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해당되는 글 54건

  1. 2022.02.17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백범 김구
  2. 2016.07.09 수사학 Rhetoric
  3. 2014.06.21 세계인권선언
  4. 2013.11.19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전문
  5. 2013.11.19 칼 마르크스 (Karl Heinrich Marx) & 마르크스주의(Marxism)
  6. 2013.11.17 디오게네스(Diogenes BC 412~323)
  7. 2011.11.25 <상처 받지 않을 권리>에서 더 읽어볼 책으로 추천하는 도서들
  8. 2011.05.31 클레오파트라 7세
  9. 2011.05.31 율리우스 카이사르 4
  10. 2011.05.0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plex) 2
  11. 2011.04.27 에이미 멀린스 Aimee Mullins 2
  12. 2011.04.24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3. 2011.04.16 프루스트의 질문 (질문에 대한 답변 - 프루스트, 마르크스, 마르케스, 맑스의 답변)
  14. 2011.04.16 북크로싱(Book Crossing)운동 2
  15. 2011.04.02 리비도(Libido)적 쾌락과 오이디푸스(Oedipus)적 쾌락
  16. 2011.03.24 광주 인화학교 - 소설 도가니 실제사건
  17. 2011.03.13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마오쩌둥
  18. 2011.02.19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1
  19. 2010.12.20 포정해우(庖丁解牛) 2
  20. 2010.12.14 디스토피아 [dystopia]
  21. 2010.12.14 사디즘 [sadism] (가학음란증, 가학증), 마조히즘 [masochism]
  22. 2010.12.14 아나키즘 [ anarchism ]
  23. 2010.12.14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Zapatista National Liberation Army]
  24. 2010.12.14 노마디즘 [nomadism]
  25. 2010.12.11 파토스 [pathos]
  26. 2010.12.10 아포리즘, 철학을 위한 아포리즘 1
  27. 2010.12.10 에로스와 타나토스 1
  28. 2010.12.10 코뮌주의와 그 비판
  29. 2010.12.05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 프로파간다의 힘
  30. 2010.12.04 크메르루즈 [Khmer Rouge] -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친애하는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 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 3차 전쟁은 온양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아들을 또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위험이 닥쳐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랴!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한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 뿐 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흑왈 남정, 흑왈 북벌 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희망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현실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촉발된다 하여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왜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새 상전들의 투지를 북돋울 것이요, 옛상전의 귀염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 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 중에 유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공포 중에서 죄인과 같은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 망덕하는 자라고 힐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신문 기자 리처드 씨의 입장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 하겠느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 써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 써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고 내정 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써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우리에게 남북 통일의 완전 자주 독립을 줄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이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 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나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하여 써 세계 평화 수립을 순리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없적을 한국 독립 운동 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 민족 간에 있어서 영원한 은의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잇는 것이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 써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 위원단을 미혹하게 하기에 전심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난익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써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매독의 인진회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합병하던 당시의 국제 정세는 합병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 지사들이 생명을 도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도쿄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 위원 단이 금일에 단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써 한국의 원정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며, 유엔 위원단 제공을 한인과 영원히 불해의 원을 뱆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하게 만든 새 일회는 자손 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사갱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 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순식 만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도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 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 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 정부를 중앙 정부하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 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사 망념은 해인 해기할뿐이니, 통일 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3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요,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지하자! 소불인이면 난대모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 보자.

3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을 사리 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 재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 뿐이다. 악착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 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에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 하나 일생을 독립 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 유 3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한독당을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 할 것이요,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3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 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 본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 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하라.

대한 민국 30년 (1948)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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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Rhetoric

생각/내용 2016. 7. 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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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기법

 

1. 비유법

1) 직유법 :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물과 직접 비교하는 기법

예) 강철 같은 근육과 부싯돌 같은 마음

예) 그것은 가뭄의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2) 은유법 : 두 가지 사실을 동일체로 단언하듯이 표현하는 기법

예)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고난의 길이다.

예) 생선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3) 의인법 : 무생물과 동물, 식물 등에 사람의 의지나 감정, 사상 등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는 표현 기법

예) 이제 봄이 온 모양이다. 꽃은 웃고 나비는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예) 천지여, 말하라! 산천이여, 대답하라!

4) 의태법 : 모습이나 움직임을 그 느낌이나 특징에 따라 표현하는 기법

예) 여성의 아름다움을 흔히 반짝반짝 빛나는 눈매에서, 방실방실 웃는 웃음에서 혹은 포동포동 한 살결에서, 보들보들 윤기 나는 입술에서 찾습니다.

5) 성유법 : 사물의 소리나 사람의 음성을 그대로 흉내 내어 현장감을 살리는 기법

예) 그 큰 바윗덩어리가 쩍 하고 갈라지지 않겠습니까?

6) 풍유법 : 비유의 말이나 예를 제시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본뜻을 미루어 짐작하도록 하는 기법

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7) 인용법 : 남의 글이나 말을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이해시키는 기법

예)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8) 대유법 : 나타내려는 명칭을 다른 명칭으로 대신 사용함으로써 은연중 본래의 사물을 나타내는 기법

예)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 앞에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9) 상징법 : 정작 자신이 표현하려는 본래의 의도를 숨기고 암시로만 그치는 기법

예) 인생이란 화려한 장미를 꺽으려다 앙상한 낙엽을 안고 돌아오는 방랑길에 비길 수 있다.

10) 중의법 : 말 한마디에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뜻을 곁들여 나타내는 기법

예) 그는 음식점에서 갈비탕을 먹고 돈을 내지 않은 채 뺑소니 친 뒤 버스 속에서 소매치기로 돈 30만원을 훔쳤으며, 어느 실직자로부터 취직 미끼로 5백만원을 받아먹다가 쇠고랑을

찼습니다.

11) 모순법 : 서로 모순되는 말의 연결로 특별한 의미를 갖도록 표현하는 기법

예) 나는 그 친구가 평소와는 달리 귓속말로 소곤대는 척하며, 공개된 비밀을 떠벌리는 그 잔인한 친절에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습니다.



2. 강조법

1) 영탄법 : 크게 감명을 받거나 또는 비통한 경우를 당했을 때 감탄어를 사용하는 기법

예) 오호라! 민족의 청사여!

예) 아! 어찌 우리 잊으랴! 통곡의 그날을!

2) 과장법 : 어떠한 사물을 사실보다 크게 표현하거나 또는 실제보다 작게 표현하는 기법

예)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실수가 있는 법이다.

예) 그 일에 대해선 티클만큼도 미련이 없습니다.

3) 점진법 :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처럼 점차적으로 그 뜻이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기법

예) 여러분은 성냥을 살 권리가 있다. 따라서 성냥을 켤 권리도 있다. 불을 켤 권리가 있으면 물건을 태울 권리도 물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권리 행사는 마치 성냥을 들고 켜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의 자유에 있는 것이다.

4) 역설법 : 모든 사람이 옳다고 믿거나 혹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을 뒤집어 반대 주장을 관철시키는 방법

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5) 대조법 : 나타내고자 하는 사물과 반대되는 사물, 혹은 고저 강약의 한도가 서로 다른 사물을 비교시켜 사물의 상태나 흥취를 한층 강하고 선명하게 하는 기법

예) 충언(忠言)은 벗을 만들고, 감언(甘言)은 벗을 잃게 한다.

6) 열거법 : 서로 비슷한 구절이나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말을 되풀이하거나 나열해 놓는 기법

예) 어릴 때 나는 푸른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조건 부러웠습 니다. 그리하여 기차 역무원이 되거나 순경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관사가 되는 게 꿈이었죠.

7) 반복법 : 두 번 세 번 같은 구절,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인상을 깊게 하는 표현 기법

예) 나는 비범한 문재(文才)가 내게 있기를 원한다. 나는 참으로 절세(絶世)의 학문이 내게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백 천 배 더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단 한번의 뜨거운 열애 (熱愛)이다.

8) 미화법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좀 더 아름답게, 추한 것도 아름답게 미화하는 표현 기법

예) 윈스턴 처어칠은 몹시 화가 나서 상대방 의원에게 거짓말장 이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칠은 의장의 발언 취소 요구를 받았습니다. 의회에서 거짖말장이라는 말은 금지된 언사였습니다. 그러자 처칠은 정중히 발언을 취소한 다음 이렇게 고쳐 말했습니다. 불확실한 말의 제공자라고..

9) 억양법 : 처음엔 말소리를 올렸다가 나중에 내리거나 혹은 일단 내렸다가 나중에 올림으로써 본래의 내용을 강조하는 기법

예) 그는 재주는 비상하지만 인간성이 나빠요

10) 단절법 : 접속되는 어귀를 일부러 짧게 자르고 하나하나 독립시킴으로써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기법

예) 애수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사랑이란 얼마나 고귀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껏 잊히지 않은 그 여인을 찾아가기로 결심 했습니다.



3. 변화법

1) 인용법 : 격언, 고사, 속담, 남의 말 등을 끌어다가 자기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또는 내용의 충실성을 기하는 기법

예) 불행에 대한 특효약은 없다고 헉슬리는 말했습니다.

2) 생략법 : 말의 핵심이 되는 부분만을 요령 있게 이야기함으로써 함축의 미와 여운의 멋을 풍기는 기법

예)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3) 도치법 : 말의 순서를 뒤바꾸어 강조하려는 부분을 앞에 놓는 기법

예)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4) 설의법 :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임에도 고의로 의문 형식을 취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기법

예) 여러분 가운데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는 잠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5) 문답법 : 처음에 정의를 세워놓고 나중에 물어보는 형식으로 말한 뒤 다시 그 물음에 답하는 식의 표현 기법

예)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다. 그렇다면 정신이란 무엇이냐? 정신이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다.

6) 경귀법 : 기발한 말귀로 익살, 암시, 교훈의 뜻을 내포시키는 기법

예) 나무에 잘 오르는 놈은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헤엄 잘 치는 놈은 언젠가 물에 빠져 죽게 마련이지요.

7) 완곡법 : 간곡히 말할 수 있는 것을 돌려 말하거나 노골적인 인상을 주지 않도록 표현하는 기법

예) 플랫폼에서 흰 손수건을 흔들며 떠나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사랑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8) 불판법 : 같은 말의 반복이나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상황을 리드미컬하게 표현하는 기법

예) 시가 나오고, 그림이 이루어지며, 음악이 나래를 폅니다.

9) 연쇄법 : 앞의 말이나 뜻을 이어받으면서 쇠사슬처럼 상황을 엮어서 설명하는 기법

예) 권태로운 여성보다 더 불쌍한 것은 슬픔에 싸인 여인이다. 슬픔에 싸인 여인보다는 더 불쌍한 것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성이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성보다 더 불쌍한 것은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이다. 병을 앓고 있는 여인보다는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받은 여성이다.

10) 비약법 : 진행 중이던 화제를 돌연 다른 화제로 바꾸거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비약시키는 기법

예) 그날 따라 명동 거리는 더없이 화려했습니다. 정확히 3년 전 바로 그 시각에 나는 어느 시골의 적막한 오솔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왜 갑자기 그 오솔길 이야기를

꺼냈는지 아십니까?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4. 스피치 할 때 세부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방법

1) 예시

2) 통계

- 긴 숫자는 반올림해서 사용한다.

- 통계 수치의 의미를 부연 설명한다.

-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 통계 자료의 출처를 밝힌다.

3) 증언





수사학과 비판적 사고(Rhetoric and Critical Thinking)

 

 

김 영 정 (Young-Jung Kim)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철학박사

한국논리학회장, 한국인지과학회장 역임

 

 

 

. 철학적 수사와 소피스트적 수사

수사학(rhetoric)은 설득(persuasion)의 방법에 대한 탐구이다. 설득의 방법론으로서의 수사학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맥락에 따른 상황적응성에 대한 강조와 언어적 표현의 설득적 힘에 대한 강조를 꼽을 수 있다.

수사학은 설득에 있어서 청자의 상황을 고려하고 그에 적합한 언어를 선택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했던 소피스트들이 탄생시킨 학문이다. 일부의 소피스트들이 언어의 힘을 악용함으로써 반 수사적(anti-rhetoric) 전통이 성립했지만,소피스트들이란 동일한 주장이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상황과 방식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은 청자 중심적 상황론자들이었다.

본래 수사가인 레토르(rhetor)는 청자의 마음에 쾌감을 일으키는 음유 시인이 아니라 참된 사고의 전달자였다. 수사학은 연설과 토론의 기술에 관한 탐구로 출발했다. 민주주의가 일찍 꽃 핀 고대 그리스에서대화와 토론은 생활의 일부였고, 법정이나 대중 연설에서 청자를 설득하는 기술은 출세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시학(poetics)이 시인의 언어가 쾌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주는) 그 신비스런 현상에 대한 탐구였다면, 수사학은 참된 사고를 전달함으로써 청자의 생각과 태도에 변화를주는(,‘ 설득을하는) 방법에대한탐구였다.

, 수사학의 주된 목적은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 보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가능한 폭넓은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전달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청자의 상황을 비롯한 담론의 환경과 표현적인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수사가 속임수와 동일시된 것은, 사고적 요소들이 논리학으로 넘어가고 표현적인요소만이 남게 됨으로써였다. 수사학이 변질되는 역사는 논리학과 시학 사이에서 수사학의 정신이 실종되어 갔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고의 보편적 형식에 대한 탐구에만 몰두했던 전통 논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비판적 사고 운동은 논리적 전통과 수사적 전통의 결합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실종된 고전 수사학의정신의 복원인 것이다.

 

 

수사에는 두 얼굴이 있다. 그 부정적 측면은 경계의 대상이 되지만, 그 긍정적 측면은 비판적 사고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수사는 주어진 문제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을 구상하는 종합적 사고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 사고력이속임수 추리와 같은 것으로 나타날 때는 변질된 소피스트적 수사가 되지만, ‘비판적 추리로 나타날 때는 수사학의 본래 정신이 발현되는 때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적 사고와 수사학 간의 의미 있는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논의의 환경에 대한 고려가 표현에 적극적으로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수사학의 본래 정신이었고, 수사학이 표현적인 요소들을 중히 여긴 것은 논의의 상황 및 환경에 대한 추리의 결과였을 따름이다. 상황에 적합한 설득의 전략을 구상하는 추리력이 수사력의 바탕에 있었지만, 이 추리력이 참되고 정의로운 것을 지향하려는 성향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청자의 태도만을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지향하기 시작할 때 수사학은 변질의 역사를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수사학이 가진 두 얼굴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좋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서 단지 언어의 힘만으로 상대의 믿음, 욕구, 행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반면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합당한 이유를 바탕으로 한 설득의 행위에 있어서 언어의 종류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하는 태도이다.

 

비판적 사고는 완결된 사고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고이며 끊임없이 자기 교정을 시도해 가는 과정의 사고이다. 비판적 사고에서 수용할 수 있는 수사란 항상 정의롭고 올바르고자 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언어적 전략으로서의 수사이다. 단지 표현의 기법만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와 연관되는지, 사태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를 항상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요구된다.

 

수사학은 상대의 지적 수준이나 감정적 상태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적인 요소들에 대한 고려를 참됨과 정의로 움의 토대 위에서 수행할 때 비판적 사고와 만날 수 있다. 수사학은 단지 기법의 학문이 될 때 궤변론으로 전락하면서 철학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상황이 배제된 사고의 보편성만을 추구했던 전통 논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개별적인 상황에서 사고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사고의 논리를 다루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수사학과 시학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한자어수사(修辭)’가 변질된 의미로의‘rhetoric’에 대한 번역어임을 지적하고 고전 수사학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적합한 번역어의 문제를 거론한 연구로 김헌의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 :시의 언어표현과연설의언어표현,

 고전수사학의전통(II)(한국서양고전학회2004년춘계학술대회) : 1~21쪽을소개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요소로 로고스(logos), 즉 논증적 요소, 파토스(pathos), 즉 정서적 요소, 에토스(ethos), 즉 윤리적 요소, 세 가지를 들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Rhetorik, I, 1356 이하). 설득은 가르치다(docere)와 움직이다(movere)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가르침은 참됨을 기본으로 갖고 있기에 정당한 논거를 포함하며, 또한 가르치기 위해서는 사실을 정확히 나타내는 표현력을 요구한다. 이 둘은 모두 로고스적인 것들이다. 다른 한편 독자(청자)의 움직임을 위해서는 독자(청자)와의 공감대가 바탕이 되기에 공감적 표현(pathos)과 화자의 바람직한 윤리적 태도(ethos)가 요구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사학적 기술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즉 논거 발견술(inventio), 논거배열술(dispositio), 표현술(elocutio), 기억술(memoria), 연기 술(actio)이다. 이 중 기억술과 연기술은 현대에 들어와 거의 다루지 않고 우리 주제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나머지 세 가지 중 논거발견술은 착상, 구상 등으로도 표현되며 이 논거발견술과 논거배열술이 궁극적으로 사고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표현술은 사고를 언어로 전환시키는 능력인데, 근대 수사학은 주로 공감적 측면의 표현술만을 탐구함으로써 문체론으로 대표되는줄어든 수사학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페렐망 등의 신수사학은 사고와 표현의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 비판적 사고 운동이라고 할 때, 상황 적응력과 언어 표현력 그리고 도덕적 성향을 그 구성 요소로 가지는철학적 수사는 비판적 사고 연구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철학적 수사와 소피스트적 수사에 대한 대조는 이미 그리스 시대 플라톤의 대화편인테아이테토스편에도 나타나 있다.

 

소피스트들은 남을 이기는 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법을 가르칠 뿐이다. 소피스트들은 지연, 혈연에 얽매여 있고, (사색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법정에서 논쟁 같은 것을 통해 세상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인(부모) 앞에서 노예와 논증을 벌여 일정한 시간 내에 결론을 내리고 승리를 이끌어 내야한다. 이 때문에 늘 피해망상에 걸린 사람처럼 어릴 때부터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이것저것 쌓은 지식으로 대단한 지혜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지혜롭지도 정직하지도 못한 삐뚤어진 마음의 소유자이다.

반면, 철학자들은 지연,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일에도 초연하기 때문에 사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은 어떤 주제에 대하여 정해진 결론을 무리해서 이끌어 내야 할 까닭이 없다.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자기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 논리를 펴야 할 까닭도 없다. 철학자는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해 대화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철학자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 테아이테토스,172b~177c 요약).

 

. 과학적 이유는 항상 좋은 이유인가?

설득은 청자에게 태도의 변화를 유도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설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장에 대한좋은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주장에 대해라는 질문을 할 때는 그 주장의 근거를 묻는 것이다. 주장에 대한 근거 혹은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주장을 정당화하는 행위이며, 이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득의 행위가 논증이다.

논증에서 청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이유이다. 비판적 사고의 연구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수사학은 상황에 따라좋은이유가 달라질 수 있음을, 즉 동일한 이유라도 그것들의 제시방식이 설득력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비만인 사람에게 다름 아닌 A 회사의 우유를 권장하는 이유로,

(1)“ A회사의 우유는 다른 회사의 것들과 비교해서 동일한 영양 성분을 가지면서도 훨씬 더 저지방이다.” 고 말하는 것은A 회사의 우유를 선택해야 하는 좋은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설득의 유형은 새로운 믿음, 즉 비만과 저지방 간의 과학적 연관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다. 반면에,

 

(2)“ A 회사의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더라.” 고 말하는 것은 앞의 것과 비교해서 좋은 이유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될 수 있다. 비판적 사고자는 과학으로 확인될 수 있는 믿음과 증거들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득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더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2)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더 설득적일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저지방과 비만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 더 설득적일 수 있다. , 화자와 청자 간에 공유되는 지식의 정도에 따라 설득의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철수의 할머니는비만저지방이라는 개념들과 그것들 간의 과학적 연관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러할 때 철수는 (1)의 방식보다 (2)의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할머니의 믿음과 태도를 변화시켰다고 해보자. 철수는 수사적 고려를 한 것이다.

이 경우 설득을 당한 사람이 비판적 사고자가 아니라고 주장될 수는 있어도, 설득을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경우는비판적이란 개념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게 된다. 설득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2)의 방식으로 말한 것은 듣는 사람의 지식수준을, 즉 논의의 상황과 환경을 고려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만이 설득에 최선의 언어임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고려된 것이며 이는 상황에 대한 종합적 판단의 결과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적 사고자의 성향에 관한 로버트 에니스(Robert Ennis)의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비판적 사고자는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상황에 맞게 증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비판적 사고를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의사 결정에 초점을 맞춘 합리적이고 반성적인 사고로 정의하면서 비판적 사고자는 다음과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한다.

 

(a) 자신의 믿음이 참인가, 그리고 자신의 결정이 정당화되는 데 관심을 가진다. , 가능한 한 올바르고자 노력한다.

(b) 자신의 입장뿐 아니라 타인의 입장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제시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c)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고려한다. 넓게 보면, 수사적 태도는 상대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주장의 근거는 과학적이어야 하지만 상대에 따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사고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행위가 설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아는 것이 수사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좋은이유가 상황 의존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고려하고자 하는 태도는, 비록 에니스는수사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수사적 태도이다.

과학적 지식이 몸에 배면 밸수록, 또 사회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설득의 대상과 그 내용은 더 복잡해 질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제시되는 근거들도 훨씬 더 정보적일 것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진술에서도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되느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고려하는 것도 비판적 사고자의 태도에 속한다. 과학자들 간의 관례에 의해 지배되는 문맥에서 과학을 논할 때는 가능한 객관적 논조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른바 학술적 담론의 청중은 대개의 경우 동료 과학자들이다. 관찰과 결과를 기술하고 그것들이 도출되는 실험적 방법,예컨대 통계적 분석이나 수학적 분석 등을 언급하는 것은 동료 전문가들을 설득하기 위한 담론의 유형이다. 이때 작가는 과학의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반면에“A회사의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더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의 맥락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학에 대해 말하는 것(talking about science), 과학의 맥락에서 말하는 것(talking in the context of science)을 구분해야 한다.

(2)의 방식, “A 회사의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은 건강해 보이더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학의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의 맥락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덜 과학적으로 사고했다거나 제시된 이유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이 반드시 도출되지 않는다. 추리의 질은 추리자가 내놓은 말과 글에 나타난 증거들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청자의 지식수준을 고려하고자 하는 성향, 즉 수사적 성향이 사고자 안에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니스는비판적사고자를, 이러한 성향까지 지닌 자로 정의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데 (2)의 방식으로 말한 것이 과연 비판적 사고자의 태도일까 하는 의문을 여전히 가질 수 있다. 물론 상대의 지적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비판적 사고자란 과학적인 문맥에서 대화를 시도하고 저지방과 비만의 관계를 알려주고 그럼으로써 상대를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2)의 방식으로 말한 사람은 (1)의 방식으로 말한 사람보다 상대에게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보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비판적 사고자이다. (2)의 방식으로 말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한 것에만 만족한다면 소피스트적인 수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2)의 방식으로 말하지만 만일 화자가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사가 아니다.

(2)의 방식으로 말한 사람이 비만과 저지방이라는 개념들, 그리고 그것들 간의 관계 등을 포함해서 상대에게 설명해야 할 것들을 더 많이 갖게 되는 이유는, 그와 청자 간에 공유되는 지식이나 믿음의 양이 매우적기 때문이다. , 이 경우는 화자와 청자 간에 지적인 거리가 크기 때문에 요구된 수사이다. 수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

 

() 자신의 수사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한다.

()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지적 책임감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비판적 사고자는 자신의 수사에 대해 보다 많은 설명이 요구되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따라서 수사적 태도는 언제든 가능한 질문과 대화에 열려져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비판적 사고자는 참된 것을 알려주기 위해 취해져야 할 설득의 단계 및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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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

생각/내용 2014. 6. 21. 16:00

전문 

인류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다.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해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케 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은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리라.


유엔헌장은 이미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했고, 보다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진보를 촉진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도대체 인권이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유엔총회는 이제 모든 개인과 조직이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지속적인 국내적 국제적 조치를 통해 회원국 국민들의 보편적 자유와 권리신장을 위해 노력하도록,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기준’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4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6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 없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8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9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별받을 때,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정에서 공평하고 공개적인 심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11조 범죄의 소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보장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공개재판을 통해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권리가 있다.


12조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


13조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


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


15조 누구나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누구든지 정당한 근거 없이 국적을 빼앗기지 않으며, 자기 국적을 바꾸거나 다른 국적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16조 성년이 된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17조 모든 사람은 혼자서 또는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20조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20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21조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23조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25조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26조 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과 기초교육은 무상이어야 하며,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우선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27조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학문적 진보와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


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29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진다. 


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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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문(마르크스-엥겔스) -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 K. marx, F. Engels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A spectre is haunting Europe)--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집권당으로부터 공산당이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당이 있는가? 또한 그 공산주의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자기의 반동적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보다 진보적인 다른 반대당에게 되돌려지지 않는 반대당이 있는가?

이 사실로부터 두 가지 점이 도출된다.

1. 모든 유럽의 열강은 이미 공산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했다.

2.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당 자체의 선언을 통하여 전세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성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그 옛날이야기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알맞는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여러 국적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런던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을 초안하고 이를 영어, 불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I.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각각의 싸움은 그때마다 대대적인 사회의 혁명적 재편 또는 경쟁하는 계급들의 공동파멸로 끝났다.

이전의 역사적 시대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가 다양한 질서, 잡다한 사회적 서열의 등급으로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에는 귀족, 기사, 평민, 노예가 있었고, 중세에는 봉건영주, 가신(家臣), 길드장인, 직인, 도제, 농노가 있었다. 이들 계급의 거의 대부분은 또 부수적인 등급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봉건사회의 폐허로부터 싹튼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계급적대를 없애지 못했다. 단지 낡은 것들 대신 새로운 계급, 새로운 억압의 조건, 새로운 투쟁형태들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부르주아지의 시대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계급적대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전체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대 적대적 진영으로, 서로 직면하고 있는 양대 계급으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중세 농노로부터 초기 도시의 시민이 생겨났으며, 이 시민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최초 분자들이 발전해 나왔다.

아메리카의 발견, 케이프 항로의 발견은 떠오르는 부르주아지를 위한 신선한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동인도와 중국의 시장,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식민지와의 무역, 교환수단의 상품의 전반적인 증가는 상업과 해운업 및 공업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격을 가하였으며, 또 그럼으로써 비틀거리는 봉건사회내의 혁명적 요소에게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폐쇄적 길드가 산업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봉건적 산업체계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시장이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를 대신한 것이 곧 매뉴팩처 체계였다. 길드장인은 매뉴팩처 중간계급에 의해 밀려났으며, 서로 다른 자치적 길드들 간의 분업은 사라지고 각 공장 내에서의 분업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시장은 꾸준히 성장했으며, 수요 또한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뉴팩처조차도 이제 불충분한 것이 되었다. 또한 증기와 기계가 산업생산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켰다. 매뉴팩처의 위치는 거대한 현대산업으로 대체되고 산업 중간계급의 위치는 산업 백만장자, 전체 산업부대의 지휘관, 현대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산업은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길이 트인 세계시장을 확립했다. 세계시장은 상업, 해운업, 육상교통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발전은 거꾸로 산업의 확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공업, 상업, 해운업, 철도가 확장되는 것과 똑같은 비율로 부르주아지는 발전했으며 자신의 자본을 증가시켰고, 중세시대로부터 이어 내려온 모든 계급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현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긴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환양식에서의 일련의 혁명이 낳은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지의 각 발전단계에는 그에 상응하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진보가 뒤따랐다. 봉건귀족의 지배하에서는 피억압계급으로, 중세 코뮨에서는 무장자치단체--어느 곳에서는 자립적 도시공화국(이탈리아와 독일), 또 어느 곳에서는 군주의 과세대상인 것제3신분겄(프랑스)--로 있던 부르주아지는 이후 메뉴팩처 시기에는 귀족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대군주들의 초석으로서 반(半)봉건군주 또는 절대군주에 봉사했으며, 현대산업과 세계시장이 확립되면서부터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현대국가의 집행기구는 단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사를 관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지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켜 왔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것타고난 상하관계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것현금지불관계겄로만 만들어 놓았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의 환희, 기사도적 열정의 환희, 세속적 감상주의의 환희를 자기중심적 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 속에 빠뜨려버렸다. 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으며, 결코 무효화될 수 없이 공인된 무수한 자유 대신 저 자유무역이라는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를 세워 놓았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정치적 환상으로 가려진 착취를 적나라하고 후안무치하고 노골적이고 야수 같은 착취로 대체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지금까지 존경과 경건한 경외심으로 받들어졌던 모든 직업으로부터 그 후광을 걷어냈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과학자를 자신이 보수를 주는 임금노동자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가족으로부터 그 감정의 장막을 찢어내고 가족관계를 단순한 돈의 관계로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복고주의자들이 그토록 경애해마지 않는 중세시대의 야수같은 힘의 과시가 어떻게 하여 가장 게으른 나태로써 훌륭히 보완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과연 무엇을 낳을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예였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 피라밋이나 로마의 수도(水道), 고딕 성당을 훨씬 능가하는 기적을 이룩했다. 이전의 모든 민족대이동이나 십자군 따위의 견주지도 못할 원정들을 감행한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생산도구를 혁명적으로 개조하고, 그럼으로써 생산관계를 개조하며, 또 그와 더불어 사회관계 전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 반면,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들에게는 낡은 생산양식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자신의 1차 존재조건이었다. 끊임없는 생산의 혁명적 발전,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의 이전의 모든 시대를 구분 짓는 특징이다. 모든 고정되고 꽁꽁 얼어붙은 관계들, 이와 더불어 고색창연한 편견과 견해들은 사라지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딱딱한 것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거룩한 것은 모두 더럽혀지며, 마침내 인간은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실제 생활조건, 자신과 인류의 관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산물을 팔 수 있는 시장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으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누벼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가는 곳마다 둥지 틀고 자리잡고 연고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착취를 통하여 각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범세계적인 성격을 부여해왔다. 복고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감이겠으나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발 밑으로부터 산업이 딛고 서 있는 일국적 기반을 빼앗아냈다. 기존에 확립된 모든 일국적 산업들은 이미 파괴되었거나 나날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 모든 문명민족들이 생사를 걸고 도입하려 하는 새로운 산업, 이제 더 이상 토착 원료자원을 가공하지 않고 가장 먼데서 온 원료자원을 가공하면서도 그 생산물은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구석에서 소비되는 새로운 산업이 그 낡은 산업들을 몰아내고 있다. 그 나라의 생산물로 충족되던 낡은 욕구 대신에, 먼 나라 먼 토양의 생산물로 충족될 수 있는 새로운 욕구가 생겨난다. 낡은 지역적, 민족적, 단절과 자급자족 대신 모든 방면에서의 상호교류 민족들간의 보편적 상호의존이 나타난다. 이는 물질적 생산뿐 아니라 정신적 생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별 민족의 지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차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민족적, 지역적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가 급속히 향상되고 교통수단이 엄청나게 개선됨으로써, 가장 미개한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을 문명화시킨다. 상품의 저렴한 가격은 모든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미개인의 매우 고집스런 증오를 굴복시키는 대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할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가지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할 것 즉, 부르주아 자체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 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자신의 모습 그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시골을 도시의 지배에 복속시켰다. 부르주아지는 거대도시들을 만들었고, 농촌에 비해 도시인구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이를 통해 상당 부분의 인구를 농촌생활의 백치상태로부터 구출해냈다 .또한 시골이 도시에 종속되도록 만든 것과 똑같이 미개국과 반미개국들이 문명국들에게, 농민의 나라가 부르주아의 나라에게, 동양이 서양에게 종속되도록 만들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 생산수단, 재산의 분산된 상태를 점차 제거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인구를 한데뭉치고, 생산수단을 집중시켰으며, 재산을 소수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정치적 집중이 이루어졌다. 개별적 이해관계와 법률, 정부, 조세제도를 갖고 있던 독립적 지역 또는 그것들과 대충 관련된 지역들은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조문, 하나의 일국적 계급이해, 하나의 국경, 하나의 관세를 지닌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한 자신의 지배기간 동안 이전의 모든 세대들이 이루어낸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창출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력의 복속, 기계, 공업과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기선, 철도, 전기통신, 경작을 위한 전 토지의 개간, 운하 건설, 땅에서 솟아난 듯한 거대한 인구--이전세기에 그러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품속에 잠자고 있으리라고 예감이나마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가 딛고 서 있는 토대인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은 봉건사회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들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이 특정한 발전단계에 이르자, 봉건사회가 생산하고 교환하는 조건, 농업과 제조업의 봉건적 조직, 한마디로 말해, 봉건적 소유관계는 이미 발전되어 있는 생산력과 더 이상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그만큼의 질곡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져야 했으며, 실제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자유경쟁이 대신 들어섰으며, 또 자유 경쟁에 맞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가 뒤따랐고,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뒤따랐다.

지금 우리 눈앞에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생산관계, 교환관계, 소유관계를 가지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사회,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출현시킨 이 사회는 자기가 주술로 불러낸 명부(冥府)세계의 힘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산업과 상업의 역사는 오직 현대적 생산조건에 대한, 또 부르주아지와 그 지배의 존재조건인 소유관계에 대한 현대적 생산력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나면서 갈수록 더 한층 위협적으로 전체 부르주아사회의 존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 상업공황만을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공황에서는 기존 생산물뿐 아니라 이전에 창조된 생산력의 거의 대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또한 이전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전염병, 즉 과잉 생산의 전염병이 번지게 된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마치 기근이나 전면전의 황폐로 인해 모든 생존수단의 공급이 차단된 것처럼 된다. 산업과 상업은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도한 문명화, 과도한 생존수단, 과도한 산업, 과도한 상업 때문이다. 사회의 수중에 있는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조건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데로 향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생산력은 소유조건에 비해 너무 강력해져서 오히려 그것에 의해 질곡당하며, 질곡을 극복하자마자 생산력은 부르조아사회 전체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 부르주아사회의 여러 조건은 생산력이 만들어낸 부를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러한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대향 파괴를 강화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정복하고 기존의 시장을 더욱 철저하게 착취함으로써 극복한다. 달리 말해 그것은 보다 범위가 넓고 보다 파괴적인 공황을 위한 길을 닦으며, 공황을 예방하는 수단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을 죽이는 무기를 주조했을 뿐 아니라 이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인 현대 노동계급, 곧 프롤레타리아들도 탄생시켰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이들은 일거리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키는 한에서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 노동자는 다른 보통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조금씩 팔아야 하는 하나의 상품이며, 따라서 경쟁의 성패 여하에, 시장의 동요 여하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기계의 광범위한 활용과 분업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모든 개인적 성격을 잃었으며, 그 결과 노동자에 대한 매력도 사라졌다. 노동자는 이제 기계의 부속물이며,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가장 단순하고 가장 단조로우며 가장 쉽게 획득한 기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그가 자신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식시키는데 필요한 생존수단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상품의 가격, 곧 노동의 가격은 그 생산비용과 같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해 느끼는 반발심이 강할수록 임금은 감소한다. 그뿐 아니라 기계의 사용과 분업이 증가할수록, 노동시간이 연장되거나 주어진 시간 내에 강제된 노동량이 증대하거나 기계 속도가 빨라지거나 하는 등으로 인해 고통스런 짐 또한 증가한다.

현대산업은 가부장적 장인의 작은 작업장을 산업자본가의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공장으로 결집된 노동자대중은 군대식으로 편성된다. 그들은 산업군대의 사병(私兵)으로써 장교, 하사관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위계의 지휘하에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계급, 부르주아국가의 노예일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시간이 갈수록 기계에 의해, 관리자에 의해, 무엇보다도 개별 부르주아적 공장주 자신에 의해 노예화되고 있다. 이러한 전횡은 영리가 그 목표이자 목적임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면 할수록 더 한층 인색해지고 증오스러워지고 쓰라린 것이 된다.

육체 노동에 필요한 기술과 발휘되는 힘이 줄어들수록, 바꿔 말해서 현대산업이 발전할수록 더 한층 남성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된다. 연령과 성별의 차이는 더 이상 노동계급에게 사회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연령의 성별에 따라 사용하는 값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노동의 도구인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자에 대해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노동자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게 되자마자 부르주아적의 기타 부분, 즉 집 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등이 노동자에게 달려든다.

도매상, 상업주, 일반적으로 은퇴한 상인들, 수공업자와 농민 등 중간계급의 하층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들의 영세자본으로는 현대산업이 움직이는 규모를 감당할 수 없고, 대자본가와의 경쟁에서 뒤쳐지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전문화된 기술이 쓸모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계급의 인구로부터 충원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발전단계를 거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나자마자 부르주아지와의 투쟁도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근로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한 지역의 직공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생산조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에 대해서 공격을 가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과 경쟁하는 수입품을 쳐부수며, 기계를 산산조각내고, 공장을 불지르며, 사라져버린 중세시대 근로자의 지위를 무력으로 회복하고자 한다.

이 단계에서 노동자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자기들 간의 상호경쟁으로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모여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결과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게다가 아직 당분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적, 즉 절대군주제의 잔재인 지주, 비산업부르주아, 쁘띠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체 역사적 운동은 부르주아적 수중에 집중된다.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모두 부르주아지를 위한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증가할 뿐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노동의 모든 차이들을 소멸시키고 거의 모든 곳에서 임금을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감축시키는 것과 비례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대열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활조건은 더욱 더 평준화된다. 부르주아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상업공황이 일어나면서 노동자의 임금은 갈수록 동요하게 된다. 기계가 급속히 발전하고 끊임없이 개선되면서 노동자의 생활은 갈수록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개별 근로자와 개별 부르주아 간의 충돌은 갈수록 두 계급간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반대하는 결사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하며, 임금율을 높이기 위해 한데 뭉치고, 때때로 일어날 충돌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단체를 창건한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은 폭동으로 터지게 된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 수단으로 인해 여러 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수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바로 이 접촉이야말로 같은 성격을 지니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을 계급들간의 하나의 전국적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중세 시대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 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그 단결을 한 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 년간 이룩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계속 저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수록 항상 다시 솟아오르며, 강해지며, 굳어지며, 거세지고 있다. 그 조직은 부르조아지 자체의 분열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특정한 이해에 대한 입법적 승인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10시간 노동법안이 통과되었다.

기존 사회의 계급들 간에 일어나는 모든 충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과정을 촉진시킨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항상적인 싸움속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귀족과, 이후에는 부르주아지 가운데 산업의 진보에 대해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된 일부분과, 그리고 외국의 부르주아지와는 항상, 싸움을 벌여왔다. 이 모든 싸움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을 정치무대로 끌어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기자신의 정치교육과 일반교육의 요소들을 공급하게 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무기를 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본 대로 지배계급의 모든 분파들은 산업의 진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자신의 존재조건을 위협당하게 된다. 이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과 진보의 새로운 요소를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르게될 때 지배계급 내부에서, 아니 사실상 기존 사회 전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붕괴과정은 매우 격렬하고 강렬한 성격을 띠게 되므로 지배계급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미래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혁명적 계급의 편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찍이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부르주아적 한 부분, 특히 역사적 운동 전반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린 부르주아적 사상가들의 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넘어온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현대산업이 전진함에 따라 몰락하며 결국 사라져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의 특수하고도 본질적인 산물이다.

중간계급 하층, 소규모 공장주, 상점주, 기능공, 농민 등 이들 모두는 중간계급의 각 부분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고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후진시키려 하기 때문에 반동적이기도 하다. 간혹 그들이 혁명적인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전락이 임박했음을 예감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현재 이익이 아닌 미래 이익을 수호하며,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낡은 사회의 최하층에서도 내팽개쳐진, 수동적으로 썩어가는 대중인 것위험한 계급겄, 사회적 쓰레기는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인해 곳곳에서 운동 속에 휩쓸릴 수 있으나, 그 생활조건 때문에 그들은 거의가 반동적 음모에 의해 매수되는 도구의 일부가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건들 가운데 낡은 사회의 조건들은 대부분 이미 사실상 곤궁에 처해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재산도 없고, 처자와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적 가족관계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으며, 영국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미국에서나 독일에서나 현대적 산업노동, 자본에 대한 현대적 종속으로 인해 그는 일체의 민족적 성격을 잃어버렸다. 그에게 법, 도덕, 종교 따위는 바로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편견과 똑같으며, 그 뒤에는 그만큼의 부르조아적 이익이 매복해 있을 뿐이다.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은 사회의 대부분을 자신의 전유(專有)조건하에 종속시킴으로써 기존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기자신의 이전의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또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전유양식까지 폐지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생산력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획득하고 강화시킬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개인재산을 보호하고 보장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전의 역사적 운동은 모두 소수의 운동이며 소수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거대한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자주적인 운동이며, 거대한 다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 현 사회의 최하층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적 사회의 모든 상위층들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도 일어설 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의 투쟁은 처음에, 내용에서는 아니더라도 형식에서는 일국적인 투쟁이다. 따라서 각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연히 무엇보다 먼저 자국 부르조아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일반적인 발전국면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어느 정도 은폐된 내전을 추적하여, 그 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터져나오고 부르조아지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를 위한 토대를 놓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보았듯이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형태는 억압계급과 피억압계급간의 적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한 계급을 억압하려면 그 계급이 적어도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정한 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노제시대의 농노가 코뮨의 구성원으로 발전해 나갔듯이, 봉건적 절대주의의 멍에 속에 있던 쁘띠부르조아는 부르조아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노동자는 산업의 진보에 따라 떠오르기는커녕 자기 계급이 존재조건 아래로 더욱 가라앉는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며, 빈곤은 인구나 부의 증가보다 더 빨리 발전한다. 여기서, 부르조아지가 사회의 지배계급이 되거나 자신의 존재조건을 고압적인 법률로 사회에 강제하는 따위는 이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즉,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노예제 내에서 노예의 생존을 보장해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즉 노예가 자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노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으로 노예를 빠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지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이제 이 부르조아지 아래에서 살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조아지의 존재는 더 이상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위한 본질적 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타의적이기는 하지만 부르조아지가 촉진시키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 결사로 인한 혁명적 결합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산업의 발전은 부르조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그 발 밑에서 무너뜨리는 셈이다. 결국 부르조아지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일뿐이다. 부르조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양자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 원칙에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찬 부분으로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당들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형성시키고, 부르조아 지배를 타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데 있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이러저러한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관계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변화에 항상 종속되어 왔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부르조아적 소유의 편에서 봉건적 소유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은 소유 일반의 폐기가 아니라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은 게급적대에 기초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한 생산물의 생산, 전유 체제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의 이론은 사유재산의 폐지라는 단 하나의 문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한 사람이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사적으로 얻은 재산, 이른바 모든 사적 자유, 행동, 자주성의 기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아 왔다.

자기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이라니!

그것은 부르조아 재산형태에 선행하는 소기능공이나 소농민의 재산을 뜻하는가? 그것이라면 폐지할 필요도 없다. 산업의 발전이 이미 상당히 파괴해 왔고 지금도 나날이 파괴하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현대 부르조아적 사유재산을 뜻하는가?

그러나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재산, 새로운 착취를 위한 임금노동이 새로운 공급을 창출하는 조건이 없이는 증가될 수 없는 재산이다. 현재의 소유형태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적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제 이러한 적대의 양 측면을 검토해 보자.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생산에서 순수히 사적인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도 갖는다는 것이다. 자본은 집단적 산물이며, 오직 많은 구성원들의 공동 행동에 의해서만, 아니 궁극적으로는 전사회 구성원들의 공동행동에 의해서만 운동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은 사적인 힘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공동재산, 전 사회 구성원의 소유로 바뀐다고 해서 개인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변화되는 것은 단지 소유의 사회적 성격뿐이다.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잃는다.

이제 임금노동을 보자.

임금노동의 평균가격은 최저임금, 즉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겨우 생존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존수단의 양이다. 그러므로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전유하는 것으로는 단지 그 생존의 연장과 재생산만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노동생산물의 사적 전유를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잉여를 남기지 낳는다. 우리는 오로지 그러한 전유의 비참한 성격을 제거하고자 할뿐이다. 그러한 전유하에서 노동자는 단지 자본을 증대시키기 위해 살아가며, 지배 계급의 이익이 요구하는 한에서만 살아갈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산 노동은 축적된 노동을 증가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반면 공산주의사회에서 축적된 노동은 노동자의 생존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며 촉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르조아사회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지만, 공산주의사회에서는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 부르조아사회에서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종속적이고 개성을 갖지 못한다.

부르조아는 이러한 상태의 폐지를 개성과 자유의 폐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개성, 부르조아적 독립성, 부르조아적 자유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하에서 자유라 할 때 그것은 자유거래, 자유매매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매매가 사라진다면 자유매매 역시 사라진다. 자유매매에 관한 이야기, 그 밖의 자유 일반에 관한 우리 부르조아지의 것호언장담겄 따위는 모두,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단지 중세시대 속박된 상인들의 제한된 매매와 대비에서만 그러할 뿐, 매매, 부르조아적 생산 조건, 그리고 부르조아지 자체에 대한 공산주의적 폐지와 대비될 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당신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폐지하려 하는데 대해 경악한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9./10의 인구에게 사유재산은 이미 제거되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있는 이유는 순전히 그 9/10의 수중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회의 광범한 대다수에게 일체의 재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그 존재의 필요조건으로 하는 재산형태를 제거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재산을 제거하려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하려 한다.

노동이 더 이상 자본이나, 화폐, 지대로, 독점 가능한 사회적 힘으로 전화될 수 없게 되는 순간부터, 다시 말해 개인소유가 더 이상 부르조아적 소유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게 되는 그 순간부터 개성은 사라진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것개인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적 소유자, 중간계급 소유자를 뜻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사실 그런 개인은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사회의 생산물을 전유할 힘을 박탈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전유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힘을 박탈할 뿐이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노동이 중단되고 곳곳에서 나태가 우리를 덮칠 것이라는 반대가 있어왔다.

그러나 그에 따른다면 이미 오래 전에 부르조아사회는 순전히 게으름으로 인해 파멸해 버려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반대는 모두 자본이 없다면 임금노도도 있을 수 없다는 동어반복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 제기된 모든 반대는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적 생산물의 공산주의적 생산, 전유양식에 대해서도 제기되어 왔다. 부르조아지에게는, 계급적 소유의 소멸이 곧 생산 자체의 소명이듯이, 계급문화의 소명은 모든 문화의 소멸과 같다.

부르조아지가 잃고서 애통해하는 바로 그 문화란 실상 엄청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단지 하나의 가계로서 행동하기 위한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르조아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는 데 대해 당신이 자유, 문화, 법 따위 당신의 부르조아적 개념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한 당신은 우리와 말다툼할 필요가 없다. 당신의 법이란 것이 실상은 당신의 계급의지, 즉 당신 계급의 경제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그 본질적 성격과 방향이 규정되는 의지가 법제화된 것에 지나지 않듯이, 당신의 바로 그 사상 역시 당신의 부르조아적 생산조건과 부르조아적 소유조건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현재 생산양식과 소유형태--생산의 진보 속에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역사적 관계--로부터 나오는 사회적인 형태들이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인 것처럼 여기는 이기적이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에 선행했던 모든 지배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적 소유에서 당신이 똑똑히 본 것, 봉건적 소유에서 당신이 인정한 것을 물론 당신은 당신 자신의 부르조아적 소유형태의 경우에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라니! 공산주의자의 이 파렴치한 주장에는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까지도 분노하고 있다.

지금의 가족, 부르조아적 가족이 서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이며 사적 이익이다. 따라서 이 가족이 완전히 발전한 형태는 단지 부르조아지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이러한 상태가 진행되면 결국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가족이 실제로 사라질 것이며, 공창(公娼)만이 남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부모에 의한 자식의 착취를 중지시키려 한다고 해서 비난하는가? 그것도 죄라면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가정교육을 사회교육으로 바꾸려는 것을 모든 관계 중에 가장 성스러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하는 교육이란 뭔가! 당신의 교육 역시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의해, 학교 등을 통한 사회의 직, 간접적 개입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에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가? 공산주의자는 교육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입의 성격을 바꾸고, 지배계급의 영향으로부터 교육을 구출하려 할뿐이다.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성스런 관계 관한 부르조아적 말장난은 현대산업의 활동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모든 가족적 유대가 끊어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자식들이 단순한 상품이나 노동도구로 바뀌어갈수록 더욱 혐오스러워진다.

그렇지만 너희 공산주의자들은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는 게 아니냐고 전체 부르조아지는 소리 맞춰 악을 쓴다.

부르조아는 자기아내를 단지 생산도구로만 본다. 그는 생산도구는 공동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 들었으므로 자연히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운명이 여성에게도 닥치리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생산도구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없애버리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하려 한다는 여성공유제에 대해 우리의 부르조아가 실제로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거의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옛날부터 존재해 온 것이므로.

우리의 부르조아는 공창은 물론 자기 휘하에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부르조아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커다란 쾌락을 느낀다.

부르조아의 결혼은 사실상 부인공유제이다. 그러므로 설령 공산주의자가 비난받는다 하더라도 그 비난은 위선적으로 은폐된 여성공유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합법화된 여성공유제를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현 생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이 제도에서 생겨난 여성공유제, 즉 공창과 사창이 모두 폐지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나아가, 공산주의자는 나라와 국적을 폐지하려 한다고 비난받는다.

노동자에게는 나라가 없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해야 하므로, 해당 민족의 영도적 계급으로 떠올라야 하므로, 자신이 스스로 그 민족을 구성해야 하므로, 비록 부르조아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 자체가 민족인 것이다.

민족들 간의 민족적 차이와 적대는 부르조아지의 발전, 상업의 자유, 세계시장, 생사양식과 그에 따른 생활조건에서의 제일성 등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그것들을 한층 더 빨리 사라지게 할 것이다. 선진문명국의 통일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방을 위한 1차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에 의한 개인의 착취가 종식되는 것과 비례하여 민족에 의한 민족의 착취도 종식될 것이다. 민족 내에서 계급간의 적대가 사라질수록 민족간의 증오 또한 사질 것이다.

종교, 철학의 견지에서 또는 일반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견지에서 나오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도 없다.

인간의 관념, 견해, 생각, 한 마디로 인간의 의식이 그의 물질적 존재조건, 사회관계, 사회생활이 변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그리 깊은 직관을 필요하는가?

사상의 역사는 바로 물질적 생산이 변화하는 정도에 따라 정신적 생산이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를 변혁하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낡은사회 내에서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이 창조된다는 사실, 낡은 사상의 해체는 항상 낡은 존재조건의 해체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고대세계가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고대종교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 기독교 사상이 18세기에 이르러 합리주의 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사회는 당시의 혁명적 부르조아지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라는 사상은 단지 지식의 영역에서도 자유경쟁이 지배한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었다.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겁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도덕적, 철학적, 법적 사상은 역사발전과정에서 변형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 도덕, 철학, 정치학, 법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항상 살아남았다.겂

겁그밖에도 자유, 정의 등 어떠한 상회에도 공통적인 영원한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영원한 진리, 모든 종교나 도덕을 새로운 토대 위에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모순적으로 움직인다.겂

이러한 비난은 어디로 귀결되는가? 모든 과거 사회의 역사는 계급적대,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취했던 적대의 발전사였다.

그러나 그 형태야 어떠하든 과거 모든 시대에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곧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다종다양하다 하더라도 과거 시대의 사회적 의식은, 계급적대가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일정한 공동형태 또는 일반관념의 범위 내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공산주의혁명은 전통적 소유관계와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혁명의 발전은 전통적 사상과의 가장 근본적인 결별을 포함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부르조아적 반론에 대해서는 이쯤 해두자.

우리는 앞에서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조아지에게서 점차로 일체의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총생산력을 가능한 한 빨리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조아적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專制的) 침해를 통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무리한 듯이 보이지만 발전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뛰어넘어 낡은 사회질서에 대한 더 이상의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조치, 생산양식을 전면적으로 혁명화하는 수단으로서 불가피한 조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물론 나라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매우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으로 활용한다.

2. 소득에 대해 높은 누진과세를 적용한다.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6. 전달, 운송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한다.

7. 국가소유의 공장과 생산도구를 증대한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공동의 계획에 따라 토질을 개선한다.

8. 모두가 똑같이 노동의 의무를 진다. 특히 농업을 위한 산업군을 편성한다.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한다. 인구를 전국적으로보다 균등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차별을 점차 폐지한다.

10. 공립학교에서 모든 어린이를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현존하는 어린이의 공장노동을 폐지한다. 교육과 산업적 생산을 결합한다, 등등.

발전과정에서 계급적 파별이 없어지고 모든 생산이 광범위한 전국적 단체의 손에 집적되면, 공권력은 정치적 성격을 읽게 된다. 이른바 정치권력이란 본래 단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조직된 힘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조아지와의 싸움에서 상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계급으로서 조직하게 되면, 또 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으로 자라나고, 그 자체로 낡은 생산조건을 무력으로 없애버리게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되면, 그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들 생산조건과 더불어 계급적대와 계급 일반의 존재조건을 없애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적대의 낡은 부르조아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단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III.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

 

1. 반동적 사회주의

 

A. 봉건적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의 귀족들은 그들이 가진 역사적 지위로 인해 현대 부르조아사회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쓰는 것을 소명으로 하게 되었다. 1830년 프랑스 7월혁명과 영국의 개혁운동에서 이들 귀족은 다시 한 번 혐오스런 벼락부자에게 굴복했다. 그로부터, 중대한 정치투쟁은 매우 명약관화한 일이 되었다. 이들에게는 문헌투쟁만이 가능했지만 문헌의 영역에서조차 복고시기의 낡은 외침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귀족들은 겉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피착취 노동계급의 이익만을 쫓아 부르조아지를 고발해야 했다. 이와 같이 귀족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주인의 귀에 다가올 재난의 대한 불길한 예언을 속삭임으로써 보복을 꾀했다.

이렇게 하여 봉건적 사회주의는 생겨났다. 반쯤은 비탄으로 반쯤은 풍자로, 또 반쯤은 과거의 메아리로 반쯤은 미래의 위협으로, 때로는 신랄하고 재치 있는 가시 돋친 비판을 통해 부르조아지에게 철두철미 충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현대 역사의 행진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항상 우스꽝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귀족은 사람들을 자기 주위로 결집시키기 위하여 기치를 들고 프롤레타리아 자선함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릴 때마다 그들의 엉덩이에 봉건 문장(紋章)이 찍힌 것을 보고는 불경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프랑스 정통주의자와 것영국청년단겄의 일파도 이러한 희극을 연출했다.

봉건주의자는 그들의 착취양식이 부르조아지의 착취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그들 역시 이제는 낡아빠졌지만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에서 착취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는 현대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도, 현대 부르조아지가 그들 자신의 사회형태에서 나온 필연적 후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비판이 가진 반동적 성격을 거의 감추지 않기 때문에,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주된 비난은 부르조아 체제하에서 낡은 사회질서를 철저히 분쇄해 버릴 운명을 진 한 계급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부르조아지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유는 부르조아지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실천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모든 강압조치에 동참하며, 일상생활에서는 온갖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나무에서 떨어진 황금사과를 줍기 위해, 그리고 진리, 사랑, 명예를 양모, 사탕무우, 주정(酒精)과 맞바꾸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목사가 영주와 손잡고 나아갔듯이 성직자 사회주의는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잡았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는 원래 사유재산, 결혼, 국가를 비난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대신 박애와 빈곤, 독신과 신체적 금욕,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해 오지 않았던가? 기독교적 사회주의는 단지 성직자가 귀족의 불만에 대해 봉헌하는 성수(聖水)에 지나지 않는다.

 

B.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가 파멸시킨 계급,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대기 속에서 그 존재조건이 취약해지고 사멸한 계급은 봉건귀족만이 아니다. 중세의 시민이나 소농경영자는 현대 부르조아지의 선구자였다. 산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거의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에서 이들 두계급은 떠오르는 부르조아지와 더불어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현대 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에서 동요하며 부르조아사회의 보완물로서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쁘띠부르조아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이 계급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유경쟁으로 인해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현대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은 현대 사회의 독립적 부분으로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제조업, 농업, 상업에서의 관리자, 토지관리인, 상점주로 거의 바뀌는 순간까지 눈 앞에 두게된다.

농민이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프랑스 같은 나라들에서는,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에 서는 저술가들은 당연히 부르조아체제를 비판하는 데서 농민과 쁘띠부르조아의 기준을 사용해야 했으며, 이들 매개적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계급을 위해 곤봉을 들어야 했다. 이리하여 쁘띠부르조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 학파의 지도자는 시스몽디였다.

이 사회주의 학파는 현대 생산조건의 모순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했으며, 경제학자들의 위선에 찬 변명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리고 기계와 분업의 파멸적 결과, 소수에게로의 자본과 토지 집적, 과잉생산과 공황을 논쟁의 여지없이 입증했다. 또한 그들은 쁘띠부르조아와 농민의 불가피한 몰락, 프롤레타리아트의 고통, 생산의 무정부성, 방치할 수 없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 국가들간의 파멸적 산업전쟁, 낡은 도덕적 유대의 해체, 낡은 가족관계, 낡은 국적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설사 그 긍정적인 목적에서 보더라도 이 사회주의 형태는 낡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 및 이와 더불어 낡은 소유관계와 낡은 사회로 되돌아가고자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에 의해 파괴되어 왔고 또 파괴될 수밖에 없는 낡은 소유관계의 틀 내에 현대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가두고자 한다. 양자 어느 경우이거나 반동적이며 공상적이다.

그 최후의 주장은 제조업에서의 법인길드, 농업에서의 가부장적 관계이다.

결국 완강한 역사적 사실이 자기기만의 도취상태를 흩어버렸을 때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우울증의 비참한 발작으로 끝나버렸다.

 

C. 독일 사회주의 또는 것진정한겄사회주의

 

* 여기서 진정한의 뜻은 말뿐임을 말함.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권력을 갖고있는 부르조아지의 억압하에서 생겨났으며 그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의 표현이었다. 이 문헌들은 독일에서 부르조아지가 봉건 절대주의와의 경쟁을 막 시작했을 무렵 독일로 유입되었다.

독일 철학자, 자칭 철학자, 그리고 재담꾼들은 이 문헌들을 열심히 읽어댔지만 이 저작들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올 때 프랑스의 사회적 조건이 같이 옮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고 말았다. 독일의 사회적 조건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들 프랑스 문헌은 직접적인 실천적 의의를 모두 일었으며 순수히 문헌적인 의미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8세기 독일 철학자에게 제 1차 프랑스 혁명에서 나온 요구들은 것실천이성겄 일반의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혁명적인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의지의 발현 또한 그들의 눈에는 순수의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의지,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인간의지의 법칙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독일 저술가의 저작은 오로지 그들의 고대철학적 양심에 새로운 프랑스 사상을 조화시키는 것,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버리지 않으면서 프랑스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접목은 외국어가 사용되는, 즉 번역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수도사들이 어떻게 고대 이단(異端)의 저작들이 쓰여 있는 원고 위에 가톨릭 성자들의 따분한 생애를 덧썼던가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 저술가들은 세 속의 프랑스 문헌을 가지고 이러한 과정을 거꾸로 밟았다. 그들은 프랑스 원본 아래 자신들의 철학적 헛소리를 써넣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인간의 소외겄를 써넣었고, 부르조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 비판서 아래에는 것추상적 보편자의 예위겄를 써넣는 식이었다.

프랑스의 역사비판서에 이러한 철학적 문구들을 삽입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것행동의 철학겄, 것진정한 사회주의겄, 것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겄, 것사회주의의 철학적 토대겄 따위의 작위를 수여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문헌은 완전히 알맹이가 빠져버렸다. 또한 독일인의 손에서 이미 그 문헌은 한 계급과 다른 계급의 투쟁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독일인은 것프랑스의 편향겄을 극복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요구가 아니라 진리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이 아니라 인간본질의 이익을, 즉 아무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실체도 없으며 단지 철학적 환상의 모호한 영역에만 존재하는 인간 일반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 독일 사회주의는 국민학교 숙제를 상당히 심각하고 근엄하게 받아들이며 그 빈약한 재고품을 협잡에 가득한 양태로 격찬하는 가운데 점차 그 현학적인 무지를 잃어갔다.

봉건귀족과 절대군주에 대항하는 독일인의 투쟁, 특히 프러시아 부르조아지의 투쟁,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로써 것진정한겄사회주의가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기회, 즉 정치적 운동을 사회주의적 요구와 대결시키며, 자유주의에 대해, 대의정부에 대해, 부르조아적 경쟁, 부르조아적 언론의 자유, 부르조아적 입법,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통적인 파문(破門)을 명하고, 대중에게 부르조아 운동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읽은 것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 비판의 단조로운 모방이면서도 프랑스 비판이, 바로 독일에서의 임박한 투쟁이 이루려는 목적인 부르조아사회의 경제적 존재조건과 이에 적합한 정치구조를 가진 현대 부르조아사회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때마침 잊어버렸다.

절대주의 정부 및 이에 딸린 목사, 교수, 지방 유지와 관리들에게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부르조아지의 협박에 대항하는 안성맞춤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 정부가 바로 그 당시에 독일 노동계급의 봉기에 대해 투약했던 채찍과 총탄이라는 쓰디쓴 약을 달래주는 달콤한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것진정한겄사회주의는 정부를 위해 독일 부르조아지와 싸우는 무기로서 역할 하는 동시에, 반동적인 이익, 독일 속물들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16세기 의 유물이자 그때부터 계속 다양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던 쁘띠부르조아계급은 현 상황의 현실적인 사회적 토대이다. 독일에서 이 계급의 존속은 곧 기존 상황의 존속을 뜻한다 .부르조아지의 산업적, 정치적 지배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적으로 인해,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으로 인해 쁘띠부르조아지에게 일정한 파멸의 위협을 가한다. 이들에게 것진정한겄 사회주의는 이 두 마리 새를 하나의 돌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화려한 수사(修辭)의 꽃으로 수놓아지고 창백한 감상의 이슬에 함빡젖은 사색의 거미줄 같은 의상,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것영원한 진리겄라는 말라빠진 그들의 육신을 감추기 위한 이 선험의 의상은 대중 속에서 그들의 상품 판매량을 놀랄 만큼 증대시키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편으로 독일 사회주의는 점점 더 쁘띠부르조아 속물의 허풍스런 대변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인식해 갔다. 독일 사회주의는 독일 민족을 모범 민족으로, 그리고 독일 속물들을 전형적인 인간으로 주장했다. 이 모범 인간이 가진 약간의 야비한 구석이라도 보이면 독일 사회주의는 그것을 실제 성격과는 정 반대로, 은폐되고 고상한 사회주의적 해석을 가했다. 또한 장황하리만치 공산주의의 것야수같은 파괴적겄 경향을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모든 계급투쟁에 대해 고상하고 공평한 경멸을 표했다. 몇 가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1847) 독일에서 돌아다니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모두 이러한 비열하고 무기력한 문헌의 범주에 속한다.

 

2.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조아 사회주의

 

부르조아지의 일부는 부르조아사회의 지속적 생존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회적 불만요인을 개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속하는 이들로는 경제학자, 자선가, 인도주의자, 노동계급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자, 자선의 조직자, 기타 온갖 종류의 하찮은 개혁가들이 있다. 나아가,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완전한 체계로 발전되어 왔다.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이러한 형태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타자맨 主: 맑스는 프루동의 겁빈곤의 철학겂을 혹독하게 비판한 겁철학의 빈곤겂이라는 저작을 남긴바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조아는 현대 사회적 조건의 모든 장점을 원하지만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투쟁과 위험은 배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그 혁명적이고 붕괴적인 요소를 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없는 부르조아지를 원한다. 부르조아지는 당연히 자신이 패권을 쥐고 있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조아지 사회주의는 이 안락한 생각을 어느 정도 완전한 여러 체계들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러한 체계에 따를 것, 그리하여 사회적 신(新)예루살렘으로 곧장 행진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기존 사회의 테두리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부르조아지에 대한 그들의 모든 증오에 찬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보다 실천적이지만 보다 덜 체계적인 이 사회주의의 또 다른 형태는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조건, 경제 관계의 변화만이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노동계급의 눈앞에서 일체의 혁명운동을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존재조건의 변화라고 할 때, 이러한 사회주의 형태는 그것을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부르조아 생산관계의 폐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산관계의 지속적 유지에 기초한 행정개혁으로만, 따라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기껏해야 부르조아 정부의 비용을 줄이고 행정업무를 단순화하는 정도의 개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부르조아 사회주의는 단지 하나의 비유가 될 때, 오직 그때에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자유무역,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보호관세,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감옥 개량, 이것이 부르조아 사회주의의 마지막 말이자 유일하게 진지한 말이다.

그것은 다시 다음의 한 문구로 요약된다. 부르조아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부르조아이다.

 

3.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모든 대혁명마다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를 소리높여 외쳐왔던 바뵈프 등의 저작과 같은 문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음으로 직접 시도한 것은 봉건사회가 불과하고 있던 전반적 격동기였다. 하지만 당시 프롤레타리아트는 미발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행방을 위한 경제적 조건--당시 아직 생성되지 않았으며, 임박한 부르조아 시대에 의해서만 생성될 수 있는 조건-도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운동들을 추종했던 혁명적 문헌들도 반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극히 조잡한 형태로 보편적 금욕주의와 사회평준화를 가르쳤다.

본래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인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의 체계는 앞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간의 투쟁이 발전되지 않은 초기 시기에 생겨난다(I절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라).

이들 체계의 설립자들도 사실 지배적인 사회형태속에서 와해요소의 활동뿐 아니라 계급적대까지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유아기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떠한 역사적 창의성도, 어떠한 독자적 정치운동도 갖지 못한 계급의 모습으로 보인다.

계급적대의 발전은 항상 산업의 발전과 보조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경제상황은 아직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조건을 창출할 새로운 사회과학, 새로운 사회법칙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행동은 그들의 사적인 창의적 행동으로 대체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해방의 조건은 환상적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계급조직은 그 발명가들에 의해 특수하게 고안된 사회조직으로 바뀐다. 그들이 보기에 미래 역사는 결국 그들의 사회적 계획의 실천이자 그 실천적 실행일 뿐이다.

계획을 구성하는 데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인 노동계급의 이익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란 오직 가장 고통 당하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그들 자신의 환경의 미발전된 상태로 인해 그러한 종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계급적대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들은 사회 모든 구성원들, 심지어 가장 형편이 좋은 사람들의 조건조차 개선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습관적으로 계급구분 없이 사회전체에게, 아니 우선적으로는 지배계급에게 호소한다. 하기야 일단 그들의 체계를 이해하고 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장 가능한 사회상태의 가장 가능한 계획임을 알지 못하겠는가?(타이핑맨 主 :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풍자적 독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그들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잘한 실험들이나 사례의 힘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으려고 애쓴다.

그렇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매우 미발전된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입장에 대한 환상적인 생각마을 가지고 있을 무렵에 그려진 미래 사회의 상상화는 산회의 전반적 재건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본능적 기지개에 상당한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출판물들은 또한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그것들은 기존 사회의 모든 원칙을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노동계급의 계몽을 위한 극히 중요한 자료들로 가득차 있다. 도시와 농촌간의 구별 폐지, 가족의 폐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산업경영의 폐지, 임금제도의 폐지, 사회적 조화의 주창, 국가기능의 단순한 생산감독 기능으로의 전화등 거기서 제기되는 실천적 조치들은, 당시에 겨우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이들 출판물에서는 초기적이고 불명확한 형태로만 인식되었던 계급적대의 소명을 지적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제안들은 순수히 공상적인 성격을 띤다.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중요성은 역사발전과 역관계를 취한다. 현대 계급투쟁이 발전되고 특정한 형태를 취해갈수록, 투쟁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이 환상적인 입장, 투쟁에 대한 이 환상적인 공격은 모든 실천적 가치와 모든 이론적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비록 이들 체계의 창시자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혁명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보적 역사발전에 반대하여 스승들의 원래 견해를 굳게 고수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적대를 해소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 이상향을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꿈꾸며, 고립된 것팔랑스떼르겄,것공동부락겄,것작은 이카리아겄--신예루살렘의 축소판--를 건설할 것을 꿈꾼다. 그들은 공중누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조아의 자비와 지갑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점차로 그들은 앞서 서술한 반동적인 보수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단지 보다 체계적인 현학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기들 사회과학의 기적적인 효과에 대한 미신적인 광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그들과 같은 범주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동계급의 편에 선 모든 정치적 행동을 격렬히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행동은 새로운 복음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영국의 오웬주의자,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은 각각 차티스트와 개혁파를 반대한다.

 


IV. 기존의 여러 반대파에 관한 공산주의자에 입장

 

II절에서 이미 영국의 차티스트나 미국의 농업개혁가들과 같은 기존의 노동계급 당들에 관한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명확히 밝혀졌다.

공산주의자는 당면 목표의 달성을 위해, 노동계급의 당면한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싸우는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이 운동의 미래를 보여주고 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는 보수적 부르조아지와 급진적 부르조아지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대혁명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물려받은 문구나 환상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권리는 남겨두고 있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는 급진주의자를 지지하지만, 이 당의 일부는 프랑스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일부는 급진적 부르조아라는 적대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놓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는 농업혁명을 민족해방의 첫째 선결조건으로 주장하며, 1846년 크라쿠프 봉기를 주도했던 당을 지지한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가 절대군주, 봉건지주, 쁘띠뿌르조아지에 반대하여 혁명적으로 행동할 경우 이들과 함께 싸운다.

그러나, 부르조아지가 자신의 지배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사회, 정치적 조건을 독일 노동자들이 오히려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써 곧바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일 반동계급의 몰락 이후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투쟁 자체가 즉시 시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는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적대관계에 가장 명확한 인식을 노동계급에 주입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독일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은 부르조아혁명의 전야에 있으며, 17세기 영국이나 18세기 프랑스에 비해 유럽문명의 보다 선진적인 조건과 보다 발전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지고 부르조아혁명은 곧이어 뒤따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산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기존의 사회, 정치적 질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을 지지한다.

그 모든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는 각국의 발전정도와 관계없이 소유문제를 핵심적인 문제로서 전면에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는 어디서나 모든 나라 민주적 정당들의 통일과 합의를 위해 노력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견해와 목적을 감추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이 오직 기존의 모든 사회적 조건을 힘으로 타도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선포한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세상이다.(Let the ruling classes tremble at a Communistic revolution. The proletarian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win.)

 


전 세 계 노 동 자 여, 단 결 하 라 !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UNITE!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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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독일어: Karl Heinrich Marx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공산주의 혁명가역사학자경제학자철학자사회학자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라인란트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그 가문의 성은 원래는 모르데카이(Mordechai)였으나 마르쿠스(Markus)로 고쳤고 다시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기독교로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중 집필의 궤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고등학교 시절 쓴 세 편의 소논문이다. 그 중 세 번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라면 의무, 자기희생, 인류의 안녕, 완성에 대한 숙고에 입각해야 하며, 이런 종류의 관심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련의 불안들과 연결시켰다. 마르크스는 열 일곱 살 때부터 이상적인 결정과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결정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1]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였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으며, 결국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2]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베를린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게서 미학적, 철학적 혁명의 방안을 찾고자 하는 브루노 바우어 등의 헤겔좌파, 혹은 청년헤겔학파와 교제하였는데 당시 그의 동료들은 박학다식함과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는 청년 마르크스의 똑똑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독일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철학은 단연 헤겔의 것이었다. 헤겔은 역사와 사회의 발전은 절대정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며 그 과정은 변증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절대정신의 대변자이자, 실현도구라고 보았으며, 그 보편국가가 프로이센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철학적 존재 이유를 제공했다.

이러한 헤겔에 대해 청년헤겔학파로부터 비판이 가해졌다. 그들은 헤겔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수용하면서도 절대정신을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라고 파악했다. 아울러 프로이센을 보편국가라고 주장한 헤겔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사상을 좌파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반체제적 혁명의 씨앗이 된다고 여긴 프로이센 정부에 인해 청년헤겔주의자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가해진다. 마르크스의 활동도 이에 영향을 받아 계속 제약되었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1841년에 청년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헤겔학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1836년 《기독교의 본질》을 비롯한 기독교 비판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전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정리, 헤겔철학에 과학적 요소를 부여하고자 했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청년좌파들과 반체제적 언론인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에 사고의 전환점, 특히 철학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 좀 더 나아가자면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다. 라인 지방 농부들을 취재하던 도중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기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3년에 《라인신문》은 폐간되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에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광고문구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가 독수리(프로이센)에게 괴롭힘당하는 그림으로 저항했다.

1843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을 발표하는데 청년헤겔학파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나,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에서 물질적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물론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에서 급진좌파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 시로 이주한다.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의 혁명적 집단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는데,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의인동맹(義人同盟, 독일어: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하는데,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쓴 것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적 일부가 이 당시 저술에 나타난다. 독일의 관념철학에서 벗어나 역사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에서 그는 유태인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해서》는 독일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프롤레타리아만이 역사적 과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파리수고(유고)'로 알려진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수고》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역할과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소외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의 소외론은 인간 해방을 갈구하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강조하는 학자들의 주장 근거가 되고 있다. 실제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소외된다고 《소외론》초판에서 주장했다. 이 해에 그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다. 파리 시절의 마르크스는 정열적으로 활동했으나, 급진적 인물이 체류하는 것을 기피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표한다. 600여 페이지의 방대한 저작인 이 책은 엥겔스와 공저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가득 차있다.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청년헤겔주의자와 결별을 선언하고 있으며 그들과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저작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최초로 체계적으로 서술했으며,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잉태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인동맹의 선언문으로서 발표된 것이다. 당시 이 조직은 블랑키와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비밀결사에서 공개조직으로 탈바꿈하려하고 있었다. 혁명적 이들에 의한 소수의 급진적 음모와 비밀결사를 선호하던 블랑키파와 그 주도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논쟁과 암투가 있었고, 결국 마르크스파가 다수가 되어 공산주의자동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들이 이런 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2월 혁명 덕분이었다. 혁명적 낙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인 단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당 선언 속에는 새로운 이론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과거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물에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확언을 선언문에 맞게 단순명료하게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에서 보이는 휴머니즘적 철학적 고뇌는 상당히 감소하고 정치경제학적 내용의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차례로 발표하는데, 계급 투쟁이 정치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잡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이 저작들은 경제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시각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850년대는 혁명을 즉,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시대의 흐름이 거꾸로 흐르는 수구반동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84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있던 유럽 경제는 1850년대에 들어와 호황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채굴된 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교통수단의 속도가 사람이나 의 힘을 이용할 때보다 빠른 증기 엔진이 운송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급진파들의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각적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 혁명의 절정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분파로 분열된 것이다. 후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완전히 습득하여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경제학이 성숙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본론》 집필을 구상해나가는 속에서 초고(Grundrisse)가 발견되었다.

이 초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적 발전과정과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원칙을 정리해 놓고 있다.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서는 비판적인 철학적(critical philosophy)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846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운동과 메커니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에 나온 《자본론》에 그러한 연구가 결집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까지 확대되어 형성된 사상이 역사유물론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 사상의 독특한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명석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으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과 사교생활을 좋아해 모든 친구들과 불화를 일으켜가며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고, 술집이 운집된 골목에서 술집을 모두 돌아다니다가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3] 그랬기에 마르크스를 존경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친우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엥겔스가 “그의 반대자는 많았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냉정하지는 않았고, 맑스가 논쟁에서 고집이 센 모습을 보였던 것도 모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당시 유럽 지식인들사이에서 난립하던 이상적 사회주의들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로 귀결하기 위함이었다는 평가가 있다.[4] 그 근거로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가 살던 시대에 난립하던 사회주의 조류들인 보수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사회주의, 추상적인 사회주의등을 풍자와 논박으로 비판한다.

맑스는 성격이 따뜻해서 자신도 어렵게 살았지만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었고, 어린이들을 좋아해서 딸 엘레노어에게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도, “예수가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5]

외적으로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이 부르주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가난’은 절대적 가난이 아니라, 부유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가난’이라는 얘기다. [3]

그가 호색한으로 애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 예니 베스트팔렌이 데리고 온 하녀 헬렌 다무스와의 관계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유명하다. 이에 대해 평생의 동지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다.”라고까지 선언하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프레데릭’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이는 후에 외과의가 되지만 프레데릭이 ‘위대한 예언자’의 아들이라는 별칭은 떨어지지 않았다. [6]

또한 마르크스는 주말이면 가족들과 산책을 하고 부인의 임종을 지킬만큼 처자식에게는 자상한 가장이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경원시했다 한다. 실제로 가난에 시달릴 때 유산을 염두에 두고 아픈 어머니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차피 병도 들고 살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맑스는 아버지 하인리히의 사진을 관에 묻히는 순간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맑스가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다기보다는 맑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맑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 근거로 맑스의 모친은 자본론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자본이나 만들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릴 때 죽은 아이들이 많고, 오직 일리노어와 로라, 제니 막스 세 딸만 성년으로 자랐다. 하지만, 일리노어는 1898년에 43살의 나이로자살하고 로라는 1911년에 66세의 나이로 자살한다. 제니는 1883년 심장병으로 39세에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도 프레데릭의 증손녀인 힐다 마르크스와 인터뷰한 러시아 기사에 따르면 사생아인 프레데릭의 손자는 나치 게슈타포로 활동하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했다.


흔히 맑스하면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서의 방황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 때문에 보수적인 종교인들로부터 반(反)종교적 인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은 종교가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현실도피적 경향을 나타내도록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민중들이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사회비판과 계급투쟁으로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맑스는 종교를 가리켜 민중의 환상적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종교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말이다. 실제로 민중들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적 억압과 착취를 계급투쟁으로 극복할 방법이 없을때는 하늘나라극락메시아미륵 같은 종교적 환상을 만들어낸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의 현실도피적 경향을 비판한 것이지 종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인본주의 존중

실제로 맑스는 딸 엘리노어가 교회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갖자 "부자들이 목수의 아들을 죽인 것"을 말해주면서도 "목수의 아들이 어린이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기독교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야."라고 말했다.기독교가 가진 자들, 권력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기독교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뜻이다. 현대 맑스주의도 기독교를 인본주의라는 공동가치를 화두로 대화해오고 있다. [5]


사회혁명

마르크스주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쟁을 통과했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킴으로써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는 정통으로 확립된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후 마르크스주의는 왜곡되고 이에 반발해 본래의 마르크스로 회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유럽에서 부상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아도르노 등이 주도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68혁명의 사상적 좌표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시련은 사상의 종주국 소련에서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이 아닌 타협을 모색하던 중,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추락한 것이다. 끝내 소련은 해체되고 마르크스주의도 매우 극적인 종언을 고하는 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정치이념이 형체도 없이 현실 정치에서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의 재평가

그러나 애초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극단의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탄생한 이상, 자본주의와 운명을 달리 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력은 특히 학문적으로, 여전히 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치밀한 분석력과 통찰력은 현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 필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자본주의 세계화와 계층화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탁월하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로 확장되면서 부자와 빈자,부국과 빈국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과잉, 공황의 문제 등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싫든 좋든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사회과학자라면 마르크스에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듯, 마르크스에게는 독보적인 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2005년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비판했고 여러 대안을 세울 수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면서 "그의 사상은 역사,사회를 바라볼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Marxism)

마르크스주의(Marxism)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공동으로 작업하여 완성되어진 학문이다. 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이론 및 정치이론이다. 당시 만연했던 사회주의 이론인 '프랑스 사회주의'와 프루동의 사회주의 이론같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탄생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저술한 '자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서도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을 여러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므로써 '현실 사회주의' 즉, 현대의 공산주의인 의미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적인 학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적인 철학개념은 변증법, 유물론, 잉여가치론, 노동가치설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순, 불의를 자본을 부정하므로써 없애겠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긴 현실적인 사회주의이며 여태껏 있어왔던 이상적 사회주의이자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와 반대로 노동자로 이루어진 정부를 두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기독교-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체계중 하나인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동작업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완벽한 사회주의적 유물론으로 재탄생하였다. 이렇게 유물론을 기본 철학개념으로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주의는 본래 유물론의 모든 물질은 '생각'을 가지고있고 그러한 물질들은 다른 물질들에 의한 정신으로 인해 또 다르게 탄생되었다는 철학개념에 의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뜻을 부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는 이러한 창조신에 대한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되어져 왔고 만약에 양립되어져 나온 학문이 있어도 그것은 사회주의에 속하지않은 종파사상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어졌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성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겉뿌리였던 사회주의와 그 사회주의안에 포함되었던 공산주의에서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계급해방은 당시 고위직에 속한 종교인에 대한 반감이었으므로 역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와 연계해서 볼 때 종교는 이 학문적 사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라져야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를 필두로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현재 보수적인 종교인들에 의해 배제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 즉, 모순이 드러나게 되자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립을 주장하기도하며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에 의한 사회구조적 모순과 불의를 없앤다는 의미는 성서의 구원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 한층 발전된 진보적인 개신교를 만들겠다는 목사들도 이러한 양립을 주장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부족한 면이있다.

 

 - 경제개념 -

 사실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 내건 국가들은 경제체제에 관해서 혼합경제체제도 아니고 시장경제체제도 아닌 계획경제체제만을 선호하게 되어있으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체제를 말하며 쉽게말해 공산주의의 경제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 학문들이 오고가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개념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개념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는 절대적인 정치사상으로는 쓰지않는다. 오로지 이 마르크스주의는 보조적인 위치에 놓여져있다.

 

 하지만 역시 자본주의식 경제체제로만 가게되면 역시 모순이 생기고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문제점이 나타나므로 선진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좌파계열 쉽게 말해 사회적 진보계열들의 아이콘과 같은 학문으로 여기고있다.

 

 - 정치, 사회개념 -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없으면 국가가 있을 수도 없으며 자본가도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그들을 사용하고 있으므로써 모든게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없으면 역시 돌아갈 수 없는 물레방아와 같다고 주장하며 자본가들을 취약한 인간체의 개념으로 여기고있다. 이러한 개념이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후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제를 주장하며 그 정치적인 방법을 뒷받침해준 학문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치, 사회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가들에 의해 미움을 받아도 충분한 사상이기는 하다.

 

 -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

 위에 설명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정치사상으로 내걸고 국가를 이끌게 된다면 경제체제는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의 경제체제가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산주의식 경제체제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러한 틀을 없앤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등소평은 사회주의 체제이면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식인 시장경제체제를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은 결국 주된 사상이었던 마르크스주의 즉 사회주의 체제를 하므로써 생기는 장점의 주된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버렸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시말해 주된 정치사상보다는 일부를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거나 보조적인 정치사상이 되어야 적당할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목표와는 다르게 '절대적인 사회주의체제의 공산주의 정권'을 목표로 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실현시키는 수단까지 서술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계급해방, 사회주의 실현은 모두 '폭력적 혁명'으로 실현해야하며 이것을 부정하는 자칭 사회주의의 사상들은 사회주의계열이 아닌 종파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있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표현보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중요시하며 어떠한 사상이든 그에 관한 폭력을 부정하는 민주주의에서와는 상반되게 사상을 위해서라면 폭력의 허용을 주장하고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면만 서술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사회주의 정권을 구축하는 모든 수단방법을 일러주고있다.

 

 - 대한민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 -

 대한민국에서는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긴다. 사실 틀린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모아놓은 학문이자 사상이고 공산주의는 그중에 경제와 정치의 혼합을 빼온 사상이다. 그렇지만 현재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체제인 '계획경제체제'를 주된 경제체제로 사용하게 된다면 역시 국가의 경제상태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실패성이 짙은 공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뜻으로 여기기 보다는 사회주의적 정치, 사회, 철학, 경제를 모두 혼합한 마르크스주의와 별개로 두는게 좋다. 또한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계획경제체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증시거품이 많아지고 시장의 자유가 심하여 규제가 필요할 때에는 계획경제체제에 속하는 경제이념을 실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경제체제를 100%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체제이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던 북한 즉,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OK)에 의해 침략을 받았던 나라이고 그들과 벌인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고 수차례 그들의 도발이 이어졌으므로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공산주의 즉 포괄적인 개념으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 북한은 정치, 사회적 또 철학적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라고 보기 어려우며 계급해방을 주장하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가 집필된 서적들은 향후 북한에서 반정부 단체를 낳게 할 우려가 있어 분서(焚書)된지 오래이다. 또한 북한의 헌법에 존재하는 공식이념은 '주체사상'이며 "주체사상의 행동강령으로 지목한다."는 '김일성주의'가 되며 곧 북한의 체제는 '김일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공생해야한다. 자본주의는 현재 공산권 국가를 제외한 주된 정치, 경제적 체제로 채택되었지만 그로인해 생기는 자본으로 인한 사회모순, 불의는 마르크스주의로 보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자본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자본가가 없으면 국고는 빈다는 것이고 모든 사회주의 계열 사상들의 공통점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들도 없다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공생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건전한 정치,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일단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핍박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나라, 프롤레타리아들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본주의에서처럼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윤이 불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도록, "함께 일하고 공평하게 나누자!" 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8:2로 나눈다면, 5:5로 나누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얘기죠.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 누군가가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면?
얘기는 달라지는 것이죠. 누군가는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하는데, 누군가는 복지의 혜택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마르크스는 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민주적 의회 정치로 정착시키려는 사상입니다.

 즉...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보수적인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진보적인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폭력과 혁명으로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의원 제도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온건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단어인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합니다.
즉, 공산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자본주의와 비슷한 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에서는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 마르크스 주의


마르크스주의는 경제관계(생산자-노동자)인 하부구조에 권력관계(지배자-피지배자)인 상부구조가 
귀속되어 있어서 하부구조에 따라 상부구조가 바뀐다는 경제(하부구조)결정론의 입장이구요. 
이에 반해 신마르크스주의는 경제결정론이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대응하는, 
즉 경제에만 관련되어 결정된다는 점을 비판하는 겁니다. 경제관계에 100%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하부구조에 상부구조가 종속되는 것을 모순된 사회구조로 보고 상부구조에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부구조들(국가, 교육, 언론, 군대, 경찰 등)이 자율성을 지니고 
이데올로기 주입으로 기존 질서를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는 이탈리아의 그람시헝가리의 루카치 등이 1920년대에 주장한 마르크스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1960년대의 신좌익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막스 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한 아도르노·마르쿠제에 의해 1930년대에 계승된 신좌익 사상이다.

초기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20세기 초반까지 최초의 논리적 사회주의 사상이란 이유로 그 명성을 얻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사회의 하부 구조인 경제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사회·정치 이론이 없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상부 구조인 사회·정치 이론을 정립화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를 중점으로 문제를 다뤄 신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신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 소외에 대해 주된 문제 제기를 하고, 휴머니즘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교육학용어사전

신마르크스주의

[ 新 — 主義 , neo-Marxism ]

모든 사회적 현상을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로 설명하려는 경제결정론적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고에 한정하지 않고인간의 주체적 인식과 해방적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의 마르크스주의적 노선.

흔히 정통 마르크스주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소련 공산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운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이론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고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워 독재체제를 이끌어 온 소련 공산주의의 왜곡된 이론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경험하는 인간소외를 극복하고 해방적 의식을 실현하려는 데 주된 관심을 바쳐 왔다.

그러나 「신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독특한 사상적 노선이라기보다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다원적 노선의 공통된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로는 루카치(G. Lucacs), 샤프(A. Shaff) 등과 같이 동구권의 학자들도 다소 있지만 대개가 공산국가가 아닌 지역의 학자들이다. 알뛰세(L. Althusser), 보울즈(S. Bowles), 진티스(H. Gintis) 등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블로흐(E. Bloch) 등의 신비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번스타인(E. Bernstein) 등의 경험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싸르뜨르(J. Sartre) 등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 프레이리(P. Freire) 등의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 W. Adorno), 마르쿠제(H. Marcuse), 프롬(E. Fromm), 하버마스(J. Habermas) 등의 비판이론적 마르크스주의, 그 외에인본주의로 일컬어지는 여러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로 인본주의, 소외이론, 관료주의 비판, 자본주의적 산업사회의 비판, 혁명에 있어서의 지식인의 역할 등에 이론적 관심을 두고 있다. 교육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사회체제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능, 억압적 문화의 구조, 소외의 개념, 실증주의의 도구적 합리성 등의 분석, 그리고 해방적 이성의 실현을 위한 문제 등에 관심이 주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마르크스주의 [新 — 主義, neo-Marxism]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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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고, 코린토스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당시 코린토스에는 유명한 어느 괴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나 학자들이 대왕에게 인사를 하러 왔지만 그는 오지 않았고,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코린토스 교외의 크라네이온으로 이 괴짜 철학자를 몸소 찾아 나서기에 이릅니다. 그는 양지 바른 곳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디오게네스입니다.

자신이 몸소 찾아왔지만 기척도 안하는 디오게네스를 보고, 알렉산드로스는 기분이 상했습니다. 
“나는 대왕 알렉산드로스다.”
“나는 개 같은 디오게네스요.”
“내가 무섭지도 않은가?”
“그대는 선한 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선한 자를 뭣 때문에 두려워 하겠는가?”
“그대가 바라는 것을 말해 보라.”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 주었으면 하노라.”

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종 무관들은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벌하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태연한 그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죠. '만약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나는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걸세'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 철학자는 권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행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리나 영혼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나고 몇 년 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안티스테네스(Antistehnes)가 아테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남루한 옷차림의 젊은 거지 하나가 교실로 들어와 안티스테네스에게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합니다. 학생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고, 안티스테네스 역시 단호하게 그 젊은 거지에게 나가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지는 막무가내였고 결국 거지의 고집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거지가 바로 디오게네스입니다.  그는 스스로 개와 같은 삶을 살면서 자신을 'Doggish Diogenes' 라고 불렀으며, 세상의 모든 관습과 편견을 조롱하며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곤 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개 같은 철학자', '빈정거리는 사람'(Cynic)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일생을 작은 통속에서 살면서 인생의 진리를 명상했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 犬儒學派 '의 원조로 불립니다. '견유학파'란 말그대로 개가 유유히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은 학파라는 말이죠. 개가 산책을 할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자연의 모든 것을 즐기고 느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동양으로 치자면 노자나 장자의 사상과 비슷할테지요. 무위자연, 즉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사는 거지요.


디오게네스는 흑해 연안의 시노페라는 도시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환전상이었는데요, 디오게네스와 그의 아버지는 돈을 위조하다 걸려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고향에서 쫓겨 난 디오게네스는 아테네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 오자마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안티스테네스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제자가 되었죠.

안티스테네스는 인간이 덕성을 갖추면 행복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돈과 향락 등 외형적인 가치판단을 배척하는 윤리적인 금욕을 제자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의 사상에 한발짝 아니 열발짝 더 나아가 결국 세상의 모든 재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냉소적인 철학자가 됩니다. 그는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하지만 부끄러움 없는 자족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독설, 말놀이를 즐기며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았고, 자신을 개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속에서 외톨이로 지냈습니다. 그는 방랑하며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았는데요, 사실 대낮에 램프를 들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진정한 인간을 찾기도 했다는 그의 일화들은 종종 해학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제자 그룹 중 주류라면, 디오게네스는 비주류에 속할 것입니다. 이 둘은 앙숙이었다고 전해지는데요, 플라톤이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정의하자, 그 소리를 들은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에게 털 뽑은 닭을 보내 그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플라톤이 욕망을 버릴 것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화려한 집에 사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했고, 비오는 날 플라톤의 화려한 침대위를 진흙 투성이의 발로 더럽혀 놓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플라톤은 디오게네스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욕을 했죠. 하지만 플라톤이 디오게네스를 그렇게 부름으로써 그를 소크라테스의 반열에 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디오게네스는 90세 가까이 되어 스스로 숨을 멈추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자신의 유해를 땅에 묻지 말고 맹수들의 먹이감으로 던져주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 말 이외에는 단 한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고, 죽을때는 단 한벌의 옷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보여준 디오게네스는 진정한 '무소유 철학자' 였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지금 운동 경기를 구경하러 가는 길입니까?"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경기를 하러 가는 중입니다."

물은 사람이 비웃으며 다시 물었다.

"도대체 누구와 경기를 하십니까?"

"바로 나의 기쁨 그리고 고통과 경기를 하지요. 수시로 덤벼 드는 욕망과 한 바탕 붙어 레슬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아십니까?

그 녀석을 붙잡아 땅으로 팽개쳐 버릴 때의 그 상쾌함이란!"

 

한 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적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적을 친구로 대접하시오. 우정이란 전염성이 무척 강한 놈이라서,

그 적도 얼마 안가 당신을 친구로 대접하게 될 것이오."

디오게네스의 낡은 누더기야말로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따뜻한 정신을 감싸고 있는 옷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어리석음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는 탁월한 지혜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보다 큰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생각한 탁월한 지혜의 결과는 다름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단순한 삶이었다.

 

그는 말했다.

"미리 준비하는 자만이 날카롭게 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을 가볍게 지나갈 수 있다."

이 말로 그가 뜻하고자 한 것은, 삶에서 적게 기대할수록 실망도 적어진다는 당연한 법칙이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다.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많이 소유하는 것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적게 가진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데에서 얻어진다.

적게 구하라, 그러면 너는 얻을 것이요 만족할 것이다.

많이 구하라, 그러면 너의 갈망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희대의 달변가이자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는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으며,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反)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가난하지만 늘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자제(自足自制)의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남루한 옷차림으로 백주 대낮에도 항상 램프를 들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 그 램프는 정직한 사람을 찾는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다. 

가짜 돈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고향인 시노페에서 쫓겨나 아테네로 가서 세계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 일컫는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자 퀴닉학파(견유학파)의 창시자인 안티스테네스의 문하생이 되었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인 안티스테네스에게 인간은 덕(德)을 위해서 살아야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선한 마음만 필요할 뿐 재산과 명성과 외모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 없음을 배웠다. 

디오게네스는 스승에게 배웠던 철학적인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도록 훈련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게 된다. 아무런 부족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神)의 특징으로,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그만큼 신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반(反)문명의 사상을 실지실행(實智實行)하며 그는 평생을 단 한 벌의 옷과 한 개의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집 대신 커다란 통 속에서 생활했다. 

정복 왕 대제 알렉산더와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 이 두 거인들의 운명적인 첫 대면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데, 

『 기원전334년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도시국가)의 대표들이 코린트에서 회합을 갖고 알렉산드로스를 아시아 출정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이에 명망이 높은 정치가, 유명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알렉산드로스를 알현(謁見)하고자 줄을 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예전부터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디오게네스를 불렀으나 오지를 않자 몸소 그를 찾아간다. 

나무통에 기대어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디오게네스에게 대제 알렉산드로스가 다가가 “내가 바로 대왕 알렉산드로스요.”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개(犬)인 디오게네스요.”라고 답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왜 개로 불리느냐?”며 묻자, “내게 무언가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짖어대며, 악한 자들은 물어뜯기 때문이요.”라고 답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이건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한 번 말해보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좀 비켜 주시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무안해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그런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했건만 알렉산드로스는 오히려 그때부터 디오게네스를 존경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만일 알렉산더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훗날 많은 사상가들은 이날의 두 사람의 만남을 일컬어 “얻으려는 자와 버리려는 자,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절묘한 만남”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 이윽고 이 두 사람은 같은 날 죽어 저승으로 가는 길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는데,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허망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말을 듣고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저승이란 곳은 정말로 불공평한 곳이로군. 대체 어찌 황제와 거지가 이토록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지?”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시오. 억울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당신은 평생을 세계를 구걸하며 떠돌았던 거지였지만 나는 내 고향에서 황제처럼 편히 살았다오.” 』 

어느 날, 광장에서 쉬고 있는 디오게네스에게 한 상인이 고기를 던져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그 고기위에다 한쪽 다리를 들고 개처럼 오줌을 쌌다고 한다. 참으로 디오게네스다운 행동이었다. 또 그는 시민들의 환심을 사려는 선동정치가들에 대해서는 ‘천민의 시중꾼’이라고 놀렸고, 축제 때 벌어지는 경연을 보고는 ‘바보와 말장난꾼들을 위한 잔치’라며 비아냥거렸다. 

디오게네스는 평소 사람들은 좋아 보이는 것만 바라고 기원하지, 진실 된 것을 바라고 기원하지 않는 것을 나무랐다. 

그는 독설과 말놀이를 즐기며 반(反)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냉소주의자였다. 자신의 관점에서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싫어해 그런 사람들을 늘 비판하였으며 또한 자신은 타인으로부터 개라고 비판받으면서 외톨이로 살았다. 부(富)를 싫어해 평생을 통나무 속에서, 평생을 방랑하며, 거지처럼 아무데서나 침식했지만 89세까지 건강하게 살았다. 

이러하듯 디오게네스는 늘 인간허무주의에 빠진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는 단지 독설로써 인간을 일깨우고 그의 이해받지 못할 행위로써 자신의 철학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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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에 서점을 갔다..  (0) 20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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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생애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15세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기원전 47~44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다.

기원전 48년 10월, 클레오파트라 7세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였다.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유다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 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뱀에 의한 자살, 독가스에 의한 자살, 타살, 에이즈(AIDS) 감염에 의한 병사(病死)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평가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이집트 여인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女傑)이었다는 관점이 있다. 



클레오파트라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파라오 율법에 따라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 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락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 찍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 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위의 그림에서 앨마 테디마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본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Cleopatra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몸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로마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The Death of Cleopatra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우리가 클레오파트라 라고 부르는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3세 이다 
이집트 왕조에서는 여왕이 제법 있었는데 고대 이집트 역사 연대기 문헌을 보면 
클레오파트라의 시대가 제법 있었다 
몇 명의 클레오파트라 라는 이름을 가진 여왕들 중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여왕이 
클레오파트라 3세 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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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Iulius Caesar영어: 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등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9~55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하였으며, 급기야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카이사르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쟁기내전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수에토니우스플루타르코스카시우스 디오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생애


유년기

카이사르는 귀족인 율리우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율리우스 씨족은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라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왕자 아이네아스의 아들 율루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집안이었다.[1]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코그노멘(cognomen, 가문 이름) "카이사르(Caesar)"는 조상 가운데 제왕절개 수술(라틴어로 '자르다'라는 뜻의 caederecaes-)로 태어난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2]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에는 다른 설명이 나오는데, 카이사르의 굵은 머리카락(caesaries)이나 밝은 회색 눈(oculis caesiis) 때문이라거나 혹은 그의 선조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전투 중 코끼리(무어말caesai)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3] 카이사르는 코끼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는데, 그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해석 가운데 코끼리와 관련된 해석을 좋아했다는 점을 암시한다.[4]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깊은 계보를 지녔으나, 정치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으며, 가문에서 배출한 집정관 수도 세 명에 불과하였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동명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공화정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법무관직까지 올랐으며,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아마도 매형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력 덕분이었을 것이다.[5]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는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또 카이사르의 가정 교사는 갈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문법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6] 카이사르는 누이가 둘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율리아였다. 카이사르의 유년 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카이사르 전기에 보면, 내용이 10대 때부터 시작하며, 두 책의 시작부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7]

카이사르의 유년기는 혼란한 시절이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 사이에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로마 시민권 문제를 놓고 동맹국 전쟁을 벌였으며, 그러는 사이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동부 속주를 위협하였다. 로마 정계는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갈라져 있었는데, 엄밀히 말해 두 파벌은 각자 공통적인 대의가 없어서 정당이나 정파와는 다르다. 벌족파는 원로원의 전통적이고 헌정상의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었으며, 민중파는 전통적인 과정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정치가들이었다.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벌족파였는데, 카이사르의 유년기 때 두 정치가의 대립으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동맹국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두 사람 모두 미트리다테스 정벌 전쟁에 지휘권을 원하였으나, 당초 술라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술라가 로마 도성을 떠나자 어느 호민관이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기는 법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주장하며 마리우스에게 망명을 강요하였으나, 술라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마리우스가 임시로 모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와 그의 정치적 동맹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도시를 장악하고, 술라를 공적(公適)으로 선언하였으며, 마리우스 군대는 술라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복수하였다. 기원전 86년 초에 마리우스가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지지자들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8]

기원전 85년 어느날 아침에 카이사르의 아버지는 신발을 신는 중에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죽자[9] 카이사르는 16살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유피테르의 고위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로 지명되었는데, 전임자인 메룰라가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 죽었기 때문이었다.[10]이 사제직에 오르는 사람은 귀족일 뿐 아니라 귀족과 결혼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기사 출신 가문의 평민 여자인 코수티아(Cossutia)와 어릴 때 맺은 약혼을 파기하고, 당시 민중파의 영수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였다.[11]

이때 미트라다테스와 협정을 맺었던 술라가 돌아와 돌아와 마리우스 지지자들에 대항한 내전을 종결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뒤 그는 기원전 82년 11월에 콜리나 대문의 전투로 로마를 장악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독재관에 임명하였는데, 전통적으로 6개월 동안 단 한 번 재직하는 독재관직과 달리 술라의 독재관직에는 임기 제한이 없었다. 마리우스의 상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마리우스의 시신은 무덤에서 파내어 티베리스 강에 던져졌다. 당시 킨나는 항명을 일으킨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미 살해된 상황이었다.[12] 술라의 처벌자 명단 공개로 그의 정적 수 백명이 죽거나 추방되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였던 카이사르 역시 명단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을 면하였으나, 아내 코르넬리아와 이혼하기를 거부하여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술라파가 있던 모계쪽 집안과 베스타 여사제의 관여 덕분에 그에 대한 위협은 취소되었다. 술라는 망설이며 결국 사면에 승낙하였는데, 카이사르 속에 수많은 마리우스가 있음을 보았노라고 말한 바 있다.


청년 시절

도주했던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군 입대를 택하여, 아시아 속주에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킬리키아에서는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밑에서 복무하였다. 역설적으로 카이사르가 군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연유는 사제직을 잃은 덕분이었는데, 플라멘 디알리스 사제는 말을 만지거나 자신의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밤을 자거나 로마 바깥에서 하룻밤을 자거나 군대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3] 그는 미틸레네 공성전에서 공을 세워 시민관을 수여받았다. 비튀니아 임금 니코메데스 4세의 함대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던 중 카이사르는 궁정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왕과 동성애 염문이 돌았으며, 이후에도 이 소문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14]

기원전 80년, 독재관에 오른 지 2년 만에 술라는 사임하고, 다시 집정관제를 복원하였으며, 집정관을 재직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여 사인(私人)으로 물러났다.[15]나중에 카이사르는 술라가 독재관직을 포기한 일을 두고 "술라는 정치의 가나다도 모른다"고 비웃었다.[16]2년 뒤인 기원전 78년에 술라는 세상을 떠났으며, 국장이 열렸다.[17]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유산을 몰수당한 터라 재산이 없던 카이사르는 로마 시에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에 평범한 집을 얻었다.[18] 그가 로마로 돌아올 때 반술라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반란을 시도하였으나, 레피두스의 지도력을 신뢰하지 않은 카이사르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19] 대신에 그는 변호사로 나섰다. 그는 빼어난 웅변에다가 인상적인 제스처와 높은 목소리로 갖추었으며 금품 강요와 부패로 악명 높던 전직 총독들을 가차없이 고발하여 유명해졌다. 키케로도 그를 칭찬하며 "이제 나와보라,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다.[20]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에 그는 로도스 섬으로 유학하여 일전에 키케로를 가르친 바 있는 아폴로니우스 몰론 밑에서 공부하였다.[21]

에게 해를 지나던 중,[22] 카이사르는 킬리키아 해적에 잡혀, 도데카니사 제도의 파르마쿠사 섬에 갇히게 되었다.[23] 잡혀있는 동안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카이사르는 포로로 잡혀있을 때 해적들을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하였는데,[24] 해적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해적들이 그의 몸값을 은 20 탈란톤으로 잡자, 카이사르는 50 탈란톤을 요구하라고 고집하였다.[25][26] 몸값이 지불되자 카이사르는 배를 모아 해적들을 추적해 잡았으며, 이들을 페르가몬에 투옥시켰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이들을 처형하길 거부하고 해적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하였다.[27]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안으로 돌아가 자신의 권리에 따라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그런 다음 로도스로 갔으나, 곧 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에 불려갔으며, 폰토스의 침략을 막고자 보조군을 모병하였다.

로마로 돌아오는 중에 그는 쿠르수스 호노룸의 첫 단계인 군사 참모(military tribune)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일어났는데(기원전 73~71년), 카이사르가 이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에 관여했다. 기원전 69년에 그는 재무관에 선출되었으며,[28] 그 해에 마리우스의 미망인이었던 고모 율리아의 장례식 연설을 하였는데, 장례 중에 (술라 집권 이후로 볼 수 없었던) 마리우스의 상을 전시하였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29] 기원전 69년 봄 혹은 초여름에 장례가 끝나고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의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휘하에서 재무관직을 수행하였다.[30]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상을 보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세계를 제패할 때와 같은 나이에 자신은 이룬 것도 없다는데 불만을 느끼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재무관직 조기 해임을 요청하여 승인받고 로마 정계로 돌아왔다. 기원전 67년에 돌아와서,[31] 그는 술라의 손녀인폼페이아와 결혼하였다.[32] 그는 조영관으로 선출되어 마리우스의 승전 기념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술라파가 아직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물의를 빚었다. 그는 또 술라의 재산 몰수로 이익을 봤던 사람들을 기소하였으며, 공공 사업과 경기에 막대한 돈을 빌려 써서 동료 조영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보다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두 차례 반란 모의에 연루 혐의를 받기도 하였다.[33]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다
 
기원전 63년은 카이사르에게 파란 많은 해였다. 그는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설득하여 벌족파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에게 37년 전에 원로원 비상 결의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자신을 이 사건을 심리할 두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키케로와 퀸투스 호르텐시우스가 라비리우스의 변호를 맡았으나, 그는 대역죄(perduellio)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인민에게 청원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였으나 법무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가 야니쿨룸 언덕에 군기를 내려 민회를 산회시켰다. 라비에누스는 다음 회기에 기소를 재청할 수 있었으나, 카이사르의 지시로 재청하지 않아 이 문제는 중지될 수 있었다.[34] 카이사르의 목적은 라비리우스 개인이 아니라, 집정관들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무시한 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처형할 때 휘둘러온 원로원 비상 결의의 정당성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35] 덕분에 그는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던 주류 세력들이 카이사르와 같은 민중파 정적들에 대하여 궁극적인 방호책으로 삼았던 비상 결의에 반대 여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35] 라비에누스는 이후 십년간 카이사르의 중요한 친구가 되었다.

술라가 임명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가 그 해에 죽자 카이사르는 로마 국가 종교의 수장인 대신관직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벌족파 경쟁 후보 두 사람이 있었는데,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였다. 후보들은 서로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선거일 아침에 카이사르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면 대신관에 당선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선거 운동으로 막대한 빚을 져서 추방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경쟁 후보들은 뛰어난 겨험과 지위를 가졌지만 카이사르가 무난히 당선되었는데, 아마도 두 경쟁 후보가 서로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6] 대신관은 신성로(Via Sacra)에 관저가 있었다.[18]

그 해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화국을 장악하려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알렸으며, 카툴루스 등은 카이사르가 이 음모와 연관이 있다고 고발하였다.[37]다음 해 법무관으로 선출되었던 카이사르는 이 음모 연루 문제 처리를 놓고 벌어진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중에 카이사르는 쪽지를 받았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카이사르가 음모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며 그 쪽지를 크게 읽도록 요구하였다. 카이사르는 카토에게 쪽지를 넘겨주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쪽지는 카토의 의붓누이인 세르빌리아에게서 온 연애 편지였다. 반역 음모자를 사형에 처하자는 의견에 대해 카이사르는 설득력 있게 반박하면서 종신 징역에 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토의 연설로 결국 음모자들은 처형되었다.[38] 다음 해 이 반란 음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다시 공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이 음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보고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여 문제가 풀렸으며, 고발자 가운데 한 사람과 또 위원회 위원 한 사람이 구금되었다.[39]

기원전 62년에 법무관이었던 카이사르는 당시 호민관이었던 메텔루스 켈레르가 논쟁적인 입법 제안에 지지하였으며, 두 사람은 매우 완고하여 원로원에서 이들을 직무 정지에 처하였다. 카이사르는 계속 법무관직을 수행하고자 하였는데, 폭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 시위를 진정시키자 원로원은 그를 복직시키기로 하였다.[40]

그 해에 보나 데아(Bona Dea, "선한 여신")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이 제사에는 남성이 출입할 수 없었으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라는 젊은 귀족 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의 아내인 폼페이아를 유혹할 목적이 분명하였다. 그는 잡혀서 신성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력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거스르지 않고자 클로디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으며, 클로디우스는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된다"면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다.[41]

법무관직을 수행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이베리아 바깥)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도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빚쟁이들을 설득해야 하였다. 그는 로마의 갑부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았다. 폼페이우스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가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빚 일부를 지불하고, 나머지 빚에는 보증을 서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카이사르의 법무관 임기가 끝나 일반 시민 지위가 되면 빚 때무에 기소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속주로 떠났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칼라이키족과 루시타니족을 정복하여 그의 군대에게서 임페라토르(최고 군사령관)로 환호받았으며, 채무 관련 법을 개혁하고, 매우 존경을 받으며 총독직을 마쳤다.[42]

'임페라토르'로 경례를 받으면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직에 출마하길 원하였다. 만일 그가 개선식을 열려면, 행사 전까지 군인 신분으로서 도시 바깥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사령관직에서 이임하고 일반 시민 신분으로 로마에 들어와야 했다. 결국 그는 개선식과 선거 출마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원로원에 부재중 출마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카토가 이를 막았다. 두가지 사이에서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선택하였다.[43]


첫 집정관 재직과 삼두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삼두 정치입니다.

집정관 선거에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몇 년 전에 카이사르와 함께 조영관직을 맡은 바 있다), 루키우스 루케이우스 세 후보가 출마하였다. 선거는 깨끗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게 지지를 청하였으며 부유한 루케이우스와 제휴하였으나, 체제의 주류 세력은 보수파인 비불루스를 밀어주었으며,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카토조차도 그를 지지하여 뇌물을 썼다고 한다. 카이사르와 비불루스는 기원전 59년에 임직하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44]

카이사르는 이미 크라수스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긴 하였으나, 폼페이우스에게도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자신의 퇴역병에게 준 동방의 정착지와 농지를 원로원에서 비준받기 위해 싸우고 있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70년에 함께 집정관직을 역임한 이래 적대 관계였으며, 카이사르는 만약 자신이 한쪽과 손을 잡으면 다른 한쪽의 지지를 잃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화해하고자 하였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은 충분한 자금과 더불어 공공 사업을 장악할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의 비공식적 정치 제휴를 제1차 삼두 정치라고 하는데,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가 결혼하면서 공고해졌다.[45] 카이사르는 재혼하였는데, 이번 배우자는 다음 해 집정관으로 당선된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딸인 칼푸르니아였다.[46]

카이사르는 빈민에게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법을 제안하였는데, 폼페이우스는 필요할 경우 무력도 불사하며 지지했으며, 크라수스도 마찬가지로 지지하여 삼두 정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불러들인 그의 병사들이 도시에 운집하였으며, 삼두정의 반대자들을 위협을 받았다. 비불루스는 불길한 전조(前兆)가 있었다고 선언하여 법을 무효화하려 시도하였으나, 카이사르의 무장 지지자들이 그를 포룸에서 쫓아내 버렸다. 비불루스의 릭토르(lictor)들이 들고 다니는 속간은 부러졌으며, 그와 함께 있던 호민관 두 사람이 다쳤고 비불루스 자신도 똥 한 바가지를 뒤집어썼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집으로 물러나 그 해 내내 틀어박혀 지내다가 이따금 나쁜 전조를 선언하였다. 이렇듯 카이사르의 입법을 방해하려는 시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로마의 풍자가들은 이때부터 그 해를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해"라고 불렀다.[47]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처음 선출되었을 때,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 해에 맡을 전임 집정관 자리로 속주 총독직 대신 이탈리아의 목초지와 숲을 맡겨서 장래에 그의 권력에 제약을 두고자 하였다.[48] 그러나 피소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나중에 이 조치는 취소되고 카이사르는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이탈리아 북부)와 일리리쿰(발칸 반도 서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도 맡겼고 그에게 4개 군단을 주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그가 맡을 전임 집정관 임기는 단 1년이 아니라 5년으로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기소가 면제되었다.[49]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카이사르는 변칙적으로 정한 직무 때문에 기소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 서둘러 임지로 떠났다.[50]


갈리아 정복

 이 부분의 본문은 갈리아 전쟁입니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속주 총독은 착취[51]나 위험한 군사 원정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로마의 동맹인 갈리아의 아이두이족(Aedui)은 전에 아이두이의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아리오비투스가 이끄는 게르마니아의 수에비족(Suebi) 분견대의 도움을 받은 다른 갈리아 부족에게 패하였으며, 헬베티족이 이주를 위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로마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처음에는 헬베티족을 다음으로 아리오비투스를 무찔렀으며,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는데 이는 즉 카이사르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바깥 영토에 관심을 둔 것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52]

겨울 동안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신규로 2개 군단을 또 편성하여,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이런 자의적인 군 편성은 적법성이 의심스러웠는데, 키살피나 갈리아인은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부족들이 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과 한 차례 전투를 벌이다 결판을 짓지 못한 뒤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그러는 사이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아르모리카 반도(Armorica)의 부족들을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하였다.[53]

기원전 56년 봄에 삼두 정치 인사들은 갈리아 키살피나의 루카에서 회합을 열어 만났다. 로마는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클로디우스의 민중 선동으로 크라수스의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나빠진 상황이었다. 회의에서 삼두 정치를 갱신하고, 카이사르의 전임 집정관(총독) 임기를 5년 더 늘렸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다시 집정관에 오르기로 하고 이후에는 카이사르처럼 장기 전임 집정관직을 맡기로 하여,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맡는 것으로 정하였다.[54]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Morini)과 메나피이족(Menapii)만 저항하였다.[55]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Usipetes)과 텡크테리족(Tencteri)을 몰아냈으며,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그 해 늦여름에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을 정복하면서브리타니아 섬(오늘날의 브리튼)에 건너가서 지난 해에 브리타니아 사람들이 베네티족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섬에 대해 잘 몰랐으며, 켄트에 상륙 거점을 얻긴 하였으나 더 나아갈 수 없어서 겨울에 갈리아로 돌아갔다.[56]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의 만두브라키우스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인 카시벨라우누스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Eburones)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암비오릭스를 무찌르면서 카이사르는 이제 갈리아를 평정하였다고 생각하였다.[57]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있을 때,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카이사르는 조카의 딸인 옥타비아를 남편 가이우스 마르켈루스와 이혼시키고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그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였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는 폭력 사태로 치닫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비상 수단으로 1인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정적인 퀸투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고, 장인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아 일단 질서를 회복하였다. 이로써 삼두 정치는 결렬되었다.[58]

기원전 52년, 갈리아 아르베르니족(Arverni)의 웨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웨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게르고비아 전투 등 여러 차례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무찔러 자신이 기민한 지휘관임을 입증하였으나,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59]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60]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전임 법무관 지위의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전쟁 동안 가장 고참인 군단장이었다.[61] 그 밖에 두각을 드러낸 카이사르의 다른 부관으로는 친척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62]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63]와 형제인 마르쿠스,[64]키케로의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65] 데키무스 브루투스,[6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67]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이 3백만 명의 적과 싸웠으며, 그 가운데 1백만은 죽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00개 부족이 복속되었으며, 800개 도시가 파괴되었다.[68] 아바리쿰(부르주) 시의 전체 주민 총 40,000명이 살육당하였다.[69]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인368,000명이 고향을 떠났으며, 이 가운데 92,000명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군 작전 이후 총 110,000명만이 돌아왔다고 보고하였다.[70] 그러나 일단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보고는 선전의 목적을 띄고 있었으며, 고대 문헌에서는 보통 숫자를 과장해서 쓰기 때문에 적 전투원의 총 수효는 특히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푸르거-군티(Furger-Gunti)는 헬베티 군대의 병사 수가 60,000명이 넘는 것은 기록된 전술을 고려했을 때 전혀 있을법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실제 수효는 총 이주민 수가 160,000명에 전투원 수는 40,000명 정도로 추산하였다.[71] 델브뤽(Delbrück)은 전체 주민 수가 100,000 이하일 것이며, 그 가운데 전투원은 16,000명에 불과할 것으로 보았는데, 이렇게 보면 켈트인 군대의 병력은 당시 30,000명 정도였던 로마군의 절반 수준이 된다.[72]


 
내전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가 주도하는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에게 전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되었으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하였다.[73] 또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두 번째로 출마하려는 집정관 선거에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하였다.[73]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면책권이 없거나 군사력이 없는 상태로 로마에 들어간다면 기소되고 정계에서 밀려나리라고 생각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단 일개 군단만 이끌고 루비콘 강(이탈리아의 북방 경계선)을 넘어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아테나이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 "주사위를 던져라!(ἀνερρίφθω κύβος)"를 그리스어로 인용하였다고 썼다.[74] 수에토니우스는 이 문장을 라틴어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고 썼다.[75]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소 카토를 비롯한 벌족파는 도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이탈리아 북부의 수많은 도시들이 카이사르에 항복하면서 새로이 징집한 군대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사마리움(Samarium)에 있던 한 집정관 소속 군단으로 저항을 시도해보기도 하였으나, 집정관이 방어군에 인계되고 그 군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폼페이우스의 군세는 제13군단밖에 없던 카이사르보다 훨씬 우세하였으나, 그는 싸울 뜻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대동하던 원로원과 군단이 도주하기 전에 그를 생포하길 바라며 브린디시움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다.[76]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빠져 나오려고 카이사르가 브린디시움 항구 장벽을 뚫고 들어오기 전에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났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철수시키려고 해안의 모든 배를 이미 쓸어가버린 터라 카이사르는 해군력이 없었으므로 히스파니아로 진로를 돌리기로 하였다.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로마의 장관으로 남겨놓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호민관으로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을 맡겨놓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2개 군단과 합류하여 놀랍게도 27일만에 히스파니아로 진군하여 폼페이우스의 부하를 무찔렀다. 그런 다음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고자 동방으로 향했는데, 기원전 48년 7월 10일 디라키움에서 카이사르는 포위망이 무너지면서 겨우 대패를 면하다시피하였다. 같은 해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보병 수는 거의 두 배 이상, 기병은 더욱 차이가 났다) 매우 짧은 전투 끝에 그를 무찔렀다.[77]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78]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기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카이사르는 스스로 집정관 선거를 열어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올랐으며(동료 집정관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였다), 그런 다음 11일 뒤 독재관직에서 사임하였다.[78][79]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레이아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였으며, 이곳에서 폼페이우스는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임금의 궁정에서 복무하던 어느 전직 로마군 장교에게 살해당하였다.[80] 이때 카이사르는 당시 알렉산드레이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이자 부인이며 공동 국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마 프톨레마이오스가 폼페이우스를 죽이는 데 관여한 탓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편에 선 것 같은데, 프톨레마이오스의 내시 포티누스가 선물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자 카이사르는 이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81]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에 나일 강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무찌르고,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삼았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그 해 봄에 나일 강에서 개선 행진을 열어 알렉산드레이아의 내전에서 승리한 데 축하하였다. 파라오의 배는 400 척의 다른 배를 대동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이집트 파라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로마법에서는 오로지 로마 시민 사이의 결혼만 인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으로 결혼할 때까지 무려 14년동안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이어나갔으며(로마인의 시각에서 이는 간통이 아니었다) 카이사리온의 아버지도 카이사르였던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한 차례 이상 로마를 방문하였는데, 로마 바깥의 티베리스 강을 건너면 있는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지냈다.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79] 기원전 47년 초 몇 달간 이집트에서 지낸 카이사르는 중동 지역으로 가서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 2세를 절멸시켰는데, 너무나 빨리 승리를 거두어 그는 과거 폼페이우스가 이런 형편없는 적들과 오랫동안 싸워 거둔 승리를 조롱하였다.[82]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아프리카에 남아있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 잔당을 처리하고자 떠났다. 기원전 46년에 그는탑수스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전사)와 소 카토(자살)의 군대를 상대하여 신속히 대승을 거두었다.[83] 탑수스 전투에서 이긴 뒤 카이사르는 10년 임기의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84]

그렇지만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로 도주하였는데, 카이사르의 옛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에서 부사령관을 지낸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들을 추격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3월에 문다 전투에서 마지막 저항 세력을 격파하였다.[85] 이런 가운데 카이사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로 기원전 46년의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동료 집정관)과 기원전 45년 집정관(동료 집정관이 없었다)에 선출되었다.


내전 이후
 
카이사르는 아직 히스파니아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원로원은 그가 부재중인 가운데 영예를 내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처벌하지 않고 거의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대도 거의 없었다.

카이사르가 문다에서 승전한 데 기념하며 4월 21에는 대규모 경기와 축하 행사가 열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내전에서 무찌른 적들이 외국인이 아닌 동료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들이 카이사르 승리 이후 열린 개선식이 빈약했음을 알았다고 썼다.[86]

기원전 45년 9월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오면서 유언장을 썼는데, 자신의 조카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상속한다고 썼다. 카이사르는 또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우스가 죽는다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카이사르는 곡물 수매에 국가 보조금을 대도록 엄하게 제도화하였으며, 곡물 수령자의 수를 고정하여 줄였는데 모든 수령자는 특별 명부에 기록되었다.[87] 47년에서 44년까지 카이사르는 그의 전역병 약 15,000명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계획을 세웠다.[88]

카이사르는 대신관으로서 달력을 정비하는 일도 했다. 구 로마력을 철저히 검사한 그의 업적은 매우 오랜 세월동안 영향력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는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89] (율리우스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정하여 오늘날의 그레고리오력이 되었다) 역법 개정으로 로마인에게 어떤 한 해가(아마 현대 역법으로 기원전 46년에 해당할 것이다)이 445일로 길어졌다.[89] 7월의 여러 유럽어 명칭(가령 영어의 'July' 등)은 그를 기념하여 율리우스에서 기원한 것이다.[90] 그 외 여러 공공 사업 가운데는 베누스 게네트릭스 신전이 있는 카이사르 포룸도 있다.
 



암살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Idus Martias)에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날 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라는 어느 "해방자"에게서 음모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으며,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여 포룸 계단에서 약간 떨어져서 카이사르 앞으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마르스 광장에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지날 때 원로원 의원 무리가 그를 가로막더니 동쪽 주랑 현관에 붙은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9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다다랐을 때,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베르가 추방당한 자신의 형제를 귀환시켜달라며 청원을 하였다고 한다.[92] 다른 음모자들이 킴베르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둘러쌌다.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카이사르가 킴베르의 청을 거절하였다고 했는데, 그러나 킴베르는 그의 어깨를 잡더니 카이사르의 투니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킴베르에게 "웬 무례한 짓인가!(Ista quidem vis est)"라고 소리쳤다.[93] 이때 카스카가 단검을 빼내들어 단번에 독재관의 목을 내리찔렀다. 카이사르는 재빨리 뒤돌아보며 팔로 카스카를 잡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라틴어로 "카스카, 이 천한 자야, 무슨 짓이냐?"라고 말했다고 썼다.[94] 겁을 먹은 카스카는 그리스어로 "동지들, 도와주시오!"(ἀδελφέ, βοήθει)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브루투스를 비롯한 모든 음모자들이 독재관을 공격하였다. 카이사르는 도망치려 하였으나, 피 때문에 분별을 잃고 발을 헛디뎌 넘어졌으며 주랑 현관 아랫 계단에 무방비로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를 계속 찔러댔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를 살해하는 데 6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23번 칼에 찔렸다.[95]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기를, 그의 가슴에 두 번째로 찔린 상처 그 하나가 치명적인 일격이었다고 한다.[96]

독재관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논쟁거리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어로 "녀석, 너도냐?"(καὶ σύ, τέκνον)였다고 말했노라고 썼다.[97] 그러나 수에토니우스 자신은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93] 플루타르코스도 카이사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가 암살자 사이에서 브루투스를 보자 자신의 토가를 끌어올려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고 한다.[98]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의 마지막 말은 라틴어로 "브루투스, 너도냐?"(Et tu, Brute?)인데,[99][100]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오는 대사에서 나온 말로, 실제로는 라틴어와 영어가 혼용된 문장 "Et tu, Brute? Then fall, Caesar."의 앞부분 구절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실로서 근거가 없으며, 셰익스피어가 대사에 라틴어를 쓴 것은 당시 카이사르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것처럼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를 썼다는 주장과도 무관하며, 단지 이 희곡을 쓴 당시 이미 대중적인 구절이었기 때문이다.[10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뒤에 브루투스는 동료 의원들에게 무언가 말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으나, 그들이 건물에서 도망쳤다고 한다.[102] 브루투스와 그의 패거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나아가 사랑하는 도시를 향해 "로마 사람들이여,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고 외쳤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문이 퍼지면서 로마 시민들은 각자 자기 집에 문을 걸어잠그고 틀어박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암살 이후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103]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카이사르와 떨어져 있었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의 분노를 벌족파들에게 쏟아버리겠다고 위협하였는데, 아마도 자신이 로마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놀랍고도 분하게도, 카이사르는 조카의 아들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이미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정해두었으며, 유증을 통해 그를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게 해준데다 '카이사르'라는 막대한 권위를 지닌 이름을 물려주었다.[104]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위대한 카이사르의 아들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로마 대중 상당수의 충성도 얻게 되었다. 며칠 뒤 로마 포룸에서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안토니우스는 1600여 년 뒤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친구들이여, 로마인들이여, 동포여, 들어보시오...") 연설을 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의 일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여론을 반영한 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게다가 장례 연설 중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티베리스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은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 등록자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하기로 발표가 났다.(300 세스테르티우스는 매우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로마 노동자들의 평균 석달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으로 상당히 좋은 선물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장례 연설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유증이 알려지면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암살자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장례식장에서 들끓어오른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놓은 장례용 장작에 마른 가지와 가구, 심지어 옷가지까지 던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군중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집을 공격하였는데, 이들은 간신히 피해 쫓겨났으며 결국 해방자들의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105]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다가올 내전의 궁극적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을 당시 겨우 19세의 나이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상당한 정치 감각을 입증하였으며, 안토니우스가 새로운 내전의 첫 단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당초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스에 막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전쟁 자금과 병사가 필요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이름이 지닌 명분과 정당성도 있어야 했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 티티우스 법(lex Titia)이 통과되어[106]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에 충성하던 기병 지휘관 레피두스 세 사람의 제2차 삼두 정치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107]삼두 정치는 기원전 42년에 공식적으로 카이사르를 '율리우스 신'(Divus Iulius)으로 신격화하였으며, 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i filius)이 되었다.[108] 카이사르가 자신의 관대함 때문에 살해당한 것을 아는 제2차 삼두 정치의 세력자들은 술라 이후에 쓰인 적이 없는 숙청의 공포를 다시 일으켰다.[109] 이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항하여 두 번째 내전에서 45개 군단을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많은 반대자들을 합법적으로 살해하였다.[110]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공화정파를 격퇴하였다.[111]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였는데, 로마를 지배할 발판으로 이집트의 어마어마한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맞서 세 번째 내전을 벌인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악티움 해전을 기점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승세를 잡게 되고, 결국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적인 이름을 달고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112]

당초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와 캅카스스키타이를 침공하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게르마니아에 다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면서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113] 그의 후계자들은 파르티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영속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건강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근거하여,[114] 간혹 카이사르가 간질을 앓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며, 또 특히 기원전 80년대에 술라가 처벌자 명단을 공개하던 당시 그가 말라리아에 걸린 것은 이보다는 더욱 확실하다.[115]

카이사르는 부분적으로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 같은 기록이 네 가지가 있다. 또 그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소발작(absence seizure)을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렇듯 그의 발작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카이사르 사후에 태어난 사람인 수에토니우스의 글이다. 그가 간질 환자였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의학 역사가들은 그의 병이 간질성 발작을 유발하는 저혈당증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116][117][118]


저서

카이사르는 생전에 로마에서 훌륭한 웅변가이자 산문 작가로 인정받았으며,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수사와 문체를 높이 평가하였다.[119] 그의 유명한 작품 가운데는 마리우스의 아내인 아주머니 율리아의 장례 연설과, 키케로의 소 카토 회고에 대응하여 카토를 비난한 글인 안티카토네스(反카토)가 있다. 불행히도 그의 글과 연설문 상당수는 유실되었다.가장 큰 원인은 그의 사후에 그가 신격화 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등 몇몇 문서들을 제외한 그와 관련된 글과 연설문들의 폐기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회고록으로는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가 있는데, 전자는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벌인 군사 작전을 기록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내전을 다루었다. 또 각각 알렉산드레이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행한 전투에 대해 쓴 알렉산드레이아 전쟁에 대하여(De Bello Alexandrino), 아프리카 전쟁에 대하여(De Bello Africo), 히스파니아 전쟁에 대하여(De Bello Hispaniensi) 이 세 저작도 역사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저자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러한 저서의 줄거리는 당시 전쟁 중이나 직후에 "전선에서 급송한 공문서"로서, 1년 단위로 써서 출간되었다. 카이사르의 저서는 문체면에서 분명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나, 사실은 대단히 복잡하고 그의 정치적 주장을 선전하는 방향으로 미묘하게 편향되어 있고 특히 로마나, 이탈리아, 속주의 평범한 소귀족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위키백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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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에서 딴 말로서 S.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쓴 용어이다.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에피카스테)의 아들인데 숙명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의 왕이 되었다. 어머니인 줄 모르고 결혼한 그들은 그 사실을 알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기 눈을 뺀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경향은 남근기(男根期:3∼5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며 잠재기(潛在期)에는 억압된다고 한다. ‘아버지처럼 자유롭게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다’는 원망(願望)은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다’는 원망으로 변하여 부친과의 동일시(同一視)가 이루어지며 여기에서 초자아(超自我)가 형성된다.

프로이트는 유아는 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극복하고서야 비로소 성인(成人)의 정상적인 성애가 발전하는 것이지만 이를 이상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일반적으로 신경증환자는 이 극복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콤플렉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929년 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상(文化人類學上)의 발견으로 이 콤플렉스는 로마법과 그리스도교의 도덕에 의하여 지지되고, 부르주아와의 경제조건에 의하여 강화된 아리안족의 부계제 가족(父系制家族)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보편적인 것도 아니며 생리학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특히, 신프로이트파의 학자들은 이 콤플렉스가 사회적 원인과 가족 내의 대인관계로부터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학자 중에서 E.프롬은 부친의 권위(權威)가 강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콤플렉스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K.호르나이는 양친(兩親)에 대한 의존 욕구와 적의(敵意)의 갈등에서 생긴 불안이 원인이 되어 이 콤플렉스가 생긴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여자 아이가 부친에 대하여 성적 애착을 가지며 모친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지는 성향을 엘렉트라콤플렉스(Elektra complex)라고 한다. 

***
 

 신화 줄거리


라이오스 1세(에디프스의 아버지)는 데베의 왕이 되자 메노에케오스1세의 딸인 요카스타(에디프스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이때 델피의 신탁(신의 명령) 에서는 앞으로 그가 아들에 의해 살해당할 운명에 쳐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아들을 낳지말라는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조상들과는 달리 술 혐오증이 없었으므로 신들이 마시는 신성한 음료를 마시고 취한채 아내와 관계를 가져 아들을 배고 말았다.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핀이나 못으로 그의 발목을 꿰뚫고는 한 목동에게 주어 그 아이를 보이오티아와 아티카 사이에 있는 키타이론 산에 갖다 버리도록 했다. 한편 코린트왕 폴리보스 4세의 기병들은 이 버려진 아이를 주워 왕비 페리보에아 4세에게 갖다 주었고 왕비는 그를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녀는 아이의 발목을 치료한후 그에게 에디푸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의 발이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푸스는 폴리보스4세의 궁궐에서 자라 어느덧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그러자 그의 형제들은 질투심이 생겨 그가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면서 놀렸다 왕의 성품은 온순한테 에디푸스는 고집이 세다는 것이었다. 에디푸스 자신도 이 점에대 해 점차 의구심이 생겨 한번은 왕비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녀로 부터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하자 델피의 신탁에 가서 자신의 진정한 부모가 누구인지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신탁은 그에게 그가 고국에 돌아가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게 될 것이므로 절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경고를 듣고 에디푸스는 자신을 양자로 삼은 코린트의 왕이 친부모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에디푸그가 마차를 타고 가다 좁은 길에서 자신의 친아버지를 만났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1세 역시 자신이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때가 왔다는 불길한 예감을 받고 델피의 신탁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기가 산에 내다 버린 아들이 실제로 죽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이 좁은 길에서 마주치자 왕의 전례관이 에디푸스에게 길을 비키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에디푸스가 지체하자 그 전례관은 에디푸스의 말중 한마리를 죽였다. 혹자의 견해에 따르면 왕이 자신의 말을 몰아쳐 마차 바퀴로 에디푸스의 발을 스치게 했다고도 한다. 이에 화가 난 에디푸스는 그 전레관을 살해하고 왕도 마차에서 끌어내려 살해해 버렸다. 

테베는 왕 라이오스1세가 죽자 왕비 요카스타의 형제인 크레온 2세가 섭정에 들어갔다. 테베에 엄청난 재앙이 탁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스핑크스란 괴물이 보이오티아에 나타나 테베의 논밭을 황페케 하며 그녀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함면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이 괴물은 여자의 얼굴에 가슴과 발 꼬리 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새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이 괴물은 뮤즈의 신으로부터 수수께기 하나를 배워 와 피키움 언덕에 앉아 자신에게 용감하게 나아온 테베인들에게 문제를 내고 있었다 그녀는 크레온2세에게 백성중에서 누구든지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있으면 자신이 그 나라를 떠나겠지만 풀지 못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 수수께기는 다음 과 같았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발이 되었다가 두 발이 되고 , 또 세발이 되는것은 무었이냐?"

왕은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스 전역에 포고령을 내려 누구든지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있으면 그를 왕으로 삼고 그의 누이 요카스타를 아내로 삼게 해 주겠다고 선언했다. 스핑크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왕의 포고령을 전해들은 에디푸스는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면 나섰다. 드디어 스핑크스를 만났을때 그는 '사람'이 바로 정답이로고 대답하며, 인간이 어려서는 팔과 다리로 기어다니기 때문에 네발이고 , 성인이 되어서는 두발로 다니고 노인이 되어서는 지팡이를 집고 있기 때문에 세발 이 된다고 설명했다 에디푸스는 자신의 발이 불구가 되어 지팡이를 집고 있었기 때몬에 답을 쉽게 맞출수 있었다.

정답을 듣자 스핑크스는 자신의 약속대로 요새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리하여 에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되었고 왕비 요카스타가 자신의 어머니인 것도 모르고 결혼하여 네 자녀까지 낳았다. 어떤 사람은 하늘이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증오 하여 재앙을 내려 테베에 기근이 찾아오고 농작물이 황폐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한 듯 신탁의 에언대로 라이오스1세의 살해 사건과 관련된 유혈 사태로 인해 도신 전역에 재앙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그러자 왕은 당황하여 예언자 티레시아스를 불러 재앙을 몰아 내는 방법을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에언자는 누구든 나라를 이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역병은 물러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크레온 2세아 요카스타의 아버지인 메노에게오스1세는 에언자의 말을 굳게 믿고 용감하게 성벽에서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결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재앙은 계속 되었다. 테베에서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코린트에서는 에디푸스가 친아버맂라고 믿고 있던 폴리보스4세가 죽었다. 이에 왕비 페리보에아4세는 자신이 에디푸스를 양자로 입적한 사실을 밝혀야할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다른 사람도 말문을 열어 처음에는 진실을 밝히기를 거절하던 곳에 증거가 드러나게 마련인 법 , 메노에테오스 1세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제서야 에언자 티레시아스도 처음부터 진실을 알 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대푸스는 어머니의 옷에 있던 핑을 떼어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되고는 자신이 저주한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 클레스 1세에게 나라를 맡기고 자신은 영영 테베를 떠났다.




1.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語源(어원) 

에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그리스 신화에서 Thebes의 에디푸스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로부터 비롯하여 남자는 잠재적으로 그 아버지에 대하여 반항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는 특별한 애착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 반대로 딸이 어머니에 대해서 가지는 이러한 감정을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라 한다


2. 정신분석학자가 말하는 에디푸스 기간이란? 

1). 프로이드의 에디푸스 기간 


(1) 구순기 
(2) 항문기 
(3) 남근기 
(4) 잠재기 
(5) 성기기 

남근기phallic stage 

3-6세의 시기이며 남근기phallic stage라 부르는데,이 시기에는 리비도가 성기에 집중되는 시기로, 남ㆍ녀 어린이 모두에게 음경penis이 마음속에서 관심의 주가 된다. 즉 성적인 관심ㆍ자극ㆍ흥분이 성기가 있는 신체부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본능적 욕구로서 성기가 주된 관심의 대상 내지 쾌락의 근거가 된다. 남자 아이들은 자신의 성기를 힘과 우월성의 상징으로 보고 여자 아이는 그것이 없다는 점에서 남근선망penis envy과 더불어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이시기의 끝부분이 에디푸스기oedipal state인데, 에디푸스기는 남녀가 다른데, 남자의 경우를 보면: 남아는 출생해서 곧바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또 어머니와 동일시identify해 왔기 때문에 '나도 엄마처럼 아빠의 애틋한 사랑을 받아봤으면!'하는 시기가 우선 처음에 온다. 그러다가 그는 여자 아이들은 물론 어른 여자들까지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서서히 어머니와 동일시 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 어머니 역시 음경이 없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는 어머니를 어려워하지 않는 눈으로 보고, '나는 아버지와 같은 편'이라는 생각에서 아버지와 동일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한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듯 자기도 그렇게 어머니를 독점하고 싶어 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에게 존경ㆍ선망ㆍ질투ㆍ경쟁을 느끼고, 어머니에게는 그녀를 소유하고 사랑하고 싶은 심정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에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서, 이는 그의 남성성masculinity을 발전시키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에디푸스 콤플렉스로 심정이 끝까지 활짝 피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든 도중하차하면 그는 다시 퇴행해서 계집아이 같은 남자sissy로 되어, 뒤에 오는 청소년기에서 주체성 확립에 큰 폭풍을 맞을 가능성이 퍽 높다. 그러면 어머니를 짝사랑하는 남아는 왜 끝내는 이를 포기하는가?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①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자기를 거세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fear of castration 즉 거세공포 때문이고, 
② 아버지에 대한 사랑때문이며, 
③ 자기의 신체적 미숙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 셋 중 첫번째 이유가 그중 으뜸이 되는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어머니를 포기하고 방향전환하여 아버지와 더 한층의 동일시를 도모하는 '남자의 길'을 택함으로써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굴레에서 벗어나는데,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resolution이라고 한다 


2). 에릭슨의 에디푸스기간 

(1) 영아기 
(2) 소아기 초기 
(3) 소아기 후기 
(4) 학령기 
(5) 소년기 
(6) 청년기 
(7) 중년기 
(8) 노년기 

소아기 후기(3-6세): 주도성 대 죄의식 initiative versus acceptance of guilt 

주도성 대 죄책감 수용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는 시기이며. 이 시기의 어린이는 사람ㆍ장난감ㆍ물건들을 공격하고 정복하는 짓을 하는 특징을 가진다. 또 기술을 배우고,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하면서 남성적ㆍ여성적으로 되는 것을 배운다. 성유형이란 남자는 남자의 성격으로, 여자는 여자의 성격으로 그들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람으로서 정당하다고 규정을 내리고 있는 신념, 태도, 활동의 규범을 익혀야 한다.이러한 성유형에 따른 성격형성은 부모나 사회에서 늘 강조하고,처 벌하고, 칭찬을 주는 과정을 통하여 어린이에게 형성된다. 또한 에디푸스적 바램은 (남아는 장차 어머니와 결혼하고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하겠다는 바램과, 여아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훨씬 더 잘 그를 돌보아 주겠다는 바램) 결과적으로 많은 상상을 증가시키고 엄청난 환상을 갖게 한다. 그 결과 또한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즉,그러한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과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사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범죄행위를 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주도성은 어떤 경우. 논쟁자를 몰아내는 데만 집중해서 질투와 분노정서를 유발하게 한다. 즉 부모중 어느 한쪽을 독차지하려는 욕구가 형제 자매에 까지 극치에 달하며, 불가피하게 따르는 실패는 죄의식과 불안을 유발한다 


3.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에디푸스콤플렉스 

1) 히스트리오닉 


일반적으로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딸들과의 관계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좋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히스테리아에서는 성장과정 특히 3,4세부터 6,7세까지의 에디푸스 기간에서의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에서의 마음의 갈등이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딸은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아이의 역할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호감을 가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딸은 어머니와 일종의 경쟁자가 되어 때로 어머니를 무시하기도 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아버지와의 지나친 사랑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성숙된 여성성을 받아들이면서 양쪽 부모와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사히 이 성장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한 경우 문제가 되어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으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남아있게 되고 그래서 성숙한 어머니의 여성성을 가지는 대신에 미성숙된 여성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를 Electra complex라고 하는데 크게 에디푸스 콤플렉스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이 잘 극복이 되지 않아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고 때로는 아버지에 대한 동일화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에는 남자같은 여자아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동성애적인 경향을 가질 수도 있다. 


2) 성도착증 

성적 충동과 성적 흥분을 위해 비정상적인 상상, 행위를 반복적이고 지속적(적어도 6개월 이상)으로 보이는 정신병적 성 장애이다. 남자에게 많으며, 50% 이상이 18세 이전에 발병하며 발병 후 도착 행위는 15~25세 사이에 가장 많이 행하고 이후 감소한다. 정신과학적으로 원인을 분석할 때, 인격이 발달하는 시기중 구순기, 항문기 고착 또는 에디푸스 콤플렉스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강력한 성적 충동과 함께 성적 흥분을 위하여 행위에 있어서 비정상적인 상상, 대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최소 6개월 이상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원인은 인격발달과정 중 구순기나 항문기 수준에 고착되거나 에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되기도 하며,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의 이별, 성폭력, 성호르몬의 장해와 대뇌 기능장해 등이 있다. 성폭력과 연관될 가능성이 특히 높은 성도착증이다. 


3) 노출증 

정신과 질병의 하나로 노출증(exhibitionism)이 있다. 미리 예상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있는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고픈 강한 충동을 갖거나 실제로 노출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로서 성도착증에 해당된다. 환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요즈음의 젊은 여성들의 노출 행동은 정신과적 질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노출 행동은 사전적 의미의 과시벽, 자기선전벽과 연관될 수도 있겠다. 

정신분석에서는 인격 발달 과정 중 구강기나 항문기 수준에서 고착(fixation)된 것으로 보거나 에디푸스 콤프렉스와 관련시켜 노출 행동을 이해한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머니와의 이별에 대한 불안을 다스리려는 무의식적 시도로 간주하기도 한다 


4) 거세콤플렉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경크기에 대하여 고민하며 정상적인 음경을 갖고 있는 사람조차 자신 은 다른 사람들보다 음경이 적다고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든 남자아이들은 일정 기간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적대적인 감정을 느끼는 에디푸스 콤플렉스시기를 거친다고 말한다. 이 때 어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건강한 아버지의 큰 음경과 자신의 작은 음경을 비교하여 자신의 음경을 왜소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생각이 발전하여 혹시 자신의 음경이 손상받을 지도 모른 다는 거세콤플렉스를 느끼게 된다. 거세콤플렉스가 성장후에도 내면에 잠재하여 자신의 음경이 왜소하다고 느끼는 원인이 될 수 있다. 


5) 성욕망 장애 

성욕망 장애는 두 가지로 분류한다. 성욕저하 장애는 성행위에 간한 성적 환상과 욕구가 결핍된 경우를 말한다. 물론 주요 우울증이나 정신분열병 같은 병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약물이나 신체 질환에 의한 것도 아니어야 한다. 이에 비해 성혐오 장애는 배우자와 성기를 통한 성접촉을 혐오하며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흔하다. 
정신역동적으로는 성에 관한 무의식적 공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성욕을 억제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감당할 수 없는 동성애적 충동을 억압하기 위해 성욕을 억압하거나 성접촉을 혐오하는 수도 있다. 프로이드는 성욕의 저하를 에디푸스 갈등이 미해결된 것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나 배우자에게 적개심을 느끼는 경우에도 성욕이 상실될 수 있다. 


6) 결혼기피증과 결혼중독증 

결혼이라는 인생의 한 과제를 지나치게 무겁게 여기면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영원한 '피터팬'들이 있다. 부모에 대한 에디푸스 콤플렉스, 일렉트라 콤플렉스 때문에 독립을 거부하고 사랑스런 자녀 노릇만 일생 고집하는 사람들도 물론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7) 에로틱한 옷의 소재 

모피 

모피는 위신이나 따뜻함, 부드러움 등을 나타낸다. 모피의 부드러움과 안락감은 모태로 되돌아 가려는 욕구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공공 장소에서도 모피를 걸친 사람을 보면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며, 보는 이로 하여금 흥분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아울러 모피는 음부를 상징하며 착용자를 동물로 연상케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모피는 인간을 동물과 동일화시켜 동물의 힘과 주요한 성질을 체험하는 한편 동물을 아버지 또는 신에 견주어 토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동물의 모피를 몸에 두르는 행위는 토템신앙 축제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때때로 모피는 상징의 차원에서 살해된 부모에 대한 죄악감과 함께 에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4. 프로이드는 에디푸스콤플렉스 환자 였다. 

현대 정신분석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프로이드는 프라베르크(Freiberg)란 책코슬로바키아의 작은 카토릭 촌에서 출생하였다. 모직물 상인이었고 대표적인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존재였던 그의 아버지(Jacob Freud)는 괘짜였다. 손자까지 본 40 세 때에 20세도 안 되는 유대인 처녀와 재혼, 이 결혼에서 아이들을 8을 낳았다. 프로이드는 이 중 첫 아기였다. 아기로 태어나자마자 이미 아저씨가 된 그는 이미 자기 분석, 신경증(neurosis) 증상을 노정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자기에게 권위와 강압의 대상인 자기 아버지를 무의식적인 질투와 미움으로 거부하였고, 반면에 젊은 어머니에 대하여는 연정(passion)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드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소위 '에디푸스 콤푸렉스'(Oedipus complex)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프로이드는 아이들을 더 낳지 않기 위해 모든 성적 행위를 기피하였다고 한다. 


5. 문학으로 볼 수 있는 에디푸스 콤풀렉스 

1)영화 에디푸스왕 - Edipo Re 


감독 :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주연 : 프랑코 치티, 실바나 망가노 
이탈리아, 1967년, 104분 

운명의 장난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고대 그리이스의 에디푸스 비극을 재해석하여 이데올로기와 신화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 


2)책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저자 : 김혜남 
출판사 : 중앙M&B 
출판일 : 2002년 05월 

이 책은 그처럼 사랑을 절실히 갈구하면서도 사랑이 두려운 영혼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치료 사례들을 근거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이책을 써 나갔으며 4장에서는 에디푸스 콤플렉스가 사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자세히 쓰여있다. 저자 김혜남씨는 정신분석 전문이이며 그 또한 에디푸스 콤플렉스 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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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용한 면도기 광고





예전 '야심만만'에서 나왔던 내용 (오이디푸스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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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원더우먼' !!! - 장애는 그녀를 막지 못한다!!  

다리가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패션모델, 영화배우, 육상 선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이 해외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라고 하는데요.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분야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녀가 궁금해지는데요~~"" 심지어 육상선수?!! 

197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생인 에이미 멀린스
종아리뼈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에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한 후 
장애인 올림픽에 '미국 대표 선수'로 출전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고 하는데요.

100m 등 단거리 및 멀리뛰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녀는
이후 패션모델로 일했고, 책을 저술하며 강연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영화배우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1백 미터 최고 기록' -> 15.77,  '멀리뛰기 기록' -> 3.5미터.

제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항상 자기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 진정한 '원더우먼' 인 것 같습니다~""


멀린스는 피플지 선정 아름다운 여성 5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네요.






에이미 달리다

(Aimee Mullins On Running, 1998)

 

 

 

 

에이미와 12쌍의 다리

(Aimee Mullins And Her 12 Pairs Of Legs, 2009)

 

 

 

 

역경의 기회

(Aimee Mullins: The Opportunity Of Adversity, 2009)

 

 

유의어 사전에서는 "장애"의 유의어로 "쓸모없는"이나 "불구" 를 들고 있지만,

신기원을 이룬 육상선수 에이미 멀린스는 장애의 정의를 다시 쓰고 있다.

정강이뼈 없이 태어난 역경을 딛고, 장애와 관련된 수식어를 극복하고 있는

그녀는 역경이 개개인의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내는지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외국의 한 모델 에이미 멀린스(1976년생)

어쩜 이렇게 이쁜지.... 참~~

반듯한 이목구비에.... 예쁜 웃음까지....

그러나 그녀가 진정 아름다운 건 바로 이것!

197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생인 에이미 멀린스는 종아리뼈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에 조지타운 대학에 입학한 후 장애인 올림픽에 미국 대표 선수로 출전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00m터 : 15.77초

멀리뛰기 :  3.5m

그녀는 모델 활동도 하며

철저한 건강관리를 위해 매일 조깅을 하고,

의족을 신고 표지모델을 장식하기도 하며,


의족개발의 필요성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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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자
  생애: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루인) - 1543년 5월 24일
  학력: 파도바대학교 의학과
  경력: 15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
           1516년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
           1516년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
           1512년 프라우엔부르크성당 신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Mikołaj Kopernik 미코와이 코페르니크/ Nikolaus Kopernikus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4일)는, 지동설을 주장하여 근대 자연과학의 획기적인 전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가져온 폴란드 혹은 프로이센 태생의 천문학자이다. 여러 가지 이름표기는 그가 태어난 곳(폴란드)과 그의 모국어(독일어) 그리고 그가 즐겨 쓴 라틴어를 감안하여 세 가지 언어로 표기한다. 인공원소 코페르니슘의 이름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그는 라틴어, 폴란드어, 독일어, 그리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모두 말할 수 있었다.

흔히 대담하고 획기적인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태양과 별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겉보기 운동과는 달리, 사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변혁으로 불리는  '과학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1543년에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에서 그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천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존엄한 존재이며 달 위의 천상계는 영원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중세의 우주관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전체를 동시에 밝혀주는 휘황찬란한 신전이 자리 잡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자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혹자는 그것을 빛이라 불렀고, 혹자는 영혼이라 불렀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길잡이라 불렀으니 그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태양은 왕좌에서 자기 주위를 선회하는 별들의 무리를 내려다본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탄압받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인간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새로운 우주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의 자유과 감성의 위대함을 일깨워야 하는 일이다.” (지동설의 부각에 대한 괴테의 언급 중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세계관을 바꾸어놓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요컨대 그것은 ‘점진적 혁명’이었다.

종교개혁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청에 등 돌리게 만들었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은 신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지구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우주적 의미를 보잘것없는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은  정말로 신의 사랑을 독자치하는 존재인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굳이 지구로 보냈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서양 중세의 우주관, 인간관, 세계관의 뿌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관측 결과와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 많은 과학자들 특히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뉴턴 등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문명세계에 사는 우리들 중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생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현재의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당시의  한자동맹 도시인 토룬(폴란드어 Toruń, 독일어 Thorn)에서 관리이자 주철업을 하는 아버지 니콜라스 코페르니크와  당시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방 출신인  어머니 바르바라 바첸로데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토룬에서 초등 및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코페르니쿠스는 1491년 당시 독일의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지방의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로 가 대학에 입학하여 1494년까지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495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가 삼촌의 권유로 신학과에 입학한다. 이탈리아에 머무르면서 코페르니쿠스는 또한 로마 및 파도바 대학에 등록하여 강의를 들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 유해 발견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숨을 거둔 이후  고고학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  그의 유해를 찾으려 노력해 왔다. 1807년 나폴레옹은 그의 무덤을 찾다가 실패하였고, 폴란드 공산 정권는 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껄끄러워 유해 찾기 작업이 순조롭지 않았다.
2005년 8월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제단 아래를 파고 들어가자  여러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중에  코페르니쿠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과 다리뼈 등이 나왔다. 유골은 사망 당시 연령이 60 ~ 70세로 추정되었다. 부러진 코, 왼쪽 눈 위 흉터 등 두개골의 특징이 현존하는 코페르니쿠스 초상화에 나타난 모습과 일치하였다.
2008년 11월 20일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유전학 전문가 마리 알렌은 기자회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나온 두 가닥 머리카락의 DNA가,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의 DNA와 일치한다'라고 밝혔다. 유해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아래턱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다. 뼈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 약 70세 가량 노인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죽었을 때의 나이와 일치한다.

2010년 그의 장례식은 500년만에 폴란드에서 다시 치려졌다.
폴란드 국민과 고위성직자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르로 기리며, 최고의 예우를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칸트가 자신의 인식론상의 입장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말입니다.
일단  단어의 뜻부터  면밀히 보게 되면  코페르니쿠스는  몇 천년동안 천동설을 믿던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지동설을 주장하며 잘못된 관념에 대해 경종을 울렸던 사람이죠.

그와 같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여지껏 인식해오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보편적 관념에 일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인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합시다. 다이아몬드 자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는 다이아몬드가 보입니다. 다이아몬드 그 자체에 대해 우리는 인지하는 것이죠.

그러나 칸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주관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빨간색 안경을 쓰고 태어난 아기는 평생 빨간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죠?
그와 같이 인간의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눈의 인식이라고 해도 이것은 인간의 눈이 인식한 것이고 다이아몬드를 완전히 인식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눈이 몇 만 화소를 보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보다 더 높은 화소나 우리가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꿀벌의  눈의 시각과  우리 눈의 시각이 다르듯이 말이죠.

이러한 혁명적 사고는 근대 인간중심주의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과거 천년 이상 지배해온 유럽 크리스트교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사상이었죠.

그 당시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고 우리가 밥을 먹듯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무신론적 사고도 가능하며 (칸트는 유신론자지만) 인간중심사회인 르네상스를 이끄는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대상을 객관적으로만 바라본 철학에 인간은 주관적으로 인식한다는 큰 사고의 전환을 일으켰습니다.


짧은 논문을 통해 지동설에 관한 구상 세워

코페르니쿠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로 가서 볼로냐 대학에서 신학, 법학, 고전학을 공부했지만 주된 관심은 천문학이었다. 파도바 대학, 페라라 대학 등에서도 공부한 그는 1500년 로마에 머무르며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했다.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의학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는 1505년경부터 플라우엔부르크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법학 지식으로 교구 행정에 참여했으며, 수학 지식으로 통화(通貨)와 경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성당 참사회 입장에서 그는 매 우 쓸모가 많은 ‘준비된 인재’였다.

 

1513년 코페르니쿠스는 성당 참사회의 상회에서 800개의 돌과 석회를 구입했다. 천문 관측을 위한 지붕 없는 탑을 쌓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천문 관측기술의 한계 탓에, 그의 관측이 새로운 천문이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514년에는 교황의 비서관으로부터 교회력 개정을 위한 회의 참석을 요청 받았지만 거절했고, 다만 달력 개정을 위해서는 태양과 달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의견만 제출했다.

 

1510~1514년 사이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 천문체계에 관한 개략적인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짧은 논문으로 작성했다. ‘천체 운동에 관해 구성한 가설에 대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소론(小論)’, 줄여서 [소론]이라 일컫는 논문이다. 논문 제목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아니라 그것을 필사하여 유포시킨 이들이 붙인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논문을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포했다(정식 인쇄본 출간은 1878년). 이 논문에서 그는 본격적인 수학적 설명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천문학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구가 움직이는 태양 중심 체계를 가설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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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애

   1] 폴란드의 부유한 상인 아들로 태어남

   2]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가톨릭교회 신부인 외삼촌 루카스 바첼로드 밑에서 자랐다.

   3]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5년에서 1505년까지 약 10년간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이아의 볼로냐 대학과 파도바 대학 등지에서 법학, 의학, 재정학, 수학 및 천문학 등을 배웠다.

   4] 당시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각 대학은 그리스 고전 번역에 활발하게 참여하였고

   5] 코페르니쿠스는 그리스 시대의 문헌을 번역하거나 당시의 번역 서적을 읽으면서 고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6] 1500년경에 처음으로 천문학자들과 월식의 광경을 관찰하면서 월식의 진행 방향 등 천문학적 현상을 자세히 그려 주변 사람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2.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갖는 모순을 발견하였다.

   1] 1512년 고국으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교회 일을 도우면서 교회의 옥상에 관측시설을 설치하고 천문학 연구에 심취하였다.

   2] 천체를 관측하면서 당시 행성 운행표가 갖는 오류를 발견하여 그 원인을 찾는데 골몰하였다.

   3] 또 프톨레마이오스의 라틴어 번역서인 알마게스트를 접한 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가 실제 관측 사실과 다른 모순점을 발견하였다.

3. 코페르니쿠스가 보기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는 행성의 정지와 역행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1] 우주가 수적 조화에 따라 운행된다는 피타고라스적 신념이

      1)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쳤고

      2) 코페르니쿠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우주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체계를 보여주지 못했다.

   3]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달력은 수정과 보완에도 불구하고 오차가 쌓였다.

      - 간접적이긴 하지만 천문학 체계의 변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4. 고대 그리스 천문학 문헌 가운데 태양중심의 우주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함

   1]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의 태양중심설

      1) 관측을 토대로 한 천문학적 연구소산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

      2) 불 숭배라는 종교적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고 추측되는 직관의 산물

   2] 코페르니쿠스로서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한 셈

   3] 이후 무려 30 년이 넘도록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대신할 하나의 대안을 완성해 간다.

5.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중심의 우주 체계 대신 태양 중심의 새로운 우주 체계를 고안하였다.

   2] 코페르니쿠스는 1510~1514년 사이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코멘타리올루스(Commentariolus)라는 짧은 논평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3] 코페르니쿠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자신의 논문의 출판을 보류한 채 가까운 친구들에게 돌렸다.

   4]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우주 체계를 발전 시켜 1530년에 책으로 완성하였다.

   5] 그 책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채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하던 1543년에 뉘른베르크에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revolutionnibus orbium coelesti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6] 그 책의 출판을 주도한 루터파 목사 오지안더(Andreas Osiander)는 책의 서문에서 지동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적어 종교와 마찰을 피하고자 했다.

      1)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은 사실을 기록 한 것이 아니라 천문학자들이 더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편리한 수학적 도구라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2) 오지안더의 서문 덕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은 신학적 반발을 피할 수 있었고 교회의 금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6. 책의 발간과 관련하여

   1]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조심스럽게 출판한 이유는 그의 성격과 사회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2] 기독교 사회에서 평생 신부로 재직하면서 천문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하는 것을 기독교 사회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겼다.

   3] 기독교 사회에서 평생동안 사회적 안위를 누리며 산 사람으로서 천문학을 연구하도록 하고 또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시켜준 지구 중심설을 깨뜨린다는 것은 신중하면서 겁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4]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는 혁명가 스타일은 아니었다.

7.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

      - 천년이 넘도록 진리로 군림해온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맞서 새로운 체계를 세운 발상의 전환에 대해서 경의를 표함

8.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나타난 지동설

   1]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주전원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

   2] 행성의 순행이나 역행도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함

9.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의 한계

   1] 행성의 원운동을 고수하는 제한된 개혁이다. -> 주전원을 다시 도입

   2] 우주가 천체에 붙어있는 투명한 수정구로 둘러싸여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3] 지구가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공전하는데도 사람들이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10. 코페르니쿠스 평가

   1] 최초의 근대적 천문학자

      1)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을 포함하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깨뜨렸다는 점과

      2)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2] 최후의 고대 천문학자

      1) 일정한 원운동에 의해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계자였다.

   3] 토마스 쿤의 평가

      1) 프톨레마이오스적 천문학자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적 천문학자이며

      2) 혁명을 주도한 인물이라기보다는 혁명의 기반을 다진 천문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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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격의 대표적인 특징

2. 남자들에게 기대할수 있는 가장 좋은 점(남자의 미덕)

3. 여자들에게 기대할수 있는 가장 좋은 점(여자의 미덕)

4. 결정적인 단점

5. 좋아하는 일

6. 나의 행복한 꿈?(당신이 꿈꾸는 행복은 무엇?)

7. 가장 큰 불행은 무엇?

8. 뭐가 되고 싶은가?

9.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10.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남자 주인공?

11. 가장 좋아하는 소설의 여자 주인공?

12. 현실속에서 나의 영웅(존경하는 모델)

13. 역사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주인공?

14. 가장 싫어하는것?

15. 역사상 가장 경멸하는 인물상?

16. 가장 소유하고 싶은 천부적인 재능?

17.  어떻게 죽고 싶은가?

18. 가장 용서하고 싶은 나의 과오는?

19. 나의 신조?

20.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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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질문"에 답한 세 사람 (프루스트, 마르크스, 마르케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문답놀이 중에 "프루스트의 질문 Le Questionnaire de Proust"이란 게 있다.
19세기 파리 살롱가에서 여흥거리로 유행했던 놀이였다는데, 
후일『익스프레시옹』지에서 유명 인사들의 사고와 감정을 알아보는 질문지로 적극 활용하면서 인터뷰를 대신해 널리 쓰이고 있는 설문이다.
프루스트가 13살 때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이 문답놀이를 한 후, 
그 질문들을 정리하여 "Birthday Book"에 남겼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질문"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한 TV 방송국에서는 저 질문을 제목으로 하는 명사 인터뷰 프로그램을 20 년째 방송하고 있다. 
(책으로도 발간되었다.)

인터넷에서 프루스트 자신이 그 질문에 남긴 답들을 발견하였기에 이곳에 갈무리 해둔다. (스무살 때 답한 것.)
더불어 마르크스, 마르케스 - 의 답변도 같이 묶어본다.



#. 당신 성격의 가장 큰 특징은? 
프루스트 :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좀 더 정확히는 날 칭찬하기 보다는 어루만쳐주거나 응석을 받아주길 바라는 욕구.
마르크스 : 목적의 단일함
마르케스 : 충성심.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도.

#. 당신의 최대 미덕은? 
마르크스 : 단순함
마르케스 : 죽을 때까지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능력

#. 당신의 결점은? 
프루스트 : 이해력의 결여와 약한 의지력
마르케스 : 비이성적 낙관주의.

#. 당신의 좌우명은?
프루스트 : 그 대답이 불운을 불러올까봐 두렵다, 대답하지 않겠다.
마르크스 : 모든 것은 의심해 봐야 한다. (De omnibus dubitandum.)

#. 당신이 꿈꾸는 행복은? 
프루스트 : 그리 높은 단계의 행복이 아닐까봐 걱정된다. 난 그게 뭔지 말할 용기도 없고, 만약 말한다면, 난 아마 그 행복을 몇마디 단어들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한 진술로 그 행복을 망쳐버리게 될 것이다.
마르케스 :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

#. 당신이 관대히 용서할 수 있는 실수는? 
프루스트 : 내가 이해하는 것들이라면. 
마르크스 : 속기 쉬움.
마르케스 : 허리 밑에서 저지르는 실수.

#. 당신이 꿈꾸는 이상은? 
마르크스 : 싸우는 것.
마르케스 :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

#. 당신의 최대 불행은? 
프루스트 : 내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전혀 알지 못했더라면....
마르크스 : 굴복하는 것. 
마르케스 : 내가 영원하지 않다고 속으로 의심하는 것.

#. 당신 친구들의 가장 좋은 점은?
프루스트 : 상냥함. (그들이 상냥함을 지닐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마르케스 : 아무 용무 없이 내게 전화 하는 것.

#. 제일 좋아하는 작가들은? 
프루스트 : 삐에르 로티. 요즘엔 아나톨 프랑스.
마르크스 : 디드로
마르케스 : 보름마다 바뀌지만, 끊이지 않는 사람은 소포클레스와 콘래드. 이번 주에는 멋진 자서전을 쓴 무하마드 알리.

#.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프루스트 : 보들레르와 알프레드 드 비니
마르크스 : 셰익스피어, 아이스킬로스, 괴테
마르케스 : 지금 현재는 카바피스. 페소아와 네루다.

#.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프루스트 : 다를뤼, 부트루 , 두 선생님.
마르크스 ; 스파르타쿠스, 케플러
마르케스 : 불길한 예언에 포위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가장 좋아하는 격언은? 
마르크스 : nihil humane a me alienum puto(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마르케스 : 너무 고전적이라 출판할 수 없음!

#. 남자의 최대 자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프루스트 : 남성들만의 꾸밈없는 교우관계
마르크스 : 강함
마르케스 : 부드러움.

#. 여성 최대의 자질은? 
프루스트 : 여성적인 아름다움
마르크스 : 약함
마르케스 : 용서.

#.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프루스트 : 베토벤, 바그너, 슈만
마르케스 : 벨라 바르톡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프루스트 :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마르케스 : 고야. 하지만 12시 이전에는 결코 좋아하지 않음.

#. 가장 좋아하는 꽃은? 
프루스트 : 그녀의 것.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모든 꽟을 좋아한다.
마르크스 : 월계수
마르케스 :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메르세데스가 매일 아침 책상에 꽂아 놓는 빨간 장미.

#. 좋아하는 색은? 
프루스트 : 아름다움은 색이 아니라 색의 조화 속에 있다.
마르크스 : 빨강
마르케스 : 자마이카에서 보이는 오후 세시의 카리브 해의 노란색.

#. 가장 좋아하는 새는? 
프루스트 : 제비
마르케스 : 오렌지색 오리

#. 가장 싫어하는 것은? 
프루스트 : 내가 지닌 최악의 단점들
마르크스 : 노예근성
마르케스 : 일요일.

#. 가장 혐오하는 역사적 인물은? 
프루스트 :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역사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마르크스 : 마틴 터퍼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대중작가)
마르케스 : 콜럼버스와 산탄데르 장군.

#.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프루스트 : 베레니케 berenice (보통 베레니스라고 부르는 연극(라신느)에 나오는 여주인공으로 머리 털자리의 전설을 낳은 고대 이집트 왕비.
마르크스 : 그레트헨(괴테의 '파우스트' 1부의 주인공)
마르케스 : 가르강튀아, 단테와 드라큘라 백작.

# .가장 좋아하는 군사행위는? 
프루스트 : 나 자신이 지원병으로 응모했던 일
마르케스 : 열다섯 명의 생존자를 구해낸 작업.

#. 당신이 갖고 싶은 천부적 재질은?
프루스트 : 의지력과 저항할 수 없는 매력
마르케스 : 점칠 수 있는 능력

# .어떻게 죽고 싶은가? 
프루스트 : 지금의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 무척 사랑받으면서...
마르케스 : 친구들에 둘러싸여 침대에서 죽고 싶음.

#.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프루스트 : 내가 바라는 일들만이 실현되는 곳 그리고 늘 사람들이 부드러운 감정들을 주고받는 곳
마르케스 : 지오콘다 깊숙이 있는 슬픈 개울 옆에서.

#. 가장 되고 싶었던 사람은? 
프루스트 :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
마르케스 : 장터의 마술사.

#.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맑스 : 라우라, 예니 (딸들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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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맑스의 답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 단순함 
당신이 남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 강함
당신이 여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미덕은 : 약함
당신의 주요한 특징은 : 목적의 단일함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 싸우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불행이란 : 굴복하는 것
당신이 가장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악덕은 : 속기 쉬움
당신이 가장 혐오하는 악덕은 : 노예근성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 마틴 터퍼 (빅토리아여왕시대의 대중작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 책에 파묻히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 셰익스피어,아이스킬로스, 괴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산문작가는 : 디드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은 : 스파르타쿠스, 케플러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주인공은 : 그레트헨 (괴테의 파우스트 1부의 주인공)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 월계수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 빨강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 라우라, 예니 (딸들의 이름)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 생선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 nihil humane a me alienum puto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 De omnibus dubitandum (모든 것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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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안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어릴 적 읽었던 책부터 시대를 주름잡았던 베스트셀러까지 가득 꾸며진 책장을 바라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겠단 생각으로 하나하나 꼽아뒀지만 생각만큼 손이 가게 되질 않는다. 더 이상 모아둘 공간도 없는데 막상 버리자니 아깝다.

이럴 때 책장 안 잠자는 책들에게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건 어떨까. 그야말로 책에게 주는 광복절 특사다. 책에도 자유를 주자는 목소리들이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날로 높아져 가고 있 다. 근데 어떻게 자유를 주라는 걸까.

직장인 김은경씨(32세). 우연히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공원벤치에서 주인 없는 책 한 권을 주웠다. 겉표지엔 이름은 적혀 있질 않고 알 수 없는 번호가 적혀 있다. 바코드도 아니고 이게 뭘까.

마침 갖고 싶었던 책이고 궁금하기도 해서 일단 가져와 책에 적혀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북크로싱…’이란 말이 뜬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떤 사이트인지 더욱 궁금 해 회원가입까지 하는 김씨. 30여분쯤 둘러보고 난 후 김씨는 자신의 책꽂이에 서 잠자고 있던 책을 꺼내든다. 그리고 주인 없는 책에서 봤던 그 표식(스티커 )을 해당 사이트에서 내려받기 한 후 김씨의 책에 정성스럽게 붙인다. 마치 날 개를 달아주듯. 사람들이 잘 다니는 곳을 곰곰 생각하다 인근 지하철역 부스에 내려놓고 돌아선다. 책은 그렇게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이게 바로 ‘북크로싱(Book Crossing) 운동’이다. 예전 ‘아나바다’ 운동을 기억하면 이해하기 더 쉽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 절약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책도 마찬가지로 서로 바꿔 읽자는 운동이다.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더욱 광범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온라인 모임을 활용하는 것.

북크로싱 운동은 2001년 미국인 론 혼베이커(Ron Hornbaker, 37)가 만든 사이 트 www.bookcrossing.com으로부터 시작됐다. 소프트웨어 운영자였던 론 혼베이 커는 읽기(Read)·쓰기(Register)·양도(Release)라는 ‘3R’ 슬로건을 갖고 창안해 낸 것이다. 이 사이트는 전세계에서 매일 500여명, 매년 20만명 이상이 회원으로 등록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우리 나라 역시 바통을 이어받았다.

온라인시대를 맞아 출판시장이 심각한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예상 외로 인터넷 구입 말고도 블로그, 카페, 미니홈피 등 책을 위한 소그룹 모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책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지난해 3월 ‘당신의 책에 자유를 주라’는 목소리를 내며 ‘프리유어북(www.f reeyourbook.com)’이 태어났다.

북크로싱의 원조격인 론 혼베이커 사이트를 열심히 들락거리며 직접 도움도 받 아 북크로싱 운동 전문 사이트를 만들었다. 현재 등록된 도서는 2830권이며 회 원수는 4000여명으로 게시판을 통해 회원간 의견 나눔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프리유어북 대표 김정호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망라하는 즐거운 지적 여행이며 동시에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실제로 만남의 기회를 갖게 하는 여 행입니다”라며 북크로싱 운동을 설명한다.

책에 돛을 달아 항해를 시킨다는 의미의 ‘돛단책(www.sailing book.com, 대표 안종권)’도 있다. 지난 9월부터 돛단책 항해가 시작됐다. 북크로싱을 순수 우 리말로 바꿔단 셈이다.

돛단책 사이트는 여러 가지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북크로싱이 잘 되고 있는지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 검색이 되는 것은 물론, 독후감이나 20자 서평대 회, 디카로 만나는 책, 연재방 등 다양한 코너가 있어 회원들 참여를 유도한다 . 연재방은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와 연계해 인터넷소설가가 직접 연재하는 재 밌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인터넷 통해 서로 바꿔보는 재미■

네이버 블로그 카페에서도 유명한 북크로싱 카페가 있다. ‘책에 날개를 다는 사람들(cafe.naver.com/crossingbookcafe)’이다. 닉네임 ‘나른고냥’으로 통 하는 차우진씨(31)가 책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들의 총책임을 맡고 있다. 200 4년 2월에 시작돼 가장 먼저 북크로싱을 움직인 주인공이다. 블로그답게 아기 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오프라인 모임 장소도 신촌과 대학로 카페를 지정해 둬 회원들이 더 편리하게 북크로싱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대한민국 사이버 도서관을 자처하는 ‘북모임(www.bookmoim.co.kr, 대표 성기 범)’ 역시 지난 9월 문을 열었다. 회원수는 4000여명을 넘어가고 있으며 등록 된 자료도 4만1036건에 이른다. 이중 등록 도서는 3만8093권이며 나머지는 DVD 와 CD등을 포함한다. 크로싱을 책에만 제한하지 않은 까닭이다. 또 북모임 사 이트를 통해 책을 살 경우에는 인터넷서점 예스24·알라딘·모닝365와 연계돼 있어 자동적으로 개인적립금 외의 2~3%가 북모임 앞으로 적립된다. 이것은 차 후 회원들에게 이벤트를 제공하거나 책이 필요한 곳에 사용될 목적이라고. 여 기엔 ‘마이서재’ 기능도 달려 있는데 요즘 인기 있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를 닮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책 목록을 올려놓으면 다른 회원들이 찾아와 빌려달 라고 리플을 달고 갈 수도 있으며 대여리스트까지 제공된다. 때문에 북크로싱 이 익숙지 않아 염려하는 회원들은 이 기능을 적극 이용하기도 한다.

성기범 대표는 “북크로싱 운동은 직장인들의 독서문화 정착에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며 “독서경영의 진정한 의미를 북모임의 북크로싱 서비스를 통해 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현재 KBS ‘책을 말하다’에서는 ‘북크로싱(Book Crossing)’에 대한 우리말 명칭을 공모하고 있다. 기간은 채택될 때 까지다. 그야말로 북크로싱의 취지를 십분 살릴 수 있는 이름이 나오길 학수고대 하고 있다. 채택된 네티즌 에겐 ‘TV 책을 말하다’가 선정한 테마북을 증정해 북크로싱 운동이 되게끔 한다.

일반인들 중 아직까지 북크로싱 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문득 길 을 가다 새주인 만나기를 갈망하는 책을 만난다면 얼른 집어들어 보자.

갖고 싶었던 책이라고 슬쩍 집안 책꽂이에 꽂아놓을 수도 있을테지만 해방되고 방생된 책을 그냥 가둬두진 못할 것이다. 책 돌려보기를 통해 성숙한 시민의식 과 함께 사장된 책을 다시 살려내는 소중함을 함께 맛보길 기대한다.

 

▷잠깐 용어

·북크로싱(Book Crossing)운동 : 책을 읽은 후, 책과 함께 북크로싱 메시지를 적어 공공장소에 놔두면 다음에 습득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다음 사람에게 책을 넘기는 방식. 예측 불가능한 책 릴레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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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도 [Libido]
정신분석학 용어로 성본능(性本能)·성충동(性衝動)의 뜻.
이 말은 보통 말하는 성욕, 다시 말해 성기()와 성기의 접합을 바라는 욕망과는 다른, 넓은 개념이다. S.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사춘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서서히 발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본능은 구순기(항문기()를 통해 발달하다가 5세경 절정에 이른 후, 억압을 받아 잠재기에 이르고, 사춘기에 다시 성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도는, 중도에서 발달이 중지되기도 하고[], 완전히 발달했다가 거꾸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다[退]. 이상성욕이나 신경증()이 이에 속한다.

또한 리비도는 대상에 주입()되어 축적되는데, 이러한 리비도를 대상() 리비도라고 한다. 우정, 부자간의 정, 연애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자아()에게 주입된 리비도를 자아 리비도 또는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라 한다. 자기의 건강상태를 이상스러울 정도로 걱정하는 상태, 말하자면 심기증() 같은 것이 그것이다. 

리비도가 충족되기를 바라다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불안으로 변한다. 또한 리비도는 승화되어 정신활동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처음에 리비도를 자기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이 둘을 결합, 에로스(영원의 결합을 구하는 본능)라고 하여 죽음의 본능, 즉 삶을 파괴하려는 본능과 대립시켰다.


오이디푸스 [Oedipu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퉁퉁 부은 발'이라는 뜻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에피카스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라이오스는 이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을 받았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나자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서 키타이론의 산중에 내다 버렸다. 아이는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이 주워다 길러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란다. 청년이 된 왕자는 자기의 뿌리를 알고자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앞의 내용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를 피하려고 방랑하다가 테베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나 사소한 시비 끝에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 노인이 곧 자기의 부친인 것을 모르고 죽인 것이다. 당시 테베에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는 사람을 잡아먹고 있었다. 여왕은 이 괴물을 죽이는 자에게 왕위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때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어 스핑크스를 죽인 후 왕위에 올랐고, 모친인 줄도 모르고 왕비를 아내로 삼았다. 둘 사이에는 네 자녀가 태어났는데, 왕가의 불륜이 사단이 되어 테베에 나쁜 병이 나돈다. 오이디푸스는 그 원인이 자기 자신임을 알자 두 눈을 뽑아내고 방랑의 길을 떠나 코로노스의 성림()에서 죽었다. 여왕도 자살하고 나머지 자녀들도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으로 모두 죽고 말았다. 시인 소포클레스는 이 전설을 비극 3부곡 《오이디푸스왕》에서 다루었는데 이 이야기가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으리라 생각된다. 신화 학자들은 이 근저에는 하나의 농경 제식에서 발단된 신화가 있다고 본다. 그 설명에 따르면 오이디푸스는 해의 신이고 이오카스테는 땅의 신이다. 해의 신은 해마다 땅의 아들로 태어나 묵은 해인 아버지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갈고 일구는 지아비가 된다. 또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이것은 유아의 어머니에 대한 독점애의 공상적 실현, 즉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그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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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어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정책 국민경제가 좌초되는 실패를 가져왔고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류사오치 (유소기)와 덩샤오핑 (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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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

1950년대 말에 마오쩌둥의 농업정책과 그로 인한 군중운동을 말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화 방안을 내세웠는데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를 개발하여 새로운 대형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대체하려 하였다대약진운동은 소련식 모델을 본뜬 산업화 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반동운동으로, 1960년대 중·소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또한 무리한 정책추진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1960년 초 중국 정부는 대약진운동을 철회하고사유지와 농기구를 농민에게 되돌려주게 되었으며각종 공사조직도 폐지되었다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당내의 분열을 초래해 1966 초에 일어난 문화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 가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규모 군중 운동이다.

 

문화 대혁명 일명 홍의병(홍의병)의 난 이라고 합니다

1948년 중국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한국전쟁 1960년대에 일어난 공산주의 수정론 즉(백가쟁명 백화제방론)

공산주의 보다 사회주의 로 수정하는 역사적 대 과업을 진행하게되었고 이에 모택통의 일인 권력기반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습니다

사회주의로 수정하는과정에  최초 공산당 이론이 다소 붕괴되자 중국사회 전반에 개인의 요구와 각계각층의 반론이 제기되기시작하자 모택동은 이 시점에 정신 혁명을 을 통한  중화사상을 통일시키고저  현대화 과정에 제동을 건  사회 혁명입니다.

이 주체는 모택동이며 이 과정에서 사회 혁명주체세력을 홍의병이란 민간 조직을 이용하여 제일 먼저 정적 탄압과 신문화 도입과 현대화 주장을 한 이론가들을 숙청하기시작하였습니다

 

 

중국에 미치는영향 

중국은 전통적으로 홍(紅)과 전(專)이란 단어를 중시하였는데 여기서 홍은 정신을  전은 기술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홍의병(紅義兵) 정신무장즉 혁명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병사라는 말입니다 모택동은 이 홍의병을 뒤에서 조종하여 많은 정적과 현대화를 주장한 이론가들을 대거 숙청한  20세기 의 분서갱유라고 보면 됩니다  현대화 보다 정신무장을 앞세운사회 개혁운동인데 이 배후는 모택동의 권력기반을 확고히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모택동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중국이 더 일찍 개방되고 현대화 되었을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것이며  아마 그때 개방되었으면 중국은 지금쯤  나라가 사분 오열되어 오늘의 중국은 없을을것입니다

 

이 문화 혁명으로 모택동의 권력유지로인해 개방 개혁은 후퇴하였으며 오히려 사상무장을로인한 공산독재 체제 강화를 가저다 준것입니다 중국은 등소평집권부터 개방과 개혁을 추구하게된 역사적 물결에 시행착오를가저온 결과 입니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발단과 전개과정





1965년 11월10일 상하이의 일간지 문회보에 경극 대본 '해서파관'을 집필한 역사학자이며 북경시 부시장인 우한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하다'가 실렸다. '해서파관'은 명대의 청렴한 관리 해서가 백성들을 위해 황제에게 상소했다가 억울하게 파직된다는 내용이다. 글을 쓴 야오원위안(상해시위원회 정책연구실)은 우한이 마오쩌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옹호한다고 비판했다. 펑더화이를 청렴한 관리 해서로 높이고, 모택동을 해서를 파직시킨 가정제로 폄하했다는 것이다.


1950년대 말 중국은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심각한 식량난, 경제난에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펑더화이는 1959년에 대약진 정책을 비판하다가 숙청되었다. 이후 1961년부터 리우샤오치와 덩샤오핑이 다분히 실용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어느 정도 복구하는 성과를 올렸다.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위치가 흔들리게 된 셈이었고, 이에 마오의 처 지앙칭 일파는 '해서파관'을 공산당 내 우파의 좌파에 대한 공세로 간주하여 야오원위안으로 하여금 문제의 글을 집필하도록 했던 것이다. 대약진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 공산당 내부의 노선 대립과 권력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1966년 8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역시 같은 해 8월에 티엔안먼(天安門)광장에서 열린 백만인 집회에 모인 홍위병들은 전국 각지에 진출하여 마오쩌똥 사상을 찬양하고 전통 문화와 가치, 부르지와적인 것을 일소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1967년 1월 28일에 마오쩌둥은 린뺘오(林彪) 휘하의 인민해방군이 문화대혁명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했다. 인민해방군은 학교, 공장, 정부기관을 접수하는 한편 초기에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수백만의 홍위병마저 오지로 추방했다. 문화대혁명은 1969년 4월 제9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마오쩌똥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되고, 린뺘오가 후계자로 결정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후 1971년 9월 린뺘오가 소련으로 탈출하려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리우샤오치, 덩샤오핑을 공격하면서 협력했던 린뺘오와 지앙칭 일파는 린뺘오가 국가주석에 오르는 문제로 대립했고, 린뺘오는 2인자의 부각을 용납지 않는 마오의 눈밖에 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덩샤오핑은 1973년에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지만, 1976년 1월에 저우언라이가 사망함으로써 지앙칭 일파의 공격을 받아 실각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지앙칭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의 제1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으며, 이후 1981년 6월에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로 규정했다.


공산당 내 좌파는 마오쩌둥을 절대시하면서, 계급 투쟁, 평등, 배외주의 등을 강조했고, 우파는 경제 발전, 교육, 실용주의 외교 등을 강조했다. 문화대혁명을 사상적으로 볼 때 평등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경제가 피폐해졌으며, 전통 문화와 가치가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사회적인 혼란이 극에 달했다. 또한 사상적인 노선 갈등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공산당 내 권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빛과 그늘; 그 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10년간 중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정치적·사회적 동란. 중국에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라 했던 이 혁명은 사회주의 사회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사회를 격심하게 뒤흔들어 전례없는 혼란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66년 여름에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갑자기 출현했던 홍위병 운동과 정치지도자의 잇단 실각과 마오쩌둥 절대권력의 확립이라는 사태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대변동이었다.


〔당시의 규정〕 중국에서는 당시 문화대혁명을 <사람의 혼을 움직이는 혁명>이라 강조하였고, <중국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구분짓는 것으로 공식 규정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62년 9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0회 전체회의(약칭 제8기 10중전회)에서 전당(全黨)·전인민에게 내렸던 <절대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출발점으로 한 것인데, 이 <혁명>의 최대 목표는 사회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관철에 있었으며, 우선은 <당내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한 줌의 실권파>를 뿌리째 타도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 했다.


〔3가지 측면〕 문화대혁명은 일관하여 중국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적인 성질과 당내투쟁의 대중운동화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 3가지가 있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문화대혁명 제1단계에서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린뱌오〔林彪〕를 당부주석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삼는 새로운 정치적 지도권을 강행적으로 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린뱌오를 중심으로 한 인민해방군의 주도에 의하지 않는 한, 류사오치〔劉少奇〕·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이른바 실권파 세력으로부터의 탈권(奪權)이 불가능했다는 것도 나타냈으며, 여기에 병영(兵營) 체제화한 중국 권력중추의 정치위기의 내부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71년 9월 일어난 충격적 린뱌오이변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볼 때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문예정풍(文藝整風)>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종래의 문화나 가치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측면도 있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회가 그 발전단계에서 인류문화유산을 어떻게 계승하여 나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 점에서 중국은 자기 문명사를 철저하게 고쳐 쓰려는 듯했으나 <마오쩌둥사상>의 절대화는 사상이나 문화를 본래적인 생명에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의 기능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빈곤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중국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마오쩌둥의 의식에는 도시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새로운 계층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한편 절대적인 마오쩌둥 가부장체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단계에 중국 민중의 저항을 받고 중국전통사회의 두꺼운 벽에 부딪쳐 마오쩌둥의 이상은 마침내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75년 여름의 항저우사건〔杭州事件〕, 76년 4월의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 정치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었고, 같은해 10월 베이징정변〔北京政變〕으로 마오쩌둥 측근인 <사인방(四人幇)>은 실각되고 말았다.


〔전개과정〕 마오쩌둥은 장칭〔江靑〕·장춘차오〔張春橋〕 등 이른바 <장칭문예살롱> 인사들이 모였던 상하이에서 문학대혁명의 개막을 알리고, 65년 11월 10일 젊은 문예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당시 상하이시당위원회 서기〕은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역사학자로서 이름난 베이징시 부시장인 우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시작했다. 우한 비판은 베이징의 지도적 지식인들, 이른바 <삼가촌(三家村)그룹>에 대한 비판 쪽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윽고 당베이징시당위원회가 실권파 아성이라고 격렬히 비판되었고, 펑전〔彭眞〕·베이징시장(당베이징시 위원회 제1서기) 등이 일제히 규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66년 4월 상순, 베이징시 당위원회가 개편되었고, 4월 18일자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 사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으로 처음 공식규명했다. 이어서 5월 16일 문화대혁명의 신호나팔 구실을 했던 당 중앙 <통지>를 공포하고, 당 중앙 문혁소조(조장 陳伯達, 제1부조장 장칭)를 설치했다. 이윽고 5월 25일 베이징대학의 젊은 여성교사 녜위안츠가 교장 루핑〔陵平〕 등을 <삼가촌그룹>의 일파라고 격렬히 비난한 대자보를 붙였다. 6월 1일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전국에 방송토록 지시하고, 이를 <20세기 60년대 중국의 파리고뮌 선언서>라고 찬양했다. 6월 3일 펑전 등의 해임과 베이징시당위원회의 개편을 발표하고, 실권파 아성의 붕괴를 알림과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을 견지해 온 린뱌오의 공적이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마오쩌둥은 회기중이었던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자―나의 대자보>를 스스로 붙였고, 8월 8일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 제1회 100만명집회에 모였던 홍위병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가두진출하여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면서 격렬한 구문화(舊文化) 파괴행동을 벌였다. 문화대혁명은 홍위병 중심의 가두투쟁단계에서 실권파 타도를 위한 탈권투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실권파의 저항도 끈질겨 각지에서 탈권과 반탈권 사이의 무력투쟁이 계속되었을 때, 린뱌오휘하의 인민해방군은 67년 1월 23일 탈권투쟁에 대한 군(軍)의 전면개입을 결정했다. <1월혁명>이라는 상하이의 탈권투쟁에서 상하이의 반란파는 코뮌형 권력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으나, 마오쩌둥 등 당 중앙은 이 코뮌구상을 갑자기 눌러버렸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그 뒤 마오쩌둥·린뱌오주류파는 혁명파의 <대연합>에 의한 탈권을 호소하며 혁명간부, 군(軍) 대표, 혁명적 대중대표로 이루어진 <삼결합(三結合)>의 혁명위원회를 수립하라고 호소했고, 혁명위원회는 68년 9월까지 전국의 모든 1급 행정구에 성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약칭 9전대회)가 69년 4월에, 56년의 8전대회 이래 13년만에 열렸다. 이 9전대회는 문화대혁명이 위로부터의 당재건이라는 큰 전환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오쩌둥의 비길 데 없는 권위를 확립하고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의식이었다. 그 동안 마오쩌둥 측근으로 문혁소조 조장이었던 천보다〔陳伯達〕는 70년 8~9월 제 9 기 2중전회에서 <대야심가·음모가>라 하여 실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린뱌오이변이었다. 린뱌오이변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73년 7월 중국당국은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몽골에서 추락사하였다고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의 한 중대한 결말이 된 린뱌오이변이라는 심각한 사건 후인 73년 8월 중국공산당 10전대회가 열렸다. 10전대회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정치보고, 왕훙원〔王洪文〕의 당규약개정 보고를 채택한 뒤에 새로운 중앙 지도부를 선출했다. 중앙위원회 주석에 마오쩌둥을, 부주석에 9전대회 때 부주석이 린뱌오 단 한 사람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왕훙원·캉성〔康生〕·예젠잉〔葉劍英〕·리더성〔李德生〕 등 5명을 선출했다. 이 10전대회는 린뱌오 처단과 대(對)소련 비난을 거당적으로 실시한 의식을 나타냈으나, <마오쩌둥체제하의 비(非)마오쩌둥화>와 탈문화대혁명을 지향하는 <조류(潮流)>의 크기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10전대회 전후에 일어난 공자비판(孔子批判)·시황제예찬(始皇帝禮讚) 운동은 이윽고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되어 이른바 <반조류>의 반격이 일어나 마오쩌둥체제 말기의 내부각축은 차츰 치열해갔다. 75년 여름에 일어난 항저우사건은 공장노동자의 임금인상요구동맹파업이 몰고 온 항저우 일대의 혼란을 군대가 제압한 사건이었고, <빈곤의 유토피아>를 강제해왔던 마오쩌둥체제의 말기적인 사회적 모순을 안으로부터 노정시킨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조류>와 <반조류>가 내부적으로 각축하는 가운데, 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총리는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읽었던 덩샤오핑부총리는 감히 <4개의 현대화>노선 계승을 문혁파 지도자의 면전에서 서약하여 문혁파들을 크게 초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주자파(走資派)> 비판운동이 76년 2월 초순부터 일제히 전개되었다. 2월 초순에는 문혁파 비(非)상하이그룹의 화궈펑〔華國鋒〕이 국무원총리대행으로 마오쩌둥의 지명을 받아 일약 부각되었으나, 이러한 <역류>에 대한 대중적 항의로 일어난 것이 천안문사건이었다. 당 중앙은 이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단죄하고 덩샤오핑을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켰으나, 후에 천안문사건이 재평가되었을 때에는 <위대한 4·5운동>으로 찬양되었듯이 천안문사건은 마오쩌둥체제하의 대중반란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중국의 권력중추는 마오쩌둥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후계권력 싸움이 마오쩌둥 측근체제 내부에서 격화되었다. 마오쩌둥의 죽음을 결정적인 계기로 하여 10월 7일에는 <기정방침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마오쩌둥의 유훈(遺訓)을 내걸고, 권력계승권을 재빨리 주장했던 문혁파 상하이 그룹인 <사인방>이 모두 실각하는 충격적인 베이징정변과 함께 화궈펑체제가 일거에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화궈펑은 마오쩌둥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당신이 한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또 하나의 마오쩌둥 유훈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그림자>는 이윽고 중국내정 전체의 마오쩌둥화가 진전됨에 따라 화궈펑의 정치적 장래를 흐리게 하여 77년 7월에는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재부활되었다. 같은 해 8월의 중국공산당 제11기전대회에서는 새로운 당규약 가운데 <4개의 현대화>가 명기(明記)되었고, 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통일적인 국가목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은 오늘날의 <4개의 현대화>라는 노선(路線)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오늘날의 평가〕중국은 79년 10월 1일, 건국 30주년을 맞아 그 축하집회에서 예젠잉이 처음으로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81년 6월 중국공산당 제11기 6중전회에 의한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이 당의 결의에 의해 정식으로 부인되어 류사오치를 비롯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타도된 지도자 모두를 복귀 또는 명예회복시키는 한편, 문혁파는 모두 실추하여 비마오쩌둥화가 진전되었다.



문화 대혁명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규모 군중 운동입니다.



일명 홍의병의 난 이라고 합니다

1948년 중국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한국전쟁 1960년대에 일어난 공산주의 수정론 즉


공산주의 보다 사회주의 로 수정하는 역사적 대 과업을 진행하게되었고 이에 모택통의 일인 권력기반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었습니다  사회주의로 수정하는과정에  최초 공산당 이론이 다소 붕괴되자 중국사회 전반에 개인의 요구와 각계각층의 반론이 제기되기시작하자 모택동은 이 시점에 정신 혁명을 을 통한  중화사상을 통일시키고저  현대화 과정에 제동을 건  사회 혁명입니다.


이 주체는 모택동이며 이 과정에서 사회 혁명주체세력을 홍의병이란 민간 조직을 이용하여 제일 먼저 정적 탄압과 신문화 도입과 현대화 주장을 한 이론가들을 숙청하기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홍(紅)과 전(專)이란 단어를 중시하였는데 여기서 홍은 정신을  전은 기술을 의미 합니다  그래서 홍의병(紅義兵) 정신무장즉 혁명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병사라는 말입니다 모택동은 이 홍의병을 뒤에서 조종하여 많은 정적과 현대화를 주장한 이론가들을 대거 숙청하여 20세기 의 분서갱유라고 보면 됩니다  현대화 보다 정신무장을 앞세운사회 개혁운동인데 이 배후는 모택동의 권력기반을 확고히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모택동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중국이 더 일찍 개방되고 현대화 되었을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것이며  아마 그때 개방되었으면 중국은 지금쯤  나라가 사분 오열되어 오늘의 중국은 없을을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문혁은 중국의 발전을 위하고 일인 권력기반 확고하게하고  정신무장으로 이념정립 정적탄압 중국의 분열을 막을수잇는  진시황제 이후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게된 모택동의  정치 이념의 실천장이였다고 볼수잇습니다


이를방치했다간 중국은 분열될것이고 이 맥락에서 본다면 1990년 천안문사태도  국가 기반이 흔들리는 행위는 용납할수없다는 중국공산당의  중화 사상입니다  작년일어난  티벳사태도 이런 맥락과 연관을 을 갖고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올림픽을 포기하는한이 있드라도 중국의 분열을 사전  무력저지해야한다는  기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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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 ;
夙 ; 일찍, 새벽,
興 ; 일어나다, 시작하다.
夜 ; 밤.
寐 ; 잠잘 때.
箴 ; 경계하다.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辯)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과 정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하라.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이면 원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퇴계선생 말씀 ;

 위의 잠(箴)은 남당 진무경(陳茂卿)이 지어 스스로 경계한 것입니다. 금화 왕노재(王魯齋)가 일직이 태주의 상채(上蔡) 서원에서 교육을 맡았을 때, 오로지 이 잠만을 가르쳐, 배우는 사람들마다 모두 외고 익혀서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삼가 노재의 경재잠도를 본떠 이 도를 만들어 그의 도와 상대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래 경재잠에는 공부해야 할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에는 공부해야 할 때가 많이 적혀 있으므로, 그 때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의 유행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한 자리도 이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서 공부를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라도 정지되는 일이 없으므로 한 순간도 이가 없을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그만두어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자(子思子)는 이르기를, "道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삼가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또 "은밀한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곳이 없고, 세미(細微)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활에 있어, 장소와 때를 막론하고 존양(存養)하고 성찰하여 그 공부를 힘쓰게 하는 법입니다. 과연 이와 같 이 할 수 있으면, 어느 영역에서나 털끝만큼의 과오마저 없게 될 것이며, 어느 때나 순간의 끊임마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병진해야 합니다. 성인이 되는 요결, 그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도는 심성에 근원을 둔 것인데, 요점은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의 태도를 높이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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夙興夜寐箴(숙흥야매잠) 

鷄鳴而寤, 思慮漸馳. 盍於其間, 澹以整之.

(   계명이오,       사려점치.       합어기간,       담이정지   )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或省舊愆, 或紬新得. 次第條理, 瞭然默識.

(   혹성구건,       혹주신득.       차제조리,        요연묵식  )

▶혹은 지난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本旣立矣, 昧爽乃興. 盥櫛衣冠, 端坐斂形.

 (  본기입의,       매상내흥.        관즐의관,       단좌렴형   )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어라.

 

提掇此心, 皦如出日. 嚴肅整齊, 虛明靜一

(  제철차심,        교여출일.        엄숙정제,       허명정일   )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태도를 엄숙하게 겉모습을 단정히 하며, 마음을 비워 밝게 하고 조용히 하기를 한결같이 하라.

 

乃啓方冊, 對越聖賢. 夫子在坐, 顔曾後先.

(   내계방책,       대월성현.        부자재좌,       안증후선   )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여,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신 듯하라.

 

聖師所言, 親切敬聽. 弟子問辨, 反覆參訂.

(   성사소언,      친절경청.         제자문변,       반복참정   )

▶성현의 하신 말씀을 몸소 간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묻고 따지는 말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事至斯應, 則驗于爲. 明命赫然, 常目在之.

(   사지사응,       즉험우위.        명명혁연,       상목재지   )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이므로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事應旣已, 我則如故. 方寸湛然, 凝神息慮.

(   사응기이,       아즉여고.       방촌잠연,        응신식려   )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動靜循環, 惟心是監. 靜存動察, 勿貳勿參.

(   동정순환,       유심시감.       정존동찰,        물이물삼   )

▶움직임과 멈춤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멈출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피어 두 갈래 세 갈래로 하지 말라.

 

讀書之餘, 間以游泳. 發舒精神, 休養情性.

(   독서지여,       간이유영.       발서정신,        휴양정성   )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푸근히 하여 성정(性情)을 쉬게 하라.

 

日暮人倦, 昏氣易乘. 齋莊整齊, 振拔精明.

(    일모인권,       혼기이승.       재장정제,       진발정명   )

▶날이 저물고 사람이 피곤해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夜久斯寢, 齊手斂足, 不作思惟, 心神歸宿.

(   야구사침,        제수렴족,       부작사유,        심신귀숙   )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며,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가 쉬게 하라.

 

養以夜氣, 貞則復元. 念茲在茲, 日夕乾乾.

(   양이야기,        정즉복원.       염자재자,       일석건건   )

▶밤기운으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이면 원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잠들때까지 하루 일과에 대한 훈계.  ※夙(일찍 숙), 興(일어날 흥), 夜(밤 야), 寐(잠잘 매), 箴(경계할 잠)

 

☞숙흥야매 (夙興夜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자는 것”을 의미하며, 이 말은 《시경(詩經)》국풍ㆍ위풍(國風ㆍ衛風) “氓”, 소아ㆍ절남산지습(小雅ㆍ節南山之什)“小宛”,대아ㆍ탕지습(大雅ㆍ蕩之什)“抑”에 쓰여 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주역(周易)》건괘(乾卦)에 나오는 구절로, 정(貞)이 다시 원(元)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겨울이 가면 봄이 돌아온다는 것으로 소생(蘇生)을 의미한다.

 

☞허명정일(虛明靜一)이란 "마음을 비워 밝게 하고 조용히 하기를 한  결같이 하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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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

1.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2.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3.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마음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辨)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4.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 동과 정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6.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하라.


7. (그 심신을)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貞)이면 원(元)에 돌아오느니라.


8.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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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정해우 - 포정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

 

중국 전국시대에 소를 잡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포정()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포정이 궁정 잔치에 쓰일 소를 잡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왕이 그의 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있는가?
포정은 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소의 겉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지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9 년이 흐른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가게 합니다. 이런 기술로 단 한 번도 칼이 살이나 뼈와 부딪히는 실수를  적이 없습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 이유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백정은 칼을 가지고 소의 살을 베기 때문에 1년 만에 칼을 바꾼다. 그렇지만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았다. 소의 뼈와 근육 사이에는 어쨌든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새로 칼날을 집어 넣어 소를 잡기 때문에 칼날이 전혀 무뎌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포정의 소를 잡는 최고의 솜씨 뜻의 포정해우(押丁解牛)의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박사가 되지 말고 도를 깨우치기를  .....

 


춘추 전국시대 제(齊)나라에 소를 잡는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도우토(屠牛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의 소를 잡아도 칼이 전혀 무뎌지지 않아서 소의 털까지 자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는 도우토 보다도 더 소를 잘 잡았던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정의 포(庖)는 부엌 포 또는 요리사 포자이다. 정(丁)은 백정을 뜻하므로 포정이란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가 아니라 소를 아주 잘 잡았던 요리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제나라 문혜군(文惠君)의 주방장이기도 했던 포정은 소 한 마리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체 시킬 수 있었다. 어찌나 능수능란했던지 손 놀리는 것이나 어깨 위에 둘러매는 것, 발을 내디디는 것, 무릎으로 밀어치는 동작, 살점을 쪼개는 소리, 칼로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뽕나무 숲에서 춤을 추듯 음악에 맞고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해우(解牛)는 소를 해체하는 즉 소를 잡는 것을 뜻하므로 포정해우(庖丁解牛)란 포정의 소 잡는 기술을 나타내는 말이다. 포정은 무려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고 사용했지만 여전히 그가 사용하는 칼의 날은  무디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도우토 보다는 분명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문혜군은 토정의 해우술(解牛術)이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신기를 보유한 것에 감탄하여 물었다.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이 대답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니 소의 겉모습은 눈에 띄지 않고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부터는 마음으로 소를 보지 눈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눈의 감각 작용이 멈추니 자연스럽게 마음의 정신작용만 남았습니다. 그때 소의 이치에 따라 살과 뼈 근육 사이에 커다란 틈새 속으로 칼을 지나가게 합니다. 그 묘한 기술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
문혜군은 넋을 놓고 포정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말이 계속 되었다.


“솜씨 좋은 백정이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칼로 소의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월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소와 뼈와 살 사이에는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소의 틈새에 넣으니 칼날을 움직이는 데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킨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여 경계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펴보면 비로소 부위 별로 해체된 소고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그가 백정이 아니라 도를 깨쳤다는 것을 알았다.


소 잡는 백정은 신분이 가장 미천한 계층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도를 깨칠 수 있다는 것을 포정이 보여 주었다. 그는 소를 칼로 잡은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서 뼈와 뼈 사이로 칼을 지나가게 하는 이치에 따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소를 해체시킬 수 있는 경지를 터득한 도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박사가 된다. 그러나 박사 보다 한 수 위가 도사다. 도술은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상황에 부딪치며 경험과 수련의 반복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다. 빵을 어떻게 하면 영향학적으로 좋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박사학위 소유자는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공장에 들어가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갈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제빵 기술을 익힌 사람보다 더 맛있는 빵은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모두 자식을 박사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박사보다 한 수 위가 도인이다. 소를 잡는 것을 가지고도 도를 터득하는데, 요리를 하고, 차를 만들고, 배를 만드는 모든 분야에서 도를 깨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도는 말로서 알려 줄 수도 없고, 문자에 의해 깨닫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포정해우의 예만 보아도 분명해 진다. 지금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도를 깨우치기를 바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을 것이고 참고할 이론도 없다 오직 스스로 정진하여 깨우쳐야 한다. 치열하게 스스로의 내면을 다스리고, 정신을 집중시켜 처절하게 구하라.

깨치고 나면 자유로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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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반대어.

역()유토피아라고도 한다. 가공의 이상향, 즉 현실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묘사하는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가장 부정적인 암흑세계의 픽션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작품 및 사상을 가리킨다.

대표 작품으로는, A.L.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G.오웰의 《1984년》(1949) 등이 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 속에 있는 위험한 경향을 미래사회로 확대 투영함으로써 현대인이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명확히 지적하는 점에서 매우 유효한 방법이다. 미래를 진지하게 논하려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쌍방의 시점에서 언급해야 한다.


유토피아 [Utopia]
[명사]
1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
2 <문학>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1515년에서 1516년 사이에 영국의 모어가 지은 공상 사회 소설.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민주주의 정치 체제 및 교육과 종교의 자유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가상(假想)의 이상국을 그린 작품으로, 유럽 사상사에서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였다.

 

디스토피아 [dystopia]
[명사]
1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 ≒역유토피아.
2 <문학>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허구로 그려 냄으로써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문학 작품. 또는 그 사상. ≒역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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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dystopia

 

토마스 모어의 '어디에도 없는 나라'인 유토피아(utopia)는 처음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고 사용되어졌건 간에 지금에 와서는 '이상향'의 전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은 이상이라는 것의 성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할 수 있는데요, 즉 이상이기 때문에 현실엔 없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결과적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주 이상적인 국가(혹은 사회상)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며 우리가 지향해야할 수렴점으로 그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의 낙원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에 반하여 등장한 디스토피아(dystopia)는 '역(逆)이상향'을 상징합니다.

초기엔 단순한 유토피아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던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사회적 현상이 된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독자적인 개념의 발전을 이루게됩니다.

현재에 와서는 비록 인지도는 낮지만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의 개념이 더욱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란 무엇일까요?

 

 

디스토피아는 인류가 현재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유토피아가 우리들의 미래에 펼쳐질 낙원이었다면 디스토피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미래향을 보여줍니다.

재미있게도 근래에 들어서 문학등을 포함한 각종 미디어에 의하여 거의 정형화된 디스토피아의 모델이 있습니다.

 

1. 불타버린 하늘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선 해가 뜨지 않습니다.

비록 아침이 있다곤 하지만 거의 묘사되지 않고 배경은 주로 밤, 아침이라 하여도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빛은 땅을 어루만지지 못합니다.

 

  Blade runner, 1982 실로 아름다운 하늘이다. 난 푸른색이 좋더라.

 

 

2. 무너진 치안

디스토피아에선 돈이 곧 법이자 정의 입니다.

더욱 강력해진 공권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 힘은 시민들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혹은 극단적으로 잔혹하거나 융통성따위는 없어보입니다.

 

Judge Dredd, 1995 좋은 예시 같지는 않지만 이런 경찰은 사양합니다.

 

 

3. 하늘을 불태운 중공업과 경공업에 몰락에 따른 생활 수준 저하

디스토피아의 하늘이 불타고 오염이 극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공업이 극단적으로 발달하는 사회기 때문입니다. 기술과학의 광적이고도 집착적인 진보와 탐욕의 끝을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결합은 중공업의 발달로 이루어지고 주로 대중의 삶의 질을 결정 짓는 생필품등과 연관된 경공업은 버려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Innocence, 2004 분명 대낮입니다. 아마 상하이 쪽 같은데... 상하이에 땅 사둔거 있으면 지금 다 팔아버리세요.

 

시간이 가속되어 저 먼 미래가 되었지만 디스토피아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금과 비슷한 의식주를 영위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비참해지면 비참해졌지 개선점은 단 한군대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Blade runner, 1982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난 미래엔 좀 더 좋은걸 먹고 싶다.

 

 

4. 사람보단 쥐에게 더욱 적합한 대도시와 위생

디스토피아의 세상엔 목가적 마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땅은 거대하다 못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강철의 도시로 덮혀있고 이 강철의 도시는 시도때도 없이 각종 오염물질을 뿜어냅니다.

공권력은 대중의 삶에 관심이 없고 경공업은 무너진 마당에 매일 밤 내리는 오염물질의 비는 도시를 하나의 거대한 쓰래기장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디스토피아 하면 떠오르는 색깔이 카키색이나 갈색, 혹은 회색인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람보다 쥐가 더 많을 것 같은 세상속에서 사람들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Innocence 2004, 찌뜬 사람들의 찌든 도시

 

 

5. 앞선 모든 예시들을 무시하는 좀 있는 사람들

여태 묘사한 디스토피아적 즐거운 삶은 모두 대중의 삶입니다. 반면 뿌리깊은 가문들과 세력으로 이루어진 권력층과 경제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진정한 '유토피아'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계층화를 넘어선 공공연한 계급화가 이루어진 이 세상속에서 공권력은 그들의 수족입니다.

 

Wonderful days. 2003 이 동네 선택받은 계급은 이런 곳에 삽니다.

 

 

6. 문명을 앞서간 과학과 기술이 개인의 삶에 지나치게 파고든 사회

몇몇 디스토피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우리가 그 본질을 미쳐 이해하기도 전에 과학이 발달하여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 들고 그에 따라 인간이 과학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인간성을 빼앗겨 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급속히 발전한 인공지능이라던가, 지나치게 사용되는 기계들은 인간성의 상실뿐만 아니라 몰인간화를 가속화 시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이는 종종 인간 사회의 아주 기본적인 원리인 교류 및 유대감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디스토피아는 앞선 몇가지 단편적인 예로볼때 결코 바람직한 세상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가 되면 절대로 안되는 세상인 것이죠.

하지만 이런 디스토피아가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지금 우리 사회속에서 소모된다는 것은 디스토피아의 어떠한 속성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음에 언급했지만, 바로 '현재'에 기반을 둔 문제이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았을 때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윤리의 사망, 근복적인 인간성의 상실, 침범되어져서는 안되는 기본들이 유린되었을때 우리의 세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갈림길에서 더욱 디스토피아의 결말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디스토피아적 문물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일종의 '경고'입니다.

SF문학이 대부분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점은 SF 특유의 비판적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그만큼 지금 현실이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움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합니다.

SF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리적 개연성이라는 기본 원리를 두고 쓰여지는 SF장르에서 유독 디스토피아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지금 세상의 모습을 다시 한번 재고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디스토피아의 또하나의 특징은, '현재'에 내재된 모든 문재점들은 외계인의 침략도 아니오 갑작스런 지구의 대격변도 아니오, 다름아닌 모두 '인간'스스로에게서 오는 문제점들이란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분명 수많은 문제점들과 모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모든 문제점들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디스토피아는 단순 흥미유발에서 나아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제시해줄 것 입니다.

 

결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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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즘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M.de 사드에서 유래된 명칭이며 ‘양성의 앨골래그니어(algolagnia)’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게 되는 마조히즘과 대응된다. 심층심리학의 시조인 S.프로이트는 모든 생리적 기능에는 사디즘이 숨어 있으며 마조히즘은 자기자신에게 향하는 사디즘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목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공격적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경향을 가리킬 때도 있다.

사디즘이라고 최초로 명명한 사람은 R.von 크라프트에빙인데, 사드 이전에도 문학이나 미술 속에서 사디즘의 표현을 볼 수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참을 수 없었던 사나이>의 에피소드가 있고, 루크레티우스가 저술한 《만상론()》에는 “죽음과 싸우고 있는 불행한 뱃사람의 조난을 언덕 위에서 구경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라는 글이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든지 성자의 순교나 지옥의 형벌을 그림으로 나타낸 중세의 회화에도 화가의 무의식적인 사디즘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한편 사드를 낭만주의의 원류라고 간주했던 문학사가() M.브라츠는 M.G.루이스의 《몽크》, C.R.매튜린의 《방랑자 멜모스》, C.P.보들레르, G.플로베르, H.스윈번, O.미르보의 《처형의 뜰》 등으로 이어지는 사디즘 문학의 계보를 만들었다. 보들레르는 “잔학성과 향락은 동일한 감각이다”라고 말하였고, 단눈치오는 “양성간의 극단적인 증오야말로 사랑의 기반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적인 이론의 바탕에도, 초현실주의의 ‘블랙유머’의 기반에도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마조히즘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사디즘(sadism)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L.R.von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젓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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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ochism

 

피학 성향, 피학대 성애[性愛]

Flogging demonstration at Folsom Street Fair 2004.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病的인 심리상태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게 하여 성애[性愛]의 충족을 이루고자 하는 성심리 장애이다.

이 용어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발리에 레오폴트 폰 자허 마조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매를 맞고 굴복당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에 대해 광범위한 저술을 펴냈다.
매저키즘과 관련된 고통의 정도는 약간의 폭행을 수반하는 의례적 모욕으로부터
심한 채찍질이나 구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학성향자[매저키스트 : Masochist]들은

 어느 정도의 상황통제력이 있기 때문에 학대가 지나쳐 심한 상처를 입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 사람에게도 고통이 어느 정도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는 있으나
피학성향자들에게는 고통이 성적 행위의 주된 목표가 된다.
이 용어는 모욕이나 학대상황을 추구하고 즐기는 사람의 행동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sadism[새디즘]에 대응하는 뜻을 지녔다.


Leopold von Sacher-Masoch. An 1860s photo. 

 

오스트리아[Austria]의 작가,

- L.R.von 자허마조흐[Leopold Ritter von Sacher-Masoch, 1836.1.27~1895.3.9]'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한다.

흔히 남녀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젖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從]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매저키즘만 독립된 특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보통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새디즘'을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한 사람이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흥분상태가 되기도 하고,
 역할을 바꾸어서 고통을 가함으로써 흥분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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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를 말한다.

무정부주의는 개인을 지배하는 국가권력 및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행하여지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하는 운동.

정부나 통치의 부재(不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an archos'에서 유래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윌리엄 고드윈,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 레오 톨스토이, 폴 굿먼, 허버트 리드, 미하일 바쿠닌, 페테르 크로포트킨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정부의자로는 신채호와 박열이 있다. 한국의 현대 무정부주의 운동은 3.1운동 후 1920년경부터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한 인사들,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간 유학생과 노동자들 가운데서 싹트기 시작하여 점차 국내로 번져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으로, 일본에서는 박열(朴烈) 등의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일본 천황 폭살 미수사건)>으로 한국 현대 무정부주의운 동의 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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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대표적 상징인 Circle-A 문양.

아나키즘(Anarchism, 프랑스어: Anarchisme 아나르시슴[*])은 모든 정치적인 조직·권력 따위를 부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이를 전파하고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αυ(없는)와 αρχοζ(지도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αυαρχοζ)에서 비롯된 말이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대신에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출처 필요] 역사에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페미니즘,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이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가) 사상

아나키즘은 그 특징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가 매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말하며, 이 외에도 다양한 성향이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이나 개인주의자들은 평등보다는 자유를 중요시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공산주의와 대립한다. 이와 같은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니힐리즘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파괴나, 몰락후의 계획 경제를 대안으로 하였으나, 아나키즘은 계획 자체를 부정하고 공동체 내의 자립, 자치, 자영 경제를 대안으로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나) 역사

정치적 아나키즘의 탄생은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아나키사회를 위계질서와 권위가 부재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권위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종교, 국가, 군대 등이 권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 흐름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조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1)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상호호혜주의, 공산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유재산의 말소와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국제당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연방주의등의 형태로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로 간주된다.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 아나코생디칼리즘

- 프루동주의

- 무장아나키즘

- 후기아나키즘

2)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권위주의 조직은 민중의 외면 속에서, 혹은 투쟁의 결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며 이것은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본다. 국가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개인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중간적 조직들은 군대를 조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국가적"인 조직이 되지 않는 한 올바른 것으로 본다.

-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 인도주의적 아나키즘

-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

- 자유방임적 아나키즘

- 그리스도교 아나키즘

- 자본주의적 아나키즘

- 시온주의적 아나키즘

3)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 원시주의적 아나키즘

- 녹색아나키즘

4)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 인식론적 아나키즘

- 아나코페미니즘

- 아나코펑크

- 초월주의적 아나키즘

- 크립토아나키즘

- 국가아나키즘

5) 결론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때로 고전적 자유지상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라)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 미하일 바쿠닌

  *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 레프 톨스토이

  * 머레이 북친

  * 엠마 골드만

  * 노암 촘스키

  * 막스 슈티르너

  * 벤자민 터커

  * 윌리엄 고드윈

  * 신채호

  * 박열

  * 이회영

  * 하기락

  * 구승회

  * 박홍규

  * 조약골

(마) 한국의 아나키스트 단체

1) 의열단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폭력항쟁으로 대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백범 김구선생을 포함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광복을 위해 폭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으면서,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神)이다.[1]

가) 주요 의거

  *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사가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의사가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사가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사가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 의사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나) 단원

창립단원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다) 공약 10조

  *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한다.

  *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 죽지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 한 사람을 다수은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처살한다.

라) 의열단 선언

김원봉은 1923년 북경을 방문하여 당시 임시정부의 외교우선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단재신채호선생을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문서화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신채호는 김원봉을 따라 상해로 와서 폭탄 만드는 시설을 살펴보고, 약 한달 동안 여관방에 앉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선언 즉,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그들은 의열단 선언을 인쇄하여 살포하였고 단원의 필독서로 지정하였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후에 본 선언문을 남겨 거사의 뜻을 전달하였다.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 제 5장 마지막 문장>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독립투쟁방법으로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등을 모두 부차적이라고 설득하였으며, 무장투쟁을 최우선하는 의열단의 뜻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마) 임시정부와의 관계

임시정부 초기에 안창호는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폭탄을 기율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예속하여 실력을 점축한 뒤 상당한 때에 대거하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미온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승만의 신탁통치 제안이나 임정내의 파벌 싸움에 매우 실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의열투쟁을 '모험행동'으로 보는 것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개조파는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이후에 창조파를 소외시키기 위하여 의열단과 제휴하였다. 이 후 의열단은 임시정부의 한 축이 되었다. 또한 김구선생도 의열단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이라는 같은 방법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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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주(州)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

1994년 멕시코 정부와 기업인·농장주 등이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원유·천연가스·목재 등 남부의 풍부한 자원을 착취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자, 이에 반발해 치아파스주()의 마야계 원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봉기한 반정부 투쟁단체를 말한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의  머리글자를 따서 'EZLN'으로도 통한다.

이들의 지도자는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인텔리이자 동화책을 집필하는 등 멕시코의 체 게바라로 평가받는 인물로, 이름은 마르코스(Marcos)이다. 그는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을 맡아 1994년부터 밀림을 거점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휘하고 있다.

1997년 12월, 세디요(Ernesto Zedillo) 정부 당시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45명의 원주민 농부들이 학살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어 정부군과 이들 반군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으나, 2000년 비센테 폭스(Vicento Fox)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반군과의 평화협상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사태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다 2001년 3월, 이탈리아의 인권단체 회원 등 500여 명의 외국인과 함께 멕시코 전역을 순회하며 15일 동안의 평화행진을 한 뒤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입성함으로써 7년여를 끌어 온 내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멕시코 정부도 수천 명의 연방경찰과 군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보호함으로써 우려할 만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행진을 마친 뒤 민족해방군은 원주민 권익보장촉구대회를 열어 원주민 권리보호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의회 비준과 치아파스주에 있는 정부군의 전면 철수, 수감 중인 반군 포로 및 동조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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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파스는 '사파티스타'라는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의 지배 지역이다.

 

우리나라와 경제순위가 비슷한 멕시코의 일부이면서

가난하고 빈곤한 삶속에서도 전혀 정부의 복지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치아파스를 지배하는 사파티스타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반군처럼 봉기 이유가 특정 이데올로기와 같은 사상,이념에 있지 않다는 것에서

사파티스타는 조금 다르다.

 

커피, 옥수수를 재배하던 깊은 산속 마야인들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강대국 산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로 인해 이들이 당할 수 밖에 없던 현실적인 고통은

이들을 마스크와 총을 든 반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표현하자면 이른바 '생계현 반군'인 것이다.

스페인어 '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의 약자를 따서 EZLN이라고 통하는 사파티스타의

시작은 1992년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부터 시작된다.

 

NAFTA는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이 맺은 자유무역협정이고,

이로 인해 미국의 자본과 기술, 캐나다의 자원,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되어

지역경제를 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치아파스

의 입장에서 보면

수자원, 목재, 목축 커피 옥수수등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진 시골마을은

NAFTA에 가입하면서 옥수수 수입제한, 커피 보조금등의 정책의 폐지를 불러왔고,

이 지역의 주를 이루는 마야 후손들의 취약한 경제 기반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농사짓기를 그쳐야 했던, 아이들을 더이상 학교로 보낼 여유조차 가질수 없던 마야인들은

스키마스크와 붉은 마스크를 얼굴에 두르고 총을 들기 시작했다.

한미FTA로 생존권을 위협받는 우리 농민들과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시위가

사파티스타의 봉기와 매우 닮아 있다.

 

그들은 강대국, 다국적기업의 이윤추구 앞에서 처절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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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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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 신문에 실린 서면 인터뷰입니다


- 한국에 처음 노마디즘이라는 용어가 전래되고 자리를 잡게 된 과정은?

 노마디즘은 본래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에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고병권, 이진경, 고미숙이 주도하는 ‘수유 너머’와 이정우가 선전하고 전파시킴으로써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노마디즘을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이데올로기, 미래의 대안이 될만한 이데올로기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노마디즘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먹히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후 자크 아탈리의 『21세기 사전』과 『호모 노마드』가 번역 출간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수유 너머’와 이정우의 주장에도 더욱 힘이 실리게 됩니다.

 

『21세기 사전』를 보면, 이정우의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 저는 이정우가 자크 아탈리의 주장이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를 확대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노마디즘은 정말 현대사회의 모든 생활과 연관돼 있는 것 같다. 교육, 직업, 쇼핑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되는데, 이럴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다면? 

교육, 직업, 쇼핑 등 현대인의 생활을 모두 노마디즘적 패턴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자크 아탈리 때문입니다.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어서 노마디즘이 모든 생활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자크 아탈리가 그렇게 주장한 것이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인 노마디즘을 사회문화적 용어로 변환시켰습니다. 그리고 노마디즘이라는 용어를 현재의 모든 패턴을 설명해주고 미래를 예언하는 요술방망이로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이지요.

 


- 한국인들은 유목민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와중에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 근하게 된 계기는?

저의 문제의식은 진보와 보수(특히 시장만능주의자들) 모두가 노마디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진보와 보수가 특정한 사상에 모두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노마디즘을 매개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개인적인 계기도 없진 않습니다. 4-5년 전쯤인가요. 당시 조선일보는 몽골 유목민의 수장으로써 세계를 점령한 칭기즈칸을 재조명함으로써 노마디즘 선전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친분이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매개로 조선일보와 타협하는 것을 보고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지금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다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도 노마디즘을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노마디즘이 진보주의자들의 사회적 비판의식을 불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기묘한 논리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이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노마디즘은 간단히 말해서 ‘이동의 담론’입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철학적 ․ 정신적 이동에 대한 담론이고, 아탈리의 노마디즘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이동에 대한 담론이죠. 진보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와 생활태도’를 연상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노마디즘에서 이동이 갖는 해방성, 창조성, 생산성에서 친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요소들을 발견합니다. 그 결과 진보와 보수가 모두 노마디즘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압도적 다수가 노마디즘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노마디즘의 현실적 기반이 되는 것은 자동차, 비행기, 노트북, 인터넷, MP3, PDA, 디지털 카메라, 텔레비전, 휴대폰, 네비게이션 같은 첨단기술 제품들입니다. 그것들이 현대인의 이동을 가능케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노마디즘은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이러한 첨단 제품은 대개 초국적 자본이나 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노마디즘의 친기술주의적 경향은 자본에 대한 관용 혹은 찬양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 결과 진보주의자들이 자본의 논리에 자연스럽게 포섭되는 양상이 전개됩니다.


 

- 현 대학생들이 노마디즘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지금의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높은 청년 실업의 문제는 비단 우리 사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청년 실업이 이렇게 만연하게 된 데는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 자체의 결함 때문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이 자동화 기계화 되는 것도 청년 실업을 높이는 주범입니다. 자본주의와 기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젊은이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은 친자본주의적 친기술주의적 경향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최전선에 노마디즘이 있습니다. 노마디즘의 시작은 68혁명을 배경으로 들뢰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은 68혁명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노마디즘이 회자되는 현실은 68혁명 시기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금의 현실에 고스란히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정신보다는 아탈리의 몫이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건강했던 이데올로기가 세월이 흐르면서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나는 대학생들이 자신을 옭죄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기술만능주의의 입지를 넓혀주는 노마디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는 플라톤의 경우처럼 격투기선수일 수도 있고 아우렐리우스에픽테토스처럼 황제나 노예일 수도 있으며, 스피노자처럼 첨단 과학의 기술자일 수도 있고, 라이프니츠처럼 외교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동은 될 수 없는가? 양을 치며 유목하는 민족을 통해 한 종교가 탄생한 이후 목자의 이미지는 종종 사상을 지배해왔다.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자’라는 인상 깊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목자의 이미지, 즉 지킴이의 이미지와는 다른 목동의 이미지는 없는가? 물론 있다. 그것이 노마드(nomade, 유목민)이다. 땅에 뿌리내리고 토박이로 살며 정체성과 배타성을 지닌 민족을 이루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형상이나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 바람이나 구름처럼 이동하며 삶을 정주민적인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시키는 유목인의 사유가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쿠체(John Maxwell Coetzee)의 작품인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만인이란 바로 유목민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런 인상 깊은 구절을 이 책에서 읽는다. “유목민들은 1년에 한 번씩 우리를 찾아와 교역을 한다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유목민인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까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이 인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종주의에 대한 고발만을 부각시키려고 이 구절을 읽은 것은 아니다. 정주민들은 위계적 정체성을 꾸미고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정주를 가능케 하는 경계(또는 국경)가 이미 배타적 정체성의 표현인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카인이 가축을 치는 아벨에게 그렇게 했듯 이런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을 증오해왔다. 아마도 근본적으로는 유목민의 도래가 정주민들이 꾸며온 모든 체계와 질서를 와해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유목민은 정주민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며 거기에 동화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쿠체는 말한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노마드에 대해 사유했던 대표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노마드에게는 역사가 없다.”


국가와 같은 형식을 통해 거주하는 자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역사를 가지지 않으므로, 노마드는 정체성 없는 익명의 힘으로 들이닥쳐 정주민을 파괴한다. 정체성 없는 이러한 힘의 침입을, 그 파괴력을 강조하여 ‘전쟁 기계’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전쟁 기계의 기원은 황제의 주둔병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목 생활을 하는 양치기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노마드의 출현으로 인한 파괴를 들뢰즈는 “탈영토화의 형식으로서 탈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거 유목민들의 삶이 보여주듯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노마드의 출현은 어쩌면 해묵은 정주민의 삶에 새로운 가치와 법을 도입하는 ‘창조’의 사건이 되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히브리인의 원정, 지중해를 횡단하는 반달 부족의 원정, 스텝을 가로질러 가는 유목민의 원정, 중국인의 원정.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곳은 언제나 탈주선 위에서이다”(들뢰즈). 그런데 민족들이 투쟁하는 대륙에서뿐 아니라 철학의 평원에서도 동일하게, 노마드의 침입과 창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주목할 만한 노마드의 발견은 칸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 형이상학의 통치는 독단론자의 지배 아래서 전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단론자의 입법에는 예전 야만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법은 내란으로 인해 점점 무정부상태로 타락했다. 그 다음 회의론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정주하여 개간하는 일을 싫어하는 유목민과 같아서 종종 시민적 단합을 파괴했다.” 이 구절은 독단론적 성격을 가지는 합리론과 회의론으로 치달은 경험론의 싸움을 전제국가와 유목민의 극적인 상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륙의 독단론이 국가를 세우면, 영국 경험론의 노마드는 그것의 전제적 성격을 간파하고서 시민적 단합을 파괴한다.

 

그러니 영토를 닦아 합리론자들 이상의 체계를 세우려는 독일인들에게도 노마드는 하나의 위협일 수밖에 없다. 들뢰즈는 저 칸트의 구절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노마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독일은 끊임없이 토양을 갈고 다져야 한다. 다시 말해 건립해야만 한다. 건립하고 쟁취하려는 열정이 독일의 철학에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즉 그리스인들이 원주민들을 통해 소유했던 것을 독일은 정복과 창설에 의해 소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국은 독일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이다. 왜냐하면 영국인들은 철학의 내재적인 구도를 이동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토양으로 여긴다. 즉 그들은 그 구도를 바다 위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 다니며 천막을 치기만 하면 되는 열도에 둘러싸인 어떤 세계로 취급하는 노마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텐트만 있으면 된다.”


그리스인들이 원주민처럼 그들의 일상적 삶과 일상적 언어를 통해 철학을 생래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면, 독일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겐 생래적이었던 사유를 학문적 개념의 형태로 애써 복원하여 다시 거주지를 형성해야 했다(예컨대 우리가 상실한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애써 일깨우며 사유를 진행한 하이데거에게서 보듯이 말이다). 반면 경험론자들은 유목민들로서, 개념을 텐트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오로지 경험에 노출시켜 개념이 작동하는지 않는지 시험해본다. 이러는 사이 비경험적인 체계로 지어진 정주민의 거주지는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노마드는 철학의 경험주의적 성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개념이다. 노마디즘의 한 예를 보도록 하자. 자신의 철학을 경험주의라고 칭하기도 하는 레비나스는 예술 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주적 성격을 지니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반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유목주의(nomadisme)는 정주 상태로의 다가감이 아니다. 그것은 거주지 없이 체류하는 것이며, 대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관계이다.”

‘인간은 시적으로 대지 위에 거주한다’라는 횔덜린의 시구를 내세우며, 하이데거는 예술을 거주함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이해했다. 횔덜린의 시 ‘라인 강’은 라인 강이 본래적으로 있어야 할 거주의 자리를 밝혀준다. 예술작품으로서 그리스 신전은 그리스 민족이 본래적으로 거주하며 살아가는 자리를 열어준다. 이에 반해 레비나스는 유목적 삶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뿌리내림과 거주함의 바깥, 고향 상실이 본래성이다!” 예술은 우리가 익숙하던 거주의 자리에서 벗어나 우리를 유목민처럼 낯선 지역으로 내몰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노마드적 사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노마드라는 말을 통해 중요한 성찰을 진행한 또 다른 철학, 바로 또 다른 경험론자 들뢰즈의 철학을 위해 노마디즘의 정수 자리를 남겨 두어야겠다. 정주민적인 사상가들이 동일성이나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속에 가축들을 가두어 놓듯 존재자를 가두었다면, 어떤 개념의 울타리도 없이 존재자들을 방목하고자 했던 것이 들뢰즈의 노마드적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주저 [차이와 반복]에 ‘방목하다’라는 말의 고대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구절을 남기고 있다.

“방목하다라는 말의 목축적 의미는 나중에서야 토지의 배당을 함축하게 된다.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는 방목장의 울타리나 소유지 개념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당시 사회의 관건은 땅을 짐승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들 자체를 분배하고 짐승들을 숲이나 산등성이 등의 한정되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에 배분하는 데 있다. 노모스는 우선 점유의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는 가령 마을 주변의 평야처럼 명확한 경계가 없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노마드’라는 주제 역시 탄생한다.”

 

애초에 가축을 가르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목축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명확한 경계가 없는 장소에 가축을 풀어놓는 일, 유목이었다. 방목의 이러한 의미를 존재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개념적 울타리를 통해 존재자에게 존재를 배분했던 것이 아니다. 경계 없는 존재 위에 존재자를 직접 풀어놓는 것이 관건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철학사를 통해 경험론적 사유가 이 과제에 도전해 왔다.


가령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단일한 것으로 지각된 순간 속에는, 이성이 발견해내는 수많은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시뮬라크르들(이미지들, 흔적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균적 지각이 동일성을 지닌 사물로 보는 것의 배후에는 수많은 지각의 순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라면, 이 동일성의 원천으로 저 피안에 있는 이데아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에 충실하자면, 동일한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순간의 수많은 다른 지각들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동일성의 개념(울타리)에 매개하지 않고 존재자를 직접 존재의 대지 위에 풀어 놓는 존재론적 유목이 아닌가?


이러한 유목적 사유는 계사(繫辭)에 대한 들뢰즈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계사를 통해, 주어 자리에 오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에 술어 자리에 오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을 귀속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 안에 있는 것은 동일성 개념이나 그에 부속하는 성질 개념에 매개되지 않는 감각들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하늘은(est/is) 푸르다’는 동일성 개념에 매개된 존재자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et/and) ‘푸름’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즉 계사의 정체는 접속사인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임’과 ‘푸름’의 가변적인 배치(agencement)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랭보의 표현을 빌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un dérèglement de tous les sens)”라 일컬을 수 있는 세계이며, 개념의 울타리 없이 존재자를 존재 위에 풀어 놓는 사고이다.


모든 감각들의 무질서로부터 정주민의 도시를 위협하는 유목민의 저 전쟁 기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재앙인가? 오히려 존재자들을 동일성이나 신학적 질서를 표현하는 유비 같은 개념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직접 존재 위에 개방하여, 존재자들을 새롭게 배치해보라는 행운이 우리 손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억압적 효과들을 발휘하는 개념의 체계 바깥에서 존재자들을 방목해볼 최초의 행운, 유목적 삶의 행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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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스 [pathos]

생각/내용 2010. 12. 11. 10:04


철학상의 용어로 정념() ·충동 ·정열 등으로 번역되며 로고스(로고스란건.. 쉽게말해서.... 옳은것을 찾아가는 분별력을 가진 이성을 뜻하고요..파토스란건.. 주위상황에따라 변하는 기분.... 그러니까.. 쾌락이나.. 뭐 그런거요.. 그런걸 뜻해요..)와 상대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어 paschein(받다)에서 파생된 말로 근본적인 뜻은 ‘받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광의로는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수동성 ·가변성이 내포되며 그때그때 내외의 상황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받는 기분 ·정서를 총괄하여 표현한 말이다.

이성의 판단과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쾌()’ ‘고()’의 정()이 기본이 되고 고전윤리학에서는 쾌 ·고의 정을 이성의 판단에 따르도록 하는 것을 ‘덕()’이라고 하였다.

파토스는 종종 이성의 명령에 반항하기 때문에 스토아학파에서는 이것을 병()이라고 하였다.

파토스는 각성적() 의식보다도 의식하()의 근원충동()에 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인간 존재의( 또는 ) 존재상황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인간 존재의 근원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학에서는 대상의 자극을 받아서 생기는 감정을 말하며 특히 현대에는 감정의 격앙 ·격정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1만원을 주웠는데.. 그것을 찾아줘야한다는건 누구나 다 알고있고.. 옳은 것이죠..이것이 로고스죠.. 그렇지만... 그것을 찾아주느냐 않찾아주느냐에 대한 갈등..... 이것이 파토스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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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에 "Children can learn many things on the internet"이라고 인터넷의 유익한 점을 명시해놓고

바로 아래는 곰 인형이 옷을 벗는 사진을 놓아서 앞의 "Children can learn many things on the internet"이 반어적인 문구가 되게 만들었네요.

즉, 애들이 인터넷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데 외설적인 사이트나 야한 동영상 같은 걸 보고 정서상

유해한 것도 배울 수 있다고 한 것이지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기서 페이소스 또는 파토스는 곰 인형이 털가죽을 벗고 있는 데 있네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인형이 털 껍데기가 벗겨져 있거나 눈알이 없거나 한 것은

아이들이 오래 가지고 놀면서 의도치 않게 훼손시킨 것, 또는 고장낸 것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어린이의 천진난만함, 순수함을 나타내는 곰 인형의 털가죽이 벗겨져 있는 것은

의도된 것이지요. 외설적인 사이트에서 누드 모델을 흉내낸 것이랄까. 그로 인해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이 훼손된 것을 보여주네요.

그러니까 곰인형이 환기시키는 어린시절의 순수가 훼손된 모습으로 제시되어

페이소스를 자아낸다고 볼 수 있죠. 게다가 그 위에 "인터넷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문구는

그 원인이 인터넷의 유해 사이트에 있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이 페이소스를 통해 광고의 설득력

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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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名言)이나 격언(格言), 잠언(箴言)은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는 말 또는 학문 등의 핵심을 간략하게 외우고 말하기 쉽게 그 내용을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속담과도 비슷한 말이며 보통 속담은 일반 서민들의 생활 속에서 나와 그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명언은 저명한 사람의 발언 또는 문장이나, 작자는 불명하나 널리 알려진 고전에서 유래한 것을 가리킨다.


아포리즘에 대한 정의 (모리와 함께  화요일)

 

Aphorism: An aphorism is a short witty sentence which expresses a general truth or comment.

아포리즘은 일반적인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짧은 재치있는 문장을 말한다

- 출처: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아포리즘깊은 진리를 간결하며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한 짧은  (금언격언잠언경구 )

- 출처민중서림 엣센스 국어사전

 

아포리즘이란 위의 사전적 정의와 같이 짧은 형식으로  금언을 말합니다

아포리즘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게  책은

바로 모리와 함께  화요일인데요 (Tuesday with Morrie)

노교수와 제자사이의 대화에서

노교수의 아포리즘을 제자가 경청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모리의 대표적인 아포리즘을 보기로 할까요?

 

Accept what you are able to do and what you are not able to do.

Accept the past as past, without denying it or discarding it.

Learn to forgive yourself and to forgive others.

Don’t assume that’s its too late to get involved.

 

너가 할수 있는 것들과 할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과거는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부정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아라

너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남을 용서하라

무엇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단정하지 말아라

- 출처: Tuesday with Morrie

 

위의 아포리즘을 사랑에 대해 제가 재해석 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너가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받아들여라

남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남이 너를 사랑하게  수는 없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로써 받아들이되

그것을 애써 지우려하지말고버리려 하지 말아라

과거는 과거로써 아름다울 뿐이지다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끝에는 당신 그리고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고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남을 용서하라

 

사랑이 끝났다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네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다

지금 행동하라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나는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다.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

 

그는 책의 서문을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반인반수의 사티로스(Satyros)가 되기를 원했다. 사티로스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몸은 염소이며, 머리에 작은 뿔이 난 디오니소스의 시종이다. 주신을 모시는 시종답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과장된 표현과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움을 자아내는 급이 뚝 떨어지는 잡신이다.




디오니소스의 제자이며 디오니소스의 시종을 희망한 이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그리고 이 책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제목과 서문도 파격이지만, 본문은 한 술 더 뜬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차례로 응답한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세상에!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깜찍한 소녀들도 “난 너무 예뻐요”를 노래할 때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얼굴의 19세기 철학자가 정색을 하고 “난 왜 이렇게 현명한가”라니!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니체는 도발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글을 물고기를 낚기 위한 낚싯바늘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글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 용어로 말하면, 그는 ‘낚시질’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낚시질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그는 [선악의 저편]에서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는 질문을 던지고, [도덕의 계보]에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우상의 황혼]에는 ‘망치를 들고 철학 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개인적으로 니체는 공손한 사람이었다는 게 니체 전기 작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글로 보는 니체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거만하고, 무례하며, 위악적이다. 그는 굳이 그 점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한다. 그는 왜 존경 받는 성인이 되기보다 지탄 받는 사티로스가 되기를 희망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답을 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도전을 한 무신론자이며, 객관적 진리를 향한 형이상학적 전통에 반기를 든 반형이상학자이고, 보편적 도덕 가치를 정초하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고 본 비도덕주의자다. 그러한 도발적 주장 때문에 니체 철학은 한편으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비합리적인 철학의 전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 용감한 철학으로 상반되는 평가를 받아왔다.


잠깐! 여기서 짚어보자. 니체는 신을 믿지 않은 최초의 무신론자인가? 아니다. 역사의 시계를 멀리 돌릴 필요도 없다. 니체가 철학의 스승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도 신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최초의 반 형이상학자인가? 아니다. 형이상학을 반대한 근대 철학자는 너

무 많아서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대체로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David Hume)은 형이상학 책은 불태워버리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또 물어보자. 니체는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의심한 최초의 인물인가? 아니다. 도덕적 회의주의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 이후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흐름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니체 철학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는 니체가 주장한 내용에서 찾지 말고 니체가 주장한 방식에서 찾아야 한다. 니체 철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철학이다. 그가 쓴 글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경구에서부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비교적 긴 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아포리즘이다. 아포리즘은 간결하지만 다의적이다. 쉽게 전달되지만 모호하다. 누구나 쉽게 니체를 읽지만, 니체 철학의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는 왜 이렇게 글을 썼을까? [차라

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아포리즘은 천천히 음미해 가면서 읽어야 한다. 아포리즘은 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포리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낯설게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지각 경계를 흔든다.












니체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신은 죽었다”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관찰에서 나온 주장이 아니다. 신의 죽음은 ‘소식’의 형태로 전달된다. 그 소식을 전하는 자는 ‘광인’이다. 1인칭 시점으로 즐겨 글을 쓰는 니체가 이 대목에서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광인을 등장시켜 그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그게 묘하다. 광인은 이 소식을 기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신을 찾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외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절규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살해자 중에서 살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가?”라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존재가 우리의 칼 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며,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해줄 수 있는가 묻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신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이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광인은 몇몇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광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인물로 바꾸어 무덤덤하게 한 마디 한다. “저 사람들은 아직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니체는 신이 죽었다는 사건을 ‘근래의 최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사건을 극화해서 전한다. 영어권 세계에 니체 철학을 소개한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은 이 극화된 장면이 성가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신의 죽음은 과학적 관찰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고찰도 아니며, 19세기 유럽문화에 대한 니체의 상황 진단이다. 이 극화를 통해서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주장처럼 신은 원래 없었으며 단지 인간의 속성이 외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우화적 표현은 광인이 전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사건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을 조롱하고 비웃은 당대 유럽 문화에 대한 고발에 초점을 맞춘다. 신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신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신의 죽음 이후에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죽이고 난 후, 그 신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죽은 신의 자리를 메웠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그것을 콕 짚어서 주장하지 않는다. 아포리즘을 통해서 기독교 신의 죽음과 새로운 신의 조짐을 경고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과학으로 읽는다. 종교적 미신이 사라진 자리를 과학적 미신이 차지했다고 바라본다. 어떤 이는 새로운 신을 근대(modernity)로 읽는다. 종교적 신화는 죽었지만, 이성과 계몽을 축으로 하는 근대 신화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본다.

 

니체는 신이 남긴 유산을 완전히 털어버리기를 원한다. 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죽었다는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또 다시 아포리즘을 동원한다. 그 아포리즘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을 통해서, 때로는 디오니소스라는 그리스 주신을 통해서, 때로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라는 한때 그가 숭상했던 인물에 대한 혹독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아포리즘이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예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던 니체를 철학의 장으로 이동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그것을 니힐리즘(nihilism)으로 읽는다. 니체는 그의 초기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세계의 근저는 그가 스승으로 삼은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 심연을 덮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노력이 영원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플라톤이 세운 이데아의 왕국은 그런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 것이며, 기독교가 만들어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세계는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플라톤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는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감내하지 못하는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조건일 따름이다. 삶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만든 것을 니체는 ‘가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니힐’(nihil)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디오니소스적 심연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니힐리즘의 역사다.


이런 틀에서 보면 기독교는 니힐리즘이고, 플라톤 이후 지금까지 서양 형이상학도 니힐리즘이며, 도덕의 보편 가치를 주장하는 도덕주의자도 니힐리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그리고 도덕적 세계를 최초로 부정한 철학자도 아닌 니체가 왜 그렇게 위험한 철학자로 취급되었는가 하는 단서를 하나 움켜잡는다.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모든 가치 체계가 니힐리즘이라는 점을 통찰한 철학자다.

 

니힐리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고귀한 가치를 집어 던진다. 그래서 니체는 고귀한 성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저속한 사티로스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풍자(satire)는 그 어원이 바로 사티로스에서 온 말이다. 니체는 우리가 듣기 싫어하는 독한 말을 내뱉기 위해 사티로스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지난 세기 후반기에 니체 읽기, 또는 니체 식으로 세상 읽기는 하나의 사조로 퍼져나갔다. 그 불을 지핀 것은 프랑스어권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원화된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 니체의 아포리즘을 이용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단 하나의 니체 철학이 있다는 점에 반대한다. 니체 철학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푸코는 니체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성을 줄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니체 철학이 본질적으로 복수주의(pluralisme)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니체를 니힐리즘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창조적인 생성의 철학자로 적극 해석한다. 생성과 다원성, 그리고 얼핏 보기에 무질서하고 엉뚱해 보이는 우연성이 니체가 제시한 아포리즘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진 니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니체만큼이나 오만했고, 니체처럼 음울했던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린다. 니체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히브리스(hybris)라는 위험한 단어는 모든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자신의 스승을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

 

히브리스는 무례하고 거만함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술 마시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도 히브리스 범주에 들어간다. 타인을 모욕하고 수치심을 주는 행위, 자신을 과시하면서 잘난 체 하는 행동도 모두 히브리스다. 그리스인들은 히브리스를 잘 다스리는 데서 미덕이 나오고,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악덕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비극은 히브리스가 날뛰는 데서 오는 불행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따르면, 히브리스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철학이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 하는 여부는 히브리스가 가진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달려있는 셈이다. 물론 니체와 니체주의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니체에 반대하는 이들은 니체 철학 자체가 히브리스이며 니체의 철학적 사유가 정지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러셀이 니체 철학을 일종의 낭만주의적 흐름으로 보는 이유다. 어원적으로 보면, 니체 철학이 크게 의존하는 아포리즘이라는 말에는 이미 경계를 확정 짓는 지평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은 니체의 기획이 히브리스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생각의 새 지평으로 보는가, 아니면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철학적 히브리스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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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가장 오래된 사랑이야기인 만큼 수많은 시인과 작곡가들이 여기서 영감을 얻어 명작을 써냈다. 그 가운데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심오한 면모들을 아주 단순한 구성 속에 놀랍도록 선명하게 부각시킨 작품이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이 극의 2막에서 연인들의 밀회와 희열은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이중창으로 표현되는데, 희열의 절정에서 트리스탄은 느닷없이 이렇게 외친다.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왜 이 남자는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쾌락의 절정을 맞는 순간에 살아있다는 것을 잊고 싶어 하는가? 마치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은 바로 죽음 자체라는 듯 트리스탄은 생명을 망각 속에 빠뜨리고 싶어 한다. 트리스탄이여, 그대는 마치 타나토스(죽음)가 긴 줄에 메달아 인생의 무대 위에서 연인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보인형, 에로스(사랑) 같구나!



이 악극의 마지막 대사들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졸데가 최후에 부르는 [사랑의 죽음 Liebestod]의 마지막 두 행은 이렇게 끝난다.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unbewußt/ höchste Lust!)” 이졸데는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연결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이졸데는 무의식의 정체는 죽음이며, 죽음에 도달하는 일은 쾌락을 얻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바그너 말고도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작가들이 죽음에 대한 동경을 표현해 왔다.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을 하나 소개하자면 프랑스 작가 쥴리앙 그라크의 경우인데, 그는 가장 큰 단위의 집단 가운데 하나인 국가 자체가 죽음정확히는 해체을 동경하는 사태조차 그리고 있다. 그라크의 소설 [시르트의 바닷가]에서, 가상의 한 국가는 마치 국가의 운명 안에 내재한 법칙을 충실히 따르기라도 하는 듯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국가는 형태가 해체될 뿐이지. 그것은 풀어지는 묶음과도 같아. 묶였던 것이 풀어지고 너무 명확한 형태가 불분명함 속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야.”


도대체 죽음 안에 맛보고 싶은 어떤 달콤한 것이 있는 것일까? 죽음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 같은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다.

1865년 독일 뮌헨 궁정극장에서 초연된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로이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신비스러운 자기학대적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있지 않은가? 당신이 뭔가 기억하기조차 싫은 실수를 했다고 치자. 만일 당신 마음이 늘 즐거운 것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 행복을 주는 새로운 사건이나 기억에만 집착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가장 고통스러운 실수를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많이 잘못한 것은 아닐 거야’,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지 뭐’ 등등. 이렇게 수많은 방식으로 실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한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놀이의 경우도 그렇다. 수술이나 주사 맞기 같은 충격적이고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아이는 그것을 잊기는커녕 당장 병원 놀이 속에서 반복한다. 마치 잘못된 인생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보려는 것처럼, 지나간 인생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가정한 쾌락원칙 : 인간에게
는 ‘쾌’를 구하고 ‘불쾌’를 피하려는 선천적인 경향이 있다.


왜 우리는 쾌락을 쫓기보다 고통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일을 반복할까? ‘고통’을 가리켜, 스트레스, 감당하기 어려운 에너지, 너무 극심한 충격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까닭은 바로 마음 안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이 과대한 에너지의 양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서가 아닐까?


가령 미국에서 있었던 911 같은 사건을 보자. 끔찍한 고통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카메라는 계속 현장으로 되돌아오고, 시청자들은 괴로워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런데 화면에 비추어지는 것은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현장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명을 구조하는 소방수들의 희생적인 행동, 죽은 이에 대한 유가족들의 사랑 같은 것들이다. 요컨대 눈을 뜨고 바라보기 어려운 비극은 칭찬할 만하고 수용할 만한 가치의 옷을 한 겹 입고서 계속 우리 눈 앞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과대한 에너지가 넘실대는 고통의 현장으로 되돌아오는 까닭은 그 에너지를 낮추기 위함이며, 낮추는 방법은 그 강력한 에너지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형태의 표상으로 둔갑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여기서 우리의 전체 정신무의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의 껍질과도 같은 의식의 역할을 발견한다. 껍질의 역할은 무엇인가? 내부를 보호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너무 강력한 자극이 들어오면 정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자극의 강도를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호자로서의 껍질, 즉 의식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정신이 이렇게 자극적인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희구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신은 ‘자극이 전혀 없는 무기물의 상태’ 같은 것을 고향처럼 동경한다는 뜻이 아닌가? 즉 어떤 긴장도 없는 죽음의 상태가 정신이 가장 원하는 바가 아닌가? 죽음을 향한 정신의 이 충동(타나토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자극을 더욱 더 비자극적인 표상으로 반복해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의식의 과제인 것이다.

 

 


 

 

우리가 몰두하는 사랑(에로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는 높은 강도의 자극과 긴장으로 가득 찬 쾌락이지만, 이는 실은 모든 자극이 사라진 죽음의 상태를 맛보는 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쾌락원칙은, 정신 기관을 자극에서 완전히 해방시키고 그 속에 있는 자극의 양을 일정한 수준이나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능에 봉사해서 작동하는 어떤 경향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기능이 모든 살아있는 물질의 가장 보편적인 노력, 즉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과 관련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

 

사랑의 행위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 또는 그냥 간단히 말해 극도의 흥분은 결국 흥분이 소멸된 죽음의 상태를 맛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쾌락은 없으며, 사랑의 배후에는 늘 모든 긴장과 집중된 에너지의 소멸을 갈망하는 죽음에의 충동이 사랑을 작동시키는 모터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왜 트리스탄이 사랑의 쾌락의 절정에서 죽음을 원했는지 알 것 같다. 또한 이졸데가 연결해놓은 세 가지 개념, ‘죽음’과 ‘무의식’과 ‘쾌락’의 의미심장한 고리 역시 알 것 같다. 정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은 자신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불쾌한 에너지의 긴장을 무화(無化)하려는 죽음에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쾌락이란 극도로 강화된 흥분의 소멸을 통해 이 죽음 한 조각을 맛보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랑을 하고 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삶의 배후에는 놀랍게도 끊임없이 무(無)로 되돌아가려는 자, 바로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구체적인 인생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삶을 떠받치고 있는 원리로서 ‘익명의 죽음’이다. 이 익명적 죽음에 실려 때로 추락하기 위해 높이까지 사랑의 에너지를 쌓아 올리거나, 때로 집중된 에너지를 낮추기 위해 고안된 것에 불과한 표상을 마치 그 자체 진리이기나 한 듯 바라보는 그런 인생들이 흘러간다. 죽음은 이렇게, 신나게 뽐내며 행진하는 삶을 커튼 뒤에서 몰래 엿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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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뮌이란?=수유+너머에서 주장하는 코뮌이란 ‘비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모임’이다. 

최근 논문과 책을 통해 활발히 코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이진경씨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유를 분석하던 도중 현실사회주의가 ‘근대적 주체’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몰락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근대적 주체에서 벗어난다면, 자본주의적 삶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근대적 주체에 대해 권용선씨는 “특정 정체성에 고정돼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면 그 정체성이라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외국인들을 배척하고 미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권씨는 “반면 ‘비근대적 주체’는 관계맺음에 따라 변화하는 주체이며 정해진 틀이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좋은 자신을 찾아 변화·탈주하는 주체”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코뮌주의는 코뮌 공동체 이외의 정해진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회·구조적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단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대해 이진경씨는 “코뮌주의는 비근대성에 대한 사유의 결론이 아니라 비근대성을 사유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며 “코뮌주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기존의 사회·구조적 이론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코뮌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가?=권용선씨는 “나 자신도 책 소유에 집착하는 등 근대적인 삶을 살았지만 수유+너머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동안의 삶이 과욕적이었고, 비생명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진경씨도 “자신의 몸에 배어있는 근대적인 습속과 무의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선물을 주고받듯 대가 없이 베푸는 관계를 ‘경험’해야 그런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코뮌이 소모임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수준의 큰 공동체에서까지도 가능하겠느냐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이진경씨는 “코뮌들의 코뮌, 코뮌들의 네트워크로 더 큰 공동체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코뮌의 한계는?=코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신준 교수(동아대 경제학과)는 “자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코뮌주의의 정신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강 교수는 “소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코뮌주의가 다수 대중의 사회운동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다수 대중을 참여시키느냐’하는 문제는 등한시 했다”고 말했다.

들뢰즈 연구자인 김재인씨(서울여대 강사) 역시 “실체가 없다”며 코뮌주의를 비판했다. 주장하는 바가 추상적이며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그는 “대표적 코뮌이라는 수유+너머만 해도 자본의 후원과 이진경씨, 고병권씨로 대표되는 상징권력 없이는 존속하지 못하는 비독립적인 공동체”라고 지적했다. 김재인씨는 이어 “사람들이 근대성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는 없다”며 “코뮌주의는 근대성을 안고 좀 더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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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허만과 나는『여론의 조작 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언론 관계 책자를 공저했는데, 이 책에서 "프로파간다 모델Propaganda Model"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모델을 적용해보면, 언론 기관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할 거니까. 그래서 프로파간다 모델이 언론의 형태를 분석하는 유익한 도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뭐 그리 심오한 도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론의 조작』에서 우리는 두 개의 모델(① 언론이 마땅히 기능해야 하는 방식, ② 언론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을 대비시켰습니다. ①의 모델은 전통적인 것입니다. 이것은『뉴욕 타임스』가 최근에 자사 발행의 『북 리뷰』에서 "정부를 견제하는 제퍼슨식 언론의 역할"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호하고, 정치 과정에서 일반 대중이 의미 있는 통제를 가하도록 돕기 위하여, 까다롭고, 고집 세고, 어디에서나 출현하는 언론, 그리하여 당국의 권력자들을 괴롭히는 그런 언론이 바로 ①의 모델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내의 표준적인 언론 모델이고 언론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②의 모델은 언론이 실제 행동하는 방식으로서, 국내의 경제를 장악하고 나아가 정부까지 상당 부분 통제하고 있는 특혜 그룹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보호하고 확충하는 세계관을 대변하는 언론입니다. ②의 모델에 따르면, 언론은 기사를 선정하는 방식, 관심사를 분배하는 방식, 문제의 틀을 정하는 방식, 정보를 여과하는 방식, 분석기사를 집중하는 방식, 그 밖의 다양한 테크닉을 통하여 그들의 사회적 목적에 봉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어느 때든 국가 정책에 일방적으로 동의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 권력의 장악은 우리 사회 내의 다양한 엘리트 그룹들 내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계의 어떤 부분이 어떤 특정 기간에 정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정치 스펙트럼의 한 부분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엘리트들끼리도 전략적 의견 불일치가 때때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이렇게 예측합니다. 언론에는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반영된다. 따라서 언론에 의해서 포섭되지 않는 정치 스펙트럼은 없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요? 물론 이것은 거대하면서도 복잡한 주제입니다. 우선 네 개의 기본적 관찰 사항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좀더 자세히 들어가 보기로 합시다. 첫 번째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이 엘리트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서방의 엘리트 민주 사상가들 사이에는 그런 전통이 강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 사상가들은 언론과 지식인 계급이 프로파간다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대중의 정신the public mind"을 통제함으로써 일반 대중을 주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던 겁니다. 이 사상은 300년 동안 영미 민주사상의 핵심 주제였고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의 근원을 소급해 보면 서구의 최초 민중민주 혁명이었던 1640년대의 영국 내전(1642~1648년 동안 영국의 정권 장악을 놓고 왕당파와 의회파가 벌인 무력 충돌)까지 올라갑니다.

 

당시의 영국 내전에는 두 파의 엘리트가 참여했습니다. 한 파는 의회의 편을 든 지주 계층과 신흥 상인 계층이었고, 다른 한 파는 전통적인 엘리트 그룹인 왕당파였습니다. 이 두 파는 엘리트 갈등의 맥락에서 발달한 대중들의 움직임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든 권위-주종 관계, 국가 당국자의 권위 등-에 도전하는 민중운동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 당시 인쇄기가 막 발명되었기 때문에 과격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영국 내전의 양쪽 엘리트들은 일반 대중이 갑자기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반 대중은 너무 호기심이 많고 너무 거만하여 민간 통치에 승복하려는 겸손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처럼 왕당파와 의회파는 일반 민중을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상실해갔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힘으로 찍어누르는 능력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당분간 철권통치하는 절대국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 다음에 왕정이 다시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정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지는 못했고 정권을 완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민중 운동이 치열하게 투쟁했던 목표들이 상당수 영국의 정치적 민주주의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후 민중운동은 기존의 권력을 어느 정도 해체하는 데 성공해 왔습니다. 그러자 서방의 엘리트들 사이에는 이런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할 힘이 점점 사라져간다면, 대안으로 국민의 생각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사상에는 이런 주요한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치학자, 언론인, 홍보 전문가 등 권력가 밀착된 사람들의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사상은 국가가 힘으로 국민을 강제할 능력이 없으니까, 엘리트가 앞장서서 공공의 마음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언론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의 생각입니다. 그는 일반 대중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무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리프먼은 이 대중들 사이에 "합의의 조성manufacture of consent"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더 쉽게 말하자면 여론조작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안 되니까 계산된 "합의의 조성"으로 통제를 계속해나가자는 것이었지요.

 

1920년대 당시 홍보산업의 주요 교범은 아예 제목이『프로파간다』였습니다(그 당시 사람들은 좀더 정직했었지요). 이 교범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의식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조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 체제의 핵심 특징이다. 그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교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수 지식인들intelligent minorities"의 임무는 대중의 습관과 의견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으뜸 원칙인 겁니다. 다시 말해 힘으로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면 세뇌indoctrination가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첫 번째 사항입니다. 이것은 엘리트들의 지적 전통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온 사상입니다.

 

두 번째 사항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모델은 일종의 사전 개연성prior plau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기업 언론사들은 미국 사회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의 프로파간다 기능에 복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사항은 일반 대중이 프로파간다 모델의 기본 특징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과는 다르게,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권력에 너무 순종적이고 복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론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일반 대중은 언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중략)

 

자, 다시 세 가지 초기 관찰 사항으로 돌아갑시다. 네 번째 관찰 사항은 프로파간다 모델의 경험적 타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지요. 프로파간다 모델이 기술하는 사항은 정확한가? 다시 말해 언론은 "전통적 제퍼슨 식 역할(민중의 등불)"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프로파간다 모델"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흡족하게 대답하기 위해서는 조사를 많이 해야 하고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 방법의 윤곽만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여론의 조작』에서 프로파간다 모델을 검사한 첫 번째 방식은 그 모델을 가장 엄격한 테스트에 회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들에게 그들이 검사받을 대상을 직접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판가들이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기 주장에 유리한 사례만을 뽑았군." 그래서 반대파들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언론의 반정부적 자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례들, 그들이 그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뽑아낸 사례들-가령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기타 등등-을 검사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이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르는지 아닌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맨 먼저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반대파에게 검사 대상을 선택하도록 시켰고 그래서 우리가 엉뚱한 사례를 집어들어 우리의 주장을 증명하려 한다는 시비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검사한 결과, 여전히 프로파간다 모델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행한 또 다른 조사 방식은 언론에 실린 의견들의 범위를 문서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에서 표현 가능한 생각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살펴보려는 거였지요.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우리는 서로 유사하여 짝을 이루는 듯한 사례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 조사했습니다. 물론 역사는 조사연구자들 좋으라고 통제 가능한 실험 사항들을 일부러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로 비슷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많습니다. 언론이 그 두 사건을 어떻게 다루는지 비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우리는 적성국가들이 저지르는 잔학행위와 비슷한 규모로 미국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언론이 어떻게 다루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적성국과 우방국의 선거 결과나 자유의 문제를 어떻게 보도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조사한 토픽들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해낼 수 있는 여러 방법론적 관점들로부터 많은 사례들을 연구했습니다. 우리의 연구는 프로파간다 모델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장을 확인해주는 다른 사람들의 책자나 논문들도 수천 건에 달합니다. 그래서 나는 프로파간다 모델이 사회과학에서 가장 잘 입증된 명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 명제에 반대하는 의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류 문화는 이런 사실("언론은 프로파간다 모델을 따른다")에 대하여 오불관언("나하고는 관계없음")의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주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류 문화는 그들과 무관한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과학 수준에서 증명해도 주류 기관들은 여전히 배척할 겁니다. 왜 이렇게 배척하는가 하면 프로파간다 모델이 옳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델은 아무리 잘 증명되어도 엘리트 문화 내에서는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지요, 이 모델이 밝혀내는 바가 아주 효율적이고 유익한 이데올로기적 제도를 뒤흔들기 때문이지요. 그런 제도에 역기능을 하니까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촘스키, 세상의 물음데 답하다 1」中 프로파간다 모델의 시험 50-57p, -

*1989년 4월 15-16일, 메사추세츠 주 로우에서 열린 주말 공개 토론회를 바탕으로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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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의 힘에 대해서 

행인과 일월산(이하 존칭 생략), 두분의 대화를 오늘 비로소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는 대화입니다. 특히 일월산에게 구체적 해법에 대해서 추궁하는 것은 '일월산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두분이서 서로 내용을 채워가는 좋은 대화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행인의 마지막 글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를 읽고 문득 드리고 싶은 말이 두가지 정도가 있어서 글을 씁니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식권력, 2) 구체성의 정체...이런 두가지입니다. 

1) 지식권력 없이는 변혁은 불가능하다
먼저 행인의 질문 [프로파간다가 세상을 변혁하나?]에 대해서 저는 아주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와 그렇지 못한 프로파간다가 있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이것은 모든 정치투쟁의 필수요소입니다. 저는 이것을 군사력과 맞먹는 또는 더한층 질기고 지속적인 권력으로 규정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식권력>이라고 부릅니다. 토마스쿤의 패러다임이나 맑시즘 계열의 이데올로기 또는 주체화 양식 또는 담론권력 등등, 뭐라고 불러도 저에겐 동일한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입니다(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은 원래 물질과학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계급담론의 인식투쟁에도 적용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입니다. 그것은 기본의 지배이데올로기가 훈육시키고 세뇌시킨 <주체화의 양식>을 거부하게 하고, 새로운 또다른 대안적인 주체화로 시민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라는 프로파간다>가 등장했따는 사실 자체가 어딘가 기존 주체화양식이 자기모순에 봉착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존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모순을 헤집고 들어간다는 게 맞겠습니다. 예를 들면, 상식-원칙-합리를 표방한 '진보개혁 신주류'가 <국익, 국가이성, 민족평화,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전쟁반대 파병찬성>같은 자가당착을 저지른다거나, 평화와 휴머니즘 교육으로 철저하게 강조해 왔던 그간의 미국교육계가 이번 자국 정부의 전쟁광기와 학살로 곤욕스러워 하는 것이라든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평등을 떠들던 구 사회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퇴화된 국가노예제가 되어버리는 것 등이 그런 예입니다. 

이처럼 한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관계가 질곡을 드러내면, 지배적인 지식권력의 주체화양식의 자기모순과 균열을 치고 들어가면서 새로운 대안을 내세우는 가지각색의 지식권력'들'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정치세력들의 군웅할거처럼 지식권력들 역시 자신들의 부족적 진리와 진영 멘탈리티를 '선험화하고 보편화하려는' 투쟁에 돌입합니다. 지식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런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오직 극소수만이 유능하고 실력있으며 세력있는 부족원들을 규합해 냅니다.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러한 대안적인 지식권력들이었습니다. 지식권력으로의 정립을 위한 여러가지 선전선동 및 의식화과정 자체가 새로운 주체화양식의 작동이지만, 그 실내용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배적 지식권력에 세뇌되고 훈육된 대부분의 노예들-쁘띠들의 지적 수준은 대단히 빈약합니다. 왜냐면 부르조아는 결코 이들이 피착취 대상물질에 적당히 머물 정도로만 교육시키지, 진짜 부르조아 지식권력의 핵심인 반동적 유물론-이기적 실용주의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르조아들은 이들 쁘띠들을 <바른생활>하는 도덕적 관념론자들로 사육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을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권력투쟁들은 태반이 이미지-상징조작의 심리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쁘띠들은 정확하게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며, 이미지-상징으로 조작된 <사연들의 세계> 속에서 흥청망청대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행인이 잘 이해했으면 합니다. 프로파간다의 대상층의 특징 말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인식심리 상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이미 쓴 글들 '불공정'이란 키워드로 내용검색바랍니다)

1) 인식할당을 불공정하게 합니다
2) 좌파상식에 대한 전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3) 잇슈들의 신분차별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프로파간다>가 되려면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 양식 하에서 철저하게 쁘띠들의 골수에 새겨진 이 3가지 인식심리를 돌파해야 합니다. 어떻게?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 구체성의 정체
행인이 일월산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구체적 해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구체적 해법의 난점이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구체적 해법이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합니다. 여기서의 전문성은 교수나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을 마련키 위해 철두철미하게 전념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모든 분야에 전문적일 수 없다>는 난점과 충돌합니다. 왜 이게 <프로파간다>에 큰 장애가 되느냐하면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을 제시못하면 주디질 고마해라>가 행인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전문적이지 않다면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가 됩니다. 구체적 해법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해당 문제의 전문성을 갖춘 자들만이 주디질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걍~ 관련 사연들이나 읊조려라고 한다면, 이것 속에는 <거대서사는 무용하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프로파간다는 무용하다>라는 이론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이미 아나키와 오늘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론적 허무주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나무에 대한 집중과 함께 숲을 보는 통찰력 또한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자들이 지도나 나침반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겠습니까?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거대서사에 대한 일방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불필요한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그간 상대적으로 빈약한 구체적 해법의 절대부족이라는 작금의 문제를 무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해법>이 할 수 없는 역할, 즉 전략적 지도map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 역시 지식권력 형성에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권력은 쁘띠들 가운데서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이탈로부터 형성됩니다. 이들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은 <새로운 통찰과 안목의 요청>입니다. 이것이 이미지-상징조작에 세뇌된 대부분의 하수 쁘띠들과 다른 선진적인 의식층들의 특징입니다.

게다가 띠리한 이들 하수 쁘띠들은 <구체적 해법> 그자체에도 별반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할당의 불공정, 좌파상식 전이해 결여, 잇슈의 신분차별>에 푹 젖어서 살기 때문에 백날 설득해 보았자 이해를 못합니다. 헛수고 입니다. 오히려 이들 쁘띠 하수들에게 유효한 지식권력 프로파간다 방식은 행인이 말한 <구체적 해법의 실천 사업-제도화>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이해됩니까? <구체적 해법의 프로파간다>는 무용지물이며, 오로지 <구체적 해법의 사업-제도화>만이 하수 쁘띠들에게 먹힌다는 점입니다.

즉, 인터넷 상에서의 담론교환행위 자체가 일정 이상의 쁘띠 선진층들 이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구체적 해법>의 토론과 축적이 사실상 넷 좌파의 지식권력에 별반 관심도 관련도 없는 하수 쁘띠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묘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지들을 위해 애를 쓰는 자들에게 정작 일반 쁘띠 하수들은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적 지식권력의 주체화에 세뇌된 쁘띠들의 오늘 현실입니다. 이렇습니다. <구체적 해법의 축적>은 대단히 소중합니다. 저는 그렇기에 <불온이스크라>가 일상에 숨겨진 정치의 발견이자, 초국적 금융자본 단계의 노동계급형성을 위한 새로운 거대서사의 제조창이자 그것이 다성적이고 다양한 미시적 구체적인 해법들의 집적소이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관계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좌파적 모든 대안의 철학은 <관계가 건강해지면 (그 관계의 총체인) 개인도 건강해진다>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자칫 <구체적 해법과 전문성 강조>가 근시안적인 축소로 인해서 누락시키기 쉬운 <관계의 정치>를 <일반적 추상적 거대서사>가 튼실하게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해 되시지요? 자본주의는 고립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립조차도)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 그러므로 자칫 <구체적 해법>은 자기가 다루는 분야의 사안에만 집중한 나머지, 해당 사안이 전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관계의 걉과 폭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좌파의 정치가 <관계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체적 해법>과 <관계의 전략적 통찰>, 이 양자가 둘 다 소중합니다. 특히나 변모된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전략들 그리고 해법들의 조속한 성장과 축적이 절실합니다. 두분 사이의 좋은 대화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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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정권의 4년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과 살상()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정부가 들어섰다. 크메르루주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내전은 계속되었다. 그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의 결과로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전범 징역 30년 선고 2010-07-27 뉴스 <== 클릭보기



크메르루주(Khmer Rouge .Khmers Rouges라고도 함)(프랑스어로 '붉은 크메르'라는 뜻)

게릴라전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후 1975~79년 캄보디아를 통치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운동단체.
캄보디아의 무장군으로서 1967년에 형성되었다.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은 베트남의 베트민 후원 아래 1951년에 형성된 혁명 캄보디아 인민당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 당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당 이름을 캄보디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1950년대말까지 이 당의 당원들은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에 대항하는 비밀활동에 참여했으나 그들의 본거지가 시민들과 떨어진 정글과 산악지역에 있었고, 또 그들이 폭동을 종용하려 했던 농민들 사이에서 시아누크가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었으므로 시아누크에 대항하는 활동들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우익 군사 쿠데타에 의해 1970년 시아누크 정부가 전복되자 크메르루주는 그들과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고,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대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는데,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초 미국이 캄보디아에 대해 파괴적인 폭탄투하작전을 감행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그당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집권하는 동안 지원을 보류해오던 북베트남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었다. 1970년에 시작되어 거의 5년간 계속된 내란 중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농촌지역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점진적으로 확장시켰다. 마침내 1975년 4월 크메르루주군은 수도 프놈펜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후 캄보디아를 통치할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후 4년에 걸친 그들의 캄보디아 통치기간은 20세기의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정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절제함으로 얼룩졌다.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죽었고, 캄보디아의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거의 근절되었다.

크메르루주 정부는 베트남 군대와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들의 침략으로 1979년 전복되었으며, 침략군들은 캄보디아에 베트남의 원조와 기술로 지탱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크메르루주는 원거리지역으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을 재개했는데, 당시 그들은 타이 국경 근처에 있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1982년 그들은 베트남을 등에 업고 있는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2개의 비공산계열 크메르 단체들과 명목상 시아누크를 지도자로 하는 위험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크메르루주는 이 연합전선에 있어 가장 강력한 동반자가 되었으며, 1990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그들의 군대를 철수하자 또다시 캄보디아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캄보디아 역사

프랑스 식민통치시대 부터 쓰겠습니다...

크메르왕국의 Ang Duong왕은 태국과 베트남을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개입을 유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태국에 머물던 그의 아들 Norodom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후 다시 태국이 크메르왕국에 침입해왔을 때 프랑스가 개입하여 이를 물리치는 대신 캄보디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1884년 Norodom왕으로 하여금 강제로 합방조약에 조인하게 하여 캄보디아는 완전히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반식민지 투쟁도 있었으나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시각도 있었다. 프랑스는 Norodom왕의 상징적인 권위를 존중해주는 척하고 뒤엣 캄보디아를 조종함으로써 힘을 덜 들이고 효과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 식민지 시절에 프랑스인에 의해 앙코르 왓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1860년 프랑스의 여행가 헨리 무오 (Henri Mouhot)에 의해서 발굴되어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Norodom왕에 이어 Sisowath(1904∼1927)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 뒤를 Monivong(1927∼1941)이 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에서도 일본에게 실권을 빼앗겼었다. 1941년 Monivong왕의 뒤를 이어 Norodom Sihanouk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당시까지는 프랑스의 입김에 의한 왕위 계승이었다. 이후 캄보디아에서는 일본이 민족주의 세력인 Son Ngnoc Thanh과 손을 잡고 프랑스는 Sihanouk와 연대하여 격렬한 대립을 지속하다가 결국 프랑스, Sihanouk쪽이 우세하게 되었다. Sihanoul는 프랑스와 중립외교노선을 유지하며 독립을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세대 민족주의자들이자 다수당인 민주당과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다수당인 민주당과 사이가 불편했던 Sihanouk는 1953년 1월 의회를 해산시키고 같은 해 11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과 8년 전쟁을 치르는 와중이어서 캄보디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며 1954년 5월 비엔티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에게 완패당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캄보디아도 이때 어부지리를 얻어 배트남과 함께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에서 그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해방후의 혼란기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시하누크와 그의 정적간에 마찰이 계속되어 혼란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국민투표를 통하여 신임을 얻은 후 정당제도를 폐지하고 왕이 아닌 정당 정치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하여 왕위를 그의 아버지께 양위하였다. 그가 새로 결성한 인민 사회당 (People's Socialist Community Party)은 1955년 9월 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이후 일당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당시 국외는 이념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던 복잡한 상황이었다. 즉 북부베트남, 남부베트남, 태국, 중국, 소련, 미국 등의 이해관계가 캄보디아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시하누크는 북부베트남이나 중국 쪽의 좌익 성향을 약간 가미한 중립외교노선을 선택하였다. 1964년 미국은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좌익 성향을 띠고 있던 시하누크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시하누크는 이를 인지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북베트남군이나 중국과 협력하여 미국과 남베트남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북부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 배치되고 1969년 미국은 캄보디아 내의 공산기지에 폭격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트남전 내내 캄보디아 동부는 미국에 의한 폭격이 계속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론놀 (Lon Nol)정권 치하

1969년까지 우익과 좌익간의 다툼은 점점 더 격화되고 시아누크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불안해졌다. 그러던 와중에 1970년 시아누크가 프랑스 방문중일 때 미국을 등에 업은 우익의 론놀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일방적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시아누크는 귀국하지 못하고 베이징에 망명정부를 구성하였다. 1970년 4월 미국과 남부베트남군은 캄보디아 내의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넘어왔다. 이 결과 베트콩은 깊숙이 숨어버려 더욱 론놀 정권에게 위협이 되었다. 또한 론놀 정부의 부패와 타락이 점점 심화되어 국민들로부터의 신뢰가 추락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내전상태에서 혼란을 겪고 좌익들은 격분하게 되었으며 이의 지지를 받은 크메르 루즈군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크메르 루즈군은 론놀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 파리에서 교육을 받은 폴 포트(Pol Pot)과 키우 삼판 (Khieu SamPhan)에 의해 주도된 크메르 루즈군은 막강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론놀 측에 게릴라전으로 대항하여 효율적으로 내전을 수행해 나갔으며 베트남에서 수세에 밀린 미국도 더 이상 론놀의 힘이 되어주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 입성하게 되었다. 

크메르루즈 치하

크메르 루즈 (Khmer Rouge)는 급진적 공산주의로, 철두철미하게 사회개조 작업을 서둘렀다. 그들은 민주 캄보디아를 표방하고 모택동식 협동농장 형태로의 전환을 위해서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하고 화폐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이는 앙코르 시대에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제방공사나 토목공사에 참여시켰던 역사와 비교되어 흥미로운 일면이 있기도 하다. 도시 사람들은 모두 농촌으로 내몰려 협동농장에서 극심한 노동을 하였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 처형되었다. 론놀 정권하의 관리들과 이에 협력한 사람들, 학자, 학생, 교사, 외국어를 아는 사람, 안경 쓴 사람, 손바닥이 말랑말랑하며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즉결 처형하여 순간 캄보디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당시 약 700만 명의 인구 중 백만 이상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특히 거의 모든 사원들이 파괴되고 8만 여명의 승려들이 처형되었으며 약 500여명의 승려들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에 관련된 사람들도 모두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 캄보디아인들에게 가족사항을 묻는 것은 일종의 실례가 되는 형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나라도 6.25 전후에 이런 상황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새삼 역사의 흐름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겉잡을 수 없는 학살의 양상은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공산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 (Heng Samin)이 대표적 저항세력이었다. 그 와중에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인 크메르루즈는 과거에 캄보디아 영토였던 메콩 델타를 회복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는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베트남은 이를 기화로 1978년에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프놈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공산베트남 점령치하

크메르 루즈군이 과거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 국경을 침범한 것을 계기로 공산베트남은 1978년 11월 캄보디아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크메르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즈군은 서쪽 태국과의 국경지대인 정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에게 베트남군은 잔악한 크메르 루즈군에게서 해방시켜주는 해방군으로 인식되었다. 베트남은 자신의 지원을 받았던 헹 삼린을 내세워 친베트남 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베트남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최악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한편 프놈펜에 급조된 친베트남 정권은 인근 태국과 중국, 미국 모두에게 달갑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시하누크를 앞세워 이 정권에 대항하게 하였고 태국과 미국은 이 정권에 쫓겨 달아난 크메르루즈와 캄보디아 난민들을 지원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였다. 

캄보디아의 오늘

베트남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정권은 나름대로 점점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베트남은 미국, 중국 등의 압력에 몰려 캄보디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반면 베트남에 원조를 하던 소령의 고르바초프가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개방을 표방하면서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의 철수를 권유 1989년 베트남은 이에 응하게 되었다.
그 해 베트남군의 마지막 군대가 철수되자 캄보디아 정부는 자체적으로 SOC(State of Cambodia)로 국명을 개명하고 파리평화협정(1991)으로 UNTAC(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이 창설되어질 때까지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1993년 5월, 22,000여명의 평화유지군의 감시아래 캄보디아 자유총선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시하누크의 민족연합전선(FUNCINPEC)이 훈센의 CPP (Cambodia People's Party)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군 및 경찰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던 훈센과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수상직을 제1, 2로 나누어 두는 기형적인 의회제도를 갖추었고 시하누크는 그의 아들 라나리드에게 제1 수상직과 훈신펙 총재직을 물려주며 다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실로 그가 처음 왕관을 쓴 이후 52년만의 일이었고 시하누크는 그때부터 민족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식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으로 불려진다. 1997년 양수상의 힘의 불균형에서 온 한 차례 내전의 홍역을 치른 후, 1998년 7월 26일 총선이 실시되어 CPP가 국회의 과반수 (122석중 64석) 의석을 차지하여 다수당으로써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리고 훈신펙 (43석)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라나리드가 국회의장을 맡아 그해 12월 새 정부가 공식 출범을 하였다. 그 당시 상원도 생겨 전 국회의장 (CPP) 체아심이 의장을 맡았다. 현재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려움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고의 안정된 정국을 맞고 있다. 반면 크메르루즈는 1998년 후반기 정부군에 쫓겨 태국 국경근처의 알롱벵까지 밀렸고 일부 군 고위 지도자들 (12명)은 무조건 집단 투항하므로 거의 와해되었으며 잇따라 폴 포트의 죽음과 타목의 전향으로 현재는 전멸되다시피 되었으며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현재 캄보디아 내 법정에서 폴 포트 시절의 대량학살 관련 재판이 진행중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훈센의 실용노선이 대세를 이루어 김영삼 정부시절 이미 정식국교를 맺었으며, 현재 여러 관로를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인 간절한 투자의 손짓을 하고 있어 가능성이 많은 이곳에의 진출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충분한 연구와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넌다는 견실한 자세가 요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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