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풍상을 견뎌내고 몇 백년간 잘 살아남은 주택은 대부분 각자의 개성과 집안의 내력과 희망을 건축에 불어넣은 집들이었습니다.  6



'살다'라는 말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고, 어느 곳에 거주하거나 거처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과 삶과 살림은 모두 비슷한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살림'은 한 집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양을 뜻합니다. 죽지 않고 살게 만드는 것도 '살림'이고, 집안의 세간조차도 '살림'이라고 합니다. 결국 살림은 삶이고, 삶을 영위하는 구체적이고 기본적인 공간은 살림집이 되며, 흔히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집이라고 하면, 사람이 전제가 되고 살아있음이 전제가 되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12


누구에게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라면, 세상의 사람 수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편적인 가치는 아마 '행복'이라는 단어로 모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7


과연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혹은 우리가 쌓아놓은 여러가지 유형과 무형의 재산만큼 행복을 줄까요.

우리는 얼마나 갖추면 행복해질까요.  18


행복이란 때와 시간을 정해놓고 찾아오는 계획된 미래가 아니라, 은행 이자처럼 순차적으로 쌓였다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예기치 못했던 순간순간마다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가령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고 집의 현관을 여는 순간 코끝에 훅 다가오는 따뜻한 집의 냄새와 온기와 익숙한 목소리로 안기는 가족의 살갗과 웃음, 그런 것들이 우리가 미워두었던 행복의 모습이 아닐까요.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행복한가?  19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몇 달 만에 그림 실력을 확 늘려줄 입시 마술에서의 요령 같은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믿음,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집을 설계하면서 처음의 생각과 머릿속에 떠올렸던 그림이 하나하나 실현되는 과정에서 행복해했던 건축주들이, 막상 집 공사에 들어가자 주변의 참견과 간섭과 조언들로 인해 흔들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내가 지어봤더니..." 혹은 "살아봤더니..."하는 사공들로 인해 갑자기 선택했던 자재에 의심이 생기고 창의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 하고 난방 방식이 바뀌기도 하면서, 점점 집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끝나고 보면 나의 생각으로 지은 집도 아니고, 남의 생각으로 지은 집도 아닌 어정쩡한 집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남이 재단해준 옷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살리는 일'은 다른 사람의 취향과 판단에 좌우되지 않고 내 마음 속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믿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나를 위한 삶의 출발점입니다.  27


고독은 사색을 불러오고 사색은 필연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불러옵니다. 철학적인 은유라기보다는 누구나 겪는, 환경에 따른 인간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78


집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구멍'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고, 바람이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고, 시선과 풍경이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 구멍을 '개구부'라고 하기도 하고 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능들이 불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뭉뚱그려 모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85


사실 건축의 가장 좋은 재료는 빛입니다. 빛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또 세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빛이란 존재를 의미하기도 하고, 깨어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관심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빛이란 집의 자세에 따라 다양한 느낌과 정서를 부여합니다. 동쪽 창으로 온 방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은 사람을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하고 희망을 줍니다. 남쪽 창으로 종일 비추는 겨울나절의 빛은 따스함과 노곤함과 생애 대한 신뢰를 주고 긍정을 줍니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황금빛으로 울컥하게 하는 석양은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혹은 밤에 불을 끄고 잠에 들려는데, 어둠이 눈에 익고 서걱서걱 이불 쓸리는 소릴 듣고 있다가 문득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예상치도 못했던 달빛은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빛은 빛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은 그 빛을 받아비추이는 것이 있어야 존재의 의미가 생겨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이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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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하라고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게다가 좋아하는 일 역시 나름대로의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를 점령한 채 방향 없이 걸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애써 태연한 척하며 공허한 조언들을 허공에 대고 읊었다.

도시에는 간혹 우울함이 몰려왔다.

마치 표지판들이 모둥 증발해버린 고속도로처럼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만큼 왔는지 전혀 모르는 채

모두들 그저 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옥죄는 고통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곳은 마치 유토피아의 정반대에 위치한 세상 같았다.

주말에 티브이를 시청할 때만 제외하곤 모두들 웃지 않았다.




욕망(欲望) -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그녀가 말했었다. "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어."

잠자코 있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외로움은 기대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즐거웠는데 사실 딱 그만큼 힘들어하고 있었다. 원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원하는 일을 하고 살았지만 그동안 내가 욕망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그 욕망은 나의 역량을 어느 정도 넘어선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기대치를 줄이고 실력을 늘리면 고통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기대는 쉽사리 접을 수 없고, 실력은 늘리기가 더더욱 힘들다.

내 욕망은 스스로를 외롭게 했다. 그런 나에게 라스베이거스는 이런 위로를 던져줄 것 같았다. "솔직한 게 제일 좋아. 그걸 남드링 싫어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환상은 대개 진부하지만 세상은 보다 진부하다. 그러니까 쿨하지 않게 보일까봐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다.



욕망의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각자의 욕망이 다르기에 종종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누군가가 의지할 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밖에 없었다. 



일탈(逸脫) -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일탈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일상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거나 혹은 목표를 향해가는 길을 잃고 잠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면 일탈의 감행을 고려해볼 만하다. 자기애가 결핍된 돌출행동은 단지 현재의 부정일 뿐이다. 일탈은 나름대로 미래지향적 자의식 발현이다.  



사고도 기왕이면 제대로 쳐야 한다.



짧은 여행이 해결해주는 건 많지 않다. 추억이 남는다고는 하지만 일상의 힘이 너무 강하기에 곧 묻혀버린다. 여행 중의 단상들은 마치 지난밤 꾸었던 두 번째 꿈처럼 희미한 기억으로 흩뿌려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았던 일탈이 좋았던 것은 여전히 나를 떨리게 만드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위안(慰安) -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또는 그렇게 하여 주는 대상




벌어지는 사건의 종유만 다를 뿐 나를 비롯한 또래들의 삶은 비슷한 편이었다. 

기쁜 순간이 잠시 있고, 슬픔 순간은 가끔 있고, 우울한 순간은 자주 있고, 힘든 순간은.. 순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다른 단어가 필요할 것 같은, 가령 '날'이나 '시기'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삼십 대 중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위로라는 게 그리 필요가 없었는데 위로를 받는다고 상황이 괜찮아질 리가 전혀 없다는 게 한 가지 이유였고, 사실 위로를 한답시고 말을 꺼내는 사람이 실은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던 경우가 많았던 게 또 다른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서로를 위로했다.



애석하게도 인생의 진부한 교훈들은 대개 맞아떨어졌다.



나는 '도시'라는 단어가 좋았다...

내게 모든 도시는 마치 여자 같았다. 귀여운 여자, 얼굴만 예쁜 여자,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 존경스러운 여자, 세심한 여자, 섹시한 여자, 터프한 여자, 여자를 좋아할 것 같은 여자, 남자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여자 등등.

그렇기 때문에 도시로의 여행은 종종 짝사랑이 되기 일쑤였다. 머리가 큰 이방인 남자를 단번에 좋아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마음을 뺏기 위해선 난 보다 오랫동안 그녀 주위에 머물러야 했다. 이십 대의 나였다면 분명 그녀들을 소유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자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음흉한 눈길의 아저씨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신사동 거리의 아름다운 여인들도, 유라시아 대륙의 아름다운 도시들도 굳디 내가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같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보통 여자들은 어른스럽다. 내가 조금 보채고 어리광을 피어도 묵묵히 바라볼 줄 알았다. 도시들 역시 내 치기 어린 행동들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그리고선 이렇게 말하는것 같았다. "너 같은 녀석들을 예전부터 많이 봐왔지."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세상을 여유롭게 사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적잖이 쓰라렸고, 오히려 난 과거에 비해 작은 상처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실 이를 극복할 교훈들은 충분히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교훈들이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이미 우리 사회는 성공한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많은 이들을 그들의 남루한 인생에서 탈출하기 위해 줄곧 새로운 교훈들을 찾았다. 물론 잠시 감동하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교훈을 머리에만 새긴 채 재워지지 않는 마음과 함께 나는 잠시 내가 좋아하는 도시들로 여행을 떠났다. 잊지 못할 스승처럼, 영원히 기억에 남는 은인처럼, 내겐 고마운 도시들이 존재했다. 도시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뛰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도시적 이야기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지난 일년 사이에 찾아갔던 라스베이거스와 찬디가르는 십여 년 이상을 줄곧 그리면서 좋아해왔던 곳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새로인 알게 된 도시였다.

그곳들로 찾아가 도시가 나긋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나는 복잡했던 마음을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 나 같은 녀석은 이미 세상에 많았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도시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사랑하게 된 사람의 오랜 습관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나름대로의 모습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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