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날마다, 꾸준히 - 이것이 글쓰기의 세 가지 원칙이다. 19
능력 대신 요령을 익히면, 그만큼 손해를 본다. 손해를 보는 듯싶지만 남의 일까지 대신 다 하는 사람은 능력 또한 남의 몫까지 얻는다. 그러니까 손해를 봐야 손해를 안 본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미련하게 힘든 글쓰기가 요령 좋은 글쓰기를 이긴다. 21
번역을 가르칠 때 나는 학생들에게 처음 몇 달 동안 그들이 써놓은 글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라는 단어를 모조리 없애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 세 단어를 문장에서 너무 자주 사용한다. 믿어지지 않으면 지금까지 써놓은 일기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에 모두 빨간 줄을 쳐보기 바란다. 자신이 쓴 글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쓴 비소설류의 모든 글이 비슷한 지경이다. 24-25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혀 있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 ===>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한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혔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댄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촬영한다.'
모든 표현의 공통분모인 '있다'를 없애버리면 '본다'와 '간다'와 '한다'와' 온다'가 되어, 모든 단어가 갑자기 다양한 모습을 저마다 뽐낸다. '있다'는 여드름처럼 모조리 짜버려도 손해 볼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장을 다듬을 만한 자신감과 용기가 없어서, 긴 문장이 유식하다는 착각에 빠져, '간다'를 '가고있다'라고만 해서도 안심하지 못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까지 한다. 26
'것' 또한 '있다'나 마찬가지로 자신감의 부족 때문에 남용되는 단어이다.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표현을 놓고 생각해보자.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있다'는 맹장을 잘라내거나 썩은 이를 뽑듯이 그냥 없애버리면 된다. 그러면 "집으로 왔던 것이다."가 된다. 그리고 '것'도 가차없이 자르고는 "집으로 왔다."라고만 하더라도 작품 전체의 흐름에는 별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진행의 과정이 훼손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있다'를 없애면서 '진행'상태를 살려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예 문장을 새로 써라.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라고 말이다. 29-30
"몸에 좋은 것이 시장에서 잘 팔린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는 '것'을 다른 단어로 바꿔 넣는 차원에서 머무르지 말고, "몸에 좋다 하면 무엇이나 다 잘 팔린다."라고 문장 전체를 아예 새로 쓰라는 뜻이다. 30
'있다'와 '것'과 더불어 단어 '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쓰기에서 '3적(三敵)'으로 꼽힌다.
"누전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라거나 "광우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라거나, "유대가 깨져 파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영어에 중독된 귀에 자칫 'can(be)'으로 들리는 이런 표현은 "누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라거나 "광우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또는 "파탕을 가져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라는 식으로 표현을 다양화하면, 우리말 같지 않은 어색함이 사라지고 훨씬 자연스럽게 들린다. 31
나는 글쓰기를 하면,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읽어보고는, 중복된 어미와 토씨를 일일이 걸러내어 고쳐놓는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에게서"라는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직장에서'와 '동료에게서'의 중복된 어미가 눈에 거슬렸고, 그래서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로부터"라고 고쳐놓았다.
"나는 가는 길에"를 "나는 가던 길에"로, "좋은 사람은"을 "훌륭한 사람은"으로,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많은 사람이 모인다"로, "그렇게 말하고 싶고"는 "그렇게 말하고 싶으며"로, "그러는 너희는 누구냐?"는 "너희들 왜 그러느냐?"로, "그러니까 어떨까"는 "그러니까 어떨지"로, "그래서 가서 보니"는 "그래서 가봤더니"라는 식으로 표현을 바꿔가며 변화를 준다.
그러고는 한 쪽(page)이나 한 장(章)의 글이 끝나면 한눈에 들어오는 지면에서 반복된 같은 단어들을 찾아내어 고치는 기계적인 작업을 다시 거친다. 물론 운을 맞추거나 두운(頭韻)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문장의 율동과 강조를 도모하기 위해 일부러 같은 단어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우발적인 반복은 가능하면 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를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체 문장을 아예 새로 쓰기도 한다. 36-37
특히 여성의 경우, '바라다'와 '바람'을 '바래다'와 '바램'이라고 잘못쓰는 습성과 더불어, '같아요'라는 막연한 표현이 말하기와 쓰기에서 가장 자주 발견되는 흠집 가운데 하나이다. 심지어는 "나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라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기분조차도 잘 모르겟다는 듯한 말투이다. 이렇게 무엇인가 비슷하다 마는 '같아요' 어족(語族)은 참으로 정신이 나가고 없는 것 같아서, 맥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기운이 빠직는 것 같은 것 같기도 하다. 38
45년 전 대학생이던 시절 처음 영어로 창작 공부를 시작한 무렵에 나는 루돌프 플레시의 <잘 읽히는 글쓰기(The Art of Readable Writing)>에서 정말로 놀랍고도 기막힌 교훈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이 써놓은 글에서 '그리고(and)'라는 접속사를 모조리 제거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고는 '그래서(so)'와 '하지만(but)' 역시 없애라고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전혀 글의 흐름이 막히지 않으리라고 했다. 막히기는 커녕 오히려 청소를 끝낸 하수구처럼 모든 문장이 맑은 물소리를 내며 잘 흐르리라는 얘기였다.
'그러부터(henceforth)'나 '그러므로(therefore)' 따위의 단어로 앞 문장과 뒷 문장을 연결 지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두 개의 문장을 이어주는 그런 지저분한 단어들은 없애야 하는데, 정 없애기가 어려우면 '그렇기 때문에(because)' 를 '그래서(foe)' 로 바꾸는 등 글자 수를 하나라도 적은 것으로 바꾸라고 했다. 42
'그래서 나는 학교로 갔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우리들은 같이 어울려 영화 얘기를 했다. 그런 얘기가 너무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영화 얘기를 했고, 그러다 보니 한두 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에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나머지 우리들만 빵집으로 가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 '나는 학교로 갔다.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들은 같이 어울려 영화 얘기를 햇다. 너무나 재미있어 우리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영화 얘기를 했고, 한두 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리를 떴다. 나머지 몇 사람만 빵집으로 가서 얘기를 계속했다.' 43-44
명사와 동사를 누에 잘 띄게 전진 배치한다. 동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움직임은 정력의 증거이다.
무리가 가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 부사는 형용사로 바꾸고, 형용사는 가능하면 동사로 바꿔본다. "그는 태만하게 근무한다"보다 "그는 일솜씨가 게으르다"가 조금쯤은 힘이 있어 보이고, "휘청거리며 걷는다"보다는 "휘청거린다"가 강하다. "빠르게 말한다"보다는 "말이 빠르다"가 의미의 전달 속도가 빠르고, "많은 눈이 내렸다"보다는 "눈이 쏟아졌다" 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는 표현이 훨씬 생동한다. 52-53
2003년 국립국어연구원이 148만 4,463개의 단어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조사(助詞) 가운데 '의'가 가장 높은 빈도수(7만 2,437)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의'를 가운데 걸고 양쪽에 두 글자씩 균형을 잡으면 사람들은 퍽 안도감을 느끼는 모양이어서 '거리의 악사' , '사막의 기적' , '고성의 검호' , '살인의 추억' 그리고 '제목의 선택'같은 안전한 제목을 즐겨 붙인다. 이것이 어느 한 작품의 제목으로서 홀로 나타나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책에서처럼 수많은 소제목이 나타나는 경우라면,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았다가는 자칫 천편일률적인 인상을 주기가 십상이어서, '무엇의 무엇'은 '있을 수 있는 것' 못지 않게 경계의 대상이 된다. 70-71
독후감 쓰기
남의 글을 먼저 읽고 나서 그 내용을 소재로 삼아 나의 글을 쓰는 행위, 이것을 사람들은 '독후감 쓰기'라고 한다. 그것은 눈으로 읽어서 지식과 정보를 입력시킨 다음, 머리를 써서 스스로 지혜를 창조하는 훈련이다. 107
1. 우선 글을 읽은 다음 내용에 알맞는 제목을 스스로 붙인다. 제목 붙이기에 대한 보충 설명은 작품에 뒤이어서 분석과 검토를 거친 다음에 수록했다.
2. 소설에 등장하는 낱단어들 가운데 좋아 보이는 단어와 문장의 목록을 만든다. '있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를 찾아보고, 그 세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어떻게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바란다. 남의 글을 그대로 베끼는 것도 때로는 좋은 훈련이 된다. 좋은 작품에 등장하는 멋지거나 아름다운 단어는 일부러 머릿속에 담어두었다가 나중에 자신이 쓰는 글에 실제로 사용하는 연습도 창조적인 글쓰기에 크게 도움이 된다.
다만, 같은 단어를 너무 자주 반복해서 사용하면 안 된다. 몇 개의 단어만 머리에 담아두고 자꾸 거내 쓰면 단연히 진부한 글이 되니까. 수많은 단어를 계속해서 머리에 담어 널고, 샘물을 퍼내서 마시듯 계속 퍼내야 한다. 샘물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고, 오히려 자꾸 퍼내야 물이 썩지 않고 맑아진다.
3. 작가가 구성해 놓은 단락들이 저마다 완전하고 독립된 단위를 구성하는지 검토해보고, 꼭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나름대로 고쳐본다. 단락은 길이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승전결의 단위로 글뭉치를 묶어내는 훈련을 쌓는다.
4. 하나의 단락 안에서 또는 앞 단락이 다음 단락과 이어지면서 어떤 인과법칙이 작용하는지, 인과의 흐름이 유연한지 어떤지 살펴본다. 두 주인공의 심리가 서로 어떻게 작용하고 반작용을 일으키는지도 비평가의 안목에서 살펴본다.
5. 작품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두 주인공의 성격을 참조하여 스스로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는 과제를 풀어야 하니까, 두 사람의 꼼꼼히 분석하여 대비하기 바란다. 108-109
작가는 언제 어떤 작품을 쓰게 될지 잘 모른다. 일단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고 나면 언제 어디서 어떤 자료를 필요로 할지 모르고, 그래서 아무리 평화 시라고 해도 나는 모든 글쓰기 전쟁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놓는다. 전쟁, 그렇다. 좀 험악하게 비유하자면, 작가의 삶은 다른 모든 경쟁적인 직업인의 삶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쟁이고, 하나하나의 작품은 저마다 한 차례 전투여서, 여러 전투에 대비한 갖가지 전략과 전술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전쟁 계획이 필요하다. 300
여러 개의 서류철에 따로따로 나눠서 관리하는 그 줄거리들은 관련된 상황과 해석 방법, 주제, 인물 설정, 절묘한 표현, 상큼한 단어 따위가 생각날 때마다 쪽지가 하나 둘 늘어가고, 저마다 여러 명의 아들딸처럼 동시에 성장을 계속한다. 참고가 될 만한 영화나 책, 잡지나 신문에 실린 기사와 논문도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다.
처음에는 무계획적으로 진행되던 자료 수집은 작품이 인물소설이냐 아니면 상황소설이냐, 또는 기둥줄거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에 필요한 본격적인 형태로 수집 방법이 바뀐다. 301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준비가 이루어지면, 나는 그동안 모아놓은 모든 곤련 자료를 꺼내 바구니에 담아놓고, 다시 정리하여 제1장에 들어갈 쪽지들만 따로 뽑아낸다. 그러고는 쪽지들을 가지고 그림 맞추기를 하듯, 제1장에서 벌이질 상황의 기승전결을 연결시킨다. 이렇게 순서대로 모든 쪽지를 작은 책처럼 배열한 다음, 나는 낚시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낚시를 가는 까닭은, 물가에 나가 앉아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장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고기가 잘 잡힌다고 해도 사람이 많은 곳에는 자리를 잡지 않는다. 입질이 없더라도 혼자 조용히 앉아, 서울로 돌아가서 써야 할 글에 대한 구상을 하고 싶어서이다. 앞으로 한 주일 동안 써야 할 부분의 상황과 인물 설정, 대화 따위를 생각하다가, 좋은 표현이나 단어, 새로 첨가할 내용 따위가 생각나면 다시 쪽지에 적어 호주머니에 자꾸자꾸 쑤셔 넣는다.
돌아와 월요일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날의 작업을 오전에 대부분 끝내고 틈이 날 때마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간다. 다시 낚시를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글쓰기에 구상할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책상에 앉은 다음부터 상상을 하려고 한다.
과제가 주어지면 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구상을 위한 산책부터 나가보라. 줄거리가 안 풀려 답답해지는 글 막힘 상황(writer;s block)이 닥치면, 조바심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모든 일이나 마찬가지로,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309-310
글쓰기에는 손이 쉬는 동안 머리가 열심히 일한다.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동안 가장 많은 정신적인 생산이 이루어진다. 312
글쓰기는 서둘러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 313
새로운 경험의 폭을 얿히기 위해서 작가는 눈과 귀를 발달시켜 남이 못보는 사물의 측면을 관찰하고, 타인들의 얘기를 들으면 내용뿐 아니라 화법도 분석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관찰은 의도적인 경험이다. 작가는 똑같은 경험을 관찰하더라도 타인들과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삶 자체가 밑천이다. 삶은 경험이요 교육이며, 훈련이고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317
쪽지는 좋거나 멋진 어떤 생각이 날 때마다, 길을 가다 걸음을 멈추고라도, 즉시 적어두는 습관이 좋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머릿속에 담아두려고 하면 자칫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일단 입 안에 들어간 밥을 삼켜야 다시 한 숟가락 더 퍼 넣을 자리가 생겨나듯, 머릿속에 담아둔 내용이 자꾸 뱅뱅 돌면서 제자리걸음을 하면, 한두 가지 먼저 떠오른 생각들이 자꾸만 발에 걸려 더 이상 새로운 구상이 전진하거나 발전하지 못한다. 318
정답에 집착하는 습성이 무개성을 낳는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대로이다. 319
진부함은 중독의 한 가지 증상이다. 321
정말로 어휘가 풍부한 사람은 갖가지 쉬운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생동감이 넘치는 문장을 만들 줄 안다.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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