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고대라는 시대를 총결산한 사회입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유럽은 중세 기대로 접어들었고 이후 근대와 현대에 이르렀습니다.  14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수없이 많은 왕정 시대에 관해 증언과 물증이 일치하는 중요한 사실은 로마와 그 주변의 라티움 문화는 초기 단계부터 사비니 문화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이런 문화구너에 로마가 초기 단계부터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티움 문화는 빌라노바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초기 철기 문화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라티움 문화는 사비니 문화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로마가 나중에 세력을 확대할 때 별다른 문화충격 없이 사비니인이나 에트루리아인의 땅을 로마의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6-37


집정관의 선출이나 전쟁 개시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했지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투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켄투리아에 한 표가 할당되어 있었으므로 총 투표 수는 193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반영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민주적이 ㄴ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의견이 우선시되는 교묘한 구조였습니다. 토표가 기사부터 시작되어 제1계급, 제2계급으로 재산이 많은 순으로 이루어지고, 과반수에 달하는 시점에서 끝났기 때문입니다. 기사 켄투리아 18표와 제1계급 켄투리아 80표에서 이미 98표로 과반수에 도달하므로 제2계급 이하의 투표는 사실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40-41


피로스 전쟁 이전의 젼쟁은 승리하면 적의 영토와 재물을 획득하는 단순한 도식의 전쟁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벌어진 한정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마는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처음 경험했던 것입니다.  65


기원전 130년에 37만 5천 명이었던 인구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약 100만명으로 팽창했습니다.  148


봄부터 가을까지 지중해가 호수와 같이 평온한 시기에 적재량이 100톤에서 300통인 배가 밀을 싣고 옵니다. 적재량 300톤의 배라 해도 1400척의 배가 당시 수도 로마의 가장 큰 외항인 나폴리 만의 푸테올리(현재의 포추올리)에 짐을 가득 싣고 도착했습니다.  151


건강하지도 않고 용모도 볼품없고 말솜씨도 업성 일족의 지지를 얻지 못했던 클라우디우스였지만 연설만큼은 품격과 박식함이 넘쳤습니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공적 활동을 해야 할 시간에 독서만 했기 때문이겠지요. 

역사, 문학, 로마의 오랜 관습에 정통한 문인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대국 로마에 어울리는 행정권을 강홧하고, 국고 관리를 간소화하고 따로 독립시켰으며, 제국의 영토를 확대하는 커다란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161


네로가 즉위 이후 모친인 아그리피나를 암살하기까지 첫 5년은 후대의 현제들로부터도 가장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 시대로 높이 칭송받았습니다. ..

하지만 17살의 네로가 당시의 정치 상황을 파악하여 원로원 의우너들을 감탄시킬 만한 정책을 만들어냈을 리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스토아학파 철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저술가였던 세네카(네로의 가정교사이자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의, 현실을 꿰뚫어본 상황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163


이제껏 없었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64년 7월 19일 일몰 무렵이었습니다. 이 화재는 엿새나 계속되어 시가지 대부분이 불탔습니다. 불에 타 허허벌판이 된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네로는 '신도시 계획'을 세워 방재 도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리의 폭을 넓히고, 주택과 주택을 나누는 벽을 방화벽으로 만드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면 네로는 후세에 로마의 재건자로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고 개인적인 취미와 정념의 포로가 네로가 가장 정열을 쏟은 것은 신도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이 기거하기 위한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의 건설이었습니다. 80헥타르나 되는 토지를 수용하여 온갖 사치를 다 부린 궁전을 세우고 그 주위에 푸른 정원과 인공 호수를 배치했습니다. 화재로 집을 잃은 많은 시민들로부터 비난을 산 것은 당연했습니다. 게다가 복구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증세를 단행했으며, 대부호들을 잇따라 처형하여 그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66


로마 제국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관료 제도가 없었습니다. 원로원에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 등 정무관 제도가 있어 의원들의 호선으로 연령에 따라 선출되었습니다. 직책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각각 재판, 건설 사업 및 치안, 국고 관리 등을 담당했습니다.  169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방대한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조직이 정비되었고, 그 정비에 의해 권력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황제가 관할하는 행정의 경우에는 유능한 해방노예를 많이 거느린 기사계급 가운데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들에게 운영과 관리를 맡겨 황제 관료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직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조직은 적어도 다섯 개의 담당 부서, 즉 내무, 재무, 법무, 진정 접수, 그리고 문교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내무는 황제와 속주 사이에 오가는 서신, 보고서, 의결서 등을 작성하고 관리하는데, 내무장관인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호아제 행정의 중심인물로서 실권을 가졌습니다. 또 재무장관에도 그리스인 해방노예가 임명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중임을 맡아 큰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두 사람의 강대한 권력은 그만큼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국고가 비었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고민을 들은 어느 남자는 그 두 사람의 재산과 황제 금고를 합치면 돈은 남아돌게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을 정도입니다.  171


로마 사회의 노예는 공노예와 사노예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공공 시설의 청소와 유지, 행정 사무, 죄인의 처형 등에 종사하는 공노예는 일반적으로 사노예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 사노예라도 가내 노예는 농사나 채석 일을 하는 노예만큼 중노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172


2세기 초반에 하드리아누스는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주인으로부터 거둬들여 재판에 준한 절차를 밟도록 했고, 4세기 초반에 콘스탄티누스는 노예 살해를 살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노예는 생산 활동 외에도 공적인 장에서의 노동이나 가내 노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에 단순히 속박하며 강제적으로 노동을 시키기만 해서는 효율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노예들이 일할 의욕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한 방책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노예는 해방노예라고 불리며 자유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방 도시에서 선거권 등을 가진 시민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노예를 해방하려면 소유자가 재판관이나 감찰관에게 신청하거나 유언에 명기할 필요가 있고 어떤 경우든 일정한 절차와 심사가 필요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해방노예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소유하는 노예의 수에 따라 해방할 수 있는 노예 수를 정해두었습니다.  173-174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교육 제도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황제도 손을 대지 않았던 분야이고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자녀 교육을 부모가 도맡았으므로 수업료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가정의 자녀들만이 교사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 교사는 초보적인 읽고 쓰기나 주판을 가르치는 초등교사(리테라토르), 그리스어 혹은 라틴어 문법이나 초보적 수사학을 가르치는 중등교사(그람마티쿠스), 그리고 수사학이나 철학, 법률을 가르치는 고등교사(레토르)로 나누어졌는데, 각각의 지도 내용이나 명성에 따라 수업료도 달랐습니다. 그 밖에 기하학, 음악, 체육 등을 가르치는 학교나 상업에 필요한 산술과 속기를 가르치는 실업 학교도 있었습니다. ..

한 명의 교사가 점포나 다락방을 빌려 운영하였으므로 오늘날의 학교와는 달랐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중등교사와 고등교사에게 면세 특궈능ㄹ 주고 그리스의 우수한 교사가 수도 로마로 이주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교사으 특권은 뒤에 의사에게도 적용되어 면세뿐 아니라 병역과 부역의 면제로까지 확대됩니다.  183-184


영토 확대 정책을 포기하기로 한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이라는 범위 안에서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고자 애썼습니다. 이것은 속주 중시 정책으로서 내수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입니다. 황제가 속주 곳곳을 방문하여 적절한 지시를 내리고 중앙정부의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내수가 확대되고 속주 경제도 호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고, 경제 활동을 자극하는 새로운 방책이 필요했는데,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에게는 효과적인 방책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북방과 동방에서 전쟁이 시작됩니다.  214


열악한 품질의 화폐를 주조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황제들은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범죄나 다름없는 정책을 실시한 것입니다.  216


멸망의 원인을 하나의 요소, 하나의 현상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쇠퇴 증후군과도 같은 상황에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면서 멸망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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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책의 목적은 수사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수사학의 긍정적 측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11


수사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언어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안에 놓아야.  13


무엇보다 수사학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을 생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4


수사학은 서기전 5세기 후반 아테나이에서 기원했다. 수사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소피스트라는 교사 집단이었다. ...

이들의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은 공교롭게도 적수들의 저작이었다. 따라서 후대 학자들이 공들여 연구했음에도 소피스트의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소피스트술(sophistry, 궤변)'이라는 단어가 '기발하지만 청중을 오도하는 추론과 잘못된 논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기술'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19


브라이언 비커스(brian Vickers) 말마따나 "플라톤은 수사학을 희화화함"으로써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소피스트의 명성은 "플라톤의 일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25


아리스토텔레스(서기전 384~322년)도 수사학을 옹호했지만, 수사학을 학문의 총체로 여기지는 않았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람이 형식논리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개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27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요한 정의를 몇 가지 제시했다. 수사학은 "어떤 경우에든, 가능한 설득 수단을 찾아내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사법적 수사학, 제시적 수사학(예:추도사), 토론적 수사학(법률을 통과시키거나 전쟁을 선포하는 등 청중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의 세 장르로 나누었다.  28


앤드루 W. 로버트슨은 후보자를 찬양하는 '칭찬' 수사학에서 투표자에게 특정한 세계관을 지지하라고 촉구하거나 충고하는 '권고' 수사학으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후자의 수사학은 "간접적이고 정서적인 방법으로 청중에게 (대체로 진실이지만 종종 과장되고 이따금 허구인) 사건이나 원칙, 정책을 제시했"다.  52


수사학이 어떻게 수용되는가는 기술, 문화, 사회 내의 권력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꾸준히 효과를 발휘하는 기법이 있지만,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하는 규칙은 없다. 그런 규칙을 정하려는 시도는 계급, 성별, 인종 같은 전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수사학에 대한 -또한 수사학이 왜 논란이 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좋은 출발점이다. 한 사회의 논증은 그 사회가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드러내며, 사회가 논의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53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수사술은 당면한 상황에서 기회를 찾는 것이지 맥락을 무시하고 연설 자체를 위해 문채를 조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괄적 체계가 아니라 기본적 연장이다. 이 연장이 있으면 다른 연설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고 자신이 시도하려는 것의 본보기를 얻을 수 있다.  58


웅변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보통 세 갈래로 나눈다.

첫째는 사법적 연설(법정을 비롯한 법적 상화에서 벌어진다), 둘째는 제시적 연설(찬양하거나 비난한다), 셋째는 토론적 연설(투표자나 입법권자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설득한다)이다.  58-59


모든 연설을 장르별로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각각의 연설에서 사법적, 제시적, 토론적 요소를 찾아보아야 한다.  62


흔히 수사학에서 다섯 가지 규범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1) 발상(invention/discovery), 

(2) 배열(arrangement),

(3) 표현(style),

(4) 기억(memory),

(5) 발표(delivery)다.

이것은 수사학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으로, 연설의 장르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62


발상은 상황에 알맞은 논증을 떠올리는 과정으로, 그러려면 청중의 성격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

연설 주제에 논란이 있을 경우는, 진짜로 문제가 되는 사안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도 발상 단계에 포함된다. ...

스타시스(stasis, 쟁점)라는 기법은 연설가가 자신의 믿음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문제를 발상 과정에서 찾아내기 위해 스스로 던지는 표준적 질문이다.  62-64


'배열'은 연설의 순서를 매기는 것이다. ...

논증의 구조는 설득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도입부의 목적은 키케로의 말을 빌리자면 "청중의 정신을 연설의 나머지 부분을 받아들이기에 알맞은 조건으로" 바꾸는 것, 달리 말하자면 청중의 주목을 끌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

수사적 구조를 분석할 때는 늘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구절은 왜 저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을까? 어떤 효과를 의도햇을까? 연설을 더 효과적으로 배열할 수는 없었을까?  65-66


'표현'은 언어와 관계가 있다. ...

수사적 표현은 언뜻 피상적 현상으로 보이지만, 이에 대한 논증은 정치적, 사회적, 민족적 갈등을 미묘하게 자극할 수있다.  66-67


'기억'

고전기 수사학 교육에는 기억술 훈련법이 포함되었다. 그중 하나는 연설의 요소(각 부분의 실마리가 되는 상징)들을 집안의 각 방에 넣어두어 시각화하는 것이다.  68



사법적 연설이든 제시적 연설이든 토론적 연설이든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대락적으로 각각 성품, 감정, 논리에 해당한다)에 호소해야 한다.  71


세 요소의 경계선은 흐리거나 애매할 수 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에토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파토스) 자신에게도 최선일 것입니다(로고스)"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둘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방법도 있다.  72


분석의 한 차원은 이른바 수사학의 '거시적' 문제에 관심을 둔다. 어떤 성격의 연설인가? 어떻게 구성되고 표현되는가? 이성, 감정, 성품 중 무엇에 호소하는가? 하지만 연설가의 전체 목표를 절에서 절로, 문장에서 문장으로 진행시키는 (또는 지연시키는) 미시적 기법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75-76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세 가지를 꼽아보라는 물음에 데모스테네스는 첫번째도 발표, 두번째도 발표, 세번째도 발표라고 대답했다.  78


단어든, 소리든, 구든, 문장이든, 생각이든 반복은 필수적인 수사학 전략이다. 다음의 옛 격언은 메시지 전달의 핵심을 짚고 있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말하고, 말하고, 무엇을 말했는지 말하라."  80


연설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할 것인지, 했는지를 청중에게 곧잘 이야기한다. 이것을 '메타담화(meta-discourse)'라 하며, 말이나 글에서 "제가 주장하려는 바는 ..."이라거나 "제가 입증한 것처럼..."이라는 문구로 논의 대상을 설명하는 것을 일컫는다.  80


역언ㄴ법(paralipsis)은 어떤 사안을 짐짓 건너뛰는 척하여 오히려 주의를 끄는 수법이다. 이를테면 "상대토존자의 음주 문제는 굳이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81


수사학을 분석할 때 "모든 청중이 알거나 믿는다고 연사가 가정하는(또는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85


'수사학의 발판'을 이해하는 것은 수사법을 구사할 때든 분석할 때든 매우 유용하다. 언어 선택을 의식적으로 성찰하면 수사학의 설득력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투적 생각 패턴의 무분별한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수사학을 고안하거나 해독하는 바법의 공식 같은 것은 없다.  91


수사적 분석의 한 가지 목표는 말을 '해독'하여 그 속에 새겨진 의미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주어진 맥락에서 특정한 진술이나 상징의 사회적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다.  97




20세기에, 수사학이 쇠퇴하고 심지어 경멸당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많은 이론가들이 '신수사학(new rhetoric)'을 제안했다. ..

사회학의 새로운 분야들에서 (부분적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을 통해 수사학을 확대하고 재평가하고 다시 활성화하려는 욕망의 발현이었다.  114-115


수사학 이론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 케네스 버크 또한 (관점이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담화가 합리적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옛 수사학의 핵심어는 '설득'이었으며 옛 수사학이 강조한 것은 의도적 계획이었다. '새' 수사학의 핵심어는 '동일시'일 것이며 여기에는 연설의 호소력에 담긴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요인이 포함될 수 있다."  115-116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으나, 무언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버크는 "사람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으면 수사학에서 통일을 내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햇다.  116



수사적 분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무엇을 분석할지 정해야 한다.

어떤 자료를 연구할지 대충이라도 정했다면 질적 접근법과 양적 접근법 중에서 무엇을 위주로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121-124


수사적 분석을 계획하고 있다면 우선 짧은 현대 연설뭉을 꼼꼼히 읽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다(현대 연설문은 진본 여부가 문제되지 않는다). 맨 처음 할 일은 토론적, 사법적, 제시적 요소를 찾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각 부분이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중 무어셍 어떻게 호소하는지 살펴본다. 중의성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심사의 예를 찾는다. 문채를 찾고, 연사의 메시지가 문채를 통해 어떻게 전개되는지-또는 방해되는지-분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이를테면 평범하게 위장한 온건한 표현이 실은 외집단의 가치를 공격하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분석을 뒷받침하는 다른 근거(이를테면 연설문 초고, 사진, 일기, 신문 등)가 없는지 알아본다. 이 자료들을 어떻게 배열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명심할 것은, 이런 과체에서 결정적인 '정답'은 없을지라도 (적어도) 설득력 있는 답을 찾을 수는 있는 것이다.  127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형편없는 싸구려 수사가 난무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군계일학이 되기는 어렵지 않다. 적당한 속도로 명료하게 말하면 삼절문과 대조법을 구사하기도 전에 좌중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

무엇보다 중요한 첫걸음은 진짜 사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한편, 수사학의 이해는 다른 면에서도 도움이 된다. 수사학 기법을 알면 논증의 타당성을 평가할 수 있으며 그럴듯하지만 오류인 주장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주장을 맞받아칠 수도 있다.  169-170


수사학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는 경우가 많지만 단순히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173


수사학은 스스로의 토대를 허물 운명을 타고났으며,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수사적 과정은 창조적 파괴의 영구 순환이다.  174




역자후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수사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상이나 감정 따위를 효과적, 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  180


수사학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을 생성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수사학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바라보는 태도에 중대한 영향들 끼친"다. 이점에서 말하기 연습은 곧 생각하기 연습이기도 하다.  180-181


민주주의는 대화를 통한 합의를 바탕으로 삼는다. 우리는 설득하고 설득당하면서 합의에 도달하고 그 합의를 존중한다. 수사학을 동원하지 않고 합의를 도출하겠다는 것은 독단이다. 수사학은 상대방의 견해에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다. 수사학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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