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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15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중세유럽의 마녀사냥


세일럼(Salem)의 마녀사냥

 

*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하는 세일럼(salem)은 그 명칭과는 달리 수십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이 벌어졌던 곳.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고향이기도 함.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엶. 『주홍글자』(1850)를 쓴 곳도 바로 이곳 세일럼이었음.

 

* 세일럼의 종교적 갈등

▶ 세일럼 타운의 성쇠 : 보스턴 인근 북쪽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케이프 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음 ->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며 항구도시로 발전, 18세기 말까지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 됨.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 전개.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유명했음.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쥠 -> but 1812년 미·영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듦

▶ 로저 윌리엄스와 로드아일랜드 :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됨. but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함.

->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히 절연할 것 &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 등을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으며,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

->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에 대한 추방 요구를 수용 ->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 -> 오늘날 영국인들의 로드아일랜드 역사가 시작됨.

▶ 퀘이커교도의 이주와 박해 :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음. 조지 폭스(George Fox 1624 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 요구,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음.

->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씀. but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함 ->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됨.

 

* 세일럼 마녀사냥의 전개

▶ 세일럼 마을이 뉴잉글랜드 지방의 모든 수출입의 통로가 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면서,  1661-1681년까지 가장 부유한 10%가 마을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됨. 정치 참여자들도 옛날 농부가 아니라 갈수록 부를 축적해 가는 상공인들이 됨. 인구분포도 상인:농부 = 6:1 정도

-> 청교도 이상주의를 품고 있던 원래 주민들이 갈수록 가난한 농부로 전락하여 교회에서도 정치에서도 부상하는 상인들에게 밀리게 됨. 사회분위기도 세속화, 물질주의적 추세가 확산되어 이들은 위협과 심리적 갈등을 겪음.

-> 이러한 때에 1688년 세일럼 타운에 새로 부임한 젊은 청교도 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주민들의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은 또다시 내분에 휩싸이게 됨.

-> 마을 교회는 2개 분파로 갈라짐 : 마을 동쪽에 거주하는 상업 주도형 세력(존 포터가 이끄는 가족을 중심으로 마을 항구를 통해 사업하는 쪽) vs 항구 반대편인 서쪽에 거주하는 토지에 의존하며 농업에 종사하는 세력(존 푸트남 가문 중심). 푸트남파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책임을 동부인들에게 물어 이들을 교회에서 힘쓰지 못하게 하려고 강력하게 단합함.

-> 패리스 부임 이전에도 여러 명의 목사가 분파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쫓겨남. 오래전 푸트남 가족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던 목사도 마녀 선풍에 휩쓸려 사망함 -> 패리스는 푸트남 가족파와 연합,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로 교회를 더럽히고 있는 악마의 세력들과 싸워 이겨야 함을 거듭 강조함.

▶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시작됨.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지름.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킴.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 ->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음.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림 ->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서인도 제도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

->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됨.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됨.

->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감.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음.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임.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됨.

->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감.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포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포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됨 ->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을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됨.

▶ 1692년 5월 중순, 영국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 심리에 착수하도록 하여 본격적인 재판을 전개함.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으로, 그녀는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 뒤에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을 당함.

->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 받아 처형,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됨.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

->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 비등. 재판관 중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며 재판관직 사임.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은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됨.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됨.

-> 하버드 대학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함 ->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되어 재판을 속개,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남 -> 5월,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 종결함.

->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 받음. 그중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짐.

 

*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 참회.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 &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 ->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움. 세일럼 제1교회도 1992년 9월 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

-> 호손은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씀. 이는 상투적 수사만은 아님.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

 

*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여러 가지 해명이 나옴.

①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 :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봄.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림.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됨.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

  한편,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와 다른 진단을 내림. 즉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함.

②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 :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 ->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됨.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

③ 또한 역사가들은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도 주목함.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음.

④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 : 희생자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신분별·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독신·행실 불량·자식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힘.

⑤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함.

 

=> 이러한 진단과 해석들은 저마다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임. 요컨대 17세기 말 세일럼의 마녀사냥은 후대인들이 당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사회적, 심리적 측면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되고 있음. 또한 세일럼의 사건을 일으킨 여러 요인들은 이후 미국의 역사 속에서 종종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미국의 정체성과 특성을 드러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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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종교적 결벽, 정치적 갈등이 빚은 역사의 오욕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고기잡는 곳’이라 불리던 작은 항구도시 세일럼. 바다와 햇살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세일럼이 낳은 대 문호 호손은 선조의 만행에 대한 원죄의식을 ‘일곱 박공의 집’ ‘주홍글자’ 등의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쏟아냈다. 세일럼 기행은 집단 히스테리에 희생된 원혼의 흔적을 찾는 길이기도 하다.

세일럼 마녀박물관.

뉴잉글랜드의 7월 햇살은 화사하기만 했다. 그러나 세일럼(Salem)을 찾아 나선 나에게 성하의 짙푸른 노변 정경은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옛 로마인들은 어느 장소든 그곳을 지켜주는 ‘장소의 정령(Genius loci)’이 있다고 믿었다. 근본적으로 직선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땅에서 이 장소의 정령이 나그네에게 말을 걸어옴직한 만곡부가 있다면 세일럼이 바로 그런 곳이리라.

세일럼은 원래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일럼은 명칭과는 달리 수십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마녀재판, 그 어두운 역사의 상흔이 밴 곳이다. 게다가 이 오욕의 역사는 기억의 저편에서 잠들기를 거부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령처럼 출몰해 미국사회를 뒤흔들었으니, 1950년대의 매카시즘 선풍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억울하게 죽은 세일럼의 희생자들은 반복되는 이 집단적 히스테리에 필시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3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떠도는 원혼이 있다면 나 같은 이방의 길손에게라도 어찌 하소연하고 싶지 않겠는가.

세일럼은 또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의 가해자 편에 선 재판관을 조상으로 둔 호손은 이 역사의 굴곡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삼아 조상이 지은 죄업을 속죄라도 하듯이 박해받아온 약자의 삶을 조명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가 ‘옛이야기’를 비롯한 초기의 단편들과 ‘주홍글자’를 쓴 곳이 이곳 세일럼이요, 유명한 ‘일곱 박공의 집’의 무대 또한 세일럼이다.

세일럼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구당 유길준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883년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유길준은 귀국을 미루고 혼자 남아 세일럼 인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덤머 아카데미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이런 연유로 그가 남긴 편지를 비롯한 유품들이 이곳 세일럼의 피바디 엑세스 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세일럼, 보스턴, 로드아일랜드

보스턴 교외를 벗어나 지방도로 107번을 타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차창을 스치는 바람이 거세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이다. 해안이 가까워지면서 노변의 나무들도 키 작은 관목으로 바뀐다. 이곳 해안가는 일찍부터 어자원(魚資源)이 풍부한 것으로 영국에 알려졌고, 그 결과 1623년에 일단의 영국인들이 어업 목적으로 캐이프앤에 이주해와 작은 정착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중 한 사람인 로저 코낸트(Roger Conant)가 1626년 약 50명의 식민자를 거느리고 이곳 아늑한 항만에 이주하면서 세일럼의 역사는 시작된다.

세일럼의 원래 명칭은 ‘나움케악(Naumkeag)’. 원주민 인디언 말로 ‘고기 잡는 곳(fishing place)’이라는 뜻이다. 이어 1628년 존 엔디콧(John Endecott)이 이끄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선발대가 도착했다. 엔디콧은 식민지 본진이 정착할 터를 닦으면서 이곳이 평화의 땅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명을 세일럼으로 바꿨다.

1630년 6월12일, 존 윈스롭이 주축이 된 식민지 본진이 당도했으나 인근을 둘러본 윈스롭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길 포기했다. 남쪽 해안을 계속 답사해 내려간 윈스롭 일행은 찰스 강어귀를 주목하다가 그곳 또한 식수가 충분치 못함을 알고서 최종적으로 강 건너 반도 쪽을 정주지로 정하고, 링컨셔에 있는 그들의 고향 도시 이름을 따서 보스턴이라 명명했다. 이후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에서 보스턴과 경쟁을 벌이면서 항구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635년 세일럼 교회의 목사 로저 윌리엄스에 의해서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사(才士)로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젊은 성직자 윌리엄스는 1631년 보스턴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됐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보스턴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취임을 거부하고 대신 분리주의자들이 세운 플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택했다.

   

세일럼의 첫 이주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한 절연할 것과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했다. 윌리엄스는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고,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의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의 추방 요구를 수용했다.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의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시작이다.

댄버스의 광풍(狂風)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조지 폭스(George Fox·1624∼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를 요구하고,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했는데,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해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런 반역의 역사적 체험이 철없는 몇몇 소녀의 일탈적 행동을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비화시킨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첫 목적지로 삼은 세일럼의 마녀박물관은 세일럼 콤몬의 맞은편, 호손의 이름을 딴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 얼굴이 길쭉한 형상의 고색창연한 청동상이 눈길을 끈다. 마녀사냥에 연루된 인물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뜻밖에 세일럼의 창설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이다. 1913년에 그를 기리는 협회가 헨리 킷선 (Henry A. Kitson)에게 제작을 의뢰해 봉헌한 것이다. 마녀사냥의 진앙지라는 세일럼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각가 킷선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아무튼 코낸트의 동상은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미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표를 산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곧장 기념품 가게다. 가게는 온갖 종류의 마녀 형상과 마술 도구로 가득 차 있다. 그 치욕의 역사가 이제 세일럼의 가장 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해 돈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활용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논리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가게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서니 마녀와 마녀사냥의 역사적 변천사가 벽면을 채웠다. 이어지는 중앙의 큰 홀에서는 마녀사냥의 촉발에서 재판에 이른 과정을 입체화해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되고 있었다.

세일럼 마녀사냥의 발원지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세일럼이 아니고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댄버스다. 1692년에 댄버스는 ‘세일럼 빌리지’라고 불렸는데, 1637년경에 세일럼 사람들이 더 넓은 땅을 찾아 이주해 세운 곳이다.

도시 주변에 새로이 형성된 정착지는 자치권을 얻어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해가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하지만 세일럼은 오랫동안 세일럼 빌리지에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역으로 번성하던 세일럼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세일럼 빌리지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689년 세일럼 빌리지의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져, 숙원이던 독자적 교회를 세우고 교구 목사를 새로 초빙할 수 있게 되면서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으나, 초빙돼온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사탄 사주 받은 마녀를 찾아라!

작품 ‘마녀 심문’ (T.H. Matteson, 1853;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마녀사냥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갈등과 분쟁의 중심에 있던 세일럼 빌리지의 담임목사 패리스의 집에서 시작됐다. 1692년 2월 어느 날, 패리스의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헛소리를 질렀다. 며칠 뒤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애비게일 또한 비슷한 발작을 일으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의 다른 소녀 두서넛도 유사한 증세로 고통을 호소했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특별히 다른 교구의 목사를 초빙해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하게 했다.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자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로 인해 사태는 급전한다.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이런 해코지를 한다는 통념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던 바베이도스 출신의 티투바, 마을의 거렁뱅이로 입이 험한 새라 굿, 그리고 과거에 행실이 불량해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자주 올랐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세일럼으로부터 호손의 선조인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됐다. 세 소녀는 이들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면서 혼절했다.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됐다.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갔다. 세일럼 행정관들이 이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됐는데, 놀랍게도 독실한 신앙생활로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다.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과 이들을 대질시키자 소녀들은 다시금 발작 증세를 보였다.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돼 투옥됐다.

뒤이어 언니를 변호한 레베카 너스의 두 자매도,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마녀로 체포됐고, 심지어 네 살밖에 안 된 새라 굿의 딸 도카스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강직한 성품으로 마을의 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던 존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됐고, 남편 존 프록터가 그녀를 변호하자, 그 역시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됐다. 이런 식의 연쇄 지목으로 5월 말까지 무려 100여 명이 투옥됐고, 그 범위도 세일럼 빌리지를 넘어 동부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됐다.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뉴잉글랜드 사회에서 처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윈스롭의 일기에 따르면 이미 1647년에 마녀재판이 열린 적이 있고, 그 이듬해에는 마가렛 존즈라는 여자가 마녀로 처형됐다. 1662년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집단적인 마녀소동이 일어나 13명이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5명 중 4명이 혐의가 인정돼 처형됐다. 한 통계에 따르면 1647년에서 1663년까지 뉴잉글랜드에서 모두 79명이 마녀 혐의로 체포됐고, 재판에 회부된 33명 중 15명이 처형됐다. 17세기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 마녀재판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선을 영국 쪽으로 돌리면 희생자는 더욱 엄청나다. 청교도 혁명 전야인 1645년에서 1647년 사이의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백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주지하듯 마녀재판은 종교개혁으로 야기된 종파적 갈등에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500년부터 종교적 관용이 정착되기 시작한 1660년까지 유럽에서 대략 5만~8만명이 마녀재판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어닥친 피바람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시작된 것은 6월 초순이다. 당시 뉴잉글랜드에는 총독의 부재 탓에 합법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행부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지도층은 1688년 명예혁명과 더불어 제임스 2세가 임명한 에드먼드 앤드로스 총독을 몰아낸 후 일종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해 식민지 행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본국의 정권이 안정된 1692년 5월 중순, 윌리엄과 메리 왕으로부터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새로운 특허장을 쥐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태를 보고받은 핍스는 부지사 윌리엄 스타우턴을 재판장으로 한 7인 특별재판부를 즉각 구성하고 심리에 착수하도록 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년에 이미 마녀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브리짓 비숍이었다.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이 선고됐고, 이틀 뒤인 6월10일 갤로우스 힐에서 교수형이 집행됐다.

6월30일, 다시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됐고, 이어 8월에 6명, 9월에 8명이 처형됐다. 9월에 처형된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이때 나이가 80세이던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고문으로 그의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돌에 짓눌려 사망하고 말았다.

   

마녀사냥 300주년을 기념해 댄버스에 세운 희생자 추모비(1992).

9월에 들어서면서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은 부지사 스타우턴이 주도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을 비판하면서 재판관직을 사임했다. 마녀임을 자인한 사람들은 오히려 심리가 유예되고, 무죄를 주장하는 강직한 사람들의 경우는 심리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유죄 판결을 받는 재판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 하는 소녀들의 증언,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그 흔적이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 유무,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등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재판의 공정성이 문제시됐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이자 명망 있는 목사였던 인크리스 매더 또한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플릿을 써서 박약한 증거를 근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사람이 마녀로 체포됐는데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청교도 지도층의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에 이르자 핍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했다. 이듬해 1월 새로운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이 속개됐으나 대부분이 무혐의로 풀려났다. 5월에 이르러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1년 남짓 계속된 마녀사냥 기간에 모두 185명이 체포되고, 그중 59명이 재판에 회부돼 31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가운데 19명은 처형되고, 1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3명은 재판을 기다리다 감옥에서 사망했다. 마녀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심을 되찾자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년 재판관의 한 사람인 새뮤얼 시월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의 뒤를 따라 과오를 뉘우치며 사과했다. 1711년 식민지 정부는 아직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 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했다. 1992년 세일럼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세일럼과 댄버스 시민은 이 오욕의 역사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세일럼 제1교회 또한 1992년 9월20일자로 자일즈 코리와 레베카 너스를 정식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집단광기의 근원

이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오와 보상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도대체 왜 이런 집단적 광기(狂氣)가 일어났는가. 언덕 위에 멋진 신앙 공동체를 세워 만천하에 신의 소명을 과시하고자 한 청교도 사회의 심장부에, 민주주의 정신의 원천으로 상찬되어온 ‘뉴잉글랜드 정신’의 요람지에, 어떻게 이런 미혹이 스며들 수 있었던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명이 나왔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을 청교도 신앙 자체에 내포된 문제의 표출로 보는 관점이다. 청교도들은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 보았다. 이 싸움의 일환으로 사탄은 선량한 사람의 탈을 쓰고 나타나 사람들을 미망에 빠뜨리는 책동을 부린다. 이런 생각은 당시 출중한 청교도 목사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카튼 매더가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쓴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이’에서도 확인된다. 독실한 신앙인을 마녀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의 이러한 마니교적 선악관의 발로라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이 청교주의의 내부에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청교주의 연구가 페리 밀러는 이와 다른 진단을 한다. 1648년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성공으로 신대륙 신앙공동체 건설의 의의가 퇴색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는데, 이 위기감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순수성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이 비타협적 태도가 결국 마녀사냥이라는 외길을 선택하게 했다는 것. 밀러는 이런 시각에서 마녀사냥을 뉴잉글랜드 청교주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사적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근래에는 사태의 근원을 청교도의 내면세계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변화에서 찾으려는 시각이 우세하다. 1684년 본국 정부가 신대륙의 여러 식민지를 통합해 직할 식민지로 개편하고 국왕이 총독을 파견해 직접 통치하면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자치권을 상실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국왕이 임명한 총독을 몰아내고 일시 자치를 누렸으나 본국의 정국이 안정되면서 1692년에 새 총독이 파견됐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혼란과 1675년 필립 왕 전쟁의 패배로 주춤했던 인디언이 세력을 재집결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때마침 겹치면서 청교도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마녀소동이 터지자 이내 집단적 히스테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세일럼과 농업 중심의 낙후된 세일럼 빌리지의 경제적 갈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특히 토지를 둘러싼 잦은 분쟁으로 야기된 반목과 불화가 마녀사냥을 기해 터져 나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중의 하나인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 분쟁으로 원한 관계에 있던 포터가(家)의 인척을 46명이나 마녀로 엮어 넣었다. 그러기에 아서 밀러는 이를 소재로 한 연극 ‘시련’에서 존 프록터로 하여금 “복수가 곧 법이 되었다”고 부르짖게 했다.

   

치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

호손 문학의 산실인 세일럼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 동상과 호손이 3년간 징세관으로 근무했던 세일럼의 세관.

한편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빚어낸 참상으로 규정한다. 희생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점을 주목한 칼슨(Carol F. Karlsen)은 ‘여성의 형상을 한 악마’라는 책에서 세일럼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난 마녀재판 희생자들의 성별, 신분별, 직업별 분포를 상세히 분석·제시하면서 청교도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적 여성상으로부터 벗어난 가난하고 독신이고 행실이 불량하고 자식이 없는 여성들이 결국 마녀사냥의 표적이었음을 밝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심리학자는 발작을 일으킨 소녀들의 증상에 주목해 이들이 세일럼 인근에서 많이 재배하는 밀이나 귀리에 기생하는 곰팡이균에 집단으로 감염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마녀재판 프로그램을 관람하고 박물관을 나서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다. 이방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 끔찍한 악몽에 가슴이 답답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부지 소녀의 말 한마디에 졸지에 마녀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막다른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답답했으면 심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압살당하는 길을 택했겠는가.

무거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화사한 호손 가로를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호손의 고향답게 처처에 호손의 흔적이 배어 있다. 호손 호텔과 너새니얼 식당도 있다. 조금 더 걸으니 모자를 손에 든 커다란 호손의 동상이 앞을 가로막는다. 동상 앞에는 누군가가 바친 꽃다발이 놓여 있다. 나는 문득 호손이 ‘앨리스 도운의 청원’이라는 단편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쓴 것을 기억해냈다. 이를 상투적 수사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의 선조가 깊숙이 관여했기에 마녀사냥에 대한 그의 죄의식은 남달랐기 때문이다.

칼슨의 지적대로 마녀사냥이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른바 서구 근대성의 한 음화일진대, 서구 근대를 온몸으로 체험했을 유길준 선생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서유견문’에서 이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보스턴이 미국 정신문화의 중심지라는 것과, 이곳 출신 아이들이 언행이 분명하고 학식이 많아서 어디에 내놓더라도 행동과 말씨로 곧장 그 출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언급이 보일 뿐이다.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서 왼쪽 더비 가로로 들어섰다. 이내 바다로 길게 뻗은 더비 부두가 보이고, 이어 세일럼 항의 파란 물결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세일럼은 뉴잉글랜드의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일찍부터 척박한 내륙보다 바다로 눈을 돌린 이곳 상인들은 멀리 아시아와 인도까지 배를 보내 무역활동을 펼쳤다.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번 무역상들은 세일럼에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을 일으켜 이들의 집이 들어선 체스넛 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이름 높았다. 특히 이곳 거리와 부두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엘리아스 더비(Elias Hasket Derby)는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1812년 영국과 벌인 전쟁을 고비로 상권을 인근 보스턴과 뉴욕에 뺏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호손이 ‘주홍글자’의 첫 장인 ‘세관’에서 술회하고 있듯이 인근 지역에서 목재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한산한 항구로 몰락해버렸다. 1938년, 한때 뉴잉글랜드의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이던 세일럼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세일럼 항구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고, 그 결과 예전의 영화를 말해주는 건물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현실과 상상 어우러진 거장의 고향

호손은 1804년 7월4일, 세일럼 유니언 가 27번지에서 태어났다. 네 살 나던 해, 선장이던 아버지가 남미의 수리남에서 황열병으로 사망한 후 두 누이와 함께 외가에 의지해 성장했다. 그를 평생 따라다닌 가난, 고독, 뿌리뽑힌 실향민 의식은 이렇듯 불우한 환경의 소산일 것이다. 열두 살 때 메인 주 레이먼드에 있는 외가 소유의 시골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소년기를 보낸 후 호손은 부른스빅의 보든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한 살 때 다시 고향 세일럼으로 돌아왔다.

그후 1842년 결혼해 콩코드로 이주할 때까지 호손은 허버트 가 12번지의 외가 골방에 칩거하면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독서와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역사와 그 일부를 이루는 가문의 과거사를 깊이 탐구하고, 폭력과 죄로 얼룩진 그 부끄러운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썼다.

   

호손의 동명 소설로 유명해진 일곱 박공의 집.

세일럼은 실로 두 가지 의미에서 호손 문학의 산실이다. 그 굴곡의 역사가 그의 소설의 주 소재라는 점과, 그런 ‘흐릿한 소재’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창작의 터전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이 두 세일럼, 곧 그가 살던 19세기의 세일럼과 17세기 청교도 시대의 세일럼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낸, ‘주홍글자’의 머리글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한다면, ‘현실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이 어우러진 세계인 것이다.

세일럼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먼저 세관 건물을 찾았다. ‘주홍글자’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세관 건물과 날개 편 독수리상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세일럼 하면 늘 이 대목을 떠올리곤 했더랬다. 책을 통해 친숙해진, 주황색 벽돌로 된 세관 건물이 이내 눈에 띄었다. 3층 건물은 고즈넉하면서도 옛 영화를 상기시키기에 족한 당당한 모습으로 항구를 내려다보며 해안가에 서 있다. 정부기관을 표상하는 날개 편 독수리상도, 줄무늬를 세로로 늘어뜨린 공화국의 국기도, 현관의 주랑도, 화강암 돌계단도 ‘주홍글자’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호손은 세일럼 세관에서 1846년부터 1849년까지 3년간 수입세 징세관으로 일했다. 결혼 전인 1839년 1년여 동안 보스턴 세관에서 검사관으로 일한 뒤 두 번째로 맡은 공직이었다. 1837년에 작품집 ‘옛이야기’를, 1841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뉴잉글랜드 역사 이야기 ‘할아버지의 의자’를, 1846년에는 ‘목사관의 이끼’를 출간하고,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글을 기고했지만, 인세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고정 수입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마다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 사이 첫딸 우나와 아들 줄리안이 태어나 식구도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세관 일은 무미건조한 것이고 더러 시간이 나더라도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아 호손은 내심 초조했다. 그는 감수성이 무뎌지고, ‘상상력의 거울이 흐려지고’, 얼마 되지 않는 재능마저 ‘에테르처럼’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애증의 세일럼

그를 구해준 것은 정권교체였다. 1848년 선거에서 휘그당 출신의 재커리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 계열이던 그는 ‘목이 잘렸다.’ 호손은 정치세계의 비정함을 원망하면서도 다시금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찾은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세관에서 실직한 뒤 두 달도 안 돼, 그의 심리적 지주였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호손은 이중의 상실감에서 ‘주홍글자’ 집필에 매달렸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탈고했다.

결코 속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로서는 대단한 속도였다. 게다가 첫 장편이었다. ‘주홍글자’의 강렬함은 이처럼 작가로서의 위기감, 상실감, 소외감,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1850년 3월, ‘주홍글자’의 출판과 더불어 그는 세일럼을 떴고, 그 후로 몇 차례의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호손의 이력을 헤아려보는 사이 내 발걸음은 어느새 세관을 뒤로하고 몇 블록 떨어진 ‘일곱 박공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세일럼, 터너 가 54번지. 호손의 동명 작품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집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래서 더 한층 검은빛을 띤 채, 마치 웅크린 동물처럼, 소로의 한 블록을 점령하고 서 있었다. 집 옆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거대한 느릅나무는 소설에서 핀천 느릅나무로 명명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이 느릅나무와 사면으로 튀어나온 가파른 박공(?퉌·합각머리나 맞배지붕의 양쪽 끝머리에 ‘入’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 또는 벽)이 하늘을 시원스레 분할하고 있지 않았다면 집은 더 음침한 인상을 주었을 것 같다. 물론 나의 이런 인상은 탐욕으로 인해 저주받은 한 가문의 몰락과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소설의 내용에 의해 굴절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소설의 모델이 된 실제의 집이 이런 내력을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원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터너-잉거솔 가라고도 하는 이 집은 카리브해 무역으로 갑부가 된 존 터너가 1668년에 지은 것이다. 3대째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 터너 가문은 이 집을 호손과 인척 관계인 잉거솔 가에 팔았다. 사촌인 수전 잉거솔을 찾아 이 집을 자주 방문한 호손은 집의 독특한 외관에 영감을 받아 이를 때마침 자신이 구상하던 소설의 제명으로 삼은 것이다. 호손 당시에 이 집의 박공은 4~5개만 남아 있었던 듯한데, 집주인으로부터 원래 박공이 일곱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곱 박공의 집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8년 집의 소유권은 다시 캐롤라인 에머튼에게 넘어갔는데, 에머튼은 집을 매입한 뒤 곧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전문가에게 의뢰해 소설에 묘사된 대로 일곱 박공의 집으로 복원했다. 삶이 예술을 모방한 것이다. 일곱 박공의 집은 17세기 목조 주택으로서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문학적으로는 물론 건축학적 의미가 큰 건물이기도 하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니 꽃이 화사하게 핀 정원으로 인도된다. 정원이 바다에 면해 있어 세일럼의 내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중충한 집의 외관과는 판이하게 화사한 풍경이 펼쳐져 있어 좀 의외라는 느낌이 든다. 정원 쪽에서 집을 바라보면 거리에 면한 입구 쪽과는 또 다른 모양이다. 서로 다른 크기의 박공이 사면으로 돌출해 있어 집은 방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정경을 연출해낸다. 따라서 집의 전모를 한눈에 보기 어렵다. 전체상을 허용하지 않는 집의 이 다면성! 호손이 왜 이 집에 끌렸는지 이해된다. 이런 독특한 외관이 다원성의 미학을 추구한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리라. 아닌게아니라 주변 건물의 대다수는 장방형의 이른바 ‘연방 스타일(Federal style)’이다. 오직 이 일곱 박공의 집만 사면으로 뻗은 입체적 양식이다.

‘원죄’ 반성하는 ‘일곱 박공의 집’

‘일곱 박공의 집’은 퇴락해가는 집에 얽힌 삶의 영고성쇠의 이야기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의 과거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주홍글자’의 연장선상에 있다. 호손은 ‘주홍글자’에 이어 다시 한 번 고문서지기를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케케묵은 옛 문서를 뒤적여 파묻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문화의 고고학으로서의 소설 쓰기. ‘옛이야기’에서 ‘일곱 박공의 집’에 이르는 호손의 문학적 여정은 이렇게 요약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소설은 일곱 박공의 집을 지은 핀천 가의 5대에 걸친 변전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집은 가족 혹은 가문의 표상이다. 다시 말해 ‘일곱 박공의 집’은 박경리의 ‘토지’처럼 집을 통해 가문의 내력을 더듬는 가족사 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친근한 모티프를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고 있는 점에 이 소설의 특이함이 있다.

세일럼에 마녀사냥이 한창일 무렵, 마을 외진 곳에서 가난하게 사는 매튜 몰의 오두막 집 터를 오랫동안 탐내왔던 지방 유지 핀천 대령은, 몰을 마귀로 몰아 그를 처형하는 데 앞장선다. 몰은 처형당하면서 핀천 대령을 향해 하나님의 징벌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저주한다. 핀천 대령은 몰의 집터에 일곱 박공의 집을 짓고 집의 완공을 축하하는 모임을 연 날 저녁, 하객들을 기다리다가 뇌출혈로 급사한다. 그후로 핀천가의 후손들은 점점 쇠락해 급기야 5대째에 이르러서는 구멍가게를 내야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몰락한다. 소설의 이런 줄거리만으로도 호손이 조상의 원죄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천가의 몰락은 신앙을 명분으로 사사로운 탐욕을 채운 죄업의 결과다. 죄업이라고 했지만 징벌이 억울하게 죽은 몰의 후손들에 의해서 직접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원죄를 초래한 탐욕과 오만이 대대로 세습되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결과다. 물론 몰의 후손들은 복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고 기회가 주어지면 은밀하게 복수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핀천의 후손들 자신이다. 마녀사냥은 따라서 언제라도 되풀이될 수 있다. 일곱 박공의 집이 마녀사냥의 원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뉴잉글랜드 사회의 상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춤추는 녹색 놀이터

집의 내부는 안내를 받아서만 구경할 수 있다. 집안은 집 주인이 동방 무역을 하면서 수집한 귀한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인은 관광객의 관심을 미로처럼 복잡한 집의 구조로 돌리는 데 더 열중이다. 그는 방과 방 사이를 잇는 비밀의 계단을 보여주면서 호손이 소설에서 이를 활용하지 않았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는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호손의 문학세계를 가로지르는 어둠의 미로는 고딕적 상상력의 발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내인의 설명은 일곱 박공의 집 내부에 이어 원래의 장소에서 바로 옆자리에 옮겨다 놓은 호손의 생가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났다. 일곱 박공의 집과는 대조적으로 진홍색으로 채색된 호손의 생가는 무성하게 늘어진 나뭇가지에 감싸여 있었다.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자연은 인간이 만드는 어둠의 역사와 상관없이 늘 스스로 충만한 것인가. 정원에 핀 색색의 장미도, 푸르른 잔디도, 느릅나무 잎새도 7월의 햇살 아래 참으로 눈부셨다. 150년 전, 근엄한 청교도의 후손인 소설가의 눈에도 자연의 향연은 마찬가지로 찬란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퇴락해가는 집에 딸린 이 정원을 “반짝이는 빛이 춤추는 녹색의 놀이터”로 찬탄하는 화려한 수사가 이 어두운 소설의 언어 속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끝)

출처;신동아2006.05.01 통권 560 호 (p526 ~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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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문화적 특색 (1) : 퓨리터니즘(Puritanism)

 

* "청교도주의(Puritanism)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는 있을 수 없다"(Perry Miller) -> 미국 사회의 모든 면을 퓨리터니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직도 미국 사회의 이념적 가치나 기반이 무엇인가라는 논쟁이 있을 수 있음. 그러나 청교도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국인의 사상과 전통에 엄청난 유산을 남겨 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음. 오늘날 미국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념 혹은 가치나 이상은 분명 퓨리터니즘으로부터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음.

* 우리가 보통 최초의 퓨리턴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신대륙에 건너와'메이플라워호 서약'(Mayflower Compact)을 맺으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명 필그림(Pilgrims)으로 불리는 사람들임.

-> 그런데 미국적 특징을 일컫는 데 사용되는 이른바 퓨리터니즘, 즉 캘빈주의적 전통을 가진 개신교도들은 이들이 아니라 1630년 레이디 아벨라(the Lady Arbella) 호를 타고 지금의 뉴잉글랜드, 특히 보스턴 주변에 정착해서 신정 정치를 구현한 사람들로, 최초에 미국 땅을 밟은 신교도들과는 다소 상이한 성격을 가짐.

-> 물론 필그림들도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이지만, 후일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이른바 청교도들과는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음. 필그림들은 영국 교회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가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임. 반면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퓨리턴들은 다소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캘빈주의자들임. 이들은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이 유럽 대륙에 비해 미진했기 때문에 영국 성공회를 좀더 정화(purify)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퓨리턴(Puritans)이라고 불려짐. 사실 영국 성공회(Anglicanism)는 교리와 형식 면에서 로마 가톨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 단지 종교적 수장이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었다는 것이고, 또 경제적 차원에서 로마로 흘러들어 가던 십일조를 영국 국가의 재산으로 귀속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음 -> 따라서 퓨리턴들은 자연스럽게 영국 성공회에 대한 반감을 가졌고, 이러한 배경에서 신대륙을 종교적 피난처로 삼아 신정 정치를 구현할 '언덕 위의 도성'(A City upon a Hill)을 건설하려고 했음.

-> 퓨리턴들은 영국 사회의 엄격한 계서제를 그대로 식민지에 이식하려 했던 사람들로 대부분이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음. 이들은 자유와 평등, 기회의 땅을 상징한다는 신대륙 식민지 사회에서 엄격한 계서제에 입각해 지도자 계층으로 성장했고, 도시나 농촌 지역에서 따라간 존재들은 신대륙 식민지 사회에서도 피지배자층으로 편입됨 -> 따라서 식민지 건설 초기의 사회는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민주주의적 질서가 존재할 수 없었음. 구대륙의 봉건적 질서와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신대륙에 건너온 이들이 이렇게 비민주적인 식민지 사회를 건설하게 된 이면에는 그들이 목숨처럼 여겼던 이른바 캘빈주의의 비민주적인 신정 정치에 기인함.

* 신정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퓨리턴들은 원죄 의식, 예정설, 선민의식, 소명의식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캘빈주의를 신봉함. 이들은 이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엄격한 신정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구대륙의 봉건적 질서 속의 군주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함. 즉 퓨리턴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신이 곧 왕의 역할을 했던 것임. 식민지 공동체 사회가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임.

-> 이러한 엄격한 위계질서에 바탕한 퓨리턴 사회는 캘빈주의의 핵심인 예정설에 이르면 더욱 비민주적 질서를 정당화하기에 이름. 즉 예정설은 신이 선택한 극소수의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사상으로, 이것은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를 정당화하게 됨. 인간은 원죄 때문에 신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며 죄인 중에서 신에게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예정설은 선택된 소수의 정치적 지배를 신분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는 것으로 귀결됨 -> 이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이란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자유와 평등의 나라, 기회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설득력이 약함.

-> 예정설에 기반한 선택된 소수라는 선민의식은 구세계를 구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이 마련해 준 신대륙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소명의식으로 귀결됨 -> 이러한 소명의식은 이른바 '대각성'(Great Awakening) 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지 전역으로 확산되어 신대륙의 이스라엘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함. 즉 신대륙에 이주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에 골라 태운 선택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소명을 가진 유일한 존재들이라는 믿음을 갖고 '언덕 위의 도성'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 -> 미국 정치인들이 늘상 연설 말미에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로 끝맺고, 미국 지폐에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것이 이상할 리 없는 것이다.

* 위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퓨리턴들은 엄격한 관습 아래 모범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익을 우선시하는 일종의 사회봉사정신의 강화에도 기여했으나, 극단적인 그들의 엄격성은 지나친 강박관념으로도 발전해 '세일럼 타운의 마녀사냥'과 같은 일련의 사건도 유발시킴. 즉 퓨리턴들이 식민지에 정착한 지 대략 3대가 지나자,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점점 세속화의 경향이 대두되면서 신의 뜻에 따라 모범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식민 정착 초기의 신념이 사라져가는 것에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마녀사냥은 바로 이러한 퓨리턴들의 위기의식의 발로였던 셈. 공교롭게도 마녀사냥을 통해 처형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거나 퓨리턴이 아닌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었음. 이런 점에서 퓨리턴들의 배타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음 -> 종교적 자유를 찾아 머나먼 신대륙에 정착한 퓨리턴들이 마녀사냥과 같은 조치를 통해 다른 교파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 이와 같은 퓨리턴들의 종교적 배타성은 결국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와 같은 반발세력을 양산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함께 식민지 사회를 팽창시키는 데 일조함.

* 한편, 퓨리턴의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적 직업윤리와 연관시키기도 함. 즉 원죄로 얼룩진 인간의 예정된 운명은 오로지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신이 부여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 임무란 바로 현세에서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것 -> 이렇게 책무를 다해 현세에서 이룬 성공과 보상이 다름 아닌 구원의 징표라고 퓨리턴들은 생각함 -> 따라서 가톨릭 세계에서 금기시되었던 대금업과 같은 업종들은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었고, 현세에서의 근검과 절약, 소명을 다하는 노동 윤리는 퓨리턴들에게 세속적인 성공으로 가는 기본적 바탕이었음. 요컨대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의 직업 윤리는 캘빈주의적 전통으로부터 발전된 것으로서,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베버의 논리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님.

* 미국 자본주의 발전에도 한 몫을 담당한 캘빈주의적 선민의식과 그것에 바탕한 소명의식은 19세기 이후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함 ->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구원자로서의 소명은 미국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었던 것임. 우리에게는 프런티어(frontier) 혹은 모험과 개척정신으로 알려진 미국의 서부 팽창과정은 미국인들의 선민의식에 바탕한 소명의식의 결과물인 것. 즉 혹독한 시련 속에서 식민지에 정착해 개척 경험을 쌓았던 미국인들은 그것이 전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고, 따라서 독립 전쟁 이후 전개된 서부 팽창 역시 이와 같은 종교적 선민의식 혹은 종교적 사명을 띤 행위로 간주됨 -> 동부 연안의 13개 주로부터 미시시피 강으로, 그리고 대평원을 지나 로키 산맥에 이르고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해간 프런티어는 퓨리턴들의 용감성과 모험정신, 진취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러한 팽창의 기본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캘빈주의로부터 연원한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이었던 것임.

-> 물론 프런티어는 경제적 팽창으로서의 의미도 지님. 당시 미국인들에게 서부는 자유, 광활함, 거친 야성을 간직한 공간으로 마치 야만과도 같은 상태였고, 그러한 야만과 미개척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신에게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은 퓨리턴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신성한 소명의식이라는 미국인들의 팽창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야만의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일종의 자연 파괴 과정이었음.

-> 이와 같은 미국인들의 전통적 신념은 19세기 후반 이후 진행된 미국의 세계적 팽창과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마련해줌. 그러한 팽창과 정당화를 통해 미국인들은 앵글로 색슨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자긍심, 즉 백인 퓨리턴의 우월의식을 정당화했고, 이러한 관념에 기반해 이른바 와스프(WASP)들이 미국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 즉 이들은 캘빈주의적 전통에 침윤된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음.

-> 아울러 캘빈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은 미국에게 세계 구원자로서의 모습과 모범을 전파해야할 우월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는 데 대단한 영향을 끼쳤음. 최근 죄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데에는 바로 이와 같은 관념, 즉 퓨리터니즘이 존재하고 있음. 물론 퓨리터니즘만으로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퓨리터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미국의 전지구적 팽창도 설명하기 어려움.






wn1 - 위의 영상은 세일럼의 마녀사냥 내용을 영화로 만들었는데요..제목이 '크루서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마녀사냥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녀 사냥이 한국의 역사 내에서도 존재 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이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많았다고 하는군요..
현재는 당연히 없어야 겠지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는 '만들어진 사이코패스'라 불리울 정도로 이러한 영화내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게 되는데요..
내려오는 말 중에 '여러사람이 한 사람 바보만들기는 쉽다'는 말이 있지요..
이 마녀사냥이란 것이 그 말이 정확함을 여실이 보여줍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힘들어 지겠지요... 
영화 익스페리먼트(스탠포드 감옥실험을 다룬 영화) 나 4월 언젠가(르완다의 인종학살을 다룬 영화), 용서받지 못한자(한국 군인들의 상실을 다루는 영화) 그리고 위의 동영상 영화(마녀사냥을 다룬 영화)
이것들이 한국내에서도 일어났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칫 감정의 대립이 있으면 언제 또 발생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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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마녀사냥


중세유럽이라고 하면 '카톨릭', '십자군 원정', '흑사병(페스트)', '마녀사냥' 등이 떠오를 겁니다. 저 4가지는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각익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마녀사냥은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테마입니다. 왜냐면 마녀사냥은 13세기초에 시작해 무려 18세기말까지 이어졌으며 그 최전성기는 중세시대가 아닌 16~17세기였습니다. 게다가 마녀사냥은 구교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교지역에서도 폭넓게 행해졌고 심지어는 18세기 미국에서도 버젓이 이루어졌던 행위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성공회의 존 웨슬리 신부 같은 사람조차 마녀사냥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습니다.(이 분은 무려 "마녀를 묵인하는 건 성경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시던 분.)


그럼 9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을 앗아간 광기가 60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녀사냥은 의학의 발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러서 유럽 전역의 국가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 시기에 4회에 걸쳐서 로마의 라티라노 대성당에서 라티라노 공의회(Lateran Council)가 열립니다.(5회는 16세기에 열렸으니 논외로) 이 라티라노 공의회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1회(1123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주재로 열린 서방 최초의 공의회. 성직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보름스협약을 인가하여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2회(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소집. 대립교황(對立敎皇) 아나클레투스 2세의 잔당(殘黨)을 처리하고 브레시아의 아르노르드, 브류이의 피에르 등의 이단설(異端說)을 처벌했으며, 교회규율에 관한 30항의 카논(canon)을 의정했다. 이 회의에는 서유럽 전국가들이 참석, 프레나리아(완전한)공의회라 불렀다.

3회(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소집. 추기경 전체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만 교황에 선출된다는 교황 선거 절차를 확정하였다. 또 이단들을 배제, 교회쇄신을 추진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4회(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소집하였다. 알비파(派), 플로리스의 요아킴, 아말리크 드 벤 등의 여러 이단을 처벌하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백성사와 배령성체(拜領聖體)를 해야 한다고 규정함과 동시에,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또 교회의 승인 없이는 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1215년에 열린 제 4회 라티라노 공의회입니다. 4회 라티라노 공의회는 십자군원정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해서 다른 부분들이 소홀하게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회의 승인 없이 치료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것이 이후 벌어지는 마녀사냥의 불씨를 당기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민간의술이 존재했습니다. 주술적인 개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민간의술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인체에 대한 지식(주로 뼈 등), 그리고 출산에 대한 지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중의학이나 한의학과 상당히 비슷한 약초학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약초 지식을 지닌 사람을 빗커(Wicc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고대영어로 '현명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녀를 지칭하는 위치(Witch)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면서 서양의학이 크게 발전을 이루면서 기존의 약초학과 대립하게 됩니다. 중세시대만 해도 학문의 중심이 교회와 수도원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는 대부분이 성직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직자들에 의해서 치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곧 교회의 큰 수입원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약초학을 이용했고 아이를 낳을 때는 약초학에 정통한 산파를 불러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에 교황청은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회의 의료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회의 승인 없이 행해지는 치료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곧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이단행위가 됩니다. 바로 마녀의 탄생이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들이 생계를 위해서 약초학을 배워서 치료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약초학의 지식을 지닌 치료사들은 대부분이 40세 이상의 노파였습니다.(중세시대에는 평균수명이 낮고 노화가 빨랐기 때문에 40대 후반만 되어도 거의 노파였죠.) 그리고 약초학에 정통한 노파들은 매일 중노동을 하는 농가의 여인들에 비해서 수명도 길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등 구부러지고 이빨은 다 빠진 마녀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단심문관을 제도화하고, 1318 년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이단심문관에게 재판 없이 언제라도 죄를 판결해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단심문관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로 부각됩니다.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마녀사냥은 그 표적이 주로 약초학 지식을 지닌 여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희생자 대부분이 노파나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사는 젊은 과부 등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거의 100년 넘게 계속된 마녀사냥의 결과 교회는 유럽의 전통 약초학의 씨를 말리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유일한 의료시설이 됩니다.

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 마녀사냥은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얻던 집단에게는 좀 달랐습니다. 100년 넘게 마녀사냥이 지속되면서 마녀사냥은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자리잡습니다. 마녀 판정을 위한 각종 서적 산업, 각종 고문도구 산업, 화형식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거나 화형식을 집행하는 대리 업자 산업 등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초 목표로 삼았던 대상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이 사업들은 유지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12세기에 확립된 교회법 중에는 이단 행위자에 대한 재산몰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 받은 사람은 당연히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심지어는 죽은지 40년 이내에 살아 있던 시절에 행한 이단 행위가 발각될 경우 그 자손들에게 상속된 유산을 전부 몰수하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산은 당연히 교회에 귀속되는 것이었지만 그 재산을 몰수하는 당사자는 교회가 아닌 이단심문관이었습니다. 이런 끝내주는 사업모델을 구상해냈는데 안타깝게도 유럽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런 수익모델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뭍혀버립니다.


14세기가 되자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시아를 통해 흑사병이 전래된 것입니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흑사병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350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습니다. 중세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녀의 소행이라고 여겨 힘 없는 여성을 잡아 산채로 화형시키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마녀사냥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인데요.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마녀사냥은 한 동안 시들해집니다. 물론 흑사병이 갑자기 퍼진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일으켜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지목해 화형하는 사례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16~17세기의 마녀사냥에는 비교도 안 되며 13세기에 성행했던 마녀사냥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전염병의 전파 속도가 너무 빨랐고, 교회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오히려 주춤하게 됩니다.

흑사병은 농민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성직자, 왕족 등 닥치는대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유럽을 유지하던 인프라가 거의 다 소멸되었다는 이야기이며, 당연히 마녀사냥이라는 비즈니스를 통해 이익을 취하던 집단도 대부분 소멸했음을 의미합니다.
흑사병의 공포가 지나가고 15세기가 되면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은 전세계와 교역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유럽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교역은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종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슬람을 비롯한 타 종교의 확산, 기독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리주의 운동 등에 두려움을 느낀 교회에서는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가장 바람직한 것에 관하여'라는 마녀박멸교서 등을 발표하며 이단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는 등으로 맞섭니다. 이런 시기에 한 책이 출판됩니다.



도미니크회의 이단심문관이었던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야곱 슈프렝겐)'가 쓴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1487년에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두 이단심문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마녀에 대한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는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은 물론이고 자연재해와 병충해까지 마녀의 소행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유럽에는 다시금 마녀의 공포가 형성되었고 두 이단심문관은 직접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녀사냥을 합니다. 이 책의 출판은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여성에서 남성으로까지, 힘없는 자에게 권력과 재산을 지닌 귀족이나 관리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마녀의 망치>는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불어닥친 마녀사냥의 열풍은 상당한 희생자를 내는데, 이단으로 판정된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규정은 이때도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산 몰수의 집행자는 당연히 이단심문관이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마녀사냥은 또 다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발전합니다.



15세기 말부터 다시금 마녀사냥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수많은 고문도구와 화형의식의 대행 등 많은 비즈니스들이 성장합니다. 비즈니스가 거대해지면서 이 산업의 종사자들은 수익성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서 보다 수익성이 높은 아이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녀사냥은 힘없는 사람을 마녀를 몰아서 화형시키는 종교적 광기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인 뒤 그 재산을 몰수해 공모자들끼리 분배하는 야쿠자 비즈니스로 변질됩니다. 실제로 16~17세기에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자산가의 미망인, 지방 지주, 지방 관리, 상인 등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자산가의 미망인이 가장 많았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마녀사냥이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는 비즈니스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630년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마녀사냥으로 이단판정을 받은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 조치는 1631년까지 단 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1629년까지 매년 평균 100명이 마녀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던 마녀사냥의 메카 독일의 밤베르크(Bamberg)는 1631년에는 단 한 명도 마녀재판으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6~17세기에 와서는 마녀사냥은 종교적 광기가 아닌 살인을 통해 재산을 빼앗는 야쿠자비즈니스였던 겁니다.


18세기말까지 이어졌던 마녀사냥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나폴레옹입니다. 171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헤름 1세가 마녀재판을 금지했음에도 여전히 성행했던 마녀사냥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자유를 알게 된 인민들에 의해 교회의 힘이 약해지고 이로 인해서 마녀사냥은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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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마녀사냥’으로 매년 200명 희생 충격
                                        2010/07/27기사



중세 유럽에서 벌어졌을 법한 잔인하고 반인권적인 마녀사냥이 오늘날 인도의 일부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어 전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일간 타임스는 “수많은 인도여성이 마녀로 몰려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잔인한 폭력을 당하며, 매년 여성 200명이 마녀사냥으로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최근 보도했다.

수치는 인도에서 활동하는 법률구호단체(RLEK)가 조사해 발표한 것이다. RLEK는 “북부 자르칸드 주에 있는 가난한 부족집단 마을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안드라프라데시, 하리아나, 오리사 주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마녀로 몰리는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과부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 등이 대부분이다. 최근 이뤄진 마녀사냥이 여성들이 가진 땅이나 돈을 갈취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된 것으로 드러나 더욱 심각한 인권 유린 행태로 파악된다.

이 단체의 어부다시 카우살 회장은 “마녀로 몰린 여성들은 사람들 앞에서 매를 맞거나 머리카락을 잘린다. 억지로 대변이나 소변을 먹기도 하며 옷을 홀딱 벗긴 채 강제로 마을 주변을 걷기도 한다.”며 마녀사냥의 잔인한 행태를 고발했다.

마녀사냥으로 사망에 이르는 여성은 한해 200명 정도이며 지난 15년을 추산한 결과 2500명이 마녀로 몰려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 혹독한 마녀사냥에 살아남았어도 피해 여성들이 수치심과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건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자르칸드, 비하르, 차티스가르 주 등에서는 마녀사냥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됐으나 시행이 미비한 실정이며 야만행위를 한 사람을 처벌하는 최고형이 겨우 징역 3개월 형에 불과해 인도 당국이 사실상 마녀사냥을 허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단체는 비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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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김진홍] 마녀사냥과 고문
 2010/06/24
“여성은 천성이 좋지 않다.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쉽게 의심하고, 믿음도 쉽게 부인한다. 이것바로 마술을 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다.”

1487년 독일에서 발간된 ‘마녀철퇴’의 한 부분이다. 편견으로 가득 찬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유럽에서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마녀를 발본색원하라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명령도 떨어졌다. 200여년간 수백만명이 약식 재판을 거쳐 화형 또는 참수형, 교수형을 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과부를 비롯해 혼자 사는 여성들이 주 타깃이 됐다.

세상에 마녀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중세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확신했다. 마녀들에게는 악마 집회에 참석했다거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거나 폭풍을 불러왔다는 등의 황당무계한 죄목이 적용됐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이 가혹한 고문이다. 고문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불로 발바닥 지지기, 손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았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치기, 관절 뽑기, 채찍으로 때리기 등을 견뎌낼 여성은 없었다. 물을 이용해 마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방법도 있었다.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에 던져 떠오르면 악마와 접촉한 것이고, 가라앉으면 죄가 없는 것이다. 마녀라고 의심받는 순간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문이 군사정권 시절의 유산쯤으로 여겨졌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 경찰관 4명이 고문한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다른 경찰서에서 고문당했다는 진정이 추가로 접수돼 국가인권위원회가 확인 중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 “어떤 이유로든 수사과정에서 고문은 용납할 수 없다”며 엄벌을 지시했다. 창피한 노릇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우리 정부조사 결과에 의문이 많다는 내용의 서한을 유엔에 보낸 참여연대에 비난이 쏟아지자 좌파성향의 시민단체들이 마녀사냥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마녀사냥이라니, 중세를 떠올리면 끔찍한 욕이다. 참여연대의 행동이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참여연대가 북한 김정일 정권을 두둔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정일 정권은 지금도 고문을 자행하며 정치범들을 마녀사냥하고 있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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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고문방법


처벌의 신발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철로 만들어진 밑창 부분에 스파이크가 돋아있습니다. 죄인이 저 신발을 신고 걷게 되면 스파이크가 살을 파고들어가 뼈를 뚫고 인대까지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단자의 포크
양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포크로 한 쪽은 이단자의 턱을 뚫고 한 쪽은 쇄골을 뚫게 합니다. 이 고문도구가 발명된 이유는 더러운 이단자가 함부로 혀를 놀리지 못하고 오직 고해만을 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머리 붕괴기
이 고문도구를 사용하면 이빨이 잇몸 속으로 뭉개져 들어가면서 턱 주변의 뼈까지 뭉개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눈이 튀어나오고 마지막에는 뇌가 귀에서 뿜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허나 이 고문방법은 현대의 몇몇 국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다의 요람
. 저 줄들은 묶여있는 사람이 떨어질 경우 아래에 있는 삼각뿔 위에 희생자의 항문이 찔리게끔 설정되어있습니다. 희생자를 일단 묶고 천장까지 올렸다가 아래로 떨어뜨립니다.

요람

이 요람은 유다의 요람과는 다르게 날카롭게 선 날 위로 희생자를 앉혀놓고 앞 뒤로 끌어당겨 희생자의 성기를 손상시키는 고문방법이었습니다.


철의 여인
고문방법은 설명을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이 고문이 끔찍했던 이유는 쇠꼬챙이가 가슴, 눈, 팔, 다리 어깨를 전부 다 찔러도 죽을 만큼 깊이 꿰뚫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철의 여인에 희생자가 갖히게 되면, 관통상으로 죽는 것이 이틀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출혈로 죽게 된다고 합니다.

꿰뚫기
이 방법은 알제리, 튀니지 등지에서 국가 반역자에 대한 처형방법이었는데, 드라큐라의 모델이었던 루마니아의 블라드 테페슈 공작이 이 방법으로 자신의 영지 내에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유명해진 방법이라고 합니다.


희생자가 거꾸로 매달리면 몸 안의 피가 머리 쪽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때 고문집행자가 희생자의 몸을 톱으로 반으로 가르기 시작하는데 머리 속에 있는 피가 너무 몰리게 되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고 고통을 못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희생자는 자신의 몸이 반으로 잘리는 것을 천천히 보다가 죽게 된다고 합니다.

 바퀴
이 방법은 중세 독일에서 가장 흔했던 처형방법이었습니다. 우선 희생자를 대자로 벌려 땅에 묶습니다. 이 때 손목 관절, 무릎, 골반, 어깨 아래에 나무를 받쳐놓습니다. 그러면 고문집행자는 아래 그림의 바퀴를 들고 있는 힘껏 내리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겨우 악몽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내려쳐서 뼈가 으깨지고 수족이 흐물 거리기 시작하면 내려쳤던 바퀴에 흐물거리는 희생자의 손발을 엮어서 꼬아버립니다. 이미 흐물거리는 상태이므로 밧줄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까지 평민들이 보도록 올려놓습니다.

의자에 묶어 물에 던지기 
매우 유명한 마녀 판별법입니다. 의자에 묶여있는 여성이 마녀가 아니라면 그대로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고, 마녀라면 물에 뜨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바로 화형장으로 직행시키는 사형법입니다.
장화
희생자의 다리를 두 개의 나무 판자 사이에 끼우고 밧줄로 묶습니다. 밧줄 사이사이에 해머로 때릴 쐐기를 끼우고 쐐기를 망치로 두드립니다. 한번씩 쐐기를 때릴 때마다 정강이 뼈가 박살납니다. 이 고문은 희생자의 정강이가 완전히 부서질 때까지 12번 내외 정도 쐐기를 때릴 수 있다고 합니다. 부츠가 벗겨지면 뼈 조각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피부는 흐믈흐믈한 살덩어리가 된다고 합니다.

고양이 발톱
이 방법은 단순히 희생자의 등에서 피부를 아주 천천히 벗겨내기 위해 고안됐습니다. 너무 많이 벗겨내면 뼈가 전부 드러나게 됩니다. 

잡아뜯기
그림이 조금 짤렸습니다만, 팔다리를 선반 위에 묶어놓고 도르레를 이용해 희생자의 팔다리를 조금씩 잡아 뜯는 고문법입니다.

말로 4등분 만들기.
우리나라의 능지처참과 같은 방법입니다. 희생자를 바닥에 놓고 각각의 팔다리를 줄로 엮은다음 각각의 줄을 네 마리의 말에 묶습니다. 말이 힘껏 달리도록 엉덩이를 때리면 희생자의 팔다리는 엄청난 힘으로 찢겨나갑니다. 주로 귀족을 살해한 사람을 이 방법으로 처형시켰다고 합니다


저 도구를 남성의 경우는 항문, 여성에게는 성기에 집어넣습니다. 손잡이 부분을 돌리면 마개가 점점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작은 꼬챙이가 하나 들어있는데, 사용자의 임으로 그 꼬챙이를 항문 안이나 성기 안에서 길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과 함께 장기 파열되어 사망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고문도구는 일반시중에서 판대 됐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 정화시키기.
많은 카톨릭 국가에서 성직자는 이단의 부패한 영혼은 정화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단지 그 방법이, 펄펄 끓어오르는 물과 타오르는 석탄 둘 중 하나를 삼킴으로써 내면의 악을 씻거나 태워야지만 가능하다고 믿었답니다.



PS. 중세 역사소설 같은거 보면 이단자로 몰아서 여러 고문을 하며 죽이는 모습을 글속에서 많이 보았는데

이런식으로 고문했다고 떠올리니 엄청 잔인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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