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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7.14 무지한 스승 - 자크 랑시에르 궁리 2008 93100

1818년에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9


스승이 해야 할 가장 중차대한 일이란 학생들에게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그들을 스승이 가진 학식의 수준만큼 차츰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친다는 것은) 잘 짜인 점진적 순서에 따라 가장 간단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정신을 이끌고 가면서 그 정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13


누구도 자신이 이해한 것 말고는 정녕 알지 못한다.  15


[옮긴이] 이 책에는 교육과 관련된 표현들이 여럿 사용된다. 주로 나오는 동사들 중 일부를 굳이 구분하자면 enseigner는 '가르치다'를, insruire는 '깨우치다'를, eduquer는 '교육하다'를, former는 '길러내다'를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사들의 명사형인 enseignement은 '가르침 및 교육'으로, instruction은 '지도'로, education은 '교육'으로, formation은 '양성'으로 옮겼다. 그밖에 pedagogic는 '교육학이나 교수법'으로 옮겼다.  15


설명자가 가진 체계의 노닐를 뒤집어야 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내는 허구이다...

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다. 그것은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인 것이다.  19


교육학의 신화는 지능을 둘로 분할한다. 열등한 지능이 있고 우월한 지능이 있다. 

열등한 지능은 지각을 무작위로 등록하고, 기억해두고, 해석하고, 습관과 욕구의 좁은 고리 안에서 경험을 통해 되풀이한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보통 사람이 가진 지능이다. 

우월한 지능은 사물들을 이성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방법에 따라,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간다. 우월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에 스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추어 전달할 수 있고, 또 학생이 배운 것을 잘 이해했는지 검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명의 원리다. 

이것은 자코토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abrutissement)의 원리가 될 것이다.  20


바보를 만드는 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에 주입하는 늙어빠진 둔한 스승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유식할수록, 눈이 뜨였을수록, 선의를 가졌을수록 더 효과가 있다. 유식하면 유식할수록, 그가 아는 것과 무지한 자들의 무지 사이의 거리는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은 이해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들이 그 학생에게 항상 더 잘 설명해주어야 한다. 눈이 뜨인 교육자의 고민은 이런 것이다. 꼬마가 이해할까? 이해 못 하지. 그에게 설명해줄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지. 원리에서 더 엄밀하면서도 형식에서 더 관심을 끄는 그런 방식을. 그리고 아이가 이해했는지 검증해 보아야지...

이 이해하다라는 슬로건이 바로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 단어 때문에 이성의 운동은 멈추고, 이성에 대한 신뢰는 파괴된다...

이해시키는 방식의 모든 개선(방법론자들과 개선론자들의 이 위대한 근심)은 바보 만들기의 진보가 된다.  21-22


조제프 자코토는 생각했다. 모든 추론은 사실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실에 따라야 한다고....

그의 학생들이 설명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스스로 익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23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  29


스승과 학생 사이에는 의지와 의지의 관계만 성립되었다.  30


인간, 특히 아이는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스스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예속(sujetion)은 순전히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예속되는 것이다. 예속이 하나의 지능과 다른 지능을 연결할 때 그것은 바보 만들기가 된다.  31


빠른 길이라고 해서 가장 좋은 교육의 길인 것은 아니었다. ...

가르치는/배우는 행위는 다양하게 조합되는 네 가지 한정을 따라 산출될 수 있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  32


[옮긴이]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무지한 스승은 학생에게 가르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다. 둘째, 무지한 스승은 어떤 앎도 전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앎의 원인이 되는 스승이다. 셋째, 무지한 스승은 불평등을 축소하는 수단들을 조정한다고 여겨지는 불평등에 대한 앎을 '모르는 스승'이다.  32-33


학생을 해방한다면, 다시 말해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 

지능은 스스로에게 필연적으로 되어야지만 그 고리에서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무지한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 해방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기만 하면 된다. 즉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34


Age quod agis, 즉 네가 하는 것을 계속하라.

[옮긴이] "보편적 가르침은 모두가 하는 것, 우리가 날마다 하는 것, Age quod agis에 기초한다고 나는 내 제자에게 말한다. 오늘, 내일, 늘 네가 시작했을 때처럼 너의 교육을 계속하라. 네가 이날까지 따라온 절차에 따라 네 언어 공부를 완수하라. 그것을 바꾸지 마라. 너는 네가 알고 있는 문법의 기초들에서 [그 언어를] 배웠던 것이 아니다. 시간 낭비하지 마라. 네가 혼자 익힐 수 있는 것을 너에게 가르쳐주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를 지연시킬 테니까."  36

그는 상호 지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무지한 자가 다른 무지한 자에게 스승이 될 수 있는 것 말이다. ..

자코토에게 문제는 해방이었다. ...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든다. 그리고 해방하는 자는 해방된 자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다. 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39


[옮긴이]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이 '개인'을 지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혼자서만 해방될 수 있다.  40


가난하고 무지한 가장도 스스로 해방되기만 하면 설명해주는 어떤 스승의 도움 없이도 가지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옮긴이] 해방된 가장 - 자코토는 가르치는 자 자신이 먼저 해방되는 것을 보편적 가르침의 '필요조건'으로 본다.  41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람은 반쪽 인간일 뿐이다."  50


지적 능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61


"옛날 방식은 문자들부터 시작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지적 불평등의 원리에 따라, 더구나 아이들이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원리에 따라 학생들을 지도하기 때문이다. 구식은 문자가 단어보다 더 구별하기 쉽다고 믿는다. 이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결국 구식은 그렇게 믿는다. 구식은 아이 같은 지능이 C, A, CA를 배우기에 알맞을 뿐, 칼립소를 배우려면 어른의 지능, 다시 말해 우등한 지능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62


불평등의 원리, 낡은 원리는 무슨 수를 쓰건 바보로 만든다.  63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 이는 다만 우리가 모르는것 전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학식도 필요치 않다. 무지한 자는 무엇이든 물을 수 있다.  67


무지한 자는 더 적게하는 동시에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는 학생이 찾아낸 것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구한 것을 검증할 것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학생이] 공부한 것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옮긴이] 무지한 자는 학생이 작업한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적게' 하지만, 학생이 들인 수고와 주의를 검증하고, 나아가 지능의 평등을 입증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한다.  68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한 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무지한 자들이 언제나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지에는 위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지한 자들과 유식한 자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지적 존재의 힘이라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평등의 힘은 이원성의 힘인 동시에 공통성의 힘이다. 하나의 정신과 다른 정신의 엉김, 묶음이 있는 곳에는 지능이 없다.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두 지능 사이에 위치한 공통된 것/사물은 이 평등을 보증하는 보증물이다. 그것은 이중의 명목으로 그러하다. 물질적인 것/사물은 먼저 "두 정신을 소통하게 해주는 유일한 다리"다. 다리는 통로이며, 또한 유지된 거리다. 책의 물질성은 두 정신에 똑같이 거리를 둔다. 하지만 설명은 한 정신으로 다른 정신을 무화시킨다.  70


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다른 여행자와 비슷하게 정신의 여행자로서, 지적인 존재들의 공통된 역량에 참여하는 지적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73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식을 거꾸로 뒤집은 평등의 정식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곤 햇다. 이 대철학자의 훌륭한 생각은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 중 하나다. 우리는 그의 생각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 주체를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지 ㄴ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 "너 자신을 알라"를 모든 인간 존재의 해방 원리로 변형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금지에 맞서 <크라틸로스>의 환상적인 어원 중 하나를 가지고 장난을 펴야 한다. 인간, 즉 anthropos는 자신이 본 것을 검토하는 존재, 자신의 행위를 헤아리는 가운데 자신을 아는 존재다.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힘은 그 실천이 스승에게서 실현되는 해방, 학생에게서 생겨나는 해방을 의식하는 데 있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앎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이 그것의 주체가 되는 지적 행위들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사유하는 존재의 힘을 쓰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한다면 자기 자식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의식은 먼저 무지한 자가 가진 지적 실력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는 자신의 언어를 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상태에 맞서 항의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상태를 알거나 그보다 더 많이 안다고 믿는 자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그 언어를 쓸 줄 안다. 그는 자신의 직업, 자신의 도구, 그 도구의 사용법을 안다. 그는 필요할 때 그것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능력들에 대해 반성하고, 그가 그 능력들을 획득한 방식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반서에 대해 정확히 따져보자. 손과 인민의 앎들, 도구와 노동자의 지능을 학교의 학식이나 엘리트의 수사학과 맞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누가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건설했는지 묻고, 사회 질서에서 건축가와 생산자가 받아야 할 자리를 주장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반대로, 두 가지 지능은 없음을 인정하고, 인간의 기술이 들어간 모든 작품은 동일한 지적 잠재성이 실행된 결과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처에서 관찰하고, 비교하고, 조합하고, 만들고, 또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처에서 이 반성이, 이 자기로 되돌아가기가 가능하다. 반성이란 사유 실체가 하는 순수한 숙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지적 행위에, 자기가 그리는 길에, 그리고 새로운 영토들을 정복하는 데 동일한 지능을 쏟아부으면서 그 길로 항상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에 무조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노동자의 손 그리고 [사회를] 먹여 살리는 인민이 빚어낸 작품을 수사의 구름들과 맞세우는 자는 바보로 남는다. 구름 제조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신발과 자물쇠 제조만큼의 일과 지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인간 기술의 작품이다. 아카데미 회원인 레르미니에 씨는 인민의 지적 무능력에 대해 논한다. 레르미니에 씨는 바보다. 그러나 바보는 멍청이나 게으름뱅이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가 쓴 논고에서 나무, 돌, 가죽을 변형하는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기술, 같은 지능, 같은 일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바보가 된다. 오로지 레르미니에 씨가 한 일을 인정해야지만 우리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들이 빚어낸 작품 속에 발현된 지능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르노블 부근에 사는 시골 빈민들은 장갑을 만드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장갑 12켤레에 30수(=1.5프랑)를 지불한다. 빈민들은 해방되고 나서 잘 만들어진 장갑을 보고,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이 장갑의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짐작할 것이다. 그들은 결국 12켤레에 7프랑을 버는 도시 여자들만큼 잘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위, 바늘, 실을 가지고 말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만이 중요하다. (인간 사회에서는) 언어를 이해하고 말하는 것만이 문제다."

언어의 물질적 관념성은 황금의 자손과 철의 자손 사이의 모든 대립을 반박하며, 손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과 사유를 발휘하기로 운면 지어진 사람들 사이의 모든 위계 - 설령 그 위계가 뒤집어진다 하더라도 - 를 반박한다. 언어로 빚은 모든 작품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고 실행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지한 자는 자신을 알게 된 뒤부터 그가 읽을 줄 모르는 책에서 자기 자식이 한 탐구를 검증할 수 있다. 무지한 자는 그의 자식이 무슨 교과를 공부하는 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자식이 어떻게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는 자식에게 한 가지만 주문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구할 때 도구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처럼 자식더러 단어와 문장을 이리저리 돌려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77-81


자기 자식의 의지를 강제함으로써 가난한 가장은 그의 자식이 그와 같은 지능을 가졌고, 그와 마찬가지로 구하고 있음을 검증한다.  82


해방은 평등에 대한 의식이다...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83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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