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거소가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18


위엄 있게 죽음을 맞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종종 그 소수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침묵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


우리는 모두 그 문 안에 갇힌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알몸으로 서 있다. 발이 물에 잠긴다. 샤워실이다.  29


아우슈비츠 근처 모노비츠에 와 있다.포로들은 일종의 고무인 부나(부나는 원래 부타젠과 나트륨의 첫 글자를 딴 것. 모노비츠에 있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는 이 합성고무를 만들기 위한 공장이 있었는데 이를 부나 공장이라 불렀다)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수용소 이름도 부나다.  31


종이 울리자 여전히 깜깜한 수용소가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5분 동안의 축복이다. ..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뭔지 알 수 없는 넝마 조각들을 우리에게 던졌고 밑창이 나무로 된 신발 한 켤레 속에 우리의 두 손을 쑤셔넣었다. 상황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바깥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눈 위에 나와 있다. 맨발에 알몸으로, 손에는 옷과 신발을 든 채 우리는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다른 막사까지 달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 막사에서 옷을 입을 수 있다.  33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


해프틀링(포로). 나는 내가 해프틀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174517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왼쪽 팔뚝에 문신을 지니고 살게 될 터였다...

"숫자를 보여줘야만" 빵과 죽을 받을 수 있었다.  35


수용소의 고참들은 수인번호로 모든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시기, 타고 온 기차, 국적이 수인번호에 나타났다. 3만에서 8만 대의 번호를 지닌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존경을 표하곤 했다. 이제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이들은 바로 폴란드 게토의(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 14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 존재했다. 독일군은 1940년부터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 게토를 재건했는데, 그곳은 곧 기아와 질병 수용소로의 강제연행 등으로 비극적인 죽음의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1943년 봄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결국 그곳에 있던 거의 모든 유대인이 학살됨으로써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이었다.  36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38


막사마다 200~250명씩 수용되는 일반 해프틀링이 사는 곳이다...

공동 침실의 바닥 면적이 얼마나 좁냐 하면, 같은 B블록에 사는 사람들은 반 정도가 침대에 누워 있지 않는다면 전체가 동시에 그 공간에 있기도 힘들다. .

우리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모두 줄무늬 옷을 입고 있고 모두 해프틀링이지만, 범죄자들은 상의에 박힌 숫자 옆에 초록색 삼각형을 달고 다닌다. 정치범들은 빨간색이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빨간색과 노란색의 유대인 별을 단다.  44


우리는 음식물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식사를 마친 뒤 반합의 바닥을 열심히 긁어내고 빵을 먹을 때는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턱 밑에 반합을 댄다. 이제 우리는 죽통의 윗부분에서 푼 죽과 밑에서 푼 죽이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리는 죽통의 크기에 따라 줄을 설 때 어느 죽통 앞에 서는 게 제일 유리한지 계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음을 배웠다. 철사는 신발을 묶는 데, 천 조각은 발을 감싸는 데 필요하고 종이는 추위를 막기 위해(불법으로) 상의에 대는 데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도둑맞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만 방심하면 반드시 도둑맞는다는 것을 배운다. 도둑맞지 않기 위해 반합부터 신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강의에 집어넣어 보따리를 만들어 베개로 베고 자는 기술을 익힌다.  45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운명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격에 따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고 여기서는 살 수 없으며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금방 확신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를 기다리는 삶이 힘겹기는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멀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믿음과 힘이 있다면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  50


나는 수레를 밀었고, 삽질을 했고, 비에 젖었고, 바람에 몸을 떨었다. 내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팔다리는 장작개비 같았으며 얼굴은 아침이면 부었다가 저녁이면 홀쭉해졌다. ..

사나흘 만나지 못하면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매주 일요일 저녁 수용소 한쪽 귀퉁이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 그만두어야 했다 숫자를 세는 게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는 매번 줄어들었고 매번 몰골이 더 사납고 더 비참해졌다. 모임에 나가려고 몇 발짝 떼어놓는 것도 힘이 들었다. 게다가 다시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51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닥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도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카베는 크랑켄바우, 즉 위무실의 약자다. ..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사람은 카베에서 치료를 받고, 병이 점점 심해지는 사람은 가스실로 보내진다.

이 모든 게 우리가 다행히 '경제적으로 유용한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65


카베의 삶은 림보(<신곡>의 지옥을 구성하는 아홉 개의 원 중 가장 형벌이 가벼운 제1원을 말한다.)의 삶이다. 굶주림과 질병 본래의 아픔 말고는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구타를 당하지도 않는다.  72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103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더 단순하다.

오늘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봄에 도달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이런 목표 뒤에 다른 목표는 아무것도 없다.  106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110-111


민간 관리국은 부나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벌주지만, SS는 오히려 허용하고 조장한다. SS가 엄금하는 수용소 안에서의 도둑질이 민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교환 행위로 간주된다. 해프틀링들 간의 도둑질은 일반적으로 처벌을 받으며, 도둑과 피해자가 동일한 강도의 벌을 받는다. 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이라는 단어가 수용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다.  130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핌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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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는 <안네의 일기>, 빅토르 프랑클의 <밤과 안개>, 엘리 비젤의 3부작 <밤> <새벽> <낮>과 함께 나찌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진상을 전하는 증언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힌다.  22


1987년 4월 11일에 또리노의 레 움베르또(Re Umberto)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했다.  23


67세의 쁘리모 레비는 아파트 4층 난간을 넘어 아래층의 홀로 몸을 던졌다.  27


생전의 쁘리모 레비와 면식이 있던 타께야마 씨는 "내가 아는 레비는 명랑하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지닌 쾌활한 인물로, 눈에는 지적 호기심이 넘치고, 언제나 농담을 즐겨 했다.(...) 그런 그가 돌연 자살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회고한다.(<지금이 아니면 언제>의 역자후기)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바로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한나 아렌트의 [우리 망명자들]이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파리아(pariah, 차별받는자를 뜻한다)로서의 유대인>이라는 평론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 중에는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우리가 선언한 쾌활함이 죽음을 곧바로 받아들일 듯한 위험스러움과 표리일체임을 그들은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생명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죽음이 최대의 공포라는 확신 아래서 자랐는데, 생명보다 지고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고 희생자가 되었다.'

한나 아렌트가 이 글을 쓴 것은 1943년이었다.  28-29


아렌트는 여기에서 망명 유대인드의 '동화' 지향, '성공' 지향을 비판하고 하이네, 카프카에서 채플린에 이르는 "'의식적 파리아'의 입장을 선호한 유대인 소수파의 전통"을 상기할 것을 주장했다. '파리아'라는 아이덴티티에 입각하여 차별과 억압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모든 '파리아'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과 통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의 자살 충동을 분석하고, "(그들은) 싸우는 대신에 또는 어떻게 하면 저항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에, 친구나 친척의 죽음을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고 진술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한다.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표면상의 쾌활함과는 정반대로 그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일종의 자기 본위로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29-30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이 씨칠리아(Sicilia)섬에 상륙하자 이딸리아의 정세는 크게 역전되었다. 7월 25일에 파시스트정권은 내부적으로 붕괴하여 무쏠리니는 실각하고 바돌리오정권이 새로 들어섰다. 바돌리오정권은 독일과 관계를 끊고 연합국과 단독강화의 길을 찾아, 9월 3일 드디어 연합군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9월 8일에 그것이 공표되자 독일군은 곧바로 북이딸리아를 점령해 감금되었던 무쏠리니를 구출하고, 그를 옹립하여 가르다(Garda)호반(湖畔 호수호 두둑반)의 쌀로(Salo)를 보넉지로, 흔히 '쌀로공화국'이라 불리는 '이딸리아사회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때부터 반파시즘 운동은 독일 점령군과 그들을 돕는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시기로 접어든다.  35


1943년 12월 13일 쁘리모 레비는 스파이에게 속아 산중의 외딴집에 갇힘으로써 어이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부대에 참가한 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38


즉결로 총살된 많은 빨치산과는 다르게, 유대인인 그는 다음 해인 1944년 2월 이딸리아의 포쏠리 디 까르삐(Fossoli di Carpi) 중계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었다.  39


쁘리모 레비는 1919년 7월 3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사(技師 재주기 스승사)였다. 지적인 중산계급 가정에서 자란 레비는 지역의 명문 마씨모 다젤리오(Massimo D'Azeglio) 고등학교를 나온 후 역시 같은 지역의 또리노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다. 무쏠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쥔 때가 1922년임을 생각하면, 그는 소년기를 전부 파시스트체제 아래서 보낸 것이다.

''아리아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나 혹은 우리 세대의 전반에는,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며 또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아직 확실하게 의식화되지 않았다.'<주기율>  50-51


레비는 대학의 화학과를 함께 다니던 친구 싼드로 델마스뜨로(Sandro Delmastro)에게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물질에 대항해 이긴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그때 피나는 노력으로 구명하던 멘젤레예프의 주기율이야말로 한 편의 시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암기해온 어떤 시보다도 장중하고 소중했다. (...)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에게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모든 독단, 증명 없는 단언, 유무를 대답할 수 없는 명령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가?' ([철], <주기율>)

쁘리모 레비에게는 화학과 물리학이 파시즘에 대한 대항물이었다. 그것은 '명료하며 하나하나가 증명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60


열여섯 살 때 화학에 심취한 그가 친구와 함께 몰래 전기분해 실험을 하는 이야기가 <주기율>의 [수소]라는 단편에 그려져 있다. 어린 쁘리모는 "부푸는 꽃봉오리나 화강암 안에서 빛나는 운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손을 보고" 마음속으로 부르짖는다.

"이것도 밝혀내고 말 테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바와는 다른 방법으로 모든 걸 밝혀내고 말 테다. 지름길을 밝혀 낼 테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말 테다, 문을 비집어 열어 보이겠어."

'이해'에 대한 간절한 욕망,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쁘리모 레비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과학정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부식으로부터 자신의 혼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우슈비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逆 거스를 역)유토피아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역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실현한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져갔다.  61


쁘리모 레비의 선조는 1492년 대추방으로 인해 에스빠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며,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1500년경에 삐에몬떼 지방으로 왔다. 그들은 또리노에서 거부당해 삐에몬떼 지방 남부의 농업지대에 정착하며 견직 기술을 도입했지만, "최전성기에도 대단히 수가 적어, 소수파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73


쁘리모 레비는 또리노를 '진정한 고향'이라고 했는데, 실은 그가 태어난 1919년은 그의 선조 유대교도들이 또리노에서 살도록 허락되고부터 불과 7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싯점이었다. '고향'은 오랜 기간 그들을 계속 거부해왔던 것이다.  74


무쏠리니의 파시스트정권도 당초는 유대인 배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이딸리아에는 망명 유대인이 유입되었고, 독일에서 압력이 강하게 들어왔다. 무쏠리니 측에서도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할 방침을 정했고, 1937년 11월에 일본, 독일, 이딸리아는 삼국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1938년 9월에 파시스트 정권은 인종법을 제정하여 일련의 반유대 조치를 선포했다.

이 싯점에 이딸리아에는 전인구의 0.1% 전후에 해당하는 약 5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그 가운데 약 1만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도시에 살았으며, 1만 3700명이 살았던 로마를 필두로 밀라노, 뜨리에스떼에 이어서 쁘리모 레비의 고향인 또리노에는 네번째로 많은 3700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81-82


1939년 6월에 공포된 정부령에 따라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대인은 유대인 고객과 환자만을 상대해야 했다. 또 유대인과 이딸리아인의 결혼을 금지하고, 유대인이 재산 소유, 특히 농지 소유를 제한했다. 1919년 이후에 국적을 취득한 귀화 유대인(쁘리모 레비의 일가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의 국적을 박탈하고, 외국 국적의 유대인과 귀화 유대인에게 1939년 3월까지 재산을 포기하고 이딸리아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1941년 말까지 7천 명의 사람들이 해외로 이주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귀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이딸리아에서 반유대정책은 불완전하게 실시되었을 뿐이다. 법령은 외견상 독일에서 실시되던 것과 동일할 정도로 철저했는데, 이딸리아 정부는 그 법령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다. 실제 이딸리아에서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의 '혼합물(混合婚 섞일혼 합할합 혼인할혼)' 비율이 높았고,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군의 장교나 고급관료, 고위정치가 같은 직책에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이 이딸리아 사회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박해는 심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곤란한 측면까지 있었다.(<절멸>)  82-83


쁘리모 레비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딸리아인이라고 느꼈을 것이며, 그보다 이성에만 복종하는 '인간'의 일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는 '유대인'인 것이 '주근깨'정도의 차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이듬해에 인종법이 공포되자, 기독교도인 학우와 교수는 대부분 쁘리모 레비에게서 멀어져갔다.  84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서부의 고도(古都 옛고 도읍도) 크라쿠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본래 지명은 오시비엥침이지만 나찌 독일이 점령한 후 그와 같은 독일식 지명으로 개칭했다.  93


'아우슈비츠'라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 마을과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한 45개 강제수용소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아우슈비츠'는 수인의 수용, 노역, 절멸과 같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세 단계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복합체였다. ..

1942년 7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 이송되기 시작해, 종전까지 폴란드에서 30만 명을 비롯해서 네덜란드에서 6만 명, 프랑스에서 6만 9천 명, 헝가리에서 43만 8천 명 등 다수의 유대인이 이송 수감되었다. 그중 이딸리아에서 이송된 7500명은 이들 중에서도 '소수파'였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는 110만 명 내지 150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 90%는 유대인이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1백만 벌 이상의 의복, 7톤의 모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구두와 안경이 발견되었다. 그 싯점에 살아남은 수인은 6만 5천여 명, 그 대부분은 철수하는 나찌에 의해서 '죽음의 행진'에 연행되어갔기 때문에 해방된 수인은 약 7천 명에 불과 했다. 쁘리모 레비는 이 행운의 7천 명 중 한 사람이었다.  96-97


유대인 희생자의 총수는 6백만 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97


도시 안의 폐쇄된 좁은 지역에 유대인을 몰아넣는 '게토화'정책. ..

바르샤바에서는 1940년 10월 12일에 게토 설치를 명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게토는 십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벽으로 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접촉은 단절되었다. 바르샤바 전역의 2.4%밖에 안되는 좁은 지역에 시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4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갇혔다.

주거 환경은 콩나물시루 속과 같아서 4인 기준의 방에 보통 10명에서 15명이 생활했다. 게토에 공급되는 식료품은 심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수인들은 기아에 시달렸으며 열악한 위생 상태와 함께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으로 하나둘 죽어갔다. 사체는 매장할 인력이 없어 며칠이나 도로에 방치되었다.  99


나찌 친위대(SS) 경제관리본부 본부장 오스발트 폴은 1942년 4월 30일 정부령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노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역(使役 부릴사 부릴역)이란 최고의 생산 상태를 얻기 위해서 말뜻 그대로 '소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해 9월 14일 법무장관 티라크가 괴벨스와 회담할 때 이 '소모'라는 말에 주석을 달아 "노동을 통한 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반제 회의의 서기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증언에 따르면, 회의에서 '문제 해결의 여러 형태', 즉 여러 살해 방법이 솔직하게 토의되었고, 참가자들에게 "진심 어린 동의" 이상의 것을 얻어냈다. 회의는 한 시간 반 이상 걸리지 않았고, 그후에는 음식이 나와서 그들 모두는 점심 식사를 했다. "기분 좋고 조촐한 사교적 모임"이었다.

'아이히만에게 이 회의가 잊힐 수 없는 데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최종적 해결에 협력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이런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의한 해결'에는 다소 마음속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의문이 지금 풀린 것이다. "지금 이 반제 회의에서 당시 가장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제3국의 법왕들이 발언했던 것이다." 히틀러,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 SS나 당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던 국가관료 엘리뜨들까지도 이 '피비린내 나는' 문제에서 서로 선두에 서려고 경쟁하는 것을 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빌라도가 맛본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1-102


영화 <쇼아>에도 등장하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필립 뮐러(Filip Muller)는 특별작업반으로서 사체 처리작업에 종사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가스실에서의 살육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몇 알의 치클론 B가 가스실 바닥에서 승화하면, 희생자들은 절규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올라오는 독가스를 피해 도망치려고 힘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때려눕히고, 좀더 살겠노라고 아직 독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공기를 찾아서 쓰러진 사람들 위로 올라섰다.

15분 내에 가스실 안의 전원이 사망했다.

약 30분 후에는 문이 다시 열렸다. 사체는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었고, 앉은 채로 죽은 자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죽은 자도 있었다. 밑에는 아이나 노인의 사체가 있었다. 사체에는 녹색 반점이 있었고, 피부는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문 사체나 코피를 흘리는 사체도 있었다. 대소변 배설물로 뒤범벅이 된 사체도 있었고, 임신중이 ㄴ여성 중에서는 출산이 시작된 경우도 있었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특별잡업반이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통로를 만들기 위해 문 근처의 사체를 잡아 끌어낸 후, 사체에 호스로 물을 뿌려, 사체 사이에 남은 독가스를 씻어냈다. 특별작업반은 그런 위에서 비로소 사체를 옮겼다. 

모든 수용소에서 사체의 구멍이란 구멍을 수색해 귀중품을 숨겼는지 확인했고, 죽은 자의 입에서 금니를 뽑았다.  105-106


약 9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살해되었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할이 살해되었다. 

특정한 인간 집단에 대한 이 특이하고 철저한 절멸정책은 오늘날 주로 '홀로코스트'라 불린다. 그 어원은 구약성서에 기술된 "구워서 신전(神殿 귀신신 대궐전)에 바치는 희생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라고 한다. 또한 최근에는 '대파괴, 파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쇼아'가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107


레비의 팔에 새겨진 번호는 174517 이었다.

"수인번호에는 유럽 유대인의 말살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10000부터 80000까지의 수인은 폴란드의 게토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였고, 119000부터 117000은 그리스의 쌀로니까(Salonica) 출신자였던 것이다. 이딸리아 유대인은 174000번대의 번호를 받았다.  117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7


'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唯一無比 오직유 한일 없을무 견줄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 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실례라는 것이다.  138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155


장 아메리(Jean Amery)의 본명은 한스 마이어(Hans Mayer)라고 한다.  157


벨기에에서 추방된 유대인 2만 5437명 가운데 약 2만 3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아메리는 불과 615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후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회복했지만, 브뤼쎌에 계속 거주하며 저술가가 되었다. 본명인 마이어(Mayer)의 철자를 바꿔서 아메리(Amery)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다. 1976년에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 자살에 대해서>를 간행하고 그 2년 뒤인 1978년 10월 16일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

쁘리모 레비에게 아메리의 자살은 틀림없이 대단히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59


아메리는 말한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수용소에 없다. 오히려 어떻게 죽을까 생각한다. 가스실에서 독가스의 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 논쟁하거나,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을 추측하여 서로 대화하거나 하는 등.  161


1944년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쁘리모 레비가 있던 모노비츠 수용소의 수인들은 점호를 받기 위해 광장에 정렬했다. 

투광기의 빛과 나무틀 교수대, 그런 도구들과 잔인한 의식은 그들에게 이미 낯설지 않았다. 쁘리모 레비는 그때까지 열세 차례나 교수형 장면을 목격했다. 예전에는 교수형이 보통 사소한 범죄나 주방에서의 절도, 태업, 탈주 등에 대한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공개 처형의 희생자는 비르케나우의 소각로를 파괴한 반란 집단의 일원이었다. 이 반란은 가스실에서 사체 처리를 강요받았던 유대인 특별작업반 340명이 감행한 것이었다. 머지않아 자신들도 처분될 거라 확신한 그들은 몇 개월 동안 준비해 경기관총 한 정, 권총 몇 정, 수제 폭탄, 톱, 도끼, 쇠지렛대, 호미 등을 가지고 1944년 10월 7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제4소각로에 방화하고, 제2소각로의 설비를 파괴한 후 철조망을 절단하여 도주를 기도했다. 그러나 반란은 나찌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250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결국 실패했다. 그날 밤, 또다시 2백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었다. 친위대 쪽 희새자는 세 명이었다. 이 사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역사에서 유일한 무장 저항이었다.(<절멸>)  175-176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다. .. 우리는 극히 적을 뿐만 아니라 이례적인 소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속임이나 요령 혹은 행운에 의해서 심연의 바닥까지 가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178


츠베땅 토도로프는 쁘리모 레비가 시달리던 수치의 감각을 '기억으로서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등 3단계에 걸쳐 분석한다. ...

저항의 의지조차도 전면적으로 파괴된 굴욕의 기억, 자신은 '카인'이라는 자기 고발. 증인으로 자신이 적격한지를 둘러싼 의혹(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증인'은 죽은 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종족의 일원이라는 생각... 이렇게 몇 겹으로 쌓인 수치의 감각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의 몸을 '심연의 바닥'에 내던진 것일까?  178-179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181-182


싸르트르의 이런 말이 떠올랐다. 알제리 해방전쟁중에 프랑스군이 알제리에서 자행한 고문이나 잔학 행위를 고발한 글의 한 부분인데,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적을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리고 어떤 안전책을 두더라도 모든 국민이, 인류 전체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실제 우리가 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혹은 계속해서 인간의 위치에 있기 위해서 크게 괴로워하는 걸까? 비인간적인 것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

음침하며 허위에 가득 찬 그런 생각들은 모두 '인간은 비인간'이라는 동일한 원리에서 나온다([하나의 승리] <상황들>)  184


바르똘로뮤 라스 까싸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

그들은 누가 단칼에 몸을 정확히 두 동강 낼 수 있는지, 누가 일격에 머리를 잘라낼 수 있는지, 내장을 파열시킬 수 있는지 등의 내기를 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서 젖먹이 아이를 빼앗아 그 아이의 다리를 잡고서 바위에 머리를 내려치기도 했다. (...)

그리고 그들은 겨우 발이 땅에 닿을 정도의 커다란 교수대를 만들고, 다른 방법도 있으련만 자신들이 구세주와 12명의 사도를 받들기 위해서라며 항상 13명씩 교수대에 걸고 그 밑에 장작불을 지폈다. 이렇게 그들은 인디오들을 산 채로 구웠다. (...)

보통 그들은 인디오들의 영주나 귀족을 다음과 같은 수법으로 살해했다. 땅속에 박아둔 4개의 봉 위에 가느다랗고 긴 봉으로 만든 석쇠 같은 것을 얹어놓고, 거기에 그들을 매달아 그 밑에서 약한 불을 지폈다. 그러면 영주들은 그 잔학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절망하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

기독교도들은 마치 미친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사람들이었으며 인류 최대의 적이었다. 비인도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살아남ㅇㄴ 인디오들은 모두 산속으로 숨거나 다른 방법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자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사냥개를 사납게 훈련했다. 사냥개는 인디오를 한 명이라도 발견하면 순간적으로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말할 것도 없이 에스빠냐 정복자를 가리킨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에스빠냐 사람들은 원주민에게 공조(貢租 바칠공 구실조)를 요구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185-186


에스빠냐인은 기독교화라는 미명 아래 아스께까왕국이나 잉까제국을 정복한 후 원주민을 혹사하고 학살했다. ..

라스 까싸스는 1541년 국왕을 알현하고 자신의 견문에 기초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복 중지를 호소했다. 그 보고서를 훗날 가필하여 발간한 것이 바로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다. 

라스 까싸스는 이 <보고서>에서 신대륙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 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그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미증유의 제노싸이드(대학살)였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기독교화되지 않은 원주민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86-187


대서양을 넘어 신대륙으로 '이송'된 아프리카인의 수는 1200만 내지는 2천만 명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도 지금은 확정 불가능하다. 더구나 거기에는 노예사냥 도중에 죽은 사람이나 항해주엥 죽어서 바다에 버려진 사람들의 수는 포함되지 않았다(<신서 아프리카사>)  189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해'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그는 이딸리아인 수인이나 포로 들과 함께 전쟁 말기의 오랜 혼란기 내내 폴란드와 소련의 영토 내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리고 거의 8개월 후에야 비로소 특별열차로 루마니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영토를 거쳐 이딸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환까지의 혼돈과 권태의 시간, 그 부조리하며 축제 갇기도한 나날을 그린 작품이 쁘리모 레비의 두번재 작품 <휴전>이다.  198


<주기율>의 [바나듐]이라는 단편에 ..

레비가 부나에서 실험실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에 출입하던 민간인 주에 뮐러 박사라는 인물이 있었다. ..

뮐러는 착하고 소심하며 정직하면서도 무기력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자신의 무관심이나 무기력을 무의식 속에서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찌의 범죄에 가담하거나 그것의 수혜를 받은 인물이 희생자에게 무거운 말투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의 천박함, 아니 불쾌감 ..게다가 그가 완고한 나찌였다면 이야기는 간단했을 테지만, 그는 당혹스럽게도 '과거의 극복'을 바란다고 말한다.

'일단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준비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개전의 태도를 확실히 보일 때, 즉 원수임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고 밝혔다. 반대의 경우, 계속 원수로 존재하며 고통을 만들어내겠다고 고집할 경우에는 물론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그래야 한다!),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 현실에서는 무장 집단이 존재했고,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정직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한 정지(整地 가지런할정 땅지)작업을 했다. 그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바로 모든 독일인에 그리고 인류 전체에 책임이 있으며, 아우슈비츠 이후 무기력한 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가 뮐러의 만나자는 요청에 답하기 위해서 쓴 편지의 초안이다....

결국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지는 못한다. 뮐러에게서 뜻하지 않게 전화가 걸려 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러자마자 그가 병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단절된 그대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단절은 점차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저편과 이편은 '사랑'이나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서로 통하지 않은 것이다.  200-206


나도 뮐러와 같은 일본인을 자주 만난 적 있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천황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의 식민지 지배에 관해서는 일본이 아니었으면 러시아가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결과는 불행했지만 일본은 뒤처진 조선인을 일본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그 '선의'는 인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편다. 하지만 나의 '뮐러'는 이 타입이 아니다.

나의 '뮐러'도 또한 내게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라며 일견 성실한 듯 보이는 둔감함으로 묻곤 한다. 혹은 "왜 그러헥 화난 겁니까?"라든가 "왜 슬퍼하는 겁니까?"라든가... 그들은 자기 자신도 그 불안과 분노 그리고 슬픔의 원인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을 휴머니스트이며 평화 애호가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면, 한국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둥 친한 친구 중 '재일(조선인)'이 있다는 둥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둥 자신은 '재일일본인'이라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도 좀 있으면 '도대체 언제까지 사회하면 되는 걸까요?'라는 흔한 질문을 슬쩍 던져본다. 그리고 이쪽이 무언가 말하려 하기 전에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서로 '미래지향적'으로 '공생'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공소(空疎 빌공 트일소)한 키워드를 늘어놓는다. 

'뮐러와 같은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재일조선인 중에소 '뮐러'는 있다. 이 '뮐러'들은 한목소리로 '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ressentiment)'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혼화한 어조로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미리 자신들을 '원한'등과 같은 비생산적인 감정을 초월한 이성의 높은 위치에 두고, 어느새 이쪽의 위치에 저급한, 보복 감정을 지닌,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와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어쩐지 수상쩍기만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 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은근한 어조로 과거를 잊어버리라고 강요한다.  206-208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212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의 권말에 젊은 독자와의 문답이 실려 있다. 거기에서 "독일인은 몰랐나요?"라는 물음에 레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사하는 테러리즘은 분명 저항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 국민이 전혀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 일반 독일 시민은 무지한 채 안주하고, 그 위에 껍질을 씌웠다. 나찌즘에 동의한 것에 대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진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220-221


그는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유령처럼 나타난 뮐러, 정직하고 무기력한 평균적인 독일인인 그는 '과거의 극복'을 말하는 한편, I.G. 파르벤을 변호하고 유대인이 학살된 사실은 "몰랐다"고 한다. 부나에 있으 ㄹ때조차 유대인인 레비에게 "왜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물은 인물이었다. 말살의 위협에 노출된 강제수용소의 수인이 매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측의 사람에게 자신이 왜 불안한지 설명하기를 요구받은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런 부조리를 전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227


쁘리모 레비는 생존자들이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잊고자 애쓰면서도 강제수용소의 "악몽에 시달리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제대로 잊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무(無)에서부터 다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한편 두번재 부류의 생존자들은 "기억해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잊으려고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사회가 망각해가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레비는 자신을 두번째 부류로 규정했다. 그는 "판사보다 증인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보고 견뎌 이겨낸 것을 증거로 가지고 돌아오는" 일이 자신의 '의무'였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  242


수용소에서 쁘리모 레비를 매일 밤 고통스럽게 한 악몽은 현실이 되었다. '이편'으로 살아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오디쎄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옥은 이미 종교적인 신념이나 몽상이 아니라, 집과 돌 그리고 나무처럼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그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파리아로서의 유대인>)  244-245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 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24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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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then, at an uncertain hour, 

That agony returns,

And till my ghastly tale is told

This heart within me burns.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582~585행




서문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14


라거의 악행을 알고 있던 수많은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15


생존자들 가운데는 포로생활중에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특권층' 증인들은 확실히 더 나은 관측소를 이용했다. 적어도 더 높은 곳에 있었고, 따라서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특권에 의해 크게든 작게든 그 또한 왜곡된 것이었다.  17


나치의 라거로부터 해방된 지 이미 40년 이상이 흘렀다. 이 상당한 간극은 사건을 명확하게 밝혀줄 모순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는데, 아래에 열거해보겠다. 

첫째는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정제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

세월의 흐름은 역사적으로 부정적인 또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원고와 피고 측 증인 대다수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아직 남아 있는, 그리고(자신들의 가책이나 저마다의 상처를 극복하고) 여전히 증언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흐릿하고 정형화된 기억을 갖게 된다. 이는 종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읽거나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하면서 나중에 알게 된 정보로부터 영향받은 기억들이다.  19


또 다른 정형화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 생활자들에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 가운데 생환자로서 자신의 조건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덜 비판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기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라거 내부는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였다. 내가 앞으로 말하게 될 "회색지대"는 어느 정도는, 또 어쩌면 좋은 의도에서 당국에 협조한 포로들의 층으로 결코 얇지 않았다. ..

처음 받은 위협, 첫 모욕, 첫 구타는 SS로부터 온 게 아니라 다른 포로들, '동료'들, 갓 입소한 사람들이 방금 갈아입은 것과 똑같은 줄무늬 유니폼 차림의 그 불가사의한 인물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20-21




이 책은 아직까지도 분명치 않아 보이는 라거 현상의 몇 가지 양상들을 밝히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보다 야심찬 목적도 있다. 좀 더 급박한 질문, 우리의 이야기를 읽을 기회가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노예 제도나 결투 의식이 그랬던 것처럼, 수용소 세계는 어디까지 사멸했으며 더 이상 되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어디까지 되돌아왔거나 되돌아오고 있는가, 위협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적어도 이러한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할 수있는가?  21





1 상처의 기억


인간의 기억은 놀라운 도구인 동시에 속이기 쉬운 도구이다. ..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종종 변형되며 심지어 상관없는 일들을 껴 넣으면서 자라나기도 한다. 

동일한 사건의 두 목격자가 사건을 같은 방식으로, 또 같은 말로 묘사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23


오스트리아 철학자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는 벨기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글은 우리를 경악에 빠뜨린다.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에 시달리는 채로 남는다... 고문당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25


사건들이 과거 속으로 멀어질수록 편리한 진실의 구축은 점점 더 커지고 더 완벽해진다.  28


내가 보기에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한 자는 결국 사적인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자신을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편리한 진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선의와 악의를 뚜렷이 구분하는 데는 큰 비용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솔직할 것을 요구하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29


우리가 자라난 체제는 자율적인 결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렸고 다른 식으로는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정하는 능력을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

근대적인 전체주의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할 ㅅ 있는 압력은 무시무시하다. 그 무기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이다. 교육, 지도, 대중문화로 위장한 프로파간다 또는 직접적인 프로파간다. 정보의 다원주의에 반하는 봉쇄, 그리고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30 


저지른 죄에 대한 기억을 변형하는 극단적 경우로는 기억의 제거가 있다. ..

기억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써 그는 배설물이나 기생충을 몰아내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로운 기억을 몰아냈다.  32


히틀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실로의 길을 봉쇄했다. 모든 도박꾼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미신적인 기만들로 짜인 무대를 자기 주변에 구축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모든 독일인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광신적인 믿음을 결국 스스로도 믿게 되었다. 곧 히틀러의 몰락은 인류의 구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실이 조작될 때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34


방어의 목적에서, 현실은 기억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행위 자체에서도 왜곡될 수 있다.  35





2 회색지대 


보통 '이해하다'의 의미는 '단순화시키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심오한 단순화 과정이 없다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정의할 수 없고 끝도 없이 얽히고 설킨 실타래와 같을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방향설정 능력과 행동결정 능력을 위협할 것이다. 요컨대,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식 가능한 것들을 도식적으로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역사도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건들이 정렬되는 도식이 언제나 분명하게 규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9


민중사는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정식화된 역사도 중간색과 복합성을 피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향에 영향을 받는다. 즉 인간 세계의 넘쳐흐느는 사건들을 갈등으로, 갈등은 대결로, 우리와 그들,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 로마인과 카르타고인 등과 같은 대결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것이 축구, 야구, 권투와 같은 두 팀 또는 두 명으로 이루어진 스펙터클한 스포츠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이유이다. 뚜렷이 구분되고 확인 가능하며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로 갈리기 때문이다. ..

단순화의 욕구는 정당화되지만, 단순화가 언제나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40


굶어 죽거나 굶주림에 비롯된 질병으로 죽는 것이 포로들의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오로지 추가적인 음식 숩취를 해야만 이 운명을 피할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특권을 손에 넣어야 했다...

수용소의 현실에 맞닥뜨린 최초의 충격은 예견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누군가의 공격이었느넫, 관리자 포로라는 새롭고 이상한 적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44-45


죄인은 길들여지거나 죽을 때까지 체계적이고 분노에 찬 구타를 당한다.  45


관리자 포로라는 혼성 계층은 수용소의 골격을 형성하며, 동시에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주인과 하인의 두 영역을 나누는 동시에 연결하는,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이다.  46


'프로텍치아'('특권'을 가리키는 이디시어 방언이자 폴란드어 protekcja)와 협력의 회색지대는 다양한 뿌리로부터 탄생한다. 첫째, 권력층의 그 폭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만큼 외부의 조력자가 더 필요해진다. ..

두 번째는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꺼이 권력에 협력하려는 의향이 더욱더 확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향은 미묘한 차이들과 다양한 동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칭송 일색의 성인전 같은 수사학적인 어떤 정형화와는 대조적이다. 공포, 이데올로기적 유혹, 승자를 곧이곧대로 모방하는 것, 어떤 권력이건 간에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시간과 장소에 제한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 그것을 향한 근시안적 욕망, 비겁, 명령이나 규율 자체를 교묘하게 피하려는 철저한 계산에 이르기까지 그 동기는 다양하다.  46-48


"선동가들, 탄압자들,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해치는 모든 자들은 유죄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만이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타락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한 만초니(Alessandro Manzoni)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억압당하는 환경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49


카포(우두머리, 태장)는 누가되었나?

첫째, 가능성이 주어진 사람들, 즉 라거의 사령관이나 그의 대리인들이(흔히는 뛰어난 심리학자들이었는데) 협력자로서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들이다.

둘째, 감옥에서 차출해온 일반 범죄자들이다. 그들에게 간수일은 수감생활의 훌륭한 대안을 제공했다. 

셋째, 5~10년의 고통의 세월에 쇠약해진, 아니면 어쨌든 도덕적으로 약화된 정치범들이다. 나중에는 유대인들도 카포가 되었는데, 자신들에게 주어진 보잘것없고 미미한 권력에서 '최종 해결책'을 피할 유일한 방법으로 찾게 된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다. 특히 사디스트들이 권력을 원했다. 물론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특권의 지위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굴욕을 가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좌절한 사람들도 권력을 원했다. 그리고 이 역시 라거라는 소우주 속에 전체주의 사회라는 대우주를 재현하는 특징이다. 당국에 경의를 기꺼이 표하는 자에게 권력이 자비롭게 주어지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달리는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진급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권력을 원했다. 그들은 억압하는 자들로부터 전염되었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53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살인자가 도사리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고한 희생자였고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안다. 나는 살인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에서만이 아니라는 것도, 은퇴했거나 여전히 현역으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54


협력의 극단적 예는 아우슈비츠와 기타 절멸 수용소의 존더코만도스(Sonderkommandos)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특권을 말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존더코만더스에 속한 사람은 특권층이었지만 부러움을 받는 자리였기 때문에 특권층이었던 것을 물론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혜란 몇 달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SS(Schutz-Staffel의 약자, 나치스 친위대. 1929년 히틀러의 경호대로 창설되었다. 그후 독일군 내에서도 나치스 이데올로기르 광신적으로 체현한 특수군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SS의 임무는 유대인을 포함한 나치스의 적들을 탐색하고 체포하는 것, 강제수용소의 관리와 방어 등이었다. - <이것이 인간인가> 13페이지에서)는 "특수부대"라는 적당히 애매한 이름으로 포로들의 한 그룹을 지정한 뒤 화장터의 운영을 맡겼다.  56


한 명은 이렇게 단언했다. "이 일을 하게 되면 첫날 미쳐 버리든가 아니면 익숙해지든가 둘 중 하나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스스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증언하기 위해. 여러분은 우리가 괴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단지 훨씬 더 불행할 뿐"이라고 했다.  59-60


특수부대를 기획하고 조직한 것은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범죄였다.

이러한 기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려고 시도한 것이다.  60


특수부대의 베테랑들을 대하는 SS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 베테랑들을 확장된 동료로 인식했다. 곧, 이제는 자신들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존재, 어쩔 수 없이 부과된 공범성이라는 추악한 굴레에 묶인 한 배에 탄 동료로서 말이다.  62


우리의 판단 욕구와 판단력은 특수부대 앞에서 흔들린다. 

왜 그들은 그 임무를 받아들였는가? 왜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차라리 죽음을 원하지 않았는가?  66


우리가 알고 있는 저 비참한 학살 실행자들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다. 곧 즉각적인 죽음보다도 다만 몇 주라도 삶을(도대체 무슨 삶인가!) 연장하기를 바랐던 사람들이다. ..

나는 누구든지 감히 심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추론적 실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67


베펠노트슈탄트(Befehlnotstand), 즉 '명령에 따른 강제 상태'  68


억압에 의해 치명적으로 유발된 인간의 모호성이라는 근본 주제에 관한 굉장히 웅변적인 이야기.  69


나치의 게토는 중세의 반종교개혁적인 게토 체제를 나치의 근대적인 잔혹성으로 인해 더욱 악화된 모습으로 복구시킨 형태였다.  70


실패로부터 도덕적 힘을 끌어내는 사람들은 소수인 것이다. 정치적 강압은 모호함과 타협의 불분명한 영역을 만들어내며 이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모든 절대 왕좌의 발치에는.. 인간들이 한 줌의 작은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몰려든다. 이것은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

처음에는 맹목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범죄자가 되었고,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맹렬히 싸웠다. 권력은 마약과도 같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마약에 대한 욕구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우연하게라도 한 번 시작한 뒤에는 중독되고 필요한 투여량은 점점 더 많아진다. 또한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전지전능을 갈구하는 유아적 꿈으로 돌아가는 일도 나타난다. ..

즉, 중독은 너무나 강해서 개인의 모든 의지의 불씨를 꺼뜨릴 정도로 보이는 환경에서조차 만연한다는 사실 말이다.  77-78


국가사회주의와 같이, 무시무시한 부패 권력을 행사하는 지옥같은 체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체제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다. 크고 작은 공범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단한 도덕적 뼈대가 필요하다...

만약 불가피하게 몰릴 때, 동시에 유혹이 무리 마음을 부추길 때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78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80





3 수치


"기쁨은 괴로움의 자식"이 아니다. 괴로움이 괴로움의 자식이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단지 운좋은 소수나 굉장히 단순한 영혼들에게만 잠시 환희를 가져왔을 뿐, 거의 언제나 불안의 양상과 겹쳐져 있었다.  82


독일인들은 모르던 수치심,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었다.  84


우리 각자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자기 방식대로 라거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원해서도 무기력해서도 아니었고 죄가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수개월 또는 수년을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았다. 우리의 나날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배고픔과 피로와 추위,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는 없어졌다. 우리는 더러움과 사샐활의 결핍과 자기 존재의 축소를 정상적인 삶이었을 때보다는 훨씬 덜 괴로워하면서 견뎠다. 우리의 도덕적 잣대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도둑질을 했다. 부엌에서 , 공장에서, 운동장에서, 요컨대 '다른 살마들에게서', 상대편에게서 훔쳤지만, 그래도 도둑질은 도둘질이었다. 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자기 동료의 빵까지 훔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와 문화뿐만 아니라 가족과 과거, 우리가 그렸던 미래 또한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물들처럼 현재의 순간에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해방은 어쨌든, 반성과 우울함이라는 해일과 함께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수용소들을 포함해서 라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포로생활 도중에 자살이 일어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에 동일하게 주목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었다. 나는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 해석들이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첫째,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는 점이다. 즉, 심사숙고한 행위이고, 자연스럽지도 않고 충동적이지도 않은 하나의 선택이다. ..

둘째, "생각할 다른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하루 일과는 빡빡햇다. 허기를 채우고, 어떤 식으로든 피로와 추위를 피하고 구타를 피할 생각을 해야 했다. 늘 코앞에 닥쳐온 죽음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

셋째, 대부분의 경우, 자살은 어떤 형벌도 덜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고 죄책감은(형벌이 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므로) 해방 후에 다시 나타나기 위해 제2선으로 밀려나 있었다.  87-89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의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카포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다)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더 약하고 더 서툴고 더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너무 어린 옆자리의 동료는 도움을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이미 그 자체로 간청하고 있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힌다. ...

보통 그런 요구를 받는 사람도 자기 입장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었다.  91


뒤늦은 수치심은 합리화될 수 있을까, 없을까?  95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그럴 힘이라도 있었겠는가?),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맡겨지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나는 이번에는 매우 광대한, 아니 보편적인 의미에서 "우리"라고 한다) 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좀벌레처럼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고 들어앉아 갉아먹으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95-96


라거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곻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適者 맞을적 사람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크라코비아의 시계상이자 신실한 유대인이었던 하임은 죽었다. 그는 외국인인 나에게 언어의 어려움에도 나를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사악함으로 가득한 첫 며칠의 고비에서 수용소의 기본적인 생존 법칙들을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과묵한 헝가리 농부 사보도 죽었다. 키가 거의 2미터여서 누구보다도 배가 고팠지만, 기력이 있는 한 더 쇠약한 동료들이 밀고 당기는 것을 도와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로 용기와 믿음을 발산하던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 로베르도 죽었다. 5개 국어를 할 줄 알앗던 그는 자신의 놀라운 기억 속에 모든 것을 기록하려 애썼고 만약 살아남았다면 내가 답할 수 없는 여러 의문들에 답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보르노 항구의 부두 하역부였던 바루크도 죽었다. 첫날 바로 죽었느넫, 처음 날아온 주먹에 주먹으로 답했기 때문이다. 연합한 세 명의 카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97-98


반복 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끔찍한 모습의 세 자매 괴물. 스텐노, 에우리알레, 메두사. 그 중 메두사는 고르곤을 대표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는데,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돌이 되었다고 한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하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98-99


끊임없이 잠을 설치게 하는 이름 모를 불편함 때문에 모두가 시달렸다. 그것을 "노이로제"라고 정의하는 것은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우스꽝스럽다.  100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이 있다. 곧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다...

타인과 자신의 죄 앞에서 그 죄를 보지 않도록, 그래서 느낄 수 없도록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히틀러 치하의 12년간, 보지 않는 것이 모르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공모와 묵인에 대한 자신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그렇게 행동했다. 자발적인 무지의 장막. ..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은(더도 덜도 아니고, 여느 인간 집단에 있는 딱 그만큼 존재했다)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가책과 수치심이라는 고통을 느꼈다.  101





4 소통하기


의사소통이 금지된 나라에서는, 또 그런 시대에는 다른 모든 자유도 곧 시들게 된다. 토론은 영양실조로 죽게 되며, 타인의 견해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강요된 견해들이 맹위를 떨치게 된다. 토론의 부재 속에, 20년간 수확을 망쳤던 리센코(Trofim Lysenko, 러시아의 농업생물학자, 가을에 심는 밀을 인위적으로 저온에 저장하여 봄에 심는다는 춘화처리법을 실시했다. 이후 농업생산 분야에서의 부진과 과도한 정치적 행동 때문에 비판받았다.)가 소련에 설파한 말도 안 되는 유전학은 이에 대한 유명한 예이다(리센코의 반대자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비관용은 검열의 경향을 띠고, 검열은 타인의 논지에 대한 무지, 즉 비관용 자체를 증폭시킨다. 이것은 깨기 어려운 단단한 악순환의 고리이다.  124





5 쓸데없는 폭력


2주간 지속될 수도 있는 여행(살로니카에서 이송되는 유대인의 경우)을 위해 독일 당국은 식량도, 물도, 나무 바닥을 덮을 깔개나 짚도, 생리현상을 해결할 용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또한 지역 당국이나 집결수용소의 책임자들(있을 경우)에게 이송 상황을 알리고 어떤 식으로든 병참 물품을 조달하는 데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통지를 하는 것에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바로 이러한 체계적인 태만은 결국 쓸데없는 잔인함으로, 고통 자체가 목적인 고통의 고의적 유발로 변모했다.  132


우리의 역설적인 행운(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행운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망설여진다) 덕분에, 우리의 화물칸에는 몇 개월 안 된 아기들을 데리고 탄 두 명의 젊은 엄마가 있었고 그녀들 중 한 명이 요강을 가지고 있었다. 여행한 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판자벽에 박힌 못들을 발견했다. 못 두 개를 빼내 한쪽 구석에 다시 박고 줄을 쳐서 담요를 걸고 임시변통으로 몸을 가릴 곳을 만들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짐승이 아니라는, 우리가 저항하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짐승이 안 될 것이라는.  134


거대한 공동화장실, 의무적으로 정해진 짧은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서서, 참을성 없이, 때로는 애원하며, 또 때로는 윽박지르면서 10초 마다 "하스트 두 게마흐트(Hast du gemacht, 아직 멀었어?)라고 물어온다. 그럼에도 몇 주 안에 불편함은 줄어들더니 결국 사라졌고, 그 자리에 익숙함이(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찾아왔다. 이는 인간에서 동물로의 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비로운 방식이었다.  135


배설에 대한 강압과 비슷한 것이 바로 나체에 대한 강압이다.  136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나체화... 쓸데없는 과도함 때문에 모욕적인 하나의 폭력이었다. ..

의복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차라리 스스로를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처럼 벌거벗고 느리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짓이겨질 수 있다고 느낀다.

포로생활 첫 며칠 동안 숟가락이 없다는 사실은 이와 똑같은 무력감과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 숟가락 없이는 매일 죽을 개처럼 핥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  137


라거의 SS들은 교묘한 악마라기보다는 둔감한 야수들이었다. 그들은 폭력적이 되도록 교육받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그들의 몸짓과 언어에서 폭력은 새어나왔다. '적'에게 굴욕감을 주고 고통을 겪에 만드는 것이 날마다 하는 그들의 업무였다. 이런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성적 사고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146-147


하루에 수톤 씩 화장터에서 나온 인간의 재는 대개 치아나 척추 뼈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습지대를 메우기 위해, 목조 건물의 벽 사이에 넣을 단열재로, 심지어 인산비료로 말이다. 특히 수용소 옆에 위치한 SS 군의 마을길을 포장하는데 자갈 대신에 사용되었다. 나는 이것이 순전한 냉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재의 출처 때문에, 곧 그것이 짓밟아야 할 재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151


트레블링카의 전(前 앞전)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과 지타 세레니의 긴 인터뷰(<그 암흑 속에서>, 아델피 출판사, 밀라노, 1975)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두 문장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어차피 다 죽일 것이었는데...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뒤셀도르프의 감옥에서 종신형에 처해 있던 슈탕글에게 작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질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었던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다른 말로 하자면 희생자는 죽기 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말이다. 이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라고 하늘에 외치고 있다.  151-152





6 아우슈비츠의 지식인


장 아메리(한스 마이어)는 .. 이탈리아인들은 거의 희귀할 정도로 소수였기 때문에, 게다가 내가 라거에서 마지막 두 달간 기본적으로 내 일을, 화학자로서의 일을 수행했고 이는 훨씬 더 희귀한 경우였기 때문에 그는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157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아메리와 나, 우리 둘 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적 믿음이든 그들의 믿음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나 개신교 목사, 다양한 정통성을 가진 랍비들, 전투적 시오니스트, 순진한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진화된 마르크스주의자,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믿음 속에서 구원의 힘을 얻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열쇠와 기댈 버팀목이 있었다. 자신의 희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줄 천년왕국의 내일이 있었으며, 천상이나 지상의 어딘가에 정의와 연민이 승리르 거둔(또는, 멀지만 확실한 미래에 승리를 거둘) 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 그들의 굶주림은 우리의 굶주림과 달랐다. 그것은 신의 형벌이나 속죄, 봉헌물, 또는 자본주의의 부패의 결과였다. 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연민의 눈길로, 때로는 경멸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힘든 노동의 막간에 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177-178


반쯤 죽은 사람들의 섬들, 아마도 교양 잇는 사람들이었거나 믿음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섬들, 그런 그들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의미 없고 잔인한 일이다.  179


아메리가 지적하기를, 지식인은(나는 여기서 '지식인'을 젊은 지식인이라고 명시하고 싶다. 아메리와 내가 체포되어 포로생활을 했던 그 시절처럼) 자신의 독서로부터 아무런 냄새도 없고 아름답게 장식된 문학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했다. ..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은 사소하고 관료적이며 일상적인 일이었다. 언급되지도 않았고 "눈물로 위로를 받지도" 못했다. 죽음 앞에서,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죽음 앞에서 문화와 비문화의 경계는 사라졌다. 아메리는 죽게 될 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한다.

'가스실의 독이 그 효과를 발휘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다. 페놀 주사에 의한 죽음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짐작해보곤 했다. 뒤통수를 한 대 맞고 죽는 것을 바라야 할까, 아니면 의무실에서 기력이 소진해서 죽는 것을 바라야 할까?' ..

아마도 내가 좀 더 젊고 그보다 더 무지했기 때문에, 아니면 좀 덜 괴로웠거나 죽음을 덜 의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한 번도 죽음에 바칠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수많은 일들로 쉴 틈이 없었다. 빵 조각을 찾는다거나, 무지막지한 노동을 피한다거나, 신발을 덧댄다거나, 빗자루를 훔친다거나, 내 주위의 얼굴들과 징후들을 해석하는 일 따위로 말이다. 삶의 목표는 죽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어이며, 이는 라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179-181





7 고정관념들


포로생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리고 훨씬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혹한 경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중간지대가 거의 없이 두 가지 범주로 뚜렷이 나뉜다 곧 침묵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양쪽 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단순화해서 내가 "수치"라고 부른 저 심적 불편함을 더 깊이 느끼는 사람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 또는 상처라 아직도 화끈거리는 사람들은 침묵한다. 반면 다른 쪽 사람들은 서로 다른 충동에 이끌려 말을 한다(대개는 말을 많이 한다).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다양한 의식 수준에서 삶의 중심이, 또 좋건 나쁘건 자신들의 전(全 온전할전) 존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이 자신들의 포로생활(이미 먼 옛날 일이 되었다 할지라도)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들이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규모의 재판에 증인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이디시어 속담에 있듯이) "지나간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은 멋진 일"이기 때문이다.  182


왜냐고 묻는 어떤 질문들에 대답하기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가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단지 증인들이다. 어쨌든 인간 만사의 역사가 엄격한 논리적 도식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으며, 모든 변화가 한 가지 이유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없다. 단순화는 학교의 교과서에만 적합한 것이다. 이유들은 많을 수 있고, 서로 혼란스럽게 얽혀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184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나라들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선(善 착할선)으로 생각한다. 자유 없이는 살 수 없고, 자유는 당연하고 명백한 권리이며, 게다가 건강이나 숨 쉬는 공기처럼 공짜로 갖는 것이라고, 이와 같은 선천적인 권리가 거부되는 시대와 장소는 그들에게 멀고 낯설며 이상해 보인다. 따라서 그들에게 감금이라는 개념은 도망이나 저항과 결부되어 있다. 포로의 조건은 부당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탈출이나 반란으로 치유되어야 할 질병처럼 말이다.  184-185


감금과 탈출의 이러한 도식적 이미지는 강제수용소의 상황과는 유사한 점이 거의 없었다. 강제수용소라는 용어를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해보면(즉,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져 있는 절멸 수용소들 외에도, 군인 포로들과 다양한 피억류자들이 있던 수많은 수용소들을 포함하여), 독일에는 노예 상태에 있던 수백만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의 피로에 지쳐 있었고, 멸시를 받았으며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또 제대로 입지도 보살핌을 받지도 못한 채 조국과의 접촉으로부터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포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의기소침하고 쇠약해진 사람들이었다.  186


그들은 짐을 실어 나르는 가축들보다도 더 가치가 없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빡빡 깎은 머리에 당장에 알아볼 수 있는 꾀죄죄한 옷을 걸쳤고, 빠르고 조용한 걸음을 방해하는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187


노예 한 명의, 특히 "생물학적 가치가 열등한" 종에 속하는 노예의 도주는 말 그대로 패배한 자의 승리와 신화의 붕괴를 타나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더 현실적으로 말해서, 각 포로는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본 사람이기 때무넹 이는 객관적 피해이기도 했다.  188-189


탈주자를 산 채로든 죽은 채로든 찾을 때까지, 막사의 동료들이나 때로는 수용소의 모든 포로들은 시간 제한도 없이 며칠이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뙤약볕이 내리쬐든 점호 광장에 서 있어야 했다.  189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과 개략적으로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 현재의 상상력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 사이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러한 상상력은 치명적인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러한 현상이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 비극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훨씬 더 일반적이고, 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잇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굶주림이 한 끼를 건너뛴 사람의 배고픔인 것처럼, 또는 트레블링카에서의 탈출이 로마 감옥에서의 탈출과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연구되는 사건들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것은 역사가의 과제일 것이다.  192


불편한 진실은 그 길이 험한 법이다. 

감금과 탈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반란의 결합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 이것이 전혀 유효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반란의 역사, 그러니까 '소수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억압받는 다수'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그만큼 다양하고 비극적이다. 승리를 거둔 몇몇 소수의 반란이 있었고 많은 반란들은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른 반란들은 역사에 자취를 남기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진압되었다. ..

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또는 야망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194-195


세기말이자 천년의 끝자락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202





8 독일인들의 편지


나는 특정한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내게 그 들들은 내 안에 들어 있었던, 나를 압도하고 있던 무엇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밖으로 쫓아내야 했다. 그것들을 말해야 했다. 아니 지붕 위에서 소리소리 질러야 했다. 그러나 지붕 위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은 모두에게 외치는 것이자, 아무에세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사막에서 외치는 아우성이다. 그 계약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변했고, 내게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 책을 물론 아탈리아어로, 이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인간성에 대한 침해에 동의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수신자는, 마치 무기처럼 이 책이 겨냥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그들, 독일인들이었다.  205


내 임무는 이해하는 것,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중범죄자들이 아니라 그들, 그 국민들, 내가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 자신들 중에서 SS대원으로 차출된 바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 믿었던 사람들과 믿지 않으면서도 침묵했던 사람들을, 우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작은 용기, 우리에게 빵 한 조각을 던져주거나 인간적인 말 한 마디를 나지막이 중얼거릴 작은 용기도 없었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206


독자들은 두 부류로 명확히 구분된다. 첫 번째는 기분 좋은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불쾌한 부류이다. 중간에 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쁨을 주고 가르침을 준다. 그들은 책을 주의 깊게, 흔히는 한 번 이상 읽은 사람들로, 때로는 작가 자신보다도 더 책을 잘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을 통해 자신들이 풍요로워졌다고 밝히며, 자신들의 견해와 때로는 비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작가에게 작품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며 흔히는 작가에게 답장 쓸 필요가 없다고 대놓고 말한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루함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과시하며 잘난척한다. 흔히는 서랍 안에 자신의 습작들을 넣어두고 있으며, 담쟁이덩굴이 나무둥치 위로 기어오르듯이 책과 작가 위로 기어올려는 의도를 슬며시 드러낸다. 또는 허세를 부리느라, 아니면 내기를 해서, 아니면 작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서 편지를 쓰는 어린이나 청소년도 있다.  222


그녀의 첫 편지에 나는 내 책이 독일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 책을 읽을 필요가 덜 한 독일인들 사이에서였다고 썼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  237





결론


모든 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247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 ..

모두가 크든 작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도 없이 그를 지지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251-252





부록 - 프리모 레비와 <라 스탐파>지의 인터뷰 : 이해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왜 프리모 레비는 문학적 경험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경험을 한 뒤에 다시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진실에 대한 필요 때문이라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254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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