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장! 이놈의 피리가 또 막혔어요. 여름밤은 너무 짧은데 말이에요.
- 넌 집에 안 가니?
-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해요?
- 기다려.
- 누굴요?
- 나도 몰라. 오지 않을 사람 같아.
- 한가한 사람이군요.
- 아니, 나는 바빠, 열심히 기다리고 있거든.
- 열심히 기다리는 건 좋은 기다림이 아니에요.
- 왜?
- 기다림은 의지와 결심으로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기다릴 것들은 당신의 바깥에 있어요. 당신에게 누군가 필요하다면 부디 아무도 기다리지 말아요.
- 저런, 네 말대로라면 공연히 무덤가의 꽃들만 시들었구나.
- 저 시든 꽃들요? 그건 다만 이 여름의 마지막 장미일 뿐이에요. 누굴 위해 피어난건 아니죠. 여기 있는 것들은 더 이상 자신을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홀로라는 말을 모른답니다. 이제 그만 이야기 할래요. 난 다시 피리를 불 거예요. 59-60
그래도 떠난 애인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가 내게 하고, 나도 나의 떠난 애인에게서 배운 말을 그대에게 하지. 내가 그대를 떠나면 그대가 나에게 배운 사랑의 말을 나의 새 애인에게 건네고, 지구의 사랑은 아무래도 그렇게 현명해지고 있는 거지. 오랜 세월 세상의 광물과 다 접톡해서 현명해진 지하수처럼.
그래서 말이지, 나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기보다는 그대에게 배울, 내 새 사랑의 말을 생각해 보는 밤이고 싶어.
사랑이 밀려오면 평온의 휴식은 끝나고, 나는 이내 가난해져 다시 또 길을 잃고. 102
순정이란 것은 자고로 연약한 마음이 아니라, 들끓는 닫힌 욕망의 체계이다. 순정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극진함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제 속의 이유로 그 사람을 독점하려는 욕망이다. 심지어는 그 욕망이 저지당하고 명백하게 그 끝을 보았을 때조차, 남자는 저 홀로 상처를 끌어안고 사랑의 끝을 모른 척하며, 여전히 제 속에 갇혀 사랑을 고수한다. 상대도 없고, 자신의 무너짐도 없이 오직 거울 속에 갇혀 홀로 사랑하는 일.
남자들아, 함부로 제 속에서 순정을 길어올리지 마라. 순정은, 이토록 사랑과 상처 사이에 기생하며 꿈틀대는 그대의 증상에 다름 아니니, 증상으로나마 제 욕망을 누리려는 마음은 더없이 쓸쓸한 것이다. 106
'밑줄여행 >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 탐구 일기 - 이세미 이슈 2012 03810 (2) | 2012.11.13 |
---|---|
황홀한 자유 - 이지상 팝콘북스 2006 13040 (0) | 2012.11.11 |
다르게 시작하고픈 욕망 서른 여행 - 한지은 청어람 2010 03810 (4) | 2012.10.29 |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 배성아 브리즈 2008 03810 (0) | 2012.10.26 |
사바이 인도차이나 - 정숙영 부키 2011 03810 (0) | 2012.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