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언어학자로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언어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60년대부터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별칭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미국
활동분야어학
출생지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
주요저서《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주요작품


1928년 12월 7일 미국의 펜실베니아주(필라델피아에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가정의 2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William Chomsky)는 저명한 히브리어 연구자였으며 촘스키가 언어학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언어학수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1955년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 언어학자인 캐롤 슈워츠 촘스키(Carol Schatz Chomsky)와 결혼했으며, 1950년대에는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qibbutz)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교수가 되었고, 1966년 석좌교수, 1976년부터는 연구교수가 되었다.  

그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하버드대학교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이 기간에 《변형 분석 Transformational Analysis》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형생성문법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론의 기본 틀을 정립하였다. 그는 1955년 논문의 내용을 발전시켜 《언어학 이론의 논리적 구조 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라는 책을 집필하였고,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이 책은 등사판으로 유포되었다가 1975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그리고 《통사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사론의 여러 측면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언어지식 Knowledge of Language》(2000), 《최소주의 언어이론 The minimalist program》(2001) 등의 저작으로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며 언어학의 혁명을 주도하였다. 

촘스키는 현대 언어학의 발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언어학자이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은 개개의 언어수행(performance)에 앞서 존재하며 그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의 보편적인 언어능력(competence)과 언어규칙에 대한 탐구로 언어학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는 ‘촘스키 혁명’, ‘언어학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 언어학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의 언어 이론은 인지과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현실 비판과 사회 참여에 앞장서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67년에는 국방성과 국무성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저작과 강연, 대담, 영상물 등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대외 정책과 정치·경제·매체를 장악한 권력을 비판해 왔으며, 직접 실천 행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발한 사회 참여 때문에 그는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어야 하며,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 Writers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1995)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언어학 이외에도 정치학, 철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80여 권의 저서와 1천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강대국의 패권적인 대외 정책과 언론, 지식인의 유착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활동에 앞장서, 《숙명의 트라이앵글 -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Fateful triangle :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1983), 《여론조작―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1988, 에드워드 허먼과의 공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What Uncle Sam Really Wants》(1996),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Profit over people : neoliberalism and global order》(1999),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2000), 《불량 국가 Rogue states》(2001) 등의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저작들과 강연, 대담 등을 통해 그는 다국적기업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와 강대국의 대외 정책에서 나타난 폭력성, 이에 융합된 사회 내의 권력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글들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며 큰 영향을 끼쳤다. 


변형생성문법 [變形生成文法,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

미국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가지고 있던 난점을 타파하고, 언어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 언어구조를 기술해야 한다는 N.촘스키에 의하여 제안, 발달된 문법.

변형문법·생성문법이라고도 한다. 종래의 미국 구조언어학에서는 분석 대상의 언어가 실제 회화에서 사용된 언어, 즉 언어체(corpus)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 능력은, 화자가 전에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문장을 포함하여 무한히 많은 수의 문장을 생성,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실제 회화에서 사용된 언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있을 수 있는 문장도 연구 대상으로 한다. 그리하여 문법적으로 옳은 모든 문장, 그리고 바로 그것만을 생성해 낼 수 있는 언어규칙을 명시적으로, 또 엄밀히 수학적으로 형식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렇게 형식화된 언어규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언어능력, 또는 언어습득 기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문법은 언어보편성()을 그 주장의 근저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천적으로 언어습득 기제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을 체계화하여 변형생성문법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는 이론이 발표된 것은 그의 《통사이론의 제양상: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에서였다. 이것은 나중에 표준이론으로 불리게 되는데, 문법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통사부문():이것은 크게 보아 기저()와 변형규칙()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저는 다시 범주규칙인 구절구조규칙() 부문과 어휘부()로 구성된다. 

구절구조규칙에는 순환규칙()이 포함되어 있어서, 종래의 단문 외에도 여러 복합문과 무한히 긴 문장이 생성되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구절구조규칙은 시발부호인 S(문장)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단계에는 복합부호()로 불리는 여러 가지 문법적 정보를 가진 자질()의 복합체를 이루게 된다. 

한편 어휘부에는 단어들이 각각의 문법적 정보를 담은 자질의 복합체와 함께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어휘가, 자질들이 서로 상치됨이 없이 구절구조규칙에 의해 생성된 구조에 삽입되고 여기에 필수변형규칙이 적용되어 하나의 심층구조가 생겨난다. 

한편 변형부분은 필수변형규칙과 수의변형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심층구조는 이러한 변형규칙의 적용을 한 번 혹은 그 이상 받아서 표면구조로 도출된다. 그러나 변형규칙은 의미를 바꾸지 않는 제약을 가지고 있으며 기본변형규칙으로는, 첨가·삭제·대치() 등이 있다. 

② 의미부문():통사부문이 생성적 부문인 데 비해, 의미부문은 해석적인 부문이다. 즉 통사부문에 비해 생성된 심층구조의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부문으로 각 어휘에 대한 의미를 나타내는 부문과, 작은 단위에서 큰 단위에로 의미를 조합해 가는 투사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③ 음운부문():이 부문도 의미부문과 마찬가지로 해석부문이다. 변형규칙의 적용을 받고 도출된 표면구조를 실제 언어와 같이 음성적 요소를 부여하는 부문이며, 일련의 음운규칙이 존재하며, 각각의 음운자질의 다발로 되어 있다. 이에 의하여 표면적으로 같은 문장일지라도, 심층구조에 차이를 두어 두 가지 이상의 해석을 가능케 함으로써 종래의 구조주의 문법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쉽게 해결하게 되었다.

그후 이 이론은 크게 보아 두 갈래로 발전하게 된다. 변형규칙이 과연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는가, 또 심층구조라는 것이 촘스키식의 통사구조가 아니고 의미구조가 아닐까 하는 등의 의문이 제기되면서, 확대표준이론으로 불리는 촘스키와 그의 제자 L.자켄도프의 이론은 의미해석을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에서 각각 해줌으로써 난점을 해결하려 하는 해석의미론()의 입장을 취하였고, 

그의 또 다른 제자들인 J.D.매콜리, E.J.바크, G.레이코프, T.로스, C.필모어 등은 변형규칙이 의미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한편 심층구조가 곧 의미구조라는 주장의 생성의미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다시 다른 관점에서 보아 전자를 어휘론자(), 후자를 변형론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후 변형문법은 주로 촘스키 계열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 수정·보완되어 왔으며, 근래에는 표면구조를 더욱 심화하여 모든 의미해석을 표면구조에서 하는 이른바 수정된 확대표준이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하면 표면구조는 표준이론의 표면보다 훨씬 추상적인 구조이며, 이것은 이동변형이 일어나고 남긴 흔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러한 의미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표면구조를 보강된 표면구조라고 부른다. 

최근의 변형문법은 이러한 체계를 더욱 발전시켜서, 문장구조 내의 지배와 묶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하위의 몇몇 규칙들(지배이론·묶음이론·주제이론·추상적 격이론·통제이론 등)의 상호작용으로 보편문법과 개별문법을 기술하려고 한다. 

이러한 이론을 근거로 한 보편문법은 다음의 네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 어휘부(lexicon), ② 통사부:범주부문·변형부문, ③ 음운형태부문(PF-component), ④ 논리형태부문(LF-component). 

이 가운데 특히 변형부문에는 단 한 개의 변형규칙, 즉 명사구이동 변형규칙(Move NP)만 존재한다.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

촘스키는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동티모르와 코소보사태 등 약소국에 내정에 개입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미국의 대중 매체 역시 국가 이데올로기를 위해 모든 뉴스를 철저하게 왜곡하고 있다며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의 저서

정치
  • 《지식인의 책무》(2005) 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 (1967)
  • · 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 (1969) ·
  •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하여》(2003) Problems of Knowledge and Freedom: The Russell Lectures.(1972)
  • 《숙명의 트라이앵글》(2001) The Fateful Triangle: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 (1983, 1999)
  • 《해적과 제왕》(2004) Pirates and Emperors: International Terrorism and the Real World. (1986)
  • The Soviet Union Versus Socialism (1986) ·
  • 《여론조작》(2006)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 * (1988)
  • 《테러리즘의 문화》The Culture of Terrorism. (1988)
  • 《환상을 만드는 언론》(2004) Necessary Illusions (1989)
  •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2000년) 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 (1993)
  •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2004) The Prosperous Few and the Restless Many.(1993, 2003)
  • Deterring Democracy (1992) ·
  •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1996년) What Uncle Sam Really Wants(1992)
  • 《노암 촘스키의 미디어컨트롤》(2003) Media Control: The Spectacular Achievements of Propaganda. (1997, 2002).
  • 《냉전과 대학》 (2001년)The Cold War and the University.(1997)
  •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1999년) Profit over People: Neoliberalism and Global Order.(1999)
  • 《불량국가》(2001) Rogue States: The Rule of Force in World Affairs (2000)
  •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2001) Chomsky on Mis-Education (2000)
  • 《촘스키 9-11》(2001) 9-11 (2001)
  • 《촘스키 사상의 향연》 Chomsky on Democracy and Education(2002)
  • 《패권인가 생존인가》(2004) Hegemony or Survival: America's Quest for Global Dominance (2003)
  • Objectivity and Liberal Scholarship (2003) ·
  • 《권력과 테러》Power and Terror: Post-9/11 Talks and Interviews.(2003)
  •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Middle East Illusions: Including Peace in the Middle East? Reflections on Justice and Nationhood. (2003)
  • 《촘스키, 미래의 정부를 말하다》(2006) Government in the Future.(2005)
  • 《촘스키의 아나키즘》(2007) Chomsky on Anarchism (2005)
  • 《촘스키, 우리의 미래를 말하다》(2006) Imperial Ambitions: Conversations on the Post-9/11 World.(2005)
  •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2006) Failed States: The Abuse of Power and the Assault on Democracy (2006)
  •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2005)
  •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2009) Perilous Power. The Middle East and US Foreign Policy. Dialogues on Terror, Democracy, War, and Justice (2006)
  •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2008) Interventions.(2007)
  •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 What We Say Goes: Conversations on US Power in a Changing World.(2007)
  • 미국의 이라크 전쟁 Iraq under siege
  •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Penser le XXI siecle par le monde diplomatique 2000 par le monde diplomatique
  • 전쟁과 평화
  • 노엄 촘스키와의 대담 (한국과 국제정세)
  •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Deux heures de lucidite : entretiens avec Noam Chomsky
  •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 Arguments against G8
  • 시대의 양심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Louder than bombs : the progressive interview


언어학 

  • 《생성문법론》Syntactic Structures (1957)
  • Current issues in linguistic theory (1964)
  •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 (1965)
  • Cartesian Linguistics: A Chapter in the History of Rationalist Thought (1966)
  • 영어의 음성체계》(모리스 할레와 공저) (1968년) The Sound Pattern of English (1968)
  • Conditions on Transformations (1973)
  • 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 (1975)
  • 《지배.결속이론:피사강좌》Lectures on Government and Binding: The Pisa Lectures (1981)
  • 《언어지식》 (2000년) Knowledge of language: its nature, origin, and use (1986)
  • 《장벽이후의 생성문법》 (1993년)
  • 《언어와 지식의 문제》 (1994년)
  • 《최소주의 언어이론》 (2001년) The Minimalist Program (1995)
  • New Horizons in the Study of Language and Mind (2000)
  • 《촘스키 자연과 언어에 관하여》 On Nature and Language (2001)






















Posted by WN1
,


wn1 - 사이코 패스 테스트를 하시는 분들은 본인이 직접 자신을 테스트 하는거라고 알고 있는듯 합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모습들을 보고 테스트 해주는 거라고 하더군요.
철학전공 인문학부 교수님 한 분이 알려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제가 해보긴 했습니다..ㅎㅎ
테스트를 해보면서 자신을 한 번 돌아보기도 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흔히 연쇄살인범이라고 잘 알려졌는데,, 실은 사이코패스 중에 성공한 CEO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물론 그런사람들이 모두 그런건 아니겠지요.. 
또한 군인들 중에도 꽤 있고 의사들 중에도 있다고 하더군요...
어떠한 것을 가지고 있든 자신이 가진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것도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이코패스 테스트입니다.

 

문항의 내용을 보면서 더욱 사이코패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1.아니다(0점)   2.조금그렇다(1점)   3.그렇다(2점)

 

 

1 말잘하는것을 매력으로 생각한다

 

2 자기의 가치에대해 자랑하고 다닌다

 

3 거짓말을 입에 달고산다

 

4 속임수를 경멸하거나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5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않는다

 

6 감동적인 걸봐도 감동인지 모른다

 

7 매사에 냉담하고 남이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다

 

8 책임감이 없거나 부족하다

 

9 일상생활에 정신적 자극이 필요하고 지루함이 많다

 

10 기생충처럼 남에게 빌붙어산다

 

11 나쁜행동을 자제할 능력이 부족하다

 

12 소년비행을 경험하거나 영유아기때 잔인한 짓을 많이 했다

 

13 현실성이 부족한 목표를 길게 끌며, 그것을 할수있다고 믿는다

 

14 매사에 충동적이다

 

15 무책임하다

 

16 소년비행을 해본적있다

 

17 약속을 잘 깬다

 

18 아무데서나 성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19 많고 짧은 연애를 한다

 

20 범재적 재능을 타고 낫거나 재능을 이용하라고 한다

 

(이 테스트에서 30점 이상 나오면 사이코패시)

 

 

 

 

 

 

사이코패스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규범이나 규칙 약속 등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격 탓으로 인해 자신.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병질(精神病質)' 을 말한다. 어떤 사회악적인 행위를 태연히 벌리면서 그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상식적인 도덕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



Posted by WN1
,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의 종아리 뼈가 없어 생후 11개월 때 무릎 아래를 절단한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차이는 없다며 작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염원했던 그였지만 결국 일반 올림픽 출전은 무산 되었습니다.

그 뒤 피스토리우스는 장애인 올림픽인 페럴림픽 100m에 출전하여 11초 17의 기록으로 우승하였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우사인 볼트(9초 69) 보다 불과 1초 48 뒤진 멋진 기록이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피스토리우스는 그 모습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기자 : "혹시 다리가 정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라는 질문에 그는


오스카 : "그런 질문은 비장애인들에게 의족을 끼고 달리는 건 어떨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한 마디 더 붙였습니다.

           "나는 그냥 나입니다."

 

세상은 그에게 남들과 다른 신체를 주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남들과 똑같은 것 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저 현재에 만족하고 지금에 감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wn1 -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있고,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질 수 있는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가지고 있는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걸 알면서도 믿으려 하지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서 부러워하거나 싫어합니다.


자신이 앞으로 가질 것에 희망을 두고 그것을 가지고 나가면서 현재를 맞추어 살게 된다면 주인공처럼 세상을 달리 볼것입니다

Posted by WN1
,

Posted by WN1
,


Posted by WN1
,


Posted by WN1
,

wn1 - 얼마전 crr분석법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빨강 - 청록 - 보라 였다..
꽤나 맞는것 같아서 여러명에게 해보니 그들도 꽤 맞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통계를 통해서 나온것이기 때문에 100%맞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EBS에서 나온것처럼 ... 심리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테스트에서 어떻게 말해도 맞는 부분은 있다고 한다..
ㅎㅎ



 

 

1. 좋아하는 색을 고른다.

 

여덟 개의 색 견본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마음이 끌리는 순서대로 세 개를 선택하라. 순간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도 말라. 약 30초 동안 본능적으로 선택하라. 당신이 좋아하는 색이나 어느 색에 얽힌 사연들 따위는 잊어버려야 한다. 굳이 조화가 이루어질 만한 색을 고르려고 애쓰지도 말라.

 

 

2. 순서가 지니는 의미

 

첫 번째에 있는 색 당신의 개인적인 본질을 나타낸다. 당신이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당신의 기본 성격과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양식을 반영한다. 이것은 당신의 진실한 자아의 표현이다. 현재 당신이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색일 수도 있다.

 

두 번째에 있는 색 현재를 의미한다. 지금 당신이 처해 있는 현재(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인 면에서 모두)와 관련이 있다. 이 색(혹은 그것의 보색)은 당신의 깊은 무의식적 욕구나 결핍 상태 혹은 약점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신이 지금 즉시 수용해야 할 색이다. 당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나타내주는 색이기도 하다.

 

세 번째에 있는 색 당신의 목표를 의미한다.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도 나타내준다. 이 색에는 당신의 내면적인 소망, 비전과 꿈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운명의 방향과 앞으로 당신이 밟아야 하는 단계를 지시해준다. 당신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한다는 전제 하에서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다. 이 색은 새롭고 신선한 미래를 만들기 위하여 당신에게 어떤 행동들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

 

 

3. 색의 조화

 

당신이 선택한 세 가지 색 가운데 두 가지가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보색 색상환에 들어 있을 경우, 색이 조화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색이 조화를 이룬다면 두 색이 서로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색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당신의 인생에 균형 감각과 매끄러운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으므로 당신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성격과 환경과 목표에 어울리는 길을 따라 건설적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선택한 색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에너지가 분산되거나 낭비되어 초점이 흔들리게 될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뜻이다. 보완적인 색들이 안정 장치 혹은 서로를 잡아 당겨주는 닻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색과 첫 번째 색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당신은 진정한 자아와 장기적인 발전 목표를 잘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니 인생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우선 두 번째 색이 드러내는 장애물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색과 첫 번째 색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현재의 상태가 당신의 진정한 자아와 잘 맞물려 있으니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의 본래 성격이 개인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세 번째 색과 두 번째 색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여기서도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비록 성공을 위한 노력이 진정한 자아가 아닌 현재의 상태와 어울려 있긴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 색이 제시하는 도전을 극복해야만 당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색이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고 해서, 그 결과가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색이 색채 스펙트럼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따뜻한 색이 많은지, 차가운 색이 더 많은지를 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균형을 찾는 방법을 짐작할 수 있다. 주로 차가운 색을 선택한 경우라면 따뜻한 색의 스펙트럼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고, 주로 따뜻한 색을 선택하였다면 차가운 색의 스펙트럼에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색은 마젠타, 빨강, 주황, 노랑이며 차가운 색은 청록, 파랑, 보라이다. 초록은 차가운 색 스펙트럼이 끝에 위치해 있지만 중성적인 색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검사를 12주에 한 번씩 다시 해보기 바란다. 당신이 선택하는 색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예전의 분석이 더 이상 당신이 현재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4. 위치에 따른 색의 의미

당신이 세 가지 색을 골랐다면 이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기본으로 그 색의 의미를 해석해보라.

 

빨강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의 기본 천성은 남을 따르는 것보다 앞에서 이끄는 쪽이다. 주로 남보다 먼저 개척하고, 먼저 의견을 제시하고, 먼저 창조한다. 사교적인 성격이며 지도력이 있다. 경쟁심이 상당히 강하고 정열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당신은 저돌적인 추진력과 계속 앞으로 뻗어나가려는 성향이 있다. 목표 달성, 성공-이런 말들을 자주 밖으로 표시하곤 한다. 전적으로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행동하며, 과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다. 꼼꼼한 계획이나 전략에 의지한다기보다, 육체적인 힘과 결단력을 더 많이 믿는 편이다. 당신은 적극적이며 강렬하고 정열적인 사람이다. 육체적 감정적 에너지가 끊임없이 솟구친다. 하지만 논리와 감정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당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인생의 평형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좀더 자신을 자극하고 분발시켜야 하며 힘을 길러야 한다. 특히 신체적인 힘을 길러야겠다. 하지만 빨강의 원래 특징이 적극적이고 줄기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의 고갈 상태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몸이 지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맹렬한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미덕은 인내심이다. 지배적인 경향, 공격성, 대결 본능, 강한 성적 자극에 너무 매달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대신에 사랑, 애정 우정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현실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다.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붙이고 현실적으로 행동하라. 지금은 공상에 빠지거나 행동을 미룰 때가 아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기회를 움켜잡아야 할 때이다. 당신은 내심 무언가 새로운 일을 만들어서 그것을 확실하게 밖으로 표시하고 싶어한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하거나, 체육관에 다니는 것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신은 일어서서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빨강을 세 번째로 선택한 것이, 당신이 몹시 지치고 고갈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당신을 진정시키고 가라앉혀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푸른 하늘, 짙은 파랑이나 청록색의 바다에 의한 생각이 이상적인 영양제가 될 수 있다.

 

주황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경쾌하고 낙천적이며 원기가 넘쳐흐른다. 활기차고 즐겁고 민감하고 행복한 기질을 갖추고 있다. 당신은 인생을 최대한 즐기려고 하며 어디에든 기꺼이 참여하고 어디를 가든 명랑함과 용기를 발휘한다. 솔직한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고 얘기하기를 즐기며 사교적이고 외향적이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며, 그들의 영혼을 드높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급하게 행동할 때가 많고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당신의 성격을 오랫동안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당신을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감정적인 폭발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균형 있게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 전체적인 상황을 요모조모 따져보고 평가하려고 노력하라. 간혹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면도 있으니, 당신의 기본적인 본성을 믿을 필요가 있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내면적 자아를 좀더 의식해야겠다. 당신의 내적인 자아가 균형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 모두 평온함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색은 노랑과 빨강 사이에 있기 때문에, 대단히 활동적인 신테적 특징(빨강)과 꼬치꼬치 파고 들어가는 노랑의 특징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한 자질이 결합되어, 다른 살마에게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경우가 잦다. 당신은 좀더 느긋하고 편안한 태도를 터득해야 한다. 당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라. 당신의 일부가 이런 시간을 원하고 있으며, 그 시간이 당신에게 영양분을 제공해줄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간을 보내야 자신을 통합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파괴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더욱더 건설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순간적인 충동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각에 별로 시간을 쏟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의 지금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자주 의심하게 된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좀더 깊은 생각과 신중함이다. 그래야 당신의 에너지를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내적으로 움츠러들어 있어서 세 번째 위치에 주황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지금 당신에게 적절한 행동은 좀더 용감하고 자신 있게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 그리고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평소의 행동 양식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찾아야 한다.

 

노랑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오감과 같은 인간의 의식적인 능력을 깨닫고 있다. 이성, 논리, 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인생을 바라본다. 당신은 지적인 측면에서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쉼 없이 분석하고 계산할 수 있다. 남을 지배하거나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경향이 강하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심술을 부리거나 심지어 악의적인 행동까지 보일 수 있다. 당신은 말솜씨가 뛰어난 편이다.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유창한 표현력을 자랑한다. 말이나 숫자가 관련된 일에 주로 참여하고, 책임감과 권위가 있는 직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서장이나 자영업자, 과학자 혹은 연구원일 수도 있다. 당신은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자리를 좋아한다. 특히 당신이 관심의 대상이 될 때.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정신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자아까지 생각해야 한다. 현실적이고 셀제적인 인생을 무시한 채 환상이나 꿈, 상상력의 세계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생기므로, 이러한 개념적인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당신의 명석한 아이디어가 시대보다 너무 앞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현시대에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당신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인내심이 부족한 편인 데다가 에너지를 한번에 여러 곳으로 발산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욕구불만과 불만족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정신을 확장하고 개방하기 위한 특별 훈련이 필요하다. 당신이 적당하다고 느끼는 훈련을 선택하되, 일단 선택을 했으면 긍정적이고 현실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또한 그 작업이 중요성을 지닐 수 있도록 훈련 과정과 비용, 기간, 장소 등을 상세하고 철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단계를 밟는다면, 햇살과 빛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당신의 인생에 낙천성과 행복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휴식일 수도 있다. 태양빛을 듬뿍 받을 수 있는 휴식. 한편으로 당신은 자신의 지식과 이해력을 유익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당신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타고난 직감과 잠재력, 지혜를 잘 활용한다면 당신의 노력은 점점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초록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지배적이지도 복종적이지도 않고, 외향적이지도 내향적이지도 않다. 양쪽의 균형을 추구하여 어떤 종류의 극단으로도 흐르지 않는다. 항상 행동하기 전에 심사숙고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면이 부족하기도 하다. 당신은 일터에서 매우 능률적이고 성실한 사람이며, 집에서는 깔끔하고 단정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언제나 탄복하는 편이며, 공원이나 해변처럼 탁 트인 공간을 좋아한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되도록 식물과 꽃들을 주위에 놓아두고 싶어하며, 나무, 흙, 돌 등 천연 소재로 만들어진 것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으며, 스스로 만들어놓은 장벽을 쉽게 부수지 못한다. 당신에게는 인생에 대한 태도를 규칙적으로 재평가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감정적인 상처를 달래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처들은 당신에게 깊은 불안감을 일으켜 궁긍적으로 환멸, 씁쓸함, 시기심과 질투심을 남길 수 있다. 이 감정들을 안으로 삭이려고 이런저런 합리화를 추구하다가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다. 겉으로 무난하고 바람직한 행동을 내보이더라도, 그런 행동들이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주 위협 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곤 한다. 그래서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남에게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편이며, 내적인 감정을 억누르려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특히 제한된 상황과 그속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을 혐오스러워 한다. 지금 당신에게는 움츠러들고 망설여질 때마다 좀더 감정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과 좀더 어울리면서 새로운 우정을 쌓거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신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익과 가치를 알게 되고, 지금의 상실감과 외로움에서 차츰 벗어날 수 있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즐거움을 찾게 되면서, 초록의 전형적인 특징인 죄의식, 원망, 무기력증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기민함이 필요하다. 상황이 당신의 판단을 거치지 않고 무작정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청록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기본적으로 불꽃 튀는 젊음을 가지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신선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드러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거의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며 까다로운 사건들도 수월하게 처리해낸다. 장애물이 생겼을 때 두려움 없이 냉철하게 대처할 수도 있다. 당신의 결단은 빠르고 행동은 확실하다. 그래서 인기 있는 인물인 경우가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적과 방향 의식을 반영시킬 수 있다. 뛰어난 통찰력과 능력을 지닌 당신은 그 재능을 영적인 길로 더 정진하는 데 사용하고자 한다. 대화를 잘 이끌어나가며 자신을 편안하게 표현할 줄도 안다. 하지만 영적인 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비현실성을 극복하고 아이디어를 현실성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신선한 에너지에 이끌려 이런저런 요구로 당신의 공간을 침범하려 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건강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타인에게서 벗어나 내적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극단과 지나친 탐닉에 빠져 있었던 경우라면,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을 깨끗이 정화하고 활력을 되찾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것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당신은 매우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내적인 침잠 시간이나 정화 과정을 소홀히 할 경우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붕괴되어 질병을 얻을 수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인생에서 닥치는 상황들을 모두 도전으로 간주한다. 새로운 변화로 자주 삶이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지기도 하지만, 당연히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변화를 위해 감당해야 하는 행동이 개인적인 변화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변화를 환영한다. 이 과정에 혼란과 두려움, 근심과 불편함이 동반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개인적인 성장과 개발을 위해 필요할 부분이다. 시련과 장애물을 훌쩍훌쩍 뛰어넘다 보면, 활력과 강인함이 보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당신은 한번 해보자라는 도전 정신을 지니고 있다. 그 움직임과 청록색의 에너지가 당신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 올려줄 것이다.

 

파랑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하며 평화롭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쉽게 흥분하는 유형도 아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으로 비쳐진다. 존재의 의미나 영적인 자아에 대한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고, 정신적인 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진실함과 솔직함 같은 자질들을 귀하게 생각한다. 당신 자신도 진솔하고 믿음직하고 충실하다. 사람들은 당신과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당신은 아무런 위협감도 주지 않은 채 고요하고 안정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자신에게 몰입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혼자 고립되는 경우가 많고, 매일 매일 벌어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감을 상실하기도 한다. 당신은 인생에서 질서를 찾고자 하며, 지속성과 안전성을 좋아한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에게는 침묵과 지식이 강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 고요를 본다. 이 평화로운 외면은 따뜻한 색의 스펙트럼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에게 부러운 면이다. 하지만 당신은 내면적으로 너무 강력한 그 침묵을 깨뜨려야 할 필요가 있다. 밖으로 자신을 좀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우울증과 의기소침에 빠져들게 되고, 무기력증과 허탈감 때문에 힘들어질 수 있다. 당신은 뒤로 물러나 숨어 있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는 습관과 자기 표현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균형 있는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영적인 생각과 명상, 이런 것들이 당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부분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당신은 삶의 순리에 좀더 신뢰를 보내야 한다.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현실에 참여해서 일상적인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당신이 추구하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자유와 영성을 찾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융통성이다. 이 커다랗고 추악한 세상에 집어삼켜 질 거라는 두려움 없이 삶에 참여하고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이 느긋하고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충만함을 찾을 수 있다 해도, 영원한 도피의 도구가 아니라 임시 방편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보라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의식과 인식을 지니고 있다.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정신력의 세계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파랑을 선택했던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잘 적응한다. 보라색 자체가 빨강과 파랑의 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지나치지 않게 당신의 영적인 면을 활용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봉사를 하고자 하며, 진정한 위엄과 고상함을 갖추고 있다. 스스로를 심미적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예술 계통이나 종교 계통, 부와 사치가 결합된 활동을 직업으로 삼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한가지 약점은, 자신이 설정한 비전을 달성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곤 한다는 점이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여러 가지를 통합하여 짜맞추는 능력이 있다. 타고난 리더로서 높은 직위에 앉아 있을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럽게 여기는 일들을 척척 해내면서도, 스스로는 자긍심이 부족하여 정서 불안에 시달린다. 당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받아들여야 한다. 잘한 일이 있을 때에는 잘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 피드백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만의 고독한 공간으로 숨어들게 될지 모른다. 인생에서 책임져야 할 일을 거부하고(부정적인 빨강) 현실 도피의 과정으로 후퇴하게(부정적인 파랑) 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성숙하지 못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반드시 끝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끈기를 발휘해야만 성숙해질 수 있다.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타고난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어하며 그 자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한다. 당신에게는 특별한 치료의 능력이 있으니, 그 신념과 직감, 지혜의 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여기서 치료라는 표현은, 질병을 치료한다는 뜻이 아니라 좀더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범주의 치료를 의미한다. 영적인 능력을 개발해야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마젠타

① 첫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친절하고 온화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타인에게 애정과 따뜻함, 사랑과 연민을 보낼 줄 안다. 인생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성숙함을 지녔으며, 주위 사람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력하고 이끌어주려고 노력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상냥함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카운슬러나 간호사, 혹은 사회사업가와 같이 타인을 보살펴주는 분야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을 발산하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② 두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인생에서 주고받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들을 격려하며 최선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지만, 당신 자신이 가진 욕구에 대해서는 소홀한 편이다. 그래서 자주 손해를 보기도 한다. 당신은 주는 것만큼 받는 것도 가치있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또 의무감이나 죄책감 때문에 애써 보답해줄 필요가 없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해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양분을 제공하라. 가 더 쉬운 것 같을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개발하라. 

③ 세 번째 위치에 있을 때

당신은 빨강이 가진 육체적인 추진력과 보라색이 가진 영적인 면들을 혼합할 수 있다. 색채 스펙트럼의 첫 번째와 일곱 번째 책이 결합되어, 인생의 기본적인 힘과 하늘의 힘이 아름답게 버무려진다. 이 결합에는 인류에 지대한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물질 세계에서 우리가 열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색이며, 우주적인 통일성을 창조해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색의 조합이다. 당신은 이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거나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한 상태일 것이다. 원시적인 자아에 사로잡히거나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상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당신의 도전 과제이다. 자칫 잘못하면 거만하고 지배적인 천성이 드러나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좀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부분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점욕과 타인을 조종하고 다스리려는 성향이 생겨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고독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Posted by WN1
,

wn1 - 개인적으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가능하면 가서 듣는다.
또한 같은 강사의 강의를 반복해서 듣는다.. 사실 공부란것은 반복이 아닌가.
내가 학생들에게 공부법을 알려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같은 분의 강의를 찾아서 여러번 듣는다.
그렇게 들어보면 처음 들을때는 많은 것을 가슴에 품으나 몇 번을 더 들으면 점점 줄어드는 강의가 있고..
사실 처음부터 그리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는 강의들도 있다...그래도 몇 번 들으려 한다.
그럼데 처음들을 때의 뭉클함을 여러번 반복해도 그대로 아니 더욱 커지는 것을 느끼는 강의가 있다.
서진규 박사님의 강의는 그러한 강의 이다...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시리기도 하고 즐겁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삶을 그대로 뭍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인간적인 면과 강렬한 카리스마를 공존 시키는 강의 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강의가 더 있으면 들으려 노력할 것이다..^^

<맨 아래에는 서진규 박사님의 카페 링크와 도서내용 링크가 있습니다>


강의 내용 요약

한국에서만도 600여회에 달하는 강연중
2006년 6월 8일 하버드 박사학위 취득
2017년 1월 21일 미국 국무장관에 취임(그의 꿈)
c형 간염의 악화로 한국에 들어오기로 결심 - 인터페론 주사는 우울증을 동반하기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지역전문가 파견시절 폭음과 공부하면서 스트레스로 인한것이라 말하심)

서진규는 초등학교시절 3년동안은 반에서 꼴찌만 하였다.
하지만 어머님의 영향으로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꿈'을 가지기 시작함.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 성공하려면 박사가 되는것이다.
이때부터 박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 물론 그 전까지의 꿈은 암행어사 였다. 아는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초6학년때부터 공부에 대한 눈이 떠지고 방법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의 성공비결은 내가 가진것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평 불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을 베풀어 스스로 바뀌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돕기위해 필요한것 첫째는 인성
                                           둘째는 실력
                                           셋째는 성과
니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명확하다면 '어떻게'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알려줄 것이다.

아버지께 바치는 노래 '한 오백년'
지역전문가를 위해 일어공부를 하는 중에 아버지 폐암말기 알게되었으나, 그때는 사명감에 아버지께 일생의 불효를 저지름.. 한국으로 돌아가는 부모님께 딸만 동행시킴...일반석으로...
평생의 후회가 되는것... '당신들도 살아계신 부모님께 사랑을 전하고 나처럼 바보같은 짓은 하지말라.'
(노래를 부르시는데 온몸에서 닭살이 돋았다... 배와 목으로 노래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밑의 서러움과 죄송함과 자신에 대한 채찍으로 부르기에 전율이 돌았다.. 찍어놓은 동영상을 올릴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무슨 일을 할때 자신에게 하는 질문
1. 꼭 필요한것은 무엇인가?
2. 어떤 것을 가지고 있나?
3.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서진규 박사님의 강의는 여러번 들었다... 짧게도 길게도...
늘 느낌은 하나다...열정...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것이 맞다...이분을 보고 있으면 그럴수 밖에 없다.
강의 영상을 올리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ㅡ.ㅡ


딸 조성아와 함께



백과사전에서의 서진규
서진규(1948년 ~ )는 미군 예비역 영관급 장교이자 작가이다

한국에서의 삶

1948년 경상남도 동래군의 어촌마을 월내에서 장수 딸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언니,오빠와 2명의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중 한 사람은 미군 복무중 사고로 요절하였으며, 한 사람은 지능의 발달이 비장애인에 비해 늦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제천시로 이사, 동명초등학교제천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풍문여자고등학교 수학을 위해 한국군 장교인 큰아버지댁에서 살았는데, 여학생 잡지를 친구들에게 파는 아르바이트와 아버지가 보내주시는 로 생활하였다. 고등학교 졸업후인 1967년 종로구에 있는 가발공장에서 사촌 언니와 같이 일했지만, 서진규 그 자신이 자서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에서 '딴 생각에 사로잡힌 소녀'라고 회상할 정도로 공장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삶

 미국이민

21세때인 1971년 친하게 지내던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들은 서진규는 도미를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온갖 말로 미국에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으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고, 아버지가 겨우 구해준 비행기삯 100달러만 가지고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그는 한식당 아리랑의 웨이트리스(여성 웨이터)로 일하며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75년 한국인 태권도 사범과 결혼하였다.

 입대

 사병시절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으로 얼룩졌으며, 결국 서진규는 미 육군사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탈영군인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훈련병 생활은 힘들었지만,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움을 참아내어 3개월간의 훈련을 마쳤을 때는 200명중에 일등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일등병이 된 그는 대한민국 용산구주한 미군 부대에서 군수업무를 맡았다.

 장교시절

상등병 시절 주위의 권유로 간부사관을 지원하여 고된 훈련끝에 임관하였다. 장교근무시절 그는 독일일본에서 해외근무를 하였으며, 1987년에 어렵게 메릴랜드 대학교 경영학과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하버드대학교 진학

마흔두살때인 1990년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미군 대위 신분으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992년에는 하버드대학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합격하였다. 당시 서진규는 대학교공부에 필요한 일본말실력을 갖추기 위해 개인교사와 일본말을 잘 하는 아버지에게 일본말을 배웠다. 하지만 공부를 더 많이 하려면 군인의 길을 접어야했기 때문에 1996년 11월 소령으로 전역하여, 20년이나 꾸준히 해온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과에서 박사 학위(수료는 1999년, 박사논문통과는 2006년)를 취득했다.

 가족

가족으로는 딸 조성아 씨,어머니,언니,오빠 내외(《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 의하면, 서진규 씨의 시누이 그러니까 서진규씨 오빠의 부인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서진규의 동생을 정성껏 돌보는 착한 분이라고 한다.)가 있다. 현재 조성아씨는 하버드대학교 졸업후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교육 장교로 복무하고 있으며, 서진규씨는 한국에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북하우스,랜덤하우스중앙)
  •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푸른숲)
  • 오디오북《목표에서 눈을 떼지 마라》(아름다운 사회)

서진규의 희망 키워드 ..

아래는 서진규 박사의 강의 마지막에 부르시는 일본에서 발매한 자신의 노래

전체를 듣게 되시길... 


내가 터득한 다섯 가지 인생철학

서 진 규 박사( 희망연구소 소장)

나에게는 반세기의 삶을 통해 얻은 신념과도 같은 인생철학이 있다.

이러한 신념은 내 딸 성아와의 대화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고,

그 아이의 성격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요즈음 성아와의 대화 속에서 이러한 나의 철학에 물들

어 있는 딸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 희열을 이번 캠프에

참여한 나의 또 다른 분신들에게 주고 싶다.

 

첫째, 인간이 태어나는 데는 아무런 선택이 없다.

 

여자로 남자로, 부잣집에서 가난한 집에서, 권력이 있는 집에서 권력이 없는 집에서 등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또한 백인으로 흑인으로 혹은 동양인으로 태어나고자 해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어디서 태어나는가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닌 건만 이 사회는 인간이 태어난 배경이 마치 그들의 공이나 죄인 양 서슴없이 차별을 가한다.

나는 감히 이러한 제도가 턱없이 부당하도고 선언한다. 태어난 배경에 의해서 그 사람의 활동 범위를 정해버리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잃고 만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손실이 아니다.

세계의 위대한 영웅들과 발명가들이 태어난 배경에 의해 한정된 기회를 부여받았더라면 인류 역사에서 오늘과 같은 발전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별은 차별을 행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큰 손실이 된다.

 

둘째,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에도 아무런 선택이 없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죽는다. 권력을 가진 자도, 돈이 많은 자도 결코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죽음이 두려워서 항상 겁에 질려 살거나, 올 때 오더라도 겁내지 않고 태연히 알찬 삶을 살거나 죽을 때가 되면 다 죽게 마련이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죽음이라면, 이것 역시 자연의 법칙이란 믿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은 죽으면 어차피 썩어서 없어질 자연의 일부다. 아무리 아끼고 귀하게 여겨도 죽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뜻에 의해 처리된다. 이왕에 내 것이 안 될 봐 에야 차라리 인류를 우해 값진 보탬이 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1991년 3월 2일 날 써둔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성아는 이 편지를 본적이 없다. 언젠가 내가 이러한 뜻을 얘기해 두려 했지만 성아가 듣기를 거부했다. 남에게는 아주 강해 보이는 아이도 엄마의 죽음을 덤덤하게 들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 이상의 사이이고 보면 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딸 성아에게

지금 이 편지를 써두고자 함은 내가 심신의 불능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할 수 없게 되어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대비해서다.

만약 내가 회복 불가능한 식물인간처럼 되어 더 이상 혼자서 살아갈 수도 또는 정신의 마비 등으로 의사에게 내 생명을 임의로 연장하고 있는 보조선을 끊어달라는 뜻을 전할 수도 없게 될 경우, 나는 네가 이 세상에서의 내 존재를 끝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며, 네게 그러 수 있는 결정권을 맡긴다.

이런 부탁에 네가 얼마나 가슴아파할지 엄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런데도 하지 않을 수없는 내가 원망스럽구나.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의 경우 내 삶을 끝내주는 것이 바로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함이 나를 더 많은 고통으로부터 구해주는 일이고, 나를 더욱 해복하게 하는 길이

기에…….

만일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혹은 과학 연구를 위해 내 몸의 일부 또는 전체가 필요하다면, 그런 고귀한 뜻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나머지 필요 없는 부분들을 태워서 너에게 가장 편리한 곳에 묻어주기 바란다.

언제나 성아를 사랑하는 엄마가.

 

셋째, 인간에게는 이승에서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우리에게 전생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우리는 죽은 후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전생에 무엇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후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 삶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보면 전생과 후생은 다른 사람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생과 이승 그리고 후생이 본인의 뜻대로 서로 연결되지 못하니, 결국 인간에게는 이승에서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넷째, 그러나 이 한번 의 기회를 어떻게 살다 가는가는 바로 내가 결정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축을 때까지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 닥치더라도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 한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며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든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며 어쩌지 못해 살든가 마지막 선택은 각자의 손에 주어져 있다.

나는 물 반잔의 비유를 자주 든다. 물이 반 남은 것을 보고 " 아, 이제는 반밖에 안 남았구나! 어떡하지?" 하며 안절부절 못하거나 "아, 아직도 반잔은 남았으니 난 얼마나 행운아인가!" ㅎ며 다행스럽게 생각하거나 물이 반잔이라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서 같은 현실도 마음먹기에 따라 자신이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바로 자신이 하는 것이다.

 

다섯째, 이왕 태어난 삶이다. 한번 힘차고 보람 있게 살다감도 멋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이미 태어났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마는 사람들도 부지시구다. 그들은 자기 소신껏 살아볼 기회마저도 뺴앗겨버린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알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죽음이 그들을 데리고 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삶을 요리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살이에 질질 끌려 다니며 죽지 못해 살거나, 아니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원하는 삶을 개척하며 힘차게 살거나 마지막 숨이 거두어질 때까지 우리는 '살아 있다'

이왕이면 이승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내 뜻대로 멋있게 살다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도 매력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16년만에 하버드대 박사학위 따는 서진규 씨

 


 

하버드대 석사 과정에 입학한 지 16년 만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서진규 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뚝 선 서 씨는 “과거에는 오기와 분노 때문에 힘든 생활을 버텨 왔지만 이제는 ‘꿈’ 때문에 힘든 도전을 계속 한다”고 말했다.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서 ‘가시나’로 천대받았던 그였다. 고교 졸업 후 가발공장 등을 전전하다 23세 때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 들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식모 이민’을 떠났던 그였다. 그가 드디어 하버드대 박사가 된다.

 

6월 8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손에 쥐게 되는 서진규(58) 씨. 1999년 자전 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로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그를 최근 보스턴 하버드대 교정에서 만났다.》

 

“정말 꿈만 같아요. 제가 속한 하버드대 문리대에서는 석사 과정 입학 10년 안에 박사학위를 따도록 돼 있어요. 제가 1990년에 석사 과정에 입학했으니깐 2000년부터는 매년 대학본부에서 ‘올해까지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 왔어요. 그때마다 학과에서 제 사정을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서 씨는 “계산을 해보니 제가 학생증을 갖고 있던 기간이 통틀어 31년이다”며 “어렸을 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한이 맺혔는데 그 때문인지 공부를 실컷 하는 게 제 운명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의 이력은 평범하지 않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가정부로 일하기 위한 미국행, 뉴욕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미군 입대, 14년간 5개 대학을 옮겨 다닌 끝에 학사학위 취득, 마흔둘의 나이에 소령 예편 후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버드대 국제외교사 및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받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에서 미군정에 미친 일본의 영향’.

 

“교수님들은 나이가 든 학생이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요. 몇 차례나 논문이 퇴짜 맞을 때는 내가 과연 박사학위를 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들었어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C형 간염이 악화돼 어려움을 겪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갔는데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나왔어요. 공부하느라 무리하면서 더 악화됐나 봐요. 이러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는 1년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치료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와 병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치료 시기를 미뤘어요. 이제 박사학위를 땄으니깐 한국에 가서 1년 정도 쉬면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에요.”

 

50대의 나이에 딸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한 하버드대 생활은 어땠을까(서 씨의 딸인 성아 씨도 하버드대 출신이다. 성아 씨는 학생군사교육단에 지원해 현재 미 육군 대위로 하와이에서 근무 중이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무서울 만큼 똑똑해요. 저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상대가 안돼요.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도 많이 느꼈어요. 그러나 저는 경험이 많잖아요. 그래서 강의실에서 토론할 때 주로 경험을 무기로 활용했는데, 항상 아슬아슬했지요. 그래도 함께 맥주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그는 하버드대에서는 ‘독종’으로 통한다.

 

논문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이 500권을 넘는다. 뒤늦게 시작한 일본어 실력도 이제 일본인을 대상으로 큰 불편 없이 강연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그에게 그동안의 수많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분노와 오기였어요. ‘왜 나는 무시 받아야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돼’라는 오기 때문에 살아왔지요. 그러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한 뒤에는 그 같은 오기와 분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꿈’ 때문에 살아가요. 제가 이 나이에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요즘에는 제 책을 읽고 희망을 갖게 돼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됐다는 독자들의 편지도 큰 힘이 됐어요.”

 

그는 앞으로 책을 추가로 쓴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힘든 시절을 살아온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문 소설도 어느 정도 초고를 잡아 놓은 상태다. 



-------------


링크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서진규의 희망                                  



서진규 박사님의 카페 http://cafe.daum.net/ilovecon

Posted by WN1
,

로마 5 현제

생각/내용 2010. 9. 18. 10:26


로마는 원로원이 66세의 네르바를 제위(帝位)에 추대하면서부터 원로원과 황제의 현명한 타협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영국의 역사가 E.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절찬한 5현제의 시대가 열렸다. 사회복지 정책의 네르바(재위 96∼98), 최초의 속주(屬州) 출신(에스파냐) 황제로서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자선사업을 추진한 트라야누스(재위 98∼117), 반평생을 속주순행(屬州巡幸)에 바친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경건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동분서주하며 외적과 맞선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는 각각 전(前) 황제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 ! 승인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

  이 시대의 특징은 제국의 영토가 확대되고 비교적 평화가 계속된 데에 있다. 특히 트라야누스는 동방 나바타이왕국을 합병한 데 이어 파르티아왕국의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다키아(현재의 루마니아) ·아라비아(나바타이)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등의 속주를 추가하여 제국의 판도가 가장 넓은 시기를 이루었다. 북쪽은 라인 ·도나우 두 강을 자연적 국경으로 하고, 도나우강 하류에서는 다키아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동쪽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사막, 남쪽은 사하라사막에까지 판도가 미쳤다.

  다음의 하드리아누스 때에는 수세(守勢)로 바뀌어 제국 각지를 순수(巡狩)하면서 국경방위 강화에 힘쓰는 한편, 속주의 통치조직 ·제국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제(軍制) 등을 개선 ·정비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에 들어와 동부 국경에서는 파르티아군의 침입을 받고, 제국 각지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황제는 동분서주하면서, 특히 북쪽 변경 수비에 몰두하였다. 더구나 다뉴브강 중류 유역에서 밀려온 게르만인의 침입을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 그들 일부에게 제국 내의 토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만들고 그들에게 제국 방위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네르바(재위 96∼98),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5제(帝)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제위(帝位)는 세습(世襲)이 아니라 원로원의원(元老院議員)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하였기 때문에, 훌륭한 황제가 속출하여 이 호칭이 생겼다.
이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경제도 번영하고 영토 또한 최대의 판도에 이르렀고, 그 문화는 속주(屬州) 각지에 파급되어 제국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각 황제의 업적


네르바(재위 96∼98).
로마의 5현제 시대를 연 황제이다. 71년과 90년에 집정관(執政官)에 취임하였다. 96년 9월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하여 원로원과 협조하여 선정을 폈고, 반란의 주모자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서도 관대하였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트라야누스 초상


바이티카 이탈리카 출생. 오현제(五賢帝) 중 제2대 황제이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특히 군인으로서 명망이 높아 군대의 신망을 얻었으며, 네르바제(帝)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였다. 원로원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고,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농촌 회복시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 판도의 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를 정복하여 속주로 하였으며, 또 남쪽으로는 사하라사막의 경계까지 진출하여 요소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다시 동방으로는 나바타이왕국을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하였으며,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아시리아까지도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파르티아의 반격, 이집트 ·유대의 반란을 당하여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포기하였다. 동방으로부터 로마로 귀환 도중 병사하였다. 로마제국 최대의 판도를 과시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

 하드리아누스 초상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 로마 출생.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 군사 ·정치의 요직을 거쳐,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는 시리아 지사(知事)로 있었는데, 트라야누스가 임종시에 그를 양자로 삼자, 현지에서 즉위하였다. 선제(先帝)의 대외 적극정책에서 수세(守勢)로 전환하여, 방위를 강화하는 한편, 국력의 충실에 힘썼다.
치세의 반쯤을 속주(屬州)의 순유(巡遊)시찰에 소비하고, 브리타니아에는 장성(長城)을 구축(하드리아누스 성벽), 게르마니아의 방벽(防壁)을 강화하였으며, 파르티아와 화의를 체결, 아르메니아를 보호국 지위로 되돌려놓았다. 또한, 속주 여러 도시의 건설 ·육성, 공공시설의 충실에도 진력하고, 아테네와 로마에 각종 신전을 건조하였다.
이렇듯 속주통치조직, 제국 행정제도, 관료제도, 군사제도의 정비에 힘써, 이후 제국 제반 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로마법의 학문연구도 촉진시키고, 문예 ·회화 ·산술을 애호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안토니누스피우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사후에는 그에 의하여 신격화(神格化)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안토니누스의 두상


정식 이름은 Titus Aurelius Fulvus Boionius Antoninus Pius. 피우스란 경건(敬虔)한 자를 뜻한다. 120년에 콘술(집정관)이 되고 또 이탈리아의 사법행정을 지배하였으며, 뒤에 아시아주 총독을 지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고 그가 죽은 뒤 즉위하였고,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의 칭호를 받았다. 관대하고 인자하며 온건하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정치를 하여,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치세를 누렸다. 관리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속주(屬州)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여 번영을 구가하였다.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고, 원로원과의 협조도 잘되어 중앙집권화의 실적을 올렸다.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하는 등 속주의 번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법학자를 등용하였고, 황후 파우스티나의 죽음을 기념하여 대규모의 자녀부양시설로 여자고아원을 설립하였다. 외부에 대하여는 방어적이어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장성(長城)을 구축하여 변경의 경비를 굳게 하였다. 그러나 변경도 차차 시끄러워졌고, 그가 죽은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초상
한자명 안돈(安敦). 121년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



옥타비아누스의 제정 시작과 5현제 시대


1. 옥타비아누스의 원수정

악티온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실제적으로 로마의 모든 지배권을 갖고, 로마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다른 군인지배자들이 로마를 지배한 방식인 <군사독재관>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를 다스립니다. 그것이 앞서 설명한 <원수정>의 형태입니다.

<원수정>이란, 집정관, 호민관 등이 존재하는 공화정 형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치형태를 만들어가는 과도기의 체제를 말합니다.

실제 옥타비아누스가 <원수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볼까요?

일단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는 속주의 모든 통제권을 장악한 <총독>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호민관이면서, 집정관이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원로원 명부의 1번째에 기록해 두었는데, 이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제 1의 시민>임을 의미합니다. 제 1의 시민이라는 의미로 옥타비아누스를 <프린캡스>라고 부릅니다. 로마가 공화정이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시민>으로 부른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왕과 다를 바 없는 독재권력입니다.

이렇게 총독, 호민관, 집정관이라는 3가지 통치권력을 독점한 공화정은 이미 공화정이 아닙니다. 공화정처럼 보일 뿐이지요. 이러한 독재적인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을 <원수정>이라고 합니다.

2. 로마 제정이 시작되다.

<원수정>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원로원은 무력했습니다. 원로원은 최후 권한인 <국가 비상시 원로원의 총책임권 ; 비상대권>마저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칩니다. 원로원은 군사지휘권, 속주관리권을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 넘기면서, 그에게 존엄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되면서 이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즉,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군사권, 재정권 등 통치실권을 장악한 <원수정>의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리거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바로 평화로운 <제정>단계가 시작된 것이지요.

제 1의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황제 즉위 후 바로 군사, 재정권을 황제 직속으로 장악합니다.

로마와 속주의 로마시민은 정규군으로 편제하고, 속주의 원주민은 보조군으로 편제합니다. 이들은 각각 재산정도에 따라 기병, 보병으로 편제되었습니다. 특히 속주원주민들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그 이유는 제대 후에 시민권을 보장하거나, 노후보장을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과거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의 <사병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고급지휘관은 원로원 계급에서 황제가 직접 임명하되, 임기는 1년으로 딱 제한해버리고, 실제 군권은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의 친속에게 두었습니다. 상설해군을 창설하여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 해외 개척의 기반도 만들죠.

이러한 모든 군권은 로마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원로원은 군권에 있어 아무런 힘이 없죠.

그럼 이렇게 모든 군권에 로마국가가 아닌 황제권에 속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군권 장악과 함께 재정권 장악을 동시에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속주의 재정을 철저하게 감시합니다. 징세청부업자를 확실하게 감독하여, 국가가 속주의 모든 징세제도를 통제하였습니다. 속주의 인구조사, 호적정리, 재산평가 등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이죠. 그 바탕에서 로마의 재정 대부분은 황제의 재정이 된 것입니다. 또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악티온 해전 이후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사적 재산이였습니다. 그 방대한 아프리카 대륙의 재산만 가지고도 황제는 군권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고, 원로원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재정은 황제의 사적 재정이 투입되는 형식이였습니다. 이로서 황제는 모든 군권을 장악하게 되어 200년간의 로마 평화 시대(Pax Romana)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렵 모라의 북방 한계선인 라인강-다뉴브강 경계가 완성됩니다.

3. 아우구스투스 사후의 양자제도와 혼란

로마의 평화 시대는 5현재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의 강성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를 가장 적합한 인물 중에서 선별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양자상속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럼 아우구스투스 사후부터 로마의 평화 시대까지를 간략하게 볼까요?

아우구스투스는 자식복이 없어서 양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제국을 물려주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55세에 황제에 올랐으나, 곧 조카 아들인 가이우스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친위대장에게 살해되고,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의 행정권을 독식하기 위하여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정치에 참여시키는 <해방노예>정치를 합니다. 이 해방노예들은 황제직속의 관리로서 유능한자는 부자가 될 수 있었으며, 일부는 에퀴테스 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자식복이 없었습니다. 당시 황제들이 자식복이 없는 건 특이한 일이지요.

클라우디우스는 3번이나 결혼 경력이 있는 부인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당합니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를 암살한 것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네로>를 황제에 올리기 위해서죠. 네로가 16세에 황제가 되자, 아그리피나의 섭정시대가 시작됩니다. 당시, 로마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네로는 그 화제의 원인을 그리스도교의 소행으로 꾸며 그들을 대학살합니다. 유명한 소설 <퀴어바디스>에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이 화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네로는 자신을 도운 재상 세네카도 반역죄를 조작하여 죽여버립니다. 또,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유혹하여 결혼하려고 하자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아그리피나는 아들이 자신의 뜻대로 안되자, 클라우디우스의 다른 어린 왕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다 <네로>에게 비참하게 죽습니다. 일설에는 네로가 어머니까지 죽이려고 자작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이 두 모자가 독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네로의 이러한 폭정은 로마인의 반란을 초래하여 네로는 자결하고 맙니다.

4. Pax Romana : 로마의 평화 시대가 시작되다.

이러한 로마의 혼란 속에서 원로원 의원 네르바가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네로 이후 궁중의 암투와 처절한 권력싸움에 이골이 난 원로원은 이제 황제라는 자리를 무능한 자식이나 친족에게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 네르바 황제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5황제 시대에는 모두 현명한 자를 양자로 삼아 황제를 잇게하는 정통이 생겼는데, 이것을 <양자상속제>라고 하며, 이 시대를 <5현제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현명한 5황제의 시대가 바로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 시대입니다.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학파의 철인황제로서 <명상록>과 같은 명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부터 게르만족의 침입 및 파르티아의 침입이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 이민족이 로마 영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로마군대에 입대하는 것도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로마는 사회체제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강력한 로마인의 군대는 이 시대를 기점으로 사라져가고, 로마 변경을 수비하기 위해 <야만인>이라 불리는 게르만과 이민족이 로마를 지키기 시작했으니까요.  


Posted by WN1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로마 제국 16대 황제
재위 기간 공동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
단독 황제:169년 - 180년 3월 17일
타고난 이름 136년 이전-카틸리우스 세베루스
136년 이후-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황제 이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후임 황제 콤모두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 16대 황제/161년 3월 7일 - 169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기마상은 고대 세계에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조각 작품 중 하나다. 기독교도들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로마 기마상을 파괴했지만, 이 작품은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으로 오인하고 내버려두었다. 이 조각상은 2세기부터 로마 시내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0년 공해를 피해 실내로 옮겨졌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21년 4월 26일 -180년 3월 17일)이다. ‘철인황제(哲人皇帝)’로 불리며, 5현제 중 한 사람이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기술된 ‘대진국왕(大秦國王) 안돈(安敦)’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끝으로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끝났으며,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였다.

생애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3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번이 집정관을 연임한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질이 특출하였던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후계자로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를 공표하였고, 같은 해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아파비아와 약혼하여 일약 로마 정계 전면에 부상하였다.

그러나 138년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인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맞아들여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는데, 나중에 그는 제위에 올라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마르쿠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중에 마르쿠스의 약혼을 파기시켜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켜 결혼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공동 통치를 한 뒤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게르만족의 침입이나 시리아 속주에 있어서의 파르티아의 침공 등 수많은 전쟁에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지금까지의 5현제의 관습을 타파하고 친아들인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여 5현제 시대는 끝나게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80년 3월에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다뉴브 강의 진중인 시르미움 근처에서 병에 걸려 급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하였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크리스트 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아카데미 5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글래디에이터’ 끝부분에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망나니 아들 콤모두스가 반란에 실패한 막시무스(러셀 크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쇠사슬에 묶인 막시무스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콤모두스에게 말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고 말했지.” 그러자 콤모두스는 “그 친구도 죽을 때 웃었는지 궁금하군”이라며 ‘그 친구’와 막시무스를 비웃는다.

그러자 막시무스는 ‘그 친구’가 바로 콤모두스의 아버지라고 알려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시무스는 미소로써 죽음을 맞는다. 막시무스야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아들’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영화 속 막시무스는 가공의 인물이고 두 사람의 대화도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 짓고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는 취지의 말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180년 3월 17일 사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맞는 태도라는 것이다.

“지나온 날을 헤아리지 말며, 그 짧음을 한탄하지 말라. 너를 여기 데려 온 것은 자연이다. 그러니 가라. 배우가 연출가의 명에 따라 무대를 떠나듯이. 아직 연극의 5막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인생에서는 3막으로 극이 끝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소관이지 네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요컨대 인생의 종말이 언제 오건 평정을 잃지 말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라는 당부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다 같이 행복을 추구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쾌락’에서 행복을 기대한 것과 달리 스토아 학파는 ‘지혜’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귀감으로 삼았다.

노예를 ‘살아 있는 도구’로 간주하던 고대 세계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평생 노예 출신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55~135)를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에게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만민평등사상을 배웠다. 스토아 철학이 로마법, 특히 만민법의 기초가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로마법은 그 후 유럽 각국에 영향을 미쳤고, 우리 법체계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혜’와 ‘만민평등의 휴머니즘’은 우리 시대에도 빛을 발한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A bust of Faustina the Younger, Marcus' wife (Louvre)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The Mausoleum of Hadrian, where the children of Marcus and Faustina were buried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Coin of Vologases IV, king of Parthia, from 152/53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이른 아침,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오늘도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 거만한 사람, 남을 속이거나 중상하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악덕(惡德)은 선악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의 본질은 아름답고 악의 본질은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잘못 범하는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 혈통을 같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성(理性)과 신성(神性)의 일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에서 동류지(同類者)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해를 입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추악한 일에 빠져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동류자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을 기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치 손발이나 눈시울이나 아래윗니처럼 서로 협력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며 모두 이 섭리와 관련이 있다. 만물은 그 섭리에서 흘러나오고 우주 전체의 이익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밖의 모든 것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신의 섭리인 자연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자연의 한 속성(屬性)이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도 변한다. 그런 원리를 이해하고 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하라. 자연의 변화에서 만족을 찾으라. 그리하여 고뇌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며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은 지금까지 이 우주의 작은 부분으로서 존재하여 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을 태어나게 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당신은 변화에 의해 생성(生成)의 원리 속으로 되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천년이나 만년이라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 지금도 죽음은 다가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아직 능력이 있을 때 선한 일을 하라. 

이웃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관심을 쏟고 그 일이 정당하고 신의 뜻에 합당한가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타락한 모습을 돌아봄이 없이 곧장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날아갈 뿐이다. 

사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설사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그들의 기억 역시 영원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뜻이 있겠는가? 고작해야 어떤 편의(便宜)가 제공될 뿐이다. 아무튼 당신이 후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소모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연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현재를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든 아름다운 것은 결국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자체에 본성이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 요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아름다움이란 본질의 일부분이 될 수는 없다. 찬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자연물, 예술 작품, 자연 현상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그런 찬사가 필요하지 않다. 법칙이나 진리, 자비심, 겸손 등이 찬양을 받았다고 해서 더 미화되고 비난을 받았다고 해서 손상되는가? 또 금이나 상아, 자수정, 하프, 단도, 관목 등도 그러하단 말인가? 

만약, 죽은 후에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고 남는다면 대기는 어떻게 태고적부터 이 수만은 영혼들을 수용해 왔을까? 그리고 육체가 썩지 않는다면 대지는 어떻게 아득한 옛날부터 그 속에 매장된 시체들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시체들은 한동안 땅속에 머물러 있다가 이윽고 분해되어 다른 시체에 장소를 비워 주는데, 이처럼 영혼도 얼마 동안 대기 속에 머물러 있다가 변화하고 분해되어 우주의 창조적 원리에 따라 불과 같은 성질이 되었다가 이윽고 새로운 영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아마도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서 매장되는 시체의 숫자만큼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매일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육체에 묻히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동물들은 그들을 잡아먹은 동물들의 피와 공기와 물과 같은 성분으로 변하여 사라진다. 이처럼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이용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과 형상 및 형상적인 것의 원인을 구분짓는 분석법으로써 알 수 있다.

철학자 테모크리토스는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다면 많은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필요한 일만 하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이성이 요구하는 일만을 이성에 따라 행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휼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오는 마음의 평정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의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시간을 즐기게 되고 반면에 근심이나 불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이 일은 꼭 필요한 것인가?' 라고 물어 보라. 또 우리는 불필요한 행동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상까지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류(萬有)로부터 주어진 자기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 올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인자한 성품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런 선인의 생활이 당신에게도 적합한지 한번 시험해 보라.

당신은 저 여러 가지 일들을 본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이제는 사물의 다른쪽 면을 보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도록 단순한 마음을 가져라. 누가 당신에게 피해를 주는가?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밖에 안 되니 상관하지 말라.

 

아우렐리우스/명상록Marcus Aurelius ; Ta eis heautond에서

이해와 감상

'명상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황제의 입장을 떠나 한 사색하는 생활인,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체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로서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스스로 인생을 올바로 살기 위하여 경계한 것, 행한 일을 반성하고 스토아적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충고한 것, 귀감이 될 만한 다른 사람의 글을 발췌한 것 등으로 그 내용이 구성되어있다.

 이 글은 그때그때 체험에서 우러나온 단상(斷想)들을 바쁜 틈틈이, 즉 전시(戰時)의 진중이나 청사를 돌보는 사이에 쓴 것이며,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수사학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 아름다운 문장이라 평가된다.

 편의상 전체를 12권으로 나누고 있지만 일정한 기간에 어떤 주제를 놓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 논리적인 체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 철학의 사상적 기반은 이 책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함으로 내용상으로는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체계화된 사상일수록 그 사상의 내용에 우주론, 인간론, 그리고 정치 사회론 을 모두 담고 있어야 하며, 이 게 가지는 상호 모순됨이 없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명상록'은 단편적인 철학적 수상(隨想)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도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며, 글을 읽어 내려감에 따라 각 구절마다 이에 그의 사상적 깊이를 새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은 그가 평생을 두고 연구하고 고민했던 스토아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갖가지 삶의 국면을 굳건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흔히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진수를 설명한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의 '어록(語錄)과 함께 고대의 양서로 손꼽히고 있다.

 '명상록'은 어떤 초기 편집자에 의해 12권으로 분류되었는데, 첫째 권을 제외하고는 내용이 뒤 섞여 있어서 각 권의 내용을 만족할 만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그 대략의 요점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로 배우게 된 교훈이 겸손하게 언급되어 있다. 제2권은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제3권은 진정한 자유인 신에 대한 복종에 대해, 제4권은 기회의 부재에 대해, 제5권은 운명과 역할에 대해, 제6권은 내면적 삶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해, 제7권은 충동의 억제와 자기 만족의 추구에 대해, 제8권은 마음의 평정에 대해, 제9권은 자발적인 의지와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에 대해, 제10권은 기인의 주변 환경과 그에 관한 성찰에 대해, 제11권은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제12권은 죽음에의 초월에 대해 씌어 있다.

 제1권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터득한 것이 아니고 조상, 부모, 스승, 신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의 겸손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가 처한 위기, 상황, 환경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2권부터는 '명상록'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단편적인 글들이라 내용도 다소 중복되고, 또 축약된 말들이 있어서 어려운 곳도 있으나 앞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을 읽었다면 아마 별 무리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자연, 즉 우주에 대한 견해부터 보기로 하자. 자연의 법칙인 운명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입장이듯이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 만물은 줄곧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일도 자연의 원리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며,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고 사물과 관련이 있음을 명심하라. 당신도 이 우주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그 본성을 계속 간직하는 것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명상록> 제2권 2장)    

  그리고 그는 인간이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살다 가는 덧 없는 존재라 하여, 각 권에서 명성이나 부(富) 등을 하찮은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죽은 후에 명성을 남기려고 연연해하는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떠한 명성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다가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만다…당신이 이미 죽은 후에 그들의 찬양은 무의미한 것이다.(<명상록> 제4권 19장)

  그는 또 죽음이란 것을 다른 사물로의 분해, 변화로 보았으며,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해악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명상록 의 전반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자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으며 평정을 누릴 수 있는 능력있는 존재라 하였다.

  지금 당신이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판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명상록> 제8권 47장)

 참고 자료

 아우렐리우스와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에서는 자연(Dbysis)이라는 말이 잘 쓰인다. 보통 자연이라고 하면 산과 강과 대지와 짐승과 초목 등을 포함시켜서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이전의 헤라클레이토스(BC 전 535∼475)의 계통을 잇는 스토아 학파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고 나서 거리로 돌아가는 근원적인 것, 또는 능산적 자연 (能産的 自然)을 의미한다. 또한 좁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자연이라든가 포도의 자연이라고 하는 경우처럼 사물의  

본성(本性)을 의미하기도 한다. 광의의 자연은 종교적으로 말하는 신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우주, 로고스, 운명과 동일한 개념이다.

  스토아 학파는-그리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서도-자연에 따는다는 마을 자주 하는데 이것은 신, 또는 우주의 질서에 따르고 또는 그것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협의로는 각각의 본성에 따르고 그것을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이성(理性)을 따르고 발휘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이성, 곧 광의의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따르는 것은 우주의 이성에 따르고 자연의 본성에 따르는것이다. 자연이 대우주라면 인간은 그 일부분인 소우주이다. 이러한 스토아 사상이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주의」의 사상적 모태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 육체라는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고 점에서는 동물과 공통되고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신과 공통된다. 스토아에는 영혼은 혈액에서 증발된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우주의 로고스의 한 조각이 인간에게 깃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이 깃들어 있는 이상 인간은 다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별, 계급, 피부색깔, 국적을 넘어선 동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스토아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지만 그 작용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론적으로 이론이성(理論理性), 도덕적으로 실천이성으로 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가끔 이성을 헤게모니콘(지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종교적 윤리적 색채가 농후한 후기 스토아세서 본심 또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욕망을 통제하고 지도하는 능력으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외계(外界)는 모두 결정되어 있어서 불변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숙명적인 필연이다. 따라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필연을 필연으로 인정하고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외계는 우리의 의지 밖에 있어서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생각뿐이다. 그러나 일단 철저하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외계가 변한 것과 동일한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음의 전환은 행복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원소에의 해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나 결국은 원래의 것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조금도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곧 '무섭다고 하는 사념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공상을 제거한다면 죽음은 자연의 작용이다' '해체를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러한 전환을 이루면 죽음은 고통스럽거나 무서운 갓이 아니라 평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은 영혼의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원소로 해체된다고 한다.

 한편 스토아에서는 자살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자연의 필연적 과정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으로서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면 죽는 것도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완수하고 육체적으로 남의 폐를 끼칠 만큼 노쇠했거나 병에 걸리면 이 세상에서 떠나가라는 신의 신호로 알고 자살해야 한다. 이 경우 제멋대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 자살이야말로 우주의 질서, 신에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아타테이아 또는 아타락시아라는 말을 스토아 철학에서는 쓰고 있는데, 전자는 부동심(不動心), 무정념(無情念)이라는 뜻이고 후자는 평정(平靜)이라는 뜻이다. 외계의 사물은 본래 우주의 질서에 따라 변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외물을 뒤쫓고 있는 한 대해의 조각배처럼 번롱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에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고 어떠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음에 평화는 교란되지 않는다. 이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인간의 행복인 것이다.

 

참고 자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img15.gif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121∼180)는 121년 로마에서 집정관 아니우스베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토니우스 황제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치가로서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세 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면서 정치에 관한 식견을 넓혀 양부 안토니우스 황제를 도왔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하여 나중에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명저인 명상록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다.

 161년 안토니우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는 일찍이 플라톤이 이상국가의 정치 형태로 제시했던 철인왕(哲人王)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도덕의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 지냈다.

 그는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자신의 부하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오히려 자비로서 용서해줄 기회를 잃은 것을 슬퍼할 정도로 적군까지도 사랑하려는 박애주의적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간 재위 기간은 로마제국의 전성 시대로 일컬여지는 이른바 '5현제(賢帝) 시대'에 속하는데 96년부터 180년 사이인 이 무렵에는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영토의 확장이 어느 시대보다 월등하였으며 아우렐리우스 역시 이전 황제들의 선정(善政)을 유지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 혹은 명상의 황제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색의 기록이 바로 '명상록' 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로마제국의 제16대 황제(재위 161~180)로 한자명으로는  안돈(安敦). 로마 출생. 5현제(賢帝)의 마지막 황제로, 후기 스토아파(派)의 철학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된 후 140년 로마의 콘술(집정관)이 되었고, 145년 안토니누스의 딸(사촌누이)과 결혼, 161년 안토니누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로 즉위하였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변방에는 외적의 침입이 잦았으며, 특히 도나우강(江) 쪽에서는 마르코만니족 및 쿠아디족이 자주 침입하여 그 방비에 힘썼다. 그 동안 페스트가 유행하여 제국은 피폐하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발칸 북방의 시리아 및 이집트 등의 진영(陣營)에서 병을 얻어 도나우 강변의 진중에서 죽었다.

 유명한 《명상록(冥想錄)》은 이 진중에서 쓴 것으로 스토아적 철인의 정관(靜觀)과 황제의 격무라는 모순에 고민하는 인간의 애조(哀調)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는 반 세기 전의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층 내면적으로 침잠해 들어오는 철학을 이루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며, 신적(神的)인 세계 영혼으로 관통되고 살려지게 되고 지배받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도 세계 영혼의 한 유출물에 불과하여 죽으면 자연히 세계 영혼에 귀일하게 된다.

 물질적 ·육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은 이 신적인 이성에 의하여 운명적 ·자연필연적으로, 그러면서도 신적 ·합법칙적으로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있다. 따라서 개물(個物)·개인(個人)은 그 이름도 기억도 이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자연필연의 이법(理法)을 확인하여 이를 신의 섭리라 믿고,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없이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 자유롭고 명랑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그의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와 황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쇠퇴하였다. 로마시에는 ‘마르코만니전쟁’을 부조(浮彫)한 기념주(記念柱)와 그의 기마상(騎馬像)이 있다.

스토아학파

키프로스의 제논이 스토아 포이킬레에 창설한 철학의 한 유파.

 BC 3세기부터 로마 제정(帝政) 말에 이르는 후기 고대(古代)를 대표한다. 키프로스섬 태생의 개조(開祖) 제논과 그 제자로서 적빈(赤貧)과 노동으로 이름 높던 소아시아의 아소스인(人) 클레안테스, 그 제자로서 스토아파의 학설을 체계적으로 완성한 킬리키아의 항구 도시 솔로이(솔리)의 크리시포스, 스토아 학설을 로마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만든 로도스섬의 파나이티오스, 종교적 경향이 강한 오론테스강 하반(河畔)의 아파메아인 포세이도니오스, 로마황제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제논이 아테네의 광장에 있던 공회당 ‘채색주랑(彩色柱廊)’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스토아파’(柱廊의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스토아파 철학은 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고전기(古典期) 그리스를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좋은 가문 출신 사람들의 철학이 아니라, 변경(邊境) 사람이나 이국인의 철학이었으며, 그리스 문물이 좁은 도시국가의 틀을 넘어서 널리 지중해(地中海) 연안의 여러 지방에 미친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철학의 여러 파와 스토아파 사이의 대립은 격렬하였다.

 고전기까지의 철학의 여러 학설을 수용하여 일반화 ·통속화한 점에서 절충주의라는 비난을 받지만, 그 기반에는 고전 철학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로마시대 사람들의 저작을 제외하고는 스토아파의 저작은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연구상 어려움이 있다.

 애지(愛知:철학)는 논리 부문과 윤리 부문, 자연 부문으로 나뉘나, 이들은 각각 독립된 분파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애지를 구성하는 3요소가 된다.

 지혜는 ‘신의 일과 사람의 일에 관한 지식’이라고 정의되지만, 이것은 사물에 관한 관조적(觀照的) 지식이 아니라, 인간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처리하기 위한 실천적 지식이다. 지혜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에 스토아파의 특징이 있으며, 이 원리에 바탕을 두어 스토아철학은 고대철학원리의 주체적인 반성철학이 되었다.

 애지(愛知)는 이러한 지혜를 습득하기 위한 ‘삶의 기술(ars vivendi)’의 연습이며, 이러한 재주를 갖는 사람이 현자(賢者)인 것이다. 그리고 현자의 지혜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충동’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병으로서의 정념(情念)이 있다. 이 정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데에 ‘활달한 삶의 흐름’이 있다. 스토아파의 현자의 이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스토익이라고 불리는 비정한 금욕주의적 심정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의 유덕한 삶이란 이성을 갖춘 유한한 개개의 자연물(인간)이 자연에 의하여 부여된 그대로의 자기의 ‘운명’을 알고, 운명대로 살아감으로써 본원(本源)인 자연과 일치하는 ‘동의(同意)’의 삶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그 자체가 이성적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귀환(自己歸還)에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현자는 모든 자연물의 근원인 자연 그 자체로서의 신과 일치한 자이며 신과 같은 자, 바로 신 그것인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은 자연존재에서의 개별성(個別性)과 전체성(全體性)의 두 계기의 강조와 양자의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스토아 철학은 고대철학 원리의 집성인 동시에 다음 시대의 철학원리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다. 언어연구 ·논리학 ·인식론에서도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는 스토아 철학은 전통철학에 없었던 새로운 요소를 많이 초래하였다.

---------------





조선일보에서의 기사 - 아우렐리우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거대한 석상이 터키 남부의 고대 로마 유적지 사갈라소스에서 발굴됐다고 한다.

   

기나긴 로마역사를 통해 수많은 황제들이 있었고 또한 모두 이름들이 복잡한 관계로 웬만하면 다들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들이지만 아우렐리우스 만은 웬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영화 '글라디에이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jpg

 

극 중 주인공 막시무스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려다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는 자애로운 황제였지만 졸지에 망나니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기억된다.

 

실제로는 아우렐리우스는 전쟁을 지휘하다 도나우강 근처에서 병으로 객사했다고 한다. 아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지 아비를 죽이고 황제자리를 차지할 만큼 패륜아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당시의 로마사회가 못난 아들에게 로마황제 자리가 계승되는 것을 용납치 않았었다.

 

5 명의 뛰어난 황제가 연속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대물림으로는 불가능하다. 전임황제가 뛰어난 후계자를 지정하여 그가 피붙이던 아니던 간에 황위를 계승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으로 안다. 물론 아우렐리우스 사후에는 그것도 깨지고 완전 난장판으로 접어들지만 말이다. (만약 진짜로 황제자리에 눈이 멀어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들 코모두스가 아니라 당시 가장 잘나가는 총독이었다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였을 것이다.)

 

영화 글라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 도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다만 검의 달인에 카리스마 넘치는 장수가 아니라 스토아학파 철학자였을 뿐,

 

글라디에이터 버젼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시오노의 주장에 따르면 설령 아우렐리우스가 영화에 나오는 대로 장수 막시무스를 총애했다고 하더라도 막시무스의 '국가관' 때문에 황위자리 승계를 권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면 황제가 되라는 아우렐리우스의 권유에 막시무스는 자신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다며 제의를 거부한다.

 

당시 로마인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질로 가족보다 국가를 우선에 놓는 공복의식을 가장 중요히 여겼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우렐리우스 같이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황제였다면 막시무스의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자질부족으로 판단 '대권?후보리스트'에서 제외시켰을 거라는 설명이다.

                             

                             marcus_aurelius.jpg

                                               Marcus Aurelius

 

우리에게 아우렐리우스를 친근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인물은 바로 이회창 씨다. 92년 대선에 김대중 후보에 맞서 출마했던 이씨는 TV토론에서 감명깊게 읽은 책이 뭐냐는 질문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이라고 답한다. 김대중 씨가 김구선생의 백범일지 라고 답해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것에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당시 이회창 씨 보좌진들은 이씨의 그 답변 때문에 몹시 당황해 했다고 한다. 유권자 중 도대체 몇명이나 생전에 아우렐리우스 라는 이름이나 들어 보았을 것이며 설령 그의 명상록을 읽어보았다고 해도 이회창 씨의 지적인 면을 높이사기 보다는 그저 잘난척 하는 것으로 간주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명상록 답변 때문에 대략 백만표는 날아갔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이씨는 선거에 졌다.

 

이회창 씨가 안읽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 하지는 않았겠지만 요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태를 볼 때 명상록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지하에 있는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사람이 저런 행동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정말 어이없어 할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고대 로마인들과 그들의 역사는 은근히 소외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대 로마제국의 유산은 현재 서구문명의 뿌리이자 주춧돌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석상 발굴소식을 계기로 로마사를 한번 관심있게 읽어본다면 유럽과 미국문명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을 뿐더러 덤으로 그들의 공세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평화로운 영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 


노예에서 황제까지: 스토아 철학의 힘 
뒷골목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힘에 있지 않다. 힘세고 싸움 잘하는 것으로 친다면 뒷골목 건달이 영웅호걸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건달은 건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늙고 병들거나 더 주먹 센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비난받고 짓밟히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영웅은 힘을 잃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권위와 명예를 잃지 않는다. 
건달과 영웅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명분과 도덕심에 있다. 건달은 결국 자신과 똘마니들만을 위해 살지만 영웅은 진정 "정의를 위해" 산다. 따라서 영웅이 힘없이 무너진다해도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하며 따르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帝國)의 역사만도 1,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로마가 단순히 힘만 센 국가였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치 힘만 센 뒷골목 건달처럼 말이다. 로마는 사람으로 친다면 '영웅호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국가였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을 '영웅호걸'로 특징 지웠던 명분과 도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토아(Stoa) 철학이다. 역사상 스토아 철학만큼 한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념은 드물다.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중에는 에픽테투스(Epictetus)같은 노예출신도 있고 세네카(Seneca)같은 정치인도 있으며 이 달에 살펴볼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같은 황제도 있었다. 노예부터 황제까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스토아 철학은 로마를 진정한 강자(强者)로 만든 숨은 힘이었던 것이다. 

"황금시대"에 태어난 꼬마 철학자 
이제 이야기를 이 달의 주인공 아우렐리우스에게로 돌려보자. 아우렐리우스는 121년,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로마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 황제 아래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구석구석 살피는 꼼꼼한 어머니 밑에서는 가정이 번창할 수밖에 없는 법,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이곳저곳을 세심히 챙기느라 일평생을 '출장' 다녔던 황제로 유명하다. 황제가 출장을 마치고 오랜만에 로마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로마 귀환 기념 주화"라는 희한한 화폐를 찍어냈을 정도로 말이다. 수도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겠지만 치밀한 하드리아누스의 눈에 황제가 될 '재목'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그 재목은 바로 아우렐리우스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3 번이나 지냈을 정도의 명문이었다. 다만, 할아버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는 외가에서 자라고 있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확실히 아우렐리우스는 황제가 사랑할 만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밤늦게까지 공부에 몰두했고 타고난 건강체질은 아니었지만 달리기, 레슬링, 매사냥 등으로 신체를 단련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린이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을 어른이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지나친 욕심과 쾌락추구는 결국 고통으로 연결된다고 보고,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강조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스토아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미 십대 무렵부터 깨달은 바 있어 따뜻한 침대를 버리고 항상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잤고, 최고의 오락거리였던 검투사 경기와 마차경기도 멀리했다고 한다. 
이런 '꼬마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금욕적인' 태도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여 '베르시무스(Versimus)'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는데, 이 말을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정말 진국인 아이" 정도가 될 듯 싶다. 

황제가 될 때까지 
황제는 아우렐리우스를 교육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 '꼬마 철학자'가 최고 수준의 교사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그 결과 아우렐리우스를 가르쳤던 스승만도 열 일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 지도층이 되기 위한 "엘리트 코스"가 있는 법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엘리트 코스를 충실하게 밟아 나간다. 여덟 살 때 이미 제사장이 되었고 이후 재무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등의 출세가도를 순조롭게 밟아 나간다. 실로 황제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출세 속도였다. 
확실히 황제는 그를 후계자 감으로 생각했던 같다. 이 점은 젊어서 죽은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 남긴 딸과 그를 약혼시킨 점에 있어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꼬마 철학자'가 하드리아누스의 다음 황제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현명한 황제는 후계자로 52세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지명하고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인다. 단, 안토니우스가 아우렐리우스를 다시 양자로 받아드리는 조건으로 말이다. 이로써 지금으로 보아서는 조금은 해괴한 '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이차이는 열 살밖에 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새롭게 얻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할아버지가 맺어준 약혼을 깨버리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족 구성은 '해외 토픽감'이었을지 몰라도, 이 가족을 구성한 할아버지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정말 훌륭하고 뛰어난 황제였다. 그가 다스리던 시대의 역사적 사실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마가 너무도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도무지 '기사화' 될 만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람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라고 불렀다. 이는 '경건한 안토니누스'라는 뜻이다. 그는 '경건'이 별명이 될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또한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스토아의 가르침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품은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번은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을 가르쳤던 가정 교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고 있었다. 이를 본 안토니누스는 다음과 같이 아들을 위로한다. 

"...현명한 이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단다. 그럴 때에는 네가 사나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참을 수밖에 없지..."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세상일은 모두 우주적 이성(Logos)에 따라 결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어난 어떤 일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을 깨는 어리석은 일일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logos)을 발휘하여 우주적 이성(Logos)의 깊은 뜻을 깨달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의 평화, 즉 부동심(不動心:Apatheia)을 찾아야 한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가르침대로 평생을 살았다. 후에 자식을 잃은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자기자신을 타일렀다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내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참으로 강하고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위기와 시련에 처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로마인의 강인함은 바로 이러한 스토아의 이념에 있었다. 

흔들리는 팍스 로마나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숨을 거둔다. 이로써 이제 마흔 살의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물려받은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 자체였다. 전쟁도 없었고 경제도 번창했다. 그러나 겉모습만 그랬을 뿐 로마는 이미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빈부의 차이가 심하게 벌어졌고, 세금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중소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수도 로마로 몰려드는 바람에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었다. 제국은 가진 자들의 횡포를 막지도 못하고 못 가진 자들의 생계를 안정시키지도 못한 채 속주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이용한 '빵과 서커스'로 사회 불만을 겨우 잠재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위기의 로마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이는 무너지려는 둑을 주먹으로 막는 것만큼이나 위태로운 것이었다. 
162년, 로마의 '전통적인 라이벌' 파르티아가 침략해 온다. 그러나 철학자 황제는 전쟁에도 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쉽사리 파르티아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확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승리와 정복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 지방에서 유행하던 페스트가 제국으로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었다. 곳곳에서 역병이 돌았고 수많은 시민이 죽어갔다. 또 큰 홍수가 거듭하여 일어나기도 했다. 나아가 166년에는 게르만족이 제국의 방위선인 다뉴브 강을 돌파했고, 168년에는 사르마텐 족이, 169년에는 무어인이 국경을 넘보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명상록}, 그리고....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그 가운데서도 철학자였다. 그의 명작 {명상록}은 반란과 침략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시절에 군대 막사나 전쟁터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에는 원래 "내 자신을 훈계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보내는 훈계였던 셈이다. 인간의 잔인성이 판을 치는 황량한 전쟁터에서도 아우렐리우스는 끊임없이 이성을 일깨우고 마음의 고요를 찾는 철학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명상록} 곳곳에는 그의 인간적인 번민과 철학적 사색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세계는 우주에 비하면 미세한 점에 불과하고, 인간의 삶도 찰나일 뿐이다....인생은 투쟁이고 세계는 낯선 이를 위한 임시 수용소일 뿐이며, 죽음 뒤에 얻은 명성은 허무하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철학뿐이다. 철학은 우리 자신 속에 거룩한 정신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은 악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일 뿐이라고 말해 준다....우주적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일 리 없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로마의 재정상태는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아우렐리우스는 부족한 재원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거나 침략을 통해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으로 한다면 '자선 바자회'라 할만한 것을 실시한다. 황제가 가지고 있던 보석부터 일상 생활에 쓰이는 가구까지 모두 거리에 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국가 지도자가 제일 먼저 앞장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겠지만 로마시민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는 크게 효과가 있었던 듯싶다. 이제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선사한다. 
또한 아우렐리우스는 매우 관대한 사람이었다. 175년, 반란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총독 카시우스(A.Cassius)를 부하장교들이 죽였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베어진 목을 직접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카시우스와 다른 이들 사이에 오간 반란에 관한 수많은 편지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 
사실 그의 관대함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이성(logos)'를 가지고 있다. 이 이성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우주적 이성(Logos)'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피부가 하얗건 거멓건, 라틴어를 쓰건 게르만어를 쓰건 간에 모두 존중해 주어야 할 소중한 존재이다. 내가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도 존엄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 내세우던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모두 '우주적 로고스'에 따른다면 다른 민족의 이성적 인간들이 만든 법도 로마법과 마찬가지로 존엄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본래 있는 것이 민족과 문화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자연법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의 합리적인 문화나 풍습도 우주적 로고스에 따르는 것으로 당연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정복이란 곧 약탈과 파괴를 의미했던 고대 문화 속에서도 로마만큼은 오히려 정복당한 민족을 나와 같은 이성을 가진 '동포'로 보고 보호하고 존중했다. 로마의 대 제국은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포옹과 관용 위에서 가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제국의 이념에 너무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그리고 제국의 몰락 
이제 아우렐리우스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항상 전쟁과 재앙에 시달리던 이 고단한 황제에게 180년, 다시금 도나우 강변이 시끄러워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게르만의 침략이 단순히 약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북쪽에서 접근하는 또 다른 민족의 공격에 밀려 제국으로까지 넘어오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이들을 로마 국경 안에 정착시키고 질병으로 인구가 줄어든 제국의 새로운 노동력으로 삼으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나아가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방어선을 넘어서까지 새롭게 영토를 넓힘으로써 아예 제국이 다시는 게르만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지 않도록 하는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우주적 이성은 이러한 황제의 뜻을 받아드려 주지 않았다. 게르만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스트로 쓰러지고 만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우렐리우스는 스토아 철학자다운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명상록}에 나오는 한 구절은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남은 사람들을 고약하게 대하지 말라...그대의 가족과도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부드럽게 이별하라. 자연(우주적 이성)이 그들을 그대와 결합시켰듯이 이제 자연이 다시 그대를 그들과 떼어놓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후, 황제 자리는 철학자 아버지와는 다르게 야비하고 잔인한 성격의 아들 코모도스(Comodos)에게 넘어가게 된다.(큰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 "글레디에이터(Gradiator)"는 이런 시대 배경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원래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죽고 코모두스 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현명한 아우렐리우스였다고 해도 이러한 '최악의 경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듯 싶다. 아들은 파탄에 이른 로마를 아버지만큼 기술적으로 통치하고 조절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이후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자연을 따르라." 
스토아철학은 원래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n)에 의해 출발한 철학이다. 원래 스토아철학은 혼란한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한 은자(隱者)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명상과 깨달음을 강조한 불교가 역사상 많은 국가에 있어서 통치이념이 되고 반성과 봉사를 강조한 기독교가 서양 중세를 지배한 이념이 되듯이 스토아철학도 개인의 깨달음을 넘어선 대제국의 통치이념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철학은 사회도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음을 역사가 증명해준 셈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삶은 우리에게 철학적 반성을 통해 성숙한 개인은 또한 훌륭한 사회 지도자도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항상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라. 이것이 수학 한 문제 더 풀고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더 여러분들을 훌륭한 사회 지도자로 만들어주는 길일 것이다. 아우렐리우스가 그랬듯이.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집문당 교양선 12, 김병호 옮김, p 205
 이번 책 소개는 지금 거의 상영이 끝나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 Gladiator"로 시작하려 한다. 30 년 전 거의 동일한 내용의 영화가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세 번째 소개한 책인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감동이나 가치, 그리고 웅장한 기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나 그림, 음악, 책에서 받는 감동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남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여기서는 다른 기록과 비교하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창조력[?]을 발휘하였는지를 검토해 볼 뿐이다. 또한 영화의 스토리와 역사적인 사실을 혼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시작되는 기원후 180 년 기번이 아래와 같이 말한 시대이다.
 "만일 세계사에서 인류가 가장 행복하고 또 번영했던 시기는 어느 시기였는가를 질문받는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아마 도미티아누수 황제의 사망(96 년)부터 코모두스 황제 즉위(180 년)까지의 시기를 들 것이다(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 현제(賢帝) 시대이다). 이때는 광대한 로마제국의 전 영토가 덕과 지혜로써 지도된 절대권력 밑에 통치되고 있었다."[로마제국의 쇠망, 1 권, p 123]
 처음으로, 영화와 역사가의 견해가 다른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 중의 하나인 아우렐리우스 황제(121 - 180; 참고로 삼국지의 유비는 161 - 223 이다)와 코모두스의 관계이다. 기번은 코모두스를 망친 것은 아루렐리우스의 편애, 과중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폭군이 되는 이유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제 겨우 14 - 15 살밖에 되지 않은 그(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을 황제 권력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시켰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아들이 원로원과 군의 환호속에서 즉위하였다. 그가 행복한 젊은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 때 그 주위에는 단 한 사람의 배제해야 할 경쟁자도 없었거니와 벌줄 적대자도 없었다."[P 131]
 이 아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또한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코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코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코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그를 완전한 후임자로 임명한 후에 아우렐리우스가 죽은 것이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황인 마르쿠스의 사후까지 코모두스는 대병단의 지휘와 콰디족 및 마르코반족을 상대로 어려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P 132]
 또한 기번은 영화의 주인공의 하나인 황제의 딸 루실라(Lucilla)에 대해서 영화와 전혀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183 년 어느날 밤, 코모두스가 자기의 숙소인 내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어둠에 잠긴 콜로세움의 좁은 주랑(柱廊)을 막 벗어나고 있을 때, 잠복하고 있던 한 자객이 검을 빼어 들고 습격하였다. ...
 코모두스 황제의 누님이며 루키우스 벨루스의 미망인인 루실라가 제국의 서열 3 위의 지위에 있는 것이 미흡하여 참지 못한데다가 황후인 파우스티나에 대한 질투심까지 결부되어 이처럼 자객을 무장시켜 동생 [코모두스]의 생명을 노리게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무서운 음모에 대하여 현재의 남편이며, 유능한 원로원 의원이자 충성스러운 인물이기도 한 클로리우스 폼페이아누스[이 사람은 영화에 나오지 않으나 여기 언급되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오래 살아 남은 사람이다]에게 이 행동을 상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그녀의 정부들 중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야심가들도 있었는데 이런 자들은 그녀의 바람기뿐만 아니라 보다 광기어린 집념에까지 기꺼이 봉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런 음모자들은 물론 엄벌을 받았다. 그리고 파렴치한 루실라도 처음에는 유형에 처해졌으나 뒤이어 사형을 받았다."[p 133]
 즉 루실라가 먼저 코모두스를 암살하려 하였으며, 영화와 달리 코모두스보다 먼저 죽었다.
 물론 코모두스가 좋은 황제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중 막시무스[Maximus]가 있다. 이 사람과 영화의 막시무스는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
 "이와 같은 폭정에 쓰러진 무고한 희생자 중에서도 가장 애처롭게 여겨지는 것은 퀸틸리아누스가의 형제들인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 두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형제애는 그 이름이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빛을 보게 되어, 후세에까지 향기로운 회상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 막대한 재산을 이어 받았는데도 두 사람에게는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이 형제가 협력해서 쓴 한 논문('농업론'이라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지만, 일생동안 무엇을 해도 두 사람은 완전히 일심동체였다. 이들의 덕행을 존중하고 그들의 화목한 우애심을 기뻐한 두 안토니우스 황제[임주(任註); 아우렐리우스의 전임황제와 아우렐리우스]들은 한날 한시에 두 사람을 모두 집정관으로 임명하였었다. 그후 마르쿠스 황제는 다시 그리스 속주의 민정과 군사권을 이들 두 사람의 공동관리로 위임했는데, 여기서도 이들은 게르만인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동정심이 많았던' 코모두스 황제의 잔인성은 마지막 죽음에 있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일심동체'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p 134]
 막시무스가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둔 것이 이 영화의 몇 안되는 진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코모두스에 의해 사형당했다.
 영화에서 막시무스의 자식과 부인이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것은 노예나 로마 시민이 아닌 경우에 한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의 체제에서 아무리 폭군 코모두스라 하여도 장군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재판 없이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친위대를 시켜 원로원 의원에게 자살을 명한 것은 역사책에 나온다. 로마인이 법 체계를 존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 시민이라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코모두스가 결정적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투기장의 우리에서 100 마리의 사자가 단번에 내몰려 나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손에서 던져진 100 자루의 투창은 그 사자 무리가 투기장 안을 날뛰며 돌아 다니는 사이에 단 한 자루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를 맞혀서 한 마리 남김없이 사체로 만들고 말았다. 거대한 덩치의 코끼리 몸뚱이도, 코뿔소의 가죽도 그가 던지는 창끝을 막아낼 수 없었다. ...
 그러나 하층계급의 일반민중들조차 이것을 너무 지나친 행위라하여 분노와 치욕감을 느낀 것은, 자기 황제가 하필이면 일개 검투사로 분장하고 등장해서 국법이나 습관도 천한 직업으로 낙인찍어 놓은 그런 직업인의 흉내를 마치 자랑스러운 듯이 연출했을 때였다.
 ... 황제는 투기사 역을 담당하여 실로 735 회나 싸웠다."[p 142]
 실제로 코모두스는 상당히 훌륭한 검투사였다. 영화의 막시무스가 앞에서 설명한 그 막시무스라면 코모두스에게 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0 년 전의 영화에서는 위의 사실을 위해 마지막의 황제의 싸움을 투창으로 하는 것으로 꾸몄다. 물론 그 영화에서도 코모두스가 죽지만 비겁한 승부는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악인을 더 비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날이 갈수록 비겁한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일까?
 코모두스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더니 드디어는 자기 측근에게 죄를 씌워 죽이기 시작하였다. 코모두스의 죽음에 대해서 기번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윽고 그의 가족들조차 공포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운명도 끝장이 났다. 동료나 선임자의 죽음을 보고 깜짝 놀란 애첩(愛妾) 마르키아, 시종무관장 에클렉투스, 근위대 장관 레투스, 이 세 사람이 포악한 군주의 바보같은 변덕으로 혹은 갑작스런 국민의 분노로 언제 [자기들의] 머리위에 떨어질 지 모를 죽음의 운명을 저지하기로 결의하였다."[p 144]
 시종무관장과 근위대장과 더욱이 애첩까지 황제의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것은 실제로 황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반(離叛)한 것이다.
 "때는 마침 황제가 동물사냥으로 기진맥진하였을 때였다. 포도주 한 잔 권하는 기회를 마르키아가 이용하였다. [독약을 먹였다] 황제는 침실로 물러났으나 점차 독과 취기가 온몸에 퍼져서 신음하고 있을 때 갑자기 역기(力技)를 직업으로 하는 건장한 젊은이 한 사람이 침실로 들어와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황제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시내는 물론 궁중에서도 황제가 죽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사체가 비밀리에 황궁으로부터 밖으로 운반되어 나왔다. 바로 이것이 현명한 군주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온갖 권력을 휘둘렀고, 재위 13 년간에 몇 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활을 폭력으로 억눌러 온 대상이던 이 폭군을 쓰러뜨리는 일은 이처럼 매우 간단했던 것이다.(디오-카시우스, '로마사' 제 73 권 22 절, 헤로디아누스, '로마사' 제 1 권, '황제열전' 제 7 권 제 17 절)[p 144]
 적어도 코모두스는 경기장에서 죽지 않았다.
 여하튼 코모두스는 자기 아버지에 비해 논의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영화 제작자는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명상록으로 돌아가자. 나는 여러분이 이 사람을 황제가 아니라 홀로 선 한 사람의, 고독한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이 고백록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기원 후 백년 경에는 두 사람의 대(大) 스토아 철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노예로 에픽테토스이고, 또 한 사람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은 로마인의 위엄을 간직하고 견실한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힘이 되었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에 관한 백과사전의 내용이 매우 많아 본문 다음에서 소개하였고, 여기서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간단한 내용만을 소개한다.
스토아 철학   Stoicism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아 철학의 특성과 영역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 형성된 후 2세기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이후 사상의 발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에 이르는 동안 스토아 도덕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 등이 인간과 자연, 국가와 사회, 법과 제재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적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토아 철학의 개인중시 사상 및 갈등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설은 실존주의와 비정통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책 내용
<1>
1. 나는 조부 베루스에게서 선량한 행실과 격정의 절제를 배웠다.
2. 아버지의 명성과 회상에서 겸손과 남성적인 기질을 배웠다.
3. 어머니에게서는 경건과 인덕(人德), 그리고 나쁜 행위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도 버려야 할 것을 배웠으며, 부자들의 습성에서 멀리 떠나 소박하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이 것 이상의 배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의 배움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4. 증조부로부터는 공립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가정에서 훌륭한 스승을 모셔 배우되, 이런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 배웠으나 서양에서는 집에 모셔서 배웠다. 결국 현재 문화가 깊은 나라들에서 말썽인 과외공부가 그 시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5. 나의 스승에게서는 경기장의 경주에서 청(靑), 백(白)의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되며, 또 검투사(劍鬪士)의 격투에서는 둥근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되고 모난 방패를 든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노역(勞役)을 견디고, 욕망을 줄이며, 자기 손으로 일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며 남의 비방에 귀를 귀울여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다.
[임성삼의 주(註); 스승에게서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며, 참된 인간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6. '디오그네투스'에게서는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번거로운 일에 열중하면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없다.]
주문(呪文)인 악귀를 쫓는 마술사나 요술가의 말을 믿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것을 믿게 되면 자신의 이성을 믿지 않게 된다. 자기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싸움을 시키기 위한 [독]수리 등속을 기르거나 이러한 일에 열중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지금으로 말하면 사냥, 낚시 등의 취미생활을 말한다.]
언론의 자유를 용인하고 철학을 숭상할 것, 특히 우선 '바키우스'를 비롯하여 점차로 [여러 좋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것] 등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결과 어릴 적부터 대화하는 것을 배우고, 널판 침대와 가죽 옷, 그 밖의 그리스식 단련에 속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7. 루스티쿠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중요한 사람들이었겠으나 우리에게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 더 중요하다.]
나 자신의 성격을 바로잡고 또한 수양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것은 궤변의 시합이나 공리공론(空理空論)의 붓을 들거나, 번거로운 권고의 변설을 휘두르거나, 또는 많은 수양을 쌓은 것처럼 자기를 과시하거나, 허식적인 자선(慈善)행위를 하는 이러한 그릇된 길에 빠지지 말고, 또한 수사학이나 시와 노래나 화려한 문자를 배격하는 것 등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친구에게서 좋은 것을 배웠다.]
 또한 외출복의 정장을 한 채로 방안을 걸어다니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하지 말며,
[임성삼의 주(註); 예절은 집에서도 지켜야 한다. 집에서는 집의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한 예절이다.]
편지를 쓰되 "시누에사"라는 곳에서 어머니에게 써 보낸 것처럼 소박하게 쓸 것,
나를 모욕하고 또 무례한 짓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화해의 뜻을 표하면 곧 마음을 풀고 융화할 수 있는 기풍을 기를 것,
[임성삼의 주(註); 단지 무례한 자가 화해의 뜻을 표하기 전에 그들에게 내가 아첨으로 화해의 뜻을 전해서는 안된다.]
무릇 책은 정독하여 표면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말 것,
[임성삼의 주(註); 이를 위해 나는 현재 거의 모든 책의 중요한 구절을 적어 여러분에게 보내고, 이런 주석을 붙이는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경솔하게 맞장구를 치지 말 것 등등을 가르쳐 주었다.  .....
8. 아폴로니우스에게서는
의지의 자유와
끝까지 목적을 관철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한동안이라도 이성(理性)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말며,
심한 고난을 당하거나 ...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더라도 언제나 태연자약(泰然自若)한 태도를 취할 것,
[임성삼의 주(註); 참 어려운 것을 배우셨다.]
그리고 용감무쌍한 동시에 매우 유순하며
자제(子弟)를 가르칠 때는 성급해서는 안 된다는 산 실례(實例)를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철학상의 여러 가지 큰 원리를 해설하는 것과 같은 자기의 경험 또는 숙련 등은 조그만 재능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였다.
 뿐더러 친구의 신세를 지면서도 결코 비굴해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관과하지 않는 태도를 역시 그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9. 세크스투스[플루타르크의 손자, 혹은 조카]에게서는
인자스러운 성격과 자부(慈父)의 미덕에 의해 가꾸어진 가정의 본보기와,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허식이 없는 엄숙한 태도며,
친구들의 이득을 자상하게 고려하고,
무지한 사람들이나 분별없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 등을 배웠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나, 유쾌한 얼굴로 대하여, 자기를 융화시키는 재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와의 교제는 어떠한 아부보다도 즐거웠으며,
그 때문에 그는 교제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실생활에 필요한 처세의 강령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것을 총명하고 조직적인 형식으로 질서를 세우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그는 분노는 물론이고 어떠한 감정도 절대로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모든 감정에 벗어나 있으면서도, 애정이 매우 깊었었다.
그는 떠들썩하게 과시하지 않고서도 칭찬의 의사를 표시할 수가 있었으며, 허식없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10. 문법학자 알렉산더에게서는
남의 흠을 잡기를 삼가며,
천한 말이나 그릇된 문법이나,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경우에 사용해야 할 올바른 표현을 교묘히 가르쳐 주되 직접 그 말로써가 아니라 다만 이에 대한 답변이나, 찬동의 표명이나 또는 질문과 같은 형식을 빌어서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11. 프론토우에게서는,
폭군이나 군주에게 어떤 질투와 위선이 존재하는가를 간파할 것과,
[임성삼의 주(註); 폭군과 군주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을 인정하자.
어떤 기관이든지 기관장의 성격에는 동일한 면이 있다.]
우리 사이에서 귀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자들에게는 대체로 자부(慈父)의 성격이 결핍되어 었음을 간파할 것을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프론토우는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12. 플라톤학파의 알렉산더에게는
자기에게 여가가 없음을 남들에게 때때로, 그리고 부질없이 말하거나, 또는 그것을 편지로 써 보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급한 일에 몰린 것을 구실로 삼고, 친한 사람들과의 교제에 필요한 의무를 게을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13. 카테울스에게서는
어떤 친구가 자기의 결함을 발견한 경우에, 비록 그것이 무리한 억지라고 하더라도, 이를 모른 체 방임하지 말고, 그 사람을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힘써야 함을 배웠다.
그리고 스승들에 대하여는 도미티우스와 아케노도투스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언제나 옳은 말을 하고,
또 자기의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할 것을 배웠다.
14. 사랑하는 형제[역주(譯註); 저자는 형제가 없었으므로 사촌 정도였을 것이다] 세베루스에게서는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정의를 사랑할 것을 배우고, 또한 그에게서 트라세야, 헬베디우스, 카토, 디온, 브루터스 등에 대하여 배웠다.
[임성삼의 주(註); 자기의 친족을 사랑하는 것은 '중용'에서도 나오는 중요한 덕목이다.
나중에 나오는 여러사람은 과거 공화정의 인물들이다. 과거의 사람에 대해 배우는 것도 큰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인을 위해 동일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정치적인 주장, 즉 평등의 권리와 언론상의 평등한 자유를 인정하고 통치하는 사상과 ,피치자(被治者)의 거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왕자다운 통치의 관념을 배우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그 시대의 이 황제가 지금 민주사회의 대부분의 정치가보다 더 진보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학에 대한 자기의 입장은 종시 일관하여 변함이 없어야 하며, 선한 일을 행하고,
기꺼이 남에게 베풀며, 선량한 희망을 품고, 친구들에게서 스스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을 것을 그에게서 배우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진의를 감추지 않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은, 그의 의향을 억측할 필요가 없이 분면하게 알게 됨을, 나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15. 막시무스에게서는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으나, 내가 앞에서 소개한 그 막시무스일 가능성이 있다.]
자제를 배우고,
또한 다른 일에 미혹되지 않으며 병들었거나 그밖에 모든 경우에 쾌활하고 상냥하며 무뚝뚝한 어느 덕성이나 적당히 조절하여, 불평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한결같이 악의에서 우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아무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놀라는 얼굴을 하지 않았으며, 서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무슨 일에나 방치하지 않았으며, 당황하지도 않았다.
 실망하거나 자기의 곤경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사회생활에서 자기의 잘못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안된다. 그저 묵묵히 인정하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다.]
언제나 인자스러운 행동을 하였고, 남을 용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모든 허위에서 떠나 있었다.
 그는 연단(鍊鍛)을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정의에서 떠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아무도 그에게서 멸시를 당했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그에 비해 뛰어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유머를 곧잘 하는 재능도 갖고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적어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주인공 막시무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16. 나의 아버지[전왕(前王); 양부,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서는 온유한 기질과 사물에 대하여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굳은 결의를 한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임성삼의 주(註); 바로 전(前) 로마 황제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16 번째로 나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이 분도 또한 로마의 5 현제(賢帝)의 한 분이었다. 아래의 사항을 보면 최고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남들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일에 허영을 구하지 않고, 노고와 정진을 사랑하고, 대중의 이익을 위해 건의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각자의 공과 과에 따라 상과 벌을 주어 일을 불공평하게 처리하지 않는 그 견실(堅實)성, 민활한 행동과 사면(赦免)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지려(智慮) - 그러한 것들을 나는 아버지에게서 보고 배웠다. ...
당신을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름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당신의 신하에 대해서도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출타할 때에 필요한 시종 등 모든 의무를 면제시켰다. ...
 아버지는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하여 용의주도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 첫눈에 보이는 외관만으로 만족하여 탐구를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성격상 친구를 오래 사귀며, 곧 싫증을 내거나 또 애정을 마구 표시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만족하고 쾌활한 얼굴을 하였다.
 또한 모든 사물을 훨씬 이전부터 내다보고, 사소한 일도 허실없이 미리 준비해 두고, 세속의 갈채나 아부를 재빨리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라의 통치에 필요한 일에 대하여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국고금의 훌륭한 관리인이 되고자 애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당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참을성 있게 견디곤 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왕으로 오랜 기간을 견딘 사람이 전 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에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5 황제 시대의 다섯 번째 황제가 네 번째 황제에 대하여. 그러나 그 훌륭한 황제들의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행동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아버지께서는 제신(諸神)에 대하여 결코 미신적인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번 책 소개를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강조한 사항이다. 시오노나나미의 말대로 지도자는 어느 시대든 미신에서 자유롭다.]
 또한 선심을 써서 남의 환심을 사거나, 백성들에게 아부하여 민심을 우롱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일에 근엄하고 견실하며, 결코 비열한 생각을 하거나 행위를 하는 일이 없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능력있는 사람들이 이렇게하여 "로마의 평화"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신기한 기호(嗜好)에 빠지지도 않았다.
[임성삼의 주(註); 언제나 그 시대의 기호에 빠지는 사람이 국가의 수장(首長)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인 다음 황제 코모두스는 그 당시의 기호인 검투(劍鬪)에 빠져 매일 아침 곰이나 사자를 한 마리씩 죽였다. ]
 그리고 어느 모로나 생활을 즐겁게 하고 행운을 윤택하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자랑하지도 않고 천시하는 일도 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
 그를 가리켜 궤변가 또는 교양이 없는 경솔한 사람이나, 현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그를 보고 원만하고 완벽하며, 특히 아부를 떠나 모든 공사(公私)의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또 아버지께서는 진실한 철학자들을 존경하는 한편, 단지 철학자인 체하는 인간에 대하여도 결코 비난하지 않고, 이들에게 쉽사리 속지도 않았다.
 좌담에도 뛰어나, 남에게 불쾌한 태도를 취하는 법이 없고, 좌석의 분위기를 즐겁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에 대하여 상당히 주의하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지도 않고, 육신의 외모에 마음을 쓰지도 않았으며, 또 전혀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조심하는 까닭에 내과의사의 진찰을 받고 약을 쓰거나, 외과의사의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
 그는 일부러 꾸미는 일이 없이, 국가의 제도와 법률을 지켜 나갔다. 또한 변화와 혼란을 좋아하지 않고, 같은 지위에 머물러 동일한 일을 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두통이 일어난 후에도 곧 기분을 새롭게 하고, 원기 왕성하여 평소의 사무를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적었다.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단지 공적인 일에 관한 것뿐이었다.
[임성삼의 주(註);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다음 황제의 진술이니 믿을 수 있다.]
 그는 민중의 구경거리, 관공서의 건축, 국민에 대한 자신의 시여(施輿)물 등에 대하여는 신중하고 경제적이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굳이 개인의 행위로 손에 넣을 수 있는 허명(虛名)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정에 없는 시간에 목욕을 하는 법이 없었다. 호화로운 거실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음식물과 옷감이나 색깔 또는 비복(婢僕)의 미모에 관심이 없었다. ...
 그에게서는 잔인성, 앙심, 난폭 또는 이른바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점은 전혀 없었다. 뿐더러 무슨 일이나 조사에 착수할 때에는 시간 여유가 많은 것처럼, 침착하고 순서를 따라 재빨리 계속적으로 진상을 캐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 즉, "많이 소유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고, 소유하면 남용하게 마련인 재화를, 그는 소유하지 않고서도 견디고 소유하고도 적절히 즐길 수 있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적용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7. 나는 선량한 조부, 선량한 양친, 선량한 자매, 선량한 교사, 선량한 교우(交友) 및 선량한 친족과 친구 등등, 거의 모든 선량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데 대하여, 신들(諸神)에게 감사하고 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지 않다.]
  또 하나 내가 신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은, 이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나 내가 해를 입히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은 점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황제의 능력이 없는 아들에게 권력을 주고 곧 죽음으로써 로마에 막대한 피해를 미쳤다. 그의 능력 범위 밖이었을까?]
 
 나는 본래 기회만 있었더라면, 이러한 과오를 범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시험에 빠지는 우연의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
 내가 통치자로서 혹은 아버지로서 모신 사람은, 내게서 모든 자만심을 제거해 주고, 적어도 남자로서 호위병이라든가, 호화로운 정장이라든가, 혹은 횃불, 석상(石像) 같은 허식을 필요로 하지 않고 궁정에서 생활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와 같이 생활할 수 있어야만, 자기를 한 사인(私人)이나 다름이 없는 풍습에 젖게 하면서도, 천한 사상을 갖지 않고, 또 행동을 조심하면서 통치자로서의 알맞은 태도로 공익(公益)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가 가장 융성한 이 때의 황제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증언해주고 있다.]
 또 다시 신들에 감사할 것은 나에게 준 한 사람의 형제[역주(譯註); 의형제 루키루스 베루스]가 그의 도의적인 성격상 언제나 나를 깨우쳐 주고, 그의 존경과 우애가 나를 기쁘게 하여 주며,
또한 내 자식들은 어리석지 않고, 육신적으로 불구자가 아니며,
[임성삼의 주(註); 하지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아들 코모두스는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수사학과 시, 그밖에 다른 학문과 예술에 능통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만일 내가 이런 일에 정진할 수 있었던들, 아마도 나는 거기에 철저히 얽매이게 되었을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능통하지 못한 것도 복이다.]
 나는 아마도 이상적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터이지만, 앞으로는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것을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육신은 오랫동안 그러한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내가 매우 유순하고, 애정이 깊고, 그리고 단순한 아내를 갖고 있는 것도,
[임성삼의 주(註); 역사적으로 이 황제의 아내이며 전 황제의 딸에 대하여는 여러 말이 있다. 위의 표현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뒤에 백과사전에서는 위와 같은 개념이지만...]
내 자식들을 위해 많은 훌륭한 선생들을 초빙한 것도,
[임성삼의 주(註);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1 권의 130 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황제의] 도움을 요청 받고 모여든 학덕 높고 유식한 교육고문들은 소년 '코모두스'의 편협한 마음을 열어주어 점차 심화되어가는 악덕을 교정하여 곧 인수받을 제위에 합당한 인물이 되게 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원래 교육의 힘이란, 처음부터 그런 교육이 거의 불필요할 정도로 본바탕 자체가 훌륭한 인간이라면 또 몰라도, 그렇지가 못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옳은가? 잘 생각해보자. 역사에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인간성이 덜 된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우리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자주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건실한 체하는 철학자의, 전혀 재미도 없는 강의 따위는 놀기 좋아하는 간신배의 한마다 속삭임에 의해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성적인 황제와 유능한 학자들이 모든 힘을 다해 교육을 시켜도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이 코모두스만은 아니다.]
 또 내가 철학에 취미를 갖게 되었을 때 궤변학파(詭辯學派)의 손에 떨어지지 않고 역사가와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추리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혹은 천체 현상의 관측에 몰두하지 않게 된 것도, 신들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들과 운명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이야기; 명상록의 1 장을 거의 모두 옮겼다.
 이 장의 첫 부분은 이 황제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배운 내용이다. 사람은 책에서 보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분들에게 어떤 좋은 점을 배웠는가를 명상(冥想)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상당히 많은 부분을 16 절의 전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성격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 이상적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를 잘 알 수 있다.
 17 절 이후는 자기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이다. 살면서 감사할 줄 모르면 좋은 사람일 수 없다.]
<2>
1. 아침에는 우선 이렇게 생각할 일이다. 즉 자기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 은혜를 모르는 자, 교만한 자, 사기꾼, 질투하는 자, 비사교적인 자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임성삼의 주(註); 이런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 로마 황제였다.]
 이 모든 일은 사물의 선악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한 것이 아름답고, 악한 것이 추한 데 대하여, 그 본성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의 성질도 나와 같은 인간으로, 비단 같은 혈통이나 종족에 속할뿐더러 동일한 신의 예지를 동등하게 나눠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손상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추악한 것을 나에게 떠맡길 수 없고, 나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화를 내거나 증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2. 내가 어떠한 존재이건 간에, 단지 한 고깃덩이와 호흡과 지배적인 부분[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의 책을 버리라. 이제 그대 자신을 현혹시키지 말라. 그것은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한 사람의 늙은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노예로 삼지 말라. 꼭두각시처럼 비사회적인 행동의 끄나풀에 조정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처지에 불만을 품어도 안 되고, 미래에서 물러나서도 안된다.
3. ... 우주는 많은 원소(元素)의 여러 가지 변화에 의해 유지되는 동시에 많은 원소가 복합된 여러 가지 사물의 변화에 의하여 유지된다. 그대는 이 원리로 만족하고, 이 원리를 언제나 그대의 견해로 삼으라.
[임성삼의 주(註); 현재의 화학과 별로 다른 개념이 아니다. 단지 화학의 원리를 정신에 끌어들여 철학으로 만들었다.]
 책에 대한 갈망을 버리라. 그것은 고민하는 일이 없이, 쾌활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충심으로 신들에게 감사하면서 죽기 위해서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 또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5. 어떤 순간에도 한 로마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원만하고 순박한 위엄을 지니는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정의감을 갖고, 당면한 일을 처리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잡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충실히 사고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정말 좋은 말이다.]
 만일 온갖 부주의와 이성의 명령에 대한 감정적인 반항과 모든 위선, 이기심,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불만을 버리고, 오직 이것이 마지막 일인 것처럼 실생활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간다면, 그대는 스스로 안정을 얻게 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실 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좋은 방법이다.]
 그대가 아는 바와 같이, 조용한 생활, 신들의 생활과 같은 삶을 보내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실로 근소한 것이다. 신들은 이러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밖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기독교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6. ... 각자의 생명은 충족되어 있다. 그런데 그대의 영혼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행복을 남들의 영혼에 맡기고 있는 동안에 그대의 생명은 고갈된다.
8. 인간은 남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에 빠진다.
10. ... 참으로 철학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도록 그[테오프라스토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쾌락을 위하여 저지르는 비행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비행보다 더욱 비난을 받아야 한다. ...
12. 만물은 얼마나 신속히 소멸하는 것인가. 육신은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그 기억은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은 무엇인가? 특히 쾌락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또한 고통으로 인간을 두렵게 하며, 물거품 같은 명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들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얼마나 비열하며, 얼마나 사멸하기 쉽고, 또 얼마나 말라 죽기 쉬운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예리한 지능만이 깨닫기 마련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명상록에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논리는 대단히 간단하다. 덧없다는 것이다. 허무의 관념으로 실 생활의 건전함을 내세우자는 논리가 '스토아' 철학의 원리인 것 같다.]
14. 인간은 설령 삼천 년을 살든, 또는 일만 년의 몇 배를 살든, 그래도 역시 모든 인간이 잃는 생활은, 현재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활일 터이며, 또한 그 생활은 현재 그가 시시각각으로 잃고 있는 생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가장 긴 생애나 가장 짧은 생애가 동일하게 된다. ...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이 이 책의 끝까지 반복하여 나온다. 앞으로는 생략할 것이다.]
17.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점(點)으로, 물질은 유전(流轉) 속에 있고, 지각(知覺)은 우둔하고, 육체의 됨됨은 썩을 운명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선풍(旋風) 같고, 행운은 예측할 수 없으며, 명성은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요컨대 육체에 속하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고, 심령에 속하는 것은 꿈결 같은 운무(雲霧)이며, 생활은 하나의 투쟁이고, 또한 나그네의 행로이며, 그리고 사후의 명예는 망각이다.
[임성삼의 주(註); 황제부터 온 로마 사람이 이러한 허무 속에 있을 때, 기독교가 그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이 시대에 로마에서는 맹렬하게 기독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즉 스토아 철학은 로마 사람들의 마음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메마르고 허무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메마른 마음에 기독교의 복음이 비와 같이 스며 들어갔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 철학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 능욕하거나 가해(加害)하지 말고, 쾌락을 초월하여, 목적이 없는 행동을 하지 말며, 또한 허위나 위선에 찬 행위를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동 여하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모든 일과 모든 운명을 자기 자신이 태어난 원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감수하며, 끝으로 죽음에 대하여는 모든 생물이 그 구성 분자로 환원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임성삼의 주(註); 그러나 철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유쾌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는 기독교의 영생(永生)을 택하게 된다. 그 길이 현세에서는 아주 힘든 순교의 길이라도...]
                           이상은 칼눈툼[다뉴브강 남쪽에 있는 판노니아의 한 고을, 야만족과의 싸움으로 이곳에서 3 년 동안 머물렀다고 함]에서 적었다.
<3>
1. 우리는 자기의 생명이 나날이 소모되고 감퇴되어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즉 가령 어떤 사람이 장수를 한다고 해도 과연 그 분별력이 존속되어 사물을 충분히 분간할 수 있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능력을 보유할 수 있을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
 
 우리는 서둘러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가 날로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물의 개념에 대한 능력과 이해력이 먼저 쇠퇴되기 때문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우주에 생성된 사물에 동정과 깊은 통찰력을 갖는다면, 어느 의미에서나 쾌감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맹수의 벌린 턱에서도 화가나 조각가의 작품에 못지않는 쾌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서도 일종의 원숙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또 젊은 남녀의 매력 있는 사랑스러움도 맑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3. 히포크라테스(BC 460 - 377 경)는 많은 병을 치료하고 나서, 자기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칼데이의 박사들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예언하였으나, 이윽고 운명은 그들도 앗아갔다. 알렉산더, 폼페우스, 카이우스, 시저 등은 그렇게 번번이 대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전장에서는 몇 십만의 기병대나 보병대를 닥치는 대로 살육하였지만, 이윽고 그들 자신도 죽음을 당하였다.
4. ...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하고 물으면, 공명정대하게 곧 "이러저러한 일"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일만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임성삼의 주(註); 동양에서는 "혼자 있을 때의 마음을 조심하라."는 말이 여러 책에 있다. 또한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에 이와 거의 완전히 같은 말이 있다.]
5. 무슨 일이든지 마지못해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하되, 마음에 혹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인위적인 허식으로 자기 사상을 장식하여서도 안 되며, 말이 많은 사람이 되거나 많은 일에 매여 너무 분주하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神聖)으로 하여금 자기의 수호신이 되게 하고, 남아답게 생각이 깊으며, 정치에 관여하고, 로마인으로서, 지배자로서, 자기의 직분을 지켜나갈 때에는 언제나 생명을 내던질 각오를 한 사람처럼 진퇴(進退)를 결정하고, 아무런 서약도, 어떤 사람의 증언도 필요없이 묵묵히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인들은 이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또한 쾌활해야 한다. 외부에 원조를 구하지 말며 타인이 주는 평화를 바라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남아는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서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그 당시 세계의 주인으로 자부하고 있던 로마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6. 인간 생활에 있어서 그대가 만일 정의, 진리, 절제, 견인(堅忍)보다 더 선한 것을 발견한다면 ... 그대는 거기에 전심전력을 위탁하라. 그리고 그대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향락하도록 하라.
 나는 말하고자 한다. 그대는 다만 단순히, 그리고 자유롭게 최선의 것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것을 고수하라.
8. 세련되고 정화된 인간의 정신 속에는 썩은 것, 부정한 것, 꿰매어 붙인 상처 같은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 언제 죽음의 손에 잡히더라도, 마치 연기를 끝마치기 전에 무대를 떠나는 배우에 대한 비난처럼 미완성의 생활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는 조금도 비굴한 데가 없고, 또한 허식도 없으며, 큰 집착도 느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사물을 등지는 일도 없고, 탓할 만한 일도 없으며, 피난처를 찾는 일도 없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가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황제를 힘없고 병든 노인으로 묘사한 영화는 진실이 아니다. 그는 죽을 때 59 세밖에 안되었었다.]
10. ... 그리고 가장 길다는 사후의 명성도 역시 짧은 것으로 대대손손(代代孫孫) 그것을 전하는 것은 다만 가엾은 인간들이며, 그들 자신이 매우 신속히 죽어가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자들이므로 먼 옛날에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알 리가 없다.
[임성삼의 주(註); 죽은 후의 명성에 대하여까지 정확히 분석하였다.
나의 집 사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중 이 줄 친 부분만은 틀렸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들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마음을 알고 그와 함께 느끼고 있으니까.]
16. ... 자기의 가슴에 심어 놓은 신성(神聖)을 모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인상에 의해 그것을 훼방하지 않으며,
신에 순종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일은 일체 입밖에 내지 않으며,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 나오는 비례물언(非禮勿言; 예절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정의에 위배되는 것은 일체 행하지 않는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역시 논어의 비례물동(非禮勿動)]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분수에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느 누구에 대하여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자기가 한 평생 도달하려는 목적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4>
2. 어떤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술상의 완전한 원리에 따라야 한다.
......
 명성에 대한 욕망이 아마도 그대를 괴롭힐 것이다. 보라, 모든 사물이 얼마나 신속히 망각되는가를.
10. 모든 사물은 정당한 이유에서 생긴다는 것을 명심하라. 만일 깊이 관찰하면, 그대는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무엇을 하든지 선인(善人)이 될 것을, 다시 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고 행동해야 한다.
[임성삼의 주(註); '엄밀한 의미에서 선인'이 될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 비슷하게도 될 수 없다.
율곡 선생님의 "격몽요결"의 첫 귀절은 다음과 같다.
初學 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              須(모름지기 수)    期(기약할 기)
처음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뜻을 정하기를
반드시 완전한 사람(성인 聖人)이 되기로 스스로를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성인을 선인과 거의 같이 해석한다.]
12. 우리는 언제나 다음 두 가지 규칙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하나는 지배와 입법을 맡은 자는 인류의 이득을 위해서만 명령을 내릴 것.
 또 하나는 만일 근처의 어느 사람이 그대의 미망을 제거해 주고 그대의 그릇된 견해를 씻어 준다면 아낌없이 의견을 변경할 것. 그러나 이 의견의 변경은 정의나 혹은 공공의 이익과 같은 어떤 확실한 이유에서 행해야 하며, 그것이 기분 좋게 보인다든가, 또는 명예를 가져온다는 이유에서 변경해서는 안된다.
17. 스스로 만 년 동안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그대 위에 걸려 있다. 그대가 사는 기간은 그대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는 선량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이 책의 기본 법칙이다. 이 논리에 대해 잘 생각해보자.]
18. 나의 이웃 사람이 말하고, 또 행하며, 혹은 생각하는 것을 알려고 애쓰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올바르고 순결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은 괴로움을 모면하게 될 것이다.
 아가톤(그리스의 비극작가. BC 447 - 400)이 말한 바와 같이, 남의 타락된 도덕에 눈을 돌리는 일 없이, 다만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 어느 의미에서나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 자체에 있어서 아름답다. ...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진리, 인애(仁愛), 겸손이 칭찬을 받아서 아름다운 것이 되었으며, 비난을 받으면 더러운 것이 된다는 말인가? 비취, 황금, 상아, 자수정 등이 칭찬을 받지 않으면 밉게 보이는가?
[임성삼의 주(註); 칭찬을 바라는 데에 대한 경고]
24.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은 언제나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하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불필요한 행위 뿐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한다. 이렇게 하면 부질없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28. 간악한 성격, 비겁한 성격, 완고한 성격, 짐승 같은 놈, 어린애 같은 사람, 동물적인 인간, 우둔한 자, 거짓이 많고 비천하고 기만적이고 포악한 자
[임성삼의 주(註); 이러한 온화한 분도 이런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받고 나면 이런 글을 남기게 된다.]
31. 그대가 배운 기술은,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를 존중하고 만족하라. 그리고 그대 자신을 폭군이나 노예로 삼지 말고, 온 몸과 정신으로 가진 것 일체를 신에게 맡긴 사람과 같이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33. 전에 귀에 익었던 말도 지금은 낡아 버렸다. 마찬가지로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들의 이름도, 오늘날에 와서는 낡아 버렸다.
34. 자기 자신을 기꺼이 운명의 여신 크로토우에게 맡겨, 그녀가 그대의 실을 마음대로 짜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운명의 여신은 각 개인의 운명을 계속 실로 짜서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그리스 신화에 나와있다.]
35. 기억하는 것도, 기억되는 것도, 다 함께 단 하루뿐인 것이다.
48. 다음과 같은 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 두라.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병자에게 자주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이윽고 자기 자신도 죽어갔는가를.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남의 죽음을 떠들썩하게 예언하면서, 자기도 덧없이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과 불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해명하고 스스로 죽어갔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한 연후에 자기도 죽어갔으며, 또 얼마나 많은 폭군들이 자기는 불멸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몸서리치는 횡포를 감행하여 생사의 권한을 한 손에 휘두른 연후에 죽어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도시가 멸망했던가. ... 인생이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무상한가. ... 자연에 순응하여 지나가고 ...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대의 나그네 길을 끝맺도록 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 시기에 사람들이 착한 행동을 하게 하려면, 이런 빈약한 논리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로마에서 광범위하게 기독교가 퍼져나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한계를 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49. 언제나 사나운 물결에 부딪치면서도 굳굳하게 서 있으며, 주위의 사나운 물결을 다스리는 곶(岬; 산허리 갑)처럼 있으라.
<5>
1. 아침에 일어나기 싫거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즉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또 그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파송된 일을 지금 하려고 한다면, 내가 어찌 그것에 불만을 느낄 수 있겠는가?
2. 성가시고 귀찮은 모든 잡념을 깨끗이 버리고, 마음을 안정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7. 아테네 사람들의 기도 - 비를, 비를, 오 제우스여, 아테네 사람들의 경작지와 들에 비를 내리소서
 우리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기도를 한다면, 이와 같이 단순하고 기품이 높은 양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9. 정당한 원리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하였는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대는 혐오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며, 또한 불평을 하지 말라. 그 경우에는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자기가 한 일이 거의가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면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그대에게로 돌아오는 것(철학)을 사랑하라. ...
11. 나는 지금 나의 영혼을 무엇에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자문(自問)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다음과 같이 자문하여야 한다.
 즉 지금 나의 지배성능이라고 말하는 영혼은 무엇을 파악하고 있는가?
[임성삼의 주(註); 앞으로 지배성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어린이의 영혼인가? 허약한 여자의 영혼인가? 가축의 영혼인가? 폭군의 영혼인가? 혹은 들짐승의 영혼인가?
17.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은 광기(狂氣)이다. 그리고 악한 자가 악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하다.
20. 자기는 인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의 결점을 참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30. 신들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스승에 대하여, 그리고 그대의 유년과 소년 시절을 돌보아 준 사람들 - 친구, 친척, 노비들에게 대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그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소행에 대하여 다음의 말이 합당한가를 생각해 보라.
 언행 중에서 그 어느것도 아직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
<6>
1. 우주의 실체는 순종이며, 또한 유화(宥和; 용서할 유, 화할 화)이다.
3. 정밀하게 고찰하라. 어떤 사물에 대하여도 그 특수성과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런 지성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6.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해자와) 같은 무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18. 사람들은 실로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시대에 살면서,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좀처럼 칭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아직 보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결코 볼 수도 없는 후세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24.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마부(馬夫)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되었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이 신기하다. 이 황제가 죽은 1800 년 후인 현대에도 상당한 수의 전 세계 관리들의 의식 수준은 이 황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9. 육체가 아직 쇠퇴하지 않는 동안에 심령이 먼저 쇠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육체가 왕성한 20 대에 심령부터 쇠퇴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30. 지나치게 황제의 세도를 부리거나, 그런 버릇이 붙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는 자기 자신을 단순하게, 선량하게, 진실하게 꾸밈새가 없이, 정의의 벗, 신들의 숭배자가 되어 친절하고 애정이 깊고 모든 일에 정당하게 행동하도록 힘쓰라.
 그대는 철학이 그대의 인격을 완성시키려고 원한 그 상태에 언제나 있으라. 신들을 공경하고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인생은 짧다.
 이 지상의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매는 경건한 마음씨와 사회적인 행위뿐이다. 모든 일을 안토니우스[먼저 황제]의 제자로서 행하라. 이성에 적합한 행위로 일관한 그의 절제, 모든 사물에 대한 그의 경건, 그의 침착, 그의 우아함, 허명(虛名)의 멸시, 사물을 이해하려는 노력... 등등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는 부당한 비난을 하는 사람들을 공박하지 않고, 어떻게 참았던가.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얼마나 태연자약하였던가. .....
47. 매우 가치있는 가르침의 하나는 그대의 생활을 진리와 정의 속에서 보내고, 거짓말쟁이나 의롭지 못한 자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이다.
48. 그대 자신을 즐겁게 하려면,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미덕을 생각해 볼 일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눈부신 활동이나, 두 번째 사람의 겸손이나, 세 번째 사람의 관용이나, 또는 네 번째 사람의 그 밖의 미덕을 생각할 일이다. 미덕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풍부하게 나타날 때만큼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실례를 우리 눈으로 언제나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49. 그대는 자기의 체중이 150 kg에 달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명에 있어서도 정한 연령 이상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51.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견해를 자기의 행복처럼 생각한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감각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분별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53. 다른 사람이 말하는 일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말하는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도록 그대 자신을 길들게 하라.
[임성삼의 주(註); 황제의 가장 큰 자격이다.]
54. 벌집 전체에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은, 개개의 벌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임성삼의 주(註); 로마제국의 황제로서의 좋은 말이다.]
<7>
1. 사악(邪惡)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그대가 자주 보아 온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할 가치 조차 없다.]
3. 쓸데없는 일거리, 무대 위의 광언, 양의 무리, 소와 말의 무리, 창술(槍術)의 연습, 강아지에게 던진 뼈다귀, 연못의 물고기에 던진 빵, 무거운 짐을 나르는 개미의 노동, 혼이 난 생쥐의 줄도망, 실에 조종되는 인형 ---
이러한 것들 속에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그대의 의무일 것이다.
6.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성에 의해 칭찬을 받은 연후에 망각 속에 묻혀 버렸던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명성을 찬양해 마지 않던 많은 사람들도 벌써 옛날에 죽은 것이다.
8. 미래의 일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러한 일에 직면할 필요가 생긴다면, 현재 그대가 사용하고 있는 이성이 그대를 도와줄 터이므로.
12. 그대는 똑바로 서라, 그렇지 않으면 똑바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결코 똑바로 섰다고 할 수 없다.]
15. 누가 무엇을 하든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선량해야 한다. 마치 금이나 에머럴드, 또는 자색 옷은 언제나 "누가 무엇을 하거나, 또 무슨 말을 하거나, 나는 에머럴드이며, 내 본래의 빛을 지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24.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다. 그것을 자주 되풀이하면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다시 명랑성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절멸되어 버린다.
27. 그대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 만큼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최선의 것을 선택할 일이다.
29. 어떤 사람이 저지른 비행(非行)은, 그것이 행해진 곳에 그대로 내버려 두라.
[임성삼의 주(註); 여기 저기에 가서 말하지 말라.]
31. 인류를 사랑하라. 신에게 순종하라.
[임성삼의 주(註); 이런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지 모른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34. 모래의 더미가 그 전 모래의 더미 위에 덮이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전에 행한 일은 나중에 행한 일에 덮쳐진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 보라.
36. 안티스테네스에서 --- 선을 행하고 비난을 받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임성삼의 주(註); 현대 사회의 장점은 많이 있다. 그러나 "고귀(高貴)"에 대한 개념을 잃은 것은 슬픈 일이다.]
37. 마음이 명하는 대로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천한 일이다.
그리고 뜻대로 자기를 통제하고 이끌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39. 불멸의 신들과 우리 자신에게 기쁨을 줄지어다.
49. 사십 년동안 인생을 관조(觀照)한 것은 만 년 동안 인생을 관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현재 이상의 것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57. 오직 그대에게 일어나는 일, 그리고 그대의 운명의 실에 짜여지고 있는 일만을 사랑하라. 그 이상 적합한 일이 있는가?
58. 오직 그대 자신을 섬기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선인이 되고자 다짐하라. 언제나 이를 염두에 두라.
62. 그대는 어떤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원하는가. 그들은 어떤 이해력을 갖고 있는가를 언제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대는 실수로 비행을 저지른 사람을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들의 의견이나 정욕의 원천을 주시하면, 그들의 칭찬을 원치 않을 것이다.
64. 고통을 당할 적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이것은 불명예가 아니다. 또 나의 지배적인 영지(靈智)를 나쁘게 하지도 않는다고.
[임성삼의 주(註); 이 황제도 고통을 받은 적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65.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갖고 있던 심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사람들에 대하여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취했으며,
신들에 대하여 경건하였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헛되니 고민하지 않고,
어떠한 사람의 무지에도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 없었으며,
우주에서 보내온 몫으로서 자기에게 닥친 일은 무엇이건 지체 없이 받아들여, 그것을 잘 견디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가엾은 육체의 여러 가지 정욕에 대하여는 동정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자기 이해력을 어둡게 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
이러한 일이 과연 어떠했던가를 탐구해야 한다.
67. 설령 세계가 그대를 마구 욕하고 꾸짖을지라도, 또한 야수가 그대의 수족을 물어서 갈갈이 찢더라도, 모든 강제에서 벗어나 극히 안정된 마음을 갖는 것은, 그대의 권한에 속한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도 정신을 안정하게 하고, 주위의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며, 또한 모든 대상을 자기의 의사대로 사용하는 것을 아무도 훼방할 수 없다.
72. 그대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이를 인정할 경우에, 여전히 바보와 같이, 어찌하여 이 두 가지 사실 이외에 제 삼의 것, 즉 선행을 하였다는 명성을 얻거나,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가.
<8>
1. 그대가 그 여생을 그대의 본성이 원하는 대로 보내게 되면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그대의 본성에 따라서 행하되 다른 어떠한 것에도 휩쓸려서는 안 된다. 삼단논법(三段論法)에도, 재물 속에도, 명성에도, 향락에도 ...
5. 그대는 자기 업무에 시선을 돌리고, 동시에 선인(善人)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기억하여,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것을 외면하지 말고 이를 행하며, 또 그대에게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말을 하되 선의(善意)와 겸손과 성실로써 해야 한다.
8. 그대는 책을 읽을 여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는 오만을 억제할 여유는 갖고 있다. 그대는 쾌락과 고통을 초월할 여유를 갖고 있으며, 명예욕을 초월하고, 어리석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자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뿐더러, 그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여유도 갖고 있다.
10. 쾌락은 선도 아니고, 유용한 것도 아니다.
22. 그대가 그토록 고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 그대가 오늘보다 내일은 더욱 선량해지려고 하므로.
30. 원로원에서도 누구에게나 아는 체 말고 온당하게 이야기하라. 순박한 말을 하라.
33. 부귀나 영화는 교만에 흐르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36. 미래도 과거도 그대를 괴롭히지 않으며, 다만 현재만이 그대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50. 어떤 오이는 쓰다. 이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
길 한복판에 나무더미가 놓여있다. - 이것은 피하여 지나가면 된다.
이것으로 족하다.
세상에 어찌하여 이런 것이 만들어졌는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첨부하지 말라
.
[임성삼의 주(註); 이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51. 어떤 사람이 맑은 샘물가에 서서 샘물을 저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샘물은 계속해서 맑게 치솟을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속에 흙덩이나 오물을 던져 넣더라도, 샘물은 곧 그것을 순화시켜 금방 깨끗해질 것이다.
61.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속으로 돌아가게 하라.
<9>
4. 악을 저지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고약하게 만들므로, 자기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12. 그대는 비참한 노예처럼 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동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것 때문에 일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대의 정신을 오직 한 가지 일에 집중시켜, 사회적인 이성이 요구하는 대로 그대 자신을 움직이고, 또한 그대 자신을 억제하라.
17. 위로 던져 올린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악이 아니다. 또한 던져 올린 것이 선이 아님은 물론이다.
20.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그대의 의무이다.
42. 어떤 사람의 뻔뻔스러운 행위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할 때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런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릴 수 없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일을 원해서는 안된다."
[임성삼의 주(註); 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도 이 문제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10>
5. 그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원인의 얽힘은, 영원한 태초부터 그대의 존재가 이에 부수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그물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임성삼의 주(註); "라플라스의 악마" 즉 기계론적 인과(因果)론이 이 시대부터 있었다.]
8. 무화과 구실을 하는 것이 무화과이며,
개의 구실을 하는 것이 개이고, 꿀벌 구실을 하는 것이 꿀벌이고,
인간의 구실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
12. 만일 그대가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다면 뒤를 바라보지 말고 이 길을 줄곧 가도록 하라.
37. 누가 무엇을 하고 있건, 그것을 볼 적마다 되도록 "이 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해 보는 버릇을 가지라. 그러나 그대는 그대 자신이 그것을 실행하여 우선 체험해 보라.
<11>
18. 그대가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곧 인간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라.
22. 시골 쥐와 도시의 쥐에 대하여, 그리고 도시의 쥐의 전전긍긍함과 두려움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임성삼의 주(註); 이 분도 이솝이야기의 참된 독자였다.]
24.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들의 공개 구경거리를 보일 경우에, 외국 사람들에게는 천막의 그늘진 자리를 제공하고, 그들 자신은 아무 곳에나 앉았다.
25. 소크라테스는 페르디카스 궁정의 초대를 사절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장 나쁜 부덕(不德)으로 멸망되고 싶지 않습니다.
즉 나는 내가 갚을 길이 없는 은혜는 받고 싶지 않습니다."
30. 그대는 노예이다. ----- 언론의 자유가 그대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임성삼의 주(註); 황제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없다. 거의 같은 이야기가 당태종의 "정관정요"에 나온다.]
36.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빼앗을 수는 없다.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도 나온다. 큰 군대의 지휘자는 포로로 할 수 있으나, 필부에게서 뜻[의지]을 빼앗을 수는 없다.]
<12>
10. 인간에게는 큰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즉, 인간은 신이 허용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며, 신이 부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
14. 등불은 꺼질 때까지 한결같이 빛나는가?
그리고 그대 속에 있는 진리, 정의, 근엄(謹嚴)은 그대가 죽기 전에 소멸하는 것일까?
20. 무엇보다 생각이 따르지 않는 일이나 목적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

임성삼의 이야기;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공 막시무스의 "자식과 아내와 함께 농사짓고 살고 싶어하는 소망"이다. 앞에서 내가 이 영화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막시무스의 소망은 실제로 위대한 로마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 영화보다 280 년 전[기원 전 100 년]까지는 로마의 군대는 모두 자영(自營)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기 농토를 지키고, 가족과 함께 농사짓기 위한 소망을 가진 병졸들은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결과 한니발, 피로스 등의 그 당시 능력있는 외국 장군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한 것을 물리쳤으며, 그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와 그리스를 점령하였다. 방어만으로는 계속되는 침입을 근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는 전형적으로 용병을 사용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일단 강해진 로마는 점령지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로 인해 자영 농민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또한 광대한 국토를 지키기 위해 먼 곳까지 농민이 파병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임금을 받는 직업군인이 군대의 주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군인들도 일정기간 근무하면 변방에 자기의 땅을 분배받아 지주가 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정식 이름은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Marcus Annius Verus(~161).
121. 4. 26 로마~180. 3. 17 판노니아 빈도보나(지금의 빈) 또는 시르미움.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초기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로마의 콘술(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프라이펙투스(장관)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로원에 들 수 있는 특권을 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결혼했고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집안의 상속녀였다. 이처럼 마르쿠스는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정치 권력이 집결되어 있던 새로운 로마 체제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 체제의 기풍은 그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었다. 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공화국 말기의 지배계급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사람을 경멸하고 거만하며 냉소적이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도회지 로마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 체제는 도시와 지방출신의 황제들이 고루 다스렸으며, 진지함과 훌륭한 일을 개발하고 경건과 신앙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어린 마르쿠스가 장차 특출한 정치적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때부터 L.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림; 임성삼의 주 - 이 사람은 마르쿠스의 아들이 아니다.)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같은 해 어린 마르쿠스는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138년초 콤모두스가 죽고 그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파혼했다.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였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하고(나중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됨; 마르쿠스의 전 황제), 대신에 안토니누스에게 콤모두스의 아들과 마르쿠스 두 젊은이를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마르쿠스는 17세 이전에 공동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40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으로 콤모두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장차 황제가 될 한 젊은이 또는 두 젊은이 모두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안토니누스 황제 아래에서 마르쿠스가 쌓은 오랜 기간의 예비황제 교육은 스승이었던 프론토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프론토가 당시 사회의 주요문인이었지만 수사(修辭)가 몸에 밴 음울한 현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프론토가 편지에 나타난 것만큼 생기없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두 젊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천재적인 감수성과 진솔한 교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마르쿠스는 스승의 한결같은 고급 그리스어와 라틴어 낭독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꼈으며, 대신 한때 노예였으나 스토아 학파의 주요 도덕철학자인 신앙심 깊은 에픽테투스의 〈담론 Diatribai〉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주로 철학에서 지적 흥미와 정신의 영양분을 구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정력적인 황제 안토니누스 곁에서 통치술을 배웠으며 공직을 맡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140, 145, 161년에 콘술이 되었다. 145년 사촌이었던 황제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으며, 147년에는 공식상 황제직의 주요권력형태였던 '임페리움'(황제권)과 '트리부니카 포테스타스'(호민관의 권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일종의 연하의 공동 황제가 되어 안토니누스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주요국정을 결정했다(그보다 10세 가량 어렸던 양동생도 적당한 시기에 주요공직을 맡았음).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던 날 두 형제는 함께 콘술이 되었다.
로마 황제 시기
 마르쿠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이미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황제자리에 올랐다(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 양동생도 마르쿠스의 강한 요청으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음). 루키우스 베루스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갖는 공동 황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업적은 뛰어난 황제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큰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는 국내정치에서 건설적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기풍을 세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법률분야였던 듯하다.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비정상적이고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과부·소수민족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의 비율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한 것 등을 업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개인적 공헌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령 개선의 유형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법령은 단지 사회와 법구조를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위대한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 헌신적인 실천가였다. 더욱이 이러한 법률적 활동에는 특별히 스토아적인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의 시대는 법과 사회의 관계가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한 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통치기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에서 차별 적용을 받는 '호네스티오레'(honestiore:상류층)와 '휴밀리오레'(humiliore:하류층)라는 두 계급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거나 더욱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휴밀리오레는 형법에서도 언제나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의 자격을 문제 삼는 논란은 아주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그중 한 예가 그리스도교도의 박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위하는 동안 어떠한 조직적인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의 법률상 지위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수배당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불안정한 그리스도교도의 지위는 제국의 안정기와 번성기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 시에 지역 주민은 그리스도교도를 고발하고 행정관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7년에 리옹에서 일어난 순교도 바로 이런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의 재위기간 동안 그전보다 많은 피를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다.
 161년 동방의 중심세력 파르티아가 시리아 지역을 침략했다. 162~166년의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베루스가 지휘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써 승리했지만 실은 황제 휘하의 유명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제국의 안정기에 익숙했던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약화시켰다.
 167년 혹은 168년에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서 게르만 유목민족이 엄청난 기세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아드리아 해의 요충지였던 아퀼레이아를 점령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자 제국의 군사적 취약함과 재정구조의 경직성이 드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절망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이 경매되었다.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69년 베루스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 마르쿠스는 온 힘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투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콤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
부동심 : M. 아우렐리우스, 이영조 역, 풍림출판사, 1985
명상록 : M. 아우렐리우스, 강연호 역, 삼연사, 1981
자성록 : M. 아우렐리우스, 김병익 역, 범조사, 1979
Marcus Aurelius : Anthony Birley, Eyre & Spottiswoode, 1966
Roman Society from Nero to Marcus Aurelius : Sir Samuel Dill, Meridian Books, 1956
Marcus Aurelius:His Life and His World : Authur S. L. Farquharson, D. A. Rees(ed.), Basil Blackwell, 1951
Kaiser Marcus : Ulrich von Wilamowitz-Moellendorf, Weidmann, 1931
Der historische Wert der Vita Marci bei den Scriptores Historiae Augustae : J. Schwedemann, 1923
Marcus Aurelius, a Biography : Henry D. Sedgwick, Yale Univ. Press, 1921
Marc-Aurele et la fin du monde antique : Ernest Renan, Calmann-Levy, 1885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오현제  五賢帝      Five Good Emperors
로마 제국의 최고 융성기를 주재했던 다섯 황제.
 네르바(96~98 재위), 트라야누스(98~117 재위),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가 그들이다. 이들의 재위 계승은 혈통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자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입양된 후계자들인데 선임자들과 아무 관계가 없거나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먼 친척관계 정도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흔히 안토니누스 일가라고 부르며 이 호칭은 때로 두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된 후계자)와 콤모두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까지 포함하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오현제 시대의 로마 제국은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다키아까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영토확장을 이룩했다. 제국은 굳건해졌고 방어태세가 완벽했으며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속주 행정제도가 제국 전역을 포괄했다. 속국들이 하나하나 속주로 재편되었고 이탈리아의 행정제도도 많은 면에서 속주와 동일하게 편성되어갔다. 이 모든 과정과 더불어 제국의 백성들도 언어와 문화면에서 로마화했다. 오현제 시대는 내정이 안정되고 선정이 베풀어진 것으로 유명하지만 취약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권력이 완전하게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해 놓은 '이원집정제'는 1세기에 이미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그 당시 형식은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더이상 통치도구가 아니라 황제 휘하의 귀족집단으로 전락했고 주로 선거에 의해 콰이스토르(재무관)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곧바로 귀족지위를 얻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행정관들의 몫으로 남겨둔 제한된 행정분야는 더욱 협소해졌고 그들의 관할권은 점차 황제가 임명한 그리스 관리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추세를 보였다. 황제 휘하에 행정부서가 완전하게 조직되어 국가관료기구로 인정받게 된 것은 주로 하드리아누스의 작품이었다. 그는 장관직책을 자유민들 수중에서 빼앗아 에퀴테스(기사계급) 출신의 행정관들에게 맡겼다.
 이 모든 변화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로운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권력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가져왔다. 이같은 폐해는 강력한 군주들이 중앙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잘 드러나지 않기는 했지만 심지어는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치세 때에도 제국 전체의 힘이 약해졌고 그에 상응해 제국정부 자체에 대한 압력이 갈수록 가중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초기적인 몰락의 징후를 보인 현상들로는 특히 제국 중심지구의 갈수록 심해지는 인구감소, 끊임없는 재정난, 속주 지방행정의 부패성, 모든 계층이 이제는 갈수록 짐만 되어 가고 있는 지방행정관직을 맡기 꺼리는 것 등이 있었다.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난 이후 로마 제국은 급속하게 내전의 혼란에 빠져들어갔으며 193년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내전이 계속되었다.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













Posted by WN1
,


1906. 3. 19 독일 졸링겐~1962. 5. 31 이스라엘 텔아비브.
제1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했다. 1932년 4월 린츠에서 비밀 나치당에 입당했고 11월 하인리히 히믈러가 조직한 나치 친위대(SS) 정예부대에 들어갔다. 1933년 린츠를 떠나 바이에른 레히펠트의 '오스트리아 군단'이라는 테러리스트 양성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1~10월 다하우에 있는 SS부대에서 일한 뒤, 베를린의 보안국(Sicherheitsdienst/SD) 중앙본부의 유대인 담당부서에서 일했다. SS 내에서 꾸준히 승진했으며 오스트리아 합병(1938. 3) 뒤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는 임무를 띠고 빈으로 파견되었다. 1년 뒤 같은 사명을 안고 프라하로 갔다.
1939년 히믈러가 국가안전국(Reichssicherheitshauptamt/RSHA)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담당부서로 전보되었다. 1942년 1월 베를린 근처 반제에서 나치 고위관리들이 모여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에 필요한 계획과 병참업무 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아이히만은 이 문제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사실상 대량학살을 뜻하는 이 '마지막 해결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 식별하고 집결시켜 그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홀로코스트).
전쟁 뒤 아이히만은 미군에 붙잡혔으나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가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치 전범 추적자 지몬 비젠탈과 이스라엘 '자원봉사' 단체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 1960년 5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되어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아르헨티나 법을 위반했다는 여론이 진정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의 특별 3심 법정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1일에서 12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


[아이히만의 비극-아무 생각 없는 삶의 비극]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 출신입니다. 그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내다,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 강제 연행되어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 받아 결국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이 재판에 섰을 때 세계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 열풍이 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풍은 단 2 주만에 식어 버립니다. 그것은 아이히만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성 격파탄자나 정신 이상자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그는 유대인 여자를 정부(情婦)로 두었습니다. 그는 나치의 정강(政綱)도 몰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위대도 그저 친구의 권유에 등 떠밀려 들어간 것이라 합니다. 그를 추적, 관찰한 현대의 유명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 아렌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지극히 가정적인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래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엄청난 범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성찰의 부재(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비극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에서 찾았고, 그런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악'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명령을 따랐고, 아무 생각 없이 살기에 함부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요즘 흔히 일어나는 성폭행, 사기 등의 온갖 비극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 는 우리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을, 아무 생각이 없기에, 그저 내 욕심, 내 삶만 바라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보는 무심코 버리는 담배 꽁초, 무심코 빼무는 담배 연기, 전철 간에서 흔히 보는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의 짙은 애정 표현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삶의 한 단면입니다.


더구나 인터넷이나 언론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부추기고 세뇌시키면 사람들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아무 생각' 없어집니다. 옳다고 하는 일에 옳음에, 그르다고 하는  일엔 그름에 취해, 그리하여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여 앞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마녀 사냥을 하며 온 세상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부추기고 세뇌하는 세력들에 의해 마치 스탈린의 '쓸모 있는 바보들'처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흘러갑니다.

 

아무리 이성을 찾아라, 편견을 갖지 말고 세상을 똑바로 보라, 한 면만 보지 말고 사물의 양면(中道)을 모두 보라, 제대로 알고 말하라 고 일러 드려도, 그렇게 시작된 아무 생각 없는 아우성, 행동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비극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갑니다.


당신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아니노라 강변하시겠지만, 그래서 당신도 이성이 있고 나름대로 당신의 길을 간다고 하시겠지만,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는 분들'입니다. 다만 교묘한 방법으로 세뇌되어 세뇌 되신지도 모 른 채 '남 따라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분노에 사로 잡혀 머리끝까지 원통함과 증오로 차 올라 아무 생각 없이 남이 짜 놓은 각본대로 가실 뿐인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가, 그렇게 광란의 분노를 내뱉은 분들이 나중에 사물의 진실을 알고 말씀하는 한 마디가 단지 '그 때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며 자신에겐 아무 책임도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일입니다.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더할 뿐, 그 분들에게 더 이상의 잘못은 자신에겐 없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다른 분을 비통에 빠뜨렸는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다른 분들의 삶을 방해했는지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보는 우리나라는, 이렇게 온통 아무 생각 없는 분들의 생각 없는 삶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삶의 성찰보다 그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일색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형 중독, 비쌀수록 잘 팔리는 상품들, 그저 즐기고 자극적인 내용의 TV 드라마들, 난무하는 악플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모습도 그런 아무 생각 없는 우리 모습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상가다. 그의 지적 계보를 잇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아렌트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이 땅에서 대중적 슬로건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 뒤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요 저작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고,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달에는 아렌트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 (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난이도 높은 그의 사상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 저작이다. 1961~19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은 아렌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 주었고 동시에 그를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저작은 책의 대중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용이한 통로를 제공한다.

감정 앞세우지 않은 이야기체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 뉴요커 > 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 뉴요커 >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 뉴요커 > 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 받은 뉴욕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대중 잡지였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의 글은 연재되자마자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에 휩싸였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실제로 글 안에서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야만의 집행자 아이히만을 묘사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 나의 투쟁 > 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양심'의 문제가 여기서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 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형이 이렇게 분석되고 난 뒤, 이 책으로 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순전한 무사유', 곧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아이히만의 진정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 없음'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하고서 이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이히만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시민들이 저마다 인격을 걸고 의견을 표출하여 경쟁하는 장으로 여겼다. 그 정치 공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론장이다.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고 강화할 때 아이히만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차이와 평등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따라읽기 붐

한나 아렌트 저작의 한국어판은 10년 전인 1996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대표작인 < 인간의 조건 > (이진우·태정호 옮김)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것이다. 1958년에 미국에서 나온 < 인간의 조건 > 은 아렌트를 정치철학자로서 우뚝 세운 저작이다. 아렌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데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재해석해 자신의 정치철학의 밑돌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을 '복수성' 혹은 '다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차이의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삶은 전체로 볼 때 언제나 복수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차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아렌트는 평등이라고 불렀다. 다름이 없다면 인간은 교류하고 소통할 이유가 없으며, 평등하지 않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 인간의 조건 > 출간 뒤 2000년대에 들어 '아렌트 르네상스'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 혁명론 > (홍원표 옮김, 한길사 펴냄) < 과거와 미래 사이 > (서유경 옮김, 푸른숲 펴냄)이 잇따라 나왔고, 1971년 저작 < 정신의 삶1-사유 > (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과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도 출간됐다. 아렌트는 애초에 < 정신의 삶 > 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칸트의 세 기획에 맞추어 3부작으로 내려고 했는데, 그 중 '정신'편만 완성했다. 유고를 갈무리한 < 칸트 정치철학 강의 > 는 이 기획의 '판단' 편에 해당한다.

'의지'편은 현재 번역중이며 또 아렌트에게 학자로서 첫 명성을 안겨준 1951년 저작 < 전체주의의 기원 > 도 한국어판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 정치의 약속 > < 공화국의 위기 > 등이 푸른숲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들이 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가 쓴 < 정치와 진리 > (책세상 펴냄) <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 > (푸른숲 펴냄)은 국내 아렌트 전공자가 쓴 아렌트 해설서로서 아렌트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


유대인 학살범 아이히만, 아르헨티나에서 덜미 잡히다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 있다. 아데나워 총리 시절(1949~63)의 독일인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고, 교사들은 그 주제를 피했다. 그들은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잊으려 애썼던 과거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 오늘]

 

1960년 5월 11일 저녁 6시30분, 아돌프 아이히만은 늘 하던 대로 버스를 타고 일터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승용차에 싣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주택으로 데려갔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온 ‘전문가들’임을 즉각 알아챘다. 어떠한 폭력도 사용되지 않았다.

1942년 1월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수립했고, 아이히만은 그 책임자로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에 체포됐다 1946년 탈출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중동지역을 전전하다 1958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추적 단체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체포돼 9일 뒤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이송됐다. 이스라엘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다. 1961년 4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이 재판에서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6년 11월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인 중 33%는 유대인이 아리아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12년간 나치 지배를 받고 난 직후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6년 뒤인 1952년의 조사 결과다. 수치가 더 늘어나 37%가 독일 영토에 유대인이 없는 것이 독일에 더 낫다고 밝혔다. 그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점령국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었던 전후의 식량·주택 부족 등에 주목하면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간주했다. 1951년 바이에른주 판·검사의 94%, 재무부 직원의 77%가 나치 전력자였다.

전범 아이히만 재판은 독일이 ‘과거’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재판과정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의 실상이 낱낱이 조사되었기에 학살의 참상을 수백만 명에게 교육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결과 히틀러를 위대한 정치가라고 믿는 서독인의 비율은 1955년 48%에서 1967년 32%로 하락했다. 갈 길은 아직도 남았다. 진정한 변화는 그 후 1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살해되었다.

1979년 독일 텔레비전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4부작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를 방영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대인의 고통은 독일 국민의 공공 의제가 되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상실’ 덕분에 나치 잔당에 의해 전후 독일의 놀라운 ‘경제 회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


[홀로코스트]아이히만은 칸트 철학을 어떻게 독해했나?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제8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의무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마, 아돌프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칸트 철학과 그의 정언명령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그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학살자의 심리와 독일이성철학이 결합되는 방식과, 독자와 철학자의 책이 오독되는 방식 그리고 그의 오독이 그를 흔들리지 않는 학살자로, 그리고 결국 그를 사형대 위에서 사라지게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난독증 에 대한 이야기… ^ ^

 

아렌트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완벽한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아이히만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 법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질의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칸트의 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렌트는 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아이히만은 그가 살던 나치 제3제국치하에서, 즉 국가가 범죄를 합법화한 시대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이 더 이상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고, 이 같은 판단은 칸트철학에 대한 오독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령 나치의 법률가 한스 프랑크가 제3제국의 정언명령에 대해, “만일 총통이 당신의 행위를 알았을 때, 총통께서 승인할만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이런 식으로 주장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칸트적 정신이란, 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것, 단순한 복종을 넘어, 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 철학에서 그 원천은 바로 실천이성이었다. 결국 칸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입법자이며, 인간이 자신의 실천이성을 사용하여, 법의 원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원칙들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국, 인간에게는 법에 대한 복종이상의 것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을 수행하면서, 아이히만을 사로잡은 것은 실천이성이 아닌, 총통의 이성이었다.

 

아이히만의 내면에서는, 유대인 문제를 최종해결하라는 히틀러의 이성을 실천하기 위한 철저함이 보인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아이히만이, 종전 무렵 하인리히 힘러를 위시한 다수 친위대들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타협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가 끝까지 철저하게 견지한 비타협성이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그의 광신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라는 점이다.

 

종전이 가까워오고, 나치의 패배가 명약관화해 지면서, 친위대 내부에서는 그 수장 힘러를 위시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온건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합군 과 유대인들과의 모종의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힘러와 그 부하 온건파들의 타협시도에 대해, 아이히만은 완강히 저항했다. , 총통 히틀러의 의지와 힘러의 의지가 충돌한 경우, 아이히만의 선택은 항상 히틀러의 유대인문제 최종해결 명령이라는 의지였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고, 협상을 모색한 친위대 온건파들의 관점을 그는 부패라 간주했다. 이 과정에서 만약 아이히만이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그것은 유대인 대학살을 명령한 그의 최고 상관인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아이히만의 양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치시대의 양심은 다음과 같은 역설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문명화된 나라에서 살인과 관계된 양심이란, “살인하지 말라라면,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 시절의 법이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유대인 대학살의 조직가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히틀러식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속삭였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칸트 읽기와 그 오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법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상의 판단,실천을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치의 전범재판 중 하나였던,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례에 따르면, 비록 상관 혹은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인륜범죄라면, 명령을 단순히 수행한 자에게도 법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




Eichmann in Jerusalem - Hannah Arendt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유대인을 학살한 죄인에 대한 재판을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만 해도 이 책의 흥미진진함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히만 재판은 그가 나치독일치하에서 유대인 관련업무만을 맡았던 공무원이기에 나치독일의 여러 민족에 대한 범죄로 기소된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재판이 열리게 된 과정부터 독특했는데,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이 살고있는 아르헨티나에서 국제법을 어기며 납치해왔으며 국제재판소를 여는게 더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열렸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 아이히만 당사자에 대한 재판이 아닌 반유대주의에 대한 재판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 재판은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고 지적하는데, 피고를 위한 증인을 허용하지 않은 점 뿐만 아니라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가정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아이히만의 성장과정을 따라갑니다. 평범한 학생이 성장해 결혼을 하고, 감압정유회사에 취직하고 나치당에 가입했고 친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당의 정강도 알지 못했고 '나의 투쟁' 도 읽지 않았습니다. 젊은 변호사 칼텐브루너의 "친위대 가입해보면 어때?" 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지 뭐" 정도의 신념으로 가입했던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성장하며 맡았던 것은 나치당의 유대인 해결책과 동일했습니다. 추방, 수용, 학살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정책이 변화할때마다 그는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된 심정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예수를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빌라도에게 고발했고,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대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형에 처한뒤 손을 물로 씻으면서 자신의 죄가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 및 수용은 몰라도 최종해결책, 즉 학살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 방법이란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단 한명도 볼수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그토록 많이 학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일은 그 짧은 시기에 유대인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할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추방,이송하는데 있어서 유대인 공동체를 이용했는데, 명단을 작성하고 돈을 인수하고 기차에 태울수 있게 경찰력을 제공하는 등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유대인처리에 있어서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밀을 맹세했고, 자기 민족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권력에 취해 홀로코스트를 이룩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합니다. 간혹 유대인을 구한 경우도 있었는데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684명을 구출했습니다. 이러한 저명한 유대인은 전쟁중에도 학살당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덜 저명한 유대인은 항상 희생되었습니다. 히틀러는 340명의 일등급 유대인에게 독일인의 지위를 부여했고 수천명의 반쪽 유대인은 모든 제약을 면제받았습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의사들은 유대인 부대도 있었습니다.

유대인 위원회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증거로 나치독일 점령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정을 들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반응에 따라 유대인학살수치에 큰 영향을 가져옴을 알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무국적 유대인을 희생시키는데 있어서 오히려 프랑스 비시정부가 자발적으로 앞장섰으나 프랑스계 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하자 격렬하게 저항한 결과 25만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벨기에의 경우 더 비협조적이였지만 나라가 작다보니 숨기가 어려워 피해가 좀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했고 무국적자마저 덴마크 정부가 보호해줬을뿐만 아니라 돈없는 유대인을 위해 덴마크시민들이 탈출비를 제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완강한 저항을 보게 되자 정작 덴마크에 파견된 독일당국마저 베를린의 명령에 대해 거부심을 표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의 경우 더욱 완강한 정책으로 불가리아 유대인은 이송되거나 자연사가 아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됩니다. 그런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보다 더 극렬한 반유대정책으로 유대인학살의 원조격인 친위대마저 루마니아인들의 학살에 공포심을 느꼈으며 유대인을 구하기위해 개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도움 없이도 독일 친위대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3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였습니다. 그의 친척중에도 유대인의 피를 잇는 사람이 있었고, 교양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눴으며 자신이 맡은 유대인학살소(테레지엔슈타트)의 학살과정을 보고 경악했으며 그의 희망은 유대인의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니스코 모험이나 마다가스카르 계획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최종 해결책이 다가옴에 따라 취소되었고 그는 변경된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판결문에서 그는 15개의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것은 유대인의 대량학살 및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추방죄와 집시추방죄를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집시의 학살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에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와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등에서 보내온 호소편지문을 모두 물리쳤고 몇시간뒤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쳐해졌습니다.

아이히만은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일 어떤 의도도 없었으며, 유대인을 증오하지도 않았지만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를 통해 그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사고의 무능력함을 지적했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지만 그 법과 조국, 숭고한 명령에 대해 사고하지 못했음을 지적했고, 설령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지지했고 인류 구성원 중 어느 누구도 아이히만과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수 없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평범하게도, 밀그램의 실험에서 버튼을 누른 대다수의 사람에 불과했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아버지였고, 평범한 공무원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누구라도 그처럼 될수 있는 평범한 악 이였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이 예루살렘 재판의 성공여부(헌법재판소로서 정의를 부여하는 행위)만을 다루고 있다고 글을 마무리하지만, 역사속에서 유대인학살을 최소화할수있었던 좋은 예들(덴마크나 불가리아의 유대인정책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

한국판 아이히만에 면죄부 준 용산 판결 / 조영관 한겨레

지난달 28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에서 열린 용산참사 재판에서 형사합의27부는 특수공무방해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9명에게 최고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용산참사의 모든 책임은 농성했던 철거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나치의 고위 장교들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은 승진을 위해 특별히 근면했던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악의적 동기가 없었고, 스스로를 ‘오류의 희생자’라 주장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통해 ‘악’이라는 것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본질은 악을 행하는 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하게 하는 ‘무사유성’이라고 보았다.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정치적 판결이다. 용산참사는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세입자들이 생존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정부가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작전을 수행했고, 결국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에 책임을 지고 있는 수많은 한국판 아이히만들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의 행위의 결과반성기회거부당했다. 합리적 해결을 바라는 수많은 시민들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좌절감을 느끼며, 복종을 강요당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던 구청 공무원, 경찰, 소방관, 용역업체 직원들은 사회 상층부의 행위양식에 또다시 적응해야 했다. 권력에 대한 ‘복종’이 만들어낸 행위의 무사유성은 더 거대한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다는 ‘악의 평범성’은 용산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너무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비극이다.

조영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진규 -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0) 2010.09.1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와 명상록  (0) 2010.09.17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소크라테스  (0) 2010.08.26
Posted by WN1
,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하는 세일럼(salem)은 그 명칭과는 달리 수십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이 벌어졌던 곳.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고향이기도 함.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엶. 『주홍글자』(1850)를 쓴 곳도 바로 이곳 세일럼이었음.

 

* 세일럼의 종교적 갈등

▶ 세일럼 타운의 성쇠 : 보스턴 인근 북쪽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케이프 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음 ->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며 항구도시로 발전, 18세기 말까지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 됨.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 전개.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유명했음.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쥠 -> but 1812년 미·영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듦

▶ 로저 윌리엄스와 로드아일랜드 :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됨. but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함.

->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히 절연할 것 &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 등을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으며,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

->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에 대한 추방 요구를 수용 ->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 -> 오늘날 영국인들의 로드아일랜드 역사가 시작됨.

▶ 퀘이커교도의 이주와 박해 :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음. 조지 폭스(George Fox 1624 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 요구,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음.

->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씀. but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함 ->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됨.

 

* 세일럼 마녀사냥의 전개

▶ 세일럼 마을이 뉴잉글랜드 지방의 모든 수출입의 통로가 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면서,  1661-1681년까지 가장 부유한 10%가 마을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됨. 정치 참여자들도 옛날 농부가 아니라 갈수록 부를 축적해 가는 상공인들이 됨. 인구분포도 상인:농부 = 6:1 정도

-> 청교도 이상주의를 품고 있던 원래 주민들이 갈수록 가난한 농부로 전락하여 교회에서도 정치에서도 부상하는 상인들에게 밀리게 됨. 사회분위기도 세속화, 물질주의적 추세가 확산되어 이들은 위협과 심리적 갈등을 겪음.

-> 이러한 때에 1688년 세일럼 타운에 새로 부임한 젊은 청교도 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주민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은 또다시 내분에 휩싸이게 됨.

-> 마을 교회는 2개 분파로 갈라짐 : 마을 동쪽에 거주하는 상업 주도형 세력(존 포터가 이끄는 가족을 중심으로 마을 항구를 통해 사업하는 쪽) vs 항구 반대편인 서쪽에 거주하는 토지에 의존하며 농업에 종사하는 세력(존 푸트남 가문 중심). 푸트남파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책임을 동부인들에게 물어 이들을 교회에서 힘쓰지 못하게 하려고 강력하게 단합함.

-> 패리스 부임 이전에도 여러 명의 목사가 분파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남. 오래전 푸트남 가족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던 목사도 마녀 선풍에 휩쓸려 사망함 -> 패리스는 푸트남 가족파와 연합,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교회를 더럽히고 있는 악마의 세력들과 싸워 이겨야 함을 거듭 강조함.

▶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시작됨.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지름.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킴.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 ->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음.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림 ->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서인도 제도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

->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됨.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됨.

->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감.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음.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임.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됨.

->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감.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포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포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됨 ->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을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됨.

▶ 1692년 5월 중순, 영국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 심리에 착수하도록 하여 본격적인 재판을 전개함.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으로, 그녀는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 뒤에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을 당함.

->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 받아 처형,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됨.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

->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 비등. 재판관 중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며 재판관직 사임.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은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됨.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됨.

-> 하버드 대학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함 ->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되어 재판을 속개,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남 -> 5월,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 종결함.

->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 받음. 그중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짐.

 

*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 참회.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 &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 ->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움. 세일럼 제1교회도 1992년 9월 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

-> 호손은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씀. 이는 상투적 수사만은 아님.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

 

*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여러 가지 해명이 나옴.

①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 :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봄.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림.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됨.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

  한편,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와 다른 진단을 내림. 즉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함.

②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 :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 ->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됨.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

③ 또한 역사가들은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도 주목함.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음.

④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 : 희생자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신분별·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독신·행실 불량·자식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힘.

⑤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함.

 

=> 이러한 진단과 해석들은 저마다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임. 요컨대 17세기 말 세일럼의 마녀사냥은 후대인들이 당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측면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되고 있음. 또한 세일럼의 사건을 일으킨 여러 요인들은 이후 미국의 역사 속에서 종종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미국의 정체성과 특성을 드러내고 있음. 



--------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종교적 결벽, 정치적 갈등이 빚은 역사의 오욕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고기잡는 곳’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도시 세일럼. 바다와 햇살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세일럼이 낳은 대 문호 호손은 선조의 만행에 대한 원죄의식을 ‘일곱 박공의 집’ ‘주홍글자’ 등의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쏟아냈다. 세일럼 기행은 집단 히스테리에 희생된 원혼의 흔적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세일럼 마녀박물관.

뉴잉글랜드의 7월 햇살은 화사하기만 했다. 그러나 세일럼(Salem)을 찾아 나선 나에게 성하의 짙푸른 노변 정경은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옛 로마인들은 어느 장소든 그곳을 지켜주는 ‘장소의 정령(Genius loci)’이 있다고 믿었다. 근본적으로 직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땅에서 이 장소의 정령이 나그네에게 말을 걸어옴직한 만곡부가 있다면 세일럼이 바로 그런 곳이리라.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일럼은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 그 어두운 역사의 상흔이 밴 곳이다.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억의 저편에서 잠들기를 거부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억울하게 죽은 세일럼의 희생자들은 반복되는 이 집단적 히스테리에 필시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3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떠도는 원혼이 있다면 나 같은 이방의 길손에게라도 어찌 하소연하고 싶지 않겠는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가 ‘옛이야기’를 비롯한 초기의 단편들과 ‘주홍글자’를 쓴 곳이 이곳 세일럼이요, 유명한 ‘일곱 박공의 집’의 무대 또한 세일럼이다.

세일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구당 유길준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883년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유길준은 귀국을 미루고 혼자 남아 세일럼 인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덤머 아카데미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이런 연유로 그가 남긴 편지를 비롯한 유품들이 이곳 세일럼의 피바디 엑세스 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세일럼,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보스턴 교외를 벗어나 지방도로 107번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차창을 스치는 바람이 거세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이다. 해안이 가까워지면서 노변의 나무들도 키 작은 관목으로 바뀐다. 이곳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캐이프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중 한 사람인 로저 코낸트(Roger Conant)가 1626년 약 50명의 식민자를 거느리고 이곳 아늑한 항만에 이주하면서 세일럼의 역사는 시작된다.

세일럼의 원래 명칭은 ‘나움케악(Naumkeag)’. 원주민 인디언 말로 ‘고기 잡는 곳(fishing place)’이라는 뜻이다. 이어 1628년 존 엔디콧(John Endecott)이 이끄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선발대가 도착했다. 엔디콧은 식민지 본진이 정착할 터를 닦으면서 이곳이 평화의 땅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명을 세일럼으로 바꿨다.

1630년 6월12일, 존 윈스롭이 주축이 된 식민지 본진이 당도했으나 인근을 둘러본 윈스롭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길 포기했다. 남쪽 해안을 계속 답사해 내려간 윈스롭 일행은 찰스 강어귀를 주목하다가 그곳 또한 식수가 충분치 못함을 알고서 최종적으로 강 건너 반도 쪽을 정주지로 정하고, 링컨셔에 있는 그들의 고향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이라 명명했다.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면서 항구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35년 세일럼 교회의 목사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서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됐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했다.

   

세일럼의 첫 이주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한 절연할 것과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했다. 윌리엄스는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고,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의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의 추방 요구를 수용했다.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의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시작이다.

댄버스의 광풍(狂風)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조지 폭스(George Fox·1624∼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를 요구하고,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했는데,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해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런 반역의 역사적 체험이 철없는 몇몇 소녀의 일탈적 행동을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비화시킨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첫 목적지로 삼은 세일럼의 마녀박물관은 세일럼 콤몬의 맞은편, 호손의 이름을 딴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 얼굴이 길쭉한 형상의 고색창연한 청동상이 눈길을 끈다. 마녀사냥에 연루된 인물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뜻밖에 세일럼의 창설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이다. 1913년에 그를 기리는 협회가 헨리 킷선 (Henry A. Kitson)에게 제작을 의뢰해 봉헌한 것이다. 마녀사냥의 진앙지라는 세일럼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각가 킷선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아무튼 코낸트의 동상은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미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표를 산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곧장 기념품 가게다. 가게는 온갖 종류의 마녀 형상과 마술 도구로 가득 차 있다. 그 치욕의 역사가 이제 세일럼의 가장 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해 돈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활용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논리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가게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서니 마녀와 마녀사냥의 역사적 변천사가 벽면을 채웠다. 이어지는 중앙의 큰 홀에서는 마녀사냥의 촉발에서 재판에 이른 과정을 입체화해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되고 있었다.

세일럼 마녀사냥의 발원지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세일럼이 아니고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댄버스다. 1692년에 댄버스는 ‘세일럼 빌리지’라고 불렸는데, 1637년경에 세일럼 사람들이 더 넓은 땅을 찾아 이주해 세운 곳이다.

도시 주변에 새로이 형성된 정착지는 자치권을 얻어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해가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하지만 세일럼은 오랫동안 세일럼 빌리지에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역으로 번성하던 세일럼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세일럼 빌리지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689년 세일럼 빌리지의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져, 숙원이던 독자적 교회를 세우고 교구 목사를 새로 초빙할 수 있게 되면서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으나, 초빙돼온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사탄 사주 받은 마녀를 찾아라!

작품 ‘마녀 심문’ (T.H. Matteson, 1853;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세일럼 빌리지의 담임목사 패리스의 집에서 시작됐다.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질렀다.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했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하게 했다.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한다.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바베이도스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세일럼으로부터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됐다.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했다.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됐다.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갔다.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다.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였다.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됐다.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됐고,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프록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됐다.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 빌리지를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윈스롭의 일기에 따르면 이미 1647년에 마녀재판이 열린 적이 있고, 그 이듬해에는 마가렛 존즈라는 여자가 마녀로 처형됐다. 1662년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집단적인 마녀소동이 일어나 13명이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5명 중 4명이 혐의가 인정돼 처형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1647년에서 1663년까지 뉴잉글랜드에서 모두 79명이 마녀 혐의로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33명 중 15명이 처형됐다. 17세기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마녀재판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영국 쪽으로 돌리면 희생자는 더욱 엄청나다. 청교도 혁명 전야인 1645년에서 1647년 사이의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백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주지하듯 마녀재판은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500년부터 종교적 관용이 정착되기 시작한 1660년까지 유럽에서 대략 5만~8만명이 마녀재판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어닥친 피바람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시작된 것은 6월 초순이다. 당시 뉴잉글랜드에는 총독의 부재 탓에 합법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행부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지도층은 1688년 명예혁명과 더불어 제임스 2세가 임명한 에드먼드 앤드로스 총독을 몰아낸 후 일종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해 식민지 행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본국의 정권이 안정된 1692년 5월 중순, 윌리엄과 메리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하고 심리에 착수하도록 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이었다.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이틀 뒤인 6월10일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고,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됐다.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하고 말았다.

   

마녀사냥 300주년을 기념해 댄버스에 세운 희생자 추모비(1992).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면서 재판관직을 사임했다.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의 경우는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됐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했다.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이 속개됐으나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났다. 5월에 이르러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했다.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했다.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과 댄버스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세일럼 제1교회 또한 1992년 9월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명이 나왔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이다.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보았다.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린다.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된다.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는 이와 다른 진단을 한다.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하다.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해 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됐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다. 그러기에 아서 밀러는 이를 소재로 한 연극 ‘시련’에서 존 프록터로 하여금 “복수가 곧 법이 되었다”고 부르짖게 했다.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호손 문학의 산실인 세일럼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 동상과 호손이 3년간 징세관으로 근무했던 세일럼의 세관.

한편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한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 신분별, 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하면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하고 독신이고 행실이 불량하고 자식이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해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마녀재판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박물관을 나서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다. 이방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 끔찍한 악몽에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부지 소녀의 말 한마디에 졸지에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막다른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심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압살당하는 길을 택했겠는가.

무거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화사한 호손 가로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호손의 고향답게 처처에 호손의 흔적이 배어 있다. 호손 호텔과 너새니얼 식당도 있다. 조금 더 걸으니 모자를 손에 든 커다란 호손의 동상이 앞을 가로막는다. 동상 앞에는 누군가가 바친 꽃다발이 놓여 있다. 나는 문득 호손이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쓴 것을 기억해냈다. 이를 상투적 수사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이다.

칼슨의 지적대로 마녀사냥이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른바 서구 근대성의 한 음화일진대, 서구 근대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유길준 선생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서유견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보스턴이 미국 정신문화의 중심지라는 것과, 이곳 출신 아이들이 언행이 분명하고 학식이 많아서 어디에 내놓더라도 행동과 말씨로 곧장 그 출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언급이 보일 뿐이다.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서 왼쪽 더비 가로로 들어섰다. 이내 바다로 길게 뻗은 더비 부두가 보이고, 이어 세일럼 항의 파란 물결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와 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을 펼쳤다.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이름 높았다.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1812년 영국과 벌인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인근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호손이 ‘주홍글자’의 첫 장인 ‘세관’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인근 지역에서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한산한 항구로 몰락해버렸다. 1938년, 한때 뉴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이던 세일럼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세일럼 항구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고, 그 결과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는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현실과 상상 어우러진 거장의 고향

호손은 1804년 7월4일, 세일럼 유니언 가 27번지에서 태어났다. 네 살 나던 해, 선장이던 아버지가 남미의 수리남에서 황열병으로 사망한 후 두 누이와 함께 외가에 의지해 성장했다. 그를 평생 따라다닌 가난, 고독, 뿌리뽑힌 실향민 의식은 이렇듯 불우한 환경의 소산일 것이다. 열두 살 때 메인 주 레이먼드에 있는 외가 소유의 시골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후 호손은 부른스빅의 보든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다시 고향 세일럼으로 돌아왔다.

그후 1842년 결혼해 콩코드로 이주할 때까지 호손은 허버트 가 12번지의 외가 골방에 칩거하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독서와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역사와 그 일부를 이루는 가문의 과거사를 깊이 탐구하고, 폭력과 죄로 얼룩진 그 부끄러운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썼다.

   

호손의 동명 소설로 유명해진 일곱 박공의 집.

세일럼은 실로 두 가지 의미에서 호손 문학의 산실이다. 그 굴곡의 역사가 그의 소설의 주 소재라는 점과, 그런 ‘흐릿한 소재’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의 터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이 두 세일럼, 곧 그가 살던 19세기의 세일럼과 17세기 청교도 시대의 세일럼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주홍글자’의 머리글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한다면,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어우러진 세계인 것이다.

세일럼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먼저 세관 건물을 찾았다. ‘주홍글자’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세관 건물과 날개 편 독수리상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세일럼 하면 늘 이 대목을 떠올리곤 했더랬다. 책을 통해 친숙해진, 주황색 벽돌로 된 세관 건물이 이내 눈에 띄었다. 3층 건물은 고즈넉하면서도 옛 영화를 상기시키기에 족한 당당한 모습으로 항구를 내려다보며 해안가에 서 있다. 정부기관을 표상하는 날개 편 독수리상도, 줄무늬를 세로로 늘어뜨린 공화국의 국기도, 현관의 주랑도, 화강암 돌계단도 ‘주홍글자’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호손은 세일럼 세관에서 1846년부터 1849년까지 3년간 수입세 징세관으로 일했다. 결혼 전인 1839년 1년여 동안 보스턴 세관에서 검사관으로 일한 뒤 두 번째로 맡은 공직이었다. 1837년에 작품집 ‘옛이야기’를, 1841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뉴잉글랜드 역사 이야기 ‘할아버지의 의자’를, 1846년에는 ‘목사관의 이끼’를 출간하고,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글을 기고했지만, 인세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고정 수입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마다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사이 첫딸 우나와 아들 줄리안이 태어나 식구도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세관 일은 무미건조한 것이고 더러 시간이 나더라도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아 호손은 내심 초조했다. 그는 감수성이 무뎌지고, ‘상상력의 거울이 흐려지고’, 얼마 되지 않는 재능마저 ‘에테르처럼’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애증의 세일럼

그를 구해준 것은 정권교체였다. 1848년 선거에서 휘그당 출신의 재커리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 계열이던 그는 ‘목이 잘렸다.’ 호손은 정치세계의 비정함을 원망하면서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찾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세관에서 실직한 뒤 두 달도 안 돼, 그의 심리적 지주였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호손은 이중의 상실감에서 ‘주홍글자’ 집필에 매달렸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탈고했다.

결코 속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대단한 속도였다. 게다가 첫 장편이었다. ‘주홍글자’의 강렬함은 이처럼 작가로서의 위기감, 상실감, 소외감,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1850년 3월, ‘주홍글자’의 출판과 더불어 그는 세일럼을 떴고, 그 후로 몇 차례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호손의 이력을 헤아려보는 사이 내 발걸음은 어느새 세관을 뒤로하고 몇 블록 떨어진 ‘일곱 박공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세일럼, 터너 가 54번지. 호손의 동명 작품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래서 더 한층 검은빛을 띤 채, 마치 웅크린 동물처럼, 소로의 한 블록을 점령하고 서 있었다. 집 옆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거대한 느릅나무는 소설에서 핀천 느릅나무로 명명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이 느릅나무와 사면으로 튀어나온 가파른 박공(?퉌·합각머리나 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入’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또는 벽)이 하늘을 시원스레 분할하고 있지 않았다면 집은 더 음침한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물론 나의 이런 인상은 탐욕으로 인해 저주받은 한 가문의 몰락과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소설의 내용에 의해 굴절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소설의 모델이 된 실제의 집이 이런 내력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원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터너-잉거솔 가라고도 하는 이 집은 카리브해 무역으로 갑부가 된 존 터너가 1668년에 지은 것이다. 3대째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 터너 가문은 이 집을 호손과 인척 관계인 잉거솔 가에 팔았다. 사촌인 수전 잉거솔을 찾아 이 집을 자주 방문한 호손은 집의 독특한 외관에 영감을 받아 이를 때마침 자신이 구상하던 소설의 제명으로 삼은 것이다. 호손 당시에 이 집의 박공은 4~5개만 남아 있었던 듯한데, 집주인으로부터 원래 박공이 일곱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곱 박공의 집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8년 집의 소유권은 다시 캐롤라인 에머튼에게 넘어갔는데, 에머튼은 집을 매입한 뒤 곧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전문가에게 의뢰해 소설에 묘사된 대로 일곱 박공의 집으로 복원했다. 삶이 예술을 모방한 것이다. 일곱 박공의 집은 17세기 목조 주택으로서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문학적으로는 물론 건축학적 의미가 큰 건물이기도 하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꽃이 화사하게 핀 정원으로 인도된다. 정원이 바다에 면해 있어 세일럼의 내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중충한 집의 외관과는 판이하게 화사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 좀 의외라는 느낌이 든다. 정원 쪽에서 집을 바라보면 거리에 면한 입구 쪽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박공이 사면으로 돌출해 있어 집은 방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정경을 연출해낸다. 따라서 집의 전모를 한눈에 보기 어렵다. 전체상을 허용하지 않는 집의 이 다면성! 호손이 왜 이 집에 끌렸는지 이해된다. 이런 독특한 외관이 다원성의 미학을 추구한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리라. 아닌게아니라 주변 건물의 대다수는 장방형의 이른바 ‘연방 스타일(Federal style)’이다. 오직 이 일곱 박공의 집만 사면으로 뻗은 입체적 양식이다.

‘원죄’ 반성하는 ‘일곱 박공의 집’

‘일곱 박공의 집’은 퇴락해가는 집에 얽힌 삶의 영고성쇠의 이야기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주홍글자’의 연장선상에 있다. 호손은 ‘주홍글자’에 이어 다시 한 번 고문서지기를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케케묵은 옛 문서를 뒤적여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문화의 고고학으로서의 소설 쓰기. ‘옛이야기’에서 ‘일곱 박공의 집’에 이르는 호손의 문학적 여정은 이렇게 요약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소설은 일곱 박공의 집을 지은 핀천 가의 5대에 걸친 변전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집은 가족 혹은 가문의 표상이다. 다시 말해 ‘일곱 박공의 집’은 박경리의 ‘토지’처럼 집을 통해 가문의 내력을 더듬는 가족사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친근한 모티프를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고 있는 점에 이 소설의 특이함이 있다.

세일럼에 마녀사냥이 한창일 무렵, 마을 외진 곳에서 가난하게 사는 매튜 몰의 오두막 집 터를 오랫동안 탐내왔던 지방 유지 핀천 대령은, 몰을 마귀로 몰아 그를 처형하는 데 앞장선다. 몰은 처형당하면서 핀천 대령을 향해 하나님의 징벌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한다. 핀천 대령은 몰의 집터에 일곱 박공의 집을 짓고 집의 완공을 축하하는 모임을 연 날 저녁, 하객들을 기다리다가 뇌출혈로 급사한다. 그후로 핀천가의 후손들은 점점 쇠락해 급기야 5대째에 이르러서는 구멍가게를 내야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몰락한다. 소설의 이런 줄거리만으로도 호손이 조상의 원죄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천가의 몰락은 신앙을 명분으로 사사로운 탐욕을 채운 죄업의 결과다. 죄업이라고 했지만 징벌이 억울하게 죽은 몰의 후손들에 의해서 직접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원죄를 초래한 탐욕과 오만이 대대로 세습되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결과다. 물론 몰의 후손들은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기회가 주어지면 은밀하게 복수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핀천의 후손들 자신이다. 마녀사냥은 따라서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 일곱 박공의 집이 마녀사냥의 원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뉴잉글랜드 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춤추는 녹색 놀이터

집의 내부는 안내를 받아서만 구경할 수 있다. 집안은 집 주인이 동방 무역을 하면서 수집한 귀한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인은 관광객의 관심을 미로처럼 복잡한 집의 구조로 돌리는 데 더 열중이다. 그는 방과 방 사이를 잇는 비밀의 계단을 보여주면서 호손이 소설에서 이를 활용하지 않았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는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호손의 문학세계를 가로지르는 어둠의 미로는 고딕적 상상력의 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내인의 설명은 일곱 박공의 집 내부에 이어 원래의 장소에서 바로 옆자리에 옮겨다 놓은 호손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났다. 일곱 박공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진홍색으로 채색된 호손의 생가는 무성하게 늘어진 나뭇가지에 감싸여 있었다.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자연은 인간이 만드는 어둠의 역사와 상관없이 늘 스스로 충만한 것인가. 정원에 핀 색색의 장미도, 푸르른 잔디도, 느릅나무 잎새도 7월의 햇살 아래 참으로 눈부셨다. 150년 전, 근엄한 청교도의 후손인 소설가의 눈에도 자연의 향연은 마찬가지로 찬란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퇴락해가는 집에 딸린 이 정원을 “반짝이는 빛이 춤추는 녹색의 놀이터”로 찬탄하는 화려한 수사가 이 어두운 소설의 언어 속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끝)

출처;신동아2006.05.01 통권 560 호 (p526 ~ 540



---------


미국의 사회문화적 특색 (1) : 퓨리터니즘(Puritanism)

 

* "청교도주의(Puritanism)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Perry Miller) -> 미국 사회의 모든 면을 퓨리터니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직도 미국 사회의 이념적 가치나 기반이 무엇인가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음. 그러나 청교도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국인의 사상과 전통에 엄청난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음. 오늘날 미국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념 혹은 가치나 이상은 분명 퓨리터니즘으로부터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음.

* 우리가 보통 최초의 퓨리턴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와'메이플라워호 서약'(Mayflower Compact)을 맺으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명 필그림(Pilgrims)으로 불리는 사람들임.

-> 그런데 미국적 특징을 일컫는 데 사용되는 이른바 퓨리터니즘, 즉 캘빈주의적 전통을 가진 개신교도들은 이들이 아니라 1630년 레이디 아벨라(the Lady Arbella) 호를 타고 지금의 뉴잉글랜드, 특히 보스턴 주변에 정착해서 신정 정치를 구현한 사람들로, 최초에 미국 땅을 밟은 신교도들과는 다소 상이한 성격을 가짐.

-> 물론 필그림들도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이지만, 후일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이른바 청교도들과는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음. 필그림들은 영국 교회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가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임. 반면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퓨리턴들은 다소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캘빈주의자들임. 이들은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이 유럽 대륙에 비해 미진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를 좀더 정화(purify)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퓨리턴(Puritans)이라고 불려짐. 사실 영국 성공회(Anglicanism)는 교리와 형식 면에서 로마 가톨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 단지 종교적 수장이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었다는 것이고, 또 경제적 차원에서 로마로 흘러들어 가던 십일조를 영국 국가의 재산으로 귀속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음 -> 따라서 퓨리턴들은 자연스럽게 영국 성공회에 대한 반감을 가졌고, 이러한 배경에서 신대륙을 종교적 피난처로 삼아 신정 정치를 구현할 '언덕 위의 도성'(A City upon a Hill)을 건설하려고 했음.

-> 퓨리턴들은 영국 사회의 엄격한 계서제를 그대로 식민지에 이식하려 했던 사람들로 대부분이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음. 이들은 자유와 평등, 기회의 땅을 상징한다는 신대륙 식민지 사회에서 엄격한 계서제에 입각해 지도자 계층으로 성장했고, 도시나 농촌 지역에서 따라간 존재들은 신대륙 식민지 사회에서도 피지배자층으로 편입됨 -> 따라서 식민지 건설 초기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민주주의적 질서가 존재할 수 없었음. 구대륙의 봉건적 질서와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신대륙에 건너온 이들이 이렇게 비민주적인 식민지 사회를 건설하게 된 이면에는 그들이 목숨처럼 여겼던 이른바 캘빈주의의 비민주적인 신정 정치에 기인함.

* 신정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퓨리턴들은 원죄 의식, 예정설, 선민의식, 소명의식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캘빈주의를 신봉함. 이들은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엄격한 신정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구대륙의 봉건적 질서 속의 군주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함. 즉 퓨리턴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신이 곧 왕의 역할을 했던 것임. 식민지 공동체 사회가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임.

-> 이러한 엄격한 위계질서에 바탕한 퓨리턴 사회는 캘빈주의의 핵심인 예정설에 이르면 더욱 비민주적 질서를 정당화하기에 이름. 즉 예정설은 신이 선택한 극소수의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사상으로, 이것은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를 정당화하게 됨. 인간은 원죄 때문에 신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며 죄인 중에서 신에게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예정설은 선택된 소수의 정치적 지배를 신분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귀결됨 -> 이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이란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자유와 평등의 나라, 기회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설득력이 약함.

-> 예정설에 기반한 선택된 소수라는 선민의식은 구세계를 구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이 마련해 준 신대륙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소명의식으로 귀결됨 -> 이러한 소명의식은 이른바 '대각성'(Great Awakening) 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지 전역으로 확산되어 신대륙의 이스라엘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즉 신대륙에 이주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에 골라 태운 선택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소명을 가진 유일한 존재들이라는 믿음을 갖고 '언덕 위의 도성'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 -> 미국 정치인들이 늘상 연설 말미에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로 끝맺고, 미국 지폐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것이 이상할 리 없는 것이다.

* 위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퓨리턴들은 엄격한 관습 아래 모범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익을 우선시하는 일종의 사회봉사정신의 강화에도 기여했으나, 극단적인 그들의 엄격성은 지나친 강박관념으로도 발전해 '세일럼 타운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련의 사건도 유발시킴. 즉 퓨리턴들이 식민지에 정착한 지 대략 3대가 지나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점점 세속화의 경향이 대두되면서 신의 뜻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식민 정착 초기의 신념이 사라져가는 것에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마녀사냥은 바로 이러한 퓨리턴들의 위기의식의 발로였던 셈. 공교롭게도 마녀사냥을 통해 처형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거나 퓨리턴이 아닌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었음. 이런 점에서 퓨리턴들의 배타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음 -> 종교적 자유를 찾아 머나먼 신대륙에 정착한 퓨리턴들이 마녀사냥과 같은 조치를 통해 다른 교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 이와 같은 퓨리턴들의 종교적 배타성은 결국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와 같은 반발세력을 양산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함께 식민지 사회를 팽창시키는 데 일조함.

* 한편, 퓨리턴의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적 직업윤리와 연관시키기도 함. 즉 원죄로 얼룩진 인간의 예정된 운명은 오로지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신이 부여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 임무란 바로 현세에서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것 -> 이렇게 책무를 다해 현세에서 이룬 성공과 보상이 다름 아닌 구원의 징표라고 퓨리턴들은 생각함 -> 따라서 가톨릭 세계에서 금기시되었던 대금업과 같은 업종들은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고, 현세에서의 근검과 절약, 소명을 다하는 노동 윤리는 퓨리턴들에게 세속적인 성공으로 가는 기본적 바탕이었음. 요컨대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 윤리는 캘빈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서,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베버의 논리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님.

*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도 한 몫을 담당한 캘빈주의적 선민의식과 그것에 바탕한 소명의식은 19세기 이후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함 ->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구원자로서의 소명은 미국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었던 것임. 우리에게는 프런티어(frontier) 혹은 모험과 개척정신으로 알려진 미국의 서부 팽창과정은 미국인들의 선민의식에 바탕한 소명의식의 결과물인 것. 즉 혹독한 시련 속에서 식민지에 정착해 개척 경험을 쌓았던 미국인들은 그것이 전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고, 따라서 독립 전쟁 이후 전개된 서부 팽창 역시 이와 같은 종교적 선민의식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띤 행위로 간주됨 -> 동부 연안의 13개 주로부터 미시시피 강으로, 그리고 대평원을 지나 로키 산맥에 이르고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해간 프런티어는 퓨리턴들의 용감성과 모험정신, 진취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러한 팽창의 기본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캘빈주의로부터 연원한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이었던 것임.

-> 물론 프런티어는 경제적 팽창으로서의 의미도 지님. 당시 미국인들에게 서부는 자유, 광활함, 거친 야성을 간직한 공간으로 마치 야만과도 같은 상태였고, 그러한 야만과 미개척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신에게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은 퓨리턴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신성한 소명의식이라는 미국인들의 팽창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야만의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일종의 자연 파괴 과정이었음.

-> 이와 같은 미국인들의 전통적 신념은 19세기 후반 이후 진행된 미국의 세계적 팽창과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마련해줌. 그러한 팽창과 정당화를 통해 미국인들은 앵글로 색슨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자긍심, 즉 백인 퓨리턴의 우월의식을 정당화했고, 이러한 관념에 기반해 이른바 와스프(WASP)들이 미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 즉 이들은 캘빈주의적 전통에 침윤된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음.

-> 아울러 캘빈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은 미국에게 세계 구원자로서의 모습과 모범을 전파해야할 우월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는 데 대단한 영향을 끼쳤음. 최근 죄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데에는 바로 이와 같은 관념, 즉 퓨리터니즘이 존재하고 있음. 물론 퓨리터니즘만으로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퓨리터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의 전지구적 팽창도 설명하기 어려움.






wn1 - 위의 영상은 세일럼의 마녀사냥 내용을 영화로 만들었는데요..제목이 '크루서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마녀사냥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녀 사냥이 한국의 역사 내에서도 존재 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이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많았다고 하는군요..
현재는 당연히 없어야 겠지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는 '만들어진 사이코패스'라 불리울 정도로 이러한 영화내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게 되는데요..
내려오는 말 중에 '여러사람이 한 사람 바보만들기는 쉽다'는 말이 있지요..
이 마녀사냥이란 것이 그 말이 정확함을 여실이 보여줍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어 지겠지요... 
영화 익스페리먼트(스탠포드 감옥실험을 다룬 영화) 나 4월 언젠가(르완다의 인종학살을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자(한국 군인들의 상실을 다루는 영화) 그리고 위의 동영상 영화(마녀사냥을 다룬 영화)
이것들이 한국내에서도 일어났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칫 감정의 대립이 있으면 언제 또 발생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중세유럽이라고 하면 '카톨릭', '십자군 원정', '흑사병(페스트)', '마녀사냥' 등이 떠오를 겁니다. 저 4가지는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각익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마녀사냥은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테마입니다. 왜냐면 마녀사냥은 13세기초에 시작해 무려 18세기말까지 이어졌으며 그 최전성기는 중세시대가 아닌 16~17세기였습니다. 게다가 마녀사냥은 구교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교지역에서도 폭넓게 행해졌고 심지어는 18세기 미국에서도 버젓이 이루어졌던 행위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성공회의 존 웨슬리 신부 같은 사람조차 마녀사냥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습니다.(이 분은 무려 "마녀를 묵인하는 건 성경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시던 분.)


그럼 9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을 앗아간 광기가 60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녀사냥은 의학의 발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러서 유럽 전역의 국가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 시기에 4회에 걸쳐서 로마의 라티라노 대성당에서 라티라노 공의회(Lateran Council)가 열립니다.(5회는 16세기에 열렸으니 논외로) 이 라티라노 공의회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1회(1123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주재로 열린 서방 최초의 공의회. 성직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보름스협약을 인가하여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2회(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소집. 대립교황(對立敎皇) 아나클레투스 2세의 잔당(殘黨)을 처리하고 브레시아의 아르노르드, 브류이의 피에르 등의 이단설(異端說)을 처벌했으며, 교회규율에 관한 30항의 카논(canon)을 의정했다. 이 회의에는 서유럽 전국가들이 참석, 프레나리아(완전한)공의회라 불렀다.

3회(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소집. 추기경 전체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만 교황에 선출된다는 교황 선거 절차를 확정하였다. 또 이단들을 배제, 교회쇄신을 추진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4회(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소집하였다. 알비파(派), 플로리스의 요아킴, 아말리크 드 벤 등의 여러 이단을 처벌하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백성사와 배령성체(拜領聖體)를 해야 한다고 규정함과 동시에,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또 교회의 승인 없이는 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1215년에 열린 제 4회 라티라노 공의회입니다. 4회 라티라노 공의회는 십자군원정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해서 다른 부분들이 소홀하게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회의 승인 없이 치료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것이 이후 벌어지는 마녀사냥의 불씨를 당기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민간의술이 존재했습니다. 주술적인 개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민간의술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인체에 대한 지식(주로 뼈 등), 그리고 출산에 대한 지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중의학이나 한의학과 상당히 비슷한 약초학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약초 지식을 지닌 사람을 빗커(Wicc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고대영어로 '현명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녀를 지칭하는 위치(Witch)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면서 서양의학이 크게 발전을 이루면서 기존의 약초학과 대립하게 됩니다. 중세시대만 해도 학문의 중심이 교회와 수도원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는 대부분이 성직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직자들에 의해서 치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곧 교회의 큰 수입원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약초학을 이용했고 아이를 낳을 때는 약초학에 정통한 산파를 불러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에 교황청은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회의 의료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회의 승인 없이 행해지는 치료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곧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이단행위가 됩니다. 바로 마녀의 탄생이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들이 생계를 위해서 약초학을 배워서 치료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약초학의 지식을 지닌 치료사들은 대부분이 40세 이상의 노파였습니다.(중세시대에는 평균수명이 낮고 노화가 빨랐기 때문에 40대 후반만 되어도 거의 노파였죠.) 그리고 약초학에 정통한 노파들은 매일 중노동을 하는 농가의 여인들에 비해서 수명도 길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등 구부러지고 이빨은 다 빠진 마녀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단심문관을 제도화하고, 1318 년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이단심문관에게 재판 없이 언제라도 죄를 판결해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단심문관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로 부각됩니다.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마녀사냥은 그 표적이 주로 약초학 지식을 지닌 여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희생자 대부분이 노파나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사는 젊은 과부 등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거의 100년 넘게 계속된 마녀사냥의 결과 교회는 유럽의 전통 약초학의 씨를 말리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유일한 의료시설이 됩니다.

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 마녀사냥은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얻던 집단에게는 좀 달랐습니다. 100년 넘게 마녀사냥이 지속되면서 마녀사냥은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자리잡습니다. 마녀 판정을 위한 각종 서적 산업, 각종 고문도구 산업, 화형식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거나 화형식을 집행하는 대리 업자 산업 등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초 목표로 삼았던 대상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이 사업들은 유지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12세기에 확립된 교회법 중에는 이단 행위자에 대한 재산몰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 받은 사람은 당연히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심지어는 죽은지 40년 이내에 살아 있던 시절에 행한 이단 행위가 발각될 경우 그 자손들에게 상속된 유산을 전부 몰수하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산은 당연히 교회에 귀속되는 것이었지만 그 재산을 몰수하는 당사자는 교회가 아닌 이단심문관이었습니다. 이런 끝내주는 사업모델을 구상해냈는데 안타깝게도 유럽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런 수익모델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뭍혀버립니다.


14세기가 되자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시아를 통해 흑사병이 전래된 것입니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흑사병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350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습니다. 중세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녀의 소행이라고 여겨 힘 없는 여성을 잡아 산채로 화형시키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마녀사냥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인데요.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마녀사냥은 한 동안 시들해집니다. 물론 흑사병이 갑자기 퍼진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일으켜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지목해 화형하는 사례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16~17세기의 마녀사냥에는 비교도 안 되며 13세기에 성행했던 마녀사냥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전염병의 전파 속도가 너무 빨랐고, 교회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오히려 주춤하게 됩니다.

흑사병은 농민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성직자, 왕족 등 닥치는대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유럽을 유지하던 인프라가 거의 다 소멸되었다는 이야기이며, 당연히 마녀사냥이라는 비즈니스를 통해 이익을 취하던 집단도 대부분 소멸했음을 의미합니다.
흑사병의 공포가 지나가고 15세기가 되면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은 전세계와 교역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유럽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교역은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종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슬람을 비롯한 타 종교의 확산, 기독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리주의 운동 등에 두려움을 느낀 교회에서는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가장 바람직한 것에 관하여'라는 마녀박멸교서 등을 발표하며 이단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는 등으로 맞섭니다. 이런 시기에 한 책이 출판됩니다.



도미니크회의 이단심문관이었던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야곱 슈프렝겐)'가 쓴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1487년에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두 이단심문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마녀에 대한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는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은 물론이고 자연재해와 병충해까지 마녀의 소행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유럽에는 다시금 마녀의 공포가 형성되었고 두 이단심문관은 직접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녀사냥을 합니다. 이 책의 출판은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여성에서 남성으로까지, 힘없는 자에게 권력과 재산을 지닌 귀족이나 관리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마녀의 망치>는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불어닥친 마녀사냥의 열풍은 상당한 희생자를 내는데, 이단으로 판정된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규정은 이때도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산 몰수의 집행자는 당연히 이단심문관이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마녀사냥은 또 다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발전합니다.



15세기 말부터 다시금 마녀사냥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수많은 고문도구와 화형의식의 대행 등 많은 비즈니스들이 성장합니다. 비즈니스가 거대해지면서 이 산업의 종사자들은 수익성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서 보다 수익성이 높은 아이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녀사냥은 힘없는 사람을 마녀를 몰아서 화형시키는 종교적 광기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인 뒤 그 재산을 몰수해 공모자들끼리 분배하는 야쿠자 비즈니스로 변질됩니다. 실제로 16~17세기에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자산가의 미망인, 지방 지주, 지방 관리, 상인 등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자산가의 미망인이 가장 많았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마녀사냥이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는 비즈니스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630년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마녀사냥으로 이단판정을 받은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 조치는 1631년까지 단 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1629년까지 매년 평균 100명이 마녀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던 마녀사냥의 메카 독일의 밤베르크(Bamberg)는 1631년에는 단 한 명도 마녀재판으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6~17세기에 와서는 마녀사냥은 종교적 광기가 아닌 살인을 통해 재산을 빼앗는 야쿠자비즈니스였던 겁니다.


18세기말까지 이어졌던 마녀사냥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나폴레옹입니다. 171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헤름 1세가 마녀재판을 금지했음에도 여전히 성행했던 마녀사냥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자유를 알게 된 인민들에 의해 교회의 힘이 약해지고 이로 인해서 마녀사냥은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


인도 ‘마녀사냥’으로 매년 200명 희생 충격
                                        2010/07/27기사



중세 유럽에서 벌어졌을 법한 잔인하고 반인권적인 마녀사냥이 오늘날 인도의 일부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어 전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일간 타임스는 “수많은 인도여성이 마녀로 몰려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잔인한 폭력을 당하며, 매년 여성 200명이 마녀사냥으로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최근 보도했다.

수치는 인도에서 활동하는 법률구호단체(RLEK)가 조사해 발표한 것이다. RLEK는 “북부 자르칸드 주에 있는 가난한 부족집단 마을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안드라프라데시, 하리아나, 오리사 주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마녀로 몰리는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과부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 등이 대부분이다. 최근 이뤄진 마녀사냥이 여성들이 가진 땅이나 돈을 갈취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된 것으로 드러나 더욱 심각한 인권 유린 행태로 파악된다.

이 단체의 어부다시 카우살 회장은 “마녀로 몰린 여성들은 사람들 앞에서 매를 맞거나 머리카락을 잘린다. 억지로 대변이나 소변을 먹기도 하며 옷을 홀딱 벗긴 채 강제로 마을 주변을 걷기도 한다.”며 마녀사냥의 잔인한 행태를 고발했다.

마녀사냥으로 사망에 이르는 여성은 한해 200명 정도이며 지난 15년을 추산한 결과 2500명이 마녀로 몰려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 혹독한 마녀사냥에 살아남았어도 피해 여성들이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건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자르칸드, 비하르, 차티스가르 주 등에서는 마녀사냥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됐으나 시행이 미비한 실정이며 야만행위를 한 사람을 처벌하는 최고형이 겨우 징역 3개월 형에 불과해 인도 당국이 사실상 마녀사냥을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체는 비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

[한마당-김진홍] 마녀사냥과 고문
 2010/06/24
“여성은 천성이 좋지 않다.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쉽게 의심하고, 믿음도 쉽게 부인한다. 이것바로 마술을 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다.”

1487년 독일에서 발간된 ‘마녀철퇴’의 한 부분이다. 편견으로 가득 찬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유럽에서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마녀를 발본색원하라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명령도 떨어졌다. 200여년간 수백만명이 약식 재판을 거쳐 화형 또는 참수형, 교수형을 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과부를 비롯해 혼자 사는 여성들이 주 타깃이 됐다.

세상에 마녀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중세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확신했다. 마녀들에게는 악마 집회에 참석했다거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거나 폭풍을 불러왔다는 등의 황당무계한 죄목이 적용됐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이 가혹한 고문이다. 고문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불로 발바닥 지지기, 손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았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관절 뽑기, 채찍으로 때리기 등을 견뎌낼 여성은 없었다. 물을 이용해 마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방법도 있었다.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에 던져 떠오르면 악마와 접촉한 것이고, 가라앉으면 죄가 없는 것이다. 마녀라고 의심받는 순간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문이 군사정권 시절의 유산쯤으로 여겨졌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 경찰관 4명이 고문한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다른 경찰서에서 고문당했다는 진정이 추가로 접수돼 국가인권위원회가 확인 중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어떤 이유로든 수사과정에서 고문은 용납할 수 없다”며 엄벌을 지시했다. 창피한 노릇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조사 결과에 의문이 많다는 내용의 서한을 유엔에 보낸 참여연대에 비난이 쏟아지자 좌파성향의 시민단체들이 마녀사냥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마녀사냥이라니, 중세를 떠올리면 끔찍한 욕이다. 참여연대의 행동이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참여연대가 북한 김정일 정권을 두둔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정일 정권은 지금도 고문을 자행하며 정치범들을 마녀사냥하고 있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


-------------

중세 유럽의 고문방법


처벌의 신발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철로 만들어진 밑창 부분에 스파이크가 돋아있습니다. 죄인이 저 신발을 신고 걷게 되면 스파이크가 살을 파고들어가 뼈를 뚫고 인대까지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단자의 포크
양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포크로 한 쪽은 이단자의 턱을 뚫고 한 쪽은 쇄골을 뚫게 합니다. 이 고문도구가 발명된 이유는 더러운 이단자가 함부로 혀를 놀리지 못하고 오직 고해만을 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머리 붕괴기
이 고문도구를 사용하면 이빨이 잇몸 속으로 뭉개져 들어가면서 턱 주변의 뼈까지 뭉개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눈이 튀어나오고 마지막에는 뇌가 귀에서 뿜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허나 이 고문방법은 현대의 몇몇 국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다의 요람
. 저 줄들은 묶여있는 사람이 떨어질 경우 아래에 있는 삼각뿔 위에 희생자의 항문이 찔리게끔 설정되어있습니다. 희생자를 일단 묶고 천장까지 올렸다가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요람

이 요람은 유다의 요람과는 다르게 날카롭게 선 날 위로 희생자를 앉혀놓고 앞 뒤로 끌어당겨 희생자의 성기를 손상시키는 고문방법이었습니다.


철의 여인
고문방법은 설명을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이 고문이 끔찍했던 이유는 쇠꼬챙이가 가슴, 눈, 팔, 다리 어깨를 전부 다 찔러도 죽을 만큼 깊이 꿰뚫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철의 여인에 희생자가 갖히게 되면, 관통상으로 죽는 것이 이틀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출혈로 죽게 된다고 합니다.

꿰뚫기
이 방법은 알제리, 튀니지 등지에서 국가 반역자에 대한 처형방법이었는데, 드라큐라의 모델이었던 루마니아의 블라드 테페슈 공작이 이 방법으로 자신의 영지 내에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유명해진 방법이라고 합니다.


희생자가 거꾸로 매달리면 몸 안의 피가 머리 쪽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때 고문집행자가 희생자의 몸을 톱으로 반으로 가르기 시작하는데 머리 속에 있는 피가 너무 몰리게 되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고 고통을 못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희생자는 자신의 몸이 반으로 잘리는 것을 천천히 보다가 죽게 된다고 합니다.

 바퀴
이 방법은 중세 독일에서 가장 흔했던 처형방법이었습니다. 우선 희생자를 대자로 벌려 땅에 묶습니다. 이 때 손목 관절, 무릎, 골반, 어깨 아래에 나무를 받쳐놓습니다. 그러면 고문집행자는 아래 그림의 바퀴를 들고 있는 힘껏 내리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겨우 악몽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내려쳐서 뼈가 으깨지고 수족이 흐물 거리기 시작하면 내려쳤던 바퀴에 흐물거리는 희생자의 손발을 엮어서 꼬아버립니다. 이미 흐물거리는 상태이므로 밧줄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까지 평민들이 보도록 올려놓습니다.

의자에 묶어 물에 던지기 
매우 유명한 마녀 판별법입니다. 의자에 묶여있는 여성이 마녀가 아니라면 그대로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고, 마녀라면 물에 뜨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바로 화형장으로 직행시키는 사형법입니다.
장화
희생자의 다리를 두 개의 나무 판자 사이에 끼우고 밧줄로 묶습니다. 밧줄 사이사이에 해머로 때릴 쐐기를 끼우고 쐐기를 망치로 두드립니다. 한번씩 쐐기를 때릴 때마다 정강이 뼈가 박살납니다. 이 고문은 희생자의 정강이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12번 내외 정도 쐐기를 때릴 수 있다고 합니다. 부츠가 벗겨지면 뼈 조각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피부는 흐믈흐믈한 살덩어리가 된다고 합니다.

고양이 발톱
이 방법은 단순히 희생자의 등에서 피부를 아주 천천히 벗겨내기 위해 고안됐습니다. 너무 많이 벗겨내면 뼈가 전부 드러나게 됩니다. 

잡아뜯기
그림이 조금 짤렸습니다만, 팔다리를 선반 위에 묶어놓고 도르레를 이용해 희생자의 팔다리를 조금씩 잡아 뜯는 고문법입니다.

말로 4등분 만들기.
우리나라의 능지처참과 같은 방법입니다. 희생자를 바닥에 놓고 각각의 팔다리를 줄로 엮은다음 각각의 줄을 네 마리의 말에 묶습니다. 말이 힘껏 달리도록 엉덩이를 때리면 희생자의 팔다리는 엄청난 힘으로 찢겨나갑니다. 주로 귀족을 살해한 사람을 이 방법으로 처형시켰다고 합니다


저 도구를 남성의 경우는 항문, 여성에게는 성기에 집어넣습니다. 손잡이 부분을 돌리면 마개가 점점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작은 꼬챙이가 하나 들어있는데, 사용자의 임으로 그 꼬챙이를 항문 안이나 성기 안에서 길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과 함께 장기 파열되어 사망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고문도구는 일반시중에서 판대 됐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 정화시키기.
많은 카톨릭 국가에서 성직자는 이단의 부패한 영혼은 정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단지 그 방법이, 펄펄 끓어오르는 물과 타오르는 석탄 둘 중 하나를 삼킴으로써 내면의 악을 씻거나 태워야지만 가능하다고 믿었답니다.



PS. 중세 역사소설 같은거 보면 이단자로 몰아서 여러 고문을 하며 죽이는 모습을 글속에서 많이 보았는데

이런식으로 고문했다고 떠올리니 엄청 잔인하군요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CRR(colour reflection reading) 분석법  (0) 2010.09.21
로마 5 현제  (0) 2010.09.18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Posted by WN1
,
wn1 - '유쾌한 이노베이션'이라는 책을 통해 IDEO사의 디자인들과 회사의 철학을 알 수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추천도서로 넣고 있지요..
이 회사를 보면서 여러 회사들이 생각이 나는데 구글이나 애플, MS 등 유수의 강한기업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전문성과 결합되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며 자신의 생각들을 점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여러 기업들이 창조적 사고력에 대해 많이 비중을 두고 있는 추세이지요...

모여서 떠들고 낙서하며... 인간을 디자인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28번 부두(pier 28).

예전에 대형 선박에서 수출입 컨테이너를 하역하던 선착장 자리에 물류 창고처럼 생긴 단층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세계의 디자인 트렌드를 리드하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의 사무실로는 뜻밖이었다.

'전 세계의 이노베이션 공장'으로 일컬어지는 아이데오(IDEO)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의 상식을 테스트하는 듯한 파격(破格)의 연속이다.

사무실 지붕은 몽고의 유르트(Yurt·이동식 가옥)를 연상시켰다.

보통 사무실 높이의 5배는 족히 돼 보이는 천장.

난데없이 자전거 6대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케팅 담당 크리스틴 헨드릭슨(Hendrickson)은 "직원들이 통근용으로 타고 다니는 자전거"라고 설명했다.

입구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휘갈겨 쓴 것처럼 보이는 낙서 수십 개를 붙여 놓았다.

직원들의 브레인스토밍에서 나온 습작들이라고 한다.

 

 

▲ 세계적 디자인 컨설팅 회사인 아이데오 직원들이 브레인 스토밍(brainstorming)을 벌이고 있다.

심리학, 건축학, 엔지니어, 마케팅 전공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직원들은 현장에 나가 나름의 시각으로 소비자를 관찰한 뒤 돌아와 난상토론을 벌인다.

토론 중 칠판에 자신만의 느낌을 적기도 하고, 장난감을 가져와 놀면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 아이데오 제공

 

지난 3월 미국 경영 잡지 '패스트 컴퍼니(Fast Company)'는 이 회사를 구글과 애플, 페이스북, GE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innovative) 기업 랭킹 5위로 꼽았다.

아이데오는 나이키와 노키아, 아마존, 닌텐도, 프록터&갬블(P&G)을 제쳤다.

 

기자는 사무실 오른편 베란다로 나가면서 탄성을 질렀다.

코발트색 바다에 황금색 햇살이 반짝였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가로지르는 길이 13.5㎞ 베이브리지가 눈앞에 보인다.

보통 회사라면 중역 사무실이 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곳은 달랐다.

직원용 바(bar)라고 했다.

직원들이 회의도 하고 식사도 한다.

이곳에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우스가 탄생했고, 삼성전자의 LCD 모니터 디자인이 나왔다.

아모레퍼시픽과 SKT, LG도 여기에 디자인을 의뢰했다.

CEO 팀 브라운(Brown)은 청바지와 T셔츠 차림이었다.

그에게 왜 기업들이 아이데오에 열광하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그는 "우리는 재무, 회계, 마케팅 시각으로 기업을 해부하는 MBA와 달리 인간을인류학적 관점에서 연구한다"고 말했다.

P&G도, MS도, 삼성도, SKT도 모두가 찾아가는 곳. 

천장엔 자전거가 매달려 있고 회의는 바다가 보이는 bar에서… 

예쁘게만 보이는 디자인은  더이상 디자인이 아니다.

역사학, 건축학, 엔지니어링 전공자들이 머리와 가슴으로 만든 명품  세상을 바꾼 혁신은 부둣가 창고에서 그렇게 태어나고 있었다. 

아이데오는 곧 아이디어다.

 


▲ 전세계 '이노베이션 공장'이라 일컫는 아이데오의 사무실엔 자전거가 사무실 천장에 높이 걸려있다.

한 직원이 장난삼아 통근용 자전거를 천장에 걸어놓았는데, 이게 전통으로 굳어졌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사풍(社風)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 아이데오 제공

 

'전세계의 이노베이션 공장'으로 일컬어지는 아이데오(IDEO)의 본사는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인 팔로 알토(Pal o Alto)에 있다.

그러나 아이데오 측은 기자에게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방문을 권했다.

아이데오의 특징을 더 '맛나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팀 브라운(Brown) 사장도 이곳 지사장 출신이다.

이 회사는 전세계에 8개의 사무실이 있지만 직원은 50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P&G, 펩시콜라,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줄을 지어 찾아온다.

P&G의 앨런 래플리(Lafley) 회장은 이노베이션의 비결을 찾기 위해 전 임원을 아이데오의 캘리포니아 사무실로 보내 하루 동안 몰입 교육을 시키기도했다.

아이데오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유명해졌나?

아이데오의 디자이너 3명이 기자에게 성공 사례를 설명해 주었다.

크리스틴 헨드릭슨(Hendrickson), 다나 조(Cho), 선진 량(Ryang)이다.

모두 디자이너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만, 경력은 다 달랐다.

각각 마케팅과 건축학, 역사학을 전공했다.

미대를 나온 사람만 디자이너가 된다는 상식을 깨는 아이데오의 창의력 양성 노하우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 샌프란시스코 베이와 연결돼 있는 베란다.

직원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회의를 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바다 건너편이 오클랜드다.

사진 오른쪽은 주방이다.

일하는 중 주방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 먹을 수도 있다. / 아이데오 제공


3명의 디자이너는 먼저 일본의 자전거 부품 업체인 시마노(Shimano)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시마노는 2005년에 고민을 들고 아이데오를 찾아왔어요. 한때 1억610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이 자전거를 탔지만, 사람들이 갈수록 자전거를 외면하고 있다는 고민이었죠. 곧장 건축·기계공학·마케터 등의 배경을 가진 아이데오 직원 5~6명이 한 팀이 됐고, 이들은 자전거 판매점과 자전거 시장에 나갔습니다. 자전거 판매점원도 돼보고, 소비자 입장에서 자전거를 사보기도 했어요. 50명 소비자를 집중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소비자들이 자전거를 싫어한다기 보다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자전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자전거 점포에 가 보면 새로운 기어 등 처음 들어보는 옵션을 설명하는 점원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통해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염두에 없었던 겁니다."

현장 관찰에 이어 팀원들의 브레인스토밍이 끝없이 이어졌다.

토의 끝에 팀원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는 단순하고, 편안하고, 전통적인 디자인이면서 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었다.

새 자전거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선 허리를 깊이 숙이지 않고 편하게 탈 수 있도록 핸들을 높였고, 올라 타기 쉽게 크로스바는 낮췄다.

기어는 수동이 아니라 자동으로 고쳤다.

소비자들은 기어 변환을 귀찮게 여기고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기어 몸체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청바지에 기어의 기름이 묻을 걱정이 사라졌다.

브레이크는 손으로 작동할 필요가 없이 페달을 뒤로 돌리면 걸리도록 했다.

 


▲ 세계적인 자전거 부품회사 시마노가 아이데오와 협력해서 새로운 자전거 모델을 내놨다.

사진 속 자전거는 시마노 제의로 만들어진 트렉(Trek)사 제품이다.

페달을 뒤로 돌리면 브레이크가 작동되고 예전보다 핸들이 높아졌다.

시마노는 랄레이(Raleigh), 트렉(Trek) 등 세계 대형 자전거 제조회사들에 새 모델을 제안했고, 최근 1~2년 사이에 신제품들이 나왔다.

다나 조 씨는 "이 새로운 디자인의 자전거는 전세계로 확산 중"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사례는 쇼핑카트다.

지난 2000년 미국 ABC의 인기 뉴스쇼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Nightl ine)은 아이데오를 상대로 색다른 실험을 했다.

쇼핑센터에서 사용하는 카트(cart)를 5일 만에 아주 새롭게 디자인해 달라고 주문한 것.

그날 아이데오의 엔지니어와 산업디자이너, 심리학, 건축학, 경영학, 언어학, 생물학을 전공한 직원들이 팀원으로 선발됐다.

이들은 그날로 매장에 가서 직접 고객이 돼 보고, 매장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다시 돌아와 한 일은 브레인스토밍.

새로운 카트는 상상을 깨뜨렸다. 새 카트는 여섯 개의 바구니를 끼워 넣을 수 있도록 개방 구조로 만들었다.

카트를 세워놓고 바구니만을 들고 매장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롤러 코스터와 유모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카트에어린이 의자도 만들어 넣었다.

컵 홀더 두 개를 달고, 카트를 옆으로 밀 수 있는 뒷바퀴도 달았다.

방송이 나간 뒤 아이데오 전화기는 불이 났다.

미국 전역의 사업가들로부터의 걸려온 문의 전화였다.

 

■ T자형 인재가 경쟁력의 원천

 

 

작은 거인(巨人) 아이데오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팀 브라운 사장은 경쟁력의 원천은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가 원하는 인재는 전문가임과 동시에 보다 인간을 두루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를 'T자형 인재'라고 부릅니다. 전문적인 디자인 기술에 머물지 않고, 인간에 대한 다양한 교양을 지니고, 또 이를 종합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 아이데오의 이노베이션 방법론을 요약하면 무엇인가요?

 

"인류학적 접근 방법입니다. 인간지향적인 접근 방식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야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맥킨지나 BCG 같은 컨설팅 회사는 재무나 회계, 마케팅 등 MBA(경영대학원)의 시각으로 기업을 해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비자들이 기업과 상품을 바라 보는 시각 그 자체를 추구합니다."

 

인류학적 접근은 관찰에서 시작한다. 남태평양 문화를 연구한 마가렛 미드 등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아이데오의 창업자 톰 켈리(Kelly)는 저서 '이노베이터의 10가지 얼굴(The ten faces of innovation)'에서 인류학적 관찰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만약 기차역에서 청량음료를 더 팔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려면 기차역에서 서성거리는 잠재 소비자들을관찰해야 한다. 문화인류학적 시각으로 살핀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플랫폼에 서서 고개 너머로 음료수 매점을 바라보고, 손목시계를 바라보다가 기차가 들어오는지 살피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승객들이 뭔가 마실 것을 사고 싶은 욕망과, 기차를 놓치고 싶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청량 음료 판매대 옆에 커다란 시계를 갖다 놓는다면? 승객들은 시계도 보고 동시에 음료 판매대로 볼 수 있다. 결국그 기차역의 음료 매출이 상승한다."

 


▲ 미국 ABC방송에서 의뢰해서 나온 쇼핑카트. 6개의 바구니를 카트 안에 끼워넣을 수 있게 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관찰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일"

 

- 앞으로 아이데오는 얼마나 커질 것으로 보시나요?

 

"몇 년 전만 해도 직원이 100명뿐이었습니다. 주문이 늘면서 지금은 어느새 500명으로 늘었어요. 우리 회사의 실적은 직원들의 능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지금도 수백 개에 달하는 경영대학원(MBA)에서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지만, 우리가 찾는 T자형 인재를 찾기는 정말 힘듭니다. 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디자인 스쿨은 굉장히 적고요. 우리는 성장보다는 성장을 일으킬 수 있는 직원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이데오의 입사 경쟁은 치열하다.

지난해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3000여 명이 지원서를 냈다.

아이데오는 대학이나 대학원을 갓 졸업한학생이 아니라, 관련 업종에서 실적을 낸 인재를 뽑는다.

 

 - 요즘 인재 시장에 나오는 비즈니스스쿨 졸업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MBA는 경영 과정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창의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수학적 논리에 의한 의사 결정은 성공을 거두기 힘듭니다. 하지만 요즘 MBA의 커리큘럼도 많이 바뀌는 것으로 압니다. 교과 과정에 이노베이션 관련 내용이 늘어났습니다. "

 

 


▲ 삼성이 아이데오와 협력해서 만든 LCD 모니터.

공간을 잘 활용하고 고급 이미지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팔로 알토, 시카고, 런던 등 전세계 500여명의 직원들 중에 MBA 출신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신 산업디자인, 건축학, 역사학, 엔지니어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팀원들이 나름대로의 배경을 바탕으로 관찰하고 의견을 내며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간다.


팀 브라운 사장 본인 역시 MBA 출신이 아니다.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했다. CEO가 되려면 MBA를 가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나를 보라"고 했다.

 

- 디자인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은 물론이고 인간의 본성을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세상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각자 어떤 점을 느끼는지를 잘 이해해야 하고요.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 당신이 겪은 경험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최근 몇 년간 강한 인상을 받고 있는 곳이 인도입니다. 첸나이, 뭄바이, 벵갈루루 등을 두루 다녔습니다.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최근 수년간 인도 사회에 엄청난 이노베이션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각적인 면에서도 볼 게 많습니다. 사원에 가 수천년 전에 만든 불상(佛像)을 보고 느낀 게 많았습니다. "

 

"그토록 공부시키면, 창조적 발상이 나올까요?" 

 

■ '아이데오'CEO 팀 브라운이 보는 한국 


아이데오는 한국에도 고객 기업이 많다.

팀 브라운 사장은 한국과 한국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방과 후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수학, 영어 등 과외 공부를 시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에게 딸이 있는데, 학교에서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방과 후에는 되도록이면 지적으로 탐구하고 각종 경험을 쌓도록 기회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대로 놔두는 거지요. 그래야 경험을 넓힐 수 있고 창의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너무 타이트하게 아이들을 공부시키면 기존 사회 구조에 몰입되고 맙니다. 이미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교육 방법이 바뀌고 있습니다. 예전의 꽉 짜인 학업 위주의 교육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체제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 한국 고객들도 많이 오나요?

 

"LG, 삼성, SKT, 아모레퍼시픽,현대카드 등과 일했습니다. 한국 기업의 특징은 대부분 한창 글로벌화되고 있는 중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많은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삼성 등 한국의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 회사들도 디자인 이노베이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세계 공통의 현상입니다. 유럽, 미국, 아시아의 서비스 기업 모두가 디자인 이노베이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

 

- 한국 기업들에 느낀 점이 있다면?

 

"한국 기업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넘칩니다. 한국 기업인들은 이곳에 오면 큰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또 다른 아시아 기업과 달리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걸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중국 기업인을 만나보면 그들은 의외로 일본 기업이 아니라 한국 기업을 존경한다고 말하며 삼성 등 한국 기업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 기업의 장점은 두 가지입니다. 스피드,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 한국 기업들에 조언을 한다면?

 

"기업들이 당면한 문제는 진짜 고객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들이 직면한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단순하게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엔지니어, 마케터, 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모두 협업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

 

- 한국에도 지사를 차릴 계획이 있나요?

 

"누가 알겠습니까? 언젠가 열지 모르지요.(웃음)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이 아이데오를 찾아오는 것은 글로벌 시장 공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곳 캘리포니아가글로벌 시장을 연구하기에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국내 시장 공략을 위한 한국 기업들의 요구가 많아진다면 (한국에 지사를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원 대기실, 프라다 탈의실까지 바꿔버렸다 

 

■ '아이데오'의 서비스 디자인 

 

디자인의 영역은 상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병원·금융회사·통신회사 등 서비스 기업들이 고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는 데도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른바 '서비스 디자인'이다.

다만 결과물이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나는 상품 디자인과 달리 서비스 디자인은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 학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사례를 들어 보자.

2003년 미국의 대형 의료기관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는 서비스 개선 방법을 찾기 위해 아이데오를 찾았다.

아이데오 프로젝트 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품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소비자(환자) 관찰이었다.

스스로 환자 입장이 돼서 병원 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데오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접수 창구나 대기실에서 엄청난 불편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어린이나 노인, 이민자들처럼 보호자가 필요한 환자들이 병원을 방문할 경우 환자와 보호자가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점도 문제였다.

환자 혼자 진찰실에서 반나체로 20~30분간 누워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아이데오는 보다 편안한 대기실, 그리고 환자와 가족 3~4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보다 큰 진찰실을 제안했다.

아이데오는 또 간호원들의 교대 근무 때문에 환자들이 겪는 불편도 눈여겨봤다.

A간호원에게 이미 "등이 아프다"고 했는데, 교대 근무로 새로 들어온 B간호원에게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아이데오는 환자 정보를 인수·인계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을 제안했다.

1991년 '데이빗 켈리(Kelley) 디자인' 등 3개의 디자인 회사가 합병해서 아이데오를 설립할 당시엔 상품 디자인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아이데오는 점차 금융 상품 제안, 공공기관 캠페인, 의료 기관 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으로 디자인 개념을 넓히고 있다.

아이데오의 작품 중에는 명품 브랜드 프라다(Prada) 뉴욕 대형 매장의 드레싱룸도 있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이 옷을 입어보기 위해 드레싱룸에 들어가면 '매직 거울'을 만난다.

그곳에 장착된 카메라는 손님의 뒷모습을 촬영해 4초 뒤에 보여준다.

새 옷을 입은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서 거울을 향해 고개를 힘들게 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T자형 인재

 

특정 분야의 전문가임과 동시에 자신과 무관한 다른 분야까지 폭넓은 지식을 보유한 사람을 말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공학박사 등이 대표적이다.

알파벳 T자 모양처럼깊이뿐 아니라 폭도 넓어야 한다는 의미다.

자기 분야는 잘 알지만 다른 분야의 일은 모르는 'I'자형 인재와 대비된다.

GE, 도요타, 삼성 등 세계적인 기업들은 T자형 인재를 핵심 인재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5 현제  (0) 2010.09.18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0) 2010.09.15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2010.09.08
Posted by WN1
,


백과사전에서의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시(Psychopathy)는 인격적 결함의 일종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 중의 하나이다. 원인은 뇌의 전두엽의 이상이 오는 것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Psychopath)라 부른다.


확립

19세기 프랑스 정신과 의사 필리프 피넬이 사이코패시 증상에 대해 최초로 저술하였고, 192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 슈나이더가 사이코패스의 개념을 설명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는 사이코패스 판정도구(PCL-R)를 개발하고 '진단명 사이코패스'라는 책을 저술했다.

 증상

사이코패스들은 감정을 관여하는 전두엽이 일반인들처럼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데 매우 미숙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해아리지 못해 이기적이며, 대단히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미국의 경우, 사이코패스의 인구가 500만 명 정도 되는데 그중 살인자는 몇만 명뿐이다.) 폭행이나 상습 절도, 강도같은 범죄를 우발적으로, 연속적으로 일으켜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에 매우 능하고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으며 곧바로 다른 거짓말을 생각해내기도 한다. 뻔뻔하게 어떤 말이든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기 때문에, 매우 무식한 사람이라도(사이코패스는 대체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충동적인 성격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을 막는다.) 아주 박식하고 매력적이며 유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주어진 환경적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한다. 그렇기때문에 정치계나 업계의 상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계산적인 행동과 표정과 말투로 사회에서 능숙히 섞여지내고 환경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가 달라 범죄를 했을때만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보통 사이코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 라 부르기도 한다.

 사이코패스의 대표적 사례

대한민국에서는 대표적으로 연쇄살인범 유영철정남규, 강호순, 김윤철, 보성 연쇄살인 어부 오종근, 영암 연쇄살인범 이향열 등이 있다. 그들은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28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1]


psychopath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psychopath)' 는 독일학자 슈나이더가 1920년대에 소개한 개념이다.

독일어 발음으로는 '프시코파트' . 간단히 말해 '성격 탓으로 인해 자신.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병질(精神病質)' 을 말한다

 

"사이코패스"라는것은 쉽게 설명하자면 A가 B라는 자신과 아무관계도 원한도 없는 자에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정도로 난폭한 행동을 취하며 폭행을 했다던가 눈을 돌리고 싶을정도로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를 했다거나 한마디로 어떤 사회악적인 행위를 태연히 벌리면서 그행위에 대한 죄책감과 상식적인 도덕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흔히 아무런 악의도 없는 순진한 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태연하게 뜯어내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던가 어린아이가 연못의 개구리를 보고 커다란 돌을 던져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심리상태에서 좀더 추악하게 발전한듯한 느낌이랄까..

 

 



 

얼마전 유영철이 죄없는 여인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고도 그 잔인하고 추악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자신이 "왜?"내가 뭘 잘못했는데?""그냥 여인들이 미워서 그랬는데 어쩌라구"등의 죄책감이 결여된 태연한(난 솔직히 유영철의 이런심리에 구역질부터 났다.)

태도를 일관하여 많은 사람들의 충격을 터뜨리게한 작태도 사이코패스에 포함된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건 우리 사회에서의 얼마나 많은 사이코패스심리가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이순간 어디에선가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보이며 죄없는 급우나 학우를 폭행하고 태연히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길거리에서 배고파하며 끙끙거리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잔인하게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역시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넘쳐나는 엄청난 양의 미디어와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사회의 썩은 모습의 단면....

우리 아이들은 요즘 너무나 무방비하게 이런 어두운 경로를 접하고 노출되며 자신도 모르게 쇄놰당한채 결국 인간이 가져야할 지극히 정상적인 도덕감을 결여당한채 성장하고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악함"이라는 심리를 가진채 사이코패스의 한부분으로 자라버리는건 아닐까? (물론 그저 단순하게 정신병적인 측면에서 볼수도 있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길가는 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하고 살인한채 유기해서 길거리에 버린다던가 등의 살벌하고 무서운 뉴스가 매일 쏟아져 나온다.역시 사이코패스의 한단면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어쩌면 이 사이코패스라는 심리는 우리 사회 모든 사람들에게 어둡게 도사리고 있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죄를 지어놓고도 도덕감을 구별하지 못한채 태연히 웃어가고 웃어가며 길을 걷는 모두의 모습, 넘쳐나는 매스미디어의 홍수속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며 자라나고 썩은 사회의 모습을 지켜보며 성장해야하는 아이들..

 

 이 사이코패스를 보이는 범죄자들의 대부분은 유년기에 어둡고 어두우며 끔찍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입은채 냉혹한 사회속에서 절망한채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쉽게 말해 부모에게 상상하기도 끔찍한 폭행을 매일매일 당하며 울음을 터뜨린채 하루 하루를  겁에질려 보내야만 했던 아이들같은 경우 자라나서도 자신의 아이에게 당연한듯 폭행을 일삼는 경우도 사이코패스의 일종이라고 봐야한다.)

 

나는 가끔 우리가 살아가는 이사회가 너무나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때가 있다.

내옆을 지나가는 사람도 이런 심리를 지녔을테고 나역시 사이코패스 심리를 지닌채 태연히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이기도 할테니.

 



 

이 사이코패스중에는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라는 또다른 모습의 범죄도 존재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유없이 남을 괴롭히면서 자기만족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혹시 사이코패스일 수도... 이들의 전반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봅시다.

 



 

사이코 패스에 대하여

 

 

1. 사이코패스의 원인은 무엇인가?


정확히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를 종합해 보면 유전적인 면과 환경적 측면이 모두 주요한 요인인 것으로 추측된다. 유전적인 측면에서는, MAOA라는 유전자의 활성화 정도가 낮은 경우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의 분비가 감소하게 된다. 세로토닌은 전두엽에 작용하는 호르몬 요소들 중 하나로서 전두엽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치고, 공격성과 밀접한 상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세로토닌이 감소하면 전두엽의 활성화 수준이 낮아지고, 그에 따라 공격성은 증가하게 된다. 세로토닌 분비를 통제한 쥐와 정상 쥐를 같은 장소에 넣고 관찰한 결과, 세로토닌 분비를 차단한 쥐가 정상 쥐를 죽을 때까지 공격하는 것이 관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종단연구를 한 결과는 MAOA유전자가 사이코패스의 원인일 것이라는 점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낮은 MAOA유전자 수준이 사이코패스와 정적인 상관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유전적 측면을 해석할 때 주의해야할 점과 마찬가지로 MAOA가 사이코패스의 원인이라고 확정짓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유전적인 측면만으로는 사이코패스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관련 연구자들은 MAOA의 낮음이 사이코패시를 발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적인 속성을 가지며, 유년기 학대 경험, 범죄 경험,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적 조건 등의 요인들(기타 범죄자들의 환경 요인들과 유사하다.)과 유전적 측면이 상호작용하여 사이코패스를 만들어낸다는 설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2. 사이코패스의 특징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한마디로 R. Hare박사의 말대로 "양심이 없다. Without consciousness"일 것이다. 이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놀랄 만큼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무관심하다. 타인의 감정상태를 추론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져서 사람의 표정을 제시해 주고 그 사람의 감정을 추론하는 능력을 테스트해본 결과 사이코패스 집단은 일반 집단에 비해 현저히 낮은 추론 수준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무감각하고 무책임하게 타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게 하는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동정심도 없다. 또한 타인들과의 정서적 유대도 잘 맺지 못한다.

반면 자신의 감정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무척 예민하게 반응한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잔혹한 반응 특성을 보이며, 감정적 폭발을 보여 폭력적인 행동 특성을 나타낸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관심이 깊다. 이기적이고,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거리낌없이 한다. 이들에게 있어 타인들(심지어 가족들조차도)은 자기 이익의 도구일 뿐이다. 성적 측면에서도 매우 문란하여 아무하고나 되는대로 관계를 가지려고 한다.

사이코패스들의 언변은 유창하나, 자세히 들어보면 앞뒤가 혼란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검사의 자백 요구에 대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아, 내가 안그랬다니까! 아...젠장...그 때 그자식의 머리를 날렸어야 하는데"라고 하는 경우 등), 이와 관련한 신경학적 원인 중 하나로 추측되는 것이 바로 양측성 언어장애이다. 사이코패스의 뇌를 fMRI로 촬영, 관찰한 결과 이들은 언어 활동을 할 때 양반구의 측두엽이 모두 활성화되는 특징을 보였다고 한다(측두엽에는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신경계가 집중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좌측두엽이 언어 기능을 담당한다.). 양반구의 언어 활동에의 동시 작용으로 인해 모순적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생 설계가 매우 거창하고 비현실적이며, 인생 목표를 몇십 차례고 바꾸는 면도 있다. 장기적인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며(이건 순전히 필자의 추측인데, 전두엽 활성화 수준의 낮음이 장기적 계획을 짜는 사고 능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두엽은 장기적 목표를 조직하는 사고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3. 사이코패스와 일반 정신질환자들의 주 차이점


사이코패스와 일반 정신질환자(정신분열, 공황 등)의 주요한 차이점은 사이코패스들에게서는 비합리적인 사고, 망상 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언변이 유창한 편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평소에 사이코패스들의 이상한 점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4. 사이코패스 범죄의 특징


유영철이 희대의 사이코패스로 알려지면서 사이코패스들이 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이들이 주로 저지르는 범죄는 절도와 사기이다. 특히 자신의 유창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한다. 다음으로 강간이 많으며, 살인은 생각보다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들이 주로 사이코패스라는 점은 비교적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범행 대상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보다는 주로 모르는 타인들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사이코패스의 범행 동기는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위하는 것이 주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에 비해 감정적인 측면(폭발적 분노 등) 때문에 나타나는 범죄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5. 사이코패스 진단은?_ PCL-R Factors 척도


사이코패스를 판별해내는 진단 기준은 R. Hare가 제작한 PCL-R(Psychopathy CheckList- Revised)척도를 사용한다. 3점 척도(0, 1, 2), 20문항, 40점 만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기보고식 설문 형태가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자에 의한 관찰 및 인터뷰, 생활 기록 조사 등을 통해 점수가 기록되게 된다. 40점 만점 중 30점 이상의 경우(북미의 경우) 사이코패스로 판정하게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PCL-R의 재범예측률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나며, 반복 측정 시에도 높은 수준의 신뢰도를 보이고, 횡문화적 일관성도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사이코패스 진단 도구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이야기를 Hare 박사의 강연 때 직접 들었던 것이고, 따라서 이 말은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횡문화적 일관성은 Hare박사가 주장한 대로 안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매우 부정적이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으며, 치유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는 점 때문에 낙인stigma으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단을 내릴 때에는 충분한 훈련을 받은 전문가에 의해 주의 깊게 관찰된 후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냉담하거나 이기적인 특성을 보인다고 해서 특정 인물을 "사이코패스"로 낙인찍는 일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6. 해결책은 없는가?


정말 난감하고 절망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현재까지 시도되었던 사이코패스 치료 프로그램 같은 것은 모두 쓸모가 없거나, 심지어는 부적 상관을 나타내기도(즉, 오히려 프로그램 후 재범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이코패스들이 프로그램을 냉담하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프로그램 내용을 범죄의 도구로 이용하게 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사이코패스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로서는 사이코패스로 성장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방법 외에는 뚜렷한 대책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7. 우리 주위에도 사이코패스가?


Hare박사에 의하면 사이코패스는 전체 인구의 1%가량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Hare박사가 강연 때 농담조로 "여러분들이 지금 300명 있네요. 당신들 중 3명은 사이코패스일거야." 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확률을 받아들인다면 주위에 사이코패스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셈이다.

 

 

 

- kbs, "악의 가면, 사이코패스"
- R. Hare/조은경, 황정하 역, "진단명: 사이코패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73779');



-----------

wn1 - 아래의 5단계는 태어난 사이코패스일 수 도 있고, 만들어진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는 두 가지의 사이코 패스가 모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최민식씨가 연기한 사이코 패스는 아마도 선천적인 사이코 패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병헌 씨가 연기한 사이코패스는 후천적인 사이코 패스 일 것입니다.

또다른 영화 '익스페리먼트'에서는 짐 바르도 교수의 스탠포드대학 감옥실험에서의 과정을 영화로 만들어 냈는데,, 두 가지 버전의 영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독일인지 러시아인지 헷갈리는데요.. 그곳에서 만든 익스페리먼트가 있고, 헐리웃에서 만든 익스페리먼트가 있습니다.

두 가지 영화를 보면 아무래도 전자가 더 낳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해석의 차이가 있는데,, 짐 바르도 교수의 실험의 의도인 인간의 관념의 변화를 잘 읽어낸 영화는 첫 번째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헐리웃 영화는 아무래도 피튀기는 액션들이 많더군요...

사실 사이코패스에 대해 조사해보기 전에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는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누가 악마일까? 에서 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구심들...그리고 얇은 지식으로 내린 결론은 영화에서 이병헌씨가 연기한 인물이 '악마'이다 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들어진 악마의 악마성은 처음부터 가진 악마보다 더욱 악마스러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였고...아! 그럼 나 역시도 악마가 안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구나...

그러면서 아부가리브 교도소에서 미군들이 이라크인들을 학대하는 장면들이 떠 올랐고.. 그들역시 평범한 사람으로 군에 입대하여...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을 그렇게 만들건 정부와 군의 지침서에서 시작되었지만...

EBS에서 하는 다큐 중에 몇 가지도 떠 올랐습니다..인간의 두 얼굴 같은 내용인데요...

사람은 누구나 교육의 유무와 는 상관없이상황에 의해 좋을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는것...

참....아이러니 합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교육으로 무장을 하더라도...그럴 수 있다는 것이..

'나'라는 자신이 무섭기도 하고... 저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 볼 수있을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물론 한국은 일제시대를 통해 비인륜적인 만행을 겪었기도 하였지요... 그 당시 일본인들은 참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만행을 저질 렀는데... 과연 지금의 우리가 그러한 일본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떠했을까... 깊이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사이코패스가 되는 5가지 단계

 

 

 1. 우월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진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흔한 유형이 여성을 증오하여 불특정한 다수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살해하는 여성혐오주의적인 사이코패스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유명철이나 강호순처럼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미국의 사이코패스도 불특정한 여성을 대상으로 살인행각을 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호순이나 유영철같은 불특정한 다수의 여성들을 살해한 사이코패스는 대부분 남성우월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여성들에게 큰 상처를 받아 좌절하게 되어 극도의 분노를 느껴 사이코패스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영철의 경우는 아내의 변심으로 상처를 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것으로 알려졌고, 강호순의 경우는 사이코패스가 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여성을 연쇄살해한 다른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볼 때 여성에게 상처를 받아 사이코패스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2.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타인의 탓으로 돌린다.

 

 유영철의 경우, 아내에게 상처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내에게 상처받아 연쇄살인행각을 벌인 그를 볼 때 과연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남성우월주의적인 사이코패스를 어떤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이코패스들은 성격적인 결함이 있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책임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피해의식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요.

 

 

 3. 병적인 피해의식에 빠져 자신이 불행해진 원인을 불특정한 다수에게 찾는다.

 

 사이코패스의 공통점은 피해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이코패스를 보면 자신이 가해자이면서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말하여

병적인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성혐오주의적인 사이코패스는 자신이 잘못해서 아내나 연인을 떠나게 만들고도 아내나 연인이 변심해서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며 아내나 연인을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잘못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불 수 있지요.

 사이코패스는 병적인 피해의식으로 자신이 불행해진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습니다.

 결국 병적인 피해의식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믿어지는 불특정 다수의 계층에 대해서 살인총동을 느낄 정도의 극단적인 증오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지요.

 

 

 4.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 분노가 폭발하여 살인충동을 느낀다.

 

 피해의식에 젖은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불행을 불특정 다수의 계층의 탓으로 생각하여 불행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갈수록 증오심이 깊어져 살인총동을 느끼게 됩니다.

 여성혐오주의적인 사이코패스의 경우, 불행한 결혼생활이나 여자친구에게 차였거나,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랑을 거절당했을 때의 상처가 여성 전체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바뀌면서 매력적인 여성들을 보면 증오심이 불타오르게 되지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여성과 만난 적도 여성들을 동일시하여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살인충동을 느끼거나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여성일 연상시키면 살인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5.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운 후에 실행에 옯긴다.

 

 사이코와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이코는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사이코패스는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에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도 사이코패스의 범행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치밀한 범죄로 증거조차 남지 않아 아직도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지요.

 미국에서도 수많은 연쇄살인이 미해결 수수께기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이코패스는 증거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의 치밀한 범죄를 계획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에 빠진 사람이 좌절한 후에 피해의식에 빠져 사이코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성우월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남자가 사이코패스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이러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교화시키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잘못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판단능력을 길러주어야 될 것 같습니다.


-----------









#.소시오패스




----------

사이코패스의 10가지 공통적인 특징

사이코패스의 대다수는 남자입니다.

 여자 사이코패스는 그리 많지 않지요.

 사이코패스는 남성우월주의자에 여성혐오주의자인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피해의식이 강해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고 여성을 가해자로 여겨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이코패스는 이성교제 실패나 결혼 실패를 통해서 여성을 이유없이 증오하다가 심해지면 사이코패스가 되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범죄를 계획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와 사이코의 차이점은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범행을 자제할 능력이 있지만,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질로 죄의 책임을 지지만, 사이코는 자신의 범행을 자제할 능력이 없어 죄를 지어도 죄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성형만 사이코패스도 있는데, 감화받아 정상인이 될 수도 있고 폭발하여 사이코패스형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를 감성적인 교육으로 감화시켜 범죄를 사전에 예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에 알려진 사이코패스를 통해서 사이코패스의 10가지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이코패스의 10가지 공통적인 특징

 

 

 1. 남성우월주의자다.

  

 사이코패스의 대부분은 남성우월주의자입니다.

 사이코패스는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변심하는 여자는 죽어마땅하다는 식의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경우가 많은데,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고가 무서운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2. 여성혐오주의자다.

  

 여성혐오주의자는 여성 전체를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남자를 말하는데, 여자를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인 여자가 변심하여 남자친구를 배신하는 것을 마치 천륜을 어긴 범죄행위처럼 간주하여 여자친구나 아내가 변심하면 배신심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사이코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실제로 사이코패스를 보면 여자친구나 아내의 변심에 이성을 잃고 사이코패스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유영철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유영철은 아내의 변심에 무고한 여성들을 연쇄살인했는데, 여성혐오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여성혐오주의자는 길가다가 여자가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신문이나 티비나 인터넷같은 매체를 통해 여자가 다친 뉴스를 보면 통쾌해 하거나 인과응보라는(아마도 남자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황당한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3. 성도착증이 있다.

 

 사이코패스는 성도착증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성도착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여자의 속옷이나 구두, 스타킹 등 여성들이 지닌 물건에 이상 반응을 하는 페티쉬즘, 야동에 집착하는 야동증후군, 훔쳐보는 것에 집착하는 관음증 등 정상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정도로 뭔가에 집착하다가 어디선가 본 것을 모방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4. 새디즘이 있다.

 

 새디즘은 이성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여 성적인 만족을 얻는 비정상적인 성욕을 말하는데, 이러한 성향이 있는 사람을 새디스트라고 합니다.

 새디즘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사이코패스는 새디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코패스는 피해자를 괴롭히면서 쾌감을 얻는 새디스티인 경우가 많지요.

 

 

 5. 완전 범죄를 꿈꾼다.

 

 사이코패스와 사이코와 가장 큰 차이점은 사이코패스는 치밀한 범죄를 계획한 후에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사이코는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이코냐 사이코 패스냐는 범죄가 충동적이었느냐 계획적이었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는 경우가 많지요.

 

 

 6.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병적으로 강하다.

 

 사이코패스는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 병적으로 강해 여자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분하고 억울해서 일탈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여자가 거부하면 몹시 격분하거나 여자에게 고백했을 때 거절당하면 몹시 화를 내는 남자가 있는데, 이런 것이 심해지면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 여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면서 범죄를 저지를 때가 많지요.

 가끔 뉴스를 보면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거절한 여자를 폭행해서 쇠고랑을 차는 뉴스를 볼 수 있는데, 남자로서의 병적인 자존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7. 성격장애가 병적으로 심하다.

 

 사이코패스는 조그만 일에도 흥분하여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장애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는 이러한 성격장애가 있는 남자를 좋아할리가 없기 때문에 사이코패스는 여성들의 외면을 당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자신의 성격장애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성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사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8. 대단히 폭력적이지만 위선적으로 폭력성을 감춘다.

 

 사이코패스는 툭하면 폭력을 휘두들 정도로 폭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폭력적이지만 더 큰 범죄를 위해 폭력성을 감추기도 하지요.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대단히 폭력적이면서도 강호순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주변의 이웃에게는 친절한 남자로 기억되어 주변 여성들의 호감을 사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9. 피해의식이 병적으로 강하다.

 

 사이코패스는 가해자이면서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여자들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거나, 사회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거나, 주변 환경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거나, 가해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할 정도로 피해의식이 강하지요.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자신의 범죄를 남탓이나 사회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10. 자신의 범죄에 대해 죄책감이 없다.

 

 사이코패스는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자거나 피해의식이 강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죄책감을 가질 정도의 양심이 살아있다면 반인륜적인 사이코패스가 되지도 않았겠지요.

 자신이 범죄를 여성이나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기 때문에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질로도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생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대부분이지요. 

 

 

 모든 사이코패스가 이런 성형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사이코패스들은 위의 10가지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사이코패스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에게 상처를 받은 후에 병적인 피해의식을 가져 자신의 범죄를 복수의 개념으로 생각하여 반인륜적인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사이코패스의 출연을 막으려면,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정착되어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된 존재라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삐뚫어진 여성관을 먼저 바로 잡아야 될 것입니다.


----------------

영화 속 사이코 패스 유형 분석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을 뜻하며,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채기 힘든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은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 기능이 일반인의 15%밖에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범죄자보다 재범률도 높고 연쇄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훨씬 높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영철, 강호순 등이 대표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로 꼽힙니다.

평소에 친절하던 사람이 갑자기 짐승으로 돌변한다면? 극단적인 행동 변화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두려움을 주는 사이코패스들. 오늘은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와 그들의 행동 및 성격을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양들의 침묵 -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

한니발 렉터는 사이코패스들 중 가장 무서운 타입이 아닐까 싶습니다.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똑똑한 머리에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취향, 물 흘러가는 듯한 말솜씨까지 모든 걸 갖추고 있지요. 하지만 자신의 미학에 약간이라도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는 것(카니발리즘)을 즐기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최근 개봉작인 한니발 라이징을 통해 그의 어린 시절 및 사이코패스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2. 쏘우 - 직쏘(토빈 벨)

사람들을 폐쇄된 공간에 몰아 넣고 그들의 목숨을 잔인하게 앗아가는 살인마 직쏘. 그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은 정교하게 제작된 살인 트랩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트랩의 구조. 트랩을 설치함에 있어서도 직쏘는 한 번에 숨을 끊기보다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쏘우 1편 마지막에는 엄청난 반전도 있어 관람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죠.


3. 아메리칸 사이코 -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부와 명예, 외모까지 완벽한 미국의 상류층 신사 패트릭. 사실 그는 무차별적인 살인을 행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입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을 참을 수 없는 결벽증 증세에 모든 사람을 정장 브랜드나 보석 등의 값어치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보다 좋은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모습은 그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예입니다. 패트릭의 살인 행각을 통해 이 영화는 사람의 내면보다는 외면을 중요시하는 물질적인 사회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4. 검은집 - ?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누군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타인의 신체를 잘라내고 어떤 이득이 주어진다면 목숨을 뺏는 행동도 서슴치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고통에도 무감각하죠. 영화를 보며 내내 소름이 끼쳤는데 그것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 외 이질적인 존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를 만나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5. 공공의 적 - 조규환(이성재)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그는 어찌 보면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과도 비슷합니다. 다른 점은 패트릭이 정신병으로 인한 발작적인 살인을 하는 반면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냉혹한 살인을 즐긴다는 점입니다. 그가 범인이라 믿고 추격을 계속하는 강철중(설경구)형사를 인맥을 이용해 순경으로 좌천시키는 등 수사를 방해하며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갑니다. 결국 결정적 증거가 잡히며 처벌을 받지만 권력을 가진 사이코패스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6. 악마를 보았다 - 장경철(최민식)

최근 개봉한 '악마를 보았다'는 그 잔인성으로 더욱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극 중 김수현(이병헌)의 약혼녀를 살해해 복수의 대상이 되는 사이코패스 장경철(최민식). 그는 여성들을 성폭행한 후 토막 살해하고 여유롭게 기타 연주까지 즐기는 엽기적인 살인마입니다.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인육을 먹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도 있었네요. 여자들이 보기에는 참 두려울 것 같은 영화. 하지만 극단적인 잔인함과 스릴을 즐기고 싶다면 추천합니다.


------------

사이코패스 만큼 위험한 사회속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Sociopath)는 정신 장애의 일종으로, 자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소시오패스가 되는 데에는 '유전적 요인'도 있지만 '유년기 시절에 학습한 경험'으로 인해 습관처럼 굳어진 경우도 있다.

이들은 주변인들에 대해 기만적 & 비도덕적이고, 잔혹 & 무책임하며, 타인의 안전을 중요히 여기지 않는 데다가, 물건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꼬지를 해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 '양심실종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소시오패스들은 끈끈한 정이나 큰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뇌 구조가 일반인들과 다른 이들로, 타인과의 공감을 전혀 이뤄내지 못하는 '무공감자'들을 말한다. 소시오패스들이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난 것에 비해, 사이코패스들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막 나갈 때가 있다.

잔혹무도한 범죄자들을 향해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보다 그 수가 훨씬 많은 '소시오패스'는 25명 중 1명 꼴로 나타난다고 한다.[ 전세계 인구4% 정도 ] 우리 주변의 사회나 가정에서 '평범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면서, 탁월한 감정 조절 능력으로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은연중에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치는 소시오패스는 싸이코패스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자기 감정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선한 미소를 짓거나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자기 '본심'을 숨긴 채) 그들을 조종하여 해를 끼치곤 한다. 이러한 소시오패스들 중엔 남들보다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 나라 드라마 속 캐릭터에서 찾아보자면, 작년(2009년)에 방영된 <남자 이야기>에서 김강우가 열연을 펼쳐 보인 '채도우' 같은 인물이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다양한 재능과 천재적인 두뇌를 지니고 있으면서, 자기 주변인들에겐 대체로 친절한 모습을 보이며 뒤로 무서운 일을 꾸몄던 그 드라마 속 '채도우'는 사이코패스라기 보다는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사이코패스들은 대놓고 타인의 생명을 빼앗거나 눈에 띄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소시오패스들은 티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만의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주변인들을 괴롭힌다. 이들이 무서운 것은 다른 이들에게 파렴치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자신이 한 그 일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시오패스들 중엔 사회에서 나름 큰 능력을 발휘하는 상류층 인사 & 유능한 직업인들이 많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신이 이기기 위해 남을 잘 조종하거나 속일 수 있기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평소 땐 '선량한 모습의 가면'을 쓰고 정상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 내면엔 '남을 짓밟고 올라가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쳐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채 이를 정당화' 하려는 '소시오패스'들은 우리 사회에 은연중에 많이 분포되어 있기에,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주변인에게서 '자주 속임을 당하거나 이용 당한다고 느낄 때, 감정을 무시 당할 때, 모순된 언행을 자주 발견할 때, 그가 본인을 제외한 타인들을 모두 비난할 때, 끊임없는 자극만을 요할 때, 지능적으로 자신을 괴롭힌다 느낄 때,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도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등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가 '소시오패스'임을 한 번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큰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와는 조용히 인연을 끊는 것이 좋다..


----------

여자 사이코패스

 

2000년 5월 남편에게 수면제먹이고 핀으로 눈찔러 실명시킴        

2001년 6월 같은 수법으로 남편의 얼굴에 끓는 기름을 부어 화상입힘..        

2001년 9월 같은 수법으로 남편의 배를 주방용 칼로 찔러 상처 입힘.        

2002년 2월 같은 수법으로 남편의 배를 칼로 찔러 상처 입힘(남편 치료중 사망)        

2002년 11월 재혼한 남편에게 수면제 먹이고 눈 찔러 실명시킴..        

2003년 7월 어머니에게 수면제 섞은 주스를 먹인뒤 양눈을 주사바늘로 찔러 실명시킴        

2003년 11월 오빠에게 수면제 탄 술을 먹인뒤 양눈에 염산을 넣어 실명시킴        

2004년 4월 입원중인 오빠의 링거호스에 이물질을 넣어 살해하려다 미수에그침        

2005년 1월 실명한 오빠에게 수면제 탄 주스를 먹인뒤 불을질러 오빠와 남동생에게 화상을 입힘.        

2005년 1월 세들어 살던 아파트에 불을질러 집주인 사망시킴.        

2005년 2월 입원중이던 병원에 석유뿌리고 불을 지르려다가 미수에 그침        

 

현재 무기징역형 수감중...수감중 어떠한 반성의 기미 없다고함


Posted by WN1
,


심문받는 이라크포로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한 이라크 병사
속옷을 머리에 쓰고 고문받는 이라크 병사
얼굴에 팬트릴 덮고 고문받는다
항문에 유탄발사기의 탄두를 넣게하고 있는 모습
심문
고문실의 유혈
고문에 지쳐 쓰러져 있는 이라크병사
전기고문 당하는 이라크 병사의 모습


자신의 동료를 잃고 애도하는 미군 모습

이러한 화를 포로고문으로 돌린것이 아니라...
미군의 포로 고문 지침에 있었다는 것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한다..
포로 학대를 하던 미군들도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영화 '엑스페리먼트'에서나 스탠포드 감옥실험 에서 처럼 상황과 인간의 물화가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만들었다...



-----------

아래는 위의 내용과는 좀 다른 이라크 전의 참상 입니다...비위약하시거나 임산부, 노약자는 그리고 18세 미만은 보지 말아 주십시오....플리즈!!




다시경고 드립니다.잔인한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노약자 임신부 청소년은 보지 마세요 

 

 

 

 

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죽은 이라크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내용이 잔인해서 칼라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해 올렸습니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2010.09.08
아우슈비츠  (2) 2010.09.08
하인리히 법칙  (0) 2010.09.04
Posted by WN1
,


스탠포드 감옥 실험

        
        
        
“1971년 세계 심리학계를 뒤흔든 스캔들 ‘스탠퍼드 실험’이 독일에서 영화화되어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스탠퍼드 심리학과 필립 짐바도 교수가 주도했던 이 실험은 대학생 20명을 연구소에 설치한 가상 형무소에 수용, 열악한 환경에 던져진 인간의 심성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의 폭력이 난무하면서 실험은 조기 중단되고 말았다.영화의 무대는 쾰른의 가상 감옥, 일방적인 폭력에 맞설 의지를 잃어버린 인간의 무력감과,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잡으면 약자를 학대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내부의 악마성을 재차 확인하는 공포와 경악은 어떤 호러영화보다 더하다(씨네 21, No. 295)"        
        
        
        
        
얼마 전 한 영화 주간지를 보다 저의 시선을 붙잡았던 기사 한 토막입니다.        
        
        
‘스텐포드 실험’. 정확히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이라 불린 이 실험은 ‘인간의 휴머니티가 악(惡, devil)을 이길 수 있는가, 아니면 악이 인간의 휴머니티를 이길 것인가?’ 라는 주제로 1971년에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에서 시행된 실험입니다.        
        
        
과거 정신과적인 병력이나 범죄 경험이 없었던,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24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감옥 상황을 연출한 실험실내에서 절반은 죄수, 절반은 교도관의 역할을 하게 한 후 이들의 행동을 2주 동안 관찰하고자 했던 실험입니다. 그러나, 실험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관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이 매우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로 죄수들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이들로부터 반복적인 구타와 감금을 당한 죄수 역할의 참가자들은 심한 혼란감과 불안, 우울감에 휩싸여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수준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험 직후 이러한 결과가 학계에 보고되자 미국 사회는 심한 충격과 혼란을 겪었으며, 연구자와 실험실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실험을 이끌었던 스탠포드 대학의 Zimbardo 교수는 여러 TV 프로그램과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되었고, 출판계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제작되었으며 심지어’스탠포드 감옥 실험(SPE)‘이라는 이름의 락밴드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이 실험이 세간에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된 데는, 실험이 보여준 충격적인 결과외에도, 이것이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인간은 선한가, 악한가‘-을 과감하게 던지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실험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실험 결과에서 보였던 극단적인 폭력성과 집단성은 인간의 본성, 휴머니티가 실재하는가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했고, 어느 누구도 심지어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조차도 그가 놓여진 사회적 상황과 주어진 역할에 따라 너무도 쉽게 악마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마성에 철저하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헤어날 수 없는 무기력감과 무가치감에 사로잡힌 채 아무런 대항이나 저항조차도 일으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말많고 탈 많았던 그 실험이 영화화된다고 하는군요. 기실, 영화화에 대한 움직임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야 실현되는가 봅니다. 아마, 인간과 세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비젼을 기대하게 했던 21세기가 밝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는 폭력성과 광기적인 집단성에 대한 회의가 다시금 이 영화를 기획하게 했나 봅니다.        
        
        
        
“ 나는 내가 나의 정체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클레이라고 불렀던 사람, 그리고 이곳에 오는 것을 결정하고 자발적으로 이곳에 걸어들어 온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감옥(실험실)에 있으면서, 이것이 단지 실험이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이곳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대신 심리학자들이 운영하는 바로 감옥 그 자체라고 여겨졌다. 감옥에 있으면서, 나는 그 모든 결정을 했던 바로 그 사람, 이전에 나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고 그곳에 있던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 곳에서 나올 때, 나는 그저 416번, 바로 숫자 그 자체였을 뿐이었다 ”        
        
        
        
실험에 참여했던 한 참가자(그는 죄수 번호 416번으로 불리었던 피험자였습니다)가 실험이 끝난 후 고백한 내용입니다. 과연 한 인간을 이토록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시킨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정말 악마가 될 수도 있는 걸까요?        
        
        
        
        
        
        
        
스탠포드 감옥 실험 (1)        
        
        
        
        
지난 주말, 한 스포츠신문 뉴스란에 어떤 여자의 사진이 12장이나 올라있었습니다. 제목은 ‘12번의 감옥행 변천사’ 아마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왼쪽 상단, 10대 후반쯤 되는 앳된 소녀의 모습이 12번의 감옥행동안 퀭한 눈동자에 부스스한 얼굴, 한 줌의 마약을 삼킨 듯한 몽롱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네요 한 가정의 축복 속에 소중한 생명으로 세상빛을 보았을 그녀인데, 어느새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간 원인이 무엇인지, 이러한 변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지, 다시 범죄에 손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직업 교육이나 기타 프로그램은 없었는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명문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였던 Zimbardo 교수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이미 30 여 년 전부터 시작한 모양입니다. 특히 그는 교도소라는 사회적 격리 장치가 범죄자들의 재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지, 그러한 환경이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갖고 그 유명한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부터 2회 동안은, 이 실험의 전반적인 계획과 여러 실험 절차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실험의 시작        
        
        
1971년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의 Zimbardo 교수는 ‘교도소의 생활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광고를 지역 신문지에 내고 지원자를 모았습니다. 광고 후 70여명의 지원자가 연락을 해왔고, 이후 간단한 정신과적 면접과 성격 검사를 실시해서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병력이 있는 사람은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 이전에 범죄나 마약과 관련한 전과가 있는 사람들도 제외시켰죠. 이런 심사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24명의 실험 참가자가 결정되었고, 실험에 참가하는 대가로 하루에 15불 정도의 금액을 받기로 했습니다.        
        
        
        
우선, 선발된 24명에 대한 기본 프로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실험 참가자로 선발될 때 앞서 말씀드린 검사나 면접외에도, 참가자들간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가능한한 일반인, 보통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수준이나 지능, 건강 조건도 비교적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계층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동질적인 구성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한 집단은 교도관의 역할을, 다른 한 집단은 죄수의 역할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결국, 죄수냐 혹은 교도관이냐 하는 집단의 분류는 임의적인 것이었지, 결코 두 집단간의 유의미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실험이 진행될수록 이 두 집단은 정말로 놀라운 모습으로 다르게 변화해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차차 말씀드리죠.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환경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이전에 장기 복역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을 섭외해 필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건물의 한 쪽 복도 끝을 막아, 감옥 셋트를 만들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면 복도는 죄수(실제 죄수가 아닌 죄수 역할을 하기로 한 참가자들)가 거닐거나 식사, 운동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죄수들이 수감되는 방에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참가자들은 이곳이 진짜 감옥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눈을 가린 채 이곳으로 데려오게 되죠. 그래서 그곳이 스탠포드 대학내 임시로 만든 감옥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이 복도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나 시계를 놓지 못하게 해서,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소품들도 모두 감옥과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3개가 있던 감방의 반대쪽에는 매우 작아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어둡고 작은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험장소인 교도소가 다 만들어진 후에, 참가자들은 이미 협조가 요청된 경찰의 인도로 실험실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죄수역을 맡은 참가자들에게는 실험실이 급조된 교도소가 아닌 아닌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는 안내를 하고, 이를 위해 눈을 가린 채 데리고 옵니다.        
        
        
        
        
        
심리적 장치 (1) - 살충제 그리고 유니폼        
        
        
죄수들이 처음으로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감옥으로 안내되어진 후였고 이들을 맞는 사람들은 교도관(교도관 역할을 하기로 했던 참가자들)들이었습니다. 죄수들은 교도소로 인도되자마자 마치 실제인 것처럼 체계적으로 조사되었고 신체 검사를 위해 옷을 모두 벗고 나체인 채로 교도관 앞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일반 죄수들에게 하는 것처럼 이나 기타 해충을 잡기 위한 살충제(잘 아시죠? DDT같은 그런 약)가 온몸에 뿌려집니다.        
        
        
        
이 과정은 죄수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모멸감을 많이 느끼게 하는 행위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마치 해로운 무엇인양 온 몸에 살충제를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사실 이 과정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해충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현실적인 목적이외에 죄수들을 다루기 쉽도록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기도 합니다. 즉, 죄수들은 일반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멸스런 대우를 반복해서 받게됨으로써 스스로를 매우 지위가 낮고 무기력하며, 점차 그런 대우를 받아도 싼 가치없는 인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이들을 통제하고 가혹하게 대하는 교도관들은 전지 전능의 힘을 가진,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대해도 되는 권한을 가진 인물로 인식되게 됩니다.        
        
        
        
결국, 죄수들은 교도관의 권위에 복종하고 따르게 되며,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처우에도 그대로 따르게 됩니다. 반항할 힘을 잃게 되는 거죠. 인간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은 무력이나 다른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터득한 후 고안된 장치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장치는 사실 교도소에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일제 시대때 일본인들이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를 통치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했던 정책이 바로 이것이었고, 새로 전학 온 아이에 대한 텃새 역시 결국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온전히 굴복시키고 복종시키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죠.        
        
        
        
        
        
죄수들을 복종시키게 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이들을 모두 똑같은 외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똑같은 머리 모양과 똑같은 옷, 그리고 이름대신 번호로 불려지게 하는 것이죠. 이 실험에서도 그러한 유니폼을 입었는데 모양은 마치 임신복처럼 밑이 트인 원피스 형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옷을 입게 했고, 속옷은 입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똑같은 모양의 모자를 쓰게 했으며, 신발은 슬리퍼로 통일해서 신도록 했습니다.        
        
        
        
        
        
왜 유니폼인가?        
        
        
우리는 종종 모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생활하는 집단을 보게 됩니다. 대기업이나 군대, 학교등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여기에서처럼 교도소도 똑같은 유니폼, 죄수복을 입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우선, 이들의 개별성을 없애기 위함이겠죠. 그리고 워낙 많은 수의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니까, 다른 집단과 구분되게 그 집단만의 유일한 외양을 갖게 해서 보다 통제가 쉽도록 만드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유니폼은 우리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죠. 대기업이나 군대, 학교, 그리고 교도소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모두 철저히 위계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라는 것이죠. 회사는 부하직원과 상사, 그리고 군대는 당연하고 학교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도소는 죄수와 교도관 그런 식의 절대적인 위계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절대적인 위계, 권위와 그에 대한 복종이 갖추어져야만 굴러갈 수 있는 조직이라는 점이죠. 그럼 권위와 유니폼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유니폼이란 한 마디로 개인에 대한 개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개별성이 최소화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 심리학 실험에서 이 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연구 결과, 개별성을 갖지 못한 사람은 여럿이 아닌 혼자서 공적 장소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장하는 경향이 매우 적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개별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특히 권위자들이죠) 앞에 나서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장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지니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결국, 권위자의 지시나 명령에 대해 아무런 저항이나 주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게 될 확률도 높다는 거죠. 유니폼은 결국 복종을 이끌어내는 또다른 심리적 장치이며, 약자의 입장에 서게 하는 심리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실험 얘기로 돌아와서, 다른 일반 감옥에서는 잘 하지 않는 장치로 이들의 발에 족쇄를 채워놓았습니다. 이는 환경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들게 하기 위해서 마련한 장치였죠. 아침에 일어나도 여전히 족쇄가 발목에 채워져 있다면, 아! 시계가 없으니 아침인지도 모르겠죠. 그렇다면 정말 참가자들은 ‘여전히 나는 감옥에 있고 이 곳에서 달아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겠죠.        
        
        
        
        
        
심리적 장치 (2) - 교도관의 유니폼과 선글래스        
        
        
한편, 교도관 역할을 맡았던 참가자들도 교도관으로 변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는데, 이들도 모두 동일한 복장을 합니다. 카키색의 상하의에 목에는 호루라기를 메고 있고 경찰봉을 들게끔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도관의 상징처럼 아주 까만 선글레스를 쓰게 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유니폼은 앞서 죄수들과는 다소 다른 심리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즉, 죄수들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밑이 트인 엉성해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데 반해, 교도관들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복장, 그리고 권위를 표현하는 경찰 뺏지 등을 차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유니폼으로 인한 몰개성화가 이루어지지만 이는 오히려 약자라기 보다는 강자, 권위자로서의 몰개성화를 일어나게 하는 장치가 됩니다. 즉, 그 옷을 입음으로써 약자의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권위로 대변되는 일련의 파워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죄수들을 무시하거나 가해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바로 이 복장 때문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착용한 선글래스는 그런 권위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상징물입니다.        
        
        
        
진한 선글래스의 특징은 바로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차단성입니다. 이는 교도관들만이 쓰게 되어 있죠. 즉 죄수들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관찰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교도관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지게 됩니다. 정보의 사각지대가 바로 교도관의 시선이라, 죄수들은 늘 긴장할 수 밖에 없지요.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장치가 사실은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니 놀랍죠? 이것이 바로 심리적 장치의 효과입니다.        
        
        
        
교도관으로 참여한 참가자들은 교도관의 역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고, 연구에서도 이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적으로 타당한 선에서, 그리고 죄수들을 존경하는 선에서 감옥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얘기만을 들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서서히 교도소 안의 규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셋팅을 만들고 교도관과 죄수들의 역할 설정을 하면서 교도소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실험 이틀째의 날을 맞게 되는데, 그날 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교도소, 정확히는 실험실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지난 칼럼에서 스탠포드 대학내에 어떻게 감옥 시설이 마련되었는지, 그리고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신분을 만들어내는 여러 심리적 장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칼럼은 스탠포드 심리학 실험의 마지막 이야기로, 실험 이튿날부터 조기 중단된 6일까지의 숨가쁜 상황이 전개됩니다.        
        
        
        
        
        
실험 이틀째        
        
        
이날 아침 예상치 못한 죄수들의 집단 행동이 발생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죄수들은 모자를 벗어버리고, 죄수복에 달려 있던 숫자를 잡아뜯는가 하면 감방 안에서 문을 향해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도관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하고조롱하기까지 했죠. 첫날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감옥이 아닌 실험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폭동에 대한 교도관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앞서 여러 번 강조했던 점이 있죠? 실험에 참가하기 전 이들은 교도관이나 죄수나 모두 지극히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감옥이니 교도관이니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구분은 그저 임의적인 구분에 불과한 것들이었죠. 그런데, 둘째 날 죄수 역의 참가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교도관 역할의 참가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사태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 전에는 단 한번도 교도소에 다녀오거나 교도관을 만난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물리적인 진압        
        
        
교도관들은 일단 소화기를 가져와 죄수들을 향해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피부의 온도를 낮추는 하얀 분말의 소화액이 발포되자 죄수들은 문에서 떨어져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교도관들은 이틈을 타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죄수들을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감방 안에 있던 생필품들, 침대와 담요 등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낸 후 알몸인 상태로 죄수들을 감방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을 모아 독방에 집어넣었죠. 죄수들에게 가하는 체벌로는, 한 명씩 불러내어 push-up을 시키고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벽을 바라보고 서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push- up 정도는 체육 시간에도 하는 거고 건강 삼아 혼자서도 곧잘 하는 거라, 이게 체벌일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 연구자들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곧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죠.        
        
        
        
체벌일까 싶었던 바로 그 push-up, 한 사람이 이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벽을 향해 서 있어야만 하는 바로 이러한 체벌이, 실제 교도소, 그것도 그 악명 높았던 나찌의 수용소에서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끝의 차이도 보이지 않고 스탠포드 감옥에서의 체벌과 나찌 수용소에서의 체벌이 똑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차이라면, 나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전쟁 전범이라고 하는, 극악무도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독일군 장교들이 유태인에게 그러한 체벌을 가했던 데 반해, 스탠포드 감옥(대학)에서는 이틀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평범하고 순진했던 청년들이 똑같은 청년들에게 체벌을 가하고 있다는 점뿐이었죠. 놀라웠던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도관의 임무나 전반적인 업무 스케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싶었던 참가자들은 어느새 기존 교도소에서 행해지는 교도관의 업무 스케쥴을 정확히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발적으로 3명의 교도관들이 나서서 야간에 당직을 서기로 했고, 3교대로 9명의 교도관들이 번갈아 가며 한시도 놓치지 않고 죄수들을 감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지능적인 심리적 진압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말이죠.        
        
        
        
        
        
심리적 진압        
        
        
우선,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하죠. 이들이 힘을 뭉치면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큼의 머릿수를 가진 집단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가 그 집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첫째, 상대 집단을 제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람수로, 강한 무기로 상대 집단의 힘을 제압하는 것이죠. 그런데, 인원도 그리 많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무기도 신통치 않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생각하신 그대로, 바로 심리적 전술입니다. 앞에 칼럼에서 교도관의 선글래스 얘기를 한 적이 있죠? 그 작은 장치 하나가 죄수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주요 수단이라고. 인간의 심리를 제압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제압하는 방법입니다. 스탠포드 감옥내의 교도관들도 바로 이런 심리적 장치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주요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도의 심리적 장치를 마련하게 됩니다.        
        
        
        
우선, 기존 세 개의 감방 중에서 하나를 일종의 특실 개념으로 개조했습니다. 이 방에서는 옷도 입을 수 있고 침대도 사용할 수 있으며 이도 닦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방에는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가장 적은 세명의 죄수들이 들어오게 해서 그곳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한 감방에, 벌거벗겨진 채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 물론 세수를 하거나 이를 닦을 수도 없는 상황에 있게 했죠. 이미 이것만으로도, 폭동에 가담하는가에 대해 심한 갈등을 갖게 합니다. 아마도 다음 폭동에는 주도적으로 나설 수 없겠죠. 그러나 심리적 장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반나절, 교도관들은 소위 모범수였던 세 명을 상황이 제일 나쁜 감방에 넣고, 폭동을 일으켰던 문제 죄수들을 제일 좋은 특실에 넣었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입니다. 교도관들은 왜 이런 조치를 취했을까요. 앞서,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가장 약한 사람들이 좋은 감방에 들어갔을 때는 일종의 보상처럼 해석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즉, 교도관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지 않을수록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잠시 후 상황은 뒤바뀌어서, 폭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좋은 감방으로 들어가고 소위 모범수였던 사람들은 다시 험한 감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니, 교도관에게 잘 해도 험한 감방으로 들어가야 하고, 못해도 들어가야 하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해답은....바로 혼란입니다. 즉, 방금 여러분들이 가졌던 그 의문점처럼 죄수들 역시 앞일을 예측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 거죠.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여기에는 중요한 심리적 과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교도관들이 죄수들에게 박탈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우선은 옷입니다. 그리고 음식, 그리고 잠자리입니다. 즉 의식주, 인간의 생존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를 얻고 얻지 못함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해 관계가 높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두 번째로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낮은 사람들이 좋은 환경으로 갔다가, 다시 나쁜 환경으로 옮겨지게 된 상황의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좋은 환경은 일종의 긍정적인 보상입니다. 보상이란 단순히 말하자면, 그 보상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뭔가 이쁜 짓,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맘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도관들이 제공하는 좋은 환경에 폭동에 가담한 정도가 적은 사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얼마 지나지 않아 폭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그곳으로 보냈을까요.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맞습니다. ‘뭔가 내가 모르지만, 교도관과 저들 사이에 은밀한 거래나 그 무언가가 있을거야’.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못한 것 같고, 실력도 없어보이는 데 승진은 일순위인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쉽게 이런 생각합니다. ‘뭔가 다른 쪽으로 손을 썼겠지. 치사하긴’이라고. 바로,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에 대해 나머지 죄수들은 일종의 불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을 더 이상은 믿지 못하죠. 교도관들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집단 안에 이들이 한데 뭉칠 수 없도록 만드는 불신을 싹트게 한 것이죠. 결국, 교도관들의 전략에 의해 폭동을 주도했던 일부 죄수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죄수들을 배반하고 편한 환경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신념을 나머지 죄수들은 갖게 됩니다. 앞서, 의식주와 같이 이해 관계가 높은 대상이 결과와 관련된다면 이러한 불신은 더욱더 공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심리적 장치, 바로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에게 가해진 심리적 장치입니다. 물론 이들도 앞서 설명에서처럼 다른 죄수들로부터 불신의 대상이 되버리고 고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만이 겪게되는 무서운 심리적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것이죠. 흔히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예측하고, 대비합니다. 우리가 15분 후에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나, 직장 상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반응을 예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예측입니다. 이런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사람들은 큰 혼란을 겪고, 초조, 불안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불안증이라고 얘기하는 정신과적 증상의 가장 큰 심리적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니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죠.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심한 처벌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실제로, 감옥에서 초반에는 그런 처벌이 가해졌죠. 처벌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예측했던 것이기에 불안은 그다지 높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곧 편한 감방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옷이 주어지고 침대에서 자고, 분명 몸은 편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 심리적인 안정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가장 불안할 때는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난 상황에 접했을 때입니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그러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예측할 수 없게 되죠. 그렇게 되면, 결국 이들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계속 그 생각에 매달리면서 모든 심적 에너지를 써버리게 되죠. 결국 그들은 이제 폭동을 일으킬 만한 에너지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진압의 결과        
        
        
폭동과 그에 대한 진압을 계기로 교도소의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죄수들은 그들 사이에 팽배해진 불신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반면, 교도관들은 몰라볼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이 실제로 문제가 많으며,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망나니처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보다 강화하기 시작했죠. 심지어 죄수들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막아, 허락을 받아야지만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방안에 양동이를 하나 주고 거기에 대소변을 보게 했죠. 그러나 곧 감방은 오줌 냄새와 변냄새로 가득차게 되고, 2일만에 환경은 최악으로 치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실험이 시작된 지 36시간만에 죄수 역의 참가자는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심한 정서 장애 및 혼란스런 사고와 감정을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고, 분노감에 차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사람의 처우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를 면담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못한 채 다른 죄수들에게 “아무도 여길 떠날 수 없어. 이걸 멈출 수는 없다구”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미쳐가는 것 같았죠. 결국, 연구자들은 실험 중간에 그를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풀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간 후 감옥 안에는 묘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죠. 그가 풀려난 것이 아닌 탈주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른 죄수들도 탈주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얘기는 교도관들에게도 그리고 연구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연구자들의 돌연변이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전략 회의를 가지고, 죄수들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살필 장치를 하고 탈옥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또한 그러한 루머가 돌던 방안에 정보를 미리 알려줄 수 있는 밀고자를 두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기도 했죠. 이전에 비해 더 많은 교도관을 두고 죄수들을 감시하고 이들을 함께 묶고, 머리에 자루를 씌어 두기도 했죠. 그리고 어떻게든 탈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안책을 강구하는 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자, 이 연구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실험 중에 연구자의 동기 하나가 실험실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변한 상황을 놀래서 바라보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실험하고 있는 거지?”라고요. 그 순간 연구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정말이지 크게 놀라게 됩니다. 즉, 그 며칠 사이에, 연구자들은 어느새 연구자, 심리학자가 아니라 또 다른 교도관, 감독자의 역할을 하면서 죄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죠. 연구자들조차도 당시에 다른 교도관들처럼 죄수들이 반드시 도망을 칠 것이며 해를 끼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인식을 하기도 전에 말이죠. 실험에 대해 Zimbardo 교수의 얘기를 빌면, 당시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가 실험 과정을 지켜보며,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도덕적으로 어떻게 이런 실험을 계속 진행하느냐?”라고 항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리고 그 자신도 실험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미 연구자들도 더 이상 연구자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찰자의 위치가 아닌 거대한 심리적 장치안으로 빨려들어와 있었던 셈이죠. 마치 교도관이나 죄수들처럼.        
        
        
        
실험 5일째로 접어들면서 일부 교도관이 죄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들을 고문하고 체벌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죄수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고, 급기야 그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이들을 빼내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포고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심한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는 죄수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등 상태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되자, 결국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학계에 보고되면서 큰 충격을 일으키게 됩니다.


------


'스탠포드 감옥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1971년 미국에서 '필립 짐바르도'라는 스탠포드 대학교수가 주도한 실험이었습니다. (구인광고를 통해서 실험차가자를 모집한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미국 심리학 실험의 참가자는 구인광고를 통하여 모집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게 만든 실험으로 '밀 그램'이 1963년도에 실시한 '전기충격실험'과 함께 유명한 실험입니다. 실험은 예상했던것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게 되어 6일만에 중지하게 됩니다. 자세한 실험 내용은 밑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험의 시작>>


1971년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의 Zimbardo 교수는 ‘교도소의 생활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신문지에 내고 지원자를 모았습광고를 지역 니다. 광고 후 70여명의 지원자가 연락을 해왔고, 이후 간단한 정신과적 면접과 성격 검사를 실시해서 심리적인 문제가 있거나 병력이 있는 사람은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 이전에 범죄나 마약과 관련한 전과가 있는 사람들도 제외시켰죠. 이런 심사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24명의 실험 참가자가 결정되었고, 실험에 참가하는 대가로 하루에 15불 정도의 금액을 받기로 했습니다.

우선, 선발된 24명에 대한 기본 프로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실험 참가자로 선발될 때 앞서 말씀드린 검사나 면접외에도, 참가자들간 이질성을 최소화하고 가능한한 일반인, 보통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수준이나 지능, 건강 조건도 비교적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계층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동질적인 구성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한 집단은 교도관의 역할을, 다른 한 집단은 죄수의 역할을 맡기려고 했습니다. 결국, 죄수냐 혹은 교도관이냐 하는 집단의 분류는 임의적인 것이었지, 결코 두 집단간의 유의미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실험이 진행될수록 이 두 집단은 정말로 놀라운 모습으로 다르게 변화해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차차 말씀드리죠.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환경과 가장 유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실제로 이전에 장기 복역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을 섭외해 필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건물의 한 쪽 복도 끝을 막아, 감옥 셋트를 만들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면 복도는 죄수(실제 죄수가 아닌 죄수 역할을 하기로 한 참가자들)가 거닐거나 식사, 운동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죄수들이 수감되는 방에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야만 하는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참가자들은 이곳이 진짜 감옥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눈을 가린 채 이곳으로 데려오게 되죠. 그래서 그곳이 스탠포드 대학내 임시로 만든 감옥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이 복도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나 시계를 놓지 못하게 해서,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소품들도 모두 감옥과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3개가 있던 감방의 반대쪽에는 매우 작아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어둡고 작은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실험장소인 교도소가 다 만들어진 후에, 참가자들은 이미 협조가 요청된 경찰의 인도로 실험실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죄수역을 맡은 참가자들에게는 실험실이 급조된 교도소가 아닌 아닌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는 안내를 하고, 이를 위해 눈을 가린 채 데리고 옵니다.

교도관으로 참여한 참가자들은 교도관의 역할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고, 연구에서도 이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적으로 타당한 선에서, 그리고 죄수들을 존경하는 선에서 감옥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얘기만을 들었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서서히 교도소 안의 규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셋팅을 만들고 교도관과 죄수들의 역할 설정을 하면서 교도소의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실험 이틀째의 날을 맞게 되는데, 그날 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교도소, 정확히는 실험실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날 아침 예상치 못한 죄수들의 집단 행동이 발생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죄수들은 모자를 벗어버리고, 죄수복에 달려 있던 숫자를 잡아뜯는가 하면 감방 안에서 문을 향해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친 채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도관들에게 욕설과 비난을 하고조롱하기까지 했죠. 첫날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감옥이 아닌 실험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이 폭동에 대한 교도관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앞서 여러 번 강조했던 점이 있죠? 실험에 참가하기 전 이들은 교도관이나 죄수나 모두 지극히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감옥이니 교도관이니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던 이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수와 교도관이라는 구분은 그저 임의적인 구분에 불과한 것들이었죠. 그런데, 둘째 날 죄수 역의 참가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교도관 역할의 참가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사태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 전에는 단 한번도 교도소에 다녀오거나 교도관을 만난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교도관들은 일단 소화기를 가져와 죄수들을 향해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적으로 피부의 온도를 낮추는 하얀 분말의 소화액이 발포되자 죄수들은 문에서 떨어져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교도관들은 이틈을 타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죄수들을 진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감방 안에 있던 생필품들, 침대와 담요 등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낸 후 알몸인 상태로 죄수들을 감방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폭동을 주도했던 죄수들을 모아 독방에 집어넣었죠. 죄수들에게 가하는 체벌로는, 한 명씩 불러내어 push-up을 시키고 나머지 죄수들을 모두 벽을 바라보고 서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push- up 정도는 체육 시간에도 하는 거고 건강 삼아 혼자서도 곧잘 하는 거라, 이게 체벌일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당시에 연구자들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곧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죠.



체벌일까 싶었던 바로 그 push-up, 한 사람이 이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벽을 향해 서 있어야만 하는 바로 이러한 체벌이, 실제 교도소, 그것도 그 악명 높았던 나찌의 수용소에서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끝의 차이도 보이지 않고 스탠포드 감옥에서의 체벌과 나찌 수용소에서의 체벌이 똑같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차이라면, 나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전쟁 전범이라고 하는, 극악무도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독일군 장교들이 유태인에게 그러한 체벌을 가했던 데 반해, 스탠포드 감옥(대학)에서는 이틀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평범하고 순진했던 청년들이 똑같은 청년들에게 체벌을 가하고 있다는 점뿐이었죠. 놀라웠던 점은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도관의 임무나 전반적인 업무 스케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싶었던 참가자들은 어느새 기존 교도소에서 행해지는 교도관의 업무 스케쥴을 정확히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발적으로 3명의 교도관들이 나서서 야간에 당직을 서기로 했고, 3교대로 9명의 교도관들이 번갈아 가며 한시도 놓치지 않고 죄수들을 감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지능적인 심리적 진압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말이죠.



폭동과 그에 대한 진압을 계기로 교도소의 상황은 급변하게 됩니다. 죄수들은 그들 사이에 팽배해진 불신으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반면, 교도관들은 몰라볼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됩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이 실제로 문제가 많으며,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망나니처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보다 강화하기 시작했죠. 심지어 죄수들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막아, 허락을 받아야지만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방안에 양동이를 하나 주고 거기에 대소변을 보게 했죠. 그러나 곧 감방은 오줌 냄새와 변냄새로 가득차게 되고, 2일만에 환경은 최악으로 치달아 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실험이 시작된 지 36시간만에 죄수 역의 참가자는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심한 정서 장애 및 혼란스런 사고와 감정을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거나 웃고, 분노감에 차서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 등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사람의 처우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를 면담했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못한 채 다른 죄수들에게 “아무도 여길 떠날 수 없어. 이걸 멈출 수는 없다구”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미쳐가는 것 같았죠. 결국, 연구자들은 실험 중간에 그를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풀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간 후 감옥 안에는 묘한 루머가 돌기 시작했죠. 그가 풀려난 것이 아닌 탈주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른 죄수들도 탈주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 얘기는 교도관들에게도 그리고 연구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전략 회의를 가지고, 죄수들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살필 장치를 하고 탈옥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또한 그러한 루머가 돌던 방안에 정보를 미리 알려줄 수 있는 밀고자를 두기로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기도 했죠. 이전에 비해 더 많은 교도관을 두고 죄수들을 감시하고 이들을 함께 묶고, 머리에 자루를 씌어 두기도 했죠. 그리고 어떻게든 탈주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안책을 강구하는 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자, 이 연구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실험 중에 연구자의 동기 하나가 실험실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돌변한 상황을 놀래서 바라보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뭘 실험하고 있는 거지?”라고요. 그 순간 연구자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정말이지 크게 놀라게 됩니다. 즉, 그 며칠 사이에, 연구자들은 어느새 연구자, 심리학자가 아니라 또 다른 교도관, 감독자의 역할을 하면서 죄수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죠. 연구자들조차도 당시에 다른 교도관들처럼 죄수들이 반드시 도망을 칠 것이며 해를 끼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인식을 하기도 전에 말이죠. 실험에 대해 Zimbardo 교수의 얘기를 빌면, 당시 실험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가 실험 과정을 지켜보며,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도덕적으로 어떻게 이런 실험을 계속 진행하느냐?”라고 항의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리고 그 자신도 실험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미 연구자들도 더 이상 연구자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찰자의 위치가 아닌 거대한 심리적 장치안으로 빨려들어와 있었던 셈이죠. 마치 교도관이나 죄수들처럼.

실험 5일째로 접어들면서 일부 교도관이 죄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들을 고문하고 체벌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죄수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고, 급기야 그들의 부모들이 찾아와 이들을 빼내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는 포고를 하기도 했다는군요. 심한 정신과적 증상을 보이는 죄수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등 상태가 악화 일로를 걷게 되자, 결국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학계에 보고되면서 큰 충격을 일으키게 됩니다.
실험이 일으킨 가장 큰 파장은 진정한 휴머니즘이란 없다는 것, 누구나 상황에 의해서 악인이 될 수도 선인이 될 수도 있다는 뼈아픈 인식을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는 대학 때, 처음 이 실험에 대한 얘기를 듣고, 학자 혹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실험 상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현실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현재 교도소라고 하는 사회적 격리 장치가 죄수들의 인권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재활과 갱생을 위한 긍정적인 장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죄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환멸스럽고 고통스러운 조치로, 그곳에서 진정 갱생과 재활이 이루어 질 수 있을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일 겁니다.




"나는 최근(출감한지 37개월)에야 교도소 독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옥 안에서 난 늘 침묵해야 했다. 옆 감방 사람에게 속삭이기라도 할라치면 곧 교도관의 곤봉과 매가 등과 어깨로 쏟아지곤 했다. 그리고 내 몸에 이나 다른 벌레들이 있다고 벌거벗긴 채 뿌려지는 살충제. 그리고 맨 바닥에서 이불도 침대도 없이 알몸으로 자야했고 맨 손으로 화장실 변기를 닦아야 했던 시간들. 나는 도둑이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도둑이라도 절도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결코 재활이나 갱생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출감할 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건 유일하게 나를 때린 사람, 나를 마치 개처럼 취급한 그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잔혹함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정상적인 도덕성을 되찾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너무나 잔혹했다.“


- 미국에서 실제 교도소 생활을 했던 어느 죄수의 고백

 

 

 

 

Milgram의 전기충격실험 斷想

2005/10/06 10:22

1960년대 예일대학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교수는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자원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선생님의 역할을, 다른 그룹에게는 학생의 역할을 맡깁니다.
그리고 나서, 선생 역할 1명과, 학생 역할 1명씩 짝을 짓도록 한 다음,
학생역할 분담자들을 가죽끈으로 의자에 묶고 그들의 양쪽 손목에 전기충격장치를 연결했습니다. 그 후 학생 역할 분담자에게는 암기해야 할 단어들이, 선생 역할 분담자에게는 테스트할 문제들이 주어졌지요. 선생들에게
"학생들을 테스트한 후 만약 틀릴 경우 한 번에 15볼트씩의 약한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한 후, 계속 틀릴 때마다 전압을 15볼트씩 올려가도록지시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징벌(전기충격)에 따른 학습효과(암기력의향상)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말이지요.

그러나, 이 실험의 주된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선생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전압을 높여 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를 연구하고자 함이바로 그 숨겨진 목적이었습니다. 선생 그룹으로 선정된 사람들에게는비밀로 했지만, 사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자원자들이 아니라 모두실험 팀의 일원이었고, 전기충격도 시늉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사기였던 셈이지요. 과연 선생 역할 분담자들이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있는 450볼트에 이를 때까지 전압을 높여 가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이 연구의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역할의 맡은 사람의 옆에는 실험 주관자(권위자의 역할)가 앉아서 "걱정 말고 계속 전압을 높여라. 책임은 내가 진다"고 격려 내지는 압력을 행사하도록 했습니다.

실험이 시작되기 전 밀그램 교수는 150볼트 이상으로 전압을 높여야 할
상황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고, 실험 중단을 요구할 것
으로 추정했습니다. 누구라도 실험참여의 대가로 4불을 받으려고 사람을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테니까요. 아마 잘해야 자원자들의 0.1퍼센트 정도가 450볼트에 이르도록 계속 전기충격을 가할 것이라는가정이 세워졌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연구소에 머무는 동안 이 실험을 녹화한
테이프를 직접 시청한 일이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처음
15볼트 정도의 전기충격을 가할 때, 선생 역할자는 벽 너머로 들리는
상대방 학생의 가벼운 비명 소리에 키들키들 웃기 시작합니다. 전압이
90볼트를 넘어 가면서는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하지요. 옆을 쳐다보면서 "이거 계속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150볼트가넘어 가면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뀌면서, "나 이거 더 이상 못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벽 너머에서 학생 역할을 맡은 자원자(사실은 실험팀의 연기)가 "으악. 그만 해요. 나는 그만 두겠어요. 내보내 줘요!"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실험 주관자가 선생 역할 분담자에게 매우 차가운 목소리로 "괜찮아요. 실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계속해요. 계속하라고 했죠? 책임은 모두 내가 져요"라고 이야기하자, 선생 역할 분담자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 전압을 높여갔습니다. 사실 언제든지 "나는 못하겠어요"라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만인데도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나중에 300볼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도 무감각해져서 그냥 계속 전압을 높여갔습니다. 중간 중간 "이래도 되는 거요?"라는 식의 의혹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빈도 수는 전압이 높아갈수록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실험 참가자 중 무려 65퍼센트가450볼트까지 전압을 높인 것입니다.

나중에 밀그램 교수의 실험은 더욱 다양한 상황으로 확대됩니다. 예컨대  조금 덜 학술적인 분위기에서 실험을 했을 때 위 확률은 48퍼센트까지 떨어지고, 실험 주관자가 같은 방에 있지 않을 때는 21퍼센트까지 떨어집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실험 주관자 두 사람을 한꺼번에 선생 역할 분담자들의 방에 집어넣고 두 실험 주관자가 "전압을 더 올려도 되는지"에 대해 논쟁하는 상황을 설정하면, 선생 역할 분담자의 참여도가 10퍼센트까지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학생역할을 맡은 실험 조교를 선생 역할의 실험대상과 한 방에 집어놓고 실험을 계속하도록 했을 때는 40퍼센트, 선생역할분담자가 학생역할분담자의 손목에 직접 전기충격기를 대도록 했을 때는(물론 실제로는 모두 학생 역할자의 연기) 30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참고로 이 실험 이후 밀그램 교수는 실험 대상자들을 속이고 진행한 이 실험의 비윤리성으로 인해 대학에서 해직되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이 실험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의 접근을 하기도 합니다. 즉, 여기서 실험 중간에 더이상 계속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일종의 의로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 이후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목한 것이지요. 예컨대 이런 말도 안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실험 주관자를 비난하든지, 아니면 좀 더 상급자를 만나보겠다고 항의하는 것이당연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른바 의인들조차도 자리에 앉아서 "정 못하겠다면 이제 집으로 가도
좋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벽 너머에는
학생역할을 맡은 자원자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실험을 중간에 거부한 사람조차도 실제로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1971년 짐바르도 교수는 여기서 더 나아가, 모두 70명의 지원자 중 "성숙하고, 감정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정상적이고, 지적 능력이 뛰어난 대학생" 24명을 선발해서 새로운 실험에 착수합니다. 이번에는 감옥의 상황을 설정하여 각각 "간수"와 "죄수" 역할을 맡도록 했지요. 이 실험은 끝내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6일만에 실험을 중단하기로 했기 때문이지요. 너무 끔찍한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해서 실험을 더 이상 계속했다가는 완전히 인간성이 파괴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입니다.

즉, 간수 역할을 맡은 몇몇 남학생들은 죄수 역할의 학생들이 마치 인간이 아닌 저열한 동물인 것처럼 가혹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죄수역할을 맡은 몇몇은 외부적으로는 노예근성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오직 탈출과 복수만을 꿈꾸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졌던 까닭입니다. 역할과 자아가 뒤섞이면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거지요. 짐바르도 교수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나약한 죄수와 악랄한 간수 사이를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운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이런 실험들과 비슷한 상황을 기초로 "The Wave"라는 소설도 나오고, 영화도 만들어지게 됩니다.



-----

스탠포드 감옥실험 BBC 1



스탠포드 감옥실험 BBC 2



스탠포드 감옥실험 BBC 3




----------



스탠포드 감옥 실험(영어: Standford prison experiment, SPE)이란 스탠포드 대학교의 필립 짐바르도 심리학 교수가 1971년에 한 심리학 실험이다. 70명의 지원자 중 대학생인 24명이 선발되어 죄수와 교도관역을 맡았으며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 건물 지하에 있는 가짜 감옥에서 살았다. 역할은 무작위로 정했다. 그들은 자기 역할에 예상보다 잘 적응했으며 교도관들은 귄위적으로 행동했고 심지어는 가혹 행위를 하기까지 했다. 2명의 교도관들은 실험 초기에 너무 화가 나서 중간에 나갔으며 모든 실험은 실험 시작 후 6일 만에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실험의 진행상황과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모든 실험장면은 촬영되었으며 그 촬영물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짐바르도의 실험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다.


 


목표와 과정 


 


짐바르도의 팀은 수감자와 교도관 각각의 특징은 어려운 감옥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라는 생각을 시험해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고용된 참가자들은 2주간 '감옥'에서 생활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70명의 지원자 중에 짐바르도는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돼 있으며 건강한 남자 24명을 선발했다. 24명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중산층이었다.


'감옥'은 스탠포드 대학의 조던 홀의 지하실에 위치했다. 대학생인 실험 도우미들은 수감자였으며 짐바르도는 교도소장이었다. 짐바르도는 참가자들이 그가 원했던 방향 감각 상실(disorientation), 자아감 상실(depersonalisation), 몰개성화(Deindividualisation)와 같은 것을 촉진할 수 있도록 특별한 상황을 마련했다.


실험 참가자들 중 교도관역을 맡은 사람은 무기(나무 곤봉)과 셔츠와 바지가 카키색인 가짜 교도관 옷을 받았다. 눈을 마주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도 받았다.


수감자들은 그들이 끊임없이 불편하도록 크기가 맞지 않는 겉옷과 머리에는 스타킹을 씌웠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이름 대신에 옷에 박힌 그들의 고유 번호로 불렸다.


교도관을 맡은 참가자들은 실험 하루 전 날 그들이 수감자들을 육체적으로 상처입힐 수 없다는 모임을 가졌다.2003년에 나온 The Stanford Prison Study비디오에 의하면 짐바르도는 교도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당신은 수감자들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 있으며 어느정도 공포감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며 그 행동인즉 수감자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우리와 시스템에 의해 조종되고 당신, 나, 그리고 수감자들은 어떠한 사생활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개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없앱니다. 대개, 이러한 모든 것을 야기시키는 것은 무력함입니다. 즉 이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어떠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수감자를 맡은 참가자들은 수감자들처럼 행동해서 그들의 집에서 무장강도 '혐의'로 '체포' 되었다. Palo Alto 경찰서는 모든 수감자들에게 하는 행위(지문 채취, 범인 식별용 사진 찍기, 미란다 원칙 설명하기 등등)를 해서 짐바르도 교수를 도왔다. 그들은 감옥에서 이송되어서 실시간 감시를 당하고 그들이 새로운 일체성을 받는 가짜 감옥에 도착했다.



결과


 


실험은 눈깜짝할 새에 손을 벗어났다. 교도관들에게서 굴욕적인 대우와 가학적인 행위를 받은 수감자들은 괴로워했으며 그 행위들은 용인되어 왔다.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서 결국 억제로 인한 반란을 초래했다. 실험이 끝날 때 까지 엄격하게 감정적인 혼란이 많이 일어났다.


별탈없이 흘렀던 첫날이 지나고 둘째날에 반란이 일어났다. 교도관들은 원래보다 더 봉사를 했으며 상관인 연구 직원들이 없이 소화기로 수감자들을 함께 공격해서 반란을 진압했다.


겨우 36시간이 흐른 후에 필립 짐바르도가 말하기로는 한 수감자가 "미♡ 짓"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8612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소리 지르고 저주하고 격노하는 등 "미♡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매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에 대해 조금 시간이 걸렸고 우리들은 그를 풀어줘야만 했다.


실험에서 빠진 #8612번이 친구들을 데려와서 남은 수감자들을 내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도관들은 감옥을 철거하고 수감자들을 안전한 다른 장소로 옮겼다. 어떠한 시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교도관들은 감옥을 짓느라 헛수고 했다는 것에 대해 화가 치솟았고 수감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그들이 배운 방법 대로 죄수 번호를 반복해서 부르라고 강요했으며 그것이 자신들을 증명하는 새로운 것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강화시켰다. 교도관들은 머지않아 이 번호 세기를 수감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으며 죄수 번호를 틀린 자에게는 평소보다 더욱 오래 기합을 주는 등의 신체적 고통을 주기도 했다. 급격히 위생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생리적 현상을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그들의 변기통을 비울 수 없는 벌을 주기도 했다. 한편 매트리스는 이러한 엄격한 감옥에서는 보물이었으며 교도관들은 매트리스를 뺏어서 콘크리트 위에서 재우는 등의 벌을 주기도 했다. 몇몇 수감자들은 벌거벗은 채로 다니도록 강요받기도 했으며 남색(男色)을 흉내내는 등의 성적 모욕을 받기도 했다.


짐바르도는 그의 실험에 점점 몰두 했으며 적극적으로 이 감옥 실험에 참여했다. 4일 째, 몇몇 수감자들이 탈옥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짐바르도와 교도관들은 그들을 더욱 안전한 지역 경찰서로 보내려고 했지만 공무원들은 짐바르도의 실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실험이 진행되면서 몇몇 교도관들은 폭력적으로 변했다. 실험자들은 교도관 중 3분의 1이 진짜로 잔학한(sadistic) 경향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실험이 일찍 끝났을 때 교도관들 대부분은 화를 냈다.


짐바르도는 참가자들이 그들의 역할에 완전히 흡수 되었다고 말하며 그들은 이것이 실험인데도 가석방을 위해서라면 벌금을 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가석방 신청이 전부 거부되었긴 했지만 실험에서 나간 실험 참가자는 아무도 없었다. 짐바르도는 모든 금전적 보상을 잃은 후에 그들이 실험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뿌리 깊숙이 감옥에 흡수가 되었으며 그들 스스로를 수감자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수감자인 #416이 다른 수감자들에 대한 행태를 보고 걱정을 표했다. 교도관들은 이러한 반항에 응했다. 그가 단식 투쟁을 한다면서 소세지를 먹기를 거부 했을 때 교도관들은 그를 방에 가두었고 이것을 독방 감금이라고 말했다.[2] 교도관들은 다른 수감자들이 #416을 반대하기 위해 #416이 독방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감자들의 담요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물론 모두 거절했다.


짐바르도의 여자친구인(후에 결혼함.) 크리스티나 마슬락(Christina Maslach)이 이 실험에 초대 받았을 때 감옥의 엄청난 실상을 본 후에 당장 이 실험을 그만두라고 짐바르도에게 얘기했으며 짐바르도는 실험을 끝냈다. 짐바르도는 이 감옥에 대해 본 50명 이상의 사람 중에 도덕에 대한 질문을 던진것은 마슬락 혼자 였다고 말했다. 2주 동안 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스탠포드 감옥 실험은 불과 6일 만에 끝이 났다.


 


날짜 별 실험 정보


 


실험 첫째 날


 


실험은 실제 장기복역자의 조언을 통해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부 건물 지하에 만들어진 모의 감옥에서 시행되었다. 죄수 역을 맡은 피험자들에게는 이 장소가 모의 감옥이 아닌 스탠퍼드 주립 교도소라고 거짓 안내되었다. 그리고 경찰의 협조를 통해 죄수 역의 피험자는 실제 상황처럼 체포당한 뒤 취조를 받은 후 모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취조한 뒤 옷을 모두 벗긴 채로 살충제를 뿌렸다. 그러고는 앞뒤로 번호가 적힌 원피스형의 죄수복을 입히고 오른쪽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속옷 착용은 금지되었으며, 삭발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모자를 씌웠다. 죄수 역의 피험자들은 한 방에 3명씩 24시간 내내 지내면서 항상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려졌다.


한편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카키색의 유니폼을 입고, 경찰봉과 호루라기를 소지하였으며 표정을 감춤으로써 감정을 숨길 수 있도록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들은 하루 여덟 시간씩 3교대로 근무했으며 근무가 끝나면 퇴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의 감옥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적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규율을 세울 수 있었다. 실험 조교들은 그들이 우월해서가 아닌 단지 우연에 의해 교도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주지시켰다.


임의로 분류된 죄수 역할과 교도관 역할 사이에서는 말투나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도관 역할의 피험자들은 명령조의 말투를 사용하는 반면 죄수 역할의 피험자들은 수동적인 어투가 나타났다. 교도관 역할의 피험자들은 법적으로 금지된 육체적 체벌 대신에 언어폭력으로써 죄수 역할의 피험자들을 모욕하였다. 교도관 역할의 피험자들은 죄수들의 작은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죄수 역할의 피험자들은 점점 더 수동적으로 변해갔다.


 


실험 둘째 날


 


새벽 2시 30분,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깨워 자신의 번호를 말하게 했다.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울 수 있고,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좀 더 통제하기 좋은 상태로 둘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과 죄수 역의 피험자들은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아침이 밝자, 죄수 역의 피험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모자를 집어던지고 죄수복의 번호표를 떼려고 했으며, 침대로 바리케이트를 치거나 교도관 역의 피험자에게 언어폭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이전에 교도소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화기를 이용해 폭동을 진압하는 한편, 모든 죄수 역의 피험자들이 뒤돌아 있게 한 채 한 명의 피험자에게만 팔굽혀펴기를 시켰다. 놀랍게도 이러한 체벌 방법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것과 동일한 체벌이었다.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자발적으로 야간 당직을 짜고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심리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해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폭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 명을 가장 악조건의 방에 수감시키고 반대로 폭동에 거의 가담하지 않은 세 명을 좋은 조건의 방에 수감시켰다. 그리고 반나절 뒤, 서로의 방을 바꾸어 수감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수 역의 피험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폭동 가담자들과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심어주어 죄수 역의 피험자들간 결속력을 떨어뜨렸다. 이 또한 교도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극도로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들은 죄수 역의 피험자들이 허락 없이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야간에는 양동이에 대소변을 보도록 했다. 모의 감옥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져갔다.


이 와중에 8612번 죄수 역의 피험자가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그는 분노에 차서 울부짖기도 하고, 쓰고 있지도 않은 모자가 머리를 조여온다고 호소했다. 필립 짐바르도는 그를 면담하고 실험을 계속할 것을 권유하였다. 면담을 통해 진정된 태도를 보이는 듯했던 8612번 피험자는 그러나 감옥으로 돌아가서는 아무도 자신을 내보내주려 하지 않는다고 소리쳤고, 모의 감옥 내부는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연구진들은 8612번 피험자의 실험 참가를 중지시키고 귀가조치시켰다. 그런데 그가 모의 감옥을 빠져나가자 모의 감옥 내부에는 다음날 8612번 피험자의 주도로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석방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피험자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실험 셋째 날


 


실험 셋째 날은 피험자 가족들의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피험자 가족 중 몇몇 부모는 자신의 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아들을 실험에서 빼내려 했으나, "당신의 자녀가 이 정도 힘든 것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짐바르도의 말에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다. 8612번 피험자의 침입도 없었다. 그러나 짐바르도는 실험 셋째 날의 과정을 동료 교수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가 실험의 목적을 상기하라는 동료 교수의 대답을 들었다.


짐바르도는 그동안 계속 고통을 호소하며 식사를 거부하던 819번 피험자를 면담하고, 그에게 실험을 중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실험에 참가하는 것 뿐이고, 언제든지 중도에 실험을 그만둘 수 있었던 819번 피험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나쁜 죄수로 생각할 것이므로 중단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하였다. 짐바르도가 그에게 이것은 실험 상황이며 819번 피험자는 죄수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주지시키고서야 819번 피험자는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실험 넷째 날


 


가석방 신청이 실시되었다. 사실 이들은 돈을 내지 않아도 언제든지 중도에 실험을 포기하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죄수 역의 피험자들 다수는 돈을 내고서라도 감옥에서 나가겠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가석방이 무산되었고, 모의 감옥 내의 분위기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실험 다섯째 날


 


교도관 역의 피험자들이 죄수 역의 피험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성적 학대를 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피험자의 부모들과 동료 교수들이 실험을 그만 둘 것을 요구하였고,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을 조기에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실험 여섯째 날


 


피험자들에게 실험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귀가조치시킴으로써 실험이 종료되었다.


 


결론


 


스탠포드 감옥 실험은 14일로 예정되었던 실험을 1971년 8월 20일에 6일 만에 끝났다. 이 실험의 결과는 사람들이 합법적인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제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사람들의 민감성과 복종을 입증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 실험은 인지부조화와 권력의 힘을 설명하기도 했다.


심리학에서 이 실험의 결과는 귀인 이론를 지지하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상황은 그들 각자의 개인적 성향보다는 참가자의 행동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말이 된다.이것은 평범한 사람이 시험관의 명령에 의해 타인을 충분히 감전시킬 수 있는 전류를 내보내는 또다른 유명한 실험인 밀그램 실험과도 양립할 수 있다.


나중에 실험이 끝나고 나서 산 쿠엔틴 형무소와 아티카 형무소에서 끔찍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짐바르도는 그가 실험에서 얻어낸 것을 미국 하원 사법부 위원회에 제출했다.



----

짐바르도 교수는 아부가리브 교도소의 만행을 보고는 '루시퍼 이펙트'라는 책을 내었다.


필립 짐바르도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의 명예교수이며 예일 대학교, 뉴욕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02년 미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과학 협회 대표 위원회(Council of Scientific Society President)의 회장과 스탠퍼드 테러리즘 심리학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의 연구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짐바르도 교수는 혁신적인 연구자이자 교육자이며 〈심리학의 발견(Discovering Psychology)〉이라는 TV 시리즈를 창안해 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성인의 수줍음을 최초로 연구했으며 수줍음이라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고통받는 성인과 청소년을 위한 '수줍음 클리닉'을 개설했다. 그가 수행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세계 곳곳에서 TV를 통해 방영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많은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필수 교재에 수록되어 있다.

2004년에 그는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범죄행위로 기소된 미군 퇴역군인의 군법재판에서 전문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그의 웹사이트 www.prisonexp.org는 매년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6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그의 연구 및 경력에 대한 정보는 www.zimbardo.com에서 얻을 수 있다. 


링크 아우슈비츠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아우슈비츠  (2) 2010.09.08
하인리히 법칙  (0) 2010.09.04
Posted by WN1
,

아우슈비츠

생각/내용 2010. 9. 8. 00:59


아우슈비츠 수용소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살인악마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독일 총리로 권력을 잡을 당시(1933년)
수용소 정문.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라고 씌여있다
버려진 시체들
산을 이룬 희생자들의 신발
가스실 내부
생체실험에 이용된 아이들
      아 !, 아우슈비츠! 이 한마디 외침 밖에 달리 무슨 말이 있을수 있으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잔혹행위의 박물관이라 할 이 거대한 시설을 둘러보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입을 굳게 다문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야만의 극치가 모두 엄연한 사실이었다고 이 수용소 시설과 유물과 사진들은 웅변하고 있다. 이 역사의 현장과, 전쟁범죄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요즘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외국 관광객 가운데 피해국 이스라엘과 가해국 독일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피해자 나라와, 끝없이 과거사를 참회하는 가해자 나라가 모두 정책적으로 이 도시로의 수학여행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의사 멩겔레 박사에 의해 인체실험을 받고있던 집시소녀들. 너무 여위어 성별구분도 어려울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남부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독일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에 400만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스실, 철벽, 군영, 고문실 등이 있다.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인구 5만명 남짓한 수용소 도시 오시비엔침 시가지를 약간 벗어난 수십만 평 들판에 자리 잡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겉으로는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고압전류가 흐르던 철조망만 아니라면, 아직 붉은 색이 고운 2층 벽돌 건물들은 전원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키 큰 포플러의 정연한 행렬과, 잘 가꾸어진 잔디와 꽃밭이 연출하는 겉모습이다. 그러나 줄 지어 늘어선 건물 안으로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관광객들은 고통스러운 정서의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수용소 지하감방 '질식의 방' 수감자들이 손톱으로 그린 벽화. 해골같은 모습은 자신들의 얼굴이다.  첫 건물에서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유태인 시체를 태운 재그릇이 관광객을 맞아준다. 유럽 각지에서 강제로, 혹은 기만적인 수법으로 연행해 온 유태인 열차가 도착하면, 나치는 노동력이 없는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불구자 등을 따로 집합시켜 즉시 가스실로 데려갔다. 총살, 교수형, 강제노동, 질병, 굶주림, 고문, 인체실험 등으로 죽은 사람들을 합쳐 이 수용소에서 생목숨을 뺏긴 사람은 150만 명으로 추산된다.그렇게 죽은 시체들은 가스실에 딸린 소각시설로는 다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야외 소각장을 여럿 만들어야 했다. 
시체 소각로
      죽은 사람의 옷과 신발과 소지품들은 재활용품으로 쓰였고, 잘라낸 머리칼로는 카펫을 짰고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 썼기 때문에 유태인은 죽어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 밖으로 달려 나가는 관광객들도 있다. 휴먼 카펫의 원료인 머리털이 전시실을 가득 메운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사람이 있을까.갈비뼈가 앙상한 가슴에 말라붙은 젖가슴을 부끄러워하는 여인과, 인체실험 대상인 집시 소녀들의 앙상한 전신 사진은 체중 35kg이 넘는 여성 재소자가 없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증명해 주었다. 한 여성 재소자가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빵 3개로 허기를 채웠다니 배고픔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를 말해준다. 가스실 바로 옆에 설치된 소각장. 독일에서 만들어 현지에서 조립한 시체소각로.  한꺼번에 900명을 살해하였던 가스실은 인간의 야수성을 웅변하는 증거다. 인근 제2, 제3, 제4수용소에는 그보다 더 큰 가스실이 있었다니 살인의 공업화, 살인기술의 과학화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가스실 옆에 있는 시체소각로는 아직도 가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탈주자, 탈주 방조자, 정치범 등을 처벌하던 지하 감방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대의 모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사의 방' 이란 곳은 음식공급을 끊어 굶겨 죽이는 곳이고, '질식의 방' 은 산소 결핍으로 서서히 죽게 하는 시설이다. 이 방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손톱으로 벽에 새긴 그림과 글씨들이 남아있다. 해골 같은 얼굴들은 아마도, 그 방에서 죽어가던 자신과 동료들 모습일 것이다.1982년 교황청이 성인 순교자로 추서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순교한 곳이 바로 이 방이다. 폴란드 출신 사제였던 그는 탈주자 발생에 대한 징벌로 10명의 동료가 '아사의 방' 으로 가게 되자, 아내와 어린 자식 걱정으로 우는 젊은이를 대신해 그 방에 들어가기를 자청한 것이다. 면적이 54만평이나 되는 제2수용소 구내로 뻗은 철도 인입선.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남자는 강제노역장, 노약자는 가스실로 끌려갔다.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출신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유태계 헝가리인인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이 죽음의 도시에 끌려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운명> 3부작에서 홀로코스트는 인간세상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하였다.그 예단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적중되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르완다와 코소보의 인종청소, 체첸과 중동지역 종족분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야만을 인류사회에서 영원히 뿌리 뽑아야 한다.
      글이 너무 장문이어서 읽기에 불편하셨으리라 생각 된다.그러나,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인종말살 사건이니 만큼기왕에 읽는 분들을 위하여 몇 군데 검색을 거쳐압축, 또 압축한 글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60 년대 후반의 '킬링필드' 사건처럼 사후에 씌어진 글이라 이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이나마 여러 사진들을 살피며 사실성에 입각 편집 했다.


      ---------------

      아우슈비츠 여성 인체실험 기구 발견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나치 학살의 생생한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서 150개가 넘는 부인과 및 외과 시술기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이 26일(현지시각) 밝혔다.

      이들 기구는 당시 여성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인체실험을 했던 외과의사 카를 클라우베르크의 행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의 기구들은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 근처 한 주택에서 발견됐다.

      박물관 측은 "최근 몇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발견 가운데 하나"라며 "모든 정황이 클라우베르크에 의해 기구들이 사용됐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나치의 SS 엘리트 친위대원이었던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의 집단 불임시술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여성 수용자 수백명이 그의 실험대상이 돼 생을 마쳐야 했다.

      그는 1945년 1월 옛소련의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자 독일 베를린 근처의 라벤스브뤽 여성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실험을 계속했다.

      그해 6월 소련인들에게 체포돼 25년형을 받은 그는 1955년 서독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수용소 생존자들에 의해 또다시 기소됐고, 2년 뒤 숨졌다.

      이번에 기구들이 발견된 주택은 2차 세계대전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둘러싸여 완전히 폐쇄됐던 지역에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사범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유럽 유대인을 집단학살하는 장소가 됐다.

      1940~1945년 이곳 수용자들을 비롯해 폴란드인, 소련인 등 약 110만명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안내자설명)

          첫:어머니가 유방암으로 2년 고생후

          죽었다.유대인 담당의사에게 "우리 어머니를 잘 고쳐 주셔서 고맙다" 고


                      반어법적으로 의사에게 비꼬는 편지를 쓴다. 또 예술학교에 낙방한 것도 유대인 선생이 떨어

          뜨렸다고 한다

          둘:나라없이 떠도는 유대인들이 뛰어난 머리와 장사수완으로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그들을 미워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이 그들이 없어지면 자기들에게 이익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하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된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유태인 홀로코스트,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1919년에 유태인 희생자가 600만명?
      1차대전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진위를 떠나 이 전쟁에 대한 유태인 국제은행가들의 배후 음모설이 무성했다. 서구의 유태계 언론은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런 맥락에서 1919년 미국의 유태계 유력지 American Hebrew 에 실렸던 한 기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눈길을 끈다:

       

      유태인 남자와 여자 600만 명 생필품의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80만 명의 어린 아이들이 주린 배를 안고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운명은 이들이 신의 계명이나 인간의 법을 어겨서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유태인의 피를 원하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는...” (The Crucifixion of Jews Must Stop!, October 11, 1919)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2차대전과 관련하여 또 다시 등장하게 된다. 뉴욕의 유태교 랍비 이스라엘 골드슈타인은 1942년 12월13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시까지 독일 점령지의 유태인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으며, 1943년 3월2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독일규탄집회에 대한 1943년 3월 2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랍비 헤르츠(Rabbi Hertz)는 히틀러 정권에 희생된 유태인의 수가 600만 명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2세기 로마 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바코크바 항쟁에 관해 탈무드(Gittin. 57b-58a)는 로마군이 베타르에서 40억명의 유태인을 학살했으며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어린이들을 두루마리에 감아 불태워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40억 명의 유태인은 고사하고 1천6백만 명의 유태인 유아들이 지구상에 존재했는지 의문이다.

       

       

      Holocaust revisionism의 선구자 뽈 라시니에; 그 자신이 전쟁 중 독일 강제수용소 수감자였다.

       

       

      홀로코스트 (Holocaust)
       

      a. 美-英의 프로파간다

      - 이미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유태인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Haaretz, Nazi Soap Stories Termed 'Invention', February 11, 2005)나 멩겔레 박사의 생체실험에 대한 얘기는 고사하더라도 2차대전 중 미국과 영국에서는 주요언론의 反독일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한때 미국에서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유태인들이 조직적으로 감전사(感電死) 당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까지 가미된 기사가 유포되기도 했다. (이 기사에는 가스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45년 2월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킨 소련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독일군이 “일시에 수백 명을 전기 처형할 수 있는 특수 콘베어 벨트를 가동했고 시신들은 벨트에 의해 소각로에 옮겨져 몇 초 내에 화장된 뒤 그 재는 근처 양배추 밭의 비료로 쓰였다...”고 보도했다. (United Press dispatch from Moscow; Washington D.C. Daily News, February 2, 1945)

       

      - 당시 현직 미국 대법원 판사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연합국측 수석검사로 활약했던 Robert Jackson은 독일군이 일시에 2만 명의 유태인을 자취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새로 발명된” 기계를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lue series, Vol. 16, June 21, 1946)

       

      b. 유태인 희생자 600만 명 (아우슈비츠 사망자 400만 명에 근거)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Former Sorbonne literature professor Robert Faurisson: "The alleged Hitlerite gas chambers and the alleged genocide of the Jews constitute one and the same historical lie, which has made possible a gigantic financial-political swindle, the principal beneficiaries of which are the State of Israel and international Zionism, and whose principal victims are the German people and the entire Palestinian people."

       

      - 유명한 홀로코스트 역사가 제랄드 라이트링어(Gerald Reitlinger)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태인의 숫자를 약 70만으로 추정했다. 좀더 근래에 들어서, 프랑스 홀로코스트 역사가 장-끌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은 아우슈비츠의 총사망자 80만 가운데 63만 명을 유태계로 추정했다. (G. Reitlinger, The Final Solution, 1971; J. C. Pressac, Le Crematoires d'Auschwitz: La Machinerie du meurtre de mass, 1993)

       

      - 1990년 5월 31일 프랑스의 보수성향 시사지 National Hebdo 는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비유태인 포함)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가를 보도했다:

       

      “8백만(프랑스 전범조사국) - 5백만(르몽드, 1978년 4월20일자) - 4백만(1990년까지의 아우슈비츠 기념관 추모비) - 3백만(아우슈비츠 소장 Rudolf Hoess의 자백) - 160만 (예후다 바우어 교수) - 125만(Raul Hilberg 교수) - 85만(제럴드 라이트링어, The Final Solution) - 7만5천(소련 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아우슈비츠 관련문서들).”

       

      (Source: National Journal, 2003)

      Date

      Official sources of information

      Figures

      31.12.1945 French Investigation Panel on Nazi-War-Crimes

      8.000.000

      19.08.1998 Chief Rabbi from Poland (Süddeutsche Zeitung)

      6.000.000

      20.04.1978 Le Monde (French daily paper)

      5.0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5.000.000

      20.04.1989 Eugen Kogon, Der SS-Staat (famous book of a holocaust survivor, page 176)

      4.500.000

      31.12.1952 Der Neue Herder (Enzyclop., Germany) 7th edition (p. 214)

      4.500.000

      01.10.1946 IMT-doc-ument 008-USSR (Nuremberg Military Tribunal)

      4.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4.000.000

      24.11.1989 Chief Prosecutor, Mr. Majorowsky, Wuppertal, Germany (indictment 12 Js 1037/89)

      4.000.000

      26.07.1990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4.0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4.000.000

      25.01.1995 Wetzlarer Neue Zeitung (German daily paper)

      4.000.000

      01.10.1946 IMT-doc-ument 3868-PS (Nuremberg Military Tribunal)

      3.000.000

      01.01.1995 Damals (official monthly magazine on history, sponsored by the Bonn government)

      3.000.000

      18.07.1990 The Peninsula Times (daily paper, S.Francisco, USA)

      2.000.000

      25.07.1990 Hamburger Abendblatt (daily paper Germany)

      2.0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quoting Chancellor H. Kohl. Minimum of 2 million)

      2.000.000

      02.05.1997 USA-Today (daily paper USA)

      1.500.000

      11.06.1992 Allgem. Jüdische Wo.Ztg (Jewish weekly, Bonn)

      1.500.000

      08.10.1993 ZDF-Nachrichten (German TV, ZDF-News Magazine)

      1.5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3.05.2000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500.000

      01.09.1989 Le Monde (French daily paper)

      1.433.000

      02.02.1995 BUNTE Illustrierte (German weekly magazine)

      1.4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1.200.000

      27.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1.100.000

      27.01.1995 IfZ (Institut for Contemporary History, München, a government institution)

      1.000.000

      03.05.2000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reputed German daily)

      1.000.000

      31.12.1989 Pressac, Auschwitz, Technique ...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928.000

      27.09.1993 Die Welt (German daily paper)

      800.000

      22.01.1995 Welt am Sonntag (German daily, Sunday edition)

      750.000

      01.05.1994 Focus (German weekly magazine)

      700.000

      23.01.1995 Die Welt (German daily paper)

      700.000

      31.12.1994 Pressac, Die Krematorien ... (2nd official report on Auschwitz, commissioned by the Jewish Beate Klarsfeld Foundation)

      470.000

      08.01.1948 Welt im Film (British news reel, nbr. 137)

      300.000

      06.01.1990 Frankfurter Rundschau (German daily paper)

      74.000

      31.05.1994 Hoffmann, Stalins Vernichtungskrieg (Book on Stalin's war by a renowned German historian, p.302 f.)

      74.000

      17.08.1994 Intern. Red Cross Arolsen - Department of holocaust investigations (Ref. nbr.: 10824)

      66.206

       

      호주 출신 revisionist Dr. Frederick Toben

       

      c. 사망원인


      - 전후 연합군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들의 운영과 관련된 수만 건의 독일 문서들을 획득했으나 이 가운데 독일 수뇌부가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려 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유태계 역사가들은 독일이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 관련문서들을 소각했거나, 혹은 독일이 모종의 암호 문서를 통해 대량학살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연합군이 확보한 독일 문서들 가운데 유태인에 대한 인종말살 계획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문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유태인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압수된 독일 측 문서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설치되었던 강제수용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시설이 아니라 유태인과 전쟁포로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Arthur Butz 교수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다른 수용수로의 배치를 기다리는 수감자들을 수용했던 일종의 강제노동인력 집결지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노역이 불가능한 노약자나 병자가 주로 이곳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시도를 비롯한 수용소규칙 위반자들에 대한 처형사례를 제외하고 사망자 대다수의 사망원인은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한 전염병(특히 발진티푸스)의 창궐과 영양실조 및 기아였다. (Arthur Butz, The Hoax of the Twentieth Century, 1976)

       

       

      - 유태계인 프린스턴대의 Arno Mayer 교수는 1942년 ‘반제회의’에서 도출되었다는 소위 ‘최종해법(Final Solution)'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사망자들 가운데 수용소 당국에 의해 처형된 숫자보다 각종 질병이나 기아에 의한 사망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고 밝히고 있다. (Arno Mayer, Why Did the Heavens Not Darken?: The 'Final Solution' in History, 1989)

       

      - 전쟁 중반기부터 많은 강제수용소들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발진티푸스를 억제하기 위해 독일 당국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의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이 유태인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했다는 혐의에 반박하기 위해 피고측의 증거물로 제출된 문서들에서도 드러난다. 한 예로 1942년 12월 28일 친위대 산하의 수용소 관리행정국이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 수용시설들에 하달한 공문은, “Heinrich Himmler 친위대 총감의 지상명령”이라는 전제 하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숫자의 절대적 감소를 위해 수감자들의 건강 및 영양상태와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과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상부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Nuremberg doc-ument PS-2171, Annex 2. NC & A red series, Vol. 4, pp. 833-834)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d. 독가스 사용설


      -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대량 살상하기 위한 독가스실이 가동되었다는 設은 독가스실이나 처형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유태인 前수감자들의 증언에 의존한다. 이는 전쟁 중 독일이 탄환 절약을 위해 독가스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연합군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강제수용소들에서 - 딱히 유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 수감자들이 독가스로 집단 처형되고 있다는 요지의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전단을 자주 살포했다. 또한 같은 내용은 연합군이 운영하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주기적으로 전 유럽에 방송되었다.

       

      아우슈비츠의 한 작업실

       

      - Marika Frank라는 한 유태인 여성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수감되었을 때는 하루당 최소 2만5천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처형-화장되고 있었다는 1944년 7월 이었다. 1945년 2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던 그녀는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가스실에 대해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에 들었다고 술회했다. (Sylvia Rothschild, Voices from the Holocaust, 1981)

       

      - 33년간 듀퐁社에서 화공학자로 근무했던 William B. Lindsey 박사는 1985년 캐나다의 법정에서 독가스로 그 만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technically impossible") 얘기라고 증언했다. 이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마이다넥에 전시되어 있는 가스실을 현지 조사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했다는 방법으로는 지클론-B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The Globe and Mail - Toronto, February 12, 1985)

       

      *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주요 수용소들에는 실제로 이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가스실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은 발진티푸스를 옮기는 이를 죽이기 위해 수용소 운영진을 포함, 수감자들의 의복과, 침구 등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DDT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클론-B는 세계적으로 널리 쓰였던 대표적인 살균소독제였다.

       

      프레드 루처

       

      - Fred A. Leuchter는 사형수를 처형하기 위한 가스실 제작 전문가로 미주리 주(州)교도소의 가스 사형집행실을 도안하고 제작했던 보스턴 출신의 공학자이다. 1988년 2월 아우슈비츠와 마이다넥 “가스실”에 대한 현장조사를 단행한 그는 법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현존하는 가스실 및 관련시설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시설들에는 적절한 봉인장치와 환기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 시설들이 독가스로 인명을 살상하는데 사용되었다면 독일인을 포함, 그 시설 밖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e Leuchter Report: An Engineering Report on the Alleged Execution Gas Chambers at Auschwitz, Birkenau and Majdanek, 1988)

       

      이반 라게스

       

      - 1944년 내내 매일같이 독가스로 살해된 수만 구의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아있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대형화장터를 운영하는 Ivan Lagace는 1988년 4월 독일계 홀로코스트 연구가 Ernst Zundel 소송 심리에서 그와 같은 일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하루당 1만에서 최고는 2만구에 이르는 시신들이 화장되었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비상식적(preposterous)”이며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beyond the realm of reality)”이라고 증언했다. (Canadian Jewish News - Toronto, April 14, 1988)

       

      수감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공개 사진)

       

      e. 국제적십자협회(International Red Cross) 보고서

       

      “국제적십자협회 보고서가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전쟁의 말기를 향해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 수용소에서 대량 발생한 사망자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규명해주고 있다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보고서의 일부를 발췌하면;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후 독일의 수송체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수용소들은 거의 식량을 보급받지 못했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사자(餓死者)의 숫자는 급증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1945년 2월 1일 이와 같은 사실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통보해 왔습니다... 1945년 3월, 적십자협회 회장은 독일 친위대의 칼텐브루너 장군과 만나 문제를 논의했고 양자의 합의 하에 ICRC는 구호품을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ICRC 대리인을 수용소들에 상주시키게 되었습니다...’

       

      Ernst Kaltenbrunner, 1946년 처형; 마지막 유언, "독일에게 행운을!"

       

      수용소들에 대한 식량보급이 중단된 원인으로 독일 교통수송망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을 지목한 적십자는 수용소 수감자들의 안위를 위해 1944년 3월 15일, ‘연합군의 야만적인 폭격’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2일 ICRC는 수송체계의 붕괴로 인해 전 독일국민이 대규모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를 독일 외무성에 전달했다. 영양실조와 기아, 이에 더해 의약품이 극도로 희귀했던 전쟁말기,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해방된 수용소들에서 연합군 병사들이 발견한 많은 시체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독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은 인근 도시들에서 발생한 폭격, 질병, 기아로 인한 독일인 사망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발견한 시체더미에는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 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 적십자위원으로 일했던 스위스 태생의 Maurice Rossel 박사는 Serge Lanzmann과의 1993년 인터뷰에서 아우슈비츠를 예고 없이 시찰한 그는 그곳에서 가스실이나 굴뚝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으며 시체를 태우는 냄새도 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Theresienstadt 수용소에 그가 목격한 것은 좋은 옷을 입은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Richard E. Harwood, Did Six Million Really Die?, 1988)

       

      *1984년 소련이 최초로 공개한 아우슈비츠 관련 문서들을 토대로 작성된 국제적십자협회의 해당년도 12월 31일자 감사보고서에는 독일이 전쟁기간(1939-1945) 동안 운영했던 모든 강제수용소들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수(모든 국적과 사망원인 포함)가 282,077명으로 나타나 있다. 아우슈비츠 사망자 수는 53,633 명이다.

       

       

       

       

      f. 2차대전 前後 세계 유태인 인구

       

       World Almanac, 1929 - 15,630,000 (p.727)

       

       World Almanac, 1933 - 15,316,359 (p.419)

       

       World Almanac, 1936 - 15,753,633 (p.748)

       

       미국유태인위원회(AJC, Bureau of the Synagogue Council), 1939 - 15,600,000

       

       World Almanac, 1940 - 15,319,359 (p.129)

       

       World Almanac, 1941 - 15,748,091 (p.510)

       

       World Almanac, 1947 - 15,690,000 (p.748)

       

       미국 이민귀화국 (INS), 1950 - 15,713,638 (Appendix VII, 'Statistics on Religious Affiliation'; Report to U.S. Senate Judiciary Committee, 1950)

       

      Jews In Europe - 1938:
      8,039,608 - 1948: 9,372,668

       

       

       

      2000년, 유태계인 미국의 노먼 핑클슈타인(Norman G. Finkelstein)교수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이렇게 요약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과 관련된 책들의 대부분은 사료(史料)로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실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뻔한 거짓말 아니면 넌센스로 채워져 있다... 홀로코스트 업계가 매일같이 만들어 내는 얘기들의 비상식적 본질을 감안할 때,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그런 얘기들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The Holocaust Industry, 2000)

       

       

      Anne Frank
      그녀가 쓴 일기로 인해 안네 프랑크는 아마도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태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다른 유태인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안네와 그녀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44년 9월, 1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프랑크는 몇 주 뒤 Bergen-Belsen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 곳에서 1945년 3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에 남아 있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 병원에 입원 중 병상에서 아우슈비츠에 진주한 소련군을 맞았다. 그는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아우슈비츠 병원

      - 아우슈비츠 수용자인 유대인을 치료해주는 의사 -

       

      아우슈비츠의 간호원들

       

      만약 독일의 국가정책이 유태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사가 비극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이야기는 독일이 의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전쟁 전 유태인에 대한 독일정부의 주안정책은 국외이민이었고 전쟁발발 직후에는 게토에, 그리고 1943년 이후로는 강제수용소에 수용하는 것이었을 뿐 유태인의 인종적 말살을 노린 genocide가 아니었다.

       

      미국 revisionist Michael Hoffman과 Canada의 Ernst Zundel

       

      관련 링크:

       

       http://www.zundelsite.org/

                   

       http://www.revisionist.com

       

       http://www.ihr.org

       

       http://www.adelaideinstitute.org/

       

       

       

      Abraham Foxman.  ADL National Director
      "The Holocaust is something different. It is a singular event. It is not simply one example of genocide but a near successful attempt on the life of God's chosen children and thus, on God Himself. It is an event that is the antithesis of Creation as recorded in the Bible; and like its direct opposite, which is relived weekly with the Sabbath and yearly with Torah, it must be remembered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DL bulletin - ADL on the Frontline, January 1994)

       

      *"The Talmudic epigraph of Stephen Spielberg's Schindler's List,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The observant knew that the traditional version, the one taught in all Orthodox yeshivot (religious schools), speaks of 'whoever saves the life of Israel.'" (Peter Novick, The Holocaust in American Life, 1999)

       

      에밀리 & 오스카 쉰들러

       

      "What did I think? I'll tell you. Scheisskopf (sXhead). But I was the idiot for falling in love with him. I am never going to cry; there is no sense in it. Schindler changed women like he changed suits. Once, we were well-off, but then we lost everything and he abandoned me and I have not recovered... There never was a 'Schindler's List'. It was drawn up by a man called Goldman. This man took money to put a name on that list - no money, no place on the list. I was told this by a Dr. Schwartz, in Vienna; he had paid in diamonds to save his wife... Hah! Neither of us was a hero... Oskar was always complex; he was playing both extremes, always, even at the end with Nazis against the Jews." - Emily Schindler, wife of Oskar Schindler, Drudge Report, June 1, 1999

       

       

      Steven Spielberg
      "Flanked by Holocaust survivors, Los Angeles teens and many of the film's stars, including Ralph Fiennes, Ben Kingsley, Embeth Davidtz and Caroline Goodall, Spielberg said he hoped "Schindler's List" would prove to Holocaust deniers that the murder of 6 million Jews did occur and that it would help educate children to prevent history from repeating itself... "There are Holocaust deniers who are so stuck in their hatred for Jews that neither 'Schindler's List' nor the Shoah Foundation will be able to convince them that 6 million murders actually occurred, but still we must try to convince them," Spielberg said... Survivor Helen Jonas-Rosenzweig told the director, "Schindler saved us, but you gave us our second life." Spielberg said that in the decade since the release of "Schindler's List," the world has become a "very sad place again," which shows that people "don't really learn that much from history, and they need to." (Spielberg: Won't comment on 'Passion',
      www.CNN.com, March 4, 2004)

       

       

      The Black Book of Communism - LE LIVRE NOIR DU COMMUNISME
      "An 800-page compendium of the crimes of Communist regimes worldwide, recorded and analyzed in ghastly detail by a team of scholars. The facts and figures, some of them well known, other newly confirmed in hitherto inaccessible archives, are irrefutable. The myth of the well intentioned founders - the good czar Lenin betrayed by his evil heirs - has been laid to rest for good. No one will any longer be able to claim ignorance or uncertainty about the criminal nature of Communism, and those who had begun to forget will be forced to remember anew." (from the dust jacket of English edition, 1997)

       

      Moshe Leshem.  former Israeli ambassador to U.N.
      "This was a movement staffed in its upper echelons by Jewish Communists and yet the world is comparatively silent about the holocaust and war crimes this thoroughly kosher system inflicted and the identity of the persons who were its architects. Auschwitz is on the tip of every tongue but who has heard of Kolyma, Magadan, the Solovetsky islands and the other infernal Soviet centers of human destruction in eastern Siberia? Who has seen films and books about the millions of human beings worked, frozen and starved to death in the construction of the White Sea-Baltic Canal, over which stood a triumphant, colossal statue of the Jewish communist mass murderer Genrikh Yagoda? The Jewish-communist epoch of mass murder has disappeared into history in one of the great vanishing acts of all time. Only practiced deceivers, with all the sleight of hand of the most accomplished stage magicians, could pull off such a coup against the rest of humanity. To trick mankind into focusing nearly all expiatory sentiment, monuments and commemoration on Jewish victims and brand the Mark of Cain - the very words war crime and holocaust itself - on Germany and upon Germans alone as their proprietary trademark, must be regarded as one of the most masterful achievements of psychological warfare in the annals of illusion... Israelis and American Jews fully agree that the memory of the Holocaust is an indispensable weapon - one that must be used relentlessly against their common enemy... Jewish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thus labor continuously to remind the world of it. In America, the perpetuation of the Holocaust memory is now a $100-million-a-year enterprise, part of which is government-funded." (Balaam's Curse: How Israel Lost Its Way, and How It Can Find It Again, 1989)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의 만행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유태인이 장악한 소련은 3천만에서 5천만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폴란드, 헝가리 국민들을 학살했다.

       

      라트비아 1941년

       

      




      1983년 5월말 어느날 폴란드 크라코프市 공항 입국장 앞, 흰머리의 60대 노인이 터질 듯 붉은 색의 장미 39송이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라? 진짜 실라야?”

      세련된 옷차림의 50대 후반 여인이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두 사람은 헤어진 지 39년만에 만났다. 이 남자 유라세크 빌레키의 손에 들린 장미의 개수는 그들이 헤어져있던 년수 만큼이었다.

      1944년 7월 21일 23살 청년이던 폴란드인 빌레키는 나치 친위대 장교 복장을 한 채 유태인 죄수복 차림의 19살 처녀 실라 시불스카를 데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유태인 수만명이 학살당한 아우슈비츠에서 유라세크는 나치군복생산 공장 인부로 일하고 있었다. 폴란드 태생 유태인 실라는 가족과 함께 끌려와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실라가 끌려온 첫째 날이었다. 수용소 입구에서 유라세크가 막 잡혀온 유태인무리중에서 실라를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실라의 가족은 그날 바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나치가 끌고간 ‘샤워실’에서 가스 샤워를 맞고 숨졌다.

      실라는 유라세크가 일하던 공장에 배치돼 일하게 됐다. 유라세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라를 살리기 위해 탈출계획을 짰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친위대 장교복을 훔쳐 입고 실라를 죄수처럼 끌고 수용소 정문을 걸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탈출은 성공했다. 9일을 걸어 크라코프의 유라세크 부모집을 찾아갔다. 실라는 안전한 이웃집 농장 지하창고에 숨겨졌다. 둘은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면 꼭 만나 결혼하자”고.

      유라세크는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1945년 여름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며 2차대전은 끝났다. 바로 그날 유라세크는 크라코프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라는 없었다.

      불과 한달전 이 도시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자 실라는 유라세크를 찾아 헤맸다.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긴 실라는 그가 오지 않자 죽었다고 여겼다. 절망한 실라는 생존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실라는 유라세크를 죽었다고 여겼고, 유라세크는 그녀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1982년 실라가 처음으로 폴란드를 찾았다. 묵었던 호텔에서 누군가에게 오래된 사랑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사람이 “그 스토리 나도 아는데”라고 했다. 유라세크는 매년 바르샤바에서 크라코프로 찾아와 실라를 수소문했던 것이다.

      1년뒤 공항에서 만난 두 사람의 눈은 뜨여지지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이 전혀 멈춰지지가 않았다.

      실라가 말했다, “우리 서로 이혼하고 같이 삽시다”. 유라세크가 말했다, “당신만을 사랑해. 그렇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식과 손자들을 버릴 수는 없어”.

      실라는 “우린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2002년 뉴욕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AP통신은 두 사람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한 지 정확히 66년이 되는 21일 “유라세크 빌레키와 실라 시불라스카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이스라엘 야드바셈재단에 의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사진=AP통신

      통신과의 인터뷰에 나선 유라세크의 손에는 젊은 남녀의 흑백사진이 들려 있었다. 바로 20대 초반의 자신과 10대 후반의 실라였다.

      “우리는 서로 운명이었습니다. 그때가 다시 돌아온다면 똑같이 그녀를 사랑하고 함께 탈출했을 겁니다”

      유라세크 빌레키의 목소리는 89세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2010.09.08
하인리히 법칙  (0) 2010.09.04
Posted by WN1
,


백과사전에서는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 관리감독자였던 H. W. 하인리히가 그의 저서 <산업재해예방(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A Scientific Approach)>에서 소개한, 오늘날 산업재해 예방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이론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법칙을 말한다. 그는 수천 건의 보험 고객상담을 통해 자료 분석 결과를 소개하면서 '사고는 예측하지 못하는 한 순간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여러 번 경고성 징후를 보낸다.'고 주장하며 이를 1 : 29 : 300의 법칙으로 정립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심각한 안전 사고가 1건 일어나려면 그 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경미한 사고가 29건, 위험에 노출되는 경험이 300건 정도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징후들을 제대로 파악해서 대비책을 철저히 세우면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2000년 개봉된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통해 일반인들에까지 알려졌으며, 최근에는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그 적용분야가 확대되어 개인은 물론 사회적 실패나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 등 사회ㆍ경제 전반적인 현상을 분석ㆍ설명하는 데 널리 활용되고 있다



-------------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1:29:300 이라고도 불리며 안전관리에서는 거의 바이블 수준으로

인정받는 학설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보험)통계학자 하인리히가

330건의 사고를 분석하면 1건의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이미 29건의 위험한 사고가 있었고, 그리고 큰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큰 사고가 날 뻔했던 300건의 경미사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소한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경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을 무관심하게 처리하면 결국 

큰 사고를 예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고는 큰 사고 작은 사고가 있고 작은 사고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결국 사고는 운이 좋아 작은 사고로 그쳤지만 어떤 사고든

대형사고로 연결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사고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고 제품의 A/S에도 해당이 됩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도요다 자동차의 리콜 문제가 그렇고,

어떤 전자제품도 그랬고 과자에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을 잘못 관리하면 회사가 망하는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우유회사는 백년이 넘는 전통을 가졌다고 했지만

소비자의 불만을 무시하다 도산되다시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교훈을 잘 아는 민간기업들은 옛날과는 다르게

정말 적극적으로 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쥐머리 같은 이물질이 있다는 소비자 신고를 받은 기업은

아예 해당제품의 생산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6일 우리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한 방에 침몰했고

46명의 고귀한 우리장병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한지 2달이 되는 지금까지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의 잘못을 이야기 하는데,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하인리히 법칙에 대입하면

그 동안 분명 사소하게 넘긴 우리들의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노사분규가 많은 회사의 제품을 잘 사지 않는다든지,

경영자가 부도덕한 회사의 제품을 기피하지 않는가요? 

그렇지만 정부에서 하는 일이 그럴리가? 하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겠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고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분명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고라는 것은 작은 문제가 쌓이고 쌓여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터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좋은 일은 연속으로 생기는데, 이것을 선순환이라고 하는데,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방향을 바꾸려면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




----------------


[하인리히법칙 = 1:29:300의 법칙] 


실패를 예고하는 300번의 징후 ?


1920년대에 미국의 여행보험회사에 다니고 있던

 

허버트 하인리히는

 

이 회사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 통제 부서에 근무하면서

 

업무 성격상 많은 사고 통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발생한 7만 5,000건의 사고를

 

정밀 분석하여

 

1931년에 『산업재해 예방』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하인리히는 이 책에서 재해에 의한 피해 정도를 분석해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어떠한지를 숫자상으로

 

명확히 밝혀냈는데,

 

그 비율이 바로 1 대 29 대 300이었다.

 


하인리히는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큰 재해가 한 번 발생한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작은 재해가 29번 있었고,

 

또 운 좋게 재해는 피했지만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사건이

 

무려 300번이나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산업재해는

 

어떤 우연한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러할 개연성이 있었던 경미한 사고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자명해진다.

 


 

주먹구구 방식이 아니라 과학적 통계에 근거하여 도출된

 

하인리히 법칙은

 

어떤 상황이든 간에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원래 하인리히 법칙은 산업재해에 적용되어 발표되었던 것이었으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고나 재난, 실패와

 

관련된 법칙으로 확장되어 해석되고 있다.



이 법칙은, 결정적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나타나는

 

실패의 징후들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페덱스의 1:10:100의 법칙]

 


서비스 부문에서 페덱스(세계적인 물류기업)에는

 

1:10:100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불량이 생길 경우 즉각적으로 고치는 데에는 1의 원가가 들지만,

 

책임소재나 문책 등의 이유로 이를 숨기고

 

그대로 기업의 문을 나서면 10의 원가가 들며,

 

이것이 고객 손에 들어가 클레임으로 되면,

 

100의 원가가 든다는 법칙이다. 



-------------


하인리히 법칙

제비가 낮게 날면 곧 비가 온다.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었다.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은 먹이인 잠자리가 낮게 날기 때문이다. 잠자리가 낮게 나는 것은 공중에 습기가 많아 날개가 젖기 때문이다. 잠자리가 낮게 나는 것은 공중에 습기가 많아 날개가 젖기 때문이다. 잠자리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은 쉽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징후를 앞세우며 다가온다. 그리고는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2008년 5월 12일 중국 쓰촨성에서 일어났던 대형지진의 경우를 보자. 지진이 올 때는 어느 순간 불쑥 오지 않는다. 징후들을 앞세우고 초기 미진까지 앞세우면서 일어난다. 당시 쓰촨성에서 일어난 지진은 강도 7.8로 이는 30년 만의 대지진이었다. 쓰촨성 지진 역시 발생하기 전에 여러 징조들이 나타났다. 보름 전 후베이 은스시에 있는 관인탕 저수지에서는 8만 톤가량의 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오전 7시경 고요하던 저수지의 물이 갑자기 소용돌이치더니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저수지 바닥이 갈라지면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지진 징후들 중 하나이다. 진앙지 인근에서는 우물물의 수위가 갑자기 높아졌으며 지진 발생 며칠 전에는 강물의 온도가 뜨거워지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지층에 변화가 생기면서 나타나는 지진의 징조들이다. 또 지진 발생 10여일 전에 지진운(地震雲)이 발생하는가 하면 지진 발생 사흘 전에는 이상 징후를 느낀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집단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진운이란 지층 속에 있던 뜨거운 김이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와 형성되는 구름을 말한다. 이것을 보고 주민들은 지진의 징조라면 당국에 대책을 요구했으나 당국에서는 이틀 연속 비가 내리고 수온이 상승했기 때문에 두꺼비들이 산란과 부화를 위해 이동하는 것이라며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올림픽을 앞두고 대외 이미지를 의식해서 이를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대대적인 지진으로 이어졌다.

 

사회적인 현상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통사고가 잦은 곳에는 머지않아 대형사고가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면 맞다. 몇 가지 잠재적인 중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연처럼 겹쳐질 때,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번의 작은 사고가 지나가고 잠재적인 사고는 더 많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 통계적인 법칙으로 정립한 사람은 하버드 윌리엄 하인리히였다. 미 해군장교출신의 하인리히는 보험회사에서 보험 감독관으로 산업재해 일을 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각종 산업재해를 보며 그 사고들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이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보험회사에 접수된 5만 건의 사건, 사고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여 이들의 통계적인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그에 의하면 한 번의 대형사고 이를테면 산업재해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면 그 이전에 동일한 원인으로 부상이 29건 발생했으며 부상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사고가 날 뻔한 경우가 300건 정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1929년에 발표된 이 논문은 하인리히 법칙으로 명명되었다. 이를 사회적인 사건, 사고에 적용하자면 강력 범죄사건 하나가 발생했다면 동일 수법의 경범죄가 29회, 범죄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범죄의 시도가 300건 정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나라 교통 관련 연구원에서 발표한 자료도 이와 근사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교통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장소에서는 그 이전에 35-40회 정도의 가벼운 사고가 있었고 300여 건 정도의 교통법규 위반 사례가 적발되더라는 것이다. 하인리히는 또 사고로 인한 재해비용에 대해서도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가설을 내놓았다. 하나의 사고로 인해 재해가 발생할 경우 그 비용은 직접비용이 하나라면 간접비용은 넷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재해비용 전체를 계산하려면 직접적인 손해비용에다 곱하기 5를 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손해보다는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손실이 더 크다는 얘기다.

 

그 후 하인리히 법칙은 타이와 피어슨에 의해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되었다. 그들이 영국 보험회사의 사건, 사고 100만 건을 분석하여 발표한 결과를 보면 사망사고 1건 뒤에는 중경상 3건, 응급처치 50건, 물손사고 80건, 사고가 날 뻔한 사례가 400건으로 집계되었다. 이 법칙들은 자연 현상이나 사회현상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으로 어떤 사회적인 큰 사건이 일어날 때도 특정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암시하는 작은 사건들이 잇따라 지나간다는 것이다.





'생각 > 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자인 리더' 美 아이데오社  (0) 2010.09.11
사이코패스 Psychopath  (0) 2010.09.08
아부그라이브(이라크전 포로 학대)  (0) 2010.09.08
스탠포드 감옥 실험  (2) 2010.09.08
아우슈비츠  (2) 2010.09.08
Posted by WN1
,

유영만

생각/인물 2010. 9. 3. 03:39



유영만 대학 교수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1963년 충북 음성 출생. 한양대 교육공학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교육공학 박사학위 취득. 삼성인력개발원과 안동대를 거침. 60권에 가까운 책을 쓰거나 번역하면서 지식생태학자·교육공학자·자기개발 전문가로 이름을 알려왔다. 농담처럼 ‘들이대학교 저질러학과 뒷수습전공’이라는 말을 하지만, 삶을 꾸준히 개척해 온 학자다. 그 개척의 과정에는 공고 졸업 후 용접공으로 일할 때 처음 참모습을 알게 된 책이 함께했다. 



유영만 교수의 블로그




‘청춘(靑春)’을 생각하면 ‘푸름’과 ‘봄’이 떠오른다. 나뭇잎이 가장 싱그러운 때를 뜻하는 것이 푸름이요, 사계절에서 가장 먼저 오는 계절은 봄이다. 그만큼 활력도, 의욕도 넘치는 시기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의 청춘들은 그렇지 못하다. 무언가에 억눌려 있고, 고민에 짓눌려 활력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런 청춘들에게 활력과 의욕을 넣어주고자, 한 지식생태학자가 나섰다. 한양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유영만 교수. 그는 지식생태학자로 자신의 책 <
청춘 경영>을 통해 주눅이 들어 있는 학생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이야기하는 ‘청춘 경영’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청춘 시절을 활력 있고 의욕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유영만 작가는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로 ‘지식생태학자’로 불리고 있다. 생소한 학문인 ‘지식생태학’은 과연 무엇일까? 

지식생태학은 현재 기업에서 하는 ‘지식경영’에 대해 ‘과연 지식이라는 것이 경영의 대상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지식경영’은 지식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사람들의 지식을 저장한 후, 사람들이 없어도 언제나 지식을 꺼내어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데이터베이스화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에 대해 저자는 ‘지식을 사람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라는 입장이다. 

“사람이 없어도 그 사람의 지식을 남겨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하면 (그 사람의)노하우나 지식도 함께 퇴근합니다. 예를 들어 김치를 잘 담그는 사람이 그 노하우를 매뉴얼로 제작하여 배포해도 그 원래의 맛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매뉴얼이 아니고 그 사람을 만나 직접 배워야 그 솜씨를 배우죠. 지식생태학은 지식을 나눔에 있어 시스템이나 기술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만남 속에 어떤 조건과 문화를 만들면 지식을 서로 나누는 역동적인 현상이 만들 수 있는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재미있고 즐거운 일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지식생태학이죠.”




지금은 지식생태학자로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작가이지만, 그가 과거에 용접을 전공한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용접을 전공하여 졸업 후에는 한국전력에 입사하여 사회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왠지 모를 허전함에 방황을 했다고 한다. 

“하루 하루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뭐랄까 피 끓는 젊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까요. 목적 없는 방황 탓에 술로서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방황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작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책! 

여느 때와 같이 술집에 가려던 작가가 우연히 서점에서 보았던 고시체험수기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공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사법고시를 합격한 이의 수기를 보고 난 작가는, 이를 계기로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후 술을 끊고 사법고시를 합격하겠다는 마음으로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며 작가가 가진 책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고 한다. 사법고시 합격의 목적과 장학금을 위해 했던 공부는, 작가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공 서적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찾아가며 읽었으며, 나중에는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이에 글을 잘 쓰기 위해 책을 더욱 많이 읽었고, 하루에 A4 1장씩 글을 쓰자는 철칙도 정했다고 한다.

“필요에 의해서 했던 공부가 이제는 지적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내가 책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처럼, 내 책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글을 쓰지 않아 펜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A4 한 장씩 글을 쓰는 연습도 했죠.”

이렇듯 열심히 노력한 작가는 비록 사법고시를 보진 못했지만, 한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 후 해외유학까지 다녀와 교육공학자가 되었다. 해외유학 후 유명 대기업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지만 그는 몇 년이 지나고 과감히 퇴사를 감행, 대학강단에 서게 된다. 스승에게 한 약속, 강단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킨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걱정이 생겼다고 한다. 수업이나 혹은 상담하면서 만난 학생들을 보면 방황하는 청춘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눈에 초점을 읽은 학생을 많습니다. 몇 년 동안 입시에 치여 살다가 대학에 와서 갑자기 자유를 얻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죠.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할 지도 모르고, 목적의식도 없는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게다가 현실적인 걱정도 많죠. 너무 일찍부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작가는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책을 써서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온실 속에서 자라 약한 그들에게 거칠고 강하게 자란 잡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 청춘들이 겪는 시련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요즘 청춘들은 빠르고 쉬운 길만 찾는 것 같습니다. 역경 속에 경력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빛나는 경력은 부딪치는 역경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죠. 큰 비행기가 높이 오래 날아가려면 긴 활주로가 필요하듯 청춘 시절에 겪는 시련은 높이 날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청춘들이 많은 고민보다 몸으로 부딪히고 실행에 옮겼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요즘 학생들은 무언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 오히려 고민이 고민을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몸으로 부딪히며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해보라 충고한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생각에 근거한 행동이 바꾸는 겁니다. 너무 생각만 많이 하지 말고 도전하고 행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청춘이란 시기는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신나게 할 수 있는 것을 탐색하고 찾는 시기입니다. 그 탐색과 실험 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돼지는 45도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매일 땅만 보며 살죠. 그런 돼지가 하늘을 보려면 뒤로 넘어져야 합니다. 사람도 실패하고 넘어지다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실패는 넘어져서 일어나길 거부하고 포기했을 때죠. 여러 가지 도전과 실패가 반복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생의 지혜를 만들어 나가는 배움의 과정입니다.”

유영만 작가는 꿈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그는 ‘꿈은 꿔오는(빌려오는) 것’이란 신영복 교수의 말을 빌려 자신의 꿈이 어디 있는지,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꿔올 것인지 알아보라 했다.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낮에도 꿈을 꾸고, 함께 그 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저서는
  • 등.. 여러저서가 있다.. 그리고 '청춘경영'도 있다




    공부선수보다 전문인으로 키우자!


    이러한 시대변화에 부응하여 점차 우리 사회도 학력(學歷)보다는 학력(學力)과 실력(實力)이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으로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녀가 할 수 있는 분야, 하고 싶은 분야에 힘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개성을 찾아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과목을 다 잘하는 공부선수를 기르기보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인접분야에 대한 폭 넓은 안목을 지닌 사람들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문가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성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이다. 특정 분야의 지식과 기술만 알고 남과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극단적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내 자식을 공부 잘 하는 공부선수로 양성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왜 이런 공부를 해야 되며, 그런 공부가 나의 미래 삶에 어떤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어려서부터 일상생활과 관련지어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가르침의 과정에서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변할 것이다. 그리고 첨단 테크놀로지가 사회변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자라나는 세대들의 가치관과 인생관도 많은 부분 바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시적인 사회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많은 것이 변화해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해야 가치가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인간적 접촉을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인간적 만남을 통해서 서로 나누고 함께 가는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의 작은 것도 나름대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자연과 벗삼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자녀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각박해지는 삶, 경쟁이 치열해지는 삶일수록 학부모들은 자녀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적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인지를 생각해 보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첨단의 유행도 좋지만, 그러한 첨단의 유행을 가능케 했던 역사의 뒤안길을 탐색해 보면서 과거의 유산이 어떻게 오늘날의 사회발전과 미래의 디딤돌이 되는지 탐구하는 기회도 가져보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해서 그 분야의 전문성을 쌓아 나가면서 소박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학부모들이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부모의 생각과 교육관이 변할 때 비로소 우리 교육이 바로 서게 되지 않을까?



    부모들이여 변화에 주목하라!


    이제 학부모들은 사회변화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날로그 사회가 디지털 사회로 탈바꿈하면서 폐쇄적 연줄 공동체가 개방적 관심 공동체로 바뀌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아날로그 세대는 주로 정(情)과 연(緣)에 근거한 폐쇄적 가족집단주의를 근간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연대망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정과 혈연, 지연, 학연이 얽혀 있다.


    그러나 디지털 네트워크상의 개방공간에서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연줄망에 입각해 있는 기존 제도권에 대한 다양한 도전이 이루어진다. 명령과 통제에 대한 순종과 복종, 타협과 아부를 뛰어넘어 기존의 권위와 지위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아날로그 세대는 철지난 정보까지 자기와 폐쇄적 연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공유했다. 하지만 개방적 네트워크 공간에서는 정보의 수평적 무한복제가 가능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개방성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런 연줄 없이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무한대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아날로그 시대가 정보를 소유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았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정보를 공유하고 남과 다르게 활용하고 가공하는 것에서 그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또한 아날로그시대가 줄 잘 서면 출세하는 ‘앞으로 나란히’의 시대였다면,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옆으로 나란히’의 시대다. 그래서 자기와 수평적 관계망을 무한대로 확산하면서, 자신이 보유하지 못한 전문성은 수평적 관계망을 통해 타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차력(借力)이 뛰어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농업적 근면성을 발휘하여 열심히 일하면 출세하는 소위 ‘개미’형 인간이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 지식정보화 시대는 혈연, 지연, 학연 등의 폐쇄적 공동체를 벗어나, 시공을 초월하여 자신과 관심을 같이하는 사람과 언제, 어디서든지 관계의 줄을 이어가는 ‘거미’형 인간이 출세하는 시대다.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다양한 전문 영역간의 의사소통과 사귐, 그리고 지속적인 연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또한 개미와 같이 열심히 일하는 농업적 근면성보다는 남들이 보기에는 쉬운 것 같지만, 쉬면서도 끊임없이 머리를 써서 부가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지식노동이 필요한 시대다. 산업화, 아날로그 시대의 노동의 개념으로 보면 베짱이가 그늘에서 노래를 부르고 노는 것은 노동이 아니지만, 이를 지식 정보화 시대의 노동개념으로 새롭게 해석하면 엄청난 창조행위, 두뇌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민사고 천재들은 하버드가 꿈이 아니다(유영만/한언) 중에서 -


    유영만의 <용기>중에서

     

    용기의 첫 번째 적은 망설임입니다.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말은 '내일'이라고 하지요.

    '내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겠다.'

    '내일부터 책을 읽겠다.'

    하지만 한 번 미룬 사람은 내일이 오늘이 되면 또 '내일 하겠다.'고 말합니다.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방법은 그냥 실천하는 것입니다


    [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47>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한양대 교수
    학습자를 즐겁게 해 ‘지식의 자연분만’을 이끌어내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부 교수를 만나기 위해 캠퍼스를 찾았다. 3월의 대학가만큼 생기가 넘치는 곳도 많지 않다. 취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3월의 신입생은 좀체 주눅 들지 않는다. 지식생태학자로 인정받는 유 교수를 만난다는 기대감이 넘쳐서인지, 인터뷰 약속 시간에 비해 한 시간 앞서 대학 정문에 들어섰다.


    ◇교육공학을 전공한 유영만 교수는 학생과 젊은이에게 관심이 많다. 그는 ‘남들보다 잘하는 것’보다는 ‘어제의 나보다 잘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그는 “방황과 역경을 거치면 남과는 다른 무늬를 지니게 돼 삶이 훨씬 풍성해진다”며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확보할 때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제원 기자
    대학 구내 서점에 들렀다. “모교와 수많은 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유 교수의 육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남들보다 중학교를 1년 늦게 입학하고, 장학금이 보장된 공고에 다니고, 대학도 뒤늦게 들어간 그를 키운 게 책이었다고 고백해 왔다. 서점 직원은 학기 초여서 교재가 많이 팔린다고 했다. 딱딱하고 읽기 거북스러운 책들이 좁은 서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토익책을 비롯한 어학용 교재도 다수 눈에 띄었다. 교양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수업용 대학 교재는 10년 전이나 20년 전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독서를 강조하지만, 정작 대학 구내에는 읽을 만한 책이 없는 현실을 다시 목격하니 씁쓸했다.

    서점을 둘러 본 뒤에 약속 시간에 연구실을 찾았다. 대학 업무 때문에 총장실을 방문한 그는 아직 부재중이다. 연구실 앞의 복도를 오가며 그와 인터뷰를 준비했다. 그의 저서를 꺼내들고, 질문용으로 적어둔 문장을 살펴봤다. 마침 사진기자가 캠퍼스에 도착했다. 보통 인터뷰 중간에 사진 기자가 합류하는 관행을 고려할 때, 취재 준비 시간이 꽤 길어진 셈이다.

    유 교수와 약속을 잡던 과정이 떠오른다. 일정을 서로 확인하니 인터뷰할 수 있는 날짜가 별로 없었다. 유 교수가 바빠서였다. 여기에다가 신문제작 여건을 고려해 월·화·수요일 오후에만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조건을 내건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관심이 많고, 지독하게도 바쁘게 산다. 그런데 바쁘다는 표시는 크게 하지 않는다. 다른 학자보다도 더 많은 일정을 소화하지만, 각종 저작물 등 내놓는 결과물은 탁월하다. 개인 홈페이지(www.010000.pe.kr)와 블로그를 둘러보면서 이런 평가에 수긍하게 됐다. 그의 인터넷 공간에는 각종 이야기와 사색이 담겨 있다. 그것도 풍부하고 깊게. 깊어야 넓어질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 글마다 묻어났다. 읽는 글마다 잘 읽혔다. 노련한 글솜씨와 경험을 들려주는 과정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생각을 할 즈음 6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함께 연구실 문을 열자 조그마한 ‘식물과 책의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책과 식물에 대한 예의일까. 연구실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신발을 벗는 곳 옆에 그가 쓴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간의 역서와 저서가 57종이라고 한다. 삼성인력개발원과 안동대에 재직할 때도 몇 권의 책을 썼지만, 대부분은 2001년 한양대로 옮긴 뒤부터 본격적으로 저술한 책이다.

    바쁜 와중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학교의 보직도 학과장·교수학습개발센터장 등 공식적으로 세 개다. 잘 알려진 학자이다 보니, 각종 모임과 기관의 강연도 빈번한 편이다. “사색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밤에 술 약속을 끝내고 힘들 때에도 글을 씁니다.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세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는 조어인 ‘피치(PITCH)’로 이를 설명한다. ‘피치’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그 무엇’이기도 하지만 영어의 다섯 단어에서 어두 음을 따서 만든 단어이기에 여러 뜻이 담겨 있다. 열정(Passion)·혁신(Innovation)·신뢰(Trust)·도전(Challenge)·행복(Happiness)의 창을 통해서 그는 세상을 바라본다.

    “즐거운 학습·건강한 지식·보람찬 성과·행복한 일터는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이 과정이 제대로 되면 ‘지식 임신’이 가능하고 ‘지식의 자연 분만’이 저절로 이뤄지게 돼요.”

    설명을 듣다 보면, 그가 개념 정리와 구조화, 관계도 창출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그에게 정보를 받아들이는 창은 곳곳에 열려 있다. 그에게 글의 소재와 원료가 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다. 독서와 미디어는 기본이고 동영상과 영화도 수시로 본다. 일련의 활동은 자신의 글을 보다 쉽게 풀이하는 과정에 요긴하다.

    “대학의 개론서는 ‘개소리하는 책’이다”고 과감히 말하는 그에게 책은 독자친화적이어야 한다. 이런 인식은 그의 전공의 성격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교육공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교육과 기술학이 결합한 학문”이라고 설명한다. 유 교수는 “학습자를 즐겁게 해서 교육 대상에게 필요한 지식을 만들어 내는 데에 핵심을 두고 있다”며 “학습자들이 바로 고객인 셈”이라고 강조한다.

    지식은 자연친화적으로 생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생명체와 생태계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현존하는 생명체는 대부분 수만년의 경쟁을 뚫고 존재하고 있다. 생태계는 이들의 축제의 공간이다. 지식의 생산·유통·소비 흐름에 생태계의 원리를 접목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학문은 세상에 도움이 안 돼도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작위적인 학문이 보호돼야 할 이유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학자들이 하는 농담을 풀어놓는다. 파리의 앞다리 연구를 석사·박사·교수·학파 수준에서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다.

    “석사는 파리의 앞다리가 몸통에 미치는 영향을, 박사는 앞다리 발톱의 성분이 몸통에 미치는 영향을, 교수는 앞다리 발톱의 때가 파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고 하지요. 교수들이 앞다리의 때를 1년 된 것, 까만 것 등으로 나누며 분석할 때 학파가 형성된다고 하며 웃습니다. 하하. 부언하자면, 박사들은 ‘나만 모르는 게 아니고 다 모른다’고 하고, 교수들은 ‘어차피 모르는 것 끝까지 우겨야 한다’고 하지요. 농담이지만 농담만은 아닌 게 우리 현실이어서 안타까울 뿐이지요. …”

    파편적 지식의 발견에 목말라하는 학자군을 에둘러 비판한 말이기도 하지만, 대중에 책임을 지지 않는 문화를 희화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학자나 지식인이 자신들만의 성(城)에서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유 교수의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됐다. 지식인은 물론 지성인이라면 말하기와 글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민하는 힘과 노력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런 인식이 10년 남짓한 기간에 57종의 책을 내놓은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생각하는 학자의 사명은 일반 학자의 인식과는 다르다. 이는 그가 이어령·윤석철·정민 교수 등의 저서를 자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읽는 학자의 글에서는 고민하는 노력과 표현하는 힘이 동시에 느껴진다. “동문이기도 한 정민 교수의 책은 독자로서도 감동을 받는다”는 고백에 진정성이 묻어난다. 정 교수를 설명하는 표현이 뇌리에 남는다. “고전에서 건져 올린 상상력을 풀어놓는 학자. 펄럭이는 물고기처럼 싱싱해서 좋다.”

    “책이 만들어낸 사람”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유 교수. 그에게는 공고를 졸업하고 용접공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을 보게 됐다. 행복한 모습을 보고, 주경야독했다. 가난 때문에 ‘까무러칠 정도’로 공부했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은사인 김종량 총장을 비롯한 이들의 도움 덕택이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친 그에게는 꿈이 있다. 장학재단 설립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한양대의 교육공학을 선택한 모든 학생이 장학금으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무리하도록 하고 싶다. 이는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고등학생 때 어머니를 떠나 보낸 후 사회에 진 빚을 갚는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쑥스럽게 말하는 그를 쳐다보면서 취재기자로서 바람이 생겼다. 그가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앞으로도 수차례 더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와 명상록  (0) 2010.09.17
아이히만 (Eichmann, Karl Adolf)  (0) 2010.09.16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소크라테스  (0) 2010.08.26
죠지 버나드 쇼  (0) 2010.08.20
Posted by WN1
,


그가 태어날 당시 동네 사람들은 악마를 쫓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용모는 대머리처럼 벗겨진 큰 이마에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불거진 듯이 툭 튀어나온 두 눈과 사자코 같이
뭉퉁한 코가 두툼한 입술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땅딸막한 키에 수박처럼 불룩한 올챙이배는 뒤뚱거리는 오리걸음을 그에게 걷게
하였다. 텁수룩하게 털이 나 있는 가슴과 팔 다리는 튼튼한 체격과 강인한 의지력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아 조각을 하기도 했으며, 당시 아테네 중류 시민의 자제들처럼 문학과 음악, 체육
등 일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18세에서 24세까지는 당시의 청년들처럼 군대에 입대하여 복무했으며, 나중에도 여러
차례 종군하여 군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생의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 알카라오스와 아나가고라스에게서 항상 배웠으며
진리 탐구열에 감화를 받았다. 또한 소피스트들에게도 배웠지만,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어서 배움을 중단하고는 스스로 궁리하고
탐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가 얼마나 사색과 탐구를 중시하며 진지한 사색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종군 중이던 그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한 곳에 넋을 잃고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막사에서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밤이 깊어지자 하나둘
잠이 들었는데, 그는 이튿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꼬박 밤을 새웠다. 그리고는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그
자리를 떠나 평소처럼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 "음미함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40세가 될 무렵에 그의 정열적인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아폴로신에게 여쭈어 보았다.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신은 신전의 미녀를 통해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유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민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
  그러나, 대단히 기뻐하던 친구에게 이 신탁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놀랐다. 그것은 그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자 자타가 현명하다고 공인하는 정치가들, 예술가들, 기술자들을 차례로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지혜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였다.



  "그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진짜로 모르고 있다"
  그래서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시민들의 부패하고 마비되고 타락한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 후 그는 70세 때까지 신탁을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인 아테네의 쇠파리 노릇을 하며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50대에 결혼을 했고 세 아들이 있었다. 그가 70세로 사형될 당시 큰 아들은 18세였다. 결혼 후에도
그는 시민들을 깨우치는 사명을 위해 무료로 가르치는 일만 했을 뿐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외면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아내 크산티페로부터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의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어 내십니까?"
  그러자, 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것이 없지"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부자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예상대로 그의 아내인 크산티페가 투덜거렸다.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염려 말아요. 그들이 이치를 아는 사나이들이라면 그걸 참아 줄 것이고, 만일 시시한 친구들이라면 그런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쓸 필요조차도 없으니까"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강론을 계속하자, 그녀는 큰소리로 욕을 해대며 그에게 구정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스레 말했다.
  "천둥이 친 다음에 소나기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알키비아데스가 참다 못해 말했다.
  "부인의 잔소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달래듯이 제자에게 말했다.
  "나는 이젠 완전히 단련이 되어 있지. 우물에서 도르레가 언제나 가랑가랑 소리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야. 자네도 거위가 꽥꽥 우는 건 참아 낼 수 있을 거야"



  그러자, 제자도 지지 않고 말대꾸를 했다.
  "허지만 거위는 알을 낳아 주고 새끼를 까 길러주고..."
  이에 스승도 한마디 했다.
  "크산티페도 아이를 낳아 준다네"


 


  하루는 크산티페가 시장 바닥에서 소크라테스의 옷을 잡아 벗기려 하자, 친구들이 손으로 막아 말리면서
  "왜 그럽니까?" 하고 그녀에게 충고조로 말했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를 대신해서 말했다.
  "결단코 그래야만 하겠지! 여러분이 우리가. 싸우는 걸 보고, '소크라테스, 힘을 내라!', '야아, 잘한다, 크산티페!' 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시는 이유가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잔소리쟁이와 함께 사는 건, 기수가 준마를 좋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기수는 그 녀석을 잘 길들이고 나면 그 다음은 누워서 떡먹기거든. 내가 내가 크산티페를 잘 길들이게 되면 내가 제어하지 못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하고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니까".


 


  한 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자, 그가 답변했다.
  "결혼하게나! 온순한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사나운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아들 람프인클레스는 어머니 크산티페를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을 거예요"
  훗날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디오게네스의 스승)도 그 여인에 대해 한마디 언급한 바 있다.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여자들 가운데서 가장 시끄러운 여자일 것이다"


 


  부자요 명문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게 집을 지으라고 넓은 땅을 제공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는 신발이 필요하나 만일 자네가 이것으로 신발을 만드십시오 하고 가죽을 준다고 하여 내가 그걸 받았다면 참으로 이상할 거야"


 


  한번은 그의 제자 카르미데스가 스승의 가난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몇 명의 노예를 헌납하면서 간청했다.
  "제발, 이 노예들을 부려 수입을 올리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제의를 굳이 물리쳤다.


  제자인 아이스키네스가 스승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니까 이 몸을 바칩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다정히 말했다.
  "아니, 어째서? 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있는데 그걸 모르느냐?"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들으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눈물이 쏟아지며 노예 상태와도 같은 경험을 했던 알키비아데스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페리클레스의 웅변을 들어도 감동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는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에우크레이데스는 메가라인으로 일찍이 철학 공부를 했으며,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는 열렬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그리하여 메가라인이 아테네에 들어오면 종신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들어와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열심히 들었다.


 


  안티스테네스는 고르기아스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다가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듣고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문하로 들어가 겸허히 가르침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건강한 힘'이라는 뜻이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신체 건강을 위해 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몸소 아침 산책, 체조, 무도를 즐기면서, 절제 있는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제자들이 초대하여
대접하면 사양하지 않고 참석하여 즐겼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에게 구조되었던 알키아비아데스가 훗날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실제로
전쟁에서 흔히 있듯이 어딘가에서 차단을 당해 굶기를 강요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인내심이 없는 다른 병사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잘 먹게 되었을 때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특히 그는 주량이 컸다. 자진해서 마시는 일은 없었지만 강요당했을 때는
누구보다도 많이 마셨다.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겨울의 추위에 대한 인내심도 대단하였다. 언젠가
그는 혹독한 추위가 닥쳐왔을 때, 모든 병사들이 진영 안에 있는 옷을 모두 껴 입고 구두를 신고 발을 담요와 양가죽으로 감싼 채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오직 그만이 평상시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구두를 신지 않고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쉽게 얼음 위를 걸었다. 병사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데리온 전투, 암피폴리스 전투, 데리온 전투에 출정해서 침착하고도 용감하게 싸운 소크라테스에 대해 용장 라케스는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그때 다른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처럼만 행동 했었더라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명성을 드날렸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추첨 결과 본의 아니게 500인 평의원에 뽑혔을 때였다. 그 무렵 아르기누사이 섬 앞바다의 해전에서 패전한
장군들을 모두 국회에서 재판하자는 안이 평의원회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최후까지 이에 반대하였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해서 찬미하였다.
  "신은 인간을 바로 서게 하고,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손을 주었으며, 다른 생물에게는 일정한 시기에만 한정 시킨 쾌락을 인간에게는 아무 때나 즐기도록 허용하였으며, 거기다가 또 영혼을 심어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소에 '인간의 참된 삶이란 잘 사는 것이요, 잘 사는 것이란 아름답게 사는 것이요, 올바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였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건 사람의 마음을 잘 보살피는 것, 즉 행복한 기분이 되게 해주는 것이야.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또 만나고 싶고, 만나면 몸을 만지고 싶고, 만지면 이번에는 소유하고 싶어지는 것이지"
  그러자, 다른 제자가 곁에 있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아테네 제일의 미녀 모델이 지금 어느 화가의 화실에서 지금 나체가 되어 있습니다"



  제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승이 대꾸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진실한 아름다움은 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지. 가보자! 그러나, 미인의 포로가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자는 따라오지 말라"


  어느날 소크라테스는 한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청년의 덕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그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건 지나치지 않는 것이지"
  그러면서 그는 청년 앞에 시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장래가 넉넉해서 미지수인 자여!"


 


  소크라테스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자기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백조 새끼 한 마리가 금방 날개가 돋더니 예쁜 소리를 내어
울고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꿈이었다. 그 다음날 플라톤이 그의 제자로 입문해 왔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보고 말했다.
  "자네는 어젯밤 내가 꿈에 본 그 백조가 틀림없어"(당시 백조는 아폴론 신전에 바쳐졌던 '싱싱한 새'였다. 그것은 마치 아테네 여신의 사자인 올빼미를 아테네 신전에 바치는 것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노년에 리라 악기의 연주를 배우려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들과 함께 늙은 소크라테스를 제자로 삼고 가르친 음악 교사인 콘노스는 '할아버지 교육자'라는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아테네는 패배하였다. 그래서 아테네는 친 스팔르타 인사와 반민주주의자 30인으로 구성된 과두
체제를 수립하여 공포정치(참주정치)를 시작하였다. 이 공포 정치의 수령인 크리티아스는 어느 날 소크라테스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관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레온이라는 사나이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 구인해 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위법이라고 여겨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강연은 자연히 제재를 받게 되었다.


 


  정적을 사정없이 탄압하던 과두 체제인 참주정치가 8개월만에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아테네는 다시 민주체제로 환원되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민주파 인사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 "구름" 때문에 더욱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구름"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선량한 시민인 스토렙시아제스는 승마에 미친 아들 때문에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자 안절부절 못한 그는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방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면서 만약 가르쳐 주면
은혜를 꼭 갚겠다고 신의 이름을 빌어 맹세한다. 그때 소크라테스는 '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것을 기르고 또 여러 가지 모습을
하는 구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을 해준다. 그 후 그와 그의 아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변론술을 배워와 빚쟁이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아들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고 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아들은 배운 변론술로 그 폭행을 정당화한다. 이런
지경에 이른 그는 이 모든 책임을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에게로 돌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이 연기 속을 헤치고 뛰어나온다. 막이 내린다"


 


  이 극이 초연되던 날, 소크라테스는 무대 위에 서서 싱글벙글거리면서 자기 배역을 맡은 배우가 자기와 닮았는지 어떤지를 관람객들에게 비교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피해를 줄 줄이야!


 


  소크라테스가 고소를 당하게 된 때는 그의 나이 70세 되던 봄이었다. 고소인은 젊은 시인 메레토스였고, 유력한 민주정치가이자 실업가인 아뉴토스와 변론가인 리콘은 고소인의 변호인이었다. 그 고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핏토스 구의 메레토스의 아들 메레토스는 아로페케구의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다음의 고소장을
제출하고 그 사실에 상위가 없다는 선서를 했다. 곧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신(Dimonion,
신적인 것, 즉 양심)을 끌어들여 청소년들을 부패 타락케 하였다. 그 죄는 모름지기 사형에 해당된다"


 


  고소를 당한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만일 나에게 지금까지의 진리 탐구의 생활을 그만둔다면 석방해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느
때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힘이 미치는 한, 지혜를 사랑하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겠습니다"


 


  당시는 30세 이상으로서 국가 채무가 깨끗한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배심원에 지망 할 수가 있었다. 단, 그 지망자가
많을 경우에는 당일 추첨하여 500명을 뽑았는데, 소크라테스의 변론 후 치뤄진 투표 결과 60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때 자신의 형량에 대한 발언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 사람에게는 영빈관에서 평생 무료 식사를 하는 대접을 받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은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만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경기에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러분을
즐겁게 할 뿐이지만 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가 나는 가난하므로 부양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잘못하면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판관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이번 사건은 나에게 매우 유익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죽는 것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죽음이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완전한 허무로서 모든 감각이 없어진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이란 벌이 아니라 굉장한 소득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기 위하여 이곳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행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변호할 양으로 단상으로 뛰어 올라 가서 소리쳤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일찍이 이 단상에 올라온 자 중에서 가장 젊지만..."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재판관들로부터 꾸짖음을 당했다.
  "내려와! 내려와!"
  할 수 없이 단상을 내려와야 했던 플라톤의 당시 나이는 29세였다.


  유죄 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고소인이 요구한 사형 형벌에 대해 의의를 제시했다.
  "본인은 아테네를 위해 신이 제시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본인에게 알맞은 형벌은, 국가의 다른 공로자들처럼 앞으로 국비로 향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최후로 친구들의 간절한 권유에 따라 30므나의 벌금을 제시했다(이때 플라톤이 보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주었다) 그런 다음, 투표를 실시한 결과, 360표 대 140표가 나와 220표 차이로 그에게 사형이 결정되었다. 당시
법률에 의하면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24시간 이내에 처형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마침 델로스 섬으로 아폴로 신과 아르테미스
신(아폴론의 쌍동이인 여동생)에게 생일의 감사 재물을 바치러 배가 떠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집행이 연기되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생일은 소크라테스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다음과 같은 찬가를 지어 읊었다.


  어서 오소서, 델로스의 주인 아폴론이여!
  어서 오소서, 아르테미스여! 품격 높은 아들들이여!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가장 열렬한 숭배자인 아폴로도로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선생님! 당신께서 아무 죄도 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로 말했다.
  "사랑하는 아폴로도로스여! 너는 내가 죄없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보다도 오히려 죄가 있어서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하고 있었던가?"


  사형 선고가 구형된 지 한 달 후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그에게 면회를 가서 탈출을 권유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부당하게 사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정당하게 사형되기를 원하오?"


  소크라테스가 옥중에 있을 동안 그의 친구들은 비밀리에 탈옥 준비를 갖추어서 그에게 몇 번이나 권면해 보았다. 제선이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의 친구 클리톤이 밤중에 그를 몰래 찾아가 다시 한번 탈옥을 간곡히 권했다.
  "이 재판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자네의 죽음은 자신은 물론 친지와 제자들 모두의 불행이야! 돈은 얼마나 들더라도 관리들을 매수 할 테니 제발 탈출하게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말했다.
  "내가 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결과가 내게 이롭건
해롭건 그 재판의 결과에 복종할 것을 서약한 것이네. 이제 나에게 사형이라는 불리한 판결이 내렸다고 해서 이에 응하지 않고 탈옥
도주한다는 것은 부정이요, 배신이야. 우리는 국법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네. 국가의 법률이 지금 나를 향해서 죽으라고
명령하였다면, 설사 국법이 옳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를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세. 우리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하네. 절제는 무절제 보다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세. 우리는
중용을 지켜야 하네. 과장은 자기를 손상시키고 또 자기의 치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공사를 버려서는 안 되네. 사회의 안녕이
동시에 개인의 안녕이기 때문일세. 우리는 국법에 복종해야 하네. 준법은 우리 자신과 국가에 대해서 최대의 이익을 낳기 때문일세.
우리는 유덕한 생활을 해야 하네. 덕은 신과 인간으로부터 최대의 보수를 받기 때문일세"


 


  최후 날, 그 전날 밤부터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베는 자식들과 함께 남편 곁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 찾아온 그의 친구들을 보자마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드디어 이것이 마지막이로군요! 친구들이 당신에게, 당신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고는, 그는 친구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영혼의 불멸'에 관해서 변함없이 문답을 주고 받았다.


 


  드디어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간수들이 독인삼을 담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형 집행 시간이 일몰로 정해져
있는데, 대개의 사형수들은 음식을 원대로 먹거나 여자를 불러 욕정을 채우기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들어오는
간수를 보자마자 이야기를 마치고는 목욕을 하고 독배를 들이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아폴로도로스가 훌륭한 죽음의 나들이 옷을
선물하면서 마지막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 부디 이걸 입고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나무랐다.
  "뭐야? 내가 입은 옷이 입고 살기에는 지장이 없었는데, 입고 죽기에는 너무 허름하다는 말인가?"
 
그러고 나서, 그는 간수가 건네준 독인삼 잔을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친구들과
제자들은 눈물만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소리내어 우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꾸짖었다.
  "이 무슨 망측한 꼴인고? 그러길래, 내가 부인들은 돌려보낸 게 아닌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말일세.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고 나는 들어왔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참게나!"


 


  독배를 마신 후, 소크라테스는 옥리의 지시로 잠시 동안 감옥 안을 거닐다가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자 침대에 가서
드러눕더니 덮개로 얼굴을 가렸다. 독 기운은 발끝에서부터 위로위로 서서히 기어올라왔다. 그러다가 배 부분까지 차가워졌을 때였다.
그는 잠깐 얼굴 덮개를 벗기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말했다.
  "클라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의약의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갚아 주겠나?"
  그러자, 크리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반듯이 갚아 주겠네! 다른 부탁은 없는가?"
  그러나, 침대에서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결국 운명한 것이다. 이 날이 기원전 399년 4월 27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저술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제자였던 크세노픈이 쓴 "소크라테스의 추억"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언제나 신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만큼 경건하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극기심이 강하였고, 선악의 결정에
있어서 한번도 그릇됨이 없을 정도로 현명하였고, 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가장 행복한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자, 한 비극 시인은 아테네인들을 책망하며 이렇게 탄식했다.
  "너희들은 뮤즈(시의 신)의 매우 현명한 휘파람새(봄이 옴을 알리는 새)를 죽여 버렸어, 죽여 버렸다고"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아테네 시민들은 곧 이를 후회하여,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곧 잘 젊은이나 소피스트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씨름판이나 체육관을 폐쇄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고소인 메레토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그밖의
고소인들도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아뉴토스는 헬라클레이아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은 조각가인
리시포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의 동상을 만들게 하고 이를 폼페이언(보물상자)에 장식하여 그 공을 길이 기렸다.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그의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한 여러 학파가 생겨났는데, 플라톤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니크 학파, 메가라 학파, 엘리스 학파가 그것이다.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히만 (Eichmann, Karl Adolf)  (0) 2010.09.16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0) 2010.08.26
죠지 버나드 쇼  (0) 2010.08.20
벤 카슨  (0) 2010.08.20
Posted by WN1
,
근래 내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들과...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의 책들이다..

글쓰기와 책쓰기와 관련된 내용들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늘 글을 쓰면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더 제대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정확한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결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 보려한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하나에 빠져 몰입한 결과물을 낸 사람들의 생각과그들의 가치관을 본 받고 싶다..꼭 읽어보려는 책이다.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 그래서 다시금 찍어 보았다.
근래 가장 많이 읽히는 책들..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 여러가지 핑계로..
나름대로 책을 본다는 착각이 정말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



인문학과 철학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가져 나가고 있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기르기 위해 그리고 인식을 위해서..
Posted by WN1
,

소크라테스

생각/인물 2010. 8. 26. 18:40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흔히 4대성인으로 불린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생애

[편집] 소크라테스 문제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기하학·철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1]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이 애국자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투철한 준법 정신에 의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며,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편집]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편집]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불 때 이런 말 자체가 결코 성립할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없는 것이다.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이없게도 독재치하에서 정치에 악용되는 방편으로 원전에 대한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 말을 계속 악용하여 왔다. [2]

[편집] 미(美)

소크라테스는 미학적인 범주를 최소한 셋으로 나누었다. 그 세 범주는 부분의 조립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미', 시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는 '정신적인 미', 그리고 '유용한(혹은 기능적인) 미'이다.[3]

[편집]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4]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게 했고,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소크라테스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철학자도 없습니다. 그는 무척 뭇생긴 사람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천하의 악처러 알려진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 만큼이나 유명한데 실제로 그녀가 그토록 지독한 악처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는 많은 질문을 통해 스승들을 곤라하게 만들었고 마침내는 아테네 청년들의 스승이 되어 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어떠한 저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에 대해 알수 있을뿐입니다.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엿는데 그가 태어날당시의 아테네는 에게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는 소피스트의 시대를 살았고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력이 기울며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소피스트들에 반대하여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분명 철학의 관심을 인간으로 돌려 놓는 공헌을 했습니다.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설파함으로써 사회의 가치관을 무너 뜨렸고 정신적인 혼란을 던져 주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신적 혼란기에 나타난 아테네의 스승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텔포이 신탁을 계기로 자신이 길을 찾습니다. 어느날 카에로폰이라는 사람이 델포이 신에게 아테네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텟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자신이 현명한 사람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 아는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 때만 무엇을 알수있습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스스로 아는것이 무지를 전제한 후 대화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주장에 맞닥뜨렸을대 그 잘못된 주장을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동의할 많안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대화를 이끌어 갑니다.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해 나가는 와중에 스스로 자신의 원래 주장을 부정하게 되거나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입니다. 그의질문은 집요합니다.그는 피상적인지식이나 독단적인 관념을거부하기 때문에 항상 정확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경건한것과불경한 것에 대해 에우티프론과 토론할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행동몇 가지가 아닌 모든 경건한 행동을 경건하게 하는 경건성 그자체가 무엇인지 말할것을 요구합니다. 마침내 에우티프론이 모든 신이 사랑하는것이 경건이고 싫어하는것이 불경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어떤 행동이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 행동이되는 것인지'를 그에게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피상적인 대답만을 반복하고 소크라테스는그 말을 듣고 더욱 구체적으로 되묻습니다. 에우티프론은 결국 그 자리를 떠나고맙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대화 방법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으믈 표현합니다.그는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할 수없으며 계속되는 대화를 통하여 진리의 길로 접어들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진리에 대한, 나아가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하여 자신으 무지를 깨닫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수있는 진리를 발견할수있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던 것입니다.



★ 악처가 철학자 남편을 만든다?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인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행패가 대단히 심해서 악처라고 세상에 이름이 높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책을 읽고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심한 욕설을
한참 동안이나 퍼붓다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들고 들어와
"이 못난 영감쟁이야...물벼락이나 한번 맞아봐라.." 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다 물을 쏟아 부었다.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책에서 눈을 떼며 털털한 웃음으로
심술궂은 아내와 맞싸우지 않고 유머로써 웃어 넘겼다. 이때 제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는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훌륭한 수부는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워보아야 하는 것이고, 또 훌륭한 기수는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택하는 법이니,   사나운 말을 잘 달래가며 탈수 있는 기수라면  다른 어떤
말 이라도 다 잘 탈수 있듯이 나 역시 성질 나쁜 아내를 잘 달랠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훌륭하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아니겠나 ? "



그는 왜 토론을 하는가?

서양철학자 중에서 아마도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전문가에게 가장 적게 알려진 서양철학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지, 조금 알고 있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기원전 399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해서 주로 그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 그리고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남긴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 모습과 생각은 서로 다를 뿐더러,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에서도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무엇이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지금도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Socrates Problem)’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상상력이 뛰어난 문학가였으며, 크세노폰은 군인,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패러디 전문가였다. 이들 모두가 ‘정품’이 아닌 ‘짝퉁’ 소크라테스를 만들 소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문제’로 인해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확실하게 알려진 그의 삶에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여러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 한 마디로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철학자가 자신의 글을 남겨도 일어나는 문제다. 그가 남긴 글의 해석이냐, 아니면 그 글의 해석의 해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철학사에 남긴, 아니 인류를 위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토론하는 그리스인들의 모습.
소크라테스는 광장에 나가 격의없는 토론을 즐겼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하기’ 정확히 말해 독백이 아닌 대화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철학자의 이미지는 골방에서 혼자 사색에 잠기거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진리를 글에 담는 모습이기 쉽다. 누가 칸트나 헤겔의 철학이 ‘100분 토론의 결과’라고 주장하겠는가? 놀랍게도 서양철학의 아버지 격으로 숭상되는 소크라테스는 이런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장 좋아했고 죽기 직전까지 했던 것은 토론,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논쟁적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테네 토론의 광장 아고라에 나가서 어느 누구와도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나이 불문, 재산 불문하며 대화를 즐겼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테네의 법이 이 즐거움을 금지시키면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옥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대화편 [크리톤]의 내용이다. 소크라테스와 동년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크리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아무도 토론 마니아 소크라테스를 말릴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크리톤과의 대화내용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줄여 표현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아테네의 법을 그는 악법이라고 부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아 죽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아테네 시민과 토론을 벌여 많은 적을 만든 것이 화근이 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재판 중에도 자극적 토론을 벌여 사형언도를 받았고, 재판이 끝난 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토론을 벌인 후 “죽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토론은 공기와 물 같은 것이었다.

 

 

 

 

영국 경찰이 발견하고 미법무부가 번역하여 공개한 [알 카에다 훈련교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가 대결하고자 하는 신앙심 없는 정권은 소크라테스적 토론도, 플라톤적 이상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외교도 모른다. 이들은 총알의 대화, 암살, 폭격, 파괴라는 이상, 그리고 대포와 기관총의 외교만을 알 뿐이다.” 알 카에다가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토론을 분리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토론을 하고자 했을까? 물론 그가 남과 이야기하기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히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대답의 전부는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철학자들이 갖고 있지 않는, 설사 갖고 있다 하더라도 남에게 공개하기 꺼리는 경험을 자랑스럽게 공개하였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받은 ‘델피의 신탁’이다. ‘신탁(神託)’이란 신이 사람을 통해 신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질문에 답하는 것, 즉 계시 혹은 점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함께 신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신탁의 내용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적인 토론은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 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신탁을 믿어 왔던 소크라테스도 이번 경우에는 신탁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아테네의 정치가, 문학가, 장인들을 찾아다녔다. 과연 이들은 현명한가? 놀랍게도 이들 모두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부하였지만, 대화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현명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이런 대화를 재미있게 구경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따라했다. 왜냐하면 ‘현명하다는 사람의 무식이 폭로되는 토론’은 실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토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 중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토론을 즐긴 이유는 단순히 상대방의 무식이나 현명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즉 철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덕(virtue)을 밝히고 실행하는 것이었다. 덕의 실행은 재산이나 직위 그리고 명예보다도 중요하며 심지어 죽음도 방해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본질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경멸한 이유는 무엇보다 영혼을 계발하는 철학을 돈과 결부시켰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단 한 번도 돈을 받고 대화를 한 적이 없음을 그의 가난이 증명한다고 [변명]에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선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결코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지행합일이란 단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현자 찾기 프로젝트’가 실패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많은 믿음들은 그 옳고 그름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델피의 신탁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밝히는 토론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스스로 글을 쓰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토론을 ‘산파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산파는 직접 아이를 낳지 않지만 낳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이를 낳지 않아본 여인은 낳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에 산파가 될 수도 없다.

 

그리스 자연철학으로부터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관심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인간사회의 규범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정의, 덕, 선과 같은 규범적 개념은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쉽게 파악되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사물의 측면만을 보기 일쑤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으로 알려진 부정적 논증(elenchus)이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일단 옳다고 가정하고, 상대방도 동의하는 다른 지식이나 명제들을 원래의 주장과 결합하여 모순을 끌어내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을 의미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기본적으로 ‘부정의 논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의 논법을 통해서도 논파되지 않는 주장,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토론은 논쟁 기술보다는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훨씬 더 중요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권력이 옳고 그름을 정한다’는 믿음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런 믿음을 옳다고 말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 시민에게 신이 보낸 등애(gadfly)라고 표현했다. 등애가 쏘면 황소도 펄쩍 뛴다. 바꿔 말해 소크라테스는 당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던 아테네의 큰 문제, 즉 집단적 오류를 등애처럼 날카롭게 쏘아댔다. 그 결과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었다. 이처럼 권력과 잘못된 믿음과의 결합은 민주주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있을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현대는 정보의 공유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쉽고 빠르다. 이를 통해 옳건 그르건 집단화된 믿음이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토론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토론을 현대 사회에 도입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독배를 마시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까지도 토론을 벌였다.




진리와 이데아의 빛

쪽빛 바다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중해 세계에서 빛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모든 은폐된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 사람들은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이데아도 그 어원은 본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빛이 비칠 때 세계는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었을 때 그는 스물 여덟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는 심한 혼돈과 현기증을 느꼈다고 한 편지에서 기록했다. 그리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의 근원은 철학”이며, “참된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기까지에는 인류는 고민에서 풀려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플라톤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출발한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보통 소크라테스 철학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우리는 난감한 사실에 봉착한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의 철학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가 그대로 반복했다는 뜻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동일한 소스에 담겨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플라톤이 쓴 기록을 통해서 읽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부르는 35편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인가 하는 점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것을 철학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이러한 사례는 어찌 소크라테스뿐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논어]도 그렇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한 불교 경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석가모니 역시 자신들이 직접 책을 쓰지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소크라테스의 조각상 앞에서 불멸에 대한 사색에 잠긴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동일체를 이룬다.

 

시대를 더 내려오면 신약성경과 코란도 그렇다. 예수도, 무함마드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경전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고대 철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많은 책에서는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위서 논란이 심심하면 터져 나온다. 그들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대 철인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크게 부각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 바로 플라톤이다. 그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모아서 집대성한 단순 기록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대화편은 플라톤이 30대에서 70대까지 쓴 책들이다.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화체 형식이다. 플라톤이 쓴 일련의 책들을 대화편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한 편을 제외하면 모든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주도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대화편을 통해서 하나의 철학적 동일체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소크라테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깐! 플라톤의 대화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초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후기 대화편에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플라톤이 젊었을 때 쓴 초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원숙한 나이에 쓴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에서는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서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의 손 노릇을 했지만, 나중에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철학의 입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다. 서두가 좀 길어졌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가지치기 작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구분하는 난제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불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대화체 형식의 책을 썼는가 하는 점을 ‘플라톤의 퍼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조용한 사색의 장에서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대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아테네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아고라 광장에서, 때로는 푸른 지중해가 한 눈에 보이는 아테네 근처의 바닷가에서, 때로는 지인들과 밤늦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토론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철학을 문자로 생중계한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토론 철학이 가진 강점과 약점이 동시에 드러난다. 대화편은 마치 한 편의 희곡을 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대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토론을 하는 그때 그곳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잡힌다. 마치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마치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대화편이 철학 책으로서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아무런 결론 없이 대화를 마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당연하다. 대화편은 어떤 특정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철학의 역사에서 대화편과 같이 고전적 지위에 우뚝 오른 다른 철학서적,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35권의 대화편은 과제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다양한 여러 주제들이 하나의 책에 뒤섞여 함께 논의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거리에서 철학을 했을까? 그리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 거리 철학을 왜 문자로 생중계했을까? 그 단서는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나온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고 역설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그림으로 기록할 때 그 그림은 죽어있듯이, 살아 있는 말을 문자로 쓸 때 문자로 기록된 말은 죽어있다고 말한다. 문자로 된 말은 질문을 던지지도 질문을 받지도 못한다. 그렇다. 플라톤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테네 아카데미에 있는 플라톤 조각상.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처럼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기본을 완성했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20세기 전반에 영국 캠브리지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화이트헤드가 만년에 한 강연에서 한 이야기다. 많은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지만, 플라톤 철학의 요체를 이처럼 적절하게 설명한 말도 드물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 말을 플라톤 철학의 체계가 뛰어나다는 칭송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뛰어난 것은 그의 답안에 있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끝없이 던지는 질문 방식에 있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가 된 이유는 그의 철학 체계보다는 그가 쓴 철학적 발제에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좋은 질문을 던진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아닌가?

 

맞다. 굳이 저작권 개념으로 따진다면, 문자 중계한 플라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 발언자인 소크라테스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왜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전통을 기본 포맷한 철학자로 인정받는가? 이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야 한다. 좀 지겹겠지만 할 수 없다. 철학적 동일체를 이룬 스승과 제자의 몸통을 분리하는 수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대화법 또는 산파술로 요약되는 질문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답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아는 게 없다. 그래서 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가실 정도로 끝없는 질문을 던진다. 주로 상대방 이야기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 든다. 상대방은 자신의 주장이 모순에 빠졌음을 깨닫고 우물쭈물한다. 큰 당혹감과 혼돈에 빠져든다. 상대방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주시한다. 옳은 답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대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종료된다. 해결되지 못하고 끝난 문제 – 이것을 철학 용어로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른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이다. 출구가 막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길도 진리의 길이 아니고, 저 길도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우리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은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우리가 숨 가쁘게 살아야 하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가?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대 그리스 문명의 중심이었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이미 철학의 관심이 피시스(자연세계)에서 노모스(인간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모스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의 화두로 떠올랐다.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관심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점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재판 법정에서 한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했다고 고소장에 씌어있지만 자신은 자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연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한 사실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말해달라고도 주문한다. 그렇다고 자연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는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철학사에서는 그 양자의 차이를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의 격돌로 정리한다. 소피스트는 인간사회의 규범은 상대적이라고 이야기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규범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보편적 진리를 수호한 순교자로 소크라테스를 자리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가? 나는 소크라테스를 보편 철학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답안을 내놓기보다는 상대 답안의 논리적 허점을 등에처럼 성가시게 물고 늘어져 철학적 대화를 아포리아 상태로 몰고 간 소크라테스 철학이 어떻게 보편주의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논리적 연결고리만큼은 분명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철학의 정신이 아닌가? 만약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 대화법(엘렌쿠스)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보편주의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회의주의, 또는 진리는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대주의와 더 가깝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 이론이 빛을 발한다. 플라톤 철학이 스승의 몸통에서 분리되는 대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포리아가 출구가 막힌 종착점이 아니라 새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서 대화를 막장에까지 다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 아닐까?

 

스승이 즐겨 사용한 엘렌쿠스로서의 철학은 제자의 이데아 철학의 뒷받침을 얻어 출구에서 탈출한다. 아니, 이 말이 소크라테스에게 큰 모욕이 된다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통해서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관계에서 처음에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손 노릇을 했지만, 점차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입 노릇을 한다고 지적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 개념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또 그 때를 기점으로 토론이 아포리아에서 벗어난다. 아포리아가 해결불능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이 점을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철학은 아포리아의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철학적 사유는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항상 상식적인 사고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에 이의를 달지 않을 때 철학적 사유는 멈춘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막다른 길에서 이데아의 빛을 향한 플라톤의 사상이 시작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지금으로부터 2400여 년 전에 죽은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과 죽음, 용모에서 언행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그리고 70년 후,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들 중 280명의 유죄 결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500명의 배심원들은 나이가 예순셋 이상인 노인과,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꽤 잡잘한 액수인 배심원 수당 3오블 -당시 그리스 화폐단위-을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 철학자이다. 심하게 못 생긴 얼굴에, 오래 된 누더기옷. 악처로 이름 높은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인용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

  아내 크산티페를 두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여자와 결혼한 이유를 물으면 " 말[마]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거친 말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대답하였다.

  그의 죽음에 관한 그림은 쟈크루이 다비드, 샤를 알퐁스 뒤프레누아, 푸셍, 켕틴, 페이론 등 많은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려냈다고 한다. 동양에 공자가 있다면, 서양엔 소크라테스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직접 쓴 저서는 없다.  

  그런 그가 떠난지 2400여 년. 왜 그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그는 이땅에 필로(philo,사랑 )과 소피아(sophia,지혜)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였기에 이땅의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악법도 법이다" 라며 독미나리 잔을 받아들였다. 법은 이 사회, 이 세상 사람들을 잘 살게 하려고 만든 가장 작은 규칙이므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였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곰곰 되씹어 본다. 이 말은 현대에 와서 다른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에 의해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부정하여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우리는 이 두 철인의 말을 모두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단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더욱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도 작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0%의 희망을 가지고 90%의 불가능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고, 90%의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소외된 10% 의 가녀린 외침을 무시했다가 낭패를 당한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찌기 성경에서는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하여---"라는 말을 하였다.

  시대의 투철한 시인정신을 지닌 김수영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라고 반어법적으로 노래하였다.

  소수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를 기대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려본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무리의 중앙에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군중에게 설파하고있다.

" 모든 것은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 " 자!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에 큰돌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돌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 어떤이는 석상을 만들려할 것이고, 어떤이는 주춧돌을, 또 어떤이는 징검다리로, 마당의 의자로 ... 이처럼 사람들은 같은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입장과 느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각 개인의 느낌이 바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진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제 각기 진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견해대로 행동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말은 곧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 진리는 개인의 잣대를 통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연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사람은 자신이 가르칠 제자들을 모집중에 있었다.

- 그때 군중을 비집고 들어와 맨 앞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서 나옴.

군중이 외친다, " 소크라테스 잖아! " 제자(학생)들을 모집하는 강사는 그를 천적으로

인식하는데, 강사는 적지아니 당황한 기색이다.

" 존경하는 강사 선생, 이 무지한 늙은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 강사는 마지못해 " 좋습니다. " 라고 말한다. " 선생, 저것이 무엇입니까? " 강사가 답한다. " 돌입니다." 소크라테스 "여러분 중에 저것이 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은 나오십시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 선생, 저것으로 만약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는다면 선생은 그것을 신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돌이라고 하겠습니까? "

강사 "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이라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 그래요? 그러면 하나 더 물어봅시다."  " 저 돌로 만든 제우스 신상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저돌은 더 이상 돌이 아닙니까? "

 

강사, 얼굴이 더 붉어지며 머뭇거린다.  " 강사선생, 저것으로 무엇을 만들든 저것은 언제까지나 돌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돌을 신으로 생각한다해도 저돌은 여전히 돌일 뿐입니다. " " 따라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사물이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 사물은 사람의 생각과 관계없이 사물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저들이 사람의 생각에 따라, 개, 말도 되고 -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개나 말도 사람의 느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강사는 뒷걸음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강사를 몰아칠 생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군중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사이, 강사는 군중들 속을 빠져나간다. 

 

소크라테스, " 돌로 무엇을 만들든 여전히 그것이 돌이듯, 진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느낌에 관계없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 " 이 변하지 않는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군중속의 한 젊은이, 묻는다. " 선생님, 그러면 도대체 그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 " 진리를 묻는 그대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청년, " 저 말입니까? " " 저는 귀족이고, 남자이며 젊고, 영리합니다. 진리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제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 웃지 마십시요!" " 이 청년은 지금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 "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게 있는데 " " 그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 " 진리를 알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닳아야 합니다."

" 인간은 모든 동물중 유일하게 자기속에 들어있는 진리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자기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똑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면 여러분은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곤 소크라테스는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 나는 누구인가? "  네델란드의 시인, 극작가, 철학가 - 존 쉘라(1759 - 1801)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매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격은 타인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서 위대하고도 또 미약하게도 된다. "

즉, 우리 모두는 환경이나 운명의 꼭두각시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친구를 선택하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고 우리의 할 일을 결정하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히만 (Eichmann, Karl Adolf)  (0) 2010.09.16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죠지 버나드 쇼  (0) 2010.08.20
벤 카슨  (0) 2010.08.20
Posted by WN1
,

죠지 버나드 쇼

생각/인물 2010. 8. 20. 22:10



쇼는 1856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옥수수 상인이었던 부친 조지 카 쇼와 루신다 엘리자베스 걸리 쇼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더블린에서 학교를 다니다 부동산 사무소에서 일하던 그는 스무살이 되던 1876년 런던으로 이사갔다.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던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읽거나 당시 런던사회 중류계급 지식인들의 논쟁을 접하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19세기 말 유럽사회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페이비언 협회 활동과 함께 서평, 미술평론, 음악평론, 연극평론 등 왕성한 글을 쓰기 시작하며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때는 철저하게 소모된 다음 죽기를 원한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더 오래 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 자체를 즐긴다. 나에게 인생은 더이상 '곧 꺼질 촛불'이 아니다. 인생은 잠시들고 있는 영롱한 횃불같은 것이다. 다음 세대에게 그것을 넘겨주기 전에 가능하면 밝게 타오르게 하고 싶다.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병들고, 피로하고 , 두렵다고 말하려 할때 잠깐 멈추자. 뭐든지 다 할수 있다고 미리 떠들어 대지도 말자. 대신 조용히 침묵하자 .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며 억지로 부담을 주려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두자.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거나, 새로운 계획에 착수해 활기 있게 살자. 또는 일상적 삶을 즐기려 노력하자. 초라한 자아 이미지는 버리자. 자기를 훼손하는 꼬리표를 붙이거나 혹은 그런 언급을 하지 말자.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이상 그런식으로 인식되기를 윈치 않는다고 알리자..."


"결혼이란? 두 사람은 죽음이 자기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사람의 진을 빼놓는 비정상적인 흥분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희망을 갖고 성공하는 사람들이란 자기가 바라는 환경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가 만들면 된다.”


"재물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쓸 권리가 없듯이 행복도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누릴 권리가 없다."


“민주주의는 부패한 소수가 정하던 것을 무능한 다수가 대체했다”




쇼는 평생 25만 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맨발의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과의 편지도 있다. 덩컨이 “당신의 머리와 내 몸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굉장하지 않을까요?”라고 편지를 보냈더니 쇼는 “거꾸로 내 육체와 당신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답장을 쓴다.

쇼는 노벨상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으면서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문학상을 생각해낸 것은 참 말이 안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열렬히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관련이 있는 ‘피그말리온’이란 연극의 극본을 썼고, 이것을 영화화한 오드리 헵번 주연의 ‘MY Fair Lady’로 오스카상을 받았다.

한 신문 기자가 버나드 쇼에게 '금요일에 결혼하면 불행하다는데 그 말을 믿으시나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쇼는 "물론 믿지, 금요일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으니..."


"법률적으로나 실용적으로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사회주의란, 사유재산을 공공재산으로 전환시키고 이로써 얻게 되는 공공 수입을 모든 주민에게 차별 없이 평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사유재산제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유재산 즉 '물적' 재산은 최대한 축적하되 수입의 분배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주의를 뒤엎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완전한 도덕적 전환을 수반한다."

"나는 젊었을 때 10번 시도하면 9번 실패했다. 그래서 10번씩 시도했다."

.
.
.
백과 사전에서 말하는 버나드 쇼

조지 버나드 쇼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년 7월 26일 ~ 1950년 11월 2일)는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1925년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생애

모친으로부터의 영향으로 음악에 흥미를 가져서 받은 성악 레슨은 후에 연설자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학교교육을 받았으나 성적은 거의 최하위, 다만 작문은 뛰어났으며 쇼의 흥미는 문학, 음악, 그래픽 아트 등에 있었다. 가난하여 초등학교만 나왔을 뿐이나, 사환으로 일하면서 음악과 그림을 배웠으며 소설도 썼다.

1871년에는 더블린의 토지 중개사무소에 근무, 여러 신문잡지에 투고하였으며, 경제적 이유로 모친이 두 딸을 데리고 런던으로 나와 음악교사가 되자 쇼도 그들 뒤를 따라 1876년에 런던으로 나왔다. 이후 단기간의 에디슨 전화사 근무를 제외하고는 직업을 가진 일이 없었다. 런던의 예술가들과 사귀어 각 신문에 원고를 썼으나 수입이 적어 양친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1879년부터 83년에 걸쳐 5편의 소설을 썼으나 모두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가운데 4편은 친구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1882년 9월, 헨리 조지의 연설을 듣고서 쇼는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마르크스 연구를 비롯, 1884년 창설 직후였던 온건 좌파 단체 페이비언 협회를 협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회사상가와 사귄다. 그 가운데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딸 에레아놀 마르크스도 있었다.

비평가로서의 쇼

1885년부터 1898년까지 13년 동안 쇼는 신문 잡지의 비평란을 담당하여 주로 음악·미술·연극·문학의 시평(時評)을 했다. 모두가 영국 비평계의 최고 수준을 과시하는 것이며, 특히 1895년에 시작되는 <새터데이 레뷔>에서의 연극비평은 오늘날 모범이 될 만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입센 옹호, 셰익스피어 비판, 당시의 인기작가 피네로(Sir Arthur Pinero) 비판은 다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쇼의 평론으로는 <입세니즘의 진수(眞髓)>(1891, 1913), <예술의 정기(正氣)>(1895), <완전한 바그너파(派)>(1898)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힌다.

극작가로서의 쇼

그는 스스로도 많은 극을 써서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풍자와 기지로 가득 찬 신랄한 작품을 쓰기로 유명하다.

쇼가 극작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다. 1885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최초의 희곡 <홀아비의 집>은 92년까지 완성되었으며 런던의 로열티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이어 입센 스타일의 새로운 여성을 다룬 <사랑을 섭렵하는 사람>(1893), 근대 매춘기업을 폭로한 <워렌 부인의 직업>(1893)은 모두 극장측에서 상연이 거부되었으나 1894년에 상연된 <무기와 사람>으로 쇼는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뒤 <캔디다>(1894), <운명의 사람>(1895), <악마의 제자>(1897),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98), <인간과 초인>(1903) 등으로 쇼는 세계적인 유행작가가 된다.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이러한 전기의 작품보다 후기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1913-16)나 <성녀 존(Saint Joan)>(1923)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쇼의 인물은 거의가 작가의 대변자이며 그 작품은 자기 사상을 진술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난, 혹은 그와 반대로 쇼는 단순한 감상적인 오락작가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적지 않다. 그러나 표면적 사상선전극 및 오락극 내부에 깃들인 참된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쇼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바버러 소령>(1905)이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가 지니는 독자적인 희극성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확실히 그가 말했듯이 우선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할는지 모른다.

"(나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나의 전작품을 적어도 2회 이상은 읽고 그것을 10년 동안 계속해달라"
 
— 조지 버나드 쇼,

.
.
그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 묘비명-



<버나드쇼의 명언>

◎ 남자는 많이 알수록, 여행을 할수록 시골소녀와 결혼하길 원한다.-버나드 쇼

◎ 가능한 한 일찍 결혼하는 것은 여자의 비지니스이고, 가능한 한 늦게까지 결혼하지 않
   고 지내는 것은 남자의 비즈니스이다. -버나드 쇼

◎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있다 는 것은 미련은 말이다. 건전한 육체는 건전한 정신
  의 소산이기 때문이다.-버나드 쇼

◎ 결혼은 그것이 최대 유혹과 최대 기회의 결합이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버나드 쇼

◎ 그대가 할일은 그대가 찾아서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해야 할일은 끝까지 그대를   찾아 다닐것이다.-버나드 쇼

◎ 남자가 여자의 교양의 시금석은 싸울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버나드 쇼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버나드 쇼

◎ '로마에가면 로마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 성공의 가장 확실한 길이다.-버나드 쇼

◎ 모든 행로는 무덤에서 끝난다. 무덤은 無의 입구이다.-버나드 쇼

◎ 인간이 호랑이를 죽이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때는 사람들
   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것이다. -버나드 쇼

◎ 미인이란 처음으로 볼때는 매우 좋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 집안에서 상대해 보면 더보
  고 싶지가 않게된다.-버나드 쇼

◎ 비겁자가 되지 않고는 영웅이 될수 없다. -버나드 쇼

◎ 살아 있는 실패작이 죽은 걸작보다 낫다. -버나드 쇼

◎ 선행이란 악행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버나드 쇼

◎ 애국심이란 자기의 조국이 다른 모든 나라보다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믿는 신앙을 말한
   다. -버나드 쇼

◎ 어버이라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여지껏 일찍이 아이들을 위해, 이 직
  업의 적성검사를 한적이 없다. -버나드 쇼

◎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표피 3cm에속는 사람이다. -버나드 쇼

◎ 수치스러운 집안의 비밀에서 벗어 날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활용하는 편이 낫다.
   -버나드 쇼

◎ 사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적응시키고, 사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에서 세상
   을 적응시켜려고 한다.-버나드 쇼

◎ 어리석은 자는 수치스러운 일을 할때에도 그것이 언제나 그의 의무라고 선포한다.
   -버나드 쇼

◎ 나는 상황이나 환경을 믿지 않는다. 이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들이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지 못할경우에는, 그들이 원하는 상황이나 환경을 만든다.-버나드쇼

◎ 꿈꾸지 않는 자에게는 절망은 없다.-버나드 쇼

<버나드쇼의 일화들>

1. 어느날 직업을 불문하고 영국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세 전보를 보냈다고한다.
   "다들통 났음,. 빨리 도망쳐라." 때문에 영국이 한동안 마비 되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그들의 불륜을 알고 있다는 사기꾼들의 협박전화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 그는 누군가가 가장 유명한 소설가 10명을 적어 달라는 요청에 자기 이름을 열번 적
    으며."남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정도의 자신감은 쓸모 없다" 라고 말했다.

3. 밤새 집필 작업을 마치고 새벽녘에 잠이 든 버나드 쇼의 방에 그의 부인이 들어 왔다.
    부인이 그의 원고를 읽고 나서,
   "당신의 글은 쓰레기 감이에요!" 하고 소리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맞아. 하지만 , 일곱번째 교정을 마친 후에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거라고"

4. 한 신문사 기자가 "금요일에 결혼하면 불행해진다는 속설을 믿으시나요?" 란 질문에
    그는 " 물론이지. 금요일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지" 라고 대답했다

5. 버나드쇼(1856-1950)가에 반한 희대의 무용수 이사도러 던칸(1856-1927)이 쇼에
  게 작업을 걸었다.
   "우리 두사람이 결혼하면 쇼 선생님의 명석한 두뇌와 소년의 미모를 합한 2세가 태어
   날터인데 좋은일 아닙니까?" 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시한다.
    쇼가 말하길
    "그것 참 좋은 생각이요. 다만 한가지가 걱정되는 구료"
    던칸이 생각하기로 쇼 선생도 별것 아니야 내미모에 안넘어 갈리 없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그런데 쇼가 한말,
    "내 이 못생긴 얼굴에 당신의 그머리 합해서 애가 태어나면 가관일 것이요."
     얼굴이 벌게진 던칸은 말없이 물러갔다.

<버나드쇼의 어록>

내가 죽을 때는 철저하게 소모된 다음 죽기를 원한다.

더열심히 일할수록 더 오래 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 자체를 즐긴다.

나에게 인생은 더이상 '곧 꺼질 촛불'이 아니다.
인생은 잠시들고 있는 영롱한 횃불이같은 것이다.
다음세대에게 그것을 넘겨주기 전에 가능하면
밝게 타오르게 하고 싶다.

삶속에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병들고, 피로하고 , 두렵다고 말하려 할때 잠깐 멈추자.
뭐 든지 다 할수 있다고 미리 떠들어 대지도 말자.
대신 조용히 침묵하자
끊임없이 불평을 해대며 억지로 부담을 주려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거리를 두자.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거나, 새로운 계획에 착수해 활기 있게 살자.
또는 일상적 삶을 즐기려 노력하자.
초라한 자아 이미지는 버리자.
자기를 훼손하는 꼬리표를 붙이거나 혹은 그런 언급을 하지 말자.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이상 그런식으로 인식되기를 윈치 않는다고 알리자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히만 (Eichmann, Karl Adolf)  (0) 2010.09.16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소크라테스  (0) 2010.08.26
벤 카슨  (0) 2010.08.20
Posted by WN1
,

벤 카슨

생각/인물 2010. 8. 20. 21:44



'신의 손'을 만든 말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는 '신의 손'이란 별명을 가진 소아신경외과 벤 카슨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계 최고의 의술을 
인정받고 있는 의사입니다. 

그가 저명한 의사가 된 데에는 특별한 이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했을 정도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던 4살짜리 
악성 뇌암 환자와 만성 뇌염으로 하루 120번씩 발작을 일으키던 아이를 수술하여 완치시킨 일입니다. 

두 번째는 1987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채 태어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샹쌍둥이로 태어나 불행한 앞날이 예고되었던 파트리크 빈더와 벤저민 빈더가 카슨 박사의 수술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수술을 통해 벤 카슨은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을 가진 벤 카슨도 아주 어두운 성장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그를 보고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의사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벤 카슨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8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싸움질을 일삼는 흑인 불량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백인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에는 항상 꼴찌를 
도맡아하는 지진아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암기하지 못했고 산수시험을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하여 급우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불량소년이 어떻게 오늘날 세계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칭송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느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벤,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벤 카슨은 그의 어머니가 끊임없이 불어 넣어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에 
사로잡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적이 오르기 시작해 우등생이 될 수 있었고, 사우스웨스턴 고교를 3등으로 졸업했으며, 
명문 미시간 대학 의대에 입학하여 '신의 손'을 가진 의사가 되었습니다. 

빈민가의 불량소년, 꼴찌 소년, 놀림과 따돌림을 받던 흑인 소년을 오늘의 벤 카슨으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해준 말 한 마디였습니다. 
"벤, 넌 할 수 있어. 무엇이든지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창조력과 힘을 가진 인생 최대의 에너지입니다. 

사람은 말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말 속엔 크고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wn1 - 벤카슨의 책 '크게 생각하라(Think Big)' 상권 하권 두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벤 카슨을 업적을 다룬 영화도 있습니다.. 
2009년에 나왔는데요..제목은 '기프티드 핸즈:벤카슨 스토리'입니다.





'생각 >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히만 (Eichmann, Karl Adolf)  (0) 2010.09.16
유영만  (2) 2010.09.03
소크라테스 일화들  (1) 2010.08.30
소크라테스  (0) 2010.08.26
죠지 버나드 쇼  (0) 2010.08.20
Posted by WN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