탕 없이 블랙으로 마시기도 하죠. 아침 식사는 스스로 만들어 먹지만 다른 끼니는 직접 하지 않습니다. 늦잠을 자는 편이지만, 필요할 때면 일찍 일어나기도 하지요. 우리 모두 그렇잖아요?  175

타락한 사회에 반항하는 것이 미숙한 것이라면, 필립 말로는 극단적으로 미성숙하지요. 더러운 면을 더럽다고 보는 것이 사회적 부적응이라면, 필립 말로는 사회 부적응자입니다. 물론 말로는 실패자이고 본인도 그 점을 알고 있어요. 그가 실패자인 이유는 가진 돈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장애가 없는데도 괜찮은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실패자이기 마련이고 대개는 도덕적인 실패자이죠. 하지만 아주 훌륭한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자옷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자면 우리는 모두 실패자일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이런 식이 되지는 않았겠죠.  182-183



제5장 일상

(여기서 조금 냉정해지자면) 결혼이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만 하는 것임을 알기를. 결혼 생황에는 언제나 훈련이 필요함을 알기를. 신혼 생활이 아무리 완벽해도, 언제든 그런 때가 올 것이니,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바랄 날이 올 것임을 알기를, 아내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시간만 준다면 그런 감정도 지나가는 법.  237

사랑해야만 하는, 혹은 증오해야만 하는, 혹은 그 둘 다 번갈아 해야 하는 장소에 대해 쓴다는 것은 대개는 마치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죠.  240-241

여자를 사랑하는 법
나는 항상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 주고, 타에 타도록 도왔지요. 한 버ㄴ도 그녀에게 무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내가 가져다주었죠. 나는 한 번도 그녀보다 먼저 문을 나서거나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어요. 노크 없이 그녀의 침실에 들어간 적도 없고. 이런 일들은 다 사소한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꽃을 계속 보내거나, 그녀의 생일엔 항상 일곱 가지 다른 선물들을 준비하고, 기념일에는 항상 샴페인을 마시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한편으론 작은 일이지만, 여자란 아주 부드럽고 사려 깊게 대해야만 하지요. 왜냐하면 여자니까요.  245

Posted by WN1
,


본 이야기의 배경은 1857년 9월, 가을이다. 길고 더운 여름에 지치고 여름이 가져온 길고 뜨거운 일에도 지친 게으른 두 작가가 주인에게서 도망쳤다. 그들은 ('문학'이라는 이름의) 아주 고매하신 부인에게 매인 몸이었다. 부인은 꽤 괜찮은 신용과 평판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서 그만큼 존경받지 못했다는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지역에는 그 훌륭한 부인에게 적대적인 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부인의 가문은 런던의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훌륭하게 도와 왔다.  9



그녀는 이 철없는 두 젊은이에게도 은혜를 많이 베풀었지만, 그들은 여주인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한 채 어디론가 완벽히 유유자적한 여행을 떠나려는 약팍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어딘가로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보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빈둥거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들은 호가스의 그림에서 '토머스 아이들(Tomas Idle)'과 '프랜스스 굿차일드(Francis Goodchild)'라는 이름을 가져와 자신들의 이름으로 삼았다.  10-11



프랜시스 굿차일드는 노력형 게으름뱅이였다. 자신이 빈둥댄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통과 노동을 감수했다. 요컨대 프랜시스에게 게으름이란 쓸모없는 근면이었다. 반면 토머스 아이들은 순수 아일랜드이이나 나폴리인 타입의 게으름뱅이였다. 수동적인 게으름뱅이, 타고난 게으름뱅이, 한결같은 게으름뱅이로.. 그는 게으름계의 완전하고 완벽한 감람석(예전 사람들은 감람석을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귀한 보석으로 여겼다.)이었다.  11



모든 급행열차가 그렇고 또 그래야 하듯이 기차는 여느 급행 열차와 다르지 않았다. 기차는 엄청난 양의 세탁물을 처리할 때 나는 냄새와 거대한 놋쇠 차 탕관(湯灌 끓일탕 물댈관)에서 나오는 것 같은 선명한 증기를 뿜어내면서 추수철의 시골을 헤치며 달렸다. 기차는 자연과 인공이 결합된 위대한 힘으로, 밭이나 도로에서 올려다보느 ㄴ사람들에게는 아찔한 높이에서 가벼운 미티어처 장난감처럼 부드럽고 비현실적으로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엔진이 아주 강렬하게 히스테릭한 고성을 내지를 때는, 담당자들이 그녀의 발을 붙든 뒤 팔을 찰싹 때려서 정신을 되찾도록 해 주는 편이 나아 보였다. 이제 기차는 다루기 힘들고 속을 알 수 없는 에너지로 터널을 파고들었고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어둠 속을 거슬러 달려가는 것 같았다. 급행열차는 정차하지 않는 기차역을 하나둘씩 삼켰다. 정차하는 역에서는, 일제히 쏟아지는 포탄처럼 달려 들어가 꽅다발을 든 시골 사람 넷과 큰 여행 가방을 든 사업가 셋을 후딱 태운 뒤 다시 발사되듯 역을 떠났다. 탕!탕!탕! 간혹 들르게 되는 불편한 식당들은 야수르 경멸하는 미녀로 인해 더 불편해졌으며(미녀는 이야기 속의 다른 야수에게 한 것처럼 사람들을 절대 측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화불량을 야기하는, 경멸하는 듯한 신랄함으로 예민한 위를 채우는 곳이었다. 또다시 기차는, 아무 일도 없이 종만 울리고 커다란 말뚝 위에 높이 세운 멋진 까치발 신호기의 가로대가 공기를 가르며 신호를 보내는 역들을 지나갔다. 들판의 말과 양, 소 들은 천둥소리는 내며 달리는 유성이 아주 익숙한지 신경 쓰지 않았다. 가축들은 들판에서 함께 껑충껑충 뛰어다녔고 돼지 한 무리가 그 뒤를 쫓아 달렸다.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어두워지며 석탄처럼 까매졌다가 흐릿해졌다가 지옥 같아졌다가 나아졌다가 안 좋아지고 다시 좋아졌다가 점점 험해지고 낭만적으로 변했다. 숲, 시내, 그릉 지대, 계곡, 황야, 성당이 있는 도시, 요새, 황무지를 지났다. 비참하게 시커먼 집드로가 검은 수로, 병든 검은 굴뚝들, 빛나는 예쁜 꽃이 있는 손질된 정원, 다 타버린 흉물스러운 제단들이 있는 황무지, 요정의 고리들이 있는 비옥한 목초지, 지난주에 섴스가 열렸던 자리에 커다랗고 둥근 자국이 남은, 침체된 도시 외곽의 임대되지 않은 지저분한 건축 부지도 지나쳤다. 기온도 변하고, 사투리도 변하고, 사람도 변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더 날카로워졌고 매너는 더 퉁명스러워졌고 눈은 더 예리하고, 냉정해졌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해서 은색 레이스가 달린 런던 유니폼을 입은 말쑥한 승무원은 아직 셔츠 깃을 풀어 헤치지도 못했고, 반질반질한 작은 주머니에 든 전보를 반 이상 돌리지도, 신문을 읽지도 못했다.  15-16



시장이 서는 날 아침, 칼라일은 놀라울 정도로 활기를 띠었고, (두 게으른 작가가)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할 정도로 분후해 졌다. 강을 따라 소 시장, 양 시장, 돼지 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빼빼 마르고 머리가 덥수룩한 롭 로이들이 스코틀랜드 식 격자무의 망토 아래 로우랜드의 전통 의상을 입고 가축들 사이를 들락거리며 위스키 냄새를 풍겼다. 시내 중심가 아래쪽에서는 옥수수 시장이 열렸고, 입구가 열린 옥수수 부대 위로 흥정하는 소리가 왁자지껄 오갔다. 거리에는 일반 시장도 열렸다. 헤더로 만든 빗자루에는 아직 보라색 꽃이 그대로 피어 있었고, 헤더 바구니는 소박하고 신선해 보였다. 여자들이 나막신을 신어 보거나 모자를 써 보기도 하는 노점들 옆에는 '성경 가판대'도 있었다. 그리고 '맨틀 박사의 진료소: 모든 인간 질병 치교, 상담은 무료'와 맨틀 박사의 '의학, 화학, 식물학 실험실'이 있었는데, 받침대 한 쌍과 판자 하나, 차양 하나로 세운 곳에 이 두 치료 기관이 모두 자리했다. 런던에서 온 저명한 골상학자인 맨틀 박사는 사람들의 머리를 검사해서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알 수 있도록"해 주겠다며, 한 무리 남녀 고개의 환심을 (각각 6펜스에) 사려고 애를 썼다. 사람들을 주의 깊게 밀어 헤치며 이 모든 흥정과 인사가 오가는 사이를 지나가는 모병계 중사는 평화로운 실타래 속에 있는 전쟁이라는 실 한 가닥 같았다. 또한 벽에는 옥스퍼드 청색대가 훌륭하고 적극적인 소수 청년들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쇄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위엄 있는 근위대가 될 수 있는 기준은 키 180센티미터 이상이지만 "180센티미터에 조금 못 미치는, 자라고 있는 소년들"도 받아줄 수 있으니 절대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토머스와 프랜시스는 땅에 묻힌 덴마트 왕보다 더 즐겁게 아핌 공기를 마시며 오전 여덟시에 칼라일을 떠나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헤스켓 뉴마켓을 향했다.  18-20



비바람을 막아 주고 따뜻하고 쾌적한, 석회를 잘 바른 멋진 집들이 길을 따라 점점이 드문드문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 자신들과 몸집이 비슷한 또 다른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을 안고 나와 둘을 구경했다. 밖에서는 수확물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비에 한껏 노출되었다. 추수가 끝나지 않은 곳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잘 가꾼 시골집 정원에는 노력의 많은 결실들이 단단한 땅을 뚫고 자라나 있었다. 야생에 둘러싸인 외진 곳이었지만,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태어나고 결혼하고 땅에 묻히며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사랑하고 사랑받았다. 신께 감사할 일이지! (프랜시스가 말했다.) 이윽고 마을이 나왔다. 거친 돌을 쌓아올려 지은, 허술한 창문이 달린 검은 집들이 있었다. 어떤 집들은 스위스의 집처럼 외부에 계단이 있었다. 돌로 만든 배수로가 도로를 거쳐 언덕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며 꺾였다. 모든 아이가 곧장 밖으로 뛰어나왔다. 여자들은 빨래하던 손을 멈추고 출입문이나 아주 작은 창으로 내다보았다. 이러한 모습들이 마차가 제화공 마을에 도착했을 때 토머스와 프랜시스가 관찰한 것들이다.  21



모든 산에는 짜증이 나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아래에서 산을 볼 때는(산은 항상 아래에서 봐야 한다) 정상이 하나뿐이지만, 여행객이 산을 오르려는 경솔한 짓을 할 때면 완벽하게 솟은 가짜 정상들이 나타난다.  30



토머스는 신파스럽게 여관 이층으로 옮겨져 의자 세 개 위에 눕혀졌다(소파가 있었다면 소파에 뉘었을 것이다). 프랜시스는 창으로 다가가서 위그턴을 관찰하며 자신이 본 것을 부상당한 친구에게 알려 주었다...  45


  

"..오, 그래!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등을 돌리고 있는 남자 둘이 보이는구먼." 프랜시스가 말했다.

"프랜시스, 내 형제여! 그 망루를 통해 본,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등을 돌리고 있는 두 남자의 표정에서 뭔가 알아낸것이 있는가?" 토머스가 외쳤다.

"수수께끼 같은 사내들이군. 뒷모습으로는 헤아려 보기 힘들어. 내게 쭉 뒷모습만 보이고 있어. 한 명이 어느 쪽으로든 몸을 살짝 틀면 다른 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살짝 틀 뿐이야. 시장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그들은 뻣뻣이 방향을 아주 살짝 바꾸곤 해. 겉모습을 보면 얼마간 광부같기도 하고, 농부나 마구간지기 같은 면도 조금씩 있어. 두 남자는 아무것도 보지 않아-아주 열심히. 아주 오랫동안 서 있어서 등은 구부정하고 다리는 휘었네. 주머니는 늘어지고 귀퉁이가 접혔어. 언제나 손을 넣고 있어서겟지. 초조해하거나 불만스러워하는 몸짓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네. 서로 너무 가까워서 각자의 팔꿈치로 다른 이의 팔꿈치를 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가끔 침을 뱉긴 하지만 말은 안 해.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데도 아직 보이네. 비를 흠뻑 맞으며 내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서서, 아주 열심히 아무것도 보지 않는 거들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사람들일세." 프랜시스가 말했다.

"프랜시스, 내 형제여! 망루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여기 와서 뜨거운 가스 난로에 머리를 말리기 전에, 할 수 있다면 그 놀라운 두 사람의 표정에 대해 뭔가 알려 주겠나?" 토머스가 외쳤다. 

"컴컴한 어둠이 빠르게 몰려오고 있네. 저녁의 날개, 칠흑같이 어두운 날개가 위그턴을 둘러싸고 있어. 두 남자는 아직도 내게 등을 보인 채 아주 열심히 아무것도 보지 않아. 아! 지금 저들이 돌아보네. 그리고..."프랜시스가 말했다.

"프랜시스, 내 형제여! 위그턴의 두 남자에 대해 본 것을 얼른 말해 주게!" 토머스가 외쳤다.

"그들에겐 아무 표정도 없어. 그리고 이제 마을은 잠드네. 시장에 있는 불 꺼진 커다란 가스등이 마을을 밝히지도 않을 테고, 아무도 마을을 깨우지 못할 걸세." 프랜시스가 말했다.  48-49



프랜시스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과 사물을 끊임없이 관찰한 내용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줄곧 자신이 현존하는 생명체 중 가장 빈둥거리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동안, 부상당한 토머스가 집 안에 갇혀서 하루 종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하다.

토머스는 시간을 보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소파에 엎드린 채 가만히 시간이 흘러가도록 두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책을 읽으며 정신수양을 했을 때에 토머스는 잠을 자고 휴식을 취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걱정했을 때 토머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꿈을 늘어지게 꾸었다.  107



토머스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게으름이라는 잔잔한 시내를 따라 천천히 흘러왔고, 때로 근면이라는 잔물결이 잔잔한 수면에 일시적으로 파란을 일으켰음을 기억했다. 토머스는 자기 혁신에 대해 생각하면서-독자들이 상상하듯이 진취적이고 노력하는 새로운 생활을 위해 계획을 세우 ㄴ것이 아니라-오히려 앞으로 일을 할 때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다시는 적극적이거나 부지런해지지 말자고 결심했다.  108



프랜시스는 상기되고 발그레한 얼굴로 정찬 시간에 돌아와 토머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해 주었다. 토머스는 누워서 책을 읽으며 아주 태연자약하게 프랜시스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프랜시스가 정말로 구릉에 올라갔는지, 구태여 그 풍경들을 애써 보았는지, 그 긴 거리를 걸었는지 물었다.

"알고 싶어서 그러네. 만약에 억지로 그런 일을 해야 했다면 자네는 그걸 뭐라고 했을 것 같나?" 토머스가 덧붙였다.

"그럼 얘기가 다르지. 그건 노동이 됐을 걸세. 지금 이건 놀이지만." 프랜시스가 말했다.

"놀이라니!"

토머스가 프랜시스의 대답을 완강히 부인하며 되받아쳤다.

"놀이라니! 계획적으로 자기 몸을 너덜너덜하게 하고 쉴 새 없는 단련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사람이 여기 있네! 챔피언 벨트를 놓고 벌이는 경기에 출전하려고 항상 훈련받는 사람같이 말이야. 그러면서 그걸 놀이라고 하다니!" 토머스가 공중으로 들어올린 자신의 부츠 한 짝을 경멸하듯 응시하며 소리쳤다. "자네는 놀 수가 없어. 노는 게 뭔지도 모르잖아. 자네는 뭐든지 일을 하려들지."

밝은 모습의 프랜시스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그래. 진심일세. 자네는 내게 최악의 친구라네. 자네는 다른 사람들처럼 굴지 않아. 다른 친구가 행동이나 감정에 있어서 대야에 빠지는 정도라면 자네는 갱에 빠지는 것 같아. 다른 친구가 화려한 나비라면 자네는 불을 뿜는 용일세. 다른 사람이 내기에 6펜스를 걸면 자네는 자기 목숨을 걸지. 열기구를 탄다면 천국까지 가려고 할 거고, 땅 속 깊이 뛰어든다면 지옥까지가야 만족할 걸세. 자넨 참 대단한 친구야, 프랜시스!" 토머스가 말했다.

쾌활한 프랜시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건 다 좋아. 하지만 자네가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니 놀랍구먼. 나는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하는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토머스가 말했다.

"토머스, 토머스." 프랜시스가 대답했다. "내가 무슨 일이든 확실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이라면, 자네는 나를 모든 면에서 이해하고 가능한 한 이용해 먹는 것이 분명해."

이렇게 철학적인 대답을 던진 다음, 명랑한 프랜시스는 마지막으로 토머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그들은 정찬 식탁에 앉았다.

"그건 그렇고, 밖에 나갔을 때 정신 병원도 둘러봤어." 프랜시스가 말했다.

"정신 병원을 둘러봤다니! 걷는 것으로 캡틴 바클레이(로버트 바클레이 앨러디스의 별칭. 스코틀랜드의 지주였던 그는 수많은 걷기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기록은 약 1600킬로미터를 1000시간 동안 걸어서 1000기니의 돈을 딴 것이다. 도보 스포츠의 아버지이자 경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처럼 대단한 멍청이가 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미치광이 짓 협회의 회장이 되다니-헛되이!" 토머스가 눈을 들며 소리쳤다. 

"엄청난 곳이었네. 병실도 훌륭하고 시설도 잘되어 있고 간병인들도 아주 친절하더군. 온통 대단한 곳이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나?" 토머스는 관심이 없었지만 햄릿의 충고를 따라 관심의 미덕을 가장하고 물었다.

"일반적인 것들이지. 말라죽은 나무들이 모인 커다란 숲 같은 남자와 여자들, 절망적인 얼굴들이 늘어선 끝없는 거리, 어떤 목적이라도 가지고 실제로 뭉칠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 서로 인간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힘을 모두 잃었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인간들의 사회 말일세." 프랜시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와 와인을 한잔 하지. 우리는 교류를 하자고." 토머스가 말했다.

"한 복도에서 말이지, 토머스. 그 복도는 윈저 성에 이르는 긴 진입로만큼 길어 보였는데." 프랜시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마 그보다는 짧았을 게야." 토머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환자들이 다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아무도 없었을 그 복도에 한 남자가 있었네. 불쌍하고 작고 거무스름한 턱을 가진 야윈 남자였어. 이마엔 당혹스러움이 묻어 있었고,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지. 바닥 매트 위에 바싹 엎드려서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매트의 섬유 가닥을 골라내고 있더군. 복도 끝에 난 커다란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고, 양쪽으로 늘어선 잠자는 작은 방들의 열린 무노가 시야에 보이지 않는 창문들이 만들어내는 빛과 어둠의 조각들이 그 광경 위에 교차되었지. 그 한가운데쯤 아치 아래에서 그 불쌍하고 작고 거무스름한 턱을 가진 야윈 남자가 기분 좋은 날씨나 고독, 다가오는 발소리 등은 개의치 않은 채 매트를 열심히 보고 있었네.

우리가 다가갔을 때 나를 안내해 준 사람이 말했어.

'거기서 뭐하나?'

남자가 우리를 올려다보며 매트를 가리켰지.

'나 같으면 그러지 않겠네.'

나를 안내해 준 사람이 말했어.

'내가 자네라면 가서 책을 읽거나, 피곤하다면 누워 있겠네. 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멍하게 대답했어.

'네,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전 ... 전 가서 책을 읽을게요.'

그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작은 방들 중 하나로 사라졌어. 우리가 몇 걸음 채 가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는 이미 다시 나와 매트를 관찰하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섬유 가닥을 짚어가고 있더군. 나는 멈춰 서서 그를 보았어. 위아래, 안팎으로 꼬인 저 섬유 가닥이 넓은 세상에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를 안내하는 작은 틈새의 빛만 남은 채 모든 지적 능력은 어두워진 거라고 말이야. 

'이 가닥은 이쪽 방향으로 꼬여 있네. 여기로 가서 밑으로 지나가고 저기로 나오는군. 여기서부터, 지금 내가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오른쪽까지 이어져 있어. 섬유 가닥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 얽혀서 이 매트가 되었고, 여기 있는 거구나.'

그러자 나는, 남자가 매트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그가 거기오게 된 과정을 조금이나마 알려 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렇게 이상하게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건지 궁금했네. 신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나는 우리가 어떻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매트 조각을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매트의 패턴에서 어떤 혼란과 미스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생각했지. 그러고 나니 그 거무스름한 턱을 가진 야윈 남자에게 슬픈 동질감이 느껴졌어. 나는 그곳을 떠났네."  129-134



또다시 밤이 찾아왔고 둘은 두세 시간 동안 글을 썼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이 나태한 글이 기반을 둔 몇 가지 나태한 메모를 쓰고 있었다.  136



지금 이 유유자적한 여행이 느긋한 바람에 실려 어디로 향할까? 언젠가 이 여행의 마지막이 사라지고 잊히는 곳은 어디일까? 쓸데없는 질문과 게으른 생각을 하며 토머스와 프랜시스는 적절한 인사를 건네고, 이것으로 <게으른 작가들의 유유자적 여행기>를 마친다.  202





옮긴이의 말


프랜시스 굿차일드가 찰스 디킨스, 토머스 아이들이 윌키 콜린스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206


개인적으로는 사실 멀게만 느껴졌던 고전 작가들인데 자신들의 게으름을 이렇게까지나 포장하는 솜씨를 보면서 이들의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추리소설이 본격 장르로 발달하기 전이고 이후에 나온 콜린스의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추리 소설의 시초 격으로 여겨지니 일종의 초창기 미스터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현실에서 이들이 돈캐스터에 간 이유는 글에서처럼 우발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디킨스가 당시 좋아하던 여배우 엘렌 터넌이 그때 거기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7




편집부 후기


찰스 디킨스와 윌키 콜린스는 1851년에 서로 처음 만났다.이둘은 둘 다 아는 친구였던 오거스터스를 통해 사귀게 되었고, 둘의 나이 차이도 불구하고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디킨스는 콜린스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고 콜린스는 디킨스의 잡지 <늘 쓰는 말들>과 <일 년 내내>에 많은 글을 실었다.

이 문제작은 절친한 두 작가가 북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유머스럽게 표현해, <늘 쓰는 말들>에 발표한 작품이다.  211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