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右翼)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정권의 4년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野蠻)과 살상(殺傷)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정부가 들어섰다. 크메르루주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내전은 계속되었다. 그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의 결과로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左傾)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전범 징역 30년 선고 2010-07-27 뉴스 <== 클릭보기
크메르루주(Khmer Rouge .Khmers Rouges라고도 함)(프랑스어로 '붉은 크메르'라는 뜻)
게릴라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1975~79년 캄보디아를 통치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운동단체.
캄보디아의 무장군으로서 1967년에 형성되었다.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은 베트남의 베트민 후원 아래 1951년에 형성된 혁명 캄보디아 인민당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 당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당 이름을 캄보디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1950년대말까지 이 당의 당원들은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에 대항하는 비밀활동에 참여했으나 그들의 본거지가 시민들과 떨어진 정글과 산악지역에 있었고, 또 그들이 폭동을 종용하려 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시아누크가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으므로 시아누크에 대항하는 활동들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우익 군사 쿠데타에 의해 1970년 시아누크 정부가 전복되자 크메르루주는 그들과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고,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초 미국이 캄보디아에 대해 파괴적인 폭탄투하작전을 감행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그당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집권하는 동안 지원을 보류해오던 북베트남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었다. 1970년에 시작되어 거의 5년간 계속된 내란 중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점진적으로 확장시켰다. 마침내 1975년 4월 크메르루주군은 수도 프놈펜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후 캄보디아를 통치할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후 4년에 걸친 그들의 캄보디아 통치기간은 20세기의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정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절제함으로 얼룩졌다.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죽었고, 캄보디아의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거의 근절되었다.
크메르루주 정부는 베트남 군대와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들의 침략으로 1979년 전복되었으며, 침략군들은 캄보디아에 베트남의 원조와 기술로 지탱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크메르루주는 원거리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재개했는데, 당시 그들은 타이 국경 근처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1982년 그들은 베트남을 등에 업고 있는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하는 위험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크메르루주는 이 연합전선에 있어 가장 강력한 동반자가 되었으며, 1990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그들의 군대를 철수하자 또다시 캄보디아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캄보디아 역사
프랑스 식민통치시대 부터 쓰겠습니다...
크메르왕국의 Ang Duong왕은 태국과 베트남을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개입을 유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태국에 머물던 그의 아들 Norodom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후 다시 태국이 크메르왕국에 침입해왔을 때 프랑스가 개입하여 이를 물리치는 대신 캄보디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1884년 Norodom왕으로 하여금 강제로 합방조약에 조인하게 하여 캄보디아는 완전히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반식민지 투쟁도 있었으나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프랑스는 Norodom왕의 상징적인 권위를 존중해주는 척하고 뒤엣 캄보디아를 조종함으로써 힘을 덜 들이고 효과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에 의해 앙코르 왓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860년 프랑스의 여행가 헨리 무오 (Henri Mouhot)에 의해서 발굴되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Norodom왕에 이어 Sisowath(1904∼1927)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 뒤를 Monivong(1927∼1941)이 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도 일본에게 실권을 빼앗겼었다. 1941년 Monivong왕의 뒤를 이어 Norodom Sihanouk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당시까지는 프랑스의 입김에 의한 왕위 계승이었다. 이후 캄보디아에서는 일본이 민족주의 세력인 Son Ngnoc Thanh과 손을 잡고 프랑스는 Sihanouk와 연대하여 격렬한 대립을 지속하다가 결국 프랑스, Sihanouk쪽이 우세하게 되었다. Sihanoul는 프랑스와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며 독립을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세대 민족주의자들이자 다수당인 민주당과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다수당인 민주당과 사이가 불편했던 Sihanouk는 1953년 1월 의회를 해산시키고 같은 해 11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과 8년 전쟁을 치르는 와중이어서 캄보디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며 1954년 5월 비엔티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에게 완패당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캄보디아도 이때 어부지리를 얻어 배트남과 함께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에서 그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해방후의 혼란기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시하누크와 그의 정적간에 마찰이 계속되어 혼란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국민투표를 통하여 신임을 얻은 후 정당제도를 폐지하고 왕이 아닌 정당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하여 왕위를 그의 아버지께 양위하였다. 그가 새로 결성한 인민 사회당 (People's Socialist Community Party)은 1955년 9월 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이후 일당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국외는 이념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던 복잡한 상황이었다. 즉 북부베트남, 남부베트남, 태국, 중국, 소련, 미국 등의 이해관계가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시하누크는 북부베트남이나 중국 쪽의 좌익 성향을 약간 가미한 중립외교노선을 선택하였다. 1964년 미국은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좌익 성향을 띠고 있던 시하누크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시하누크는 이를 인지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북베트남군이나 중국과 협력하여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북부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 배치되고 1969년 미국은 캄보디아 내의 공산기지에 폭격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트남전 내내 캄보디아 동부는 미국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론놀 (Lon Nol)정권 치하
1969년까지 우익과 좌익간의 다툼은 점점 더 격화되고 시아누크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1970년 시아누크가 프랑스 방문중일 때 미국을 등에 업은 우익의 론놀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일방적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시아누크는 귀국하지 못하고 베이징에 망명정부를 구성하였다. 1970년 4월 미국과 남부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내의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넘어왔다. 이 결과 베트콩은 깊숙이 숨어버려 더욱 론놀 정권에게 위협이 되었다. 또한 론놀 정부의 부패와 타락이 점점 심화되어 국민들로부터의 신뢰가 추락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내전상태에서 혼란을 겪고 좌익들은 격분하게 되었으며 이의 지지를 받은 크메르 루즈군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즈군은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폴 포트(Pol Pot)과 키우 삼판 (Khieu SamPhan)에 의해 주도된 크메르 루즈군은 막강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론놀 측에 게릴라전으로 대항하여 효율적으로 내전을 수행해 나갔으며 베트남에서 수세에 밀린 미국도 더 이상 론놀의 힘이 되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다.
크메르루즈 치하
크메르 루즈 (Khmer Rouge)는 급진적 공산주의로, 철두철미하게 사회개조 작업을 서둘렀다. 그들은 민주 캄보디아를 표방하고 모택동식 협동농장 형태로의 전환을 위해서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하고 화폐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이는 앙코르 시대에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제방공사나 토목공사에 참여시켰던 역사와 비교되어 흥미로운 일면이 있기도 하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농촌으로 내몰려 협동농장에서 극심한 노동을 하였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처형되었다. 론놀 정권하의 관리들과 이에 협력한 사람들, 학자, 학생, 교사, 외국어를 아는 사람, 안경 쓴 사람, 손바닥이 말랑말랑하며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즉결 처형하여 순간 캄보디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당시 약 700만 명의 인구 중 백만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특히 거의 모든 사원들이 파괴되고 8만 여명의 승려들이 처형되었으며 약 500여명의 승려들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에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 캄보디아인들에게 가족사항을 묻는 것은 일종의 실례가 되는 형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나라도 6.25 전후에 이런 상황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겉잡을 수 없는 학살의 양상은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공산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 (Heng Samin)이 대표적 저항세력이었다. 그 와중에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인 크메르루즈는 과거에 캄보디아 영토였던 메콩 델타를 회복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는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베트남은 이를 기화로 1978년에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산베트남 점령치하
크메르 루즈군이 과거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 국경을 침범한 것을 계기로 공산베트남은 1978년 11월 캄보디아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크메르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서쪽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정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베트남군은 잔악한 크메르 루즈군에게서 해방시켜주는 해방군으로 인식되었다. 베트남은 자신의 지원을 받았던 헹 삼린을 내세워 친베트남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최악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한편 프놈펜에 급조된 친베트남 정권은 인근 태국과 중국, 미국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시하누크를 앞세워 이 정권에 대항하게 하였고 태국과 미국은 이 정권에 쫓겨 달아난 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 난민들을 지원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캄보디아의 오늘
베트남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은 나름대로 점점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 중국 등의 압력에 몰려 캄보디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반면 베트남에 원조를 하던 소령의 고르바초프가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개방을 표방하면서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의 철수를 권유 1989년 베트남은 이에 응하게 되었다.
그 해 베트남군의 마지막 군대가 철수되자 캄보디아 정부는 자체적으로 SOC(State of Cambodia)로 국명을 개명하고 파리평화협정(1991)으로 UNTAC(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이 창설되어질 때까지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1993년 5월, 22,000여명의 평화유지군의 감시아래 캄보디아 자유총선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시하누크의 민족연합전선(FUNCINPEC)이 훈센의 CPP (Cambodia People's Party)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군 및 경찰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던 훈센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수상직을 제1, 2로 나누어 두는 기형적인 의회제도를 갖추었고 시하누크는 그의 아들 라나리드에게 제1 수상직과 훈신펙 총재직을 물려주며 다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실로 그가 처음 왕관을 쓴 이후 52년만의 일이었고 시하누크는 그때부터 민족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식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으로 불려진다. 1997년 양수상의 힘의 불균형에서 온 한 차례 내전의 홍역을 치른 후, 1998년 7월 26일 총선이 실시되어 CPP가 국회의 과반수 (122석중 64석) 의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으로써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리고 훈신펙 (43석)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라나리드가 국회의장을 맡아 그해 12월 새 정부가 공식 출범을 하였다. 그 당시 상원도 생겨 전 국회의장 (CPP) 체아심이 의장을 맡았다. 현재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고의 안정된 정국을 맞고 있다. 반면 크메르루즈는 1998년 후반기 정부군에 쫓겨 태국 국경근처의 알롱벵까지 밀렸고 일부 군 고위 지도자들 (12명)은 무조건 집단 투항하므로 거의 와해되었으며 잇따라 폴 포트의 죽음과 타목의 전향으로 현재는 전멸되다시피 되었으며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현재 캄보디아 내 법정에서 폴 포트 시절의 대량학살 관련 재판이 진행중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훈센의 실용노선이 대세를 이루어 김영삼 정부시절 이미 정식국교를 맺었으며, 현재 여러 관로를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간절한 투자의 손짓을 하고 있어 가능성이 많은 이곳에의 진출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충분한 연구와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넌다는 견실한 자세가 요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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