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동화독법>을 읽고 있다. 

10편의 동화와 우화들을 소재로 한 책인데, 절반정도 읽은 시점에서 중간정리하는 생각으로 앞장을 후루룩 넘겨본다. 


저자의 의도는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나 우화에서 보편적인 교훈점이 아닌 세세하게 다시금 읽으며 생각해 본점들에 대한 담론을 가져보자는 점이다.

또한 속도의 시대에 시간의 흐름보다 더 빨리움직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반해서 오롯이 여유를 가지며 읽어보는 시간, 세뇌가 아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가져보자는 것이다. 


절반인 다섯 편을 읽은 시점에서 써보는 이유는 저자의 의도에 부흥하려는 이유도 있고, 좀 더 천천히 되새겨보며 읽어나가기 위한 이유에서이다. 4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이다보니 다 읽고나면 앞쪽은 가물가물해 질듯해서.

성인이 책을 다 읽고 덮은 그 시점에서 기억하는 내용은 대략 47%정도라고 한다.(솔직히 나의 경우로 생각해보면 20~30%정도 밖에 안 되는것 같다.) 우리의 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은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우선 또렷이 자신의 앞선 경험과 부합하거나 떠올리게하는 내용이거나 아니면 최근의 기억들이 가장 큰 이유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중간쯤에서 다시 앞으로 넘겨본다.


읽은 다섯편의 동화, 우화는 '미운오리새끼' '신데렐라' '솔로몬의 지혜' 인어공주' '토끼전'이다.

개인적으로 더 좋았던 부분은 미운오리새끼와 솔로몬의지혜 그리고 토끼전이었다.


특히 솔로몬의 지혜에서 저자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솔로몬의 의도는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진정한 지혜의 왕은 아이의 생명을 기준으로 대했기에 사용하였던 표현이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이다.

'누구의 아이인가?'라는 주체가 어머니가 아닌 아이, 특히 아이의 생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 현명한 대처는 큰 교훈이 된다.

두 여인이 서로 자신의 아이라는 주장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은 진짜 엄마를 가릴것을 생각하는 것에 반해 솔로몬이 중히 여긴것은 '아이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솔로몬의 아이를 반으로 잘라 나누어 주라는 명령에 감정이 아이에게 동하여 양보한 여인에게 아이를 넘기게 된다. 

성경에는 '아이의 엄마'라는 표현은 없다. 다만 생명을 지닌채 아이를 상대 여인에게 주라는 의미의 표현이 있을 뿐이다. 설사 아이의 친 어미가 아니어도 이정도의 마음이라면 아이를 잘 키우려 할것이란 생각에 동조할 것이다.

진짜 어미일 것이나, 아니라 하여도 어쨌든 아이는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친어미든 아니든 그런 결정을 할 수있는 여인이라면 아이에게 애정을 가지고 키워 나갈 것이란 점이다.

주장하는 이들의 의도를 넘어 바라보는 관점과 넓고 깊음은 진정한 지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저자는 이러한 에피소드의 결말의 표현은 "왕을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였다. 백성들은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나누어 주라는 명령과 칼의 등장에 왕을 두려워한것도 물론 있을 수 있으나, 왕의 현명함에 대한 존경에 두려움이었을 것이리라.

또한 하느님께 받은 지혜이기에, 하느님에 대한 경배의 차원에서 느끼는 경건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카페에 앉아서 종이에 썼는데, 돌아와 타이핑하면서, 혹시나 하고 성경어플을 설치해서 열왕기상 3:28 열어보니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카톨릭성경어플에서는 '임금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온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임금을 두려워하였다'라고 되어있었다... 쓰면서 이런생각을 했다면 좋았을걸..ㅎ 그리고 성경의 종류가 매우 많다는 걸 알게도 되었다. 번역자의 차이에 대한 그런 것일까..)


그럼에도 솔로몬은 나이가 들어 '지혜의 왕'이란 수식어를 무색하게 한다. 그의 변절의 내용에 대해 저자는 '거울'의 예를 사용하여 우리의 교훈을 생각해 보게 한다.

'진실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 이러한 거울은 '유리로 만든 거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거울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있다'는 것이다.

거울을 자주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보거나 아예 보지 않는 사람은 없듯이, 우리 역시 마음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 봄으로 스스로 진실된 사고와 행동을 하자는 교훈이다.

이러한 내용이라면 '철학'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질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자신을 다듬어 가기위해 자신의 주위의 삶과 환경과 표현, 행동들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볼때, 자신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있으며, 좀더 진실되게 다가가 인간에게 있는 양심의 작용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알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깨달음'이란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게 된다. 그 시점이 철학하는 시점이며, 의도적으로 그러한 순간들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철학자라 표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에서 '돈오'와 '점오'가 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차이에 대한 단어들인데, 돈오는 단번에  깊은 뜻을 깨닫는것을 말한다. 즉 순간적인 찰나에 깨달음을 얻는것이다. 점오는 점점깊이 깨달아가는것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련하고 알아가면서 깨달아가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해 어느것이 맞는지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한다. 

철학의 깊이에 대해서는 모른다. 철학도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며 깊은 철학에 참구해 본적도 없다. 다만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뜻을 지는 철학이란 단어를 생각해보는 부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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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드는 생각은 '웃긴다'이다. 이글을 쓰려고 생각했을때만해도 처음 언급된 '미운오리새끼'에 대해 쓰려고 하며 그 내용들의 페이지들을 다시금 넘겼는데, 우연히 펼친 페이지의 솔로몬의지혜 내용을 적었다.

읽은 내용주에 가장 인상받은 것은 '미운오리새끼'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적은 내용은 다른 내용.

글을 적어보면서 종종 경험하게 되는데, 그럴때마다 원래 쓰려한 내용을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지금도 그렇듯이..

이러한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재밌기도 하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에 대본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듯, 글을 쓰는 것도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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