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한 우회로, 이현우(로쟈)

자신의 주저를 몇 권 꼽아놓은 적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외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그리고 <시차적 관점>까지 네 권의 책이 그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

지젝은 이러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곸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 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나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8-9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이 열쇠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가령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9-10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원적 경합을 허용하며 그것에 의해서 유지되는 체제이지만,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라고 그는 주장하며,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는 정반대라고 선을 긋는다.  12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 볼시 어긋날차)에 대한 고려라고 본다. 예컨대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12-13


지젝은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아무리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자체는 제거할 수 없다.  14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인데, 지젝은 영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즉 여기서 '신적 폭력 = 비인간적 폭력 =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등가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이다.  15


그가 도출해내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되'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진정한 혁명적 과정은 두 가지 계기를 구성소로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지젝은 그것을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이 요점이다.  16


지젝은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주장한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교훈 말이다. 그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 거기에 있다.  17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가 농감의 배경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단 말이야!"  ...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17-18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 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 ..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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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의 전체적인 ..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20





서문 


폭력이라고 하면 우리는 즉각,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subjective)'폭력, 즉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폭력의 분출이 대체로 어떤 배경 속에서 발생하는 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

주관적 폭력은 세 가지 폭력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 가지 폭력 중 나머지 둘은 객관적(objective)폭력인데, 그 첫 번째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 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symbilic)'폭력이다. ..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으며,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다. 

두 번째로, 내가 '구조적systemic)'폭력이라 부르고자 하는 폭력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 우리의 경제 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바로 이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폭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23-24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좌파 담론에 만연하는 가짜 급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령 이들의 담론에서 여성, 흑인, 노숙자, 동성애자 등이 당하는 폭력의 장면을 거론할 때에는, 대개 추상적 개념과 사실적인 (거짓)구체성이 공존한다. "이 나라에서는 6초마다 한 여성이 강간당합니다"라는 진술과 "당신이 이 문단을 읽는 동안, 열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경고는 그저 두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도덕적으로 분개하고 있다는 위선적 감정이 깔려 있다. 스타벅스는 바로 몇 년 전에 이런 종류의 거짓 급박감을 써먹은 것이다. 매장 입구에 스타벅스 체인의 이윤 거의 절반이 커피 원산지인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시설로 간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여 놓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한 어린이의 생명을 살리게 된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풍겼던 것이다.

이런 긴급 지령들에는 근본적으로 반(反 되돌릴반)이론주의적 강렬함이 있다. "생각에 잠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이런 거짓 급박감을 통해, 탈산업화 시대의 부자들은 그들끼리 격리된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자기 세계 외부의 혹독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줄곧 적극적으로 떠들어댄다. ..

"그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요? 그냥 손 놓고 기다리라고요?"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 

"예, 바로 그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현실참여는 모든 방향에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듯하다.  29-31 





1. SOS폭력


1922년 소비에트 정부는 철학자와 신학자에서 경제학자와 역사학자 등 주요 반공산주의 지식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

니콜라이 로스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하인과 유모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상층 부르주아지의 안락한 삶을 누려왔다. ...

구조적 폭력 ..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주관적인 악행은 잔혀 없었다. 다만 이런 구조적 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있었을 뿐이다.  35-37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다른 형태들의 폭력을 시야에서 지우고, 따라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문제의 진정한 중심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37


어느 남편이 일터에서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가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깜짝 놀란 아내는 소리쳤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맞받아쳤다. "딴 놈이랑 누워서 뭐하고 있는 짓이야?" 아내는 태연히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먼저 질문했잖아. 주제를 바꾸면서 내 질문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마!" 이런 농담은 폭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제는 바로 '주제를 바꾸는 것', 폭력을 멈추자는 필사적인 인도주의적 SOS 외침에서 벗어나, 다른 SOS에 대한 분석, 즉 주관적 객관적, 상징적이라는 세 가지 방식의 폭력이 복잡하게 벌이는 상호 작요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8


객관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철저히 역사회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순환을 광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39


자본은 자신의 운동이 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로지 수익성이라는 목표만을 추구한다.  39


라캉이 말하는 현실과 실재의 차이를 볼 수 있다. '현실(reality)'은 부단한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을 행하는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을 말하며, 실재(the Real)'는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과 같은 자본의 논리이다. 생활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나라를 방문하면 누구든 이런 격차를 분명하게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눈에는 파괴된 환경과 비참한 인간들로 가득찬 광경이 들어온다. 그러나 이후에 경제학자가 쓴 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나라의 경제적 상황은 '재정적으로 견실하다'고 알려 준다. 현실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인 셈이다...  40


16세기 멕시코의 비극에서 한 세기 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로 죽어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주의를 돌릴 때면 이에 대한 책임은 대부분 부인된다. 그 모든 일은 그저 '객관적인' 과정의 결과물로서 일어났을 뿐이며, 누구도 계획하고 실행한 적이 없었고, '자본주의 선언' 같은 것도 없다.(그나마 '자본주의 선언'에 가장 근접한 걸 쓴 인물은 아인 랜드(Ayn Rand)이다.) 콩고 대학살의 주범인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대단한 인도주의자였으며 교황에 의해 성인칭호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는 이런 노력에서 얻은 이윤 대부분이 벨기에 국민들의 복지, 공공사업, 박물관 등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레오폴드 왕은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들의 선구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41-42


올리비에 말뉘(Olivier Malnuit)는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십계명을 꼽은 바 있다.

1. 모든 것을 공짜로 줘버려라(저작권이 없는 자유로운 접근...). 단, 부가서비스에만 요금을 받으라. 그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2. 물건만 팔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라. 세계혁명과 사회의 변화를 통해 물건의 품질도 나아질 것이다.

3. 나눔에 신경 쓰고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라.

4. 창조적이 되어라. 디자인과 신기술, 그리고 과학에 초점을 맞추라.

5. 모든 것을 말하라, 비밀이란 없어야 한다. 일처리의 투명함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지하고 실천하라. 전 인류가 협력하고 소통해야 한다. 

6. 정시 출퇴근하는 직업을 갖지 말고, 노동하지 말라. 다만 스마트하고, 역동적이고, 유연한 즉석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라. 

7. 학교로 돌아가 평생교육에 참여하라.

8. 효소처럼 행동하라. 시장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하라.

9. 가난하게 죽으라. 결코 다 쓰지 못할 만큼 가졌으니 재산을 필요한 자들에게 환원하라.

10. 국가가 되라. 기업과 국가의 협력 관계를 맺으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이다. ..

실제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주의의 위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들의 가장 선한 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니까!  46-47


몇몇 거대 다국적 기업이 자사의 남아공 지점에서 모든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하고 흑인과 백인에게 동일 직업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는 등 인종차별 법규를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결정이 직접적인 정치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사례 아닌가? 그 회사들은 이제 인종차별정책이 사라진 남아공에서 번창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47-48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세계 시민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걱정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퓰리즘적 근본주의와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기업들에 대해 걱정한다. ..

그들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 과정의 부산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건 사실이지만, 누가 그걸 불평하겠는가!  48


속지 말아야 할 점은, 기부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49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는 사병(私兵 사사로울사 군사병)을 고용해 자신의 철강소에서 노동자 단결을 잔혹하게 억누르면서도, 많은 재산을 교육, 예술,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내놓았다. 철강왕으로 알려진 그는 마음만은 황금으로 되어 있음을 입증해 보인 셈이다. 같은 식으로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한 손으로 일단 벌어들였던 것을 다른 한 손으로 내놓는다.  50-51


빌 게이츠..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윤리로는, 자선을 베풀면 무자비한 이윤 추구 행위도 상쇄된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52


진심이든 위선이든 자선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논리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진정으로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부를 나눠준다는 일종의 재분배를 통해 균형을 재확립하며, 치명적인 덫을 피해간다.  53-54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8-59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末人 끝말 사람인, the Last Man),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59-61


알랭 바디우는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의 세계(Monde atone)라는 개념을 전개한다. 이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 라캉은 우연적인 표상체계를 단일한 의미의 체계로 만들어낼 수 있는 특권적인 중심기표를 주인기표라 부른다)의 개입이 결여된 까닭에 다양성을 가진 혼란스러운 현실에 어떤 의미 있는 질서도 부여하지 못하는 세상을 뜻한다.  67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근본적 특성은 명령(order)을 내리는 주인기표의 이런 작용을 없애려 든다는 점이다. 세계의 복잡성은 무조건적으로 확고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 복잡성에 어떤 질서(order)를 부과하려 드는 주인기표는 모두 해체되고 흩어져야 하는 것이다. "근대는 세계의 '복잡성'을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는데, 그것은 정말 무조(無調 없을무 고를조)에 대한 욕마을 일반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68 


주관적 폭력과 싸우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구조적 폭력의 행위자가 되는데, 이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주관적 폭력을 낳는 원인이다. 관용의 정신으로 에이즈 치료나 교육에 수백만 달러를 내놓는 자선가는 그 자신이 금융 투기로 수많은 이의 삶을 파괴했던 장본인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타파하고자 하는 불관용 그 자체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

환상은 금물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 중 부차적인 것만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체제 자체의 잘못된 점을 직접 구현하는 화신이다. 인종주의, 성차별, 종교적 반계몽주의 등과 싸우느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타협해야 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새겨야 한다.

그렇다면, 으리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사람이고 세계의 빈곤과 폭력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이런 걱정을 할 만한 능력도 되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

또 그는 빈곤과 싸워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건 그가 그 신념을 바타응로 돈을 벌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70-71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선한 자에 대한 심문]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71-72





2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오늘날은 탈정치적 생명정치(post-political bio-politics)라는 정치 형태가 지배하고 있다. 

'탈정치'란 낡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벗어나, 대신 전문적인 운영과 관리에 초점을 맞춘다고 주장하는 정치이다. 그리고 '생명정치'란 인간 생활의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 두 영역이 어떻게 겹쳐지는가는 자명하다. ..

탈정치화되고, 사회적으로 객관적이 관리와 이해 조정을 정치의 기본적 차원으로 삼게 된 이상,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적극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생명정치란 궁극적으로 공포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부당하게 희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혹은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막아내는 것을 중요시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공리를 기초로 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인 부분을 포기해버리는 정치 사이의 차이다. 왜냐하면 후자의 정치는 다음과 같은 온갖 원리들을 동원하면서 공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 범죄에 대한 공포, 성적인 타락에 대한 공포, 많은 세금을 물릴지도 모른다는, 지나치게 개입하는 국가 자체에 대한 공포, 생태적 파국에 대한 공포, 괴롭힘에 대한 공포 등이다... 이러한 (탈)정치는 언제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우중(ochlos) 혹은 다중(multitude)을 조종하는 수법에 의존한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무섭게 몰아대는 것이다.  73-74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점차 괴롭힘 당하지 않을 권리가 중요한 인권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타인과 안전 거리르 유지할 권리이다.

게다가 탈정치적 생명정치에는 두 가지 측면.. 하나는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환원해 버린다는 면이다. 이른바 신성한 존재라고 불리는 호모 사케르란, 전문지식에 기초하여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관타나모의 죄수들이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처럼 모든 권리가 배제된 이들을 일컫는다. 이와 같은 극단화는 자신이 취약한 존재이며, 항상 다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식으로 경험하는 자기애적 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75


우리는 모두, 지각의 착각(perceptual illusion)과 비슷한 일종의 윤리적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76-77


똑같은 사람이 어떻게 적들을 향해서는 끔찍한 폭력 행위를 저지르면서 자기 집단에 속한 이들에게는 따뜻한 인간애와 친절을 베풀 수 있는가,...

자신의 윤리적 고려의 범위를 모든 곳에 적용하는 이들은 깊은 모순, 심지어 '위선'에까지 빠진다. 하버마스의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그들은 화용적 모순(pragmatic contradiction)에 휘말린다. 자기 자신이 속한 언어 집단을 지탱하는 윤리적 규범들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내부에 속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기초적인 윤리적 권리를 그 외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3


기독교 윤리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기독교도들은 늘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전 인류를 포용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신과의 직접연결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選民 가릴선 백성민)이라 여기면서, 사신(邪神 간사할사 귀신신)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도 인간이기는 하다고 인정한다. 반면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의 편향적 태도는 비기독교도를 인류의 보편성 그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다.  91-92


프로이트와 라캉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본성적으로 문제적인 데가 있다고 주장한다.  ..

이웃이 가진 비인간적 특징으로 인해 이웃은 보편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93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만약 당신이 타인의 꿈속에 갇힌다면, 끝장이다!"인 셈이다.  94


정중함이라는 방어벽의 붕괴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들이 충돌할 때이다.  96



* 주이상스(Jouissance).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96



오래 전 프로이트가 이미 간파한 바와 같이, 이웃이란 본래 하나의 사물이고, 충격을 안겨주는 침입자이며, 우리와 다른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웃은 저 나름의 사회적 관습과 의식에 따라 구체화된, 주이상스를 추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자이고, 우리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이 너무 가까워질 경우 우리는 이 거슬리는 침입자를 없애기 위해 공격적인 반응을 하게 될 수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새로운 '재량 규범'을 도입함으로써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8


뮐레르는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완전히 거부해 버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폭력을 정의할 때 필수적인 것은 '좋은'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폭력과 '나쁜' 폭력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폭력이라는 단어의 고유한 용법을 잃고 혼란에 빠져든다. 무엇보다도, '좋은' 폭력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기준을 만들어내는 순간, 우리는 모두 그 기준을 매우 손쉽게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투쟁과 공격이 삶의 일부인데 어떻게 폭력을 완전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쉬운 해결책은 '공격(aggression)과 '폭력'은 '죽음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공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격이 과도해져 점점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면서 사태의 정상적 흐름을 교란시키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과도함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102


처음에,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곧 한계를 넘어 남들을 지배하려 들게 될 것이다... 시몬 베유는 "한계가 분명한 욕망은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만, 무한한 욕망은 그렇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103





3 '피로 물든 조수가 범람하다'


2005년 가을,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천 대의 차가 불타고 대규모 군중 폭력이 발생했다. 흔히 2005년 8월 2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치고 간 뒤에 발발한 약탈과 1968년 5월 파리의 68혁명을 이 사건과 비교하곤 한다.  115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세계 없음(Worldless)'의 공간(space)으로 경험된다고 했다. 이런 공간에서, '의미없는' 폭력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있을 수는 없다.  122



* 세계없음(Worlsless). 우리가 예전에는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세계(world)'에 살고 있었는데, 유토피아적 전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이곳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단순한 장소(place)에 불과하다는, 바디우의 독특한 조어.  122



자본주의는 전지구적이며 전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없는' 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유지시키며,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릴 기회가 박탈된 상태로 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는 역사상 최초로 의미를 와해시키는(detotalised meaning) 사회경제 질서다.  123



* 대학담론(university discourse). 라캉에 따르면 의미활동이 시작되는 담론의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담롬의 성격이 달라진다. 라캉은 이를 주인담론, 대학담론, 히스테리담론, 분석가담론 등 4가지로 도식화했는데, 대학담론은 탄탄한 지식체계로 무장한 교수들의 '지적' 담론을 순진한 학생들이 전수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25



이기주의(Egotism), 즉 자신의 안녕에 대한 관심은 공익 대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기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이타적인 규범을 도출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대 보편적 규범에 대한 고집이라는 이항대립은 그릇된 것이다. 두 대립항이 결과적으로는 결국 같아지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비평가들은 완전히 요점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이기주의적이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反 되돌린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죽음 충동은 현실원칙만큼이나 쾌락원칙과도 대립한다.(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칙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틱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했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악, 즉 죽음 충동은 자기파괴를 수반한다. 죽음충동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반(反 되돌리반)하여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캉이 설명했듯, 인간의 욕망이 가진 문제점은 그것이 언제나 '타자의 욕망' 이라는 데 있다. 이때 '타자의 욕망' 이란 타자를 향한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특히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바로 이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질시가 발생하며, 부러움이라는 감정 속에는 원한의 감정도 들어 있는데, 이는 인간 욕망을 이루는 근본 요소들이다.  131-132


*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프로이트는 모든 본능적 충동이 쾌락을 추구하고 쾌락원틱을 따른다고 봤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아가 그렇게만 행동하면 정상적 인간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현실원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쾌락을 포기햇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 모종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쾌락은 현실적으로 양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132


부러움/원한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단지 내가 이기면 다른 사람은 지게 되는 제로섬 게임의 원칙을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러움/원한에는 양자 간에 격차가 있다는 점이 함축돼 있는데, 이 격차는 긍정적인 것(아무도 지는 일 없이 모두가 이길 수도 있다)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이다. 내가 얻느냐 내 적이 잃느냐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내 적이 잃는 편을 택한다. 심지어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말이다. 마치 내 적의 손해에서 오는 나의 결과적인 이득이 내 승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병적인 요소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평등이 비인격적이고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발생한다면, 그 불평등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쉽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내에서 시장은 '비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성공과 실패 역시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게 시장의 장점이다. 내 성공이나 실패를 '내 책임이 아닌 것',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시장에 대한 오래된 모티프가 '예측 불가능한 운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이 점을 감안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견딜 수 있다는 얘기다.  133-134


루소는 이기주의를 자기애(amour-de-soi)와 자존심(amour-propre)으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도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가 강한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한다.

'이 원초적 정념, 즉 자기애(amour-de-soi)는 그 본질이 사랑스럽고 다정다감한 것이다. 이는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생각하며, 또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관련되는 것들만 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대하는 것이 목표물에서 장애물로 바뀌게 되면 그들은 대상에 닿고자 하는 노력보다 그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온 마음이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그들의 본성은 바뀌어 성마르고 증오에 차게 된다.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인 자기애가 자존심(amour-propre)으로 바뀌게 되는건 이런 식이다. 여기서 자존심이란 남과 비교를 위해 동원되는 상대적인 감정이고, 편애를 요구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향유한다는 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의 행복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불행에서 만족을 찾게 된다.'

따라서 악한 사람은 이기주의자(egoist)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자기 이익에 신경 쓰기도 너무 바빠서 남들에게 불행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136-137


널리 알려진 인류학적 일화에 따르면, 우리는 '미개인'들이 모종의 미신적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예를 들어 그들이 물고기나 새 등의 후손이라는 믿음), 이런 믿음에 대해 직접 물어 보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안 믿죠, 우린 바보가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조상 중에는 정말 그 얘기를 믿었던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가령 우리는 매년 산타클로스 행사를 여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믿을 것 같다고 여기고, 따라서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천진난만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그리고 물론, 선물을 받으려고)산타클로스를 믿는 척한다. 또 이는 모종의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이 정직한 척 하면서 말하는 흔해빠진 변명과 뭐가 다른가? "저는 그 사실을(혹은 저를) 믿는 평범한 사람들을 실망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143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서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왜곡해서도 안 되며, 혹은 사실을 묵살해서도 안 된다. 요점은 어떤 높은 차원의 정치적 진리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시실을 왜곡 혹은 묵살하라는게 아니다. 주관적 입장을 바꾸어 실제 사실을 말하는 행동에 발화 행위의 주관적 입장에서 나오는 거짓말을 포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이 가진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7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명했다. 이 장벽의 이미지, 전기 시설로 빈틈없이 무장한 복잡한 구조물의 이미지는 베를린 장벽과 섬뜩하리만치 닮았다. 다만 그 기능이 정반대일 뿐이다. 이 벽의 목적은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는게 아니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분리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151





4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


2006년 가을,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무슬림 성직자, 셰이크 타즈 딘 알-힐랄리의 발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격분했다. 무슬림 남성들이 집단 강간을 저질렀다가 수감된 사건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만일 고기를 포장도 하지 않고 길거리에 내놓았다가..고양이들이 그 고기를 먹었다면.. 누구의 잘못인가, 고양이들인가 고기인가? 포장되지 않은 고기가 문제다." 베일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포장하지 않은 날고기에 비유한 자체가 엄청나게 도발적인 것이었기에, 알-힐랄리의 주장에 훨씬 더 놀라운 전제가 숨어 있었음에도, 이 전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의 성적 행위는 여성의 책임인데, 그렇다면 성적 유혹이라 인식하는 것을 잡했을 때 남성들은 완전히 무력하고, 그 유혹에 전혀 저항할 수 없으며, 날고기를 본 한마리 고양이와 똑같이 완전히 성적 욕구의 노예가 된다는 말인가? 남성은 자기 자신의 성적 행동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는 이런 태도와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는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대놓고 강조하는데, 이는 남성이 성욕을 자제할 수 있으며, 성적 충동의 맹목적인 노예가 아니라는 전제에 기초한다.  155-156


홀로코스트는 비판이 금기시되는 성역이 아닌가?  157


어떤 때에는 범죄를 직접 인정하는 것이 그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법률만능주의적 위선..  158


칸트의 논의 속에서 이성개념을 부정적인 용법으로 사용할때는 예지계적 대상(poumenal objects)에 한정되며, 우리 또한 이성 개념을 부정어법으로만 사용해야만 한다.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다. 이는 반드시 부정어법으로만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끌어들임으로써 어떤 정치적 수단을 정당화/합법화하고자 하면 안 된다. 반대로 그것은 오직 그 정치적 수단을 비합법화하기 위한, 즉 우리의 정치적 행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홀로코스트와 같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오만한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163


법을 위반하는 강도짓과 법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도짓은 뭐가 다르냐는 말이다. 이 교훈을 살짝 변형시키면 이렇게 된다. 즉, 국가권력이 벌이는 대테러 전쟁에 비하면 테러 행위는 뭐가 대수인가?  168-170


우리는 불관용에 대해 얼마나 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  184


이브 르 브르통은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서 어느 늙은 여인을 만났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여인은 오른손에는 불이 담긴 그릇을, 왼손에는 물이 담긴 사발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묻자, 여인은 불로는 천국을 불살라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하고, 물로는 지옥의 불을 모조리 끌 거라 대답했다. 여인은 이어서 말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상을 받기 위해, 혹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공포 때문에 선행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선행을 베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하느님도 지워 버리고 그냥 선행 그 자체를 위해 선행을 하면 안 될까? 온전히 기독교적인 이 윤리적 자세가 오늘날 대부분 무신론에만 남아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196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의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타자를 어린애 대하듯 다루며 그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상처주지 않는 편을 택하는 태도이거나, '진리 체계들' 이 복수로 존재한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진리를 명백하게 주장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적인 강요라고 깎아내리는 태도이거나, 이렇게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이슬람을 존중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엄격한 태도로 비판적 분석을 해보면 어떨까?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무슬림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들을 자기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진지한 성인들로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198






5 관용은 이데올로기다


진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아미시 청소년들은 모든 선택사항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그런 선택사항들 속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205


'관용적인' 서구의 다문화주의적 관점 속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는 이들이 속한 특정한 생활세계에서 찢겨지고 그 뿌리에서 절단되는 극심한 폭력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207


나아가 타자의 문화를 두고 관용의 태도가 결여돼 있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둥 치부해버리는 태도의 대척점에는 타자의 문화가 가진 우수성을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리는 태도가 있다. 가령 인도에 주둔하던 영국 식민 관리들 중 인도의 심오한 영성을 찬양하던 이가 얼마나 많았던가. 서구에서는 합리성과 물질적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며 말이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타자가, 남을 지배하기보다는 조화를 추구하고, 유기적 존재이고자 하며, 덜 경쟁적이고 또 협력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찬양하는 것도 서구 자유주의가 가진 진부한 주제의 목록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서구의 자유주의가 타자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억압을 못 본 체 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심지어는 선택의 자유를 도착적인 방식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가령 과부를 불태워 죽이는 짓을 한다 해도, 그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 눈에 비참하고 불쾌해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209


전체주의 체제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모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극도로 엄격한 법적 규제(형법)를 부과하는 수법이다. 다만 그 엄격한 법을 완전히 집행하지는 않는다. 이런 전략을 통해 체제는 자비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겠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 전부를 체포해 유죄 판결을 내리는 건 일도 아냐. 하지만 무서워 하지마, 우린 관대하니까.." 이와 동시에 체제는 계속적인 위협으로 기강을 잡으며 체제에 종속된 이들을 길들인다. "너무 기어오르면 안 좋아. 잊지 마, 우리는 언제라도 너희들을.."  222


전체주의 체제는 법의 위반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틀 속의 사회적 삶에서는 법을 위반하고, 뇌물을 주고, 부정한 짓을 하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223


만일 내가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승진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 처했다가 내가 이긴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친구가 승진할 수 있도록 내가 물러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모두 우정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상징적 교환, 즉 '거절이 기대되는 제스처'이다. 상징적 교환의 불가사의한 마력은, 결과적으로 양자가 모두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과 똑같은 지점에 있지만, 그들이 맺은 단결하자는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양자 모두 분명히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데 있다. 사과를 주고받는 과정 역시 유사한 논리를 따른다. 만일 무례한 말로 누군가를 불쾌하게 했다면 내가 취해야 할 합당한 행동은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고, 한편 그는 "고맙네, 하지만 난 기분 상하지 않았어. 자네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전혀 사과할 필요 없다네!" 정도의 말로 답하는 것이 도리다. 물론 여기서 요점은, 결국에는 사과할 필요 없다는 결말이 났지만, 그에 앞서 먼저 사과의 말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은 오직 내가 사과를 한 이후에만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 아닌 상황이고 사과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과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만 얻는 것이 생기고, 우정도 깨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거절해야 하는 제안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내가 친구와의 승진 경쟁에서 진 뒤에 자기 대신 그 지위에 올라가라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이는 그야말로 파국적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사회질서의 중핵을 이루는 형식적 자유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실체 그 자체의 붕괴, 사회적 유대의 해체나 다름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로베스피에르에서 존 브라운에 이르는 혁명적 평등주의자들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습관을 무시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규칙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습관 덕분인데, 말하자면 이들은 습관에 대한 고려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225-226


19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지 오웨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져야 한다는 바람은 필요하지만, 그럴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그런 바람은 전혀 효력이 없다. 우리가 여기서 맞닥뜨려야 하는 사실은 계급 구분을 철폐한다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의 일부를 없앤다는 의미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중간계급의 일원으로서의 '나'가 있다고 치자. 내가 '계급 구분을 없애고 싶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화고 말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계급 구분 덕분에 형성된 결과물이다. (..)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뒤바꾸어, 결국에는 이전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29-230


오웰은 이데올로기적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 태도는 우리가 진심으로 믿고 있지만 조롱하는 척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개이 '지식인'들이 내놓는 좌파적 의견은 대부분 거짓이다. 그는 조롱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믿고 있으며, 단지 조롱하는 척만 할 뿐이다. 여러 가지 예가 있지만 하나만 꼽아 보자면, 명문 사립학교에서 강조하는 명예에 대한 예법. '단체 정신', '쓰러진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등등의 헛소리를 들 수 있다. 이런 예법을 비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라면 그 누가 이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외부에서 이를 비웃는 이를 만난다면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마치 우리가 일상 속에서는 늘 우리 잉글랜드를 욕하지만, 외국인이 똑같은 욕을 하면 크게 분개하는 것과 같다. (..) 당신과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야, 당신은 당신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게 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웰이 전제하는 이 진정한 미데올로기적 정체성에는 '내면적인' 면이라곤 전혀 없다. 내면 깊숙한 믿음은 전적으로 '외부에'있으며, 내 몸이라는 육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관습 속에 체현돼 있다.  231


아랍 문명과 미국 문명의 충돌은 야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익명으로 행해지는 잔혹한 고문과 미디어의 구경거리가 된 고문, 피해자의 육체가 고문의 가해자인 '무고한 미국인' 의 미소 짓는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무명의 재경 역할을 고문 사이의 충돌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문명의 충돌은 모두 그 밑에 잠재한 야만끼리의 충돌인 듯하다.  244






6 신적 폭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 탐정 아보가스트가 계단에서 살해당하는 장면은 '신의 시점에서 바라본' 히치콕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1층 복도와 계단에서 이루어지는 전체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다. 한 인물이 괴성을 지르며 화면 속으로 들어와 아보가스트를 난도질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인물의 주관적 시점으로 이동한다. 계단으로 추락하는 아보가스트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마치 객관적 장면에서 주관적 장면으로의 이동을 통해서, 신 자신이 중립적 위치를 버리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난폭하게 개입하면서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인다. '신적 폭력'은 이와 같은 난폭한 개입처럼 법을 넘어선 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245


진정한 원한과 처벌(복수), 용서, 그리고 망각이라는 3항조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일반적 대응방식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우리가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정당한 복수(처벌)라는 유대교적 원칙('눈에는 눈' 이라는 원칙)이 "우리는 당신의 범죄는 용서하겠지만 그것을 잊지는 않겠다"라는 일반적인 정식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 혹은 정당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진 후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으며 과거의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범죄를 합당하게 처벌하는 일에는 뭔가 해방적인 요소가 있다. 나는 사회에 빚을 갚고 다시 자유로워지며, 과거는 더 이상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자비'의 논리는 반대로 훨씬 더 억압적이다. (용서받은 범죄자로서) 나는 영원히 내가 저지른 범죄이ㅔ 시달림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 범죄는 '무효화' 되지 않았고, 소급해서 취소되지 않았으며, 지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이 헤겔이 말하는 처벌의 의미인데 말이다.  262


벤야민의 <폭력비판에 대하여> 마지막 몇 문단.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인 폭력이 맞선다. 그리고 신적인 폭력은 모든 면에서 신화적 폭력과 반대다. 신화적 폭력이 법 제정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하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하는 폭력이라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 왜냐하면 피는 단순한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법적 폭력이 소멸된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체에 불과한 자들이 지은 죄에서 생겨난 것이다. 결백하고 불행한 생명체였던 이 자연적 생명체는 단지 죄지은 생명체로서 '속죄'해야 하는 징벌을 받은 존재다. 그리고 이 때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이 죄 자체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사면해준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법의 지배는 단순한 생명체에서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적 폭력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해 단순한 생명체에 가해지는 유혈의 힘이고, 신적 폭력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 모든 생명체에 가해지는 순수한 힘이다. 신화적 폭력은 희생을 요구하며, 신적 폭력은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

(..) "죽여도 됩니까?" 란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십계명의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어다" 말고는 달리 없다. 이 계명은 마치 신이 어떤 행위를 '가로막는' 것처럼 행위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그러나 그 계명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하는 처벌에 대한 공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 명령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다.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해서는 그 계명을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행위에 대한 신적 판단이나 그 판단의 근거가 됐던 것 모두는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폭력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그 계명을 근거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그 계명은 판단의 척도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격체 또는 공동체에 대해 행도으이 지침으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인격체나 공동체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 계명과 대결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 계명을 도외시한 책임을 스스로 떠안아야 한다.'  271-273


신적 폭력에 의해 제거되는 자들은 명백하게 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희생자(제물)가 아니다.

그들은 희생 없이 죽임을 당하는 셈이다.  273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의 결론부에서 "혁명적 폭력은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순수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274


어떤 폭력이 신적 폭력인지 식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275


신적 폭력은 신(대타자) 자신의 무능을 보여주는 징표다.  276





7 에필로그


우리의 탐구는 한 바퀴를 돌았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거짓 주장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적 폭력을 승인하는 데 이르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ㅍ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83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점이다. 다른 형식의 폭력적 학대에 대해서는 그토록 예민한 서양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무감각하게 만드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시에 동원해 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대단히 징후적인 일이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은 종종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의 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교훈,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  284


끝으로(세 번째),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 있다.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다.  293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 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 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 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바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공허함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폭력이란 말을 기본적 사회관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면, 몰지각하고 정신나간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수백 만 명을 학살한 역사상의 '괴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괴물들이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지젝이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가 항상 선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이콧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진적인 행동을 조직해야 할 상황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안흔 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어서, 이는 실용적으로 접근돼야 한다.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있는 것이다."  297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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