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서문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A. S. 닐이 선구적인 자치 자유학교인 서머힐을 설립하고 운영해온 50년의 세월을 되돌아본 책이다. 8

 

서머힐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려고 했다는 점이다. 10

 

 

닐과 서머힐

 

목표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에 완전하고 건강한 감정과 개인의 역량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닐은 아이들이 이런 완저함을 성취하기만 하면, 학문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려는 동기는 저절로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성장으로 이끄는 열쇠는 아이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에게 맘껏 놀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었다. ..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14

 

다른 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을 서머힐에서는 일상생활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나간다. 19

 

따뜻한 마음, 낙관주의, 독립심 그리고 자립성은 서머힐에서는 전염병처럼 쉽게 옮아가는 자질이다. 서머힐의 구조는 아이들을 자립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가장 훌륭한 가족이 그러하듯이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21

 

 

들어가는 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자치, 수업에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을 자유, 필요하다면 며칠, 몇 달, 몇 년이라도 놀 수 있는 자유 , 종교나 도덕이나 정치를 막론하고 모든 교화로부터의 자유, 성격 틀에 맞춰 찍어내기(character oulding)로 부터의 자유. 25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를 나누는 장벽은 필요 없다. 그런 장벽은 아이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만든다. ...

독단적인 권위는 아이에게 평생토록 지속될 열등감을 심어준다. 26

 

아이는 작고 나는 크다. 왜 나는 나보다 작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가? 27

 

아이의 무례함은 나를 그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버렸다. 그것은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나의 위엄과 지위를 훼손했다. 28

 

서머힐에는 세대 간에 차이가 없다. .. 열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교사에게 그의 수업이 따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사 역시 어떤 아이에게 넌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야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유는 양쪽에 다 적용되어야만 한다.

교육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한 아이들을 길러내야 한다. 자치는 분명히 그것을 해낸다. 28-29

 

어떤 교사도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아이를 치유할 권리는 없다. 꼭 이루어져야 할 유일한 치유는 바로 불행을 치유하는 것이다. 30

 

문제아는 불행한 아이다. 그 아이는 자신과 전쟁 중에 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세상과 전쟁을 벌인다. 31

 

 

서머힐의 사상

 

활동적인 아이들을 책상 앞에 붙들어 앉혀놓고 대개는 쓸데없는 과목들을 공부하게 만드는 학교는 분명 나쁜 학교다. 그런 학교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그리고 돈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문명에 잘 어울리는 유순하고 창조성 없는 아이들을 바라는 창조성 없는 시민들에게도 그 학교는 좋은 학교다. 35

 

서머힐은 어떤 곳인가? 먼저, 수업은 아이들의 선택 사항이다. 아이들은 수업에 들어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원한다면 몇 년 동안 걔속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시간표는 있지만 그것은 교사들의 시간표다.

보통은 나이에 따라 학급을 편성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의 관심사에 따라서 학급이 편성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새로운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6

 

인간은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느해 봄 나는 몇 주에 걸쳐 감자를 심었다. 그런데 6월 들어서 그 감자들 중 여덟 포기가 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은 권위주의에 젖은 사람의 행동과는 다르다. 나는 단지 감자를 문제 삼았지만 권위주의에 빠진 사람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 문제까지 끄집어낼 것이다. 감자를 훔치는 건 나쁜 짓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았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내 감자의 문제로만 삼았다. 그건 내 감자이므로 다른 사람은 그 감자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다. 42-43

 

자유로운 아이들은 쉽게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44

 

강조할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아홉 살 난 아이가 공놀이를 하다 유리창을 깨면 나한테 와서 그 사실을 말할 것이다. 그 일로 내가 호통을 치거나 혹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분개할 거라는 걱정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사실대로 말한다. 그 아이는 유리창 값은 물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훈계를 듣거나 벌 받을까봐 겁낼 일은 없다.

두려움이 없을 때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과 더 쉽게 친해진다. ...

아이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44-45

 

 

전체회의

 

학교 생활 가운데 자치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것도 강요하지 낳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누가 음식을 조리하고 어떤 음식을 조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체회의의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다. 새로운 교직원의 채용 문제는 아이들과 공식 협의를 거치지 않는다. .. 학생들에게 자치는 그들의 공동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상황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50

 

자치에서 어른들이 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어른들은 이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 바깥으로 물러나 있는 재주가 필요하다. 51

 

민주주의란 완벽한 제도가 아님을 나는 인정한다. 다수결의원리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독재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대안을 찾기는 어렵다. 여러 해 동안 내가 놀란 것은 우리 학교의 소수자들이 다수의 판결을 잘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55

 

 

자치

 

민주주의는 아이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인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9

 

아마 우리 민주주의가 민주 정치보다 더 공정할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대단히 너그럽고, 아무런 기득권이 없기 때문이다. 59-60

 

자치를 하지 않는 학교는 진보학교라고 불리면 안 된다. 그건 일종의 절충 학교다. 아이들이 자기네 사회 생활에서 자치를 이루어나가는 데 완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자유로운 게 아니다. 우두머리가 있을 때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이것은 엄격한 우두머리보다는 자비로운 우두머리에게 더 해당되는 말이다. 활기찬 아이는 모진 우두머리에게는 반항을 하지만, 부드러운 우두머리 밑에서는 오히려 유약해지고 자신의 진실함 감정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한다.

학교에서 자치가 잘 이뤄지려면 나이 든 학생 몇몇이 필요하다. 그들은 평온한 삶을 좋아하며, 악동이 아이들의 무관심이나 반감에 맞서 싸운다. 그들은 표결에서는 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자치제도를 진정으로 믿고 원하는 아이들이다. 한편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치제도를 잘 운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아직 사회 생활을 영위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힐에서는 일곱 살짜리 애도 전체회의에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유치원생들까지 투표권을 가지며 종종 훌륭한 발언을 한다. 62

 

모든 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을 나이와 분리해서 대하는 태도다. 64

서머힐은 바깥 세상의 삶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서머힐은 시대에 앞선 공동체 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지고 있다. 삽을 보고 땅도 잘 파지 못하는 형편없는 삽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삽을 가지고 도랑을 파는 사람만이 형편없는 삽이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0-71

 

 

놀이와 자율

 

놀이에 대한 이론은 많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은, 어린아이들이 나중의 삶을 위한 연습 행위로 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끼고양이가 털실을 쫓아다니는 것은 미래의 쥐잡기를 준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새끼고양이가 발로 얼굴을 닦고 몸단장을 하는 데도 어떤 목적이 있음을 전제한다. 또는 그와 달리 동물의 행동에는 장차 신성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신의 힘이 작용한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이런 두 가지 가정에 모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새끼고양이나 강아지가 놀이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믿어야할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에 그 에너지는 타고난 육체적 에너지인 듯하다.

아동기는 성인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은 노는 시기다. 그런데 어떤 아이든 충분하게 놀지 못한다. 아이 때는 충분히 놀아야 앞으로 일을 시작해 나갈 수 있고 또 닥쳐오는 어려움에도 맞설 수 있다는 것이 서머힐의 이론이다. 74

 

내가 생각하는 놀이는 바로 공상과 관련된 놀이다. 조직되니 게임은 기술과 경쟁 그리고 팀워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기술이 필요 없으며 경쟁이나 팀워크도 거의 요구되지 않는다. 75

 

서머힐에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은 하루 종일 논다. 공상의 날개를 펴고서. 어린아이들에게 공상과 실재는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열 살 난 남자 아이가 유령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어린아이들은 좋아라고 비명을 질러댄다. 하얀 침대보를 뒤집어쓴 유령이 토미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유령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러댄다.

어린아이들은 공상 속에서 살면서 그 공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다, 여덟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나 인디언 놀이를 하는데, 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무 비행기를 타고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어린 여자 아이들 역시 갱 놀이를 하는데 총이나 칼을 쓰지 않는 대신 인신공격 성향이 강하다. 메리의 패거리와 넬리의 패거리는 서로를 싫어한다. 그래서 서로 간에 말다툼과 거친 말이 오간다. 남자 아이들의 경우 상대 패거리는 오직 놀이에서 적일 뿐이다. 그래서 어린 여자 아이들보다는 어린 남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편이 훨씬 더 수월하다.

공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경계가 어디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실재와 공상은 아주 밀접하다. 한 여자 아이가 장난감 접시에 음식을 담아 인형에게 줄 때 그 아이는 잠시라도 인형이 살아 있다고 믿는 걸까? 흔들목마를 아이들은 진짜 발로 생각하는 걸까? 어떤 남자 아이가 손들어!” 하고 외치며 총을 쏠 때 그 아이는 자기 총을 진짜 총으로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진짜라고 상상한다고 여기고 싶다. 어떤 감수성 둔한 어른이 끼어들어 그것이 공상임을 일깨울 때 비로소 아이들은 현실 세계로 풍덩 떨어진다.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은 놀이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다른 것 같다.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논다. 여자 아이들은 놀이 자체보다는 공상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드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남자 아이들은 거의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과 놀지 않는다. 남자 아이들은 갱 놀이를 하고 술래잡기를 한다.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짓고 구멍과 참호를 파며 논다. 남자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이 보통 하는 그런 일을 다 한다. 75-76

 

서머힐에서는 게임을 장려하는지 사람들은 묻곤 한다. 우리는 정말 어떤 것도 장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이 모험과 공상으로 가득 찬 게임을 하면서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

나는 게임과 놀이를 구별한다. 나에게 축구, 하키 럭비, 야구 등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그런 게임에는 놀이의 상상력이 없다. 자유로운 아이들은 공상 놀이(더 좋은 이름이 없어 이렇게 부르겠다)를 좋하하기 때문에 팀을 이루어서 하는 게임을 피하려 든다. 77

 

놀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장에서 아이들의 책에 관해 거론해서는 안되겠지만 어딘가에서는 한 번 언급되어야 할 이야기. 78

 

아이들이 읽는 책을 대체 얼마나 검열해야 할까? 잔인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학적인 이야기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어느 일요일 밤, 나는 학생들에게 모험 이야기를 해주었다. 식인종의 가마솥에서 마지막 순간에 구조되는 장면에 이르자 아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79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들의 마음보다 훨씬 더 깨끗해 보인다. 어떤 남자 아이는 헨리 필딩의 <톰 존스>를 읽도고 외설적인 구절을 발견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아이들을 성에 대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면 어떤 책에나 있을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연령층의 책들에 대한 검열도 단호히 반대한다.

언젠가 학교에 새로 들어온 열네 살짜리 여자 아이가 내 서가에서 <어느 소녀의 일기>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아이는 안던니 킥킥 웃어대며 그 책을 읽었다. 여섯 달 후 아이는 다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더니 책이 이전보다 재미없다고 내게 말했다. 모르고 읽었을 때는 짜릿했던 것도, 알고 나서 읽으면 시시해지는 법이다.

프로이트가 어린아이들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후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욕에 관한 책은 여러 권 나왔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자율적으로 자란 아이들에 관한 책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80

 

자율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 즉 원죄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믿음을 내포한다. 자율은 어린 아기가 외부 권위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사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는 배고프면 밥을 먹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만 개끗한 옷을 입고, 혼이 나거나 볼기를 맞지 않으며, 늘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의미다 물론 자율도 다른 이론적인 생각들처럼 일반 상식과 결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81

 

자율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자율적으로 아이를키우기 위해서 따로 교육을 받거나 성품을 계발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노인이 된 스코틀랜드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메리가 생각난다. 메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이었다. 결코 안달하지 않았고 호통도 치지 않았다. 메리는 본능적으로 자기 아이들편에 섰다. 아이들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엄마가 자신들을 인정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병아리들을 돌보는 푸근하고 온화한 암탉과 같은 엄마였다. 메리는 남을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81-82

 

아이에게 장난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혼자 힘으로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을 때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도와주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주지 말라. 이 문제에서 나는 조금 주관적일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에게 꽤 많은 돈을 빚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값비싼 최고급새 경주용 자전거를 보내왔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이 싫다. 일반적으로 말해 오늘날 아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그만큼 선물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83-84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너무 인색해서도 안 된다. 아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선물을 하는 부모는 흔히 자기 아이들을 충분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퍼부어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다. 84

 

아이들은 음악과 진흙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계단을 쿵쾅거리며 오르내리고 시골뜨기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가구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나다니는 중에 고대 로마시대의 골동품인 포틀랜드 꽃병이 놓여 있으면 아이들은 그냥 뀌어넘어갈 것이다. 그것이 뭔지 쳐다보지도 않고.

문명의 폐해는 어떤 아이도 충분히 놀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모든 아이들이 어른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른이 되도록 온실 재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는 지극히 독단적이다.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의 시간표를 짠다. 9시부터 11시까지 수업하고, 그 후 1시간 반 동안 점심 식사 하고, 다시 오후 3시까지 수업한다. 만약 자유로운 아이가 손수 자기 시간표를 짠다면, 그 아이는 분명히 노는 시간을 길게 잡고 수업 시간을 짧게 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어른들이 가지는 반감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근심 어린 질문을 골백번도 더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하루 종일 놀기만 하면,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시험에는 합격할까요?” 다음의 내 대담에 수긍하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당신 아이가 놀고 싶은 만큼 실컷 놀더라도, 이 년만 바짝 공부하면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삶의 요소로서 놀이가 지닌 가치를 무시하는 학교에서는 보통 입시 준비로 오 년, 육 년, 혹은 칠 년을 공부하지요.”

그 말 다음에 나는 꼭 이렇게 덧붙인다. “물론 그것은 그 아이가 시험에 합격하고 싶어할 때만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발레리나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혹은 의상 디자이너나 목수가 되고 싶을지도.

그렇다, 아이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마음때문에 어른들은 아이에게서 놀 권리를 빼앗는다. 아니, 거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놀이를 허용하지 않는 태도의 배후에는 모호한 도덕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아이라는 존재는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암시, 청소년들에게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고 훈계하는 목소리에 담긴 암시가 그것이다.

자신들이 어린 시절에 가졌던 동경과 열망을 잊어버린 부모들, 어떨게 놀고 어떻게 공상하는지를 잊어버린 부모들이 불쌍한 부모들을 만들어낸다. 노는 능력을 상실한 아이는 신체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기와 사귀려고 다가오는 다른 아이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놀지 못했을 때 어떤 손상을 입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84-86

 

 

일과 정직

 

아이들의 공동체 의식, 즉 사회적 책임감은 적어도 열여덟 살은 지나야 충분히 발달한다. 아이들의 관심사는 당장 눈앞의 것에 있다. 아이들에게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89

 

아이가 지금 놀아야 하는 시기에 자유롭게 지낸다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인생관이 바로 정립된다면 직업이 어떤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90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자주 부려먹는다. "메리어느 달려가서 이 편지를 우체통에 놓고 와." 어느 아이든 이렇게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91

 

아이들 스스로 관심이 일지 않는데, 억지로 관심을 가지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시간당 얼마씩 주기로 하고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과 나는 같은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즉 나는 내 텃밭에 관심이 있고, 아이들을 가욋돈을 버는 데 관심이 있다. 92

 

건전한 문명이라면 최소한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리라는 게 내 의견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벌써 많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들에게 놀이와 같은 것이며 아마 부모의 입장에서는 비경제적인 일일 것이다. 94

 

좋은 버릇은 일찍이 어린 시절에 몸에 배지 않으면 나주엥는 평생 발달하지 않을 거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있다. 우리가 그 전제에 길들여져왔고 또 그 생각이 도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 전제를 부정한다.

아이들은 자유 속에서만 자기가 타고난 방식, 즉 좋은 방식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꼭 필요하다.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온 학생들에게서는 억압의 결과물들을 볼 수 있다. 거짓 공손함과 가식적인 예의를 드러내 보이는 그 아이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97

 

아주 어려서부터 자유롭게 자란 아이는 거짓된 태도를 취하거나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98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아이들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98

 

 

문제아들

 

아이의 범죄는 모든 경우에 사랑의 부족에서 연유한다. 100

 

아이는 본래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다른 것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에고가 충족될 때, 우리는 선이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에고가 굶주릴 때, 우리는 범죄라고 불리는 것을 행한다.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서 자기 에고의 진가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회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자는 사회에 대해서 복수한다. 101

 

아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은 힘에 대한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하다. 사람은 선행을 하기를 원한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증오와 반항은 오로지 좌절된 사랑이요 좌절된 힘이다. 111

 

무엇이 처벌이고 무엇이 처벌이 아닌지를 결정하기는 정말 어렵다. 112

 

사랑은 다른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112

 

 

또 다른 문제들

 

자유로워지면 아이들이 거짓말을 별로 안 한다... 아이들은 대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가정일수록 아이들의 거짓말은 번성한다. 두려움을 없애면 거짓말도 사라진다. 115

 

나는 거짓말하는 것과 부정직한 것을 구별한다. 여러분은 정직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인생의 큰 문제에서는 정직하지만 사소한 문제에서는 가끔 부정직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의도에서 거짓말을 한다. ...

대개 어른들의 거짓말은 이타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거짓말은 늘 편협하고 개인적이다. 아이에게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이를 평생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115-116

 

 

개인 상담

 

요즘 나는 정기 심리 치료를 하지 않는다. 신경증에 걸린 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그 아이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주는 일이다. 아이에게 정신의학 이론을 자세하게 설명한다거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방법으로는 아이를 조금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더 나는, 아이들이 자유 속에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풀고 마음껏 지낼 때는 심리요법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34

 

장차 치유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것이 있다. 친구들에게는 심리요법을 사용하지 말라.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위험하다. 미술 교사들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잦다. "네 그림을 보니까 너는 엄마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는구나." 그 그림에는 한 아이가 도끼를 들고 나무를 자르려 하고 있다.

상징을 해석하는 일은 십자낱말풀이처럼 재미있는 게임이다. 그것은 환자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이제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하는 것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왕도라고 했지만, 프로이트 이론을 추종하는 정신분석가들도 더 이상 꿈을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교사는 상징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심리학을 사용하려 한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아이의 꿈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아이를 직접 껴안아주는 일이 훨씬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 교사는 심리학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135-136

 

내가 사용한 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들을 대하는 잘못된 방법과 정반대로 햇다는 것이다. 보통 학교에서 도둑질을 하면 그 아이는 회초리로 맞거나 적어도 도덕적 훈계를 들어야 한다. 나는 도둑질을 도덕과는 무관한 문제로 만들었다. 세 학교에서 도망친 전력이 있는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서머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집에 갈 차비가 있다. 벽난로 위에다 놔둘 테니까,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이 돈을 달라고 해라." 그 아이는 서머힐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태도 때문이었을까? 혹은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맛본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성공만 한 것이 아니라 실패도 했다. 드레스덴에 있을 때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여자 아이에게 상자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못을 쓴다고 말했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도 전에 만난 잘난 체하는 선생들이랑 똑같아." 나는 그 아이와 다시는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없었다. 아홉 살 난 레이먼드에게 용돈을 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현관문을 훔친 벌로 6펜스의 벌금형이야." 그러자 레이먼드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사건 전에 나는 레이먼드에게 정신병 증세가 있다는 점을 알았어야 했다. 아홉 살 난 아이들에게 모험담을 들려주던 중, 우리가 발견한 금을 마틴이 훔쳐갓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마틴이 울면서 나에게 왔다. "난 절대 금을 훔치지 않았어."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을 악당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139

 

이제 노인이 된 나는 심리요법에 대해 어떤 입장인가? 나는 심리요법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로 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심리요법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 프로이트는 아이들을 위한 자유를 믿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프로이트는 가부장주의를 고수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심리요법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지 가족들이 신경증에 안 걸리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142

 

 

건강

 

아이들은 에티켓을 문제 삼는 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예의라고 불릴 만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146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의범절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관습의 유물일 뿐이다. 진정한 예의범절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146

 

서머힐에서처럼 아이가 자신의 이기심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끔 자유로워지면, 그런 이기심은 점점 이타주의로 바뀌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과 배려로 변한다. 147

 

우유 문제를 다루어보자. 여러 해 동안 우리 학생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도싯, 웨일스에 있는 목장에서 짠 우유를 직접 받아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 외에는 전혀 구할 수가 없다. 또다시 문외한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저온 살균 처리된 우유는 맛이 없고 발효되지 않는다. 단지 상할 뿐이다. 살균 처리되지 않은 우유를 먹으면 결핵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가난한 아이들이 영양 부족 때문에 결핵에 걸린다. 우리는 늘 전문가들의 손안에서 놀아난다. 148

 

 

성과 남녀공학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을 잘 보냈다. 그들은 자위행위를 했다고 훈계를 듣거나 벌을 받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벌거벗은 몸에 익숙했다. 대체로 성에 대한 태도가 건강하고 자연스러웠다. 168

 

남녀공학인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온 청소년 몇 명에게, 그 학교에서 이성교제가 이루어지는지 물었더니,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그 대답에 내가 놀라자, 아이들이 말했다. "가끔 남자 애와 여자 애가 친구로 지내는 일은 있지만, 서로 사귀는 일은 전혀 없어." 나는 그 학교 교정에서 잘생긴 남자 아이들과 예쁜 여자 아이들을 보앗던 터라, 학교가 학생들에게 사랑에 반하는 관념을 강요하고 있으며, 대단히 도덕적인 학교 분위기가 성을 금기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어느 진보학교의 교장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사귀는 경우가 있습니까?"

"아니오, 없습니다."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문제아를 받지 않습니다."

조건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가끔 사랑할 능력을 상실한다. 섹스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소식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젊은이에게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커다란 비극이다. 168

 

젊은이의 사랑에 반대하는 주장들 중 이치에 맞는 주장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억압된 감정이나 삶에 대한 증오심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며 독단적이고 외설적이다. 170

 

 

극장과 음악

 

연기는 교육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연기는 대체로 자기과시다. 하지만 연기가 단순히 자기과시에 그쳤을 때, 서머힐에서는 그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

연기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일시하는 힘이 강해야 한다. ..

연기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방법이다. 177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율동은 모든 아이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180

 

 

교사들과 가르침

 

교사들은 나무 뒤의 숲을 보지 못한다. 그 숲은 풍성한 삶, 성격틀에 맞춰 찍어내기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교사들 대상의 강연을 할 때, 나는 교과나 규율 그리고 수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거라고 애초부터 말한다. 청중들은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한다. 진심 어린 박수갈채 속에 강연을 마치면 사회자가 질문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질문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이 교과나 가르치는 문제에 관해서다.

무슨 우쭐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교실 벽과 감옥 같은 학교 건물이 얼마나 교사의 시야를 좁게 만들고 교육의 진정한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슬픈 심정으로 말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목 위 머리 부분만 다룬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핵심 부분인 아이들의 감정은 그들에게 낯선 영역이 되고 만다.

부모들 역시 학교에서 학습이란 측면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상을 주고 점수를 매기고 시험을 보는 것은 모두 온전한 개성 발달에서 어긋난다. 학자연하는 사람들만이 책을 통한 학습을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학교에서 가장 중요성이 떨어지는 도구다. 아이들에게는 읽기, 쓰기, 산수 세 가지면 족하다.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공구, 찰흙, 운동, 극장, 그림, 자유 등이다.

이제 우리는 학교 공부에 대한 개념에 도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약간의 예술, 특히 문학을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보통의 아이들은 이런 과목들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190

 

학습을 놀이에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한답시고 의도적으로 학습에 놀이를 가미해서도 안 된다. 191

 

아이에게 배움을 강제하는 것은 의회의 법령으로 종교를 강제하는 것과 똑같다. 그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192

 

청소년들이 하는 학교 공부의 대부분은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인내력의 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서 놀고 놀고 또 놀 권리를 앗아간다. 아이들의 어깨 위에 늙은이의 머리를 얹는 꼴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노려는 욕망, 자유로워지려는 갈망, 그리고 자신의 모습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어른들이 강제로 틀에 맞춰 키워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을 '교육'은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나라가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공들여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존이나 피터나 이반이, 부모와 교사 혹은 우리 문명의 강압성이 가한 억압 때문에 입게 된 정서적 손상과 사회악을 극복하는 데 학교의 실험실이나 작업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 교과들이 왜 그렇게 규격화되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왜 역사는 있고 식물학은 없는가? 왜 지리학은 있는데 지지학은 없는가? 왜 수학은 있는데 시민학은 없는가? 늙은 퍼블릭스쿨 교장의 말에 그 답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가 그것을 싫어하는 한,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아무 상관없다." 193-194

 

사범대 학생들에게 강연을 하다보면, 쓸모없는 지식들로 가득찬 그 젊은이들의 미성숙함에 자주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많은 것을 안다. 논리에 뛰어나고 고전들을 인용할 줄도 안다. 하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에서 그들 대다수는 어린아이 수준이다. '아는 법'은 배웠지만 '느끼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친절하고 유쾌하고 의욕에 차 있지만, 뭔가가 부족하다. 감정적 요소, 생각을 감정에 종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놓쳐버렸고 또 지금도 놓치고 있는 그 세계에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들의 교과서는 성격이나 사랑, 자유, 자기 결정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러니 책을 통한 지식 습득만을 목표로 하는 체계가 지속되고, 머리는 가슴에서 계속 분리되어간다. 199

 

우리네 교육에서 진정한 행위, 진정한 자기표현은 얼마나 될까? 손으로 하는 작업은 전문가의 감독 아래 접시를 만드는 게 고작이다. 유도식 놀이 체계로 유명한 몬테소리 교육법조차, 아이로 하여금 행위를 통해 배우게 만드는 인위적인 방식이다. 거기에는 창조적인 면이라곤 하나도 없다.

창조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과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얻기 위해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 학습을 강조하는 교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창조성이 죽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200

 

공부는 중요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200

 

 

서머힐의 교직원

 

토요일 밤 전체회의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드러난다. 그런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면 아이들을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에 나이 많은 아이들 패거리가 늦게까지 자지 않고 웃고 떠들면 어른들은 싫은 소리를 한다. 해리는 자신이 한 시간이나 걸려 현관문에 쓸 판자를 만들어놓았는데, 점심을 먹고 와보니 빌리가 그것으로 선반을 만들어버린 것을 알고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린다. 나는 납땜 도구를 빌려가서는 되돌려주지 앟는 아이들을 비난한다. 나이 어린 세 아이가 저녁 식사 후 배가 고프다면서 빵과 잼을 가져갔는데 다음날 아침 복도에 빵 조각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흥분해 소리를 지른다. 피터는 도예실에서 아이들이 자기의 귀중한 찰흙을 던지며 장난친다고 몺 언짢아한다. 어른들의 입장과 아이들의 부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계속된다. 하지만 그 싸움은 결코 서로의 인격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개인에 대한 어떤 반감도 없다. 이런 갈등으 서머힐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204

 

당신이 정말 아이의 편이라면 아이는 그것을 안다. 205

 

수업이 강제가 아닐 때, 아이들을 수업에 들어오게 하려면 정말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내가 원하는 교사는 어느 정도 유머가 있고 위엄은 전혀 없는 교사다.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도 안 되고 도덕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유머가 없는 사람은 아이들에게는 분명 위험한 존재다. 유머는 아이들에게 친근감, 존경을 표할 필요 없음, 두려움 없음, 다시 말해 어른들의 애정을 의미한다. 유머는 대개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교실이란 울터리를 벗어나 있다. 유머는 교사로서 요구하는 존경을 없애버린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의 웃음은 그를 너무나 인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웃는' 사람이고, 가장 자쁜 교사는 아이들을 보고 '비웃는' 사람이다. 206-207

 

내가 서머힐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다른 재미난 아이들 사이에서 나도 한 명의 재미난 아이가 될 수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는 수학이나 역사 그리고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다른 모든 교과목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유머는 일종의 정서적 안전판이다. 재미있게 웃을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에 죽어 일흔이 되어서야 땅에 묻힌다고 누군가가 썼다. 분명 유머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다. 209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209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은 숙련이 필요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212

 

 

종교적 자유

 

행복은 모든 아이들의 권리다. 미래의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대비한답시고 아이들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216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해야 할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잘못이다. 어린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요구하는것은 잘못이다. 모든 아이들은 이기주의자다. 온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이다. 아이들의 열망은 강렬하다. 아이들을 오직 바라기만 하는, 세상의 왕이다. 사과를 손에 쥐면 오직 사과를 먹겠다는 바람 한 가지뿐이다. 그리고 엄마가 동생과 사과를 나눠 먹으라고 하면 아이는 동생을 미워하게 된다.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 가르쳐도 이타주의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런데 아이에게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치면 아마 이타주의는 전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타적인 아이는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의 이기심을 억업하면 그 이기심은 고착된다. 충족되지 않은 바람은 무의식 속에 잠재한다.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르침을 맏은 아이는 평생 이기적인 데 매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훈계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219-220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한 가정은 부모가 도덕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 아이들에게 숨김없이 정직한 가정이다.... 거짓된 위엄과 강요된 존경은 사랑과 거리가 멀다. 강요에서 나온 존경에는 '' 두려움이 따른다. ..

잘 자란 아이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숨을 쉰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두려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표시다. 220

 

만약에 아이가 어떤 것을 죄악이라고 배운다면 삶에 대한 그 아이의 사랑은 분명 두려움과 증오로 바뀐다. 자신들이 자유로울 때 아이들은 결코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221

 

 

서머힐의 졸업생들

 

송공에 대한 나의 기준은 '즐겁게 일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230

 

"열한 살이 되었는데 아직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단 말이야!"하고 큰소리치는 아줌마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깥의 환경은 온통 놀이를 반대하고 공부에 찬성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어렴풋하게 느낀다. 243

 

 

서머힐의 미래

 

나는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익히려 들지 않거나 혹은 아예 그런 안목을 익힐 여지가 없는 부모를 만나면 화를 낸다. 267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면 소극적인 구경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한편 나는, 어떤 아이가 여려 해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보이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 내면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성격 형성하기가 바로 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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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 여행자의 생각(짠홍즐)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이다. 당신이 여행 가방을 메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때, 당신은 '고향을 등에 메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된다...

내가 길을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나는 한 트렁크의 '편견'과 '오랜 습관'을 가지고 간다. 나를 속박하는 시선까지도.  7


사물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이하고 이국적인 환경과 낯선 풍습은 관찰자 '스스로의 대조'를 통해서 나온다. 

우리는 등 뒤에 고향의 '감옥'을 메고 다닌다.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만 리 길을 걷는 것이 낫다'  8


당신은 여행을 하면서 변했다. 당신은 '타향을 등에 메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9


돌아온 당신은 원래의 당신을 '부정'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원래의 당신을 '포함'하고 있다.  10


'행동하기'의 의미  12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여행 가방을 메고,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다.  16


이곳에서 나는 제법 괜찮게 생활했지만, 빠르고 투박하게 도시 사람들을 흉내낸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18


여행은 우리의 몸을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에 자극을 주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28


2세기 여행엔, 미처 발견되지 않은 대륙도 없고, 신비롭고 구하기 어려운 향신료도 없다. 특별히 정복해야 할 밀림도 없고, 문명 밖에서 생활하는 인종도 없다. 

그저 당신의 몸으로 직접적이고, 강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만 하면 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따뜻한 물, 비누, 각종 건강관리 물품, 심지어 수면용 치아 교정기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8


태양 아래에 더이상 새로운 세계는 없다. 오늘날 콜럼버스는 반드시 천진한 영혼과 빈곤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만 계속해서 그만의 여행을 할 수 있다.  39


어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이 꼭 그 도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57


나는 지금 발리 쿠다 거리에 서 있다. 이곳은 발리 섬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히피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들은 연신 땀을 닦으며, 관광산업 때문에 발리 섬의 순수한 풍토와 인정이 망가진 것에 대해 성토한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팽창 때문이야! 자본주의가 여행의 진정한 묘미까지 파괴하고 있어."

한 프랑스 사람이 분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보고 싶어했던 발리 섬이 아니야!"

"그럼 어떤 발리 섬이 보고 싶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나는 쪽빛 하늘과 백옥 같은 모래사장, 친절한 사람들, 오래된 사원,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공예품을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림자극에 나오는 인형을 사서 돌아가고 싶었다는..."  75-76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여행자의 눈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감상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여행자의 시선은 하루나 이틀 혹은 이십여 일이 지나면 막을 내리지만 현지 사람의 생활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는 것을 오랜 여행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어하는 여행자들의 호기심과 욕심을 위해서 생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과 자손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낟.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하지, 여행자의 눈을 의식해서 일상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거나 보여주기식의 공연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76-77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여행을 아름답게 만든다.

여행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현지 사람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뿐이다. 침묵은 적의가 아니며, 가장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85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친구 되기가 쉬운 것도 아니었고, 같은 언어를 말하지 않아도 왕왕 아주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여행자와 현지 사람들 간의 차이는 문화성과 비사회성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현지 사람들은 여행자가 자신들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것을 용인해주고, 특이하다고 받아들여준다. 게다가 여행자가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어울리지 못해도, 여행자가 우둔해서 아무론 감동을 주지 못해도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겨 조용하고 너그럽고 포용한다. 언어를 벗겨낸다. 언어를 벗겨내면, 언어를 위해 건립된 모든 사유 체계 또한 벗겨진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본성을 드러내며 상대를 순수하게 마주하게 된다. 어떠한 사회의 통념도 개입되지 않는다. 진실하고 평등한 대접만이 남는다.  87-88


언어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유일하게 개인의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해.  90


여행이란 편견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106


인류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점점 더 판단력을 잃어간다. 예전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던 많은 문제들도 지금은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132


현대인들은 큰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들은 농업시대 조상들이 토지에 대해 가졌던 중요한 관념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생활 방식을 따르고, 물과 풀을 따라다니며 살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하고 쉬는 데 제약이 없으며,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시의 유목민' '보보스족' '현대 보헤미아인' '신(新) 집시족'이라 일컫는다.  133-134


"우리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여행에서 막 돌아온 다보스맨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역시 방금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원주민을 봤어요. 가난하게 생활하지만 위엄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우리는 그동안 바쁘게 돈을 버느라고 진짜 생활을 잊지 않았던가요?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건 그들의 삶이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169


경계(境界 지경경 경계할계)가 여행자의 길을 가로막았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완전한 파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사이가 무형의 눈금과 경계선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모든 선(線 줄선) 뒤에는 '자연의 힘'과 '정치 권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국경을 긋는다. 마치 하느님이 손수 그린 선 같다.  172


현대인들은 국경을 넘기 위해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한다. 정치 체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지시를 기다린다. 비자를 신청할 때면 '국가'라는 구조 아래에서 개인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73


사실 '군중'이라는 존재는 쉽게 매수당하는 존재다. 집권자는 작은 당근을 던져주면서 군중이 사소한 행복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실제로 영구에서는 지금까지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대혁명이 발생한 적이 없다. 영국 정부가 중대한 법률에 있어서는 민중의 권익을 위해 신속하게 양보를 했기 때문이다.  183



여행자는 여행길에서 종종 고독을 느낀다. 또다른 시공간이 사방에서 떠다니고, 중가넹 가로막혀 볼 수 없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렇지만 이런 고독은 건강한 고독이다. 세상 사람들은 엄숙하게 가라앉은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면서 필사적으로 세상의 보폭을 뒤쫓는다. 여행자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나태할 수 있는 존재이다.  239


여행자는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여행자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자유 역시 가상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40



어디를 가든지 간에 여행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여행을 하는 시간은 공백의 시기이다.  241



여행자는 여행길에서 화려함이 뒤섞인 낯선 환경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이국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자가 떠나가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떠남에 '버린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42


당신은 어떤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그 사건이 발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행자의 가장 큰 슬픔은 무언가가 막 좋아지기 시작했거나 익숙해졌을 무렵 그 풍경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예전에 둘러본 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눈앞에서 보았던 풍경, 들이마셨던 냄새, 몸을 스쳐갔던 바람, 사랑하는 연인과 그 나이의 당신..

그 모든 것이 아마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변할 것이다. 당시의 정황, 기분, 감정 그리고 그런것들을 남겨두고 싶은 당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환경은 한번 지나가고 나면 절대 되돌아오지 않는다.  244-245


여행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아름다운 경험들은 대부분 생명의 가장 깊고 신비로운 감동과 연관되어 있다.  245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도 본인이 직접 경험햇던 견고한 사랑만 못하듯 여행도 그렇다. 여행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속하기 때문이다.  246


여행 경험은 병에 포장된 와인 같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되어 표면적으로 같은 병에 담기고, 같은 공장 상표가 붙어 있다. 그렇지만 생산 연도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몇 달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맛의 차이도 아주 크다.

그러나 코르크 마개를 개봉하기 전까지 당신은 그런 세세한 차이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쌍둥이보다 더 쌍둥이같이 닮은 와인 병은 손으로 만져봐도 프랑스에서 대량생산된 와인처럼 생각된다.

코르크 마개를 개봉한 와인 병에서는 알라딘에서 요정 지니가 램프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처럼 향이 흘러나온다. 술은 담갔던 해의 기억은 빠르게 공기중으로 퍼져가고, 코를 통해 들어가 머릿속에까지 생동감 있게 회복된다. 당신은 이내 그날의 날씨와 공기중의 습도가 포도 생산과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녹색 넝쿨들이 만들어낸 물줄기가 태양 아래 반짝이고 자홍색 포도가 요트처럼 드문드문 나타나는 모습이, 허리가 굽은 나이 많은 프랑스 농부가 거치고 큰 손으로 포도의 겉을 세심하게 어루만지며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당신의 눈에 선하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와인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은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249-250


여행은 연속된 기다림이다. 휴가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저금통장 속 숫자가 이상적 수치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적절한 계절을 기다리고, 함께 여행할 사람을 기다리고, 길 위에서 기다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리고, 착륙하기를 기다리고, 수하물 컨베이너 벨트가 운행되기를 기다리고, 택시가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고, 예약한 호텔 객실이 정리되어 체크인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미술관 개장을 기다리고, 여행 관련 잡지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일출을 기다리고, 버스가 자신을 다른 장소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고... 여정 동안 여행자는 늘 기다린다.  260


여행자는 점점 '잘 기다릴 수 있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여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잠들 수 있다. 미소를 지으며 낯선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여행자는 하릴없어 보이거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여행자는 당당하다.  261


기다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즐거움이다. 허무는 모든 여행자가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짐이다. 기다림이 습관이 된 그날, 나는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62-263


현대 여행 시스템에서 문화 경험은 하나의 '상품'이다.  280


기계의 시대에서 문화 경험은 수차례 복제될 수 있다.  281


문화 복제는 여행자의 사진첩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284


여행은 한 편의 영화와 같아서 여행자는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감상하는 대상은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이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타국의 풍경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카메라와 비디오는 갈수록 가벼워져 휴대하기 좋아졌고, 가격도 저렴해졌다. 덕분에 우리는 길을 거닐면서 만나는 풍경을 기록하고, 관찰하면서 새로운 환경과 교감한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그 화면을 편집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상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여행은 더 '사유화(私有化 사사로울사 있을유 될화)'된다. 뉴욕은 더이상 뉴욕이 아니고, 파리도 더이상 파리가 아니다. 도쿄 또한 더이상 도쿄가 아니다. '나의' 뉴욕, '나의' 파리, '나의' 도쿄다. 이는 이 시대의 여행서가 대량으로 쓰이고 복제되면서도 전에 없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모든 사람들은 여행을 할 수 있고, 사적이고 은밀한 감상을 할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모든 여행자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여행 사진은 점점 결혼식 사진과 신생아 사진처럼 귀중한 특징을 지니게 되어싿. 삶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계화 시대에 대량생산된 물건같이 무엇인가가 일단 많아지면, 더이상 귀하지 않게 된다. 결혼식 사진, 신생아 사진, 여행 사진을 전시할 때 당사자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방문객은 예의 있게 참으면서, 틈틈이 시계를 보며 자리를 떠날 기회를 찾는다.  285-286


대중은 우매하고 세속적이기 때무넹 상업 시스템 안에 빠지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대중은 매일 매체와 광고의 최면세 걸려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이 창의적이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들의 행위는 상인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288



후기 - 자유, 독립, 여행 그리고 여행자

만일 갈릴레이가 당시 로마 교황청에 도전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드이 귀족 권력의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고, 여자들이 스스로 '제2의 성'이라는 말에 만족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봉전사회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믿고, 끝없는 여해을 하면서 세상의 가장 자리와 마주하고, 연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나는 아마 전족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여행을 떠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A부터 B까지, B부터 다시 C까지, 다시 C에서 D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명의 과정은 '나'라는 한 주체가 호기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갈망하고, 탐색하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여행자의 정신인 것이다. 세계느 ㄴ이렇게나 넓고, 여행자는 한 도시에 머무는 것을 만족하지 않는다. 여행자는 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도시에 가고자 한다. 높은 산을 오르고 나면 더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한다. 지도에 표시되었거나 표시되지 않은 장소에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찾는다. 여행자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무지하지만 용감하고, 미지의 것에 매료된 사람이다. 이 세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자에게 제공한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302-303


여행은 여행가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밀란 쿤데라가 묘사했던 것처럼 세상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아서 갑자기 가운데 균열이 생겨나고, 그 틈을 통해서 당신은 또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세상의 뒷면을 보게 된다. 당신이 평소에 볼 수 없고,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또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표면은 평온하고 안정적이며, 결점이 없고 아름다워서 당신의 시야를 가득채웠다. 하지만 추악하고 무서운 틈은 표면적인 세상의 완전함을 파괴한다. 당신이 그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정보들을 누설한다. 틈은 당신이 과거에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조차 못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틈은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신의 관점은 유일한 관점이 아니다. 당신이 독단적으로 정한 표준은 전 세계의 표준이 아니다. 당신이 안심하고 기대온 지식은 사실 아주 혀뵤소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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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 거예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이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324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니 <장자<니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거기다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네 권 정도를 먼저 읽어야 해요.  325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性惡)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윤리적 합의르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 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맹자는 많이 협소해요. 그래서 우리의 허영에 불과한데도 선이라는 말은 더럽게 좋아해요. 악하면서.(웃음) 나는 바꿀 데가 많다고 자각하는 것이 맞는데, 다 선하대요, 선하기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테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328-329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孔孟)'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330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 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흔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354


노자의 이름이 노담(老聃)인데요. <장자> 내편에서 노담을 비판해요. 노담이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요. <장자> 맨 뒤에 <천하(天下)>편이 나오는데, 장자의 후학들이 제자백가 역사를 쓴 거예요. 그걸 보면 노자와 장자는 학풍이 달라요. 장자 후학들도 장자가 노자를 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장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니까요.  357


유가와 묵가 말고는 학파적 자의식이 없었어요. 나머지는 다 개별 사상가들이라고 보면 돼요. 후대에 도서관 분류했다너 사람, 한나라 때 사마천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학파로 묶어서 분류한 거죠.  358


<장자> 내편이 장자 본인이 쓴 쪽에 가깝고, 외편은 후학들이 썼다고 해요.  359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끔 그런 경우도 많이 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367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373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텍스트가 <고타 강령 비판>이에요. 저는 인문사회 쪽 사람들이 이걸 제대로 안 읽는 게 참 웃겨요. 왜 안 읽는 줄 아세요? 마르크스가 자기들 입장을 바로 공격하니까요. 좌우지간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개소리를 하는 거라는 내용이거든요. <고타 강령 비판>은 엥겔스가 'xx' 처릴르 많이 해요. 마르크스가 욕을 너무 많이 써서.(웃음) 엄청 흥분해서 썼거든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기껏 만들어놨더니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자기 이름 팔면서 나오니까 화가 난 거죠.  376


인단 남의 일엔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되다느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 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냐,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 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387


제3자들에 대한 애정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391


벤야민은 진보가 없다고 해요..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만든 게 아니라 노예들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피라미드 안에 노예가 잠들어 있지는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도 거기서 잠자지 않고요.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곳에 억압이 있어요. 노예도,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양상이 좀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진보한 게 아닌데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차이예요. 옛날에는 채찍으로 때려서 일을 시켰어요. 노예의 지상 목표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요. 사람들이 제 발로 와서 이을 하겠다고 해요. 자본이 없으면 못 살게끔 조건을 만든 거예요.  400


벤야민의 지적은 인문학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명심해야 해요. 채찍으로 안 때린다고 좋아진 게 아니라고요. 더 비참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탈출했잖아요. 노예들은 자살 안 해요. 탈출의 기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자살과 한 끗 차이라고요.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는 자살과 마찬가지예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 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제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웃음) 

어느 정도 소유가 늘어났다고 해서 진보했다고 믿는 거죠.(지승호)

그렇게 착각한다고요. 사람들은 허영이 있어서 '자발'에만 방점을 찍고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해요. 하지만 귀결은 '복종'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걸 이해시키기가 힘들어요. 자기의 불행을 덮고 안 보려고 해요. 안타깝죠.  401-402


사회민주주의는 분배를 하겠다는 건데, 분배를 하려면 자기가 소유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결국 소유 형식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분배자와 피분배자의 위계가 생겨요. 분배하는 사람이 필요해지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들먹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좌우지간 소유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사기끈들이라고 하거든요. 마르크스는 일체의 소유 관계를 없애자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원한 건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예요. 일체의 소유 형식을 없애자고 얘기했을 때는 국유까지도 포함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를 영속화하는 제도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말은 '내가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윤리적으로 분배를 잘한다'라는 거예요.  402


지금은 긴 안목으로 봐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6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느낌이 주는 강한 현재성이 있어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인간을 잡아요. 미래를 염려하면 사랑하기 힘들어요. 내 아이 하나 사랑하기도 힘들어요. 미래를 염려해서 생명보험, 상조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지금 아이랑 낚시를 가는 게 나아요. 살아 있을 때 재밌게 살아야죠. 권력은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결혼이 왜 문제냐면, 두 사람이 미래만 보는 거예요. 내 집 마련, 육아, 자녀 교육 등등. 둘아서 연애할 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커플 관계는 붕괴되는 거예요.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또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08


<철학vs철학>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더고가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을 인용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지승호)

애정 결핍이에요. 원리주의자는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거예요.  411-412


"인문정신을 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하셨는데요.(지승호)

둘 다 기독교 비판이에요.

그 뿌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지승호)

내재주의거든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인데, 범신론의 범(汎 넘칠 범)이 '모든'이란 뜻이에요. 모두가 신이라는 주의가 범신론인데, 그러면 나도 신이란 말이에요. 동학도 죽은 사람들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잖아요.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게 '나를 향해서 위패를 만들어라'라는 말이거든요. 동학 자체가 서학, 즉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스피노자랑 동학을 얘기한 것은 조금만 힘들면 절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엄마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말자는 거예요. 이게 미성숙이거든요. 미성숙을 극복하려면 엄마라는 존재,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 그런 면에서 동학이랑 스피노자는 비슷해요.

동양은 내재주의 전통이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유학에서는 내가 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잔항요. 불교는 다 부처가 되자는 거고요. 그 전통이 있기 때문에 동양 사유 전통만 잘 짜깁기하면 동학 경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동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립해 내재주의 전통을 강화한 거예요. 동학,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우린 이걸로 갈테니 서학은 나가라. 이런 게 동학이에요. 이처럼 동학에는 나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으니까 일제에 대항한 거예요. 동학농민전쟁이 그래서 일어난 거죠. 굽실거리는 정신이거나 어디 가대는 정신이었다면 그런 게 안 일어났을 거예요. 동학의 혁명성은 거기서 나오는 거죠.  416-417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맨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라고도 쓰셨는데요.(지승호)

벤야민은 파리에서 축제 때 벌어지는 여학생들의 매매춘을 본거예요. 그리고 직업적인 매춘부들이 생겼을 때 매춘부가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에요. 어떻게 되냐면, 돈을 안 받아요. '돈 주면 안돼'그러면서 울어요. 그러면 매춘을 못 하는 거죠. 그럴 때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거에요. 벤야민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찾아요. 마르크스의 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고, 신뢰는 신뢰노만 바뀌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도 돈 좀 있으면 만나고 실직하면 안 만나요.

마르크스는 그게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얘기해요.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와요. 젊은 마르크스의 그 정신을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마르크스도 쉬워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거예요.(웃음) 자본이 어쩌고, 잉여가치가 어쩌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목적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니까 혁명을 한 다음에도 관료주의 체제가 나오고 독재가 나오는 거예요. 자본은 없앴는데 공산당이 너무 강해서 사랑을 못 하게 해요.(웃음)  421-423


지금은 사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지승호)

애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지도 않았고요. 미숙하면 사랑 못해요. 그러면 자본에 포섭이 돼요. 자본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인간이 더 중요하잖아요. 돈이 있어서 뭐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문버 남녀가 막 사랑해야 해요. 그래서 강해져야 돼요. 그런데 경쟁하잖아요. 게임만 하고, 그래서 약해지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실연도 당하고, 그래야 강해지는 거예요.  424


사랑을 제대로 받아봐야 사랑할 줄도 알 텐데요.(지승호)

부모가 어린애라서 그래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웃음)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웃음)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에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에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424-425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가 없어요. 진보는 사랑이에요. 자기 기득권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고민해야 해요. 이 법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야 진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진보가 없는 거죠. 자기 기득권이 먼저면 진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것만 챙기는 진보가 어디 있어요?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얼마만큼 나가느냐에 따라서 진보를 얘기할 수 있어요. 자기 이녀모가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 쪽으로 보수화되는 거예요.  431


억압된 것의 회귀가 정신 분석학의 테마잖아요.  434

정신분석학의 근본 테마는 사회나 가족이 억압적이지 않으면 히스테리 같은 게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가정의 억압은 국가의 억압이 축소된 형태라고 얘기해요. 부모가 사회적 가치로 아이를 교육시키니까요.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을 쫓아다녀요.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중에 우파적인 사람이 융(Carl Jung)인데, 저는 융을 싫어하거든요. 원형 무의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미 원형적으로 억압돼 있어서 총알이 장전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인데요. 이건 완전히 성악설이죠. 사회의 억압 체제는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거라고요. 라이히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억압이 없어진다고 봐요. 독재자를 제거해야 하고, 자본주의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러시아혁명 같은 걸 막 쫓아다니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리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의 진짜 중요한 책이에요. 그 책은 좀 많이 읽어봐야 해요.   435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일단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인데, 진리라는 것도 소유의 관념이에요. 내가 진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만 봐도 권력은 소유에서 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소유의 논리고, 학점이나 스펙이라는 것도 사실상 소유의 등기부등본이죠.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는데 중간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거죠.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공동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의 흔적이에요. 그런 사랑의 흔적이 아주 사적인 연애로 응축해 있다는 것을 고민해봐야 해요. 옛날에는 사랑이 굉장히 넓었거든요. 내 가족이나 내 애인의 경계를 넘어갔다고요. <다중(Multitude)>이라는 책에서 네그리는 '왜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협소하게 부르주아 남녀 관계 속에 국한됐을까?'라고 물어요. 네그리가 꿈꾸는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더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못 해요. 집요한 이기주의죠. 그래서 공동체가 와해돼요. 사적 소유가 강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다 헛소리예요. 사적 소유가 있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면 아이가 자살하지 는 않아요. 우리는 노숙자도 많고, 하루에 마흔 명도 넘게 자살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관념은 있지만 그게 '상상의 공동체' 같은 거라서 실질적으로는 공동체가 아닌 거예요. 오늘의 자살자 43명에서는 빠졌지만 내일의 43명에는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그 안에 안 들어가려고 더 소유를 해야 돼요. 이게 악순환인 거예요. 그래서 갈 데까지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뼈저리게 느껴야 알 수 있는 거죠. 아니, 역사를 보면 뼈저리게 느껴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공황이 일어나도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잖아요. 현실을 리얼하고 속직하게 느끼기에는 관념이 너무 비대해요. 각인된 소유의 관념으로 강하게 무장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예요.  448-450


제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냉장고가 없으면 자본주의 거의 붕괴될걸요? 옛날에는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면 나눠줬어요. 안 먹고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썩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 개를 살려요.(웃음)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썩힌다고요. 저장에 대한 욕구죠.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 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고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우리에겐 소유욕이 있어요. 배고픈 데도 자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비범한 거예요. 성숙한 거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우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450-451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452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지승호)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458-459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잡기가 어렵잖아요.(지승호)

그게 니체가 한 말이잖아요. '괴물과 싸울 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459


요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매스컴은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적인 보도만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지승호)

한 개인의 범죄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거죠. 아이를 경쟁시키고,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런 문제들을 덮는 희생양 하나를 만든 것이거든요. 몸에 암이 있어서 겉으로 고름이 조금 나온 건데, 그걸 짜면서 더 가보자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한 명 또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우리 사회는 문제없다. 한 놈이 미친 거였어' 이렇게 보자는 거죠. '우리 구조는 깨끗해, 살 만해' 그러면서 또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우리 사회를 까뒤집어봐야 하는데, 막상 구조적인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곧바로 십자포화를 맞아요. '그러면 연쇄살인범이 죄가 없다는 거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는 그런 담론을 쓸 수 없는 만큼 남루하다고요. 제 말은 두 가지 차원을 같이 보자는 거예요. 일회적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도 봐야 하지만, 그런 희생양을 낳는 구조도 함께 봐야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여성 단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성 단체도 희생양을 찾으니까 '미친놈들이다' 이러면 편하죠. '미친놈들이 자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한다'라고 하면 편한 거죠. 그러니 끝내 이 자본이란 체제와 맞짱을 못 뜨지. 그게 여성 단체의 보수성이에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남성 우월성을 알아야 한다고요. 여성이 상품화되는 건데.  462-463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찾기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잖아요.(지승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짜 실감 나잖아요. 그건 가상이고 과장된 건데,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전쟁을 보면 사람들이 피해를 못 느껴요. 굉장히 심각한 거죠.  463


하이퍼리얼리티,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 들리고.(웃음)  465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서로를 못 보게 하는 것,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그걸 얘기하는 거죠...

드보르의 얘기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 지도자를 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거예요. 또 드보르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자본의 구조와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구조가 같다는 거예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은 사람은 이 책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데, 사실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비판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스펙터클일 뿐이다'라는 거예요. 

케네디(Jhon F. Kennedy)도 공격하죠. 미국에서 최초로 스펙터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케네디거든요. 정책은 허접했지만, 잘생기고 멋있는 대통령은 케네디가 처음이었죠. TV가 등장하면서 케네디가 이긴 거거든요. 상대편은 연설을 못 했지만 정책은 좋았어요.  468-469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때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Jacques Derrida)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Raoul Vaneigem)의 글을 벽면에다 옮겨 썼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은 자기들이 갖는다고.  471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200개가 넘는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툭툭 던지는 식이라 독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번역했던 분도 드보르를 감당 못 한거 같아요. 다행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사이트에 불어 원본이나 영역본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해가며 보면 돼요.  472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눈 감고 있잖아요. 애인 품에 안겼을 때 눈 감고 있고, 키스할 때 눈 감고 있어요. 이런 것이 사실 소중한 세계예요. 촉각의 세계죠. 시각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문학 작품 속에 많이 나와요. 소설가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시각이 거리 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든가 가슴 수술을 한다든가 지랄을 하지만, 그런 건 옆에 앉는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시각에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죽이고 있어요.  474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475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에요. 사랑의 방법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가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네그리가 얘기하는 '다중'이 기쁨의 연대인데, 스피노자저 ㄱ의미에서 대상을 가진 기쁨의 감정이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예요.  476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덜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478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지승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야 돼요.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 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권력이든 뭐든 누가 잘해줄 때는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해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 기관이에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재분배를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지도자 만나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세금 낸 건 잊어버려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깨알같이 도토리만 보고 있으니까 인문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줘야 해요.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아요. 다람쥐 여러분.'(웃음)

우선 사람들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인문학 저자들이나 시인처럼 당당함을 갖춘 사람들이 모일 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구조를 바꿔서 우리한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바꿔서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한비자도 국가권력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거리의 필부라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가 있겠느냐? 군주의 자리에 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야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군주, 성군에 빠지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의 위험성을 읽어야 해요. 노빠니 뭐니, 특정인을 지지하고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요.

요새 티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얘길 하거든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사실 제대로만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비겁하니까. 어떻게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각을 협소하게 가지려 해요. 민주주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데모하지 말라고 하면 데모 안 하고,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사인해줄 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480-482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기본 덕목은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도 애정을 워야 한다는 거예요. 반대로 나한테 칼을 찌른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공소시효가 없어야 해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도갲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떼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482


미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요.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용서는 '죽일 가치가 없다. 복수할 가치조차 없네' 이럴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화해하고 잘 지내자' 이런 건 아니고요.  483


자살의 종류도 다양해요. 대개 살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죽느데, 그건 문제가 있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나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경쟁 판에 뛰어든 것을 긍정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10ㄷㅇ 하는 아이들은 꼴찌 했다고 안 죽어요. 그 아이들은 대개 경쟁을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자기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등 오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놓죠.(웃음)

애초부터 가난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부자이거나 권력자였다가 몰락했을 경우 내가 진짜 패배자가 된 거예요. 그 경쟁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고, 내가 1등 한 모습을 내 자의식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난 1등이야' 그런데 꼴찌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만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좋은 대학 나왔을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카이스트 아이들의 자살이 이해가 안 되는거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들뢰즈의 자살은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 자살했다니까 생성의 철학자와 삶의 철학자가 자살했다고 의아해해요. 경험의 부재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죽은 상태로 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죠. 심지어 들뢰즈 연구자란 사람들도 그래요.  485-486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488


자기 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지승호)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489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 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494


인문학 책은 자기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 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예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496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497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예요.  507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513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지승호)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 아카데미 처음 시작할 때에는 6, 7명이 강의를 들었어요. 다른 선생들은 사람 수 적어서 쪽팔리다고 초기에 다 그만뒀는데 저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나중에는 수강생을 제한했어요. 30명밖에 못 들어오니까. 그 당시에 수강생 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아직도 수강행 수가 적어요. 애정의 문제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예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 건 제 얘기가 메아리 되어 돌어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선 안 되거든요. 자기 얘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518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지승호)

'나는 나다' 이것에서 뿜어져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지승호)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 있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526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 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긍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예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527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 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건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528


초고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쭉 정리해두셨다가 집중적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요. 시놉시스 같은 것을 만들어두고 작업하시나요?(지승호)

큰 틀이 있죠. 제가 단행본을 열입곱 권 썼잖아요. 이제는 어떤 걸 강의해도 이게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아요. 이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도 가늠이 되고요. 발악을 하고 중언부언해도 책이 안 나오는 것이 있고, 이건 양이 넘쳐서 세 권은 되겠다는 것도 있고. 그래서 강의안을 쓸때도 이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른 강의와 연결이 되는 건지 그런 감이 있죠.

저는 강연과 집필을 분리하면 안 돼요. 강연과 집필이 같이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강연 따로, 집필 따로 그렇게 분리 못 해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언제 강연을 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뭔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만약 제게 그런 감각이 없었으면 그렇게 많이 강연 다니면서 책으로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책이 좀 팔려서 강연을 안 해도 어껴서 살면 살 수 있거든요. 가끔 들어오는 인세로. 옛날에는 그게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예컨대 학술진흥재단 같은 데서 선정해서 국가가 돈 주는 일들, 그런 일들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거든요.

벤야민이 그렇게 글을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벤야민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요. 글들이 짧고 어떤 글들은 왜 이걸 가지고 썼을까 싶기도 한데, 잡지에서 써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거기에도 벤야민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벤야민은 그걸 쓸 때도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엮일까를 고려하면서 썼거든요. 단행본 말고 벤야민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것들을 모아 전집을 ㅁㄴ들어도 일관적이에요. 점묘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벤야민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저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단행본 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끄집어내시는 거네요.(지승호)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 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 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잔하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열일곱 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예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열일곱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가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웃음)

그런 감각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ㅁ낳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드맂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세 권은 써봐야 그 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나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다섯 권 정도 내고 나면 여섯 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누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540-542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리모가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 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도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 써요.  543


책 읽는 것은 다 우연이에요. 서점에서 대충 얻어걸려서 읽거나 누가 선물해줘서 읽거나, 그게 묘미죠. 결정돼 있지 않아요.  547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 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549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라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지승호)

해야 할 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검열이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해야 돼요. 기준은 그거예요. 그래야 검열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일종의 모험 같은 것들이 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거니까.  565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도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다로디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한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클래식을 듣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안 맞춰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클래식 티켓도 선물해주고 같이 공연장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연장 가서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 꼬받 두 시간을 견뎌야 해요. 거기 가서 졸면 돈 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브람스를 계속 들으면서 연습하고 공연장에 간다고요. 그러면 훨씬 좋으니까. 그러면서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고, 그 남자랑 헤어지더라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져. 그러면 사랑 안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웃음) 100%예요. 사실 그게 만만치가 않아요. 사실 조금만 잘못돼도 '하지 말걸'이렇게 돈다고요. 그래도 그걸 한 번 내질러보고 직접 겪어보는 거죠. 그게 나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거예요. 대개 번지점프 싫어하고 고소공포증 얘기하는 친구들 보면 한 번도 번지점프를안 해본 애들이에요. 하지만 번지점프를 열 번은 해봐야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열 번을 했다가 번지점프에 환장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는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고요.

예전에 위악(爲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잇어요.(<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의 앞부분을 보면 이상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옙스키에 갇혔잖아요.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철해"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검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힘들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니체 얘기가 맞아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사람들이 진짜로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합. 전라도 음식이잖아요. 그거 처음 먹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배가 먹기 진짜 힘들 거라고, 속이 터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딱 열 점마 ㄴ먹어보래요. 그래서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후에 다시 삼합을 먹었는데 그때는 입에서 그냥 굴러다녀요.(웃음) 전에는 몰랐던 거죠. 그런 혐오감 같은 것들을 한 번 넘어가 보는 것, 그게 위악이에요.

이상의 제스처를 좀 배워야 해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보고, 무서운 번지점프지만 웃으면서 뛰어내려보고, 불쾌하고 싫은 건데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쨋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요.  566-569


여행 많이 다니고, 만힝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 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570


위대한 문인들 보면 기인이 많잖아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발악이에요. 위악의 행동을 하니 기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겁 안 내고 위악적인 행동, 기괴한 행동을 해요. 문인이라고 하면 사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회사원이면 엄두도 못 낼 짓들을 하는 거죠.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서 소변을 본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는 자기가 세종보다 높다고 우기고 나중에 보니 시인이야. 그러면 풀어줘요.(웃음)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했잖아요. 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판단했을 때 이건 해서는 안 돼, 이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많이 해 봐야 해요. 누굴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판단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악인 것 같다 싶으면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웃음) 진짜 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처절하게 배우는 거죠. 그렇게 인격적인 동일성을 갖춰야 돼요.  571


맨 얼굴로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예요. 그런데 우리는 권력자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잖아요. 억압 사회예요.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게 억압의 척도예요.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광대 얼굴을 해야 할 때와 내 감정을 토로해야 할 때가에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회예요. '에이, 저게 뭔데' 하고 대통령한테 지랄해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 이게 건강한 사회거든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면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커플들, 부부들 보면 알아요. 저 인간들은 둘 다 평생 무장하고 사는구나.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려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574-575


인문, 사회 과학을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577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은 친해지고 사랑하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하는데요. 눈에 약간 무당기가 있어요. 친한 사람한테 그 눈빛이 나와요. 진짜 투사 하듯이 얘기를 하고, 눈으로 압박해 들어오면 정직할 수밖에 없어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저도 강한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랑 눈에 부딪치면 정말 재밌어요. 대개는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가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맨얼굴을 던지면 그 사람도 맨얼굴이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 그렇게 해줘요. 편하죠. 거꾸로 되면 안 되죠. 내가 맨얼굴 하고 있는데 상대는 가면 쓰고 있고, 내가 가면 썼는데 상대는 맨얼굴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죠.

서로 맨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세밀한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거죠. 행복하고.  581-582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582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583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焚書)>의 <동심설(童心說)>에 나오는 구절을 책에 인용하셨는데요. 도심이란 어떤 건가요?(지승호)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그게 아니라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비겁했거든요. 진짜 비겁했어요.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뭐 하나 발각되면 그걸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망가지잖아요.(지승호)

저 같은 경우는, 예컨대 누가 제가 모르는 시집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시에 대해서 책을 썼으니까 안다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안 읽어봤는데요' 혹은 '몰라요. 저는 읽고 싶은 시만 읽어요. 그 시집은 재밌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처음에 바로바로 다 정리해요. 쓸데없이 가리려고 하면 안 돼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햇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가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을 벗으면 가면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라밍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패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도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웃음)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584-587


일단 제가 기본적으로 할 말이 많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588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589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자기들이 압받당하면 비겁하게 '선생님은 행복해요?'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가 화날 때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내가 불행하다면 너희들은 내가 한 얘기를 안 지킬 거냐? 옳은 것은 옳은 거다. 선생이 못 했다고 해서 옳은 것이 그런 게 되지는 않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런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예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자유로운 사람나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590-591




에필로그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593


위대한 잡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이렇게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595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96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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