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두하는 사랑(에로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는 높은 강도의 자극과 긴장으로 가득 찬 쾌락이지만, 이는 실은 모든 자극이 사라진 죽음의 상태를 맛보는 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쾌락원칙은, 정신 기관을 자극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그 속에 있는 자극의 양을 일정한 수준이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능에 봉사해서 작동하는 어떤 경향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기능이 모든 살아있는 물질의 가장 보편적인 노력, 즉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
사랑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 또는 그냥 간단히 말해 극도의 흥분은 결국 흥분이 소멸된 죽음의 상태를 맛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쾌락은 없으며, 사랑의 배후에는 늘 모든 긴장과 집중된 에너지의 소멸을 갈망하는 죽음에의 충동이 사랑을 작동시키는 모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왜 트리스탄이 사랑의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을 원했는지 알 것 같다. 또한 이졸데가 연결해놓은 세 가지 개념,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의 의미심장한 고리 역시 알 것 같다. 정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은 자신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불쾌한 에너지의 긴장을 무화(無化)하려는 죽음에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쾌락이란 극도로 강화된 흥분의 소멸을 통해 이 죽음 한 조각을 맛보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랑을 하고 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삶의 배후에는 놀랍게도 끊임없이 무(無)로 되돌아가려는 자, 바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구체적인 인생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는 원리로서 ‘익명의 죽음’이다. 이 익명적 죽음에 실려 때로 추락하기 위해 높이까지 사랑의 에너지를 쌓아 올리거나, 때로 집중된 에너지를 낮추기 위해 고안된 것에 불과한 표상을 마치 그 자체 진리이기나 한 듯 바라보는 그런 인생들이 흘러간다. 죽음은 이렇게, 신나게 뽐내며 행진하는 삶을 커튼 뒤에서 몰래 엿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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