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 책을 내며
부처에게는 자기 자신이 어떤 종교의 창시자라는 의식이 전혀없었다. 단지 눈 뜬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11

소 치는 사람
33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34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25

무소의 뿔
38
자식이나 아내에 대한 집착은 마치 가지가 무성한 대나무가 서로 엉켜 있는 것과 같다. 죽순이 다른 것에 달라 붙지 않도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9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7

60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1

62
한번 불타 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2

69
홀로 앉아 명상하고 모든 일에 항상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근심인지 똑똑히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3

71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4

천한사람
142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오. 날 때부터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자비
143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144
만족할 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게 하며,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58

알라바카 야차
186
“성자들이 열반을 얻는 이치를 믿고 부지런히 배우면 그 가르침을 들으려는 열망에 의해서 지혜를 얻는다.

187
적절하게 일을 하고 참을성 있게 노력하면 재물을 얻는다. 성실을 다하면 명성을 떨치고, 베풂으로써 친구를 사귄다.

188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성실과 자제와 인내와 베품, 이 네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저 세상에 가서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189
만일 이 세상에 성실과 자제와 인내와 베풂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어 보라.”  72–73

성인
213
홀로 걸어가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80

수칠로마 야차
270
“탐욕과 혐오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좋고 싫은 것, 소름 끼치는 일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또 온갖 망상은 어디에서 일어나 우리를 방심케 합니까. 마치 어린아이들이 잡았던 까마귀를 놓아 버리는 것처럼.”

271
“탐욕과 혐오는 자신에게서 생긴다. 좋고 싫은 것과 소름 끼치는 일도 자신으로부터 생긴다. 온갖 망상도 자신에게서 생겨 방심케 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잡았던 까마귀를 놓아 버리는 것처럼.

272
그것들은 집착에서 생겨나고 자신에게서 일어난다.  101-102

바라문에게 어울리는 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셨다. 그때 코살라국에 사는, 큰 부자인 바라문들이-그들은 늙어 쇠약해 있었지만- 스승이 계신 곳에 가까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서로 기억에 남을 만한 즐거운 인사를 나누더니 한쪽에 가서 앉았다.
큰 부자인 바라문들은 스승께 물었다.
“고타마시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지펴온 바라문의 법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바라문들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지켰던 바라문의 법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타마시여, 별 지장이 없으시다면, 옛날 바라문들이 지켜 온 바라문의 법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바라문이여, 명심해 잘 들으시오. 내가 말을 해 드리리다.
“듣겠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284
“옛 성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소. 그들은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을 버리고 자기의 이상을 실천하였소.

285
바라문들에게는 가축도 없었고, 황금도 곡식도 없었소. 그러나 그들은 베다 경전 ㅗ이는 것을 재산으로 삼고 곡식으로 삼아, 브라만의 창고를 지켰던 것이오.

286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문간에 음식을 마련해 놓았소.

287
아름답게 물들인 옷가지와 이불과 집을 가진 시골의 잘 사는 사람들과 도시 사람들은 모두 바라문을 찾아왔소.

288
바라문들은 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거나 굴복시켜서도 안 되었소. 그들이 문간에 서 있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소.

289
옛날의 바라문들은 사십팔 년 동안 순결한 몸을 지켰소. 그들은 지혜와 덕행을 추구했던 것이오.

290
바라문들은 다른 종족의 여자를 얻지 않았소. 또 그들은 아내를 사지도 않았소.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화목해 하며 즐거워하였소.

291
함께 살면서 즐거워했지만, 바라문들은 월경 때문에 아내를 멀리해야 할 때도 결코 다른 여자와는 성의 접촉을 갖지 않았소.

292
그들은 순결과 계율, 정직, 온화함, 고행, 부드러움과 자비와 관용을 칭찬했소.

293
그들 중에서 용맹하고 으뜸가는 바라문들은 끝까지 순결을 지켰소.

294
이 세상에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본받아 순결과 계율과 인내를 찬양했소.

295
쌀과 이불과 옷가지, 가구, 기름을 시주받아 그것으로 제사를 지냈소. 그들은 제사를 지낼 때 결코 소를 잡지 않았소.

296
부모 형제 또는 다른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소는 우리들의 선량한 벗이오. 소한테서는 여러 가지 약이 생기오.

297
소에서 생긴 약은 실료품이 되어 우리에게 기운을 주고 피부를 윤택하게 하며 또 즐거움을 주오. 소한테 이러한 이익이 있음을 알아 그들은 소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오.

298
바라문들은 손발이 부드럽고 몸이 크며 외모가 단정하고 명성이 있으며, 자기 의무에 충실하게 할 일은 하고 해서 안 될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소.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세상 사람들은 행복하고 번영했소.

299
그런데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소. 점점 왕자의 부귀 영화와 곱게 단장하고 화려하게 입은 여인들을 보게 됨에 따라.

300
또는 준마가 이끄는 훌륭한 수레, 아름다운 옷, 여러 가지로 설계되어 잘 지어진 집을 보기 시작하면서.

301
바라문들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미녀들에 둘러싸여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았소.

302
그래서 그들은 베다의 주문을 편찬하고, 저 감자왕에게 가져가서 말했소. ‘당신은 재산도 곡식도 풍성합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303
그래서 수레와 군사의 주인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말에 대한 제사, 인간에 대한 제사, 화살과 창에 대한 제사, 소에 대한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온갖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라문들에게 주었소.

304
소, 이불, 옷가지, 아름답게 꾸민 여인과 준마가 이끄는 훌륭한 수레며, 아름답게 수놓인 옷들.

305
쓸모있게 잘 설계된 훌륭한 집에, 여러 가지 곡식을 가득 채워 바라문에게 주었소.

306
이와 같이 해서 그들은 재물을 얻었는데, 이번에는 또 그것을 저장하고 싶은 생각이 났던 것이오. 그들은 욕심에 사로잡혀 많은 것을 갖고 싶어했소. 그래서 그들은 또 베다의 주문을 편찬하여 다시 감자왕을 찾아갔소.

307
‘물과 땅과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가는 데 필수품이듯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의 재산은 많습니다.’

308
그래서 수레와 군사의 주인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소.

309
튼튼한 다리와 날카로운 뿔을 갖고도 결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소는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소. 그런데 왕은 뿔을 잡고 칼로 찔러서 소를 죽이게 했던 것이오.

310
칼로 소를 찌르자, 모든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들은 ‘불법한 짓이다!’라고 소리쳤소.

311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 이 세 가지 병밖에는 없었소. 그런데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많은 가축들을 죽인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이오.

312
이와 같이 살생의 몽둥이를 부당하게 내려치는 일은 그 옛날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소를 죽인 것이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도리를 거스르고 있는 것이오.

313
이와 같이 예전부터 내려온 이 좋지 못한 풍습은 지혜로운 이의 비난을 받아 왔소.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볼 때마다 제사 지내는 일을 비난하게 되었소.

314
이렇게 법이 무너질 때, 노예와 서민이 둘로 나뉘었고, 여러 왕족들이 흩어졌고, 아내는 남편을 경멸하게 되었소.

315
왕족이나 범천의 친족 또는 제도에 의해 지켜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생명의 존엄성을 버리고 욕마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큰 부자인 바라문들은 스승께 말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또는 ‘눈이 있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다’ 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빛춰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당신께 귀의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수행자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당신 고타마께서는 저희들을 재가 수행자로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106-114

젊은이 바셋타
620
..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1
모든 속박을 끊고 두려움이 없으며, 집착을 초월하고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2
고삐와 함께 가죽끈과 가죽줄을 끊어 버리고 어리석음을 없애 눈을 뜬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3
죄 없이 욕을 먹고 구타나 구속을 참고 견디며, 인내력이 있고 마음이 굳센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4
성내지 않고 도덕을 지키며 계율에 따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몸을 잘 다스려 ‘최후이 몸’에 이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5
연꽃 위의 이슬처럼,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온갖 욕정에 더렵혀지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6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의 고뇌가 소멸된 것을 알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

650
..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653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220-227

동굴
772
동굴 속에 머무르며 집착하고 온갖 번뇌에 뒤덮여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참으로 이 세상의 욕망을 버리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773
욕망에 따라 생존의 쾌락에 붙잡힌 사람들은 해탈하기 어렵다. 남이 그를 해탈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와 과거에 집착하면서 눈앞의 욕망에만 빠져 든다.

776
세상 사람들이 생존에 대한 집착에 붙들려 떨고 있는 것을 나는 본다. 어리석은 사람ㄷ르은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한 집착을 떠나지 못한 채 죽음에 직면해 울고 있다.

777
무엇인가를 내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은 물이 말라 가는 개울에서 허덕이는 물고기와 같다. 이 꼴을 보고 ‘내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

779
생각을 가다듬고 거센 강을 건너라. 성인은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며,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열심히 정진하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272-274

으뜸가는 것
796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보는 것들을 ‘으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생각에 붙들려 그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논쟁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797
그는 본 것, 배운 것, 계율과 도덕, 사색한 것에 대해서 혼자서 어떤 결론을 내리고,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뒤떨어진 것으로 안다.

798
사람이 어떤 한 가지만 중요하다고 여긴 나머지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가치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커다란 장애라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본 것, 배운 것, 사색한 것, 또는 계율과 도덕에 붙잡혀서는 안 된다.

799
지혜에 대해서도, 계율이나 도덕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기를 남과 동등하다거나 남보다 못하다거나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800
그는 가지고 있던 견해를 버리고 집착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특별히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실로 여러 가지 다른 견해로 분열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어느 한쪽을 따르는 일이 없고, 어떤 견해일지라도 그대로 믿는 일이 없다.

801
그는 양극단에 대해서, 여러 생존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도 저 세상에 대해서도 원하는 바가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해 단정하는 편견이 그에게는 조금도 없다.

802
그는 이 세상에서 본 것, 배운 것, 또는 사색한 것에 대해 티끌만한 편견도 가지지 않는다. 어떠한 견해에도 집착하지 않는 바라문이 이 세상에서 어찌 그릇된 생각을 하겠는가.

803
그는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어느 한 견해만을 특별히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가르침을 원하지도 않는다. 바라문은 계율이나 도덕에 이끌리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피안에 이르러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  281-283

늙음
805
사람은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물건 때문에 근심한다.  284

809
내것이라고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평안을 얻은 성인들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285

투쟁
874
“바르게 생각하지도 말고 잘못 생각하지도 말며, 생각을 가지지도 말고 생각을 없애지도 말라. 이렇게 수행하는 자에게 형태가 소멸된다. 그러나 의식은 생각을 인연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305

무기를 드는 일
949
과거에 있었던 것(번뇌)을 지워 버리라.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라. 중간(현재)에도 아무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해지리라.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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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어른은 별다른 노력이 없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냥 나이를 먹으니 어른이 되어 버렸고,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어른으로 대접하고 있으니까요. 5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없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아야 어른입니다. 싫은 건 싫다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힘과 자유는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기를 갖고 싸워 얻어야 하는 것임을. 6



프롤로그 - 잠옷을 입고 실내에 있을 수도 없고 실외로 나갈 수도 없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도대체 내가 했던 모든 행동 중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

나와 같은 사람은 1,000년 전에도 없었고 1,000년 뒤에도 없을 겁니다. 아니, 지금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타인들과 유사합니다. 그것도 지독하게 유사합니다. 이건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보다는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베케트(Samuel Baclay Beckett, 1906-1989)라는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작가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을까?’ 13


‘화두(話頭)’.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이 바로 화두입니다. ...

화두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겁니다. 상식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풀릴 수 없는 역설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게 풀리는 것이 화두이기 때문이지요. 15


스님들이 싯다르타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멋지게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16


‘무문관’ .. ‘문이 없는 관문’. 18


타인이 만든 문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지 말고 온몸을 던져 뚫어 내라는 겁니다. 20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무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갈 뿐,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육조 혜능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문관> 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24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몸소 체현하고 산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32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라고 말했다. <무문관> 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33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36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하는 법입니다. 37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7



송원 화상이 말했다.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또 말했다.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 20칙 대역량인(大力量人) 42

‘여여(如如)’ 혹은 ‘타타타’라고 부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요. ...

불변하는 영원한 자아를 불교에서는 ‘아(俄, atman)’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이런 영원한 자아를 부정합니다. 영원한 것,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우리 마음에 심각한 고통을 안겨 주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44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은 우리의 생생한 경험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는 경험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희론(戱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논의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희론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도록 만드는 색안경과 같은 것이지요.  45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Don't think, but look)!"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럴 거야'라는 가치평가나 희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있는 그래도 여여하게 직시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50



파토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무문관> 44칙, '파초주장(芭蕉?杖)'  51

주장자(柱杖子)를 아시나요. 큰스님들이 길을 걸을 때나 설법을 할 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자는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 즉 '불성(佛性)',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실현한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51

'주장자가 없다'는 생각, 그리고 부처라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파초 스님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53

베그르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자신의 주저 <창조적 진화>에서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라고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없다'는 생각이 '있다'는 생각보다 무엇인가 하나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54

'지갑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애인과 헤어졌어' 등등. 우리는 매번 '없음'에 직면하며 당혹감과 비통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지갑이 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을, 살아 계신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집착의 기원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없어진 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일 겁니다. 없다는 느낌은 그만큼 그것이 있었을 때 느꼈던 행복을 안타깝게도 더 부각시키는 법이니까요.  55, 58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 부처를 꿈꾸는 마음이 강해지면,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절망이 다시 부처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게 될 겁니다. .. 집착은 깨달은 자가 가지는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니까요. .. 주장자가 있다는 오만도, 그리고 주장자가 없다는 절망도 모두 집착일 뿐입니다.  59



구지 화상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었다. 뒤에 동자 한 명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외부 손님이 "화상께서는 어떤 불법을 이야기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자, 동자도 구지 화상을 본더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방 밖으로 나가오 ㅆ는데, 구지 화상은 동자를 다시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순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웠다. 동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말을 마치자 그는 입적했다. <무문관> 3칙. '구지수지(俱?竪指)'  60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신의 본래면목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61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나는 '동일자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의 반복'입니다.  63

<장자(莊子)>라는 책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趙)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마저 까먹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 다른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면,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걷는 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에 해당. 그러니까 남을 흉내 내지 않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애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65



남전 화상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 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다미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 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그날 밤 조주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문관>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68

신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조주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자는 머리에 얹고 신발을 발에 신는 것을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규칙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신발을 머리에 얹거나 모자를 발에 신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이 아니라 습득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요. 반면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조주는 신발과 모자와 관련된 기존의 통념, 혹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경쾌하게 부정해 버립니다.  71-7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선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구분합니다. 모자는 머리에 쓰고 신발은 발에 신어야 한다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기존의 규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는 판단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적 판단력이 규칙을 따르는 생각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을 창조하는 생각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73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또 막대기"라고 말했다. <무문관> 21칙, '운문시궐(雲門屎?)'  104

부처에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습니다. 부처란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까요.  107

깨달음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아는 것이고, 해탈은 조연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109



동산 스님이 설법하려고 할 때, 운문 스님이 물었다. "최근에 어느 곳을 떠나 왔는가?" 동산은 "사도(査渡)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운문 스님이 "여름에는 어디서 있었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호남의 보자사(報慈寺)에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운문 스님이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라고 묻자, 동산은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했다. "세 차례 후려쳐야겠지만 너는 용서하마."

동산은 다음 날 다시 운문 스님의 처소로 올라와 물었다. "어저께 스님께서는 세 차례의 몽둥이질을 용서하셨지만, 저는 제 잘못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이 말했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이 대목에서 동산은 크게 깨달았다. <무문관> 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120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제자가 스스로 깨달음의 등불을 발화시키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뿐입니다.  121

<임제록>에서 임제의 속내를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그의 사자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122-123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여행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무슨 말인지 금방 짐작하실 겁니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 도중에서도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을 겁니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리고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와야만 하니까요. 당연히 여행 도중에서 만나게 되는 코를 유혹하는 수많은 꽃 내음들, 뺨을 애무하는 바람들, 실개천의 속삭임들, 지나가는 마을에서 열리는 로맨틱한 축제조차도 그는 향유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니, 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런 사건과 사물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목적지에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에게 여행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출발지와 도착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장자(莊子, BC369~BC289?)는 진짜 여행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요(逍遙)'라는 말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가하다'는 의미입니다. 장자도 진짜 여행이란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던 셈입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고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면 과감하게 떠납니다. 간혹 아름다운 새를 쫓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도 일쑤입니다. 그는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맵ㄴ 출발지와 목적지를 만드는 주인이기 때문이지요. 알튀세르(ALouis Althusser, 1918~1990)눈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이런 사람을 '유물론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었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우리는 기원과 목적,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참될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만나는 것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 춤어 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목적지로 가느라, 혹은 출발지로 되돌아오느라 분주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로운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문관>의 열다섯번째 관문을 통화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임제의 가르침을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아로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수(隨)' '곳 처(處)', '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될 진(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125-127



옛날 석가모니가 영취산의 집회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때 대중들은 모두 침묵했지만, 오직 위대한 가섭만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말했다. "내게는 올바른 법을 보는 안목, 즉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문자로 표현할 수도 없어 가르침 이외에 별도로 전할 수밖에 없기에 위대한 가섭에게 맡기겠다." <무문관> 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130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진짜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136-137



어느 스님이 물었다. "광명이 조용히 모든 세계에 두루 비치니..." 한 구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운문 스님은 갑자기 말했다. "이것은 장졸 수재의 말 아닌가!" 그 스님은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에 떨어졌군"이라고 말했다.

뒤에 사심 스님은 말했다. "자, 말해 보라! 어디가 그 스님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무문관> 39칙, '운문화타(雲門話墮)'  138

제도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인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노예의 삶일 뿐이기에, 스님이 되어야만 부처가 된다는것은 불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139

 -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

현대 영국의 철학자 라일(Gilbert Ryle, 1900~1976)도 자신의 논문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당 상황에 대한 지적인 명제들을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요리하거나 운전할 줄 모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실천적 앎과 단지 이론적으로만 아는 이론적 앎을 명확히 구분한 이야기입니다.  143-144

말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진짜로 깨달았는지의 여부니까요. 진짜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의 횡설수설이 모두 오도송입니다. 반대로 깨닫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경전이나 선사의 말에 부합되는 말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모두 횡설수설에 불과한 법입니다.  145

깨달은 스승이 깨닫지 않은 제자를 강제로 깨달음에 이끌 수는 없습니다. 제자 스스로 깨닫도록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148



백장 화상이 설법하려고 할 때, 항상 대중들과 함게 설법을 듣고 있던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설법이 끝나서 대중들이 모두 물러가면, 노인도 물러가곤 했다.그런데 어느 날 노인은 설법이 끝나도 물러가지 않았다. 마침내 백장 화상이 물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 부처가 계실 때 저는 이 산에 주지로 있었습니다. 당시 어느 학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가 500번이나 여우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화상께서 제 대신 깨달음의 한마디 말을 하셔서 여우 몸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마침내 노인이 "크게 수행한 살마도 인과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라고 묻자, 백장 화상은 대답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 백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크게 깨달으며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 몸을 벗어서 그것을 산 뒤에 두었습니다. 화상께서 죽은 스님의 예로 저를 장사 지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장 화상은 유나에게 나무판을 두들겨 다른 스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공양을 마친 후 죽은 승려의 장례가 있다." 그러자 스님들은 서로 마주보며 쑥덕였다. "스님들이 모두 편안하고 열반당에도 병든 사람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리시는 것인지?" 공양을 마친 후 백장 화상은 스님들을 읶르로 산 뒤쪽 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끌어내어 화장(火葬)을 시행했다.

백장 화상은 저녁이 되어 법당에 올라가 앞서 있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황벽 스님이 바로 물었다. "고인이 깨달음의 한마디 말을 잘못해서 500번이나 여우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매번 하나하나 틀리지 않고 말한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백장 화상은 말했다. "가까이 앞으로 와라. 네게 알려 주겠다."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황벽 스님은 스승 백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백장 화상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달마의 수염이 붉다고는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붉은 수염의 달마가 있었구나!" <무문관> 2칙, '백장야호(百丈野狐)'  154-155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 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신입니다.  155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 ..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입니다. 나가르주나는 흔히 제2의 싯다르타이자 동시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

그의 주저 <중론(中論)>에 보면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156

그저 인연이 맞아서, 혹은 인연이 서로 마주쳐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인연이 다해서, 혹은 인연이 서로 헤어져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생겼다고 기뻐하거나 무엇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라는 개념으로 나가르주나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157-158

핵심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로 표현되는 불교의 강력한 현실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사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무엇인가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색안경으로 사태를 보는 생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견(常見 항상상 볼견)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 끊을단 볼견)입니다. 글자 그대로 상견이 모든 것에는 '불변하는 것(常)'이 있다는 견해(見)라면, 단견은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변해 '연속성이 없다(斷)'는 견해(見)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상견은 아주 강한 절대적인 인과론이고, 단견은 인과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상견도, 단견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 원인과 결과는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158-159



혜능 스님이 혜명 상좌가 대유령에까지 추적하여 자기 앞에 이른것을 보고 가사와 발우를 돌 위에 놓고 말했다. "이것들은 불법을 물려받았다는 징표이니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대가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도록 하라!" 혜명은 그것을 들려고 했으니 산처럼 움직이지 않지 당황하며 두려워했다. 혜명은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지, 가사 때문은 아닙니다. 제발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 주십시오." 혜능 스님이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 혜명은 바로 크게 깨달았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혜명은 깨달았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혜능에게 절을 올리며 물었다. "방금 하신 비밀스런 말과 뜻 이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으십니까?"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니네. 그대가 스스로 자신의 맨얼굴을 비출 수만 있다면, 비밀은 바로 그대에게 있을 것이네." 혜명은 말했다. "제가 비록 홍인 대사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 자신의 맨얼굴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스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마치 사람이 직접 물을 먹으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부터 스님께서는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러자 혜능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그대는 이제 홍인 대사를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사이가 된 셈이니, 스스로를 잘 지키시게." <무문관> 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  164-165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 것도, 엄청난 부를 욕망하는 것도, 그리고 학위를 취득하려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65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주저 중 하나인 <도덕의 계보학>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과 악(Good & Evil)'과 '좋음과 나쁨(Good & bad)'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핵심은 '선과 악'의 기준과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가되지만, '좋음과 나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외적인 권위로는 종교적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선악이라는 관념은 우리 자신의 삶에 기원을 두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고 적응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9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는 맨얼굴을 회복한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삶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니체는 초인(Ubermensch)이라고, 혜능은 부처라고 불렀던 겁니다.  170



동산(東山)의 법연 스님이 말했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 보라! 그는 누구인가?" <무문관> 45칙, '타시아수(他是阿誰)'  172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는 1955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슬픈 열대>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자야말로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가 출현하면서 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화된다는 것입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오래된 위계적 분업 체계가 발생한 것도 사실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174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어싿. "계십니까? 계십니까?" 암자 주인은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주는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고 말하고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다시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었다. "계십니끼? 계십니까?" 그곳 암자 주인도 역시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누는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절을 했다. <무문관> 11칙, '주감암주(州勘庵主)'  189

<서경(書經)>에도 나오지 않던가요.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망념을 이기면 성인이 된다."  195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마조는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무문관> 33칙, '비심비불(非心非佛)'  197

마조의 개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스승 남악(南岳, 677~744)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남악 스님은 바로 육조 혜능(六祖慧能)의 직제자이지요. 마조와 나악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옵니다. 어느 날 남악이 마조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그러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부처가 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남악은 벽돌 한 개를 가져와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풍경에 마조는 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당황스런 얼굴로 마조는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의 이야기를 담은 <마조록(馬祖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198-199

더 좋다는 것을 추구하고 더 나쁘다는 것을 피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외적 가치의 노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런 일체의 가치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요. .. 평생 남의 꽁무니마 ㄴ쫓아다녀서야 어떻게 자신의 의지대로 한걸음이라도 걸어 보는 경험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란 무엇인가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착은 무엇인가에 집중해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200

마조를 상징하는 명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종이 자랑하는 불겨엥 대한 지적인 이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종 전통에서 강조하는 좌선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저 평상시의 마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203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를 때도, 제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할 때도,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도, 어느 경우나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204



어느 스님이 말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러자 주조는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그 스님은 말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그럼 발우나 씻게." 그 순간 그 스님에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무문관> 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213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지박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불법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  중요한 것은 내면이냐 외면이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17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219



운문 화상이 말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무문관> 16칙, '종성칠조(種聲七條)'  221

벤야민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는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

1보는 걷지 않고서 꿈꾸는 2보도, 3보도, 그리고 n+1보도 단지 백일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말해 2보보다는 3보를, 3보다는 4보를, 아니 100보를 꿈꾸는 순간, 우리는 1보 내딛는 것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222



'젊은 사람의 소중한 역할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과 부딪히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런 가치도 없어!'라고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으며 강압적이라는 걸 스스로 확신하는 데 있다. - 바디우(Alain Badiou, 1937~)  231



위산 화상이 백장 문하에서 공양주의 일을 맡고 있을 때였다. 백장은 대위산의 주인을 선출하려고 위산에게 수좌와 함께 여러 스님들에게 자신의 경지를 말하도록 했다. "빼어난 사람이 대위산의 주인으로 가는 것이다." 백장은 물병을 들어 바닥에 놓고 말했다. "물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너희 둘은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좌가 먼저 말했다. "나무토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백장은 이어 위산에게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물병을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 버렸다. "수좌는 위산에게 졌구나!"라고 웃으면서 마침내 위산을 대위산의 주인으로 임명했다. <무문관> 40칙, '적도정병(?倒淨甁)'  232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 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세계입니다.  233

불교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선종의 역사는 자기가 속한 학파를 극복하는 역사, 혹은 스승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독화(singularization)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에 이른 순간.  233

스승을 통쾌하게 짓밟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나 사상이 범접하기 힘든 불교만의 정신이자 스타일입니다.  234

삶의 주인공은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스스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238



흑암 화상이 말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무문관> 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240

<이입사행론>은 깨달음에 들어가는(入) 두 가지(二)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다른 하나는 '행입(行入)'입니다. 이치로 드어가는 지적인 방법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실천적인 방법, 이 두 가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242



어느 스님이 노파에게 "오대산으로 가는 길은 어느 쪽으로 가면 되나요?"라고 묻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 스님이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인지 걸어갔을 때, 노파는 말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뒤에 그 스님이 이 일을 조주에게 말하자, 조주는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을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간파하도록 하마"라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바로 노파가 있는 곳에 가서 조주는 그 스님이 물었던 대로 묻자, 노파도 또한 대답했던 대로 대답했다. 조누는 돌아와 여러 스님들에게 말했다. "오대산의 노파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제 완전히 간파했다." <무문관> 31칙, '조주감파(趙州勘婆)'  266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겁니다. 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근기여서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상근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산사에는 상근기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산사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열망이 쉽게 식지 않아서 사람들이 끈덕지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268-269



향엄 화상이 말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무에 올랐는데, 입으로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지만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지도 않고 발로고 나무를 밟지 않고 있다고 하자. 나무 아래에는 달마가 서쪽에서부터 온 의도를 묻는 사람이 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무문관> 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282

불교에서는 행동을 업(業, Karman)이라고 합니다. 행동은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불교의 업보(業報, karma-vipaka)이론입니다. 타인에게 좋든 그르든 강한 결과를 남기는 업을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바로 삼업(三業)이지요.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身業), 말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고 부릅니다.  283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침묵해야만 합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침묵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286



어느 날 덕산 화상이 발우를 들고 방장실을 내려갔다. 이때 설봉 스니이 "노스님!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묻자, 덕산 화상은 바로 방상실로 되돌아갔다. 설봉 스님이 암두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암두 스님은 말했다. "위대한 덕산 스님이 아직 '궁극적인 한마디의 말'을 알지 못하는구나!"

덕산 화상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시자(侍者)를 시켜 암두 스님을 불러 오라고 했다. 덕산 화상은 암두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암두 스님이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자신의 뜻을 알려 주자, 덕산 스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덕산 화상이 법좌(法座)에 올랐는데, 정말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암두 스님은 승당 앞에 이르러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노스님이 '궁극적인 한마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무문관> 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  298

누구나 알고 있듯 불교는 자비를 슬로건으로 합니다. 보통 자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우정을 뜻하는 '마이트리(maitri)'라는 말과 연민을 뜻하는 '카루나(karuna)'로 구성된 합성어가 바로 자비(maitri-karuna)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이트리, 즉 우정 혹은 동료애라는 의미 아닐까요. 자비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수직성보다는 동등한 두 사람이라는 수평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 역시 우리와 동등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99



오조 법연 화상이 말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 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무문관> 36칙, '노봉달도(路逢達道)'  323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당당히 영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판, 즉 타인의 말이나 침묵에 동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27



조산 화상에게 어느 스님이 물었다. "저 청세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조산 화상은 말했다. "세사리!" 그러자 청세 스님은 "네"라고 대답했다. 이어 조산 화상은 말했다. "청원의 백 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무문관> 10칙, '청세고빈(淸稅孤貧)'  334

생면부지의 남이나 혹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주는 행위, 즉 보시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보시라는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엄청난 의지를 수반하는 수행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나와 관계가 있든 없든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보시이기 때문이지요.  337



점심 공양 전에 스님들이 법당에 들어와 앉자 청량(淸?)의 대법안 화상은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때 두 스님이 함께 갓 발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대법안 화상은 말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무문관> 26칙, '이승권렴(二僧卷簾)'  343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상태에 있지 않고, 최소한 세 가지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객(主客) 관계에 사로잡힌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번데기는 맛있는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좋아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반대로 번데기는 혐오스러운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싫어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가 먹음직스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여전히 번데기를 좋아하거나 혐오하리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과거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를 기호 식품으로도 혐오 식품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깨달은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44-345



남전 화상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무문관> 34칙, '지불시도(智不是道)'  351

참선과 같은 치열한 내성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불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 불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354

임제의 말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열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58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법입니다.  358



석상 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된느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스님은 말햇다. "100척이나 된느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 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360

실연을 당한 사람만이 실연한 사람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고,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된 사람만이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361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지만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객관적,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주저 중 한 권인 <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 '주관적'이라는 말은 'subjective'를 번역한 겁니다. 잘 알다시피 철학에서 ' subject'는 주관이자 주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주관적"이라는 말은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 그리고 주인으로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객과적'이라는 뜻을 가진 'objective'는 사물이나 대상을 뜻하는 'object'라는 말에서 유래한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드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라는 말은 타인을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는 셈이지요.  364-365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보통 우리는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지만, 타인들은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물건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타인을 물건처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당연히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주체이고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겁니다. "정확히 자신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모든 타인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고민하니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물론 타인을 주관으로, 즉 당당한 주체로 보아야만 가능한 겁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것이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임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365-366



외도(外道)가 세존에게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세존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커다란 자비를 내려 주셔서, 미혹의 구름에서 저를 꺼내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예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아난이 곧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감탄하고 떠난 것입니까?" 그리저 세존은 말했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무문관> 32칙, '외도문불(外道問佛))'  376

지적인 허영에 빠진 학생에게는 그 허영을 충족시켜 줄 지적인 대답을 해 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학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생과 지적인 대화를 한다는 허영심만 가중시킬 테니까요. 제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답을 해도 그 학생은 제 이야기를 그냥 지적으로 납득할 뿐, 자신의 삶으로 흡수하지 않을 겁니다.  378

삶의 차원에서 매순간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만일 두 가지의 문제가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차원이 아니라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 내지 못하고,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379

무문 스님은 서른두 번째 관무을 마무리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계단이나 사다리에 의존해 절벽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단이나 사다리가 우리의 당당한 삶을 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 그건 우리가 그것에 좌지우지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 계단과 사다리로 상징되는 일체의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온몸으로 깨닫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깨달음은 스스로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82



어떤 스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法)이 있으신가요?"라고 묻자, 남전 화상은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법인가요?" 남전 화상은 말했다. "마음(心)도 아니고, 부처(佛)도 아니고, 중생(物)도 아니다." <무문관> 27칙, '불시심불(不是心佛)'  400

디테일에 빠지지 말고, 그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401



오조 법연 화상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물소가 창살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머리, 뿔, 그리고 네 발굽이 모두 창살을 통과했는데, 무엇 때문에 꼬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인가?" <무문관> 38칙, '우과창령(牛過窓櫺)'  409

창이 있는 방을 생각해 보세요. 그곳에 자유를 잃고 갇혀 있는 물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마리는 남달랐습니다. 구속에 적응하기보다는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자유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 인지, 그 물소는 창살을 지나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의 대로가 펼쳐진 겁니다. 이제 그냥 아무 곳이나 뛰어가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몸통이 창살을 통과했다면, 꼬리는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요. .. 무엇일까요. 창살을 통과하지 않은 그 물소의 꼬리는? 자유를 되찾은 그 물소는 혼자서 자유를 만끽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자신이 탈출한 방에는 아직도 동료 물소들이 갇혀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물소들이 탈출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탈출구를 동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꼬리를 창살에 남겨둘 수밖에요. 이것이 자비의 마음, 다시 말해 이타의 마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416



도솔 종열 화상은 세 가지 관문을 설치해, 배우려는 사람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을 찾아 수행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불서을 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불성을 알았다면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그대는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겠는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면 바로 가는 곳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질 때, 그대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무문관> 47칙, '도솔감관(兜率三關)'  418

<무문관>의 48개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선사들은 가혹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을 꺼 버리면서 제자들이 스스로 불을 켜기를 촉구합니다.  420

새끼들을 절벽에 던지는 호랑이와 같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천 길이나 되는 낭떠러지로 제자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니까요.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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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의 -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내 삶을 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9


스스로 결정짓는 삶은 이 규범의 틀 안에서 외부로부터의 강제가 없는 삶, 그리고 어떤 규범을 통용할 것인지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10


독립성은 타인에 관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되지요.  11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부동의 동력(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타자를 움직이는 힘)'이 아닙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 숨죽이고 앉아서 내적 드라마를 이리저리 조종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생각과 감정과 소망을 결정할 때에도 우리는 선행조건 없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무렇게나 하지는 않습니다. 이 두 번째의 의미로서의 자기 결정이라는 것은 소리 없이 일하는 난쟁이(큰 인격 안의 작은 인격)로 인한 인격의 중첩도 아니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자문하게 되기까지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일을 겪었고 수만 가지 것들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각인은 또 다른 것들을 향한 접점이 되는데, 우리는 이 접점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는 이유는, 그 반대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점에 서 있는 사람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경험의 발자취도 없다면 기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의지와 경험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역사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삶의 역사가 주는 조건에 의해 제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할 때, 자기 결정권은 그러한 선제 조건들로 이루어진 인과관계적 삶이 흘러온 틀 안에서의 영향력으로만 존재합니다.  11-12


내가 매 순간마다 자신의 과거가 드리우는 그림자와 외부의 영향이 미치는 자기장 안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기 결정권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13


나의 내면 세계가 외부와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하나의 세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과 소망을 주관하여 말 그대로 삶의 작가요. 그의 주체가 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을 단순히 맞닥뜨리거나 당하여  그 일로인한 경험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압도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주체가 되는 대신에 단순히 경험이 펼쳐지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자기 결정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13-14


우리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특징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경험과 내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식과 이해의 거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과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4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인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15


내적 거리의 두 번째 종류를 보면 자신의 경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항상 견지해 오던 나의 사고방식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두려움, 시기심, 증오가 마땅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정녕  나는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증오심을 다시 물려주는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님이 갖고 있던 두려움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화해와 마음의 여유를 누릴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같은 질문을 내 소망과 의지에도 똑같이 던져봅니다. 좀 더 많은 돈, 좀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나의 의지가 정말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가? 낵 진정으로 화려한 삶과 요란한 성공을 좇는 사람인가? 혹시 수도원 같은 고요 속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유형은 아닌가?  15


자기 결정이 성공하는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그 ㅁ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하 수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


자아상의 기준이라는 것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아상에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속하고 노예처럼 옭아매는 생각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일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도 있지요. 그리고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것을 잘못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적 구조 변경은 어느 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 영혼의 연금술로 뚝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바꾼다든가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든가 낯선 인간관계를 개척한다든가 필요할 경우 치료나 훈련을 받는다든가 등등 외적인 우회로가 많이 필요하지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인식에 있습니다. 원하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너무 달라 계속해서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면 자아상뿐만 아니라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그 욕구들의 근원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자기 결정은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인식은 사치품이나 뜬구름 같은 철학적 이상이 아니라 자기 결정적 삶, 더 나아가 존엄성과 행복의 구체적 조건입니다.  17-18


확실하다고 믿어오던 것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증거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들이 변화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의 문을 열게 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반복되면 내 의견의 총합이 완전히 탈바꿈하여 결과적으로 생각의 정체성이 변화하게 됩니다.... 비판적 물음을 통해서 익숙하던 생각의 패턴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검증 가정을 통해 생각의 주인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지녀온 언어적 습관과 거리를 두는 것과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또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많은 것들이 모국어를 그대로따라 함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19


경각심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확한 의미를 따져보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그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과연 무엇을 통해 알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사고를 조망하는 능력과 사물의 명학함을 추구하는 일 모두에 언제나 굽힘 없는 열정을 가진다는 것과 통합니다.  20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이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3


경험된 과거로 말로 표현하는 우리의 능력은 그러므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집니다. 첫 번째 얼굴은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측면입니다. 이때 자아상은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나서 결국 미래를 향한 설계도를 가지 ㄴ현재에 도달한 한 사람의 초상화지요. .. 또 하나의 얼굴은 모든 자아상이 그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아상은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을 때나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등등 때에 따라 고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새롭게 짜이고 앞뒤가 맞는 또 다른 정황이 생겨나며 맞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잊히고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이 윤색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25


기억이 강력하게 압도적인 그 힘으로 어떤 의지를 자꾸만 방해하거나 무시당하고 분열된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과 행위를 비열한 어둠 속에 꼼짝 못하게 옭아맬 때, 정신의 지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오직 그들을 언어로 불러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러 ㄴ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결정적 존재가 되려면 일단 이해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되어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26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느 ㄴ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책을 들고 말없이 소파에 앉아 아주 가끔씩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30



이제 타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31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만일 외부 권위와 그것이 주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우리는 자기 결정의 상실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치 머슴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이 내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삼은 자기 자신의 종이 됩니다. 도덕의식과 자기 결정이 서로 공존하려면 두려움이 원인이 되어서도 안 되며 열정 없는 의무감에 의한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 결정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요.

한 가지 방법은 이성적이고 공익적인 의미를 두어서 자기 저신의 이익으로도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두 도덕적 규범을 지킨다면 서로를 적대시하는 혼란 속에서보다 자기 결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커지므로 결국 각자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에는 특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 안에서는 복합적이고 깊은 도덕적 감수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려는 적수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도덕적 친밀감이 있는 만남에서는 분노와 원망, 도덕적 수치심, 후회 같은 감정도 일어나긴 하지만 또한 의리나 상대방의 도덕적 숭고함에 대한 감탄 같은 감정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단순히 사회적 게임을 같이하는 냉정한 동반자였다면 절대 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은 자기 결정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 우리를 읶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32-34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인 라브뤼예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굴종적이고 올바르지 않으며 정의와는 동떨어진, 미움과 정횡과 편견으로 가득찬 인간들의 판단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그가 이 글을 쓴 것은 아카데미 프랑세즈로부터 세번째로 입회를 거부당했을 때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으 ㄹ하는지에 대해 타인의 칭찬과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소망이었죠. 이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욕구입니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35


타인이 휘두르는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5


자기 결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일은 타인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그에 맞설 때만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가장 쉬운 방법은, 외부러부터의 모든 시선을 독립적인 정신적 정체성으로 되받아치는 것입니다. .. 타인의 시서노가의 대결이 자기 결정적인 성질을 띠려면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내가 가진 것 중 나는 보지 못하지만 타인은 볼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기기만을 발견하는가? .. 이러한 자아 확인에도 우리가 거리를 둬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라브뤼예르가 꼬집었던 것으로,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하며 그들이 우리를 평가할 때 우리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오직 그들만의 문제인 수만 가지 요인에 의해 그 평가가 왜곡되고 부정적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결정적 삶은 이러한 낯섦도 견뎌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36-37


자기 생을 스스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욕구는 타인에게 조종당하지 않으려는 욕구와도 일치합니다. ..

조종은 계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기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최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입되는 광고, 속임수, 정보의 차단,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그 어떤 생각의 형성도 못 하게 만드는 세뇌 작업등입니다.

조종이 악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자아상에 의해 걸러지지 못하는 영향력이며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가진 자아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내적 상처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우리는 무시당합니다. 제대로 된 독ㄹ비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존엄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가혹한 행위입니다. 

가장 비열한 것은 겉으로 바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세간에서 통용되거나 심지어는 높이 평가받는 장면이나 은유, 미사여구의 공식 등을 통한 은밀한 조종입니다. 세계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중에느 ㄴ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상과 자기 결정적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정치적 연설 같은 것들이 이런 방식의 이야기들로 넘쳐나 수없이 많은 생각의 들러리들을 양산하지요.

그것에 대항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을 서술하는 데에 이 방식이 정말로 옳은 방식인가? 내가 생각하며 느끼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는가? 막강한 권위에 의해 제정된 요란한 공식이 띠는 당위성이 지극히 당연하게 다가올수록 우리는 더욱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잇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참됨과 독창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37-38


제가 원하는 문화는 조금 더 잔잔한 소리가 지배하는 문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도움을 받는 고요함의 문화입니다. 오직 그것이 최우선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런 문화 말이에요.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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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자기만의 일과 사랑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윤리 규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탐구하라.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길을 대신 만들도록 허락하지 마라. 이 길은 당신의 길이자 당신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다. 다른 이와 함께 걸을 수는 있으나, 어느 누구도 당신을 대신하여 걸어 줄 수는 없다."  7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을 맞는다면 그건 뭔가를 얻었을 때가 아니라 잃었을 때일 것이다"라는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뭔가를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인생에 대해 절실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23-24


바깥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따윈 무시해 버려. 그건 모두 악마의 장난에 불과해. 진실은 자네 안에 있어. 자네 안에서 답을 찾아, 그리고 자네 영혼에게 영원한 자유를 안겨 주라구! - 호어스트 에버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26


사람에게는 때때로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무싀식은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단조로운 일상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33


살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있다.  35


스스로를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36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주인공 크리스는 아들에게 말한다. "누군가 너에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게 하지마. 희망이 있다면 그걸 지켜야 해."  42


대화가 인간의 지적 활동에 묘약인 것처럼 고독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묘약이다. - 에밀 시오랑  51


친구를 얻는 가장 좋은 길은 스스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73


세상과 떨어져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사실 고된 정신 훈련 중 하나다. 혼자 여행을 하면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두려움들과 후회들이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몰려올 때가 많다.  74


사회적 통념이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를 제약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화와 상반되는 문화권으로 떠나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84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확신이 설 때까지.  91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겠다,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말하면서도 한낱 담배에 연연하고 집착하는 나를 보니 한심스러웠다.  102


"즐거운 추억이 많은 아이는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 이라는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행복한 여행의 기억이 사람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107


한 번 불운한 일이 있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길을 잃으면 길을 찾아주는 사람을 만났고 발을 다치면 걸을 수 있게 붙들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

아프리카나 아니아 또는 남미처럼 언어가 다른 곳을 여행할 때는 말이 아닌 눈빛으로, 마음으로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세비야 골목길에서 팔던 그 찻잔을 샀어야 했는데..'하는 후회가 몰려올 때는 원하는 게 있다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지 말자는 다짐을 한다.  119-120


뜨거운 물에 자꾸만 가까이 가려는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은 다치지 않을 정도의 뜨거운 물을 손등에 살짝 찍어 주는 일인 것처럼 인생에 가장 좋은 공부는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121


17, 18세기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에게는 귀족 사회에 입문하기 전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여행이 있었다. '그랜드 투어'라고 불린 이 여행은 영국에서 시작해 파리, 로마, 피렌체, 나폴리, 폼페이를 거쳐 인스부르크, 베를린, 뮌헨, 암스테르담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는 여행이었으나 귀족들은 너도나도 자식들을 떠나보냈다. 그랜드 투어를 하지 않으면 세계의 정치와 사회, 경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의 젊은 후계자들은 가정 교사와 하인과 통역관까지 실은 대규모 마차 부대를 이끌고 전 유럽을 떠돌며 새로운 문화를 몸소 체험했다.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는 귀족 사회의 예법과 언어를 배우고, 로마와 나폴리, 폼페이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공부했으며, 피렌체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익혔다. 이후 철도가 대중화되면서 그랜드 투어는 점차 사라졌지만, 나는 '세계를 여행하며 세상을 직접 배워야 한다'는 가치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121-122


나는 여행이 인생의 한 시기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늘 새로운 세계를 배울 준비를 해야 하고, 삶의 어느 시점에서도 성장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137-138


프랑스 철학자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여행이 실제로 시작되는 지점을 "집을 나서면서 현관문을 닫고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말했다. 여행의 실질적인 첫 단계는 떠나온 장소에 있지 않으며, 우리가 갈망하던 장소에 도착하지도 않은 '사이'의 시간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144


니콜라스 바로우는 소설 <세상 끝에서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에서 기차 여행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 옛 시절이 떠오른다.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객이라 불리고, 세상이 한없이 크게만 느껴지던 시절. 그 시절 사람들은 기차에 올라 차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목적지를 향해 평안하게 나아갔다." 기차가 전 세계적으로 낭만적인 여행 수단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146-147


지혜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여행을 한 후, 스스로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 마르셀 프루스트  190


내 생각에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쉽게 잊혀지는 것은 일상에서 그와 같은 경험을 다시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1


짐을 줄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간을 줄이는 것이다.  201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205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거 어느 때에도 오늘날처럼 인간에 관해 다양하고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과거 어느 때에도 오늘날 사람들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던 적은 없었다."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지식 외에 별도로 스스로를 탐구하고 존재에 대해 알아가야만 한다.

또 다른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특성을 발휘할 수가 있고, 그래야만 무언가 올바른 것을 이행할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 역시 인간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만, 삶의 여정에서 발전을 이루고자 할 때 자신의 특성과 재능에 적합한 것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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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 여행자의 생각(짠홍즐)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이다. 당신이 여행 가방을 메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때, 당신은 '고향을 등에 메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된다...

내가 길을 떠날 때 가져가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나는 한 트렁크의 '편견'과 '오랜 습관'을 가지고 간다. 나를 속박하는 시선까지도.  7


사물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이하고 이국적인 환경과 낯선 풍습은 관찰자 '스스로의 대조'를 통해서 나온다. 

우리는 등 뒤에 고향의 '감옥'을 메고 다닌다.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만 리 길을 걷는 것이 낫다'  8


당신은 여행을 하면서 변했다. 당신은 '타향을 등에 메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9


돌아온 당신은 원래의 당신을 '부정'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원래의 당신을 '포함'하고 있다.  10


'행동하기'의 의미  12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여행 가방을 메고,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다.  16


이곳에서 나는 제법 괜찮게 생활했지만, 빠르고 투박하게 도시 사람들을 흉내낸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18


여행은 우리의 몸을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감각기관에 자극을 주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28


2세기 여행엔, 미처 발견되지 않은 대륙도 없고, 신비롭고 구하기 어려운 향신료도 없다. 특별히 정복해야 할 밀림도 없고, 문명 밖에서 생활하는 인종도 없다. 

그저 당신의 몸으로 직접적이고, 강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만 하면 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따뜻한 물, 비누, 각종 건강관리 물품, 심지어 수면용 치아 교정기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8


태양 아래에 더이상 새로운 세계는 없다. 오늘날 콜럼버스는 반드시 천진한 영혼과 빈곤한 식견을 갖고 있어야만 계속해서 그만의 여행을 할 수 있다.  39


어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이 꼭 그 도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57


나는 지금 발리 쿠다 거리에 서 있다. 이곳은 발리 섬에서도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히피 슬리퍼를 신고 있다. 그들은 연신 땀을 닦으며, 관광산업 때문에 발리 섬의 순수한 풍토와 인정이 망가진 것에 대해 성토한다.

"이 모든 게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팽창 때문이야! 자본주의가 여행의 진정한 묘미까지 파괴하고 있어."

한 프랑스 사람이 분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보고 싶어했던 발리 섬이 아니야!"

"그럼 어떤 발리 섬이 보고 싶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나는 쪽빛 하늘과 백옥 같은 모래사장, 친절한 사람들, 오래된 사원,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공예품을 보고 싶었어. 그리고 그림자극에 나오는 인형을 사서 돌아가고 싶었다는..."  75-76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여행자의 눈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도시를 감상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여행자의 시선은 하루나 이틀 혹은 이십여 일이 지나면 막을 내리지만 현지 사람의 생활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는 것을 오랜 여행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어하는 여행자들의 호기심과 욕심을 위해서 생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과 자손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낟.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도시를 만들어 가야 하지, 여행자의 눈을 의식해서 일상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거나 보여주기식의 공연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76-77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여행을 아름답게 만든다.

여행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현지 사람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뿐이다. 침묵은 적의가 아니며, 가장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85


같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친구 되기가 쉬운 것도 아니었고, 같은 언어를 말하지 않아도 왕왕 아주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 여행자와 현지 사람들 간의 차이는 문화성과 비사회성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현지 사람들은 여행자가 자신들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하는 것을 용인해주고, 특이하다고 받아들여준다. 게다가 여행자가 현지 문화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어울리지 못해도, 여행자가 우둔해서 아무론 감동을 주지 못해도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겨 조용하고 너그럽고 포용한다. 언어를 벗겨낸다. 언어를 벗겨내면, 언어를 위해 건립된 모든 사유 체계 또한 벗겨진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본성을 드러내며 상대를 순수하게 마주하게 된다. 어떠한 사회의 통념도 개입되지 않는다. 진실하고 평등한 대접만이 남는다.  87-88


언어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유일하게 개인의 영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해.  90


여행이란 편견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106


인류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점점 더 판단력을 잃어간다. 예전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던 많은 문제들도 지금은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132


현대인들은 큰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자신들은 농업시대 조상들이 토지에 대해 가졌던 중요한 관념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 생활 방식을 따르고, 물과 풀을 따라다니며 살고,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하고 쉬는 데 제약이 없으며,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산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도시의 유목민' '보보스족' '현대 보헤미아인' '신(新) 집시족'이라 일컫는다.  133-134


"우리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여행에서 막 돌아온 다보스맨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역시 방금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다.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원주민을 봤어요. 가난하게 생활하지만 위엄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우리는 그동안 바쁘게 돈을 버느라고 진짜 생활을 잊지 않았던가요?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건 그들의 삶이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169


경계(境界 지경경 경계할계)가 여행자의 길을 가로막았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완전한 파랑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사이가 무형의 눈금과 경계선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모든 선(線 줄선) 뒤에는 '자연의 힘'과 '정치 권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자연의 힘'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국경을 긋는다. 마치 하느님이 손수 그린 선 같다.  172


현대인들은 국경을 넘기 위해 영사관에 가서 비자를 신청한다. 정치 체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지시를 기다린다. 비자를 신청할 때면 '국가'라는 구조 아래에서 개인은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73


사실 '군중'이라는 존재는 쉽게 매수당하는 존재다. 집권자는 작은 당근을 던져주면서 군중이 사소한 행복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실제로 영구에서는 지금까지 프랑스처럼 피비린내 나는 대혁명이 발생한 적이 없다. 영국 정부가 중대한 법률에 있어서는 민중의 권익을 위해 신속하게 양보를 했기 때문이다.  183



여행자는 여행길에서 종종 고독을 느낀다. 또다른 시공간이 사방에서 떠다니고, 중가넹 가로막혀 볼 수 없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렇지만 이런 고독은 건강한 고독이다. 세상 사람들은 엄숙하게 가라앉은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면서 필사적으로 세상의 보폭을 뒤쫓는다. 여행자는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나태할 수 있는 존재이다.  239


여행자는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여행자는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자유 역시 가상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240



어디를 가든지 간에 여행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여행을 하는 시간은 공백의 시기이다.  241



여행자는 여행길에서 화려함이 뒤섞인 낯선 환경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이국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자가 떠나가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떠남에 '버린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42


당신은 어떤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그 사건이 발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행자의 가장 큰 슬픔은 무언가가 막 좋아지기 시작했거나 익숙해졌을 무렵 그 풍경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예전에 둘러본 곳을 다시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눈앞에서 보았던 풍경, 들이마셨던 냄새, 몸을 스쳐갔던 바람, 사랑하는 연인과 그 나이의 당신..

그 모든 것이 아마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변할 것이다. 당시의 정황, 기분, 감정 그리고 그런것들을 남겨두고 싶은 당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환경은 한번 지나가고 나면 절대 되돌아오지 않는다.  244-245


여행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아름다운 경험들은 대부분 생명의 가장 깊고 신비로운 감동과 연관되어 있다.  245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도 본인이 직접 경험햇던 견고한 사랑만 못하듯 여행도 그렇다. 여행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속하기 때문이다.  246


여행 경험은 병에 포장된 와인 같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되어 표면적으로 같은 병에 담기고, 같은 공장 상표가 붙어 있다. 그렇지만 생산 연도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몇 달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맛의 차이도 아주 크다.

그러나 코르크 마개를 개봉하기 전까지 당신은 그런 세세한 차이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쌍둥이보다 더 쌍둥이같이 닮은 와인 병은 손으로 만져봐도 프랑스에서 대량생산된 와인처럼 생각된다.

코르크 마개를 개봉한 와인 병에서는 알라딘에서 요정 지니가 램프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처럼 향이 흘러나온다. 술은 담갔던 해의 기억은 빠르게 공기중으로 퍼져가고, 코를 통해 들어가 머릿속에까지 생동감 있게 회복된다. 당신은 이내 그날의 날씨와 공기중의 습도가 포도 생산과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녹색 넝쿨들이 만들어낸 물줄기가 태양 아래 반짝이고 자홍색 포도가 요트처럼 드문드문 나타나는 모습이, 허리가 굽은 나이 많은 프랑스 농부가 거치고 큰 손으로 포도의 겉을 세심하게 어루만지며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당신의 눈에 선하다.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와인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은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249-250


여행은 연속된 기다림이다. 휴가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저금통장 속 숫자가 이상적 수치에 이르기를 기다리고, 적절한 계절을 기다리고, 함께 여행할 사람을 기다리고, 길 위에서 기다리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리고, 착륙하기를 기다리고, 수하물 컨베이너 벨트가 운행되기를 기다리고, 택시가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고, 예약한 호텔 객실이 정리되어 체크인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미술관 개장을 기다리고, 여행 관련 잡지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일출을 기다리고, 버스가 자신을 다른 장소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고... 여정 동안 여행자는 늘 기다린다.  260


여행자는 점점 '잘 기다릴 수 있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여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잠들 수 있다. 미소를 지으며 낯선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여행자는 하릴없어 보이거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여행자는 당당하다.  261


기다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즐거움이다. 허무는 모든 여행자가 반드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짐이다. 기다림이 습관이 된 그날, 나는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62-263


현대 여행 시스템에서 문화 경험은 하나의 '상품'이다.  280


기계의 시대에서 문화 경험은 수차례 복제될 수 있다.  281


문화 복제는 여행자의 사진첩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284


여행은 한 편의 영화와 같아서 여행자는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감상하는 대상은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이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타국의 풍경은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카메라와 비디오는 갈수록 가벼워져 휴대하기 좋아졌고, 가격도 저렴해졌다. 덕분에 우리는 길을 거닐면서 만나는 풍경을 기록하고, 관찰하면서 새로운 환경과 교감한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그 화면을 편집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상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여행은 더 '사유화(私有化 사사로울사 있을유 될화)'된다. 뉴욕은 더이상 뉴욕이 아니고, 파리도 더이상 파리가 아니다. 도쿄 또한 더이상 도쿄가 아니다. '나의' 뉴욕, '나의' 파리, '나의' 도쿄다. 이는 이 시대의 여행서가 대량으로 쓰이고 복제되면서도 전에 없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모든 사람들은 여행을 할 수 있고, 사적이고 은밀한 감상을 할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모든 여행자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여행 사진은 점점 결혼식 사진과 신생아 사진처럼 귀중한 특징을 지니게 되어싿. 삶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계화 시대에 대량생산된 물건같이 무엇인가가 일단 많아지면, 더이상 귀하지 않게 된다. 결혼식 사진, 신생아 사진, 여행 사진을 전시할 때 당사자는 흥미진진하고, 생생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방문객은 예의 있게 참으면서, 틈틈이 시계를 보며 자리를 떠날 기회를 찾는다.  285-286


대중은 우매하고 세속적이기 때무넹 상업 시스템 안에 빠지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대중은 매일 매체와 광고의 최면세 걸려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이 창의적이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들의 행위는 상인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288



후기 - 자유, 독립, 여행 그리고 여행자

만일 갈릴레이가 당시 로마 교황청에 도전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드이 귀족 권력의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고, 여자들이 스스로 '제2의 성'이라는 말에 만족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봉전사회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구가 사각형이라고 믿고, 끝없는 여해을 하면서 세상의 가장 자리와 마주하고, 연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나는 아마 전족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여행을 떠나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A부터 B까지, B부터 다시 C까지, 다시 C에서 D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명의 과정은 '나'라는 한 주체가 호기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갈망하고, 탐색하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여행자의 정신인 것이다. 세계느 ㄴ이렇게나 넓고, 여행자는 한 도시에 머무는 것을 만족하지 않는다. 여행자는 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도시에 가고자 한다. 높은 산을 오르고 나면 더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한다. 지도에 표시되었거나 표시되지 않은 장소에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찾는다. 여행자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무지하지만 용감하고, 미지의 것에 매료된 사람이다. 이 세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자에게 제공한 모든 경이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302-303


여행은 여행가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밀란 쿤데라가 묘사했던 것처럼 세상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 같아서 갑자기 가운데 균열이 생겨나고, 그 틈을 통해서 당신은 또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세상의 뒷면을 보게 된다. 당신이 평소에 볼 수 없고,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또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의 표면은 평온하고 안정적이며, 결점이 없고 아름다워서 당신의 시야를 가득채웠다. 하지만 추악하고 무서운 틈은 표면적인 세상의 완전함을 파괴한다. 당신이 그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정보들을 누설한다. 틈은 당신이 과거에 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조차 못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틈은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신의 관점은 유일한 관점이 아니다. 당신이 독단적으로 정한 표준은 전 세계의 표준이 아니다. 당신이 안심하고 기대온 지식은 사실 아주 혀뵤소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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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과 대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강하고 깊은 존재로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12


근대는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운명의 부담을 가능한 한 줄여 주려는 시대입니다. 자연마저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간을 위한것으로 길들이고, 사회도 빈곤과 불평등을 줄여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안락한 삶을 보장하려는 것이 근대의 경향입니다. 또한 근대는 사람들이 투쟁하지 않고 서로를 동정하고 도우면서 평온하게 사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깁니다.  13


장영희씨는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정신을 상기시킵니다. 스스로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상어 떼의 정신입니다. 상어 떼는 노인이 힘겹게 잡은 대어에 달려들어 수비게 그 고기를 뜯어 먹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쉽고 안락하게만 인생을 살려는 정신을 '말세인들의 정신'이라고 일컫습니다.  16


저는 이 책에서 니체라면 우리가 사는 것을 버겁게 느끼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질문들에 어떻게 답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살마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예수나 부처가 설파하는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을 약한 자들에 대한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의 정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니체가 주창하는 정신은 예수나 부처식의 사랑이나 자비의 정신도 아니고 제국주의적인 정신 역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약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주창하는 근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는 강건한 정신으로,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강화를 위해 오히려 요청하는 패기에 찬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 뛰어넘을초 사람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



첫 번째 질문 -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초조가 세상을 뒤엎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20


쇼펜하우어,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22


과학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알려줍니다. 

이에 반해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27


'아름다움이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세계에 나눠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0


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43



두 번째 질문 -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무엇일 필요합니까?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 있는 삶이 된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은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자의 정신에서 ㅇ라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47


니체가 말하는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합니다.  48


니체는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라고 이야기했지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붕괴된 자리에 남아 있는 가치와 의미의 공백 상태는 정말이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이라 명명.  50-51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잇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60


중력의 정신이란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두려움과 걱정, 시기와 원한과 같은 부정적인 정신을 뜻합니다.  70



세 번째 질문 -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왜 하나도 없을까?

위험하게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수 이쓴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노력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면 된다'는 철학이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의지의 철학을 '단죄(斷罪 끊을단 허물죄)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단죄합니다. '그대가 실패한 것은 그대의 노력 부족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공부 재능이 없다면 아이에게 주어진 다른 운명적 소질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계발시켜줘야 하고, 이렇다 할 아무런 재능도 없으면 평범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자세를 키워줘야 하겠지요.  77-80


두 번째 태도는 숙명론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로서 모든 것을 운명 타승로 돌리는 태도에 해당합니다. 자유의지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죄하지만 숙명론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80


세 번째 태도는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역경을 오히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면서 험난한 운명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운명애(運命愛 옮길운 목숨명 사랑애)의 철학은 언뜻 보면 자유의지의 철학과 동일한 것 같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런 철학은 힘든 운명을 하나의 기회로 승화시키려고 합니다.  81


운명애의 사상에 엄습되었을 때 니체는 그의 책이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로 전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했고 그것을 긍정했습니다.  85



네 번째 질문 -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적과 대등하다는 것 - 이것이 대개 성실한 결투의 첫째 전제다. 상대방을 얕보고 있는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103


니체는 강간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성욕을 제거하려 하거나, 경쟁심이 인간들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경쟁심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치통을 막기 위해 치아를 빼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111



다섯 번째 질문 - 신을 믿지 않으면 불행해지는 걸까?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 살해자들 중의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위호할 것인가?' 

'신은 죽었다' 니체의 이 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달리 신일 수 있는 이유는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근대에 들어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되엇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서양의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부딪힌 문제들을 신에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보통 자연 또는 사회에서 오는 것이지요. 폭우나 가뭄처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해가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재해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또 잘못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구조의 개혁을 통해서 극복하려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부딪힌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따라 인간은 신보다는 잣니의 힘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대에 들어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벼락을 신의 진노라고 해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자연법치겡 따라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인류학이나 민속학 같은 사회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민족들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서양 사회에서 갖는 영향력은 중세 시대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19-121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니체는 종교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135



여섯 번째 질문 - 살아가는 데 신념은 꼭 필요한 걸까?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변화하는 세계를 하나의 이론 체계로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체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모두 불성실하다고 보았습니다.  166


확신이란 감옥이다.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아래에 - 그리고 자기 뒤에 - 오백 가지나 되는 확신들을 봐야 한다.  167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혹은 정치적 이념에 대한 독단적인 확신이 아닌가 합니다.  173


확신은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여러 가지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는 것, 어떤 점에서도 공평하지 않다는 것, 철저하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 모든 가치를 하나의 엄격하고 필연적인 관점에서 본다는 것 - 이것만이 확신에 사로잡힌 인간이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진실한 인간과 진리에 반대하고 그것에 적대하는 자가 된다.  174-175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175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176



일곱 번째 질문 - 예술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 살더라도 충만하게 사는 것입니다.  187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반영시키며,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라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학의 제1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응하여 제2의 진리에 해당되는 것은 '퇴락한 인간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하지 않다'라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193


니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기쁨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195


그는 예술이 삶의 위대한 자극제라고 생각했습니다.  196



여덟 번째 질문 - 죽는다는 것은 두렵기만 한 일일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우연하거나 돌연하게가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29



아홉 번재 질문 -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만의 꽃을 피워라


니체는 우리의 타고난 성격과 소질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스타일을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229


사람들은 틀에 맞추어지지 않는 자신을 악한으로 간주했고 되책감에 시달렸습니다.  

'도덕이 삶에 대한 고려나 배려 그리고 삶의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 자체로 단죄하는 한, 도덕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특수한 오류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해를 끼친 퇴락한 자들의 특이체질이다.'  233


'우리 다른 사람들, 비도덕주의자들은 정반대로 모든 종류의 이해와 파악 그리고 긍정에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았다. 우리는 쉽게 부정하지 앟으며 긍정하는 자라는 점에서 명예를 찾는다. 우리는 성직자와 성직자의 병든 이성의 거룩한 무지가 배격하는 그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이용할 줄 아는 경지에 갈수록 더 눈이 열리게 되었다.'

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을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234-235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235



열 번째 질문 -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려라


우리는 보통의 경우 초인이 아니라 안일을 탐하는 말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극복을 하려면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다...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 연명하는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합니다.  250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힘들다고 해서 함부로 눕지 말고 그때마다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적절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순히 감정과 사상을 훈련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은 바로 신체다.'  255


신체를 완전히 우리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본능까지 건강하고 기품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본능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경쾌하고 가벼우며 필연적이고 자유롭게 건강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257


그는 우리가 고귀한 인간이 되려면 보는 법과 생각하는 법 그리고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눈에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급하게 속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하나하나의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258-259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서두르지 않게 되고, 쉽게 믿지 않게 되며,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접하더라도 우선을 적의를 품은 평정과 함께 그것을 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쓰는 법인데, 니체는 이것을 '무용을 배우듯'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탁월한 무용수는 섬세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춥니다. 그런 몸짓 하나하나를 언어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요. 그런에도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쓸 때에는 사물들이 갖는 섬세한 뉘앙스를 느끼면서 그것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59




에필로그

니체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화되고 있는 반면 그 안의 각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회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나사 부품이 되는 대가로 안락과 향락을 누릴 수 있는 물자를 받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아무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기 바라는 소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니체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대지는 작아졌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말세인'이 그 위에서 날뛰고 있다.   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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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가벼움이 횡행하는 시대, 인문 내공을 권하다


인문적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은 어떤 문제의 핵심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주체적이고 지혜롭게 자기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  8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대개 인문적이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고, 부단한 노력은 대개 '깊이 있는 탐구'를 동반하게 되는데, 그 탐구가 인문적 사유를 유도하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탐구'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낳고 그로 인해 사람을 인문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9


지식인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들 중 무엇이 올바르고 나은 것인가를 검토하고 판단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어야 한다.

인간의 지력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으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은 지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책은 그 세 과정에 대한 이해와 그 원칙과 방법, 나아가 태도의 문제까지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10


일반적으로 지력을 발전시켜나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11




서장 - 삶을 돌파하는 힘, 인문 내공


인문적 가치의 핵심. 인문 정신의 요체 중 하나는 내 삶이 존엄하다는 것, 타자 역시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17


자기 이익에 반해 보이는 일들을 태연히 일어나게 내버려둔다.  23


나의 어머니는 .. 젊은 시절부터 근 40년 동안 남의 옷을 만들고 수선해주면서 세 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하루는 '바느질도 다 같은 것이 아니며, 하는 사람에 따라 격(格)이 다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23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는 자기 내부에 일종의 자가발전 시스템을 갖춘 것과 같다. 그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발전한다.  24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신념을 좇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기 신념대로 사는 것뿐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25


생명이 탄생하기 이전의 무(無), 생명이 소멸한 이후의 무에 대한 호기심이다.

'무'에 대한 관심, 그것은 철학의 시초이고 종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33


인간은 밖으로는 하느르이 별을 보며 우주를 상상한다. 외부 세계에 대해 일정한 형태를 상상한다. 그 일정한 형태를 '범형(凡形)'이라 한다. 또한 인간은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35


서양에서는 인문을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라고 했다. '인간성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 '인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류 문화에 대한 '정신과학'이었다. 

동양에서는 인문을 한자로 '人文'이라고 쓴다. '文'을 우리는 '글월 문'이라 읽는다. 그것은 본래 '무늬'를 의미했다. 동양에서 '글'이라 하면 주로 한문을 말한다. 동양에서 라틴어와 같은 지위를 갖고 있는 한문은 잘 알다시피 상형문자다. 상형문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의 실루엣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文'은 '무늬'와 '글자'를 동시에 의미하게 되었다.

'人文'은 직역하면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다.  37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내 생각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중 많은 것은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본 것이다. 많은 사람드은 그것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44


'혼돈의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이 아무 맥락 없는 혼돈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우리 안의 히틀러] 막스 피카르트  48


현대인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들이 맥락 없이 머릿속을 부유(浮游)할 뿐이다.  49


인문서를 읽으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생긴다.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으면 대중의 행동, 사회현상, 자연의 변화, 지식과 정보, 예술 작품, 과학기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기반해 삶의 지혜가 생긴다. 그로 인해 인문적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현명하게 인생을 살아 나갈 수 있다.  52





1부 공력(功力) - 지성인으로 거듭나는 생각의 내공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월터 리프먼  54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연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罔)'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암담해지고, 혼자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자기 생각에 갇혀 편협해지거나 오만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 것' 중 무엇이 더 큰 문제인가? 당연히 전자다. 요즘에는 '학력 인플레'라는 말이 나돌 만큼 고학력자가 많다. 유치원에서부터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20~30년 동안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비용, 노력한 만큼 지적 성취나 사고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른바 '티처 보이(teacher boy)'라는 말이 있다. '맘마 보이(momma boy)'가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티처 보이'는 선생이 없으면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유치원 시절부터 한 번도 선생 없이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이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외우는 데는 도사다. 그러나 스스로의 머리로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유추해보라고 하면 어려워한다.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적게 배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배워서 문제다. 사고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분석과 종합은 독학(獨學), 즉 혼자서 책을 읽고 이렇게 저럭헤 생각해 볼 때 배양된다.

학력만큼 지력이 발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중심의 교육제도에 있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국어, 영어, 수학의 '시험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 받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있다.  57-58


역사적으로 국가 조도의 근대적 교육의 기원은 19세기 초반 프로이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교육 목적은 군대에 충성하는 군인, 사용자에 순종하는 노동자,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은 공립학교, 개인 학교, 홈스쿨링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교육 형태를 강제로 소멸시켰으며,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게 되었다. 의 무교육의 목표는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어 '부모 없는 사회(학교)'를 구성해 기업이 필요로 하는 훈련된 노동자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낻 교육 자체가 애초부터 지성인의 양성 같은 고매한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제도 교육이 목표하는 것은 여러 지식을 하나의 의미 있는 질서로 통합하는 지적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사회가 처방하는 특정 기호와 정보를 얼마나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도 교육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없애고, 기득권을 향한 개인의 노력을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그것은 제도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비판적 사유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 같은 교재를 통해 가르친다. 문제는 이 교재들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을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교재에는 많은 지식들이 무미건조하게 '교양의 차원'에서 개괄되어 있을 뿐이다. 교재에는 여러 지식인들이 애초에 가졌던 문제의식의 심각서오가 진지함, 철받함이 소거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의 뿌리인 '현실적 문제의식'과 '윤리적 호소'를 실감할 수 없게 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학위나 학점에 대한 열정으로 대체될 뿐이다.  59


지성인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혼자 탐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그들은 그냥 많이 배워서 지성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바탕으로 '독학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성인이 된 것이다. 지성인의 핵심적 능력은 독학 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학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고, 다양한 사고를 낳는다.  61


대중매체는 여론을 전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줄 때, 대중매체는 대중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대중매체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단어를 써서 질문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통계나 답변에 대한 해석의 권한도 대중매체에게 있다. 그를 통해 대중매체가 자신이 원하는 여론을 형성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중매체가 여론을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이다. 여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생각하라'는 암묵적인 압력이 존재한다. 특별한 자기 입장이나 자기 확신이 없는 한, 사람들은 이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 판단할 리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중매체도 이런 영향을 알고 있다. 그래서 대중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여론을 가시화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여론은 '대중의 생각을 담은 결과들'이 아니라, 반댈 대중의 생각을 낳는 씨앗이다. 대중매체는 단순한 여론의 전달자가 아니다. 여론의 창조자이자 여론 형성의 주체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언론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은 세상에 없는 일이다. 그만큼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활동하는 범위는 좁고 잘 아는 사람도 몇몇에 불과하다. 언론사는 주로 경찰서, 시청, 법원, 청와대, 국회 등 국민과 당국이 접촉을 일으키는 곳에 -주로 권력기관에- 기자들을 배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주로 기사화한다. 언론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알고 개괄해줄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언론 플레이가 중요하고, 그에 따라 기업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은 대개 언론 홍보팀을 운영한다. 언론 홍보팀은 어떤 사안에 대한 보다 자료를 각 언론사에 보낸다. 기자는 보도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게 되는데, 단지 참고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보다 자료의 재뇽은 객관적이 수 없다. 그것은 해당 기관들이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내용과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언론사들이 보도 자료를 베낌으로써 독자들은 기억이나 관료 집단, 정치 집단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64-66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 근대 학교 교육의 주체는 국가이고, 그런 만큼 거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 이익의 논리가 반영되어 있다. 근대 교육 시스템은 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자를 길러내는 목적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에는 국가의 논리와 더불어 기업의 논리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66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성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상당수의 그릇된 의견들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원리에 기초를 두고 받아들인 것들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의견을 회의에 부치고 근원적인 것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추론 방식이 바로 '방법적 회의'였다. 그 과정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은 명제가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67


불교 경전 <앙굿타라 니카야(ANgutara Nikaya)>에도 리런 글이 있다. "어느 것이든 계시나 전통이나 보고 같은 것에 근거해서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것이 단순히 사변의 산물이라거나, 어느 한 입장에서 볼 때 진실되다거나, 사물의 피상적 관찰에 의한 것이거나, 선입견에 맞아덜어진다거나, 권위가 있다거나, 스스의 위신 때문이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만으로 받아들이지 말지어다."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상식과 권위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상식과 권위로 무장된 모든 관념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안으로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는 타인의 의식을 일깨울 수 있다.  68


고대인들은 관계 속에서 만물이 생겨나고, 살아가고, 소멸한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예를들어, 한자 '목숨 명(命)'을 파자(破字)해 보면 '모두 합(合)'과 '나눌 분(分)'으로 나누어진다. 이 한자에는 '합쳐지고 분리되는 과정이 반복됨'을 통해 모든 생명 혹은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고대인들의 통찰이 깃들어 있다. 내가 어제 돼지고기와 배추 김치를 먹었다면, 그것은 지금 내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잇다. 남이 나의 일부로 합쳐진 것이다. 화장실에서 우리가 큰일을 보면 그것은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진 결과이고, 죽는 것은 그것이 다시 불리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죽어 해체된 원소들은 다시 다른 생명체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이 합쳐지고 나누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다.  70-71


관계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불교의 <상응부경전>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이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탄생하고 소멸한다. 나는 타자의 존재 조건이고, 타자는 나의 존재 조건이라는 말이다.  71


흔히 인간은 '지적 존재'로 인식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지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것이 있어야 지력이 발전한다.

지식이 체감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연관성이 풍부해야 한다.  76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문제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식 자체에 집착하곤 한다. 심지어 특정 지식을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로 믿기도 한다. 그것을 '교조주의(敎條主義)'라고 한다.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지식과 사상이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늘 자문해야 한다.  77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사고는 나의 직업"이라고 했다. 지성인이 되려면 생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치열하게 사고해야 한다. 그 치열함에는 현실적 맥락 속에서 사고하는 것, 사고 내용을 현실적 맥락 속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도외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안이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8


깨어 있는 의식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계기로 생겨난다.  79


쾌락과 고통의 관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반대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인간의 대표적인 쾌락인 식욕과 성욕을 보자. 어떤 사람이 배가 몹시 고플 때 산해진미로 가득 찬 식사를 한다면 만족도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 끼니 계속된다면? 만족도는 점차 떨어지다가 나중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계속 먹어댄다면? 과도한 영양 섭취로 각종 질병이 생기고, 그로 인해 오히려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성적 쾌락도 마찬가지다. 성적 쾌락을 과도하게 추구하면 그것은 더 이상 쾌락이 아니다. 만약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쾌락은 한계효용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쾌락은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금세 저만치 달아난다. 아무리 좋은 쾌락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성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든다. 그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계속 강도를 높여가고, 한 욕망으로부터 다른 욕망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쾌락의 극단적인 추구는 불행과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지속적인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고통은 지속적이다. 배고픔, 질병, 고문 등으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82-83


여행은 현대인들이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꼽는 것이다. 사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런데도 여행이 즐거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이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탐험이다. 그 과정에서 여행자는 여러 당혹스럽고 불편한 일들과 조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여행자가 길을 헤매다 더위와 배고픔에 하루 종일 시달렸다 하자. 그러다 어두컴컴한 저역에 겨우 민박을 구해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 거기서 샤워를 하고, 먹을 것을 구했다. 그럴 때 여행자는 집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보잘것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 정말 행복하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기쁨이지!' 하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평소보다 무엇이 더 채워지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다. 더러워진 몸과 배고픔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결핍감이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플러스됨으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인 것이다. 그 마이너스는 여행하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인위적으로 결핍의 상황을 만들고, 그 결핍이 제거되는 것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런 여행의 즐거움 역시 고통과 쾌락이 동전의 양면임을 잘 보여준다.  83


인간은 범형의 구성 능력과 성찰 능력을 가진, 그리고 생각한 것을 세계에 구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분명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가능성이 오만함으로 변질될 때 인류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0


칸트 "인간은 인식된 현상세계만을 알 수 있으며, 인식되기 이전의 세계인 '물자체'는 알 수 없다.  91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감각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 감각 방식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인식도 달라진다.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 '움벨트(Umwelt)'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세계를 일컫는다. 모든 동물은 '움벨트'가 다르다. 무엇이 우월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생물은 상이한 움벨트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인간 인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해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94


모든 대상은 거리르 두고 볼 때 전체가 파악된다.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리를 두고 봐야 어디에 어떤 무넺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98


사물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은 넓게 볼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래야만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는 것은 시야의 문제를 넘어 사유의 문제다. 거시적으로 봐야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질곡에 빠졌을 때, 내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훨씬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조언이 도움이 되는 것도, 그들이 내 문제를 나보다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99


인문적으로 사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시간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100


시간적 거리가 가져다주는 지혜를 잘 표현한 유명한 말이 있다. 헤겔이 좋아했던 말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가 그것이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와 같은 여신)이고, 올빼미는 철학의 상징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올빼미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비상(飛上)하기 위해, 서서히 날개를 편다는 말이다. 지혜의 여신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철학의 상징인 올빼미, 얼마나 현명하겠는가? 그야말로 '지혜의 정수'다. 그런 올빼미가 왜 다른 때가 아닌 '황혼녘'에 날개를 펴겠는가?

황혼녘이 성찰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이나 한창 일하는 낮에는 하루를 돌아볼 수 없다. 사람이 상념에 빠지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이다. 일을 마치고 난 후, 해가 지는 시간, 세상의 온도가 가라앉는 시간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갖게 된다. '황혼녘'이란 결국 하루를 돌아볼 만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황혼녘인 노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나의 삶은 어땠나?'하고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101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사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낄 수 없다. 아무리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도 어떤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인간이 실존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도 사회 속에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번우주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존재적 의미는 오로지 사회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인간이 실존적 충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집단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집단의 논리'를 개발한다. 집단의 논리는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노리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집단 전체에게 골고루 이익을 주지 않는다. 집단 논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개 지도칭이다. 그들의 이익이 집단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집단의 논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규범으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이익은 애국의 이름으로, 종교 집단의 이익은 순교의 이름으로, 사회의 이익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집단의 논리는 공적 이익의 논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사적 이익의 논리보다는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논리는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비도덕적으로 보인다. 집단을 위한 헌신과 희생도 범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우스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익의 논리'는 그것이 개인을 위한 것이건 집단을 위한 것이건 아무리 그럴싸히게 포장되어도 그 본질은 유치한 것이다. 남과 우리를 가르고,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104


애개 개인의 가치관은 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산해내는 집단 이익 논리들이 내재적으로 수용된 결과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한 지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많은 파괴와 억압, 폭력적 현상 배후에는 집단의 논리에 기반을 둔 '집단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개념 중에 (被投)'라는 것이 있다. '내던져짐'이라는 뜻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자기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날 국가, 가문,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선택은 운명적이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속하게 된 집단이 생산한 논리를 지속적으로 학습하며 성장한다. 학습된 집단의 논리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대상화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훨씬 지성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에는 집단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적 장치들이 있다. 이 또한 집단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예를 들어, 국가는 각종 작위와 지위, 메달, 휘장, 훈장 등의 서훈 체계를 통해 청성 경쟁을 유발시킨다. 또한 국기, 국립묘지, 국가 유공자, 국민의례, 기념일, 기념행사, 어용 예술 작품, 동상, 기념관, 박물관, 정부가 발행하는 출판물 등 다양한 명예 상징을 통해 압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들은 자연스럽게 개인들을 국가 중심의 사고와 감정에 젖게 한다.  105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적 탁월성의 본래적 의미는 비판 정신이며 지적 독립성이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에서 "권력에 흡수되거나 고용디지 않고 언제나 주변에 머물러야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두 지성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말들이다.  106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생산되는 논리를 자신의 신념으로 알고 산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신념이란 자신이 이성적 판단으로 '선택'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자기 집단의 논리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학습된 집단의 논리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보거나 판단해보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7


'깊이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깊이와 넓이는 상반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고, 깊이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  108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인간의 몸을 공부하면서 인간의 몸 역시 여러 생물의 진화와 그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다. 생물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탄생과 진화는 지구 환경의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생태학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몸의 변화가 심리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심리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인간 심리의 한 양태로서의 종교로 확대될 수 있고, 종교의 탄생과 변화가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것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다방면에 걸쳐 많이 아는 사람)가 된다.

인문적 사유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생겨나는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말아야 한다. 궁금증과 지식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있다. 흔히 사람들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반대다. 대개는 아는 것이 많을수록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진다. 인간에게는 '지적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래서 궁금증도 잘 생기지 않는다. 반면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아, 내가 이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느끼게 되고, 그 '지적 공백'을 마저 채워 넣으려 한다.  110-111


인간은 제너럴리스트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분업화된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제너럴리스트적 역량을 발휘하기 힘들게 한다.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존재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이 맡은 한 가지 일만 한다. 그러면서 돈만 번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나머지 일들은 돈으로 물건을 삼으로써, 혹은 돈을 지불하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김으로서 해결하려 한다. (심지어 돈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들, 예를 들어 정서적 유대가 핵심인 가정 문제나 양육 문제까지도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다양한 능력을 이용해 직접 무엇을 하지 않는다. 대신 남에게 맡긴다. 그결과 노동의 기쁨도 상실되고, 주체적 책임도 상실되며, 의존성은 강화된다. 또한 자기 소외가 증대되며, 실존적 무력감도 증대되고, 육체와 정신의 균형 파괴에 따른 건강도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13


틀에 박힌 사고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활력을 잃을 뿐 아니라, 더욱 진보하지 못한다.

진부한 표현이나 사고를 이른바 '클리셰(cliche)'라고 한다. 클리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식상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클리셰는 진실을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클리셰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고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비단 노하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고에는 세상을 바라고는 그 나름의 고유한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스스로 '실감'하기 전에는 함부로 믿지 않는 지적 태도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이가 '이 말은 옳다'고 떠들어도 '과연 그럴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하고 자문해본다. '과연 그럴까?'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명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태도를 갖는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는 명제가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지적 권위를 획득했으며, 그 지적 권위가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시켰으며, 어떤 정치 경제적 여건이 그 말을 옳은 것으로 만들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과학적 태도다. 창의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태도와 사회과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114-115


브레인스토밍(Brainstoming)기법도 규칙적인 사고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기법은 '스캠퍼(SCAMPER)'라고 불린다.

대체하기(Substitute), 조합하기(Combine), 적용시키기(Adapt), 변형하기(Modify), 다른 용도로 써보기(Put to order use), 삭제하기(Eliminate), 역발상 해보기(Reverse)의 일곱 가지 단어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115


몸이 아픈 어떤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몸의 병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의사들은 몸에 물리적인 이상이 없어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보였다. 고통은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니! 여인은 속을 끓이며 마지막으로 어떤 의사를 찾아갔다. 그 의사 역시 물리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화를 통해 여인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발견했다. 여인은 어떠한 삶의 의욕도, 생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그것을 병의 원인으로 보고 '우울증'이라 이름 붙였다. '우울증'이 탄생하는 순간이엇다. 병명이 생긴 뒤, 의료계는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했고, 치료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제야 '가짜 환자'라는 오명을 벗고 비로소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말과 인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무엇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을 일컫는 이름이 없으면 우리에게 잘 인식되지 않는다.

말이 우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말이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 말이 갖는 이미지와 상징, 뉘앙스는 대상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말을 사유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언어 전체 혹은 특정 낱말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말은 우리의 인식을 대상에 이르게 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대상을 인식하게 해주는 매개인 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121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으면, 보이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사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햇볕, 바람, 이슬, 안개, 비, 흙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기는 어렵다. 인문적 사유가 어려운 것도 눈에 보이는 것(현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본질)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영어로 '메타피직스(Metaphysics, 형이상학)'라고 한다. 여기에도 같은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 어원은 '메타피지카(Metaphysica)'로서 '뒤, 다음, 배후'라는 뜻을 가진 '메타(meta)'와 '자연'이라는 뜻의 '피지카(physica)'의 합성어다. '피지카'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형체가 있는 것을 말한다. '메타피지카'는 '자연의 배후'라는 뜻이다. '메타피직스'는 자연을 잘 관찰해야 그 뒤에 숨어 있는 본질-형체가 없는-에 대한 이해가 따라온다는 논리를 내포한다.

이러한 논리는 동양에도 있다.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그것이다. '격물치지'에서 '격(格)'은 '잣대로 잰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사물을 잣대로 재면 앎에 이른다'가 된다. '사물을 잣대로잰다'는 말은 '사물을 잘 살펴서 꼼꼼히 따져보고 분석한다'는 의미다. '메타피직스'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잘 관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지식(앎)으로 나아간다는 논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논리가 같은 것이다.  126


문제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127


"물에 대해 가장 잘 모르는 것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131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적응'의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그런데 이 '적응'이 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의식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리성을 부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그 환경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나 집단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 질서, 논리, 체제, 문화 등을 내면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환경이 불합리하더라도 그것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면 비판적 의식이 줄어든다.

보통, 뛰어난 적응력은 생존에 유리한 장점이라고만 생각된다.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분명 그런 측면이 크다. 그러나 사회 환경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은 보다 신중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전무후무한 규모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이 시스템에 성실히 적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환경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 그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혁명기에도 마찬가지다. 혁명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폭동이나 봉기에 가담하지만,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겠다'는 명확한 목표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현실적 고통, 특히 경제적 고통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혁명에 일조하게 된다.  132


인간은 적응력이 높은 동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사회 환경의 진화를 못 따라가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점진적이지만 사회 환경의 진화는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 격차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134


우리는 누군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전에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 환경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적 사유에서 매우 중요하다. 환경과 조건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자기 자신, 인간, 사회의 본질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은 현상의 배후이자 토대다.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경과 조건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136




2부 공감(共感) - 남의 글에서 내 생각을 발견하는 독서 내공


'생기'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생기'를 추구한다. 만약 살아 있어도 생기를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생기'는 삶의 필수요소이며 쾌락의 원천이다. 생기를 충족시키는 방식에는 '극단적인 방식'과 '중용적인 방식'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에는 폭식, 과도한 성행위, 음란물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쇼핑 중독, 일중독, 폭력, 살인,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이 있다. 중용적인 방식에는 적당한 운동과 노동, 음식과 섹스의 절제, 문학 예술을 감상하거나 창조하는 것 등이 있다.

극단적인 방식은 일시적으로 삶에 큰 생기를 부여하지만,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불행과 죽음으로 몰아가곤 한다. 그러나 중용적인 방식은 반대다. 쾌감의 크기는 작지만, 육체와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삶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 이유를 보자. 개인적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독서는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중국의 비평가 린위탕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독서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하나만의 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라도 손에 책을 들면 별천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세계에 대한 시야가 넓게 트이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141-142


경험이 곧 앎이 되지 않는 것은, 경험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이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써야 메시지가 잘 전달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남의 경험처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에서 사회적 의미가 생겨나고, 비로소 글이 된다. 경험 자체가 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해석된 경험만이 글이 된다.  144


책을 읽어야 하는 개인적인 이유 두번째는, 독서가 개인을 심미적 존재(아름다운 존재), 철학적 존재(사유하는 존재), 도덕적 존재(양심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145


독서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실존적 요구를 충족시킨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이 요구에 부합해야 하고,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가 지속된다.  146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고요하게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나 모바일로 게임에 열중한다. 소음도 중독된다. 그렇게 시끄럽게 있다가 전자제품들을 끄고 책을 읽으려 하면 뭔가 허전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 고요하게 있는것은 중요하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과 대면하고, 타인과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뇌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156


독서를 하기는 쉽지만,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열정적인 독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과 연관된 문화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157


자신의 내적 욕구에 충실한 독서란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책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자신의 호기심에 맞는 책을 읽으면 누구나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그래야 열정적인 독서도 가능해진다. 또 하나는 자기 삶의 문제와 연관된 독서를 하는 것이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인생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독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독서가 된다. 자기 문제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책을 읽을 때와 달리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쏙쏙 잘 들어올 것이다. 여기에 열정적인 독서의 열쇠가 있다.  161-162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나'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다. 내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세상에 대한 이미지가 함께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인 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163


독서는 단지 저자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진정한 독서가에게 모든 책은 참고 문헌일 뿐이다.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책에 있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자기 내부의 텍스트를 발견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몰입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몰입을 '매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진정한 몰입에는 주체의의지가 살아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빠져 들었다가도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그로부터 빠져나와 "이 말이 맞나?"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거나, 내용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164


'매몰의 독서'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만 급급해 아무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165


무릇 책은 평가하고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첫째, 저자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물으며 읽어야 한다. 그 타당성은 저자의 논리와 근거가 적절한지를 살펴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그 반대의 주장은 말이 안 되는지, 혹은 예외는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반대의 주장과 예외는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이것은 책에 없는 내용을 생각하고 검토하는 것이 된다. 셋째,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현실, 혹은 나의 현실에 맞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이 역시 책에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무리 저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적용될 수 없으면 곤란하다.  165-166


거칠게 구분하자면, 지적 도약은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적 욕구를 잘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책을 읽을 때다. 이때, 사람들은 독서가 주는 지적 희열을 맛보게 되고, 그에 따라 열정적으로 책을 읽게 됨으로써 최초의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꾸준한 독서를 통해 주요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때다. 이를 기점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의를 모두 이해하는 지적 도약을 이루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독립적인 연구와 조사, 분석과 종합을 통해 여러 지적 논의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 수 있게 될 때다. 이것이 지성인으로 진입하는 단계다.  171-172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읽는 것, 좋아하는 작가가 자주 참고하는 저자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주제의 책을 잇달아 읽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네트워크 독서법'이다. 한마디로 '네트워크 독서법'이란 서로 관련 이쓴 책을 잇달아 읽는 것을 말한다.  185




3부 공명(共鳴) - 세상과 나 사이에 울림을 만드는 글쓰기 내공


신중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을 표현해도 좋은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은가'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글을 씀으로써 모호하던 생각들이 뚜렷해지고 섬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치밀한 생각들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194


글쓰기와 사유 능력의 발전은 상호 촉진 관계에 잇다. 글쓰기를 하면 사유 능력이 발달하고, 사유 능력이 발달하면 글쓰기를 더 잘할 수 있다.  195


유시민이 한 말로 기억한다. "마당발 치고 지적인 사람이 드물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하고 읽고 써봐야 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은 늘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람(집단)들과 친교 맺기를 좋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을 마음껏 비판할 수 없게 된다.

글쓰기도 어느 정도 고립을 요구한다.  197


지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기꺼이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지성인이란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소통하는 사람이고, 소통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다.  198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란 하얀 종이 위에 저자의 순수한 의도가 지나가는 길이 아니며, 저자와 독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정치, 경제적 사건이다.

C. W. 밀즈는 이런 말을 했다. "학자들이 글을 쉽고 명료하게 쓰지 않는 것은 주제의 복잡성이나 사고의 심오함과는 무관하며 자신의 지위를 걱정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 그것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높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물론 주제 중에는 쉽게 쓰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특히 철학적인 주제들이 그렇다. 그러나 학자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폼'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은 정직한 고백에 가까우며, 글쓰기에 대한 신비적 색채를 거두어준다.  199


실제로 자신의 생활 관리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작가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요소다. 시간 관리에 실패하면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다.

작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하며, 금욕적으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지적 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지적 도약은 흔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도 감수해야 할 것은 있다. 바로 세속적인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전에는 재미있고 즐겁게만 생각되던 대화나 오락 거리들이 유치하고 시답잖게 느껴질 수 있다. 지적 발전이 이루어질수록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깊어진다. 그러나 그만큼 더 인간과 사회를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보통 사람드로가 더 멀리 떨어진다는 것, 심리적으로는 더 고독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204-205


글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이 창의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경우다. 창의적인 시각이란 지배적인 시각, 전통적인 시각과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뿌리, 생각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둘째, 이전의 글들보다 새롭거나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다. 외국의 최신 동향이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빨리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혹은 오래된 정보라도 잘 알렺지 않았던 것이면 가치가 있다.

셋째,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들을 대비시켜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오늘날의 사건과 인물을 대비시킴으로써, 외국과 우리 사회를 비교함으로써 일정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과 오늘날의 사건을 비교해 이해시키는 것도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들을 낯설게 보게 하고, 우리 사회의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넷째, 결과만 알려진 것의 '과정'을 면밀하게 폭로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이미 알려진 사건이 나중에 소설화되고 영화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 사건에 대해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다. 대개 사건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글을 통해서 사건의 과정을 잘 검토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다섯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 주제에 관해 깊이 있게 설명해주는 경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만큼 습득한 지식의 양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이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독자들은 흥미를 느낀다.

여섯째, 기존의 메시지를 감각적인 글쓰기를 통해 정서적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경우다. 트깋 기존의 글이 이성적 설득을 하는 데 그쳤다면 이러한 전략은 유효할 수 있다. 어렵게 쓰인 인문적 메시지를 수필이나 소설 같은 문학적 글쓰기로 변용시켜 전달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8-209


처흠은 쉽게 시작해서 나중은 어렵게 끝나야 한다. 이 원칙을 구현하는 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흥미로운 것에서 따분한 것으로 써 나간다. 글을 흥미로운 것으로 시작하면 독자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선택 받기 쉽다. 여기서 '따분한 것'이란 식상하거나 고리타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것,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설명하기 까다로운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개인적인 양상은 사회적인 양상의 일부이며 실례다. 그러나 개인적인 양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사회적인 양상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개인적인 예로 글을 시작하면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도 쉽다.

셋째,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써 나간다. 구체적인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건 혹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 그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철학적 담론 같은 추상적인 내용을 나중에 쓴다. 그러면 역시 독자들이 부담 없이 글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210-211


어디서 좋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첫째, 남에게 받은 질문이나 대화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타인과 대화하며 산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에는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을 하는가?', '나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그 말은 어떤 논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그 논리는 어떤 권력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가?' 같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타인들과 대화, 그리고 타인과 나의 대화를 잘 곱씹어보면 많은 글감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해 본다. 인류의 정신사는 지배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풍부해져왔다. 지배적인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견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견해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의 중심에는 대개 권력의 작용이 있다. 또한 그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지배적인 견해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그런 새악을 갖고 늘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자신이 갖고 잇는 불만과 바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불만과 바람에 귀 기울인다. 예를 들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불만과 바람이 글이 된 경우다.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나타난 농민과 노동자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모어의 불만,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 그 바람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통해 제시된다 - 글의 모티프였다. 인문적 글쓰기는 비판적 글쓰기이고, 그것은 사회적 불만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은 인문적 글쓰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경험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경험은 가장 기본적인 글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경험 중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찾으면 좋은 글감이 될 수 있다. 경험 중에는 사회적 의미가 본래 강한 것이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험들이 많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섬세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동서고금의 유명한 일화나 에피소드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다. 이야기는 대중적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쉽고 재미있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은유로 쓰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야기로도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이용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중에 쓰일 법한 이야기를 접하면 평소에 잘 수집해둘 필요가 있다.

여섯째, 시사적인 사건에서 글감을 발견한다. 시사적인 사건들은 사회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집약되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관찰하면 사회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사적인 사건은 두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대개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 사회적 이슈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일곱째, 개념에서 글감을 찾는다. 항상 말이 중요하다. 개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하나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일정한 관점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노동의 유연화'를 보자. '노동의 유연화'는 친자본적 친 기업적 관점을 담은 말이다. 실업자, 비정규직, 인턴, 파트타임을 양산하는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자에게 결코 '부드럽지 않다' 그것은 팍팍한 삶을 의미할 뿐이다.

이렇듯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하고 쓸 것들이 널려 있다.

자세히 관찰해야 포착된다.  211-213


글도 자기 취향이나 기질에 맞게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잘 써지고 좋은 글도 쓸 수 있다.  215


비평가는 자기 말을 하되, 작품을 매개로 말하는 형식을 취할 뿐이다.  218


비평가는 객관적인 작품 해설이 아니라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게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끼어들어 독자의 시선을 조작한다. 한 마디로 '관찰의 조작'이다.  219


서평 쓰기는 습작기에 있는 사람드에게 분명 용이한 측면이 있다.  221


독후감이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 것이라면, 서평은 논리와 근거를 동원한 이성적 글쓰기다.

독후감이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글쓰기라면, 서평은 좀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글쓰기다.  222


서평은 독서하다가 떠오른 문제의식이 있다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중에 문제의식이 있으면 그것을 주제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해 글을 써내면 좋은 서평이 된다.

서평도 창작이다. 자기 생각을 쓰는 것이다. 책을 매개로 한 자신의 생각과 통찰을 적는 것이다.  223


칼럼을 쓰는 것 외에 시사적 글쓰기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독립적인 인터뷰어(interviewer, 인터뷰를 하는 사람)가 되는 것이다.  229


'인문적이면서 문학적인 글'인 인포멀 에세이는 작가의 철학과 인격, 정서가 잘 조화된 글이라 할 수 있다.  231


인포멀 에세이를 쓸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소재를 붙들고 파고드는 집요함이다.  233


철학적인 글쓰기에서는 암시와 비유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암시나 비유는 메시지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그것을 뭉개면서 의미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235


링컹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게 장작을 패기 위한 여덟 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를 가는 데 여섯 시간을 사용하겠다." <장자>의 [소요유]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백 리 길으 ㄹ가려는 사람은 하룻밤 양식을 찧으면 되지만, 천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모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준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란 평소 읽은 책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것이다.  242


자료 정리를 하면 첫째, 백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어떻게 쓸까'가 아니라 '무엇을 쓸까'이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절실한데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글감이 없다면 무작정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일이 아니라, 자신이 인상적으로 읽은 책들을 자료 삼아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책 내용 중 마음에 드는 글을 베끼고, 그 내용과 관련해 떠오른 자기 생각을 컴퓨터에 옮겨 적어야 한다.

자료 정리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더 좋은 글을 쓰게 된다.  243-244


둘째, 자료 정리를 하면 자기 세계관이 치밀해진다. 글쓰기가 힘든 것은 단지 표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거이다. 이 문제 역시 자료 정리를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떤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컴퓨터에 옮겨 적을 때, 그 글의 내용은 대개 자신이 적극 동의하는 내용인 경우가 많다. (비판하기 위해 베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얼마 안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리된 자료는 '자신이 동의하는 내용들'이 거대한 집적물이다. 그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로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는지가 명확해진다. 내가 내 생각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44-245


셋째, 자료를 정리하면 문장력이 좋아진다. 자료 정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베껴 쓰는' 과정이다. 베껴 쓴 이후에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주 그 자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입력된다. 자료 정리를 하다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양이 늘고, 어휘의 개녀모가 지시성에 대한 감각이 섬세해지며, 문장과 표현이 정밀해지고, 논리적 사고 및 언어 사용 능력이 생겨난다. 심지어 문장의 리듬감까지 익힐 수 있다. 문장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좋은 방법을 놔두고 문장력을 강화하기 위해 문법, 맞춤법을 공부하거나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책을 통째로 베끼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자신의 부족한 어휘량'을 채우기 위해 사전을 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 대비 효과가 낮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자료 정리'만 한 것은 없다.  245


글을 간결하게 쓰라.

첫째, 불필요한 부사를 줄여야 한다. (사실, 일반적으로, 더 이상...)

둘째, 불필요한 '형용사'를 줄여야 한다. (유명한, 오래된, 비참한...)

셋째, 불필요한 지시어를 지워야 한다. (이처럼, 그러한...)

'빼도 말이 되는지'를 본다. '빼도 말이 된다' 싶으면 되도록 빼는 것이 좋다.

넷째, 불필요한 접속사를 최대한 빼야 한다. (즉, 그리고...)  275-277


인생에는 별자리를 보는 것과 눈앞의 파도를 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배가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그 두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회가 자본에 의해 지배 받고, 과학기술이 첨단화될수록 인문적 사유 능력은 더욱 절실해진다. 왜냐하면 자본과 과학기술은 그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인문적 사유다.  315


비판적 이성이란 '왜(why)'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비판적 이성을 사용하지 않으니, 삶에 대한 확신이 없고, 정체성이나 진로 문제 같은 것을 서른 가까운 나이에도 고민하는 일종의 정신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도구적 이성이란 '어떻게(how)'를 묻고 답하는 이성이다. '어떻게 하면 집값을 더 올릴까?', '어떻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까?', '어떻게 하면 컴퓨터나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이 도구적 이성에 속한다. 비교해보면 도구적 이성보다 비판적 이성이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사용해야 가치 지향적인 삶, 후회 없는 삶,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에 훨씬 경도되어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현대 사회의 성격 자체가 도구적이기 때문이다.  317


경제 발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느냐'를, 가학기술의 발달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리느냐'를 문제 삼는다. 두 가지 모두 '어떻게'를 문제 삼는다. 거기에는 '왜 더 많은 부를 축적해야 하느냐?' 혹은 '왜 더 많은 편리함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뇌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도구적 이성'이다.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의 발전의 맹목적 추구는 현대사회에서 압도적인 분위기와 생활 방식, 사고 방식을 만들어낸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사는 개인들 역시 도구적 이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성의 도구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지 않고 곧바로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318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글에게 환경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오염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지금도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다.그는 애초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평생 환경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염된 환경은 가장 익숙한 환경이다. 그런 그가 환경의 위기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경계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환경 문제에 관한 한, 독일의 이론가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더 옳아 보인다. 그는 마르크스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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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길은 내가 만들어야 한다


제자백가 시대의 종합적 텍스트가 세 권 있는데 <관자> <순자> <여씨춘추>라는 책이에요...

<여씨춘추>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한 편, 한 편씩 논문을 써서 모은 거예요. 편집만 여불위가 한 거고요. <브리태니커>같은 완벽한 백과사전이죠. <순자>는 유학이 입장에서 정리한 제자백가 백과사전이고, <관자>는 관중의 입장에서 정리한 춘추전국시대의 백과사전이에요.  324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하려면 <논어>니 <장자<니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자> <순자> <여씨춘추>, 거기다 <한비자>까지 추가해서 네 권 정도를 먼저 읽어야 해요.  325


<순자>에는 성악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조를 만든 것은 후대의 유학자들이에요. 순자에게서 성악(性惡)이라 함은 자연성, 생물성이에요. 어린아이 같은 터프함. 성악에서 악(惡)이라는 말은 윤리적 합의르 띠는 게 아니라 거칠다는 뜻이에요. 도자기가 안 된 진흙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즉 학습해야 한다는 거죠. 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순자가 생각하는 악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거예요. 우린 거칠다는 거죠. 극기복례, 즉 우리의 성은 악 하지만 인위적 노력으로 선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 맹자는 많이 협소해요. 그래서 우리의 허영에 불과한데도 선이라는 말은 더럽게 좋아해요. 악하면서.(웃음) 나는 바꿀 데가 많다고 자각하는 것이 맞는데, 다 선하대요, 선하기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치철학 테마예요. 성악설대로라면 우리 인간은 거칠잖아요. 진흙이 제 혼자 그릇이 되진 않는다고요. 선생이나 사회의 규범이 필요하죠. 그래서 정치권력을 정당화해요. 반면 성선설대로라면 인간은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양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면서 맹자를 복원시키는 거예요. 국가권력이 제후를 간섭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를 간섭하지 말라는 거죠.  328-329


<맹자>는 지식인 자율의 담론이에요. 군주권 중심이 아니라. 유학의 비극은 순자가 죽고 맹자가 뜬 데 있어요. 여기에는 주자(朱子)의 공이 크죠. <순자>를 빼버리고 <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사서를 묶어 '공맹(孔孟)'을 만들어버렸으니. 순자로서는 안타깝죠. 당시 최강이었는데. 그래서 사상가는 뒤에 가봐야 알아요. 뒤에 빛을 내주는 사람이 없으면 사상가는 죽어요.  330


춘추전국시대를 겪은 동양 담론들은 '지금 흥한다고 계속 흔하냐, 지금은 흥해서 사람이 많지만 곧 훅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얻어놔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거예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만든 담론이죠. 애초에 전쟁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것이 동양 담론의 비극이에요.  354


노자의 이름이 노담(老聃)인데요. <장자> 내편에서 노담을 비판해요. 노담이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요. <장자> 맨 뒤에 <천하(天下)>편이 나오는데, 장자의 후학들이 제자백가 역사를 쓴 거예요. 그걸 보면 노자와 장자는 학풍이 달라요. 장자 후학들도 장자가 노자를 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장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니까요.  357


유가와 묵가 말고는 학파적 자의식이 없었어요. 나머지는 다 개별 사상가들이라고 보면 돼요. 후대에 도서관 분류했다너 사람, 한나라 때 사마천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학파로 묶어서 분류한 거죠.  358


<장자> 내편이 장자 본인이 쓴 쪽에 가깝고, 외편은 후학들이 썼다고 해요.  359


우리한테 시급한 과제는 자유로운 개인이에요... 

가끔 그런 경우도 많이 봐요. 민족주의가 가진 조폭성, 페미니즘이 가진 조폭성, 피해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진 조폭성. 용서될 수 있는 조폭성이지만 그 조폭성이 또 다른 공격성을 낳으니까 문제죠. 용서는 돼요. 이해는 되지만 더 약한 사람을 공격할 때는 큰 문제죠. 우리 민족주의가 제3세계 노동자들을 수탈하는 것 보세요. 엄청나다고요. 일본 놈들한테 그렇게 당해놓고서.  367




chapter 7 철학, 한국 사회를 보다


공동체 생활의 원리는 사랑이에요. 아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373


우리 사회에 치명적인 텍스트가 <고타 강령 비판>이에요. 저는 인문사회 쪽 사람들이 이걸 제대로 안 읽는 게 참 웃겨요. 왜 안 읽는 줄 아세요? 마르크스가 자기들 입장을 바로 공격하니까요. 좌우지간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개소리를 하는 거라는 내용이거든요. <고타 강령 비판>은 엥겔스가 'xx' 처릴르 많이 해요. 마르크스가 욕을 너무 많이 써서.(웃음) 엄청 흥분해서 썼거든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이념을 기껏 만들어놨더니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자기 이름 팔면서 나오니까 화가 난 거죠.  376


인단 남의 일엔 간섭하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그럴 때에나 간섭할 수 있는 거예요. 나에게만 간섭 안 하면 되다느 게 아니에요. 타인에게 근본적인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우리 이웃이 뭘 하든 건드리면 안 돼요. 반면 누가 나나 우리 이웃을 건드렸을 때는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선이 있어요. 그 선을 지킬 수 있는 여지, 우리 사회엔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최인훈이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 얘기를 하잖아요. 사람에겐 밀실도 있고 광장도 있어야 해요. 광장이 없으면 사람은 파괴되고, 밀실이 없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분열돼서 죽어요. 신상 털기의 핵심은 너무 밀실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까지 공적 영역이냐 아니냐, 광장의 일이냐 밀실의 일이냐 하는 균형 감각에 대한 문제거든요. 한 사람의 밀실까지 너무 육박해 들어가는 건 곧 그사람을 파괴하는 거라는 의식을 가져야 해요.  387


제3자들에 대한 애정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391


벤야민은 진보가 없다고 해요..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만든 게 아니라 노예들이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피라미드 안에 노예가 잠들어 있지는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도 거기서 잠자지 않고요.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곳에 억압이 있어요. 노예도, 노동자도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짓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양상이 좀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진보한 게 아닌데 진보한 것처럼 보이는 거죠. 이런 차이예요. 옛날에는 채찍으로 때려서 일을 시켰어요. 노예의 지상 목표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어요. 사람들이 제 발로 와서 이을 하겠다고 해요. 자본이 없으면 못 살게끔 조건을 만든 거예요.  400


벤야민의 지적은 인문학 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명심해야 해요. 채찍으로 안 때린다고 좋아진 게 아니라고요. 더 비참해진 거예요. 옛날에는 탈출했잖아요. 노예들은 자살 안 해요. 탈출의 기회가 있잖아요. 그런데 자발적 복종은 자살과 한 끗 차이라고요.

자발적 복종은 이미 형식적으로는 자살과 마찬가지예요. 자기 부정의 형태죠. '자발'이라고 하면 자기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그 귀결이 '복종'이에요. 그게 자살이잖아요.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이 조직 탓도 안하고 자본주의 탓도 안 해요. 자기가 버려졌다고 자살해요. 자기는 노예이고 싶은데 버려졌다고. 그래서 면접장에서 노예로 간택받잖아요. 제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런 얘기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웃음) 

어느 정도 소유가 늘어났다고 해서 진보했다고 믿는 거죠.(지승호)

그렇게 착각한다고요. 사람들은 허영이 있어서 '자발'에만 방점을 찍고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해요. 하지만 귀결은 '복종'이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걸 이해시키기가 힘들어요. 자기의 불행을 덮고 안 보려고 해요. 안타깝죠.  401-402


사회민주주의는 분배를 하겠다는 건데, 분배를 하려면 자기가 소유를 하고 있어야 하잖아요. 결국 소유 형식이 유지되는 거예요.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분배자와 피분배자의 위계가 생겨요. 분배하는 사람이 필요해지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를 들먹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좌우지간 소유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분배 얘기하는 놈들은 다 사기끈들이라고 하거든요. 마르크스는 일체의 소유 관계를 없애자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원한 건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예요. 일체의 소유 형식을 없애자고 얘기했을 때는 국유까지도 포함한 거예요.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가 지배를 영속화하는 제도라고 봐요.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말은 '내가 박근혜나 이명박보다 윤리적으로 분배를 잘한다'라는 거예요.  402


지금은 긴 안목으로 봐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406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느낌이 주는 강한 현재성이 있어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해요. 현재를 잡아야 인간을 잡아요. 미래를 염려하면 사랑하기 힘들어요. 내 아이 하나 사랑하기도 힘들어요. 미래를 염려해서 생명보험, 상조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지금 아이랑 낚시를 가는 게 나아요. 살아 있을 때 재밌게 살아야죠. 권력은 그걸 못 하게 만드는 거예요. 

결혼이 왜 문제냐면, 두 사람이 미래만 보는 거예요. 내 집 마련, 육아, 자녀 교육 등등. 둘아서 연애할 때는 그런 게 없잖아요. 미래를 걱정하게 되면 커플 관계는 붕괴되는 거예요. 사랑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인데, 결혼의 공식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예요.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사람은 내일 가도 또 내일이 있고, 또 내일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사람은 오늘만 있고, 내일 가도 또 오늘만 있어요. 그러니까 매번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원리지만, 사랑의 원리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거예요. 결혼이나 소유, 경쟁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체제에 포획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고 하죠.  408


<철학vs철학>에필로그에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도더고가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라며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을 인용하셨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지승호)

애정 결핍이에요. 원리주의자는 애정 결핍에서 나오는 거예요.  411-412


"인문정신을 회족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와 동학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인문정신의 핵심이다"라고 하셨는데요.(지승호)

둘 다 기독교 비판이에요.

그 뿌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지승호)

내재주의거든요.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인데, 범신론의 범(汎 넘칠 범)이 '모든'이란 뜻이에요. 모두가 신이라는 주의가 범신론인데, 그러면 나도 신이란 말이에요. 동학도 죽은 사람들한테 제사 지내지 말고 나를 향해서 제사를 지내자고 하잖아요.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게 '나를 향해서 위패를 만들어라'라는 말이거든요. 동학 자체가 서학, 즉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만든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스피노자랑 동학을 얘기한 것은 조금만 힘들면 절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만 힘들면 엄마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하지말자는 거예요. 이게 미성숙이거든요. 미성숙을 극복하려면 엄마라는 존재,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 거고요. 그런 면에서 동학이랑 스피노자는 비슷해요.

동양은 내재주의 전통이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내가 예수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유학에서는 내가 성인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을 배우잔항요. 불교는 다 부처가 되자는 거고요. 그 전통이 있기 때문에 동양 사유 전통만 잘 짜깁기하면 동학 경전이 만들어지는 거죠. 동학은 독창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립해 내재주의 전통을 강화한 거예요. 동학, 동아시아의 학문이다. 우린 이걸로 갈테니 서학은 나가라. 이런 게 동학이에요. 이처럼 동학에는 나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으니까 일제에 대항한 거예요. 동학농민전쟁이 그래서 일어난 거죠. 굽실거리는 정신이거나 어디 가대는 정신이었다면 그런 게 안 일어났을 거예요. 동학의 혁명성은 거기서 나오는 거죠.  416-417


"매춘부가 사랑을 통해서 맨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사실, 벤야민은 왜 이사실에 주목했을까요? 그것은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라고도 쓰셨는데요.(지승호)

벤야민은 파리에서 축제 때 벌어지는 여학생들의 매매춘을 본거예요. 그리고 직업적인 매춘부들이 생겼을 때 매춘부가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 거에요. 어떻게 되냐면, 돈을 안 받아요. '돈 주면 안돼'그러면서 울어요. 그러면 매춘을 못 하는 거죠. 그럴 때 매춘부로서 수명을 다한다는 거에요. 벤야민은 그런 것들의 흔적을 찾아요. 마르크스의 테마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좋은 사회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고, 신뢰는 신뢰노만 바뀌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돈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친구도 돈 좀 있으면 만나고 실직하면 안 만나요.

마르크스는 그게 인간관계를 왜곡시킨다고 얘기해요.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와요. 젊은 마르크스의 그 정신을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신뢰하지 못하게, 우정을 나누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기 때문이에요. 마르크스도 쉬워요.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거예요.(웃음) 자본이 어쩌고, 잉여가치가 어쩌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목적을 알아야 해요. 그걸 모르니까 혁명을 한 다음에도 관료주의 체제가 나오고 독재가 나오는 거예요. 자본은 없앴는데 공산당이 너무 강해서 사랑을 못 하게 해요.(웃음)  421-423


지금은 사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기가 더 어려워진 상황이 된 것 같은데요.(지승호)

애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그래요. 사랑하는 법을 어렸을 때부터 길러주지도 않았고요. 미숙하면 사랑 못해요. 그러면 자본에 포섭이 돼요. 자본을 이길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인간이 더 중요하잖아요. 돈이 있어서 뭐해요?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초등학생 때문버 남녀가 막 사랑해야 해요. 그래서 강해져야 돼요. 그런데 경쟁하잖아요. 게임만 하고, 그래서 약해지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을 많이 해야 해요. 실연도 당하고, 그래야 강해지는 거예요.  424


사랑을 제대로 받아봐야 사랑할 줄도 알 텐데요.(지승호)

부모가 어린애라서 그래요. 우리 아이를 죽이는 것은 상태 안 좋은 미숙한 어머니와 정권과 자본의 결탁이라고 보면 돼요.(웃음) 카이스트 학생들도 부모나 교수는 무시하고 연애에 몰두하면 자살 안 할 수 있어요. 성적이 떨어졌어도 애인이 '난 오빠가 카이스트 다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그러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안 죽는 거예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개를 키워도 돼요.(웃음) 사랑하면 안 죽어요. 갈 데가 없을 때 죽는 거예요. 

애들이 사랑할 줄을 모르니까 성적이 떨어지면 여자도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요. 공부도 하고, 음악도 듣고, 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엄마가 성적으로만 사랑받게 만들어놓았으니 성적 떨어지니까 존재감이 없어지는 거에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짜리들이 카이스트 들어가는 것도 반대에요. 애들을 경쟁시키고 전문화시켜 천재로 만들어서 죽여버려요. 기형적으로 자라게 하는 거라고요.  424-425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진보가 없어요. 진보는 사랑이에요. 자기 기득권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까지 봐야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고민해야 해요. 이 법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담아내야 진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진보가 없는 거죠. 자기 기득권이 먼저면 진보가 아니라니까요.

자기 것만 챙기는 진보가 어디 있어요?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얼마만큼 나가느냐에 따라서 진보를 얘기할 수 있어요. 자기 이녀모가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 쪽으로 보수화되는 거예요.  431


억압된 것의 회귀가 정신 분석학의 테마잖아요.  434

정신분석학의 근본 테마는 사회나 가족이 억압적이지 않으면 히스테리 같은 게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가정의 억압은 국가의 억압이 축소된 형태라고 얘기해요. 부모가 사회적 가치로 아이를 교육시키니까요. 라이히는 러시아 혁명을 쫓아다녀요.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 중에 우파적인 사람이 융(Carl Jung)인데, 저는 융을 싫어하거든요. 원형 무의식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미 원형적으로 억압돼 있어서 총알이 장전된 상태라고 보는 사람인데요. 이건 완전히 성악설이죠. 사회의 억압 체제는 항상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거라고요. 라이히는 사회혁명이 일어나야 억압이 없어진다고 봐요. 독재자를 제거해야 하고, 자본주의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러시아혁명 같은 걸 막 쫓아다니는 거예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리히의 책은 정신분석학의 진짜 중요한 책이에요. 그 책은 좀 많이 읽어봐야 해요.   435




chapter 8 자본주의에 맞서라


일단 철학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인데, 진리라는 것도 소유의 관념이에요. 내가 진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만 봐도 권력은 소유에서 오는 거예요. 아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권력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소유의 논리고, 학점이나 스펙이라는 것도 사실상 소유의 등기부등본이죠.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요. 하나는 소유하면 할수록 얻는 행복이에요. 다른 하나는 거꾸로 내 것이 줄어드는데도 느끼는 행복이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든가 음식을 사준다든가, 아니면 밤새도록 병구완을 하면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주는 거죠. 이렇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버림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공동체 원리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져도 후자의 행복이 덧없지 않은 거예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인용했잖아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고, 우정은 우정으로만 바뀌어야 한다' 그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거기 돈이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개입되면 관계가 왜곡되는 거예요. 가난한 친구는 뭔가 훔칠 것만 같아 보이고, 부유한 친구는 신뢰와 우정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마르크스가 젊었을 때 그런 세태를 본 거예요. 사랑은 사랑으로만 바뀌어야 하는데 중간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가 되는 거죠.

소유물이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공동체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가 사랑의 흔적이에요. 그런 사랑의 흔적이 아주 사적인 연애로 응축해 있다는 것을 고민해봐야 해요. 옛날에는 사랑이 굉장히 넓었거든요. 내 가족이나 내 애인의 경계를 넘어갔다고요. <다중(Multitude)>이라는 책에서 네그리는 '왜 우정과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협소하게 부르주아 남녀 관계 속에 국한됐을까?'라고 물어요. 네그리가 꿈꾸는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소유물을 더 아끼기 때문에 사랑을 못 해요. 집요한 이기주의죠. 그래서 공동체가 와해돼요. 사적 소유가 강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다 헛소리예요. 사적 소유가 있으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면 아이가 자살하지 는 않아요. 우리는 노숙자도 많고, 하루에 마흔 명도 넘게 자살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아니라는 거죠. 공동체라는 관념은 있지만 그게 '상상의 공동체' 같은 거라서 실질적으로는 공동체가 아닌 거예요. 오늘의 자살자 43명에서는 빠졌지만 내일의 43명에는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그 안에 안 들어가려고 더 소유를 해야 돼요. 이게 악순환인 거예요. 그래서 갈 데까지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다가 뼈저리게 느껴야 알 수 있는 거죠. 아니, 역사를 보면 뼈저리게 느껴도 모르는 것 같아요. 공황이 일어나도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잖아요. 현실을 리얼하고 속직하게 느끼기에는 관념이 너무 비대해요. 각인된 소유의 관념으로 강하게 무장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거예요.  448-450


제가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냉장고가 악의 축이에요. 냉장고가 없으면 자본주의 거의 붕괴될걸요? 옛날에는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으면 나눠줬어요. 안 먹고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썩으니까요. 대한민국 모든 가정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으로도 단언컨대 아프리카 나라 열 개를 살려요.(웃음) 그런데 냉장고에 넣어놓고 썩힌다고요. 저장에 대한 욕구죠. 냉장고가 확장된 것이 은행 잔고예요. 썩지 않게 하는 것. 화폐는 안 썩잖아요. 안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여러 체제와 전산 시스템이 우리의 소유를 저장해준다고요. 소유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의 특징이죠. 우리에겐 소유욕이 있어요. 배고픈 데도 자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비범한 거예요. 성숙한 거죠. 자본주의는 미성숙한 야만적 상태 내에 인간을 국한시키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따로 안 배워도 돼요. 그냥 적응이 돼요. 인류가 만든 체제 중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성, 사랑과 무관한 소우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체제예요. 어떻게 보면 인류에게 아주 치명적인 거죠.

소유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 아니에요. 소유의 형식의 제일 반대편에 있는 것이 사랑의 형식이에요. 저 여자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저 여자한테 뭘 주겠다. 저 남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450-451


인류학 책을 왜 많이 봐야 하냐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오래 살다 보니까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몰라요. '소유 형식이 문제야'라고 하면 '안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반문해요. 그런데 인류학 책을 보면 지금 우리 문명의 흐름과는 다른 사회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유 형식이 필연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452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라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휴머니즘과 폭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셨잖아요.(지승호)

최소 폭력을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유한자니까 뭔가를 먹어야 하고 뭔가를 해쳐야 하잖아요. 빵도 먹고 배추도 먹어야 하잖아요. 단지 어떻게 하면 그걸 최소화할 수 있으냐 하는 문제일 따름인 거죠. 그러니까 오만하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은 순진무구함을 선택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과대한 폭력을 선택하면 안 돼요. 최소한의 폭력, 이게 중요해요. 균형 감각이 중요한 거고요. 적정하게, 최소 폭력의 지혜가 필요한 거죠.  458-459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고,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의 선을 잡기가 어렵잖아요.(지승호)

그게 니체가 한 말이잖아요. '괴물과 싸울 때 조심해라. 너도 괴물이 된다.'  459


요즘 흉악 범죄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매스컴은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고 선정적인 보도만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지승호)

한 개인의 범죄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거죠. 아이를 경쟁시키고, 성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이런 문제들을 덮는 희생양 하나를 만든 것이거든요. 몸에 암이 있어서 겉으로 고름이 조금 나온 건데, 그걸 짜면서 더 가보자는 거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에요. 한 명 또 죽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편하니까. '우리 사회는 문제없다. 한 놈이 미친 거였어' 이렇게 보자는 거죠. '우리 구조는 깨끗해, 살 만해' 그러면서 또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일어나면 우리 사회를 까뒤집어봐야 하는데, 막상 구조적인 것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곧바로 십자포화를 맞아요. '그러면 연쇄살인범이 죄가 없다는 거냐?' 이렇게 나와요. 우리 사회는 그런 담론을 쓸 수 없는 만큼 남루하다고요. 제 말은 두 가지 차원을 같이 보자는 거예요. 일회적인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도 봐야 하지만, 그런 희생양을 낳는 구조도 함께 봐야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여성 단체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성 단체도 희생양을 찾으니까 '미친놈들이다' 이러면 편하죠. '미친놈들이 자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한다'라고 하면 편한 거죠. 그러니 끝내 이 자본이란 체제와 맞짱을 못 뜨지. 그게 여성 단체의 보수성이에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남성 우월성을 알아야 한다고요. 여성이 상품화되는 건데.  462-463


"발달한 대중매체는 대중매체 속의 이미지들을 현실 세계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일종의 찾기 효과가 생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재난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든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요. 무인폭격기 이런 것이 현실을 게임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잖아요.(지승호)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가상현실, 전쟁 영화가 너무 리얼한 거예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짜 실감 나잖아요. 그건 가상이고 과장된 건데,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현실의 전쟁을 보면 사람들이 피해를 못 느껴요. 굉장히 심각한 거죠.  463


하이퍼리얼리티, 과다한 현실성, 이게 언론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이자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예요. 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를 지배하면 사랑에도 문제가 생겨요. 왜 쟤랑 키스할 때는 그 영화에서 봤던 느낌이 안 나고 입 냄새만 나느냐는 거죠. 장미도 안 쏟아지고, 종소리도 안 들리고.(웃음)  465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서로를 못 보게 하는 것,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그걸 얘기하는 거죠...

드보르의 얘기는 무언가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 지도자를 보느라 서로를 보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거예요. 또 드보르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데, 자본의 구조와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구조가 같다는 거예요.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은 사람은 이 책이 자본주의 비판이라고 하는데, 사실 하이라이트는 러시아 공산주의 비판이에요. '프롤레타리아 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스펙터클일 뿐이다'라는 거예요. 

케네디(Jhon F. Kennedy)도 공격하죠. 미국에서 최초로 스펙터클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케네디거든요. 정책은 허접했지만, 잘생기고 멋있는 대통령은 케네디가 처음이었죠. TV가 등장하면서 케네디가 이긴 거거든요. 상대편은 연설을 못 했지만 정책은 좋았어요.  468-469


<스펙타클의 사회>를 경제 비판, 자본주의 비판으로만 읽으면 협소해져요. 오히려 이 책의 매력은 프랑스 68혁명 때, 소련을 진리라고 생각했던 그때, 소련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책이었다는 데 있어요.

드보르는 영화감독이었어요. 자유로운 예술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죠. 나중에 권총으로 자살하는데, 자기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려서 자기를 죽여버린 거예요. ..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어보면 뒤에 나오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같은 사람들이 모두 드보르의 통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실제로 68혁명 때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보드리야르도 들뢰즈도 데리다(Jacques Derrida)도 아니고 드보르와 그의 친구 바네겜(Raoul Vaneigem)의 글을 벽면에다 옮겨 썼다고요. 드보르는 공산당의 실체를 폭로한 거예요. 당이 지금 스펙터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고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지배권은 자기들이 갖는다고.  471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책을 꼽는다면 현 시점에서는 <스펙타클의 사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은 200개가 넘는 테제로 구성돼 있는데, 툭툭 던지는 식이라 독해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번역했던 분도 드보르를 감당 못 한거 같아요. 다행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사이트에 불어 원본이나 영역본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해가며 보면 돼요.  472


자본주의와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은 사실 쉬워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사람들 눈을 멀게 하면 돼요. 그러면 투표도 하기 힘들고, 서로 더듬으면서 살아야 해요. 프라다도 의미가 없고 TV도 못 봐요. 그러면 자본주의는 붕괴돼요. 알량한 시각 문화만 없으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고요.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 눈 감고 있잖아요. 애인 품에 안겼을 때 눈 감고 있고, 키스할 때 눈 감고 있어요. 이런 것이 사실 소중한 세계예요. 촉각의 세계죠. 시각이 아닌 세계에 대한 갈망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문학 작품 속에 많이 나와요. 소설가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시각이 거리 둠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초콜릿 복근을 만든다든가 가슴 수술을 한다든가 지랄을 하지만, 그런 건 옆에 앉는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타까워요. 사람들이 시각에 집중하느라 다른 감각을 죽이고 있어요.  474


시각의 세계가 곧 자본의 세계이기도 한 거죠.

시각의 세계는 정치의 세계예요. 왜냐하면 보는 자는 우월하고 보이는 자는 열등하거든요.  475


모든 걸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에요. 사랑의 방법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이냐가 모든 진보적인 사람들. 인문학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거고요. 네그리가 얘기하는 '다중'이 기쁨의 연대인데, 스피노자저 ㄱ의미에서 대상을 가진 기쁨의 감정이 사랑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중은 곧 사랑의 공동체예요.  476


자본주의는 우리를 콩가루처럼 쪼개려 해요. 단결해서 같이 쓰지 못하게 해요.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싫어한다고요. 개성, 개성 하는데, 소비의 자유를 개성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죠. 지금 광고에서 떠드는 개성이란 건 다양하게 고를 자유에 불과한 거예요. 사지선다형 식의 자유일 뿐이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고르는 게 무슨 자유예요? 자본은 이렇게 인간을 파편화시키고, 개인과 개인을 덜어뜨려놓을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을 산산이 쪼개놓을 수 있어요.  478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정신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지승호)

자본주의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야 돼요. 자본주의를 우회하면 안 돼요. 그게 우리 삶에 고통과 고민을 안겨주는 근본적인 원인이니까요. 산 사태가 나는 것에 대한 직감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우리는 도토리에 정신이 팔려서 산사태가 나는지도 모르잖아요. 체제가 너무 기만적이에요. 장밋빛 꿈을 계속 미래로 연결시키죠. 자꾸 저축하고 보험 들고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영위하지 못하게 해요.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사회죠.

권력이든 뭐든 누가 잘해줄 때는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라는 걸.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아야 해요. 국가는 수탈과 재분재 기관이에요. 세금은 자발적으로 내는 게 아니라 수탈하는 거지만, 수탈하고 나서 여러 가지 사업에 쓰잖아요. 재분배를 하는 것도 다시 수탈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국가기구의 핵심이에요. 사람들이 재분배를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지도자 만나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세금 낸 건 잊어버려요. 그런 것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깨알같이 도토리만 보고 있으니까 인문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사람들이 지적을 해줘야 해요. '산사태가 일어납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아요. 다람쥐 여러분.'(웃음)

우선 사람들이 위축되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인문학 저자들이나 시인처럼 당당함을 갖춘 사람들이 모일 때 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누가 구조를 바꿔서 우리한테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바꿔서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위험한 거죠. 

현명한 군주는 좋아하고 나쁜 군주는 싫어하는데,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군주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거든요. 그런 이해에까지 이르러야 해요. 한비자도 국가권력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요. '거리의 필부라면 한 사람이라도 죽일 수가 있겠느냐? 군주의 자리에 있으니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런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없어야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좋은 군주, 성군에 빠지지 말고 군주라는 형식 자체의 위험성을 읽어야 해요. 노빠니 뭐니, 특정인을 지지하고 그 사람을 메시아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요원해져요.

요새 티체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얘길 하거든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 사실 제대로만 보면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거든요. 그런데 구조적인 문제를 보면 엄두가 안 나는 거예요. 비겁하니까. 어떻게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시각을 협소하게 가지려 해요. 민주주의 덕목 중 하나가 자유인데 자유가 가능하려면 용기가 있어야만 해요. 자기 삶에 굉장히 당당해야 해요. 자본가한테 쫄아 있고 권력자한테 쫄아 있으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거예요. 데모하지 말라고 하면 데모 안 하고, 진짜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의 정치예요. 직접민주주의가 별건가요?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정치는 과두정치예요. 민주주의가 아니에요. 다들 알 텐데도 그걸 안 보려고 해요. 협소한 시각으로만 봐요. 투표할 때만 보고. 그리고 정치인들이 표 달라고 구걸할 때만 보고는 '내가 주인인가 보다'하죠.

쫄지 말고 당당해져야 해요. 그래야 자기 상처라든가 비겁함, 남루함에도 직면할 수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굽실거리다가 죽지 말고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에 사인해줄 때도 이렇게 써요. "항상 당당하세요!"  480-482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 할 기본 덕목은 나에게 애정을 준 사람에게 나도 애정을 워야 한다는 거예요. 반대로 나한테 칼을 찌른 사람은 20년이 지나도 공소시효가 없어야 해요... 약자가 어떻게 강자를 용서해요? 받아들이는 거거든요. 용서는 강자들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강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착한 척해요. 그러니까 매번 당하지, 사람들이 독해지면 독재도 함부로 못해요. 도갲했다가는 삼대가 힘들다. 애들이 복수한다. 이러면 감히 어떻게 독재를 하겠어요?...

그런데 너무들 착해. 양 떼들 같아요. 그래서 니체가 민주주의가 되면 사람들이 양 떼가 된다고 비판한 거예요. 그렇다고 영웅주의로 가자는게 아니라 개개인이 굉장히 강해야 한다.  482


미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면 사랑해야 할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요. 동전의 양면이거든요. 혼자 생각해서 다 용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용서했다고 생각하는데 화병이 남아요. 그러면 사람이 위축되고 활력이 없어지고 피해 의식이 생겨요. 나중에 그런 상황이 되면 미리 피하고, 겁이 많아지고 소심해지고. 김어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쪼는'게 되는 거죠.

용서는 '죽일 가치가 없다. 복수할 가치조차 없네' 이럴 때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화해하고 잘 지내자' 이런 건 아니고요.  483


자살의 종류도 다양해요. 대개 살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죽느데, 그건 문제가 있어요.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거예요.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에요. 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느냐면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스스로 패배자인 나를 단죄하는 거예요. 자신에 대한 처형 행위죠.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부정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패배자고 못난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는 거예요. 

경쟁 사회에서는 경쟁을 내면화해요. 나 스스로가 이 경쟁에, 게임에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졌으니까 끝나 거예요. 누구 탓이 아닌 거죠. 이런 논리로 자살을 하는 거거든요. 애초에 경쟁 판에 안 뛰어들고 '왜 너희가 경쟁 판을 만들어?' 하는 사람은 안 죽어요. 경쟁 판에 뛰어든 아이들, 1등 하는 아이들이 죽는 거예요. 경쟁 판에 뛰어든 것을 긍정한 아이들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10ㄷㅇ 하는 아이들은 꼴찌 했다고 안 죽어요. 그 아이들은 대개 경쟁을 안 받아들여요. 심지어 자기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등 오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놓죠.(웃음)

애초부터 가난했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부자이거나 권력자였다가 몰락했을 경우 내가 진짜 패배자가 된 거예요. 그 경쟁의 게임을 받아들인 거고, 내가 1등 한 모습을 내 자의식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난 1등이야' 그런데 꼴찌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만 자살한다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좋은 대학 나왔을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카이스트 아이들의 자살이 이해가 안 되는거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경쟁을 안 받아들인다고요. 사회불만 세력들은 안 죽어요. 그런데 체제의 수혜자였던 아이들, 경쟁을 받아들였던 아이들이 많이 죽죠. 사실은 체제가 살인을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들뢰즈의 자살은 좀 다른 면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 자살했다니까 생성의 철학자와 삶의 철학자가 자살했다고 의아해해요. 경험의 부재죠.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죽은 상태로 있는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죠. 심지어 들뢰즈 연구자란 사람들도 그래요.  485-486


모든 인생론은 가짜예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화두를 던지잖아요. 세계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화두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핵심은 나만 바뀌면 된다는 거예요. 세계는 한 번도 안 바뀌어요. 인생론과 자기계발서를 믿는 사람들은 나중에 자살을 해요.  488


자기 계발은 자기를 서서히 죽여가는 거네요.(지승호)

서서히 죽이다가 자기계발에 실패하면 죽어요.(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인데 오래됐죠.  489




chapter 9 음악이 필요한 시간


항상 편집자들에게 강조하는 게 이런 거예요. 책이 많이 안 나가도 된다. 최소 10년 이상 나가는 책을 쓰는 게 중요한 거다.  494


인문학 책은 자기계발서나 스티브 잡스 책과는 달라요. 사람들이 읽었을 때 표면적이고 너무 쉬운 것. 그게 대중적 글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독자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끔 글을 쓸 수 있느냐예요. 그게 인문학에서의 대중성이죠. 독자들과 우리 이웃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요.  496


대중적 글쓰기를 하려면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해요.  497


얻어걸려서 한두 마디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유기적 연결이 되는지가 문제예요.  507


자기 스스로 당당하게 살고자 해서 생긴 고통의 폭이 큰 사람이 선생이에요.  513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지승호)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조바심쳐요. 흥행하려고 하고. 그러지 말아야죠. 길게 가야지. 인문학은 농사짓는 것과 같아요. 천천히, 천천히 가야해요.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폐강하면 안 된다고요. 한 명이었던 수강자가 두 명이 되도록 늘려 나가야죠. 상상마당 아카데미 처음 시작할 때에는 6, 7명이 강의를 들었어요. 다른 선생들은 사람 수 적어서 쪽팔리다고 초기에 다 그만뒀는데 저는 계속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나중에는 수강생을 제한했어요. 30명밖에 못 들어오니까. 그 당시에 수강생 수가 적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아직도 수강행 수가 적어요. 애정의 문제예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사람들이 강신주를 모르니 막 들이대는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이 배웠어요. 무엇을 쓰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거예요. 사람들이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알게 된 거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제가 상상마당을 그만둔 건 제 얘기가 메아리 되어 돌어온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사랑한다면 흉내 내선 안 되거든요. 자기 얘길 해줘야죠. 저는 다른 사람 경험을 느낄 준비와 연습이 되어 있는데, 그걸 잘 안 해줘요.  518


철학이든 음악이든 결국 자기 것을 만들어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거네요.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거고요.(지승호)

'나는 나다' 이것에서 뿜어져 나와야 해요.

그러면 인문학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지승호)

인문학적 기초에다 살아 있는 경험이 더해져야죠.  526


중요한 건 정신성이에요. 누군가를 진짜 사랑하면 방법을 찾아내죠.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에요. 방법 가지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바람둥이라고 하잖아요. 저 사람을 진짜 사랑하면 아껴주는 방법을 찾아요. 그래서 정신성이 중요한 거거든요. 흉내 낸다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른 거니까요...

표현할 정신성이 있다면 기술적인 것, 기법은 다 찾아서 하게 돼 있어요. 기법부터 배운다고 해서 없던 정신성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나니까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 나의 시선, 이것을 얼마나 긍정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가는 사활을 건 문제예요.

이건 예술가나 저자뿐 아니라 각 개인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건강해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면 자신을 부정하게 되잖아요.  527


겁 많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안 해본 것은 무서운 것이고, 무서운 것은 나쁘고 저주스러운 것이라고 여긴다는 거예요. 제가 "번지점프 무섭죠?" 하고 물어보면 무섭대요. 해봤냐고 물어보면 안 해봤대요. 갇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그냥 하라고, 하면 된다고, 번지점프를 연속으로 다섯 번 하라고, 다섯 번 했는데 무서우면 그때는 진짜로 무서운 거라고 얘기해줘요. 고소공포증이라는 건 다 뻥이거든요. 산에 올라가면 고소공포증이 있대요.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되지, 고소공포증은 무슨 고소공포증이에요? 그냥 무서운 거예요. 나 무섭다. 비겁하다. 용기 없다. 그러면 되잖아요. 고소공포증 하면 뭔가 본질적인 게 있는 것 같잖아요.  528


초고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쭉 정리해두셨다가 집중적으로 쓰신다고 하셨는데요. 시놉시스 같은 것을 만들어두고 작업하시나요?(지승호)

큰 틀이 있죠. 제가 단행본을 열입곱 권 썼잖아요. 이제는 어떤 걸 강의해도 이게 책이 될지 안 될지를 알아요. 이건 분량이 어느 정도 나올지도 가늠이 되고요. 발악을 하고 중언부언해도 책이 안 나오는 것이 있고, 이건 양이 넘쳐서 세 권은 되겠다는 것도 있고. 그래서 강의안을 쓸때도 이건 일회성인지, 아니면 다른 강의와 연결이 되는 건지 그런 감이 있죠.

저는 강연과 집필을 분리하면 안 돼요. 강연과 집필이 같이 가야 되는 사람이에요. 강연 따로, 집필 따로 그렇게 분리 못 해요.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는 두 가지 일을 하는 것 같으니까 '언제 강연을 하고 언제 책을 쓰세요?'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든 발언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전체 구조 속에서 연결지어야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것들이 쌓여서 책이라든가 하나의 정리된 결과물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니 막 던지지 말고, 뭔 하는지 알고 해야 돼요. 이 발언이 책의 어느 꼭지에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서 해야죠. 만약 제게 그런 감각이 없었으면 그렇게 많이 강연 다니면서 책으로 먹고 살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의 책이 좀 팔려서 강연을 안 해도 어껴서 살면 살 수 있거든요. 가끔 들어오는 인세로. 옛날에는 그게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예컨대 학술진흥재단 같은 데서 선정해서 국가가 돈 주는 일들, 그런 일들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거든요.

벤야민이 그렇게 글을 쓰고 살았어요. 그래서 벤야민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요. 글들이 짧고 어떤 글들은 왜 이걸 가지고 썼을까 싶기도 한데, 잡지에서 써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거기에도 벤야민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벤야민은 그걸 쓸 때도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엮일까를 고려하면서 썼거든요. 단행본 말고 벤야민이 여러 잡지에 기고한 것들을 모아 전집을 ㅁㄴ들어도 일관적이에요. 점묘와 같지만 전체적으로 벤야민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저도 그러고 있지 않나 싶어요. 단행본 뿐 아니라 잡지에 쓴 칼럼, 신문에 쓴 칼럼, 짧은 글들이 하나의 전체를 그려 나가는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걸 정리해서 하나의 작은 우주로 만들어야겠다 싶을 때 집필을 하는 거고요.

머릿속에 있는 것을 조합해서 끄집어내시는 거네요.(지승호)

처음에는 힘들어요. 자료를 모으는 데 집을 지어본 적이 없으니 재료가 모자라기도 하고 남기도 해요. 예컨대 목차를 구성해보니까 경제 문제만 너무 많아요. 그러면 책 균형이 안 맞잔하요. 그런 것처럼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모아야 될 것과나중에 책으로 묶일 것이 최적화되죠. 열일곱 권째 쓰니까 지금은 최적화가 된 거예요. 천재적이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고 열일곱 권의 시행착오가 있었던 거예요. 이제는 대충 길다가 보면 눈에 띄는 거죠. '이건 문으로 쓰면 되겠네'(웃음)

그런 감각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에요. 해봐야 해요. 이것저것 모아서 만들다가 너무 ㅁ낳이 모았다. 이건 모자라네. 그러면 돌아다녀야겠죠. 힘드맂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해요. 적어도 단행본 세 권은 써봐야 그 감이 생겨요. 한 권 쓰고는 '나 안 돼' 이러지 말고 열심히 하면 한 권 정도는 다 쓸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때 다 절망하죠. 잔뜩 지쳐서, 거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요. 그래서 첫 책 내는 사람들을 항상 격려해줘요. 다섯 권 정도 내고 나면 여섯 번째 책에서는 좋아진다고. 구성도 좋아지고 책 자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인문학 책이나 고전을 봤을 때 누껴지던 품격이 생겨요. 균형미도 잡히고.  540-542


실존적인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느냐, 무언가에 대해서 울리모가동요가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저자에게서 그게 사라지면 그 저자는 끝나는 거예요. 시인이 시를 못 쓰는 이유는 그 울림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시 나부랭이는 쓸 수 있지만 이미 시가 아니죠. 감정을 담아서 표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날조하는 거죠. 영화를 보고 울면서 평론을 쓰면 글이 좋잖아요. 그보다 더 센것은 자기가 직접 사랑해보고 힘들어서 쓴 글이고...

울림이 없으면 글을 못 써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고, 사람들이 잘 못됐는데도 안타깝지도 않고, 어떤 현상에 대한 분노도 없고, 노을을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렇게 일체의 감정이 고갈되면 글을 못 써요.  543


책 읽는 것은 다 우연이에요. 서점에서 대충 얻어걸려서 읽거나 누가 선물해줘서 읽거나, 그게 묘미죠. 결정돼 있지 않아요.  547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 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는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  549




chapter 10 인간을 위하여


"라캉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당신이 소망하는 것인가?'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일치를 극복했을 때, 우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 아니었으며, 혹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사랑이었다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셨는데요. 진실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지승호)

해야 할 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요. 검열이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해야 돼요. 기준은 그거예요. 그래야 검열을 넘어설 수 있어요. 일종의 모험이죠. 일종의 모험 같은 것들이 자기를 깨어나게 하는 거니까.  565


인간은 독립을 빨리 못해요. 기지도 못하고 이도 늦게 나니까. 부모 곁에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니까 부모의 문화가 전다로디는 거예요. 인간한테 역사와 문화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과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거에 의존한다는 건 곧 부모한테 의존한다는 얘기예요. 결과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게 김치면 김치를 먹어야 하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이 1등이면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 가치를 받아들이면 내가 욕망하는 거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욕망하는 거죠. 내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김치찌개를 먹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이 실현되는 거예요.

사람이 재미있는 게,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의 욕망이 달라져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클래식을 좋아하면 클래식을 듣게 된다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안 맞춰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클래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클래식 티켓도 선물해주고 같이 공연장도 가는 거예요. 그런데 공연장 가서 내가 아무것도 못 느끼면 꼬받 두 시간을 견뎌야 해요. 거기 가서 졸면 돈 내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브람스를 계속 들으면서 연습하고 공연장에 간다고요. 그러면 훨씬 좋으니까. 그러면서 클래식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고, 그 남자랑 헤어지더라도 나는 브람스를 좋아할 수 있는거죠.

그런데 성숙해진 다음에 사랑할 때, 이성이든 존경하는 사람이든 내가 독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할 때는 달라요. 내 욕망을 내가 선택하는거니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거니까요. 스피노자가 얘기했듯이 사랑의 기준은 나한테 기쁨을 주는 것인데, 여기서 기쁨이란 그 사람을 만나서 내 삶의 의지가 확장되는 거예요. 가능성이 더욱 열리는 거예요. 저 인간을 만났더니 좁아져. 그러면 사랑 안 해요. 그 사람을 만나서 삶을 더 누릴 수 있다는 느낌, 확장된다는 느낌이 중요하거든요. 

라캉의 핵심 테마가 우리가 욕망하는 것의 타자성인데, 문제는 그 타자가 내가 선택한 타자냐, 아니면 부모처럼 내가 절대적으로 그 타자에게 던져져서 적응하는 것이냐 하는 거예요. 인생에 있어서 딱 한 번의 혁명이 필요한데, 그게 어른이 되는 거예요. 부모의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는 이 과정은 굉장히 힘들어요. 한번 어른이 되면 어른인 거예요. 자기 욕망을 갖추는 것이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이에요. 핵심은 내가 타자를 선택한다는 거죠.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동물적 의미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더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타자의 욕망을 선택하는 거죠. 그럴 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부모나 사회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런 거예요. 할까 말까 주저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건 하고 싶다는 거거든요. 그럴 때 해야 돼요.(웃음) 100%예요. 사실 그게 만만치가 않아요. 사실 조금만 잘못돼도 '하지 말걸'이렇게 돈다고요. 그래도 그걸 한 번 내질러보고 직접 겪어보는 거죠. 그게 나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걸 자기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거예요. 대개 번지점프 싫어하고 고소공포증 얘기하는 친구들 보면 한 번도 번지점프를안 해본 애들이에요. 하지만 번지점프를 열 번은 해봐야 자기가 그것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열 번을 했다가 번지점프에 환장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는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헬기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고요.

예전에 위악(爲惡)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잇어요.(<위악이란 비범한 의지>, <채널 예스>)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해보라는 건데, 그건 제 얘기가 아니라 이상이 한 얘기예요. <날개>의 앞부분을 보면 이상이 위악의 의지를 가져보라고 해요. 19세기 문학이 도스토옙스키에 갇혔잖아요.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려면 위악을 저지르는 우아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철해"봐야 한다는 이상의 표현, 그게 핵심적인 거예요. 자기로 서겠다는 것, 도스토옙스키를 벗어나보겠다는 것, <날개>를 위악적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기존 가치관에 따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해보는 거예요. 바로 그 악이라는 요소 속에 나에게 맞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 애들 있잖아요. 무모하게 모험하고, 젊었을 때 도서관에 갇혀 있지 않고 막 들이대는, 일단 해보는 거예요. 해보고 결정하는 거죠. 해보고 나서 '이거 더럽게 나쁘다, 하지 말자'라고 판단하는 건 온전히 내 판단인 거예요. 하지만 하지 말라고 머릿속에서 검열해서 영원히 하지 않는 것은 내 판단이 아닌 거죠. 그걸 겪어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악 중에서 '이건 악이 아니라 선이구나'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어른이 되는 거거든요. 힘들어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고, 니체 얘기가 맞아요.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악이 우리의 탈출구예요. 악이라고 금지하는 걸 행해보려는 우아함, 사람들이 진짜로 못 먹겠다고 하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먹어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삼합. 전라도 음식이잖아요. 그거 처음 먹을 때 진짜 힘들었거든요. 선배가 먹기 진짜 힘들 거라고, 속이 터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딱 열 점마 ㄴ먹어보래요. 그래서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도 싫더라고요. 그런데 일주일 정도 후에 다시 삼합을 먹었는데 그때는 입에서 그냥 굴러다녀요.(웃음) 전에는 몰랐던 거죠. 그런 혐오감 같은 것들을 한 번 넘어가 보는 것, 그게 위악이에요.

이상의 제스처를 좀 배워야 해요.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보고, 무서운 번지점프지만 웃으면서 뛰어내려보고, 불쾌하고 싫은 건데 한 번 해보기도 하고. 위악으로 시도했던 것들이 다 좋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걸 자기화한다는 차원인 거예요. 반반이에요. '야, 이거 너무 좋다.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할 수도 있고요. '역시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이럴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쨋거나 내가 검증해본 거잖아요.  566-569


여행 많이 다니고, 만힝 부딪치고, 우리가 봤을 때 '왜 저런 걸 하지'싶은 사람들이 가진 건강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를 찾은 거니까요. 거기에서 오는 여유들이 느껴지죠...

내 삶은 하나인데 너무 많은 가치관이 혼재해 있으니까 복잡하다고요. 복잡한 사람은 행동을 못 해요. 단순해야죠. 어쩌면 행동이 빨리 나오는 편이 나아요. 생각은 항상 뒤에 가도록 해야 해요.  570


위대한 문인들 보면 기인이 많잖아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는데. 그게 다 발악이에요. 위악의 행동을 하니 기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겁 안 내고 위악적인 행동, 기괴한 행동을 해요. 문인이라고 하면 사라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회사원이면 엄두도 못 낼 짓들을 하는 거죠.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서 소변을 본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는 자기가 세종보다 높다고 우기고 나중에 보니 시인이야. 그러면 풀어줘요.(웃음) 인문학은 고유명사라고 했잖아요. 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악이라는 것들을 다 해보는 거고요. 자기를 찾으려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판단했을 때 이건 해서는 안 돼, 이런 느낌이 드는 것들을 많이 해 봐야 해요. 누굴 사랑하면 안 될 것 같아, 이 판단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악인 것 같다 싶으면 확 질러버리는 거예요.(웃음) 진짜 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처절하게 배우는 거죠. 그렇게 인격적인 동일성을 갖춰야 돼요.  571


맨 얼굴로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예요. 그런데 우리는 권력자 앞에서 자기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잖아요. 억압 사회예요.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게 억압의 척도예요.

페르소나를 써야 할 때, 광대 얼굴을 해야 할 때와 내 감정을 토로해야 할 때가에 있는데, 이걸 구분할 수 있으면 그나마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감정을 토로하는 사회예요. '에이, 저게 뭔데' 하고 대통령한테 지랄해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 이게 건강한 사회거든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가면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커플들, 부부들 보면 알아요. 저 인간들은 둘 다 평생 무장하고 사는구나.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를 약자가 쓴다는 거예요. 가부장제 사회면 여자가 더 많이 써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너무 강해지면 보호가 아니라 페르소나에 갇혀버려요.

사랑의 위대함은 페르소나를 벗게 해요. 정직함을 요구하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면 벗게 돼요. 벗었다가 상처도 많이 받게 되죠.  574-575


인문, 사회 과학을 읽은 남자애들이 여자를 잘 유혹해요. 말로 잘 구워삶아요. 조심해야 돼요.  577


'사랑의 경험이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면 감정에 정직해지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은 친해지고 사랑하면 진짜 냉정하게 얘기하는데요. 눈에 약간 무당기가 있어요. 친한 사람한테 그 눈빛이 나와요. 진짜 투사 하듯이 얘기를 하고, 눈으로 압박해 들어오면 정직할 수밖에 없어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저도 강한 사람이고 정직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랑 눈에 부딪치면 정말 재밌어요. 대개는 농담 삼아 얘기하는데 가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맨얼굴을 던지면 그 사람도 맨얼굴이 되고, 농담 따먹기를 하면 그렇게 해줘요. 편하죠. 거꾸로 되면 안 되죠. 내가 맨얼굴 하고 있는데 상대는 가면 쓰고 있고, 내가 가면 썼는데 상대는 맨얼굴 하고 있고, 그러면 안 되죠.

서로 맨얼굴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세밀한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거죠. 행복하고.  581-582


현실에 대한 집중도가 중요해요. 그런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집중할 테니까. 한곳에 신경을 써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면 다른 쪽에다 에너지를 못 쓰잖아요.  582


사랑은 내려놓는 거예요.  583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마음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 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분서(焚書)>의 <동심설(童心說)>에 나오는 구절을 책에 인용하셨는데요. 도심이란 어떤 건가요?(지승호)

동심은 가면 벗은 얼굴이에요. 맨얼굴이에요.

동심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그게 아니라 저는 인문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비겁했거든요. 진짜 비겁했어요.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뭐 하나 발각되면 그걸 가리려고 또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가 망가지잖아요.(지승호)

저 같은 경우는, 예컨대 누가 제가 모르는 시집을 가지고 와서 저한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요. 시에 대해서 책을 썼으니까 안다고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안 읽어봤는데요' 혹은 '몰라요. 저는 읽고 싶은 시만 읽어요. 그 시집은 재밌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처음에 바로바로 다 정리해요. 쓸데없이 가리려고 하면 안 돼요.

인문학자가 되면서 제가 배운 건 사람 만날 때 가급적이면 그렇게 정직하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은 화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정직하려는 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김수영도 사상보다 백배나 중요한 것이 정직함이라고 햇어요. 정직한 사람만이 뭐든지 배우니까. 정직하다는 것은 맨얼굴이고, 동심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아요. 내 맨얼굴을 저 인간이 못 받아들이네. 이런 것도 빨리 알고요. 그러면 그 인간이랑 안 만나면 돼요. 계속 나보고 가면을 쓰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그런 인간들은 안 만나야죠.

가면을 벗어야 상대방을 알아요. 가면을 한 번만 벗으면 돼요. 세상이 홍해처럼 가라져요. 내 맨얼굴을 인정해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들. 그런데 가면을 써도 이 가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가면을 벗으면 가면 쓴 모습이나마 좋아해주던 사람마저 없어질 것 같다고 두려워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새롭게 재편되는 것일 따름이에요. 그러니까 맨얼굴을 인정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양분하는 편이 나아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아야 해요. 가면을 썼을 때도 내 가면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가면을 벗으면 내 가면을 싫어하던 사람이 나를 좋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좋아했던 사라밍 없어지리라는 생각만 해요.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예요. 패를 다 까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랑 있는 편이 낫죠. 그게 더 건강한 거니까.

가면의 역할은 일대일의 관계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가면은 대개 사회적 가치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얼굴을 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이렇게 흉내를 내줘야 상대방이 좋아한다든가 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고 연기니까 배역이 정해져 있고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면은 일대일의 관계를 막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면을 쓰게 되면 일대일 관계가 안 되는 거예요. 가면이라는 존재 자체에 사회적 가치가 들어와 있는 거니까요. 돈 있는 척, 유식한 척, 허점이 없는 척, 지금까지 만난 남자만 해도 열 명인데도 '남자가 뭐예요?' 이러는 거.(웃음)

누구를 사랑하려거나 누구한테 사랑받으려면 가면을 벗어야 해요.  584-587


일단 제가 기본적으로 할 말이 많아요. 글을 쓴다는 것은 가지치기예요.  588


바라건대 정직하게, 더럽게 힘들었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사랑이라고요. 편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589


사랑에 대해 강의할 때 사람들이 물어요. '선생님은 행복해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불행에서 온 통찰이다. 그게 더 리얼하지 않냐? 행복하면 사랑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행복을 성찰한다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져 있다는 거다.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자기들이 압받당하면 비겁하게 '선생님은 행복해요?'라고 물어보거든요. 제가 화날 때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면 내가 불행하다면 너희들은 내가 한 얘기를 안 지킬 거냐? 옳은 것은 옳은 거다. 선생이 못 했다고 해서 옳은 것이 그런 게 되지는 않는다. 철학이 필요한 것은 옳은 것은 옳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판단은 각자가 해라. 그런 얘기면 지키지 말고, 옳은 얘기라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리고 '옳게 사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덧붙이죠.

그런데 옳은 것을 관철시키려고 살 때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요. 

연어가 언제 제일 행복하냐면 더 이상 헤엄칠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손을 놓을 때예요. '아, 이제는 버티지 않아도 된다' 제대로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안식으로 여겨요. 제대로 못 산 인간들이 생명 연장을 꿈꾸죠. 왜냐하면 옳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예요. 그래서 반체제적이고, 김수영이 얘기했던 것처럼 불온한 거죠.

자유로운 사람나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어요.  590-591




에필로그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웠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태를 말한다. 자기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이란 지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미성숙에 머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그대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 칸트  593


위대한 잡품을 남겼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할 인문정신입니다. 이렇게 인문정신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가나 자본가, 혹은 멘토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인문정신을 제대로 갖춘 사람은 우리에게 항상 물어봅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사유하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주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힘이 있는가?  595


강연 말미에 저는 항상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합니다. "여러분! 저를 선생이나 멘토로 기억하지 말고, 강신주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기억해주세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기억해주세요." 저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저는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선생님과 학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강신주와 여러분 각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선생님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지 않으니, 저는 선생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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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우리들이 건강한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덕분이다. 우리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까닭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부짖고 있는 사람과 주리고 목마른 사람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22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 '정말 필요한 것이면 보아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30


어때서 일어나지도 않은 현상을 미리 가불해서 앞당여 근심하고 있단 말인가.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매 순간 단순하게 살지 않는다면 인내심을 갖기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합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5


선승 황벽(黃檗)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주님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36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38


일찍이 당나라의 선승 동산(洞山)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면 이를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가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그러자 동산이 소리쳤다.

"이놈아! 추울 때는 그대를 더 춥게 하고, 더울 땐 그대를 더 덥게 하는 곳이다."

우리는 추우면 본능적으로 더운 곳으로 피하려 한다. 더운 곳으로 피하면 추위는 일시 가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이나 근심이 있을 때 술을 마시거나 다른 방법으로통해 고통을 피하려 한다. 피하고 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추위를 피하려면 애써 더 추운 곳으로 찾아가라는 동산 스님의 말은 고통이 오면 더욱 그 고통을 직시하라는 뜻이다. 


중국의 도가서(道家書)인 <열자(列子)>에는 전설적인 신궁 비위(飛衛)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 기창(紀昌)이 찾아와 활쏘기를 배우려 하자 비위가 말한다. 

"활쏘기보다, 먼저 눈을 깜빡거리지 않고 끝까지 보는 공부부터 하게."  58


이순신 장군도 말씀하셨다.

"살려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면 곧 살 것이다."


주님도 이렇게 못 박고 계시지 않는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59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지만 고통이 없다는 것은 못 느낀다. 두려움을 느기지만 평화는 못 느끼며, 갈증이나 욕망은 느끼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금세 잊어버린다. 마치 심한 갈증으로 허겁지겁 물을 마신 후에는 남은 물을 버리는 것처럼."  77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소화 데레사 성녀는 널리 알려진 대로 15세에 가르맬수도회에 들어가 24세에 선종함으로써 10년도 못 되는 짧은 수도원 생활을 한 새내기 성녀다...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마룻바닥을 닦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에 전념했던 수도자였다.  97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소소하고, 그러니까 마룻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늘 하나를 주울 때에도 주님에 대한 사라응로 주우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영혼 하나를 구원한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는 데 조그만 희생 하나, 눈길 한 가닥,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이용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성인의 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발견한 '겨자씨'의 비밀이었다.  98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우리들의 수도우너인 가정 속에서부터 타올라야 한다.  100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때도 데레사처럼 사랑으로 하고, 자식들을 아기 예수처럼 대하고, 아내를 성모님처럼 공경하고, 남편을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1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미나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117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는 반드시 이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다. 우선 유혹에 넘어가 그 죄를 응시하는 첫 발견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다. 먹음직스럽다. 화려하다. 향기롭다. 감미롭다. 죄는 본능적인 감각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후에는 맹렬한 상상이 일어나고 쾌락에 대한 기대감이 용솟음친다. 이 과정을 <준주성범>은 '처음에는 마음에 단순한 생각만 하고, 그 다음에는 상상이 일어나고, 쾌락이 생기고, 잇따라 악한 중동이 발하고, 마침내는 승낙을 하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와가 느낀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다'는 느낌은 악의 논리다. 결정적인 악의 정당화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나마 유혹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가 있지만, '딱 이번 한 번뿐인데', '이생은 원래 즐기는 거야', '사랑은 불나비야'라는 식의 악의 논리는 여지없이 충동적인 만용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열매를 따 먹고 남편에게도 따 줌으로써 악은 습관화(중독)되고 전염되어 온 세상에 만연하게 되는 것이다.  127


미국의 CIA는 거짓말을 백색, 회색 그리고 흑색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행하는 흑색 거짓말과 완전한 거짓은 아닌, 상대방을 위한 선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백색 거짓말, 그리고 그 경계가 애매한 회색 거짓말.  139


남전이 주석하고 있는 선당은 동서에 선방을 두어 동쪽의 선방에 사는 수자를 동당(東堂), 서쪽의 수자를 서당(西堂)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모든 납자들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서로 자기네 고양이라고 주장하며 동당 고양이, 서당 고양이 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다툼이 시끄러워지자 스승 남전은 무슨 일인가 나와 지켜보다가 싸움의 원인이 고양이 한 마리 때문임을 알고는 고양이의 목을 한손으로 쥐어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칼을 들어 모가지에 들이대고는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지만 말할 수 없다면 목을 베어 죽일 것이다."

서슬이 퍼런 스승의 선기에 압도되어버린 대중들은 입조차 달싹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날 밤 외출에서 돌아온 제자 조주(趙州)가 스승에게 인사하러 왔을 때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겠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는 말없이 자신이 신던 짚신 한 짝을 머리 위에 얹고 걸어 나갔다. 이에 스승 남전이 혀를 차며 말하였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살 수 있었을 터인데."

그 이후부터 '불살생'의 계율을 파계하여 고양이의 목을 벤 남전의 칼은 애욕을 끊기 위한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그것이 분쟁의 원인인 고양이라 할지라도 하찮은 짚신조차 머리 위에 떠받으는 것처럼 섬기겟다는 조즈의 칼은 '사람을 살리는 칼'로 불리게 되었다.  148-149


근세의 선승 혜월(彗月)은 1937년 죽기 전 선암사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병대장이 명검을 보고 싶은 욕망에 절을 찾아왔다. "그 칼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간청에 "물론입니다."하고 앞장서 걷던 혜월은 느닷없이 뺨을 후려쳐 헌병대장을 섬돌 아래로 떨어뜨렸다. 졸지에 수모를 당한 헌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빼려 하자 혜월이 먼저 다가가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천하의 명검이오. 내가 때려 섬돌 아래로 떨어뜨린 손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며,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손은 사람을 살리는 칼입니다."  150


혀와 손과 생각은 모두 양면의 날을 가진 불칼임을.  155


불교에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이 전해져온다. 당나라 때 양보(楊補)라는 사람이 사천에 유명한 무제(無際)보살이 있다 해서 먼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던 양보는 "어디를 가오?"하고 묻는 노인에게 "무제보살을 스승 삼고자 길을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 그래."하고 말했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데요?" 하고 양보가 묻자 노인은 대답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맞아주는 분을 만나게 될 텐데, 그분이 바로 부처시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바 이불을 두른 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 나오는 어머니 모습에서 비로소 양보는 '집 안에 있는 부처'를 견성(見性)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2


예수께서 저를 붙드신 목적은 제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달음질치게 하려는 것에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서의 '말씀'능력과 예수로서의 '행동'능력과 성령으로서의 '생각'능력, 즉 '지언행(知言行)'을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170



스님, 정말로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까? _최인호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_법정



내가 좋아하는 선가(仙家)의 말 중에 '살아도 온몸으로 살고 죽어도 온몸으로 죽어라' 라는 말이 있다.  180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였던 A. 모루아는 "병은 정신적 행복의 한 형식이다. 병은 우리들의 욕망, 우리들의 불안에 확실한 한꼐를 설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C. 힐티는 <행복론>에서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밭을 갈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파서 갈아준다. 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견디는 사람은 보다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된다."

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지 않으면 대지는 황폐해진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홍수로 땅이 뒤집혀야 하는 것이다. 태풍이 바닷물을 엎어버리지 앟으면 플랑크톤은 사라지고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끊어진다.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태풍이 몰아쳐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82-183


당나라 때 향엄(香嚴)이란 선사가 있었다. 등주(鄧) 사람으로 법명은 지한(智閑)이었다. 키는 7척이나 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하여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날 스승 위산영우(僞山靈祐)를 찾아가 불법에 대해 묻자 위산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남에게서 보고 들었거나 부처께서 말씀하신 삼장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나는 그대에게 묻겠다.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서 한 마디 일러 보아라. 그것으로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겠노라."

향엄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으나 위산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위산에게 가르침을 간청하자 스승은 "나의 말은 나의 견해일 뿐 그대 스스로의 안목으로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 아니겠느냐." 하고 거절한다. 이에 향엄은 자기가 읽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후 "이번 생에는 불법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까지 나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는데, 스승에게 한 방망이 맞고 보니 그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그저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중이 되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작별하고 암자에 들어가 수행을 하였다. 

하루는 마당의 풀을 베면서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난 '딱'소리를 듣고 순간 크게 깨달았다. 이 장면을 선가에서는 향엄격죽(香嚴擊竹)리라고 부른다. 향엄은 스승에게 돌아가 깨달음을 인정받고 오도송을 읊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去年貧 未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今年貧 始是貧

작년에는 송곳꽂을 땅이 없더니 去年 無卓錐之地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더라. 今年 錐也無

이 선화에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화두, 즉 '그대가 아직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 얼굴'이란 공안인 것이다.  200-201


향엄 스님은 "이번 생애는 불버븡ㄹ 깨닫지 못하겠다."고 절망 했지만 용맹정진 끝에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딱' 소리에 크게 때닫고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참나, 즉 '본래면목'을 견성하엿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첫 일성으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언하셨다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어느 날 문득 어린이가 되어 하느님이 '빚어 만드신 최초의 참사람'으로 돌아가 원죄 없는 원형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눈에서 바라보십시오."

심학규는 공양미 삽백 석이 있어야만 눈을 뜨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신을 위해 죽었던 심청이를 보고 싶다는 참사랑의 열망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을 시작도 끝도 없는 '이제와 항상 영원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치마를 뒤집어쓰고 임당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심청이의 본래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의 참모습을 견성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눈을 뜨는 데는 공양미 삼백 석과 같은 수천 년 세월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는 것은 <심청가>에 나오듯 '휘번쩍'눈을 뜨는 한 순간이다.  209-210


운동처방학을 전공하는 윤기운 교수는 운동선수들에게 세 가지 종류의 혼잣말 훈련을 실험하고 그 결과를 지켜본 후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혼잣말의 종류에는 '지도적 혼잣말'과 '동기적 혼잣말', '긍정적 혼잣말'등이 있는데 지도적 혼잣말은 '천천히' 혹은 '침착하게' 같은 교훈적인 것이며, 동기적 혼잣말은 '이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야', '드디어 때가 왔어'같은 심리적인 동기부여를 가리키며, 긍정적 혼잣말은 '좋아, 할 수 있어', '난 내 자신을 믿어'와 같은 말인데 마음속으로 외우기보다는 실제로 입 밖으로 드러내어 혼잣말을 하는 실험대상이 그렇지 않은 상대보다 월등히 실제 행동과 학습효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215-216


중국의 당나라 때 절강성의 서암사라는 절에는 사언이라는 선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로 유명한 암두의 제자였다. 사언은 스승으로부터도 인정 받지 못했던 치둔인이었다. 

그가 그렇게 불린 데는 어느 날 공양 초대를 받아 신도 집에 갔을 때 주인이 유리와 구슬로 된 염주알을 바구니에 잠아 각자 골라 가지라고 햇던 데서 비롯되었다. 사언은 다른 스님들이 다 고른 후 마지막에 남은 가장 볼품없는 것을 집어 들고 "이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든다."라고 흡족해하여 '바보선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사언은 아침에 일어나면 판도방(큰방) 앞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공아."

그러고 나서 사언은 대답했다

"네."

"정신차려라."

"네."

"앞으로도 속지 말아라."

"네."

사언의 자문자답은 자기 속의 자기야말로 만유의 근원적인 한 물건이자 본질 이전의 진아(眞我)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경책하는 벽력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216-217


웰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 개의 나 자신 중의 어느 나를 좇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217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였던 라로슈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귀중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고 말하면서 신제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추기경님은 그날 대담(2003년이엇던가. 새해를 맏아 동아일보에서 기획한 새해 특집으로 김수환 추기경과의 대담)에서 내개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가장 긴 여행이 뭔지 안세요?"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추기경님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하느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246-247


성경의 한 구절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까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거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러가.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사람의 정을 물리치지 말아라."  255


세속과 청산을 따져 무엇 하겠는가. 길상사건 대원각이건 굳이 어느 쪽이 옳은가 따져 무엇하겠는가. 봄볕이 비추면 꽃피지 않는 곳이 없지 않는가. 꽃피는 곳마다 부처 역시 살아나고 있는 것. 봄볕이 비추는 곳을 찾아갈 일이지 굳이 세속과 청산을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58


신문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성철 스님이 내린 법어가 실려 있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며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 해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유형무형 할 것 없이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들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함으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종말을 걱정하여 두여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러 온 것입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268


내가 "스님, 어느 책에선가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법정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실제로 죽음이 닥치면 어떨진 모르지만 지금 새악으로는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확고해지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277


법정 스님은 근대 불교계의 큰 어르신이셨던 효봉(1888~1966)의 애제자였다.

효봉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법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법관이 되었다. 36세가 되던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삶에 대해 큰 회의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와 엿장수를 하며 3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에 불문에 귀의하셨던 늦깍이셨다. 법정 스님이 출가를 결정하고 여부를 묻자 효봉 스님은 생년월일을 묻고 간지를 짚어본 후에야 이를 허락하였으며, 훗날 새로 출가한 법정 사미만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殿)에 가서 수행에 몰입할 만큼 법정을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일화 중에 한 토막.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자 효봉 스님이 법정 사미를 부르며 빈 그릇하고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법정 사미가 그릇과 젓가락을 가지고 우물가로 가자 효봉 스님은 설거지를 하며 버린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주워 담은 후 법정 사미가 보는 앞에서 밥알과 시래기를 물로 씻은 후 훌쩍 한 입에 들이마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출가해서 수도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든 아끼고 절약해서 시주한 사람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자 살림이고 되도록 몸에 지니지 않는 무소유야말로 참으로 전부를 갖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법정 스님의 철저한 무소유는 바로 스승이셨던 효봉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  280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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