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라
신생아실 창문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기적같이 우리 품으로 날아 와준 아이와 첫 대면을 할 때만 해도, 학교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주 먼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아이들은 무겁다 아우성쳤지만, 그 가녀린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아이들을 땅 속으로 꺼져버리게 만들 것만 같았다. 이 세상은 엄마로 살기도 힘겹지만 아이로 살기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 어이없는 세상에 화가 났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 세상에 아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하지만 세사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더 이상 오지 않을 세상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내 아이를 위해서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 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아니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겟지만 세상에 순응하기보다는 아이가 선택해서 갈 수는 있는 다른 길으 찾기 시작했다.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남과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신만의 길을 걷다 보면 그 길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예측하기 어렵다.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자나갔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잘 닦인 길이 아니다. 거칠고 험할 뿐 아니라 외로운 길이다. 하지만 누군가 성공의 길이라고 미리 정답처럼 보여주는 길에서 그 길을 쫓느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만의과정을 만들어가는 동안 ‘오늘’을 살 수 있다. 그것이 뒤에 오는 누군가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이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가지 길을 가거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중에서
언제부터였는지 우리는 누군가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해왔다. 그 누군가는 학교나 선생님으로 단정 지었다. 빨리 배울수록 좋다고 생각해서 ‘조기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이들은 취학연령 훨씬 이전부터 유치원을 비롯해서 어린이집, 문화센터, 방문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생님을 만났다. 스스로 무엇인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아야 할 것으로 규정한 선생님들이 배워야 할 것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아이들은 타고난 지적 호기심이나 욕구를 느껴보기도 전에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구나 착각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도 능동적인 사고보다 수동적인 사고로 자신을 억제하며 단체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 사회성 좋은 아이라 생각한다면, 또 그게 다 사회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더 논의할 의미가 없다.
합법적으로 아이들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분리되고 있다. ‘교육제도’ 또는 ‘복지제도’란 이름으로 부모들이 별 저항 없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과 다르면 불안해하고, 강한 개성을 가지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는 조직에 적응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깊이 간섭하고 통제하며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성장하길 바란다. 개성을 밟아버리고 자아 존중감마저 죽이면서.
하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낸 사람들이 창의적인 일에서 상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는 세상이다. 자신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대치에 맞춰 살아야 하는, 말 잘 듣고 착한 사람으로 사회적 잣대의 성공을 이루었을 때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지켜야 할 수많은 규칙 안에 자신을 가두고, 서둘러서 먼저 배우는 시스템에 아이들은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규칙들은 대부분 아이 당사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체생활에서 아이들을 원활하게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아이들은 자존감을 익히고 키우기도 전에 타고난 재능은 꺼내 보지도 못하고 ‘적응’에 익숙해진다.
영국 교육학자 켄 로빈슨(Ken Robinson)의2006년 테드(TED) 강연이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바로 교육에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미지의 앞날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재능을 갖고 있다. 혁신을 창조하는 재능이 있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이러한 재능을 가차 없이 억누르고 있다. 이제 창의력을 읽기, 쓰기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아이들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것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없다면 신선하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어른이 되면 뭔가 실수를 할까봐, 틀릴까봐 걱정을 하면서 살게 된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실수라는 것을 살면서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말살시키고 만다. 우리의 교육 체계는 학습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건 산업화의 산물이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어린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예술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문제다.” 우리의 창의력은 자라면서 계발되기는커녕 있던 창의력도 없어진다. 교육이 창의력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교육을 하려면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 스스로 미래를 멋지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무리 좋은 학교, 훌륭한 교사도 내 자녀의 잘못된 교육을 책임지지 못한다.
교육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질 사람은 부모 말고 없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하기에 학교라는 울타리에 내 아이를 교육시킬 최소한의 가치가 남아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2014년 9월 <SBS스페셜> ‘부모vs학부모’.
사회는 너무도 간단히 ‘자살했다’ 결론짓는다. ... 사회적 폭력, 그 폭력에 의해 아이들이 희생자가 된 타살이다. ...
후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잘못된 시스템에서 버티기 위해 가쁜 숨 몰아쉬던 아이들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후진데 아이들이 폼 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정부부처가 다루고, 전문가가 고민하는 교육 문제의 대부분은 실질적인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현실적인 ‘입시’에 대한 논의다.
학교 교육의 최종 수혜자 기업은 이 잘못된 시스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학교는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치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관정하는 부처 관계자들은 홈스쿨링은 법적으로 명기돼 있지 않아 불법이라 한다. 초중등교육은 의무교육인데, 이외의 교육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명시해놓은 게 없어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불법이라는 것이다. 법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불법’의 의미가 법으로 정해진 사항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테고, 그렇게 규제나 규정에서 정해놓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어겼을 때를 불법이라 하는 것 아닐까? 할 수 있는 것만 규정해놓은 법 덕분에 그 어떤 제도적 울타리 없이 허허 발판에 서 있었던 홈스쿨러였다. 홈스쿨러가 증가하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홈스쿨을 제도화해서 법령 안에서 그들을 포용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법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홈스쿨을 불법이라 단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 맺음에 있어서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가 착하기를 바란다. ‘착하다’는 것이 뭘까?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야 하고 잘 길들어져 있어야 한다. 즉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적자생존의 법칙에 순응하며 세상에 자기를 억지로 끼워 맞추기 위해 ‘사회성’이라 이름 붙인 길들여짐을 배우고 있다. 이미 그런 세상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개중에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다. 학교는 그런 아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단순하게 부적응자라고 낙인찍어 학교 밖으로 자꾸만 몰아낸다.
학교 안에 있어야 기를 수 있다고 믿어지는 그 ‘사회성’은 어떤 모습일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눈치 보지 않고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 부정과 부패, 비리가 얽혀 있는 ‘패거리 문화’에서 당당히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이들은 가르치는 것만 배우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의 타고난 재능인,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배우고자 하는 욕구를 밟아 뭉개는 잘못을 부모와 학교가 저지르지만 않으면 된다. ... 그냥 지켜보며 기다리기만 해도 아이들은 신기하게 자신이 관심 잇는 것을 너무 잘 찾아낸다. 아쉽다면 가끔 아이 손잡고 나들이 삼아 전시관이나 공연장을 찾아가 함께 느끼고 즐기면 그만이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노력을 같이 해보지 않아서다.
‘학습자 스스로가 학습의 참여 여부에서부터 목표 설정 및 교육 프로그램의 선정과 교육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전 과정을 자발적 의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여 행하게 되는 학습 형태. 자기주도학습은 특히 사회교육이나 성인학습의 특징적 방법으로 많이 활용된다. 그 이유는 학교 교육의 경우는 통상적으로 정형적 교육(formal education)의 성격상 표준화된 교육과정에 의해, 교사의 주도하에, 타율적인 교육이 실시되나 이와 달리 사회교육에서는 상대적으로 학습자에 의한 자율적 교육의 선택 폭이 넓은 비정형적이고 자율적이며 이질적이고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교육의 주 대상이 되는 성인 학습자는 아동 및 청소년 학습자와는 달리 자아개념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숙하게 되므로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러한 자율적 학습이 보다 효과적인 교육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주도학습에서 학습자는 단순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학습 풍토하에서 수동적으로 학습에 임하는 객체가 아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교육학용어사전’
읽으면서 맘에 걸리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 속한 아이들을 위한 학습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를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에 비교해보자.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 차는 첨단기업이다. 가장 속도가 빠르다. 비정부기구(NGO)는 90마일의 속도로 달린다. 요즘 그 수가 급증했다. 하지만 같은 도로에서도 느린 차들이 있다. 규제당국은 25마일이다.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공교육 시스템은 10마일 정도가 될지 모르겠다. 시속 3마일로 달리는 차도 있다. 정부와 관료주의다. - <부의 미래> 앨빈토플러
스스로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찾아내고 선별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정조로 재가공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학교는 아이들이 능동적을 지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교육과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이런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내 아이가 학교에 속해 있는 지금, 이것을 학교로부터 기대할 수 없다면 가정에서라도 지도해주어야 한다. 허울뿐인 ‘자기주도학습’에 속지 말고 진정한 의미의 자기주도학습을 위해 너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능동적 지식을 찾을 시간을 돌려주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 어떨까.
우리 세대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제 3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렸다면 우리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제 4의 물결’의 시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도무지 변화의 속도를 쫓아갈 능력도 의지도 없는 곳이 ‘학교’다. 교재 연구도 지도 방법도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교실’에서 그나마 변화를 위해 애쓰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닥치며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20세기 ‘교사’들이 원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 그 속도가 낯설지 않은 21세기 ‘학생들’을 상대하는 곳이 학교다. 세상의 속도에도 아이들의 속도에도 맞추지 못하니 제자리걸음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곳이 학교다. 그 학교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와 관료주의까지 더하면 그 안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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