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를 팔아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손가락질하게 만든 것도 이런 조작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수의 말을 두려워하고 도 그 말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때론 실수를 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비웃음을 받고 싶지 않아서겠죠 우유부단하면 안 된다거나 주변 살마들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또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렵지만 무언가를 시도하고, 여러 번 실패를 겪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일어나 성취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권하는 우리 사회는 실패의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죠.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비효율적일 뿐입니다. 당나귀를 팔려고 나갔으면, 빠른 시간 안에 시장에 도착해서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면, 그만큼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밭에라도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이데올리기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늘 효율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거둔 이들이 성공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누리는 것도 겪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강요된 성공의 이미지만 좇다 보면 성공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돈은 많지만 돈 쓰는 법을 모르고, 집은 좋지만 과시와 투자 외에는 집의 효용성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룬 성공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죠.

이솝은 우리에게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전합니다.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 우리 자아가 온전할 테니까요. 하지만 역사를 보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성공(?)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습니다. 고대로부터 폭군, 독재자, 살인자는 모두 단호하고 신속하게 목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말에는 귀를 닫았습니다. 그들이 당나귀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면, 역사 속의 비극적인 사건도 많이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0-31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 - <피로사회> 한병철 34

 

우리는 학창 시절 내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우리 교육은 규율에 맞춰 살며 질서를 지키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서울대에서 4.0이상의 학점을 받은 학생들의 공부 비법을 알아 본 결과, 대부분이 교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게 필기한다고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육 과정은 마치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입 시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게 만들죠. 그래서 질문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은 학생들이 고득점을 얻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34-35

 

모든 것을 긍정하고, 모든 것에 정력적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무기력한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무기력해진 인간은 분노하는 법도 잊습니다. 저자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는 사색을 제안합니다. 사색적 삶이란 생각하는 삶을 말합니다. 36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Nachdenken)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 <피로사회> 한병철 36-37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어른들 중에는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거나 어떤 일에 혼란스러워할 때도 아이의 의견만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무엇이 되고 안 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은 절망에 대한 것도 배웁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속수무책일 째, 위로받고 힘내는 법도 배웁니다. 어른이, 선생이 옆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격렬하게 우는 아이를 잠시 내버려 둘 줄 알며, 기꺼이 소년의 짝이 되려는 사람이 바로 좋은 선생입니다. 49

 

우리들의 경제 구조는 조직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립없이 함께 일하며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 기호가 획일화하고, 쉽게 동화하고, 수요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대중들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제도는 인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하는 사람들과, 사회라는 기계에 아무런 마찰도 없이 조립되고 강제나 통솔자가 없어도 통솔되고, 맹목적으로 휘둘려지는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제도는 사람을 순하게만드는 제도이다.’ - <서머힐> 알렉산더 닐 51-52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Karl Wilhelm Von Humboldt)모든 인간의 목표는 개인의 능력을 가장 고귀하고 조화롭게 발전시켜 모순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표면적으로 학교가 내세우는 정신과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지점에서 말이죠. 훔볼트는 개인은 잠재력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한 학교들을 돌이켜 보면, 대부분 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교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아이들의 능력을 발견하는 데 무관심하고, 수많은 시험은 잠재력을 들여다볼 만한 시간을 빼앗죠. 개인의 잠재력과는 상관없이 학교,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학교의 목표인 것입니다. 53

 

금기(禁忌 금할금 꺼릴기)’란 어기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 어떤 두려움도 이겨 내기 때문이죠. 59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항상 환기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식과 공기와 물이 몸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도 내 몸의 안과 밖으로 들고 나야 합니다. ..

우리가 그토록 친구를 필요로 하고, 어릴 적 친구를 가장 편하게 대하는 이유도 자신의 치부까지 다 본 사이라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상황에 빠져 있든 그대로 봐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필요 없는 사이가 가장 이상적인 대나무 숲인 것입니다. 64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무서운 임금님 노릇을 하는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남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화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65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아픈 데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대나무 숲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친구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면 그도 속상할 테니, 아예 말하지 않아요.” 66

 

인디언의 어느 부족은 친구를 내 짐을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짐을 상대의 어깨에 부려 주기도 하고, 내가 견딜 만할 때는 상대의 아픔을 지는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떨까요? 지나친 도시화로 대나무 숲을 보기 힘든 이 시대에 말입니다. 66-67

 

위대한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교묘한)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육친[六親, 아버지 자식 형 동생 남편 아내, 곧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성과 자애가 생겨났고,

국가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나왔다.’ - <노자> 노자 69

 

노자는 자연스러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도덕과 윤리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덮기 위해서 거짓이 거짓을 낳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지요. 70

 

어린이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만큼 사람 그 자체, 세계 그 자체에 빠져드는 존재도 드물 것입니다. 90

 

아무리 설명한다 해도 진심이 아니면 머리에 남지 않고, 겪지 않으면 가슴에 담기지 않습니다. 97

 

인어 공주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인간 다리와 교환합니다. 어릴 적에는 인어 공주의 용기만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어 공주가 이루려는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교환은 매우 불공정해 보입니다. 이제까지 이 교환에 대해 반발을 느꼈다는 독자가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요.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어 공주를 살리려는 언니들의 교환 조건을 보죠. 인어 공주를 다시 바다로 데려오기 위해, 죽음의 위기에 빠진 막내의 목숨 값으로 언니들이 마녀에게 준 것은 머리카락뿐입니다. 공주의 머리카락이 제아무리 탐스럽다 해도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녀가 내준 약과 칼은 성격이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녀의 약과 칼, 둘다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해 주죠.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자가 막내 인어 공주라는 것 또한 같습니다. 인어 공주는 육지로 가기 위해 마지막 순간 모래사장에서 스스로 약을 먹고, 인어 공주로서의 삶을 끊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다로 가기 위해 왕자를 칼로 찔러 왕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끊어야 했죠. 그러므로 마녀가 내준 것은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녀는 같은 성질의 것에 다른 값을 받았습니다. 108-109

 

흔한 사랑의 경구 중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프롬의 말대로 사랑도 기술처럼 갈고 닦아야 하는 능력이라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수동적인 자세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없으니까요. , 내가 하지 않는 사랑이란 불가능합니다. 127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128

 

고독한 존재로서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교환 가치가 당연해진 세상에서 사랑 또한 본질이 훼손되었습니다. 물질적이고 획일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 또한 교환 가치가 있는 보시 대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교환 가치를 넘어선 사랑을 꿈꿉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나를 예쁘고 잘생겼을 때만 사랑한다고 느낄때, 나의 돈과 능력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때 쓸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 때문에, 매월 일정액을 벌어 오기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조건을 넘어 선 사랑, 주고받음의 대차대조표가 없는 사랑이 이상적이라면, 우리의 본능 자체를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편리성에 길들여진 우리는 사랑 또한 교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릴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버리면 사랑을 위해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과 대면해야 할 테니까요.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랑에 대한 높은 이상을 훼손시키며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사랑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그러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요.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도고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129-131

 

엄마란 어떤 사람 일까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하나 없다는데, 엄마에 대해서는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100명이라면 엄마의 이미지도 100개여야 할 텐데,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에 헌신적인, 자애로운, 희생적인등의 단어를 갖다 붙입니다. 세상 모든 자식이 똑같은 덕목을 가지지 못했듯, 엄마의 이미지도 획일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엄마와 자식이 사회에서 만든 이상적인 엄마 상이라는 그림에 갇혀 불화를 겪고 상처를 받죠. 140

 

어른의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있죠. 143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께서 어떻게 성공할 거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어요.”

어느 날, 열일곱 살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쓴 청소년 소설의 독자로 만났던 그 친구는 저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제 열일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죠. 과연 그 친구보다 제가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늘 헤살렸지만, 그래도 저를 필요로 하면 그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습니다.

?”

제가 되물었습니다.

고민했는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른들은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잔항요. 학교는 아닌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말이 막히는 거예요.”

저도 낯설지 않은 화두였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방법을 벗어날 때, 누구나 같은 고민을 하게 되겠죠. 저는 그동안 저를 괴롭히고 헤매게 만든 질문, 그러나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그 친구에게 던졌습니다.

왜 성공을 해야 하는데?”

성공해야 행복하잖아요.”

친구는 제가 생각했던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했듯이 다음 과정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행복이 뭔데?”

?”

구체적으로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풍경은 어떤 거야? 괜찮은 차? 서울에 있는 고급 아파트?”

“..... 비슷한 거 아니에요?”

가진 것의 합이 행복일까? 네 행복은 그런 거니?”

열일곱 살 친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치 저의 옛 모습을 보는 듯했죠. ‘행복을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이지만, 사실 행복의 구체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행복의 풍경을 그리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우리가 세뇌된 행복에 길들여져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이 곧 행복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유토피아가 우리의 행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고 해서 바로 자신만의 행복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는 행복의 풍경이 우리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64-166

 

어른 보다 아이가 바이러스에 치명적인 것처럼, 이 사회의 병든 이데올로기에 가장 취약한 것도 어린아이입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물질적인 것밖에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이기도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그 이미지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일까요? 혹시 누군가에 이해 감염된 것을 행복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요?

세라는 행복해졌다고 작가는 썼습니다. 금광을 소유한 아버지 친구가 세라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세라는 아버지의 몫 외에도 미혼인 아버지 친구의 재산까지 상속받게 도리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세라는 친구들과 함게 행복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며 봉사 활동에도 앞장섭니다. 부유하고 윤택해진 세라, 하지만 세라는 분명히 행복해졌을까요?

세라의 환경에서 변한 것은 경제 상황 뿐입니다. 세라는 여전히 고아이고, 후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세라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작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자마자 세라의 행복을 단언했지만, 세라는 왠지 동의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만이 그녀의 행복을 결정한다면, 그녀는 앞으로 돈만 아는 숙녀로 성장하겠죠. 하지만 기품 잇는 그녀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미래를, 행복의 풍경을 그려냈을 것만 같습니다. 결코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말이죠.(<소공녀> 프랜시스 버넷) 167-168

 

우리는 늘 예쁜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말을 농담(?)처럼 듣고 삽닌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모 지상 이데올로기에 허우적거리고 있죠. 모델처럼 늘씬하지 않아서, 복근이 없어서, 키가 작아서 ......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외모의 조건에 자신이 세운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외모지상주의의 포로가 되었을까요? 새 왕비에게 거울이 있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요? 우리에게도 마법의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 대신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거울, 피로의 푼다며, 심심하다고 보는 텔레비전.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법의 거울입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텔레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선호하는 이미지, 즉 팔리기 좋은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그 이미지들은 또 텔레비전에 예쁘게 나오죠. 소비자인 남성, 혹은 여성이 좋아하는 이미지입니다. 자신의 만족에 의해 설정된 외모 기준이 아니라 텔레비전, 즉 자본주의 사회가 선호하는 외모가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메시지를 담은 텔레비전을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틀어 봅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내것이어도 나의 행복은 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마법의 거울은 백설 공주와 새 왕비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의 목소리는 신뢰를 가장한 억압이므로, 텔레비전을 끄면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 내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182-183

 

스펙터클(spectacle)이란 간단히 구경거리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을 뗄 수 없고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현란한 구경거리에 스펙터클이란 말이 붙죠.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뽀로로>나 어른들의 저녁 시간을 잡아먹는 드라마는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스펙터클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만이 스펙터클은 아닙니다. 1년을 분기별로 나누게 하는 스포츠, 이제는 텔레비전 뉴스에도 나오는 한류 스타들의 공연, 떠들썩한 세몰이로 정치 바람을 일으키려 앴는 전당 대회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엄청나게 역동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쇼들을 모두 스펙터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펙터클의 세꼐는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현대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은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사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즐기는 우리도 과연능동적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능동적인 인간은 보는인간이 아니라 행동하는인간입니다. 184-185

 

능동적으로 사는 인간은 스스로 그것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인간입니다. 자신의 삶에 완벽히 뛰어들면 자신의 삶이 가장 흥미진진한 쇼가 되죠. 굳이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185

 

일반적인 역사적 삶이 지니고 있는 결함의 다른 측면은 개인적 삶이 아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펙타클적 극화(劇化 심할극 될화) 속에 밀려드는 가장된 사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 분리된 일상생활에서의 개인적 경험은 언어나 개념이 부재한 채로, 이를 테면 어느 곳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없는 채로 존속한다. 개인적 경험은 고통되지 않는다. 개인적 경험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스펙타클적인 가장된 기억을 위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망각된다.’ -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흔히 셀레브리티(celebity)라 말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학자, 예술인, 정치인만이 아니라 대중 매체가 일자리인 셀레브리티 상당수가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86

 

셀레브리티는 대부분 상류층입니다. 그들 자신과 자녀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즐길 거리도 많습니다. 186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속 재벌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꿈 같은 로맨스가 끝나면, 울는 현실 속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텔레비전의 세계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역동적이면 역동적일수록 우리네 삶이 더욱 남루해보이죠. 187

 

존엄성을 지킨다는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육체는 '자기 자신'의 첫 번째이자 가장 기초적인 요소죠.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키우고, 단련하는 법이야말로 가장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기초가 아닐까요? 한 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기나긴 인생을 위한 수업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남의 기준에 맞춰 살도록 강요합니다. 공부라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누구나 알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결정 앞에서 타인의 기준이나 사례는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지요.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삶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삶입니다. 그 시간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인생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헤매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깊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어떤 부분이 약한지 모릅니다. 작은 펀치 하나에 온 존재가 휘청이고 나면 이미 때는 늦었죠.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닥쳐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때일수록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릴적에 배워야 했던 끼니의 중요함, 체력 키우기 등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눈과 코와 입술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머리에 새기며 자신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렇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을 인정해 가며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합니다. 돌아가는 길이라 더디고 어렵지만, 한 가지 위로할 만한 것은 인간은 생각보다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빗장을 열러 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9-230

 

시스템은 다수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신이나 왕권 같은 불가침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시스템에 대하여 늘 고민하는데, 현대 철학자 중에 이를 깊이 고민한 학자가 바로 존 롤즈(john Rawls. 1921~2002, 미국의 철학자로, '정의'라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입니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정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면 개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 (...)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정의론> 존 롤즈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경제 발전을 위하여'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침묵을 강요한 정부가 그랬고, 노동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재계(財界)가 그랬죠. 242


정의로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는 말에 동의를 한다면, ..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실험을 말이죠.

존 롤즈는 이를 위한 사고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통칭 '무지의 베일'이라 불리는 실험이죠. 내가 남한에 태어날지 북한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 나의 집이 부자일지 가난할지 모르는 상태, 내가 이성애자가 될지 동성애자가 될지 모르는 상태, 내가 건강할지 아닐지 모르는 상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 속의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대한 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뿐입니다. ..

내가 생각하는 평등을 다른 사람이 불평등이라 말할 때, 다른 사람의 평등이 내게는 너무나 불평등하게 느껴질 때, 잠시 무지의 베일을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43-244

 

가만히 돌이켜 보니 우리는 소시민에게 감정이입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나 어른이 되어 즐기는 영화의 주인공들 대부분은 특별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즐기기 위한 것입니다. 독서나 영화 관람이 끝난후에 일상생활에서 씁쓸함을 느낀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죠. 저는 그것이 일상적 감정이입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즐길 때나 진행되어야 할 감정이입이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고 말이죠.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특별한 사람의 성취를 목표로 삼다 보니, 작은 성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목표를 바라보니 자신은 늘 제자리, 실패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내면은 스스로 관객이 되어 평범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 합니다.

이 사회는 늘 성공하라고 세뇌를 하죠. 성공해야 행복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내면 깊이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에서는 성공의 모습까지도 기성품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도심의 평수 넓은 아파트, 멋진 자동차, 명품 옷과 액세서리 등등. 이런 것들을 갖춘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성공으로 가는 궤도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맹목적으로 달려갑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을 되뇌이면서요. 하지만 성고이란 자기 충족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 충족할 수 있을 것 같거나 충족해야만 할 수준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가장 멋진 옷이 성공의 척도였듯이 우리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위해 미친듯 달려갑니다. 자기계발이란 말이 고전적 단어가 되고, 이미지 메이킹이란 말도 시들해지니 이제 셀프 브랜딩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충족하는 삶은 임금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퇴화죠.

"나는 이 정도 디자인과 옷감이면 만족해" 혹은 "나는 여기까지만 성공할래"라고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멈추는 순간 허물어질 것이라는 불안도 만연하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소시민의 충족한 삶은 살짝 밀기만해도 무너질 만큼 허약합니다. 모두가 그것을 알기에 마족하고 싶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시민이면서도, 평생 소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임금과 같은 각오와 부담감을 안고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도안 소시민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회, 임금이 되어 본 적도 없는데 벌거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49-251

 

조선의 세자들은 지독한 조기 영재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보통 예닐곱 살 정도에 시작된 교육은 그 양과 질에서 조선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공부에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 평가는 물론이고, 수업 시작 전에는 여러 명의 스승들 앞에서 전날 배운 것을 암송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학자들이 어린 세자 한 명을 가르치기 위해 24시간 준비 상태였는데, 그들 모두 내노라하는 공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매서운 눈으로 감시하며 공부를 시켰으니, 조선의 세자도 웬만해선 버티기 힘든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공부를 사도 세자는 네 살에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 덕분에 생후 4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쉴 시간도 없이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어린 사도 세자는 꽤 똘똘한 아이여서 시키는 대로 공부를 곧잘 했다고 합니다. 그렇잖아도 귀여운 아들이 조선 최고 지식인들에게 뛰어나다는 평까지 들으니, 영조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공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수업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의 건강한 사내아이가 재미있어 할 리가 없겠죠. 그러나 영조는 놀고 싶어 하는 세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조금이라도 꾀를 부릴라치면 버럭 화를 냈습니다. 사도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영조에 대한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266-267

 

어른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착함'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하고,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면 그리 하고, 자야할 시간에 자는 아이, 한마디로 어른 손을 덜 타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도 그럴까요? 갓난 아이는 수동적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만이 자신의 생각과 그것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위협으로 그 의지가 꺾이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면, 아이는 개성은 커녕 자신에 대한 주체적 인식조차 성장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합니다. 아이의 말에 윽박지르는 일은 비교육적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죠. 그래서 되레 식당 같은 공공 장소에서 아이의 제멋대로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86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성가시게 하는 질문이나 고집은 수긍해도,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부는 이 사회의 인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

어른이 되어 사회가 속삭인 약속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에는 이미 레일 밖으로 나오기엔 늦었습니다. 부모의 손을 타지 않는 아이, 어른의 말에 순종적인 학생,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 줄 모르는 국민...... 사회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 군상입니다. 286-287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289

 

이 책은 자유롭다는 사회에서 우리가 왜 이렇게 부자유스럽게 살아가는지, 답답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병증을 시원하게 아려 줍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자유란 그것을 향유할 우리가 건강해야만, '자신의 생각과 개체성'이 확고 해야만 누릴 수 있다고요.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왕이나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됨으로써 고독이나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를 시도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처음에는 시도였을지 모르지만 자본의 지배가 가속되자 '자유롭다고 믿는 자동인형'을 만드는 시스템은 공고화되었지요. 290

 

'......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됨을 그치고 변화하는 것이다. , 그는 일종의 문화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동일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에게 기대하는 그런 상태로 변화된다. 그와 함께 ''와 외부 세계와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 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 인간은 이미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그가 지불한 대가는 혹독하게 비싼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가 자동인형이 된 인간으로 가득해진다고 합니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인간적인 무력감과 절망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고 인생이 무의미해질 때, 인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인생의 의미를 대신 찾아줄 무언가를 갈망하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사회가 바로 파시즘의 온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개인의 개성을 증오하는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민주주의라면 인간에 대하여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백인백색, 모든 주체적인 인간은 각각의 개성을 뽐내겠지요. 그것은 또한 각 개인의 권리이며 수많은 피를 흘리며 되찾아 온 권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이 그러하듯 그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집요하기만 합니다. 착한 아이, 양순한 시민으로만 살아가서는, 절대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죠. 가만히 있으라는 기득권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평생 투쟁심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동인형이 되어 파시즘의 깃발에 열광하여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말이지요. 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제야 겨우 조금, 풀꽃들 사이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춤추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든 싸울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피곤하게 느끼겠지만, 노예로 사는 것보다 그것이 나은 삶 아닐까요? 당신이 출 춤에 미리 박수를 보냅니다. 29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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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HREE 일과 삶

 

10 우리는 시간과 투쟁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더 오래 살고 있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시간은 더 없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247

 

아이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은 양육에서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조직 시간이 자주 자기 시간이나 상호작용 시간보다 우선시되는 세계에서 꼭 필요한 기술이다. 25

 

우리 문화에서 시간은 돈이다... 일을 더 빨리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 자동차 컴퓨터는 빠르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곳을 가고 더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더 빨리 일할수록 우리의 시간은 더 빨리 새로운 일로 채워진다.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일수록 우리는 더 적은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속도에 집중할수록 서로에 대한 인내심은 점점 줄어든다. 또한 빠르게 돌아가는 삶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사람들은 자유시간이 전혀 없다고 불평한다. 253-254

 

앨빈 토플러가 <미래 충격>에서 지적했듯이, 사회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문화 전체가 일시적인 공황을 경험할 수 있다. 254

 

시간의 속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많이 이동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더 많다. , 더 많은 것을 사야 하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줄 오락활동들도 더 많이 있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활동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더 시간이 없는 것처럼 느끼는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255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진 현상이 아니다. 과거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시간에 맞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숙련된 장인들은 늦게 일어나 더 늦게 일을 시작했다. ..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노동자 계급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산업화 이전의 삶은 대학생들의 생활과 약간 유사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이 과음과 파티, 그리고 잠샘 작업과 어우러져 있었다. ..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보인다. 우리는 이미 조직 시간의 요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 산업화 이전의 노동자는 게으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시간을 돈으로 여기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여가가 더 가치있는 것이었다. 255-256

 

17세기와 18세기 유럽의 남성 및 여성 근로자들은 매주의 첫날에는 일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그 휴일을 () 월요일이라고 불렀다. 남성들은 술을 마시고, 길모퉁이를 서성거리고, 싸우고, 투견이나 투계 선술집에서 내기 게임을 하며 월요일은 보냈다. 일요일은 가족을 위한 날이고, 월요일은 친구를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여성들도 술을 마셨지만 대개는 집안일을 하면서 월요일을 보냈다. 성 월요일의 흔적은 1970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서 헤일리는 베스트셀러 소설 <자동차>에서,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를 결코 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주말이 끝난 후, 근로자들은 병가를 내서나 피곤한 상태로 출근하기 때문에 월요일에 만들어진 차들은 다른 날 만들어진 차들보다 덜 믿음직한 성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는 것이다. 256

 

고용주들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일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낮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00년대 초, 헨리 포드는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동규율을 강화하기 위해 낮은 임금을 이용하는 대신 오히려 보수를 높여주고 주당 근무 시간도 줄여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착실한 근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탐욕스런 소비자로 만드는 것, 즉 충분한 임금과 쇼핑하기에 충분한 시감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기업에 이득이 되었다. 257

 

테일러화(과학적 관리법의 창시자인 테일러의 이론에 따라 모든 업무를 단편화하고, 개별 작업자의 동작을 규정, 감시함으로써 시간과 동작의 낭비를 줄여 일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 260

 

아마도 현대의 일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은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263

 

시간에 맞춰 일하는 것에 저항했던 산업화 이전의 우리 조상들과, 시간과 과업에 의해 구조화된 일을 하는 현재 사람들의 상태는 일과 시간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첫째 아마도 과업 지향적인 일이 시간 지향적인 일보다 더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운 듯하다. 둘째,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하고 긴 자유시간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셋째, 그러나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 시간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고용인들에게 자신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264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어떤 면에서 20세기의 가장 급진적인 경영 혁신이다. .. 지난 백년 동안, 대부분의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일에 끼워맞추도록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는 바닷속의 좁쌀 한 알(滄海一粟, 창해일속)’에 불과하지만, 개인이 자기 삶을 중심으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생황에 맞게 일을 조정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시간제 근무이다. 시간제 근무는 최근 나쁜 평판을 얻어왔으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고용주들은 전일제 고용인들을 해고한 다음 그들의 자리를 더 값싸고 쉽게 내보낼 수 있는 시간제 고용인들로 메우고 있다. 둘째, 시간제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지 않으며, 임금 수준도 낮고 승진 가능성도 없는 직업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제 근무를 선호한다. 265

 

우리들 대부분은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266

 

일이 우리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수록 모든 활동은 점점 더 일처럼 느껴진다. 시계와 일정표는 우리의 사회생활로부터 자연스러움을 빼앗아간다. 이제 사람들이 친구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 되고 있다. .. 현재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고 있지 않은 일은 아마도 잠자는 일일 것이다. 신경 생리학자인 스탠리 코랜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첨단 기술인 시계가 지배하는 생활방식 덕분에우리는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연간 500시간의 수면을 덜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69

 

최근에는 컴퓨터, 이메일, 팩스, 휴대전화, 호출기 등이 우리를 일터의 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침대에서 잠옷을 입고 일하거나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

근로자들이 직장 내의 책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은 일하는 시간의 범위를 넓히거나 그 시간의 양을 증가시키는 데도 이용된다. 270

 

장소에서의 융통성은 근무시간에도 융통성을 부여한다. ..

신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은 잠재적으로 우리를 하루 24시간, 1365일 내내 고용인으로 만든다. 271

 

시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팔고, 사용하고, 사고, 투자하고, 아끼고, 죽인다. 274

 

샘 킨은 자신의 책 <열망>에서 .. 일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사람들은 무력해지고, 성적 구별이 사라지며, 시장 원칙만이 추종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직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일이 없으면 삶 전체가 타락한다.”그러나 자유시간이 없어도 삶은 타락할 수 있다. 275

 

 

11 여가와 소비주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믿었다. ..

그리스어로 여가라는 단어는 스콜레(skole)’이며, 라틴어로는 오티움(otium)’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 일을 뜻하는 단어는 여가를 뜻하는 단어의 부정형이다. ‘이라는 뜻의 아스콜리아(ascholia)’네고티움(negotium)’은 둘다 여가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페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뜻하는 스페인어네고시오(negosio)’여가각 아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모두 여가가 마치 생활의 중심인 것처럼 일을 여가와 관련시켜 비유한다. 영어단어 레저(lisure)는 라틴어의 리케레(licere)로부터 파생되었는데, 그것은 허락되다라는 의미이다. 영어에서는 마치 일이 생활의 기준인 듯 여가를 일에 빗대서 표현하고 있다. , 우리가 일을 멈추도록 허락되었을때가 여가라는 것이다. 276-277

 

사업가들은 일요일을 우울하고 지루한 날로 만들려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가가 너무나 보람차고 즐겁다면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279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용주들은 토요일 휴가를 주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고용인들이 말썽만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280

 

TV를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 사람들은 나뭇조각으로 카누를 만들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원하지만, 단지 TV를 더 많이 보기 위해 여가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비록 한가한 시간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TV를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82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본성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다. 283-284

 

한때 여가는 아마추어를 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 애호가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아마추어를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애호하는 사람또는 어떤 것에 대해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돈이나 명성 같은 외적인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재미있고 본질적으로 보람을 주기 때문에 취미를 개발한다. 285

 

1970, 경제학자 스테판 린다는 <곤경에 처한 유한계급>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시간더 많은 소비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대부분 더 많은 소비를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286

 

돈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돈을 벌기 위한 시간, 쇼핑할 시간, 그리고 유람용 모터보트나 패키지 투어 등 돈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소비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약할 때조차 일을 해야 할 필요를 창출한다.. 287

 

십대(teenager)들조차 자신의 여가를 소비와 교환한다. 과거의 십대들은 가족을 돕거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 자신이 원하는 사치품을 사기 위해 일하는 중산층 십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젊은이들에게 을 장려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일을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규율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87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것은 십대의 학업을 방해할 뿐 아니라 호기심 많고, 상상력 풍부하고, 호전적이어야 할 시기에 적응된 온화함(adjusted blandness)”을 심어줄 수 있다는 그린버거와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288

 

여가와 소비재를 교환하는 십대들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일과 소비의 패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잃는다. 만약 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자유시간을 포기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여가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어떤 활동들이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좋은지 발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부모를 비롯하여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이다. 말썽을 일으킬 위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289

 

우리는 미국인들이 점차 타인 지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1950년대 데이비드 리스먼의 주장을 논의한 바 있다. 타인 지향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원할 뿐 아니라 시장의 물질적 동기와 고용주가 제공하는 심리적 유인에 의해 움직인다. 리스먼의 말은 옳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제공하는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지만, 아마도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안에 불어넣은 욕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쇼어는 소비가 대개 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290

 

주디스 윌리엄슨은 <열정의 소비>에서, 시장이 우리의 열정을 소비하고, 그것이 더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장해제시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돈은 당신이 돈을 번 방법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숨겨준다... 우리는 고객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수표, 혹은 신용카드를 갖고 있기만 하면, 당신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292

 

'여가'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본질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가행위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 행위 자체를 즐긴다. 293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변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일과 소비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여가를 즐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여가는 돈이 들지 않는다. 친구나 가족과 어울리는 것, 소설책을 읽거나 단지 공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여가를 즐길 수 있다. 여가는 우리에게 소중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활동을 하는 시간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 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 것이다. 여가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한층 더 어려울지 모른다. 295

 

 

12 의미 있는 일, 그리고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에게 의미 있는 일은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일을 뜻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원한다. 의미 있는 일의 본지로가 그에 대한 욕구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철학적 질문의 모태가 되는 질문에 직면해야만 한다. ,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296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한다. 300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자체가 정신 질환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마리 보나파르트에게 보낸 편지엣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는 순간, 그는 이미 병에 걸린 것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처럼 부정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면 우울한것이 사실이다. ..

심리치료자이자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인 빅터 E.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치료 방법을 개발했다. '의미치료(logotherapy : 이 이름은 '의미'리는 뜻의 그리스어인 '로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 원동력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변화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것이지만, 사람들은 선행을 하고, 가치를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300-301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레오 톨스토이는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모든 인류가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303

 

놀랍게도,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관심을 기울인 현대 철학자는 거의 없다. 또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대답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질문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곤 한다. E. D. 클림케는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영역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질문은 우주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세 번째 질문이다. 나는 왜,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만약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그것을 발견할 것인가? 목적이 없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자체가 하나의 대답만을 암시한다는 이유로 그 질문을 해체시킨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의미한 질문으로 여긴다. 305-306

 

철학자 L.J. 러셀이 지적하듯이, 만약 삶의 의미가 오직 그 결과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일 잼을 만들어라, 어제 잼을 만들어라. 그러나 오늘은 잼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은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를 위해 마찬가지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잼을 먹지는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란 현재를 위한 삶과 미래를 위한 삶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러셀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좋아한다. 그러나 러셀은 삶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07

 

도덕성이 반드시 당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의 가치 있는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한다면, 이론상으로 우리는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행복으로 가득한 삶은 의미 있는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행복하기'위해 해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 즉 삶의 목표이다. 어리스토텔레스는 실용적인 지혜, 탁월함,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는 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학구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수준에서의 학습, 재능이나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이 삶의 보람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세스는 탁월함에 대해서도 도덕적이고 지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설명을 모두 종합하여,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309-310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무 즐거움이나 행복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오직 고귀하고 도덕적인 즐거움만이 참다운 행복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행복은 오직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행복은 활동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가생활은 게으른 생활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삶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 때 가장 행복하다. 누군가를 감옥의 텅 빈 독방에 가두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최악의 고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죄수에게서 자유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행위와 상호작용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종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삶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삶의 행복한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당신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은 고통과 슬픔까지도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급자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결핍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는 행복이란 게 반드시 살아가면서 원하는 걸 얻는 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과 의미는 모두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며, 도덕적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요구와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있는 불행은 일을 지향하는 문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오직 일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는다. 그것은 극도의 피로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310-311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행복 연구는, '일이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만들어낸다'는 아렌트의 견해를 지지하는 듯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동안에는 약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몰입을 경험하고, 여가시간에는 18% 정도만 몰입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에 몰입할 때 창조적이고, 강하고, 활동적이며, 집중적이고, 동기화된 느낌을 더 많이 갖는다는 의미였다. 311

 

칙센트미하이의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통찰은, 현재 우리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일터가 아닌 곳엣 이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12-313

 

자본주의는 삶의 수단을 제공할 뿐 삶의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315

 

20세기 내내 고용주들이 조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것을 손에 넣어 이용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중 맨 처음에 등장한' 과학적 관리법'은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했고, 다음으로 출연한 '인간관계론'은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며, 이제 몇몇 컨설턴트들은 '영혼'을 건드리려 하고 있다. 317

 

'직장에서의 영성'은 대중 심리학과,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경영학 이론이 항상 해왔던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 그것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듦으로써, 애초에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던 권력과 갈등, 자율성에 관한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대신 그거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318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3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처럼, 의미 있는 일은 주관적인 특성과 객관적인 특성을 모두 지닌다. .. 일의 사회적 의미와 도덕적 가치는 문화와 개인에 따라, 그리고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세상을 '인식'할 뿐 아니라,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조직은 의미 있는 일을 '창조'해주지 않는다. 320

 

개인이나 조직이 의미를 창출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만약 그러한 의미가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그것은 냉소주의만을 가져올 뿐이다. 앞서 우리는 따로따로 일하는 사람들을 ""이라고 불렀던 회사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한 상황 혹은 실재를 파악해야만 한다. .. 모든 고용인들은 존엄과 존중을 가지고 처우받아야 한다(너무나 많은 근로자들이 수년간 자신들이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해왔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삶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 약간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결정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된 노예라도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면 이러한 능력을 되찾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노예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결정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321

 

의미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면 알게 된다. 종교직과 같은 일부 직업들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직업들보차도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의미를 발견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의미 있는 일이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고통이나 고된 일 혹은 스트레스를 수반한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좌절하거나 지쳐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개인의 삶에 활기를 북돋워준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경험과 우리가 논의한 숭고한 여가의 개념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22-323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존중받기'를 워하며, 어느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고 싶어할 뿐이다. 결국 선의는 심리적으로 계획되기보다는 존중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번성하는 경향이 있다. 323

 

 

 

에필로그 -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이 책은 저주로부터 소명으로, 그리고 그 이상의 것으로 변화한 일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일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첫째, 일은 더 나아졌는가? 그리고 "더 낫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분명 임금 노동자는 노예보다는 낫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노예와 농노, 계약제 하인, 그리고 초기 산업 노동자들보다는 육체적으로 덜 고되고 덜 지저분하고 덜 위험하다. 그러나 "더 낫다"는 것은 또한 고용주와 고용인들 간의 도덕적 관계를 포함해야만 한다. 직장 내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정성이 존재하는가? 개인들은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는가? 혹은 일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는가? 이 역시 "더 낫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달려 있다. 일이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향상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우리의 직업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324-325

 

나는 현대의 경영자들이 올바른 직장을 '만들기'보다는 개인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 현대의 경영 기법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일이 점차 우리 삶의 보다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고용인들에게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주주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들은 교묘한 속임수로는 신뢰와 헌신을 얻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325

 

고용주들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고용인들에 대한 의무 없이 그저 권한만 유지하려 든다. 글나 근로자들은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경영자 및 경제의 실수와 "불운"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질책한다는 것이다. 326

 

고용불안정은 실업률이 낮을 때보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326

 

정직한 직장은,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328

 

과거의 사회계약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어떤 것일까? 조직은 직업 안정성을 약속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보의 공유를 약속할 수는 있다. .. 경영자들은 조직의 모든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용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정보는 가능한 한 많이 고용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 '정직한 직장'이란 고통스러운 진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그들이 그것에 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조직을 의미한다. 결국 그것이 "근로자들을 성인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329

 

상호존중은 단기적인 헌신관계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서로에게 존중을 표하고 존중을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이 항상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며,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을 '신뢰'한다...

존중, 신뢰, 정직은 양 방향으로 작동한다...

'진실'은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고용인들과 학생들은 평균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그들은 진짜로 평균 이상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330

 

전통적인 노동윤리 아래서 개인의 고결함은 그가 어디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영이론가와 고용주 들은 '일을 잘하는 고용인일수록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331

 

 

내가 현대인의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가지 이유는 단지 직장 내의 불의, 경영 술수, 혹은 경제적 불안정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인 큰 그림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삶 자체가 더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살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어느 곳에서 일하고 어떤 물건을 구입할지에 대해 전례 없이 많은 선택권을 가진 놀라운 시대,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기계들은 우리의 노예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지금은 삶이 온갖 종류의 보람 있는 활동들로 가득 차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랜 근무시간뿐 아니라 채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트레스와 외로움, 그리고 가정해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왜 그런가?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항상 더 많은 것을 워하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331-332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 , 생활 속에서 선택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학예(liberal arts)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332

 

보다 광범위한 질문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만큼의 가치를 갖는가?"이다. ..

일이 지배하는 삶 역시,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고 개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삶을 일에 꿰어맞추는 대신 일을 삶에 통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333

 

 

 

 

역자 후기 - '일과 삶', 그 본질에 대한 고찰

 

일 혹은 일의 부재는 우리 삶에 너무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지금껏 우리가 하는 ''에 대해, 그리고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통찰해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335

 

현대사회에서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개인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도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일은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는 일을 잃음으로써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 심지어 가정까지도 - 잃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르고 바람직한 현상인가? 일은 본래부터 모든 희생을 감내하면서 지켜야 하는 무엇이었나? 일은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성취감과 만족을 주는가?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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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5 일과 자유

 

독립, 자유, 평등과 같은 미국의 문화적 가치들에 비춰볼 때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미국적인것에 가깝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서로 돕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할 뿐이다. 115

 

노예제도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방법이다.

노예제도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타락, 최악의 상태로서의 일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노동자들은 그는 나를 노예 취급해라든지 나는 그녀의 노예가 아니야혹은 그 사람은 정말이지 노예 감독관이야라는 말을 종종 한다. 불쾌하지만, 노예제도는 매혹적인 관리법의 전형이다. 그것은 일꾼들에 대한 완전한 소유와 통제를 의미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는 살아 있기위해 일한다. 117-118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찬성했지만, 노예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과 분되는 인간의 측성, 즉 선택하고 숙고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 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로 만든다고 저술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하므로 어떠한 행복도 갖지 못했다. 그들의 랆은 대부분 일과벌,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노예들을 동기 부여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언젠가는 자유를 주겠다는 상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들은 다시 인간이 되는 셈이다. 118


가장 가혹한 근로조건 아래서 일하는 현대의 고용인들조차도 노예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노예들과 달리 그들은 항상 일을 그만둘 수 있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보통 여덟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그만둘 수 있을까? . 일터를 떠난다고 해서 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118-119

 

불행히도, 노예제도는 완전히 과거의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예폐지협회(Anti Slavery Society), 노예제도에 관한 국제연합 실무위원회(UN Working Group on Slavery), 그리고 인도의 노예해방전선(Bonded Liberation Front) 같은 단체는 노예제도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이들 집단은 자신의 노동으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갚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강제 노역자들, 자신이 일하는 경작지를 떠날 수 없는 농노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착취당하거나 가족에 의해 팔려 무보수로 일하는 아동들이 포함된다. 119

 

계약제 하인들에게 사회계약은 실질적으로 고용주가 대부분의 힘과 권리를 갖는 법적 계약이었다. 뉴잉글랜드 바깥 지역의 초기 백인 이주자들은 절반 이상이 계약제 하인이나 무임도항(無賃渡航) 이주자들(도착한 후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무임으로 도항한 이들)로 미국에 왔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결국 고용이란 자유와 기회로 이어지게 될 일시적인 노예 상태를 의미하였다. 122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계약노예제도를 인가했다. 앞서 말했듯이, 민간 해운 업체들은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노동력을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곤 했다. 존 반 더지는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제임스 오티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작가들이 폭정(tyranny)’굴종(slavery)’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계약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계약노예제도는 과거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구자들은 불과 몇 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의 노동착취 사업장(sweat shop)에서 계약노예제도를 사용하는 태국인 고용주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재봉틀로 옷을 박는 일흔 네 명의 태국인 여성들을 발견했다. 고용주는 한 아파트에 여성들을 가두고는, 만약 도망치려고 시도하면 그들과 가족들을 해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오는 뱃삯을 갚는 데 수년이 걸렸던 것처럼 태국 여성들도 고용주에게 항공료를 지불하기 위해 칠 년간 일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중 일부는 자신들에 대한 처우 방식에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오로지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뿐이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오페어(au pairs)들의 처우에 관련된 추문도 있었다. ‘오페어란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 여자로,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한 가조고가 살면서 가사를 돕고 아이를 보살피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에 온 젊은 오페어들은 학대와 과로, 저임금에 시달리곤 했다. 그들은 미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싼값에도 기꺼이 일하러 온다. 그리고 땔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제 하인보다 나을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4-125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에서는 타인의 노동을 빌리기보다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다. 백인 계약제 하인들은 1650년경에 시작되어 1800년대에 확대된 흑인노예들의 대규모 유입 이전에 미국에 왔다. .. 남부의 농장주들은 백인인 하인들보다 흑인노예들을 훨씬 좋아했는데, 이는 흑인노예들이 기후에 더 잘 적응하고 더 온순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인이 그들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5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노예 소유자들은, 남부의 노예들이 북부의 임금노예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오히려 남부의 노예들이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도 주장했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부양하고 있고, 어둡고 더러운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고용인들과는 달리 위생적인 야외에서 더 짧은 시간 동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북부 사람들은,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해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박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상태로 장시간 공장 노동을 시키는 것, 아동의 노동, 위험한 기계, 유해한 공기 등을 포함한 끔찍한 노동조건은 북부인들의 이러한 도덕적 주장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의 산업 노동자들을 미국의 노예들과 비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그들은 미국의 흑인들보다도 못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철저히 감시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처럼 살아가도록,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그들도 비인간적인 생산양식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부 생산업자들에 대한 반론은 임금노동자들의 자유가 비인간적인 노동 현실을 보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26

 

문제는 그들이 과연 북부의 생산업자들보다 더 적은 이윤을 원했거나 필요로 했을까하는 점이다. 127

 

한 개인이 자신의 일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고용주의 학대를 반드시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한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선택권을 실제로갖고 있는가이다. 127

 

굶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이 자신에게 음식과 안전을 제공할 만한 사람과의 계약관계를 자유롭게맺기로 선택할 수 있는가? 128

 

철학자 존 로크는 빈곤한 자의 복종은 주인의 동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굶어죽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되는 것을 택한 가난한 자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이 당신의 노예나 계약제 하인이 되기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란 얘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일까? 128-129

 

우리는,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이 만약 착취당하지않았다면 훨씬 더 못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착취의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러한 논리를 보여주는, 일하는 원숭이들에 대한 풍자적인 보고서를 실은 적이 있다. 채국 남부에서는 매년 150만 톤의 코코넛 열매를 따기 위해 수천 마리의 원숭이들이 고용된다. 마을의 가족들은 원숭이를 훈련시켜, 농장주들에게 빌려준다. 원숭이들은 농장주로부터 달걀과 쌀, 과일 등 원숭이 임금으로 매달 약 12달러 정도를 벌어들인. 일하는 원숭이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목욕시키고, 돌보고, 하루 세 번 음식을 준다. 때로 그들의 주인은 자신의 모터스쿠터 뒤에 그들을 싣고 일하는 곳가지 태워다주기도 한다. 아픈 원숭이는 하루 동안 일을 쉰다. 너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는 원숭이는 은퇴해서야생으로 돌아가거나 가족의 애완 동물로 남는다. 일하는 원숭이의 불리한 점은 항상 사슬에 묶여 있고 원하는 대로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이러한 형태의 고용이 인간에 의해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게잡이원숭이 같은 몇몇 종들의 멸종을 막아준다고 지적한다. ...

농부가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기는 하지만, 원숭이들은 특히 서식지 대부분을 농부들에게 빼앗긴 이후 그들끼리 야생의 생태계에 남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없다. ... 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하다. 농부들은 원숭이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에원숭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원숭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농부는 원숭이가 하루 세 번의 식사를 필요로 한다고 결정하고 원숭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때로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갖고 있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욕구를 충족시킨다. 130-131

 

우리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우리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야 한다. 131

 

일반적으로 우리는 취직을 할때,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고용주들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

임금이 상실된 자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견해는 또한 몇몇 터무니없는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한 살마이 직업에서 더 적은 자유를 누릴수록, 더 많은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현실은 정반대이다. 표면적으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직업일수록 더 높은 지위를 나타내고, 더 많은 돈을 받는 경향이 있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 <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하고 주장한다. 132

 

사람들은 직업에서 더 많은 통제권을 갖도록 해주는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희생한다. 예를 들면, 과거 젊은이들은 장인의 도제로 수년을 보냈는데 이것은 사실상 계약고용었다. 미국의 도제들은 장인과 일하기 위해 노동계약서에 서명했다. 영국의 도제제도는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제도를 운용했던 조합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 결과, 자격 기준이나 인증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133

 

장인의 가치와 힘은 무언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들은 기술의 비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고 스승들은 도제들에게 물려주었다. .. 비밀은 장인들에게 힘과 자율성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비밀성을 강화해줄 만한 강한 조합제도가 없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장인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책과 간행물을 통한 정보의 보급이 광범위해지면서 몇몇 장인들은 자신의 비밀을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팔기도 했다. <유용한 천 가지 비밀(1795)>과 같은 실용서(how-to book)들은 조각, 철물상, 니스칠, 시멘트 바르기, 밀랍으로 봉하기, 유리, 페인트, 도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135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실용서의 전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실용서가 아닌 산업화가 장인들의 힘과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일이 갖는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 기계화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시켰을 뿐 아니라 몇몇 업무를 단순 작업화함으로써 사람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쉬비게 대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36

 

 

6 일꾼 길들이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생산업자들은 미국인 숙련 노동자의 태도 문제(attitude problem)”와 싸워야 했다. 숙련된 미국 태생의 일꾼들은 자신의방식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일하고 싶어했다. ..고용주들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국의 자유와 평등 원칙에 공공연히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야만 했다. 137

 

테일러는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거절했다. 140

 

노동자들을 장악하고 생산 속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열쇠는, 누구나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도록 일을 설계하는것이었다. 141

 

1878년 미드베일 제강에 입사한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십장과 주임기사 자리에 올랐다. 미드베일에 있는 동안, 그는 산업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테일러가 창안한 가장 유명한 과적적 관리법의 실례는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헨리 놀의 사례이다. 테일러는 자신의 연구에서 그를 슈미트라고 이름붙였다. 141

 

테일러는 슈미트가 제대로만 한다면 하루에 47톤의 무쇠를 실어나를 수 있다고 계산했다. 현재 속도는 하루 12.5톤이었다. 테일러는 슈미트와 나눈 대화를 <과학적 경영의 원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는 당신은 몸값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값싼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까?” 하고 슈미트에게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하루 1.15달러를 벌고 싶은지, 아니면 1.85달러를 벌고 싶은지 물어본다. 슈미트는 후자를 택하고, 테일러는 이 냉정하고 짧은 대화에서 값비싼 일꾼(혹은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제 당신은, 몸값이 비싼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지시받은 대로 정확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일꾼이라면 당신은 이 남자가 내일 당신에게 지시하는 대로 아침부터 밤까지 정확히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무쇠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면 .. 당신은 무쇠를 들고 걷습니다... 그가 앉아서 쉬라고 하면 당신은 앉습니다. 이제 값비싼 일꾼은 지시받는 대로만 행하고 말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지시에 따랐고 하루에 47.5톤의 무쇠를 운반했다. 60% 더 많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400%나 더 많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두 가지 모두 때문이든, 그들 여기시 슈미트와 똑같이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테일러가 <과학적 경영의 원리>를 출판한 덕분에 슈미트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자가 되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곧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테일러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위대한 발전으로 인정받았다. 비평가들은 슈미트의 경험과 그에 대한 테일러의 묘사에 숱한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책이 노동과 생산에 대한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판에 주를 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한 때 테일러의 미망인을 만나 그의 사진을 요청한 적이 있는 베니토 무솔리니 등이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142-143

 

과학적 관리법의 네 가지 기본 요소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일의 순차적 단계들을 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과거에사람이 먼저였다면, 미래에는 체계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각각의 작업을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쪼갰다. 셋째, 과학적 관리법은 경영진에게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도록 요구했고, 각각의 노동자들은 업무 수행을 면밀히 감시받게 되었다. 테일러는 일의 구조뿐 아니라 고용인들의 가치관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용인들은 서로를 통해 일뿐만 아니라 할당량을 유지하고”, “남자답게 처신하는도덕적 자세를 배웠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도록 고용인들을 훈련시키는 편이 더 나았다. 속도를 중시했던 테일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할당량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학적 관리법의 넷째 요소는 고용인이 지시받은 대로 일하도록 하기 위한, 주의 깊게 고안된 임금 체계에 기초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논문 <왜 생산자들은 대학생을 싫어하는가?>에서 협력이란 노동자들이 지시를 받았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안하는 일 없이 신속히 지시받은 대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술했다. 테일러는 순종을 얻어내고 할당량을 깨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용인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사리사욕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 중반, 과학적 관리법의 논리는 거의 모든 산업에서 호응을 얻는다. 143-144

 

미국노동총연맹에서는 테일러의 체계를 생산성 증가 체계(speedup system)”라고 불렀다. 144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는 노동쟁의가 밣생했다. 145

 

대부분의 고용주들은 평온한 노사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로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할창일 때, 애국심이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내는 것을 보고 감명받은 몇몇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조직에서 그러한 종류의 정신과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복지 자본주의에 대한 영감은 노동 불안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이직률로 인한 비용, 자선 단체들, 그리고 대외관계 등을 포함한 여러 원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진심으로 고용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업주들도 있었다. 복지 자본주의의 이면에 자리잡은 일반적인 생각은 고용인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의 이익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닌, 고용주의 이익과 결합된는 공동체에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46

 

초기 복지제도의 일부는 침대차 제조업자인 조지 모티머 풀먼이 고용인들을 위해 1880년 시카고 외곽에 지은 시범 마을처럼 근로자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온정주의적 기획이었다. 풀먼은 그들의 고용주였을 뿐 아니라 집주인이자 지역 상점의 소유자였다. 146-147

 

또 다른 복지제도들은 근로자들에게 회사의 주식과 더 높은 안정성을 제공하기도 했다. .. 1923P&GIBM같은 회사들은 연간 48주의 전일 고용을 보증하기 시작했다. P&G는 또한 1886년 이익분배제도를 시작했으며, 시어스 로벅 사도 1886년에 그것을 시작했다. 1927년까지 80만 명의 근로자들이 이러한 이익분배제도나 소위 근로자주식소유제도(ESOPs;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s)10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 인터내셔널 하비스터 사는 1911년에 연금제도를 실시한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였다. 당시의 또 다른 혁신에는 건강보험, 안전기준의 개선, 회사 구내식당 같은 시설이 포함되었다. 147

 

고용주들은 미국식 제도 아래서 복지 자본주의의 많은 교의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고용인들의 충성과 협력을 얻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148

 

1935,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은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나 결정에 관한 진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면 품질관리 서클을 비롯한 모든 유사한 참여 조직들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법안은 허위조합(sham unions)”, 또는 실제 조합을 막으려는 시도로 고용주가 만든 사내 조합을 금지했다. 오늘날 고용주들은 이 법안이 작업장에서 참여 조직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불평하곤 한다. 148

 

복지 자본주의와 미국식 제도는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고, 1930년대 대공황이 오자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의 한 비평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분명한 것은 임금노동자들의 복지를 고용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회사들은 실제로 고용인들엑 대해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미국식 제도가 소멸되자 곧바로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신뢰와 충성을 방해하는 주요한 장애물 가운데 한 가지가 부각되었다. ..

1935년의 한 경영자 회의에서, 뉴저지 벨 사의 회장인 체스터 버나드는 복지 자본주의가 근로자의 발전이나 협력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49

 

1920년대는 산업 혁신과 실험 그리고 노조 억압의 시대였다. 경영에서의 인간관계 접근은 고용인들의 태도와 감정이 어떻게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 경영진은 고용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고용인드로과 대화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었다. 15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노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돈만 많이 받는 부패한 특수 이익집단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노조가 지나친 욕심과 낮은 생산성으로 세계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 노동조합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부패와 난폭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탄생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노사관계 혁신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양자간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을 조절해주기 때문이다. 157

 

 

7 노동의 두 얼굴

 

1950년대에 C.라이트 밀스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대기업이 고용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거대한 관료 조직에서의 사무직 노동의 우울한 모습을 그렸다. 밀스에게 일의 황금기는 가족 농장과 소규모 독립 상인들의 시대인 1850년대였다. 그는 1850년대에는 일이 삶과 잘 통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기술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일했던 장인이나 상인에게는 이것이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밀스는 또한 일을 살에 통합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고, 소외는 나쁜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는 일의 의미가 너무나 축소된 탓에, 일이 더는 내적인 방향성과 사회와의 연결성을 제공하지 모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믿었다.

밀스가 보기에, 사무직 노동은 어떤 면에서 비숙련 노동보다도 못했다. 그는 계약노예들(paroles)”은 육체적으로는 고생스럽더라도, 적어도 집에 가면 자유인 반면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뿐 아니라 개성까지도 팔아치워야 한다고 말했다. 밀스는 사무직 노동자를 새로운 작은 사람(new little man)””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뿌리가 얕아 충성심이라고는 없으며, 항상 서두르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밀스에 따르면, ‘새로운 작은 사람은 반영웅적이고, 자신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어려운 시기에 회상할 만한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했다. 162

 

새로운 작은 사람에 대응하는 인물을, 밀스는 미국 조직의 새로운 권력자(new men of power)””라고 불렀다. ...

밀스에 따르면, 일의 상당수가 파편화되고 무의미해져서 계급 이동성과 향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대규모 복합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자기 발전(혹은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가 실행될 수 없다. .. 밀스는 인사 부서의 목적이 쾌활하고 협조적인 부하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감정마저도 조직이 바라는 대로, 조직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직장 내의 정서를 통제함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밀스는 사무직 근로자가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조직에 의해 심리적으로 강요당하며, 자신의 개성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후 일 외의 부분에서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 밀스가 설명하듯이, 일은 가정생활과 공동체 내애서의 생활을 향상시키기보다는 파괴한다. .. 밀스와 같은 비평가들이 실제로 우려하는 것은, 근로자들이 이로 인해 시간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미치는 조직의 영향력으로 인한,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63-164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출간한 책 <고독한 군중>

이 책 속의 타인 지향의 생활: 보이지 않는 손에서 악수하는 손까지라는 장에서, 리스먼은 타인 지향적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공예 기술보다는 사람 다루는 기술을 더 강조하고, 은행계좌의 잔고보다는 교제비를 더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재미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관리자들은 비서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장과 고객들을 기쁘게 하는 악수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리스먼에 따르면, 타인 지향적 사람은 회사에 우선적으로 속하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는 더 얕게 뿌리내리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후반의 직장은 오늘날의 직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 “사회윤리이러한 윤리는 조직의 충성 요구를 합리화하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희생하는 고용인들에게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만족을 준다. 이러한 윤리에는, 집단은 창조성의 원천이며 개인은 궁극적으로 소속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경영학 분야에서 일하는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소속감을 창출하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된다. 165

 

1950년대의 사회 비평가들은 사람들이 조직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새로 등장한 교외생활의 가치에 대해 걱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합의된 가치의 부재와 도시 및 교외 공동체의 파괴를 우려한다. 직장에서는 여전히 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고, 집단의 가치가 강조된다. 누구도 창조성의 상실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집단의 정체성에 종속되는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듯하다. 경영자들은 팀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갖는다. 너무나 많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경영 이론가들은 집단과 팀이 모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것의 토대라고 믿는다.

와이트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릇된 집단화에서 가장 잘못된 시도는 집단을 창조적 도구로 보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인기 있는 경영 개념과는 반대로, 와이트는 사람들이 집단 내에서 제대로 사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단은 단지 일의 시행을 지시할 뿐이다. 166

 

와이트의 책 이후로, ‘팀의 영광(glories of teams)’에 대한 끝없는 저작과, ‘집단에 대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쏟아졌다. 오늘날 조직의 수사학(rhetoric of organizations)은 팀, 파트너, 가족, 동료와 같은 단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단결된 조직과 팀이 일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데 늘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어빙 제니스 같은 연구자들은 우리에게 집단적 사고의 불이익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집단적 사고 강태에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비슷하게 사고하기 시작하고,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보지 못하게 된다. ...

조직은 더 이상 와이트가 자신의 책에서 논의했던 인성 검사를 실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지표(MBTI ; Myers-Briggs Type Indicator) 같은 다른 유형의 검사들을 실시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격 유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표이다. 167

 

일부 조직들은 순응적인 고용인을 선택하기 위해 아직도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168

 

와이트가 보기에 인성 검사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많은 고용인들은 그러한 검사를 자기 인식 및 발전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별자리 운세나 성적 매력에 대한 잡지 퀴즈들처럼, 심리 검사는 내적인 자아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문제는 우리가 직장에서 그러한 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인식을 얻은 대가로 자기 노출과 어쩌면 부당한 분류깢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

책의 결론 부분에서 와이트는 독자들에게 조직과 싸울 것”, 그리고 회사의 순응 요구에 말려들지 말 것을 권고한다. 168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단계” ...

욕구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전부라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열정, 이상, 가치가 갖는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가치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에 기반한 선택을 한다. .. 우리는 우리가 가치있게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 피라미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고용인들은 경영진에게 악몽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조직이 줄 수 있는 것, 즉 소속감과 명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172

 

일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들 대부분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걸치는 페르소나와 허용되는 감정의 범위는 직업에 띠라 달라진다. 1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동안 자기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서비스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특정한 감정 상태를 지녀야 한다. 과거의 서비스 분야 종사자들은 정중해야 했다면, 오늘날에는 친절하기까지 해야 한다. 알리 러셀 혹실드는 그녀의 도발적인 책 <감정의 통제>에서 ...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자신의 실제 감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서비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자신의 존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무언가를 마지못해 생산하고 있다고 느낀다. 182-183

 

유리는 매일 상업화된 개별화와 쾌활함, 친절함에 노출되어 있다(비록 어떤 경우, 이러한 감정은 상당히 진실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비스의 즐거운 얼굴(happy face)” 관점은 정중함과 공손함 이상의 것이다. 183

 

 

8 유망한 직장

 

1980년대에는 수많은 최신 경영 방법들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 직장 민주주의 실험이 쇠퇴했음에도, 많은 회사들은 고용인들에게 권한을 주거나일에 대한 더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점점 더 많은 근로자들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식노동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해싿. 1980년대가 되자, 일은 매력적이고 재미있으며 흥미로운 것처럼 보였으며 직장은 마치 행복한 대가족인 듯했다. 187

 

하버드나 와튼 같은 주요 경영대학원들은 그러한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6년까지,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75%사명선언문이나 윤리강령을 갖고 있었다.

윤리강령에 대한 관심이 1980년대에 높아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부 회사들은 부정적인 보도 추무느 소소으 불법 활동들에 대해 염려했다. 또 다른 회사들은 고용인들이 다양한 배경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윤리적 가치를 진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중 및 고객과 즇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진 일부 기업들은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말뿐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사는 윤리강령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막연하게 느끼는 기업 지도자들도 있었다. 188

 

노예제도와 계약노예제도, 그리고 과학적 관리법을 거친 1980년대 중반의 기업들은 과연 이상적인 직장이 되었을까? 189

 

1980년대의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들에서 자주 몸델로 제시되었던 회사들은 휴렛팩커드, 존슨 앤 존슨, 리바이 스트라우스, AT&T와 같은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들이었다. 또한 경영학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드로과 잘 팔리는 경영학 서적을 쓴 컨설턴트의 고용주들이 이런 책에 자주 등장했다. 이들 회사는 경영 혁신의 성공을 증명한다. 한편 이러한 상황은 대기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경영학 연구가 과연 객관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질손의 견해가 여전히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또한 조직 내의 힘, 권력, 갈등에 관한 질문들이 왜 경영학 교과서나 대중 문학에서 논의되는 일은 드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0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그리고 주로 일본과의 세계경쟁에 의해 많은 기업들이 황폐화되었던 1980년대에 경영자들은 좋은 충고를 갈망했다. 시장에는 경영자들의 사기를 향상시키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쓰여진 경영학 서적들이 일시적으로 넘쳐났다. 191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분명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경영서였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조직 속에서의 경영자 역할이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고용인들에게 의미를 창출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터스와 워터만은 가치, 상징, 이데올로기, 언어, 신념, 의식([儀式 거동의 법식), 그리고 조직의 신화를 의미하는 말로 기업문화를 사용했다. .. 피터스와 워터만은 직장 민주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통제되고 잘 조직화된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했다. 그들은 무엇이 고용인들을 흥분시키는 지 알아내고 조직내에서 호손 효과를 의도적으로 지속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2-193

 

1982년에 출판된 텔렌스 E. 딜과 앨련 A. 케네디의 <기업문화>.. “강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는 일을 더 기분 좋게 느끼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 딜과 케네디는 강한 기업문화가 고용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구조와 가치 체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 등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위 고용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들 중 일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과연 고용인드르의 개인적인 취미는 무엇이며, 그들이 거기에 시간을 쓰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가치를 확신하고있어야 하는가? 193-194

 

강한 기업문화의 커다란 이점은 그것이 포괄적이고 자동 조절되는 사회 체제라는 점이다. 불리한 점은 그것이 억압적인 동시에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부정적인 면은 고용인들이 충분히 일 바깥에서 충족시킬 수 있는 욕구, 예를 들면 우정의 욕구 같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점점 더 일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신이 실직하게 되면 당신은 이로가 소득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195

 

로버트 하워드는 <놀라운 새 일터>에서 새로운 조직은 일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마술에 걸리도록 시도하는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

하워드의 놀라운 새 직장에서는 도넛 타임이나 맥주 파티 같은 사교 모임들이 의사소통을 증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팀 정신과 조직에 대한 헌신을 끌어내기 위해 적절히 이용되었다. .. 기업문화가 다양한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더라도 여전히 모든 살마들은 함께 도넛을 먹어주어야 한다. 마법에 걸린 회사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의 업무와 이러한 사교생활에 참석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두 가지 일 모두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에티켓 전문 작가인 주디스 마틴(“미스 매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업무상 사교(business entertaining)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줌으로써, 직무관계(business dealing)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성같은 사회적 기준을 적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업무상 사교는 모순 어법이다. 196-197

 

프레더릭 윈슬로 테일러가 말한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직에서 일터는 ... 힘과 통제의 관계가 명확했다.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될 뿐 자아를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 단순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이다. 하지만 이제 더욱 고달파지고 둔감해진 일의 세계에서는 직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가 유인(誘引)이 된다. 197

 

존 미클스웨이트와 애드리언 울드리지는 자신들의 책 <주술사들>에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경영 이론들이 있으며, 그들이 서로 모순되곤 한다는 점을 지적햇다. 예컨대 어떤 이론은 독특한 기업문화일수록 좋은 것이라 말하고, 다른 이론은 다문화적인 기업일수록 좋은 기업이라고 말한다. 한 이론은 (quality)’’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론에서는 중요한 것은 속도라고 말한다. .. 경영학 이론의 유행 주기는 10년에서 1년으로 짧아졌다. 컨설팅 회사 베인 앤 컴퍼니25개의 인기 있는 경영학 이론들을 골라,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자신들의 업무에 적용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전세계에 걸쳐 실시했다. 조사 결과, 1993년에는 평균 11.8, 1994년에는 12.7개의 이론이 사용되었으며, 1995년에는 그 수가 14.1개로 증가할 것이라고 베인앤 컴퍼니는 추정했다.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CEO인 잭 웰치는 기업이 서로 다른 경영 아이디어들을 시도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고용인들에게도 유익할까? 201

 

1980년대, 그들은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회사의 사교 모임에 참여했다. 1990년대, 이제 훈련은 팀 만들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202

 

경영학에서의 일시적 유행과 관련된 문제점은 그들이 종종 무비판적이고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 이론가들은 일에 대한 동일한 사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발견할 때마다 매번 또다시 기뻐한다. ‘팀워크1980년대와 1990년대 경영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커다란 ()개념들 가운데 하나이다. 203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

팀은 문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204

 

고용인들이 협력을 얻어내는 것은 항상 도전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팀을 만들어 이끌거나 코치하는 법을 배우는 데 투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205

 

팀 지도자들은 팀과 한몸이 되어야 하는 반면, 팀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205-206

 

딜버트 만화는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요약한다. 딜버트의 상사가 고용인들에게, 그들을 빠르게 움직이는 팀으로 재편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고용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계획이네요 우리가 스스로를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엔 우리가 무기력하고 세밀하게 조종되는 노예라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206

 

1980년대의 경영 이론들 중에서 종합적 품질경영(TQM; Total Quality Management)만큼 열렬히 신봉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품질관리가 전 과정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208

 

만약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면 생산성도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제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하는 대신 전 과정에 걸쳐 품질관리를 하라는 것이다. 209

 

미국 정부는 TQM을 채택하고 장려했다. ...

리처드 J. 피어스는 TQM과 리더십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현장 관리자들이 지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피어스는 계속해서, 근로자들 또한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품질 성과를 개선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는 해도, 아무런 부가적 보상을 가져오지 않을 것(“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나요?”)이다. 그렇지만 생산성 및 품질의 개선은 장기적으로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필요가 있다. .. 당근을 대신하는 채찍(혹은 숨겨진 위협)인가? TQM의 이면에는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행한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포함한 장인윤리의 회복이라는 고귀한 정신이 존재한다. 210-211

 

데밍이 원래 제시했던 품질경영의 열네 가지 본질적 요소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위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직장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직장에서의 두려움에 관해 연구한 캐슬린 D. 라이언과 대니얼 K. 오스트리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복과 앙갚음, 그리고 징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두려움을 낳는 또 다른 원인들은 조직 내에서 사람들이 논의하기 두려워하는 것, 논의 불가능한 것들에서 발견된다. 22개 조직의 260인을 대상으로 한 라이언과 오스트리치의 조사에서 가장 논의 불가능한 것으로는 사장의 경영 방식이 꼽혔다. 그 다음으로는 동료의 서오가와 보상 및 급여가 차지했다. .. 생산성 증가는 팀워크코칭과는 전혀 상관없는, 두려움 같은 요인들의 결과일 수 있다. .. TQM을 비롯한 경영 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것으로 만들어주었는가? 다시 말해 일은 보다 즐겁고,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이 되었는가?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는가? 그것들은 약속했던 모든 것-권한위임, 훈련, 팀 구성원이 되는 기쁨-을 주었는가? 213-214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20세기의 마지막 주요 경영 이론으로서 과학적 관리법과 적절한 대조를 이룬다... 리엔지니어링은 일련의 과업들이 한 사람에 의해 행해질 수 있도록 조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 과학적 관리법은 근로자들을 전문가로 변화시키고, 일을 지루한 것으로 만들었다. 리엔지니어링은 고용인들을 만능일꾼으로 만듦으로써 일을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

리엔지니어링은 마이클 해머와 제임스 챔피의 공동 작품이다. ..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모든 경영 혁신들 주에서, 리엔지니어링은 한 개인이 하는 일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214-215

 

한때 지시받은 대로 일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경영자들은 이제 감독관처럼 행동하지 않고 코치처럼 행동한다. 근로자들은 상사에게 덜 신경 쓰는 대신 소비자의 욕구에 더 신경을 쓴다.’ ..

해머는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적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구조조정이나 조직개편과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엔지니어링은 더 적은 인워능로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216-217

 

 

9 배신하는 직장

 

1990년대 중반의 많은 미국인들...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 그들은 회사가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일을 해치우고 싶어했기때문에 직정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성들과 소수민족의 사람들도 해고를 당했으며...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 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꼐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

해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더 나은 직장으 얻은 사람들에 대한 좀더 유쾌한 이야기도 있다. .. 그러나 이들 성공 스토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전 직장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생활 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1995년 노동부는 실직 노동자의 35%만이 동일하거나 더 나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직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221-222

 

어떤 이들은 구조조정이 올바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잘못될 것이 없다고 좋아한다. ..

1990년대의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실제 경영에 있어서는 구조조정을 강조했던 반면, 당시의 경영서들과 경영학적 수사법들은 헌신”, “충성”, “신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

헌신은 노동력을 줄이고, 근로자들의 작업량을 두 배로 늘린 회사들이 특히 필요로 하는 덕목이었다. 222-223

 

구조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존재했으며 강한 노동조합에 의해 강화되어온 노동의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변화시켰다. ..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은 근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있었거나 의심해온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 고용주들과 경제는 변덕스러우며, 당신은 조직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말이다. .. 산업화와 더불어 근로자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았다. 225

 

근로자에 대한 배신에 있어, 구조조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 지난 20년간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들은 고용인들과 이윤을 공유하기는 커녕, 시장과 주식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치하한다며 임원들에게만 막대한 상여금과 스톡옵션을 주고 있다. 226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저서 <살찌고 비열한>에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의 주요 원천은 대부분의 미국 기업들이 고용인들을 다루는 방식과 비대한 관료주의를 유지해온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 대중은기업의 이윤과 중역들의 보수는 증가하지만 자신들의 임금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체되거나 하락한 임금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끌어들이는 혐의는 세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이다. ..

경제학자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정부가 부자들의 편에 서 있는 탓에 중산층과 빈자들을 위한 정책에 실패하여 임금 및 소득의 불평등이 증가했다고 비난한다. 227

 

1974CEO들은 평균적인 근로자보다 40배나 많은 돈을 벌었다. .. 1999년 노동조합 단체인 페이워치(Paywatch)CEO의 평균 급여가 공장 근로자 평균 임금의 326배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급여 전문가인 그래프 S. 크리스탈은 이렇게 말한다. “CEO의 급여는 너무 빨리 오르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더는 놀라지 않는다.” 228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기분 좋게느끼게 만듦으로써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내게 무슨 득이 돌아오느냐?”고 묻지 않도록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현혹시킨다. .. 오늘날에도 불성실한 경영자들은 갈등과 사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부풀린다(이것은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영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임금 인상은 억제되었고, 노동조합 참여는 감소했으며, 남아 있는 노조들의 힘도 약해졌다. 힘의 균형은 압도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한 상태가 되었다. 229

 

엘튼 메이오의 시대 이후 경영진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덜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까?”였다. 연구 결과는 월급 인상이 반드시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근로자들은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되니 이유가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TQM이 너무나 효과적으로 실행되어서 근로자들이 실제로 내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고 묻지 않는 일이 이제 가능해진 것인가? 그들은 정말로 업무 품질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보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가? 231

 

일을 보다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본래 그 자체로는 훌륭한 의도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을 더 그럴듯해 보이게 하는 것은 착취이다. 232

 

미래의 불확실성에 근거한 미묘한 두려움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우리들 대다수는 어떤 막연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더 오랫동안 일한다....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달리 두려움의 노동윤리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좀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시장은 변덕스러워서 개별 고용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고용주는 사람들을 해고할 때 미안 하네, 경기가 안 좋아서...”라든지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으면 경쟁할 수가 없네라고 이야기한다. 좌절한 실직자들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에게 소리쳐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경영자들이나 정치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 그들 역시 세계경제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직한 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초점 잃은 분노를 품는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 그들의 회사를 보다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삶은 혼란에 빠진다. 235

 

만약 카를 마르크스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는 혁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 “전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너희들이 잃을 것은 구속뿐이다.” 그러나 칸막이나 팀 안에서 일하는 오늘날의 근로자들은 단결할 수도 없고, 단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잃을 것이 있다. 바로 그들의 직장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파업이나 저항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

냉소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단결하여 조합을 형성하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기 때문에, 혁명론자들보다도 함께 일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대신에 그들은 봉급을 받을 때 수동적인 저항과 비웃음으로 침묵의 파업을 행한다.

복지 혜책의 과감한 삭감, 더 긴 노동시간, 증가된 노동량, 구조조저으 그리고 급등하는 중역들이 보수에 대한 근로자들의 공공연한 침묵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한다. 238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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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일의 의미, 삶의 의미를 찾아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장들이 우리의 명령에 의해서든,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든, 알아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베틀의 북이 혼자서 앞뒤로 움직이고, 연주자가 저절로 움직이는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공장주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노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쉬지 않고 일하는 로봇들에 의해 자동화된 공장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대신, 우리는 전보다 더 필사적으로 일(work)에 매달린다. 우리 사회는 일을 지향하는 사회이다. .. 우리는 일을 축복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일을 없애려고 하는 모순적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8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과 직장이 갖는 의미에 관한 책이다. 8

 

일은 우리의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까지도 결정한다.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 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9-10

 

오늘날의 일은 대부분 우리 사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들이 단지 과로했을 뿐이라면, 오늘날의 많은 노동자들은 과로할 뿐 아니라 과도한 통제를 받고 있다. 14

 

 

 

PART ONE 일의 의미와 역사

 

1 왜 일하는가?

 

잠시 동안 일하지 않는 생활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평생을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은 우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유급노동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그의 저서 <일이 사라졌을 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단지 빈곤으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공식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소감을 상실한다. 더는 일이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윌슨에 따르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일은 규율, 소속감, 규칙성, 자기 효능감 같은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러나 과연 일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왜 실직자들은 여가를 통해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가? 20-21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직자들이 여가를 갖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또 다른 통찰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평화나 적당한 미덕, 교육이 없이는 여가도 가질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는 용기와 인내가 요구되며, 여가를 위해서는 철학이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마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절제와 정의는 두 가지 모두에 필요하지만, 특히 평화와 여가의 시기에 더욱 요구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들을 공정하고 절제하도록 만드는 반면,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상당한 재산과 여가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2

 

두려움, 물질적 필요, 책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여가를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여가를 위한 교육을 통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학습과 활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활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읽기, 쓰기, 미술, 신체적 훈련, 음악 같은 과목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양인 학계(liberal arts)’의 기초가 된다. 로마의 키케로도 학예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에서, 삶의 필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진리와 그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볼때 교양은 일하는 방법이 아닌, 여가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여가는 단순한 자유시간이상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며, 특정한 일으르 하기 위한 기회이다. 직업을 이맇었거나 직업을 가질 수없는 사람들은 결코 일에서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일할자유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3

 

인간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점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난 에도 스스로 일하기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4

 

일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직업을 갖는 것이 우리 문화에서 그토록 바람직한 이유는 명백하다. 일은 우리에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은 규율과 정체성, 가치를 제공한다. 일은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고 우리의 삶에 리듬을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준다는 점이다. 교육과 소득, 평화와 안전이 주어진다 해도, 유급노동이 일의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을 만족감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채울 수 있을까? 우리들 대다수는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일을 통해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준다. 그러나 인간이 일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을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게으름이야말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생산활동의 필요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부지런한 습관은 일이 가져다주는 산물이며, 우리가 일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교육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과 바쁜 습관을 만들어낸다고 저술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훈련과 도덕적 조건화로 인해 일할 필요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25-26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27

 

개미와 같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은퇴를 위해 저축하며, 남은 20년 동안 이전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바라면서, 삶의 45년 내지 50년 동안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저당잡힌다. 32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33

 

개미와 달리 베짱이는 현재를 위해 살고 미래를 희생한다. 그의 놀이는 아무데에도 이르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노는 삶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 꿀벌은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베짱이처럼 자신이 우추구하는 것을 즐긴다. 꿀벌은 다른 사람들이 고맙게 여기는, 훌륭하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서 기쁨을 얻고 의미를 찾는다. 꿀벌은 유용하고 보상을 주는 일을 상징한다(물론 실제 꿀벌의 삶은 이야기 속의 꿀벌의 삶과는 전혀 다르다). 개미는 일하는 삶, 안전한 삶의 표본인 반면, 베짱이는 놀이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경솔한 삶을 대표한다. 그렇다고 해서, 베짱이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34-35

 

버나드 수츠 <베짱이의 놀이, , 유토피아>.. 수츠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일하면서 놀 수가 있다. 첫째, 당신은 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둘째, 당신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솝 우화의 꿀벌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개미와 달리 꿀벌은 꿀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거나, 꿀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즐기거나, 여전히 꿀 만들기를 즐긴다. .. 몇몇 생산적인 활동은 필요성은 없으나 만족을 준다. 36

 

매미의 노래처럼, 놀이를 하는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다. 이솝 우화 속의 베짱이는 무책임해서 굶어 죽지만, 매미는 배고픈 예술가로 그려진다. 매미는 음악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굶어 죽는 것이다. 두 개의 우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반면 일보다 노래를 더 좋아해서 죽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들 대다수에게 더욱 적절한 질문은 만약 당신이 개미처럼 산다면, 즉 나이 들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해서 돈을 저축한다며, 그것은 의미 있는 인생인가?”이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37

 

일은 일 이외의 삶을 잠식한다. 일 이외의 삶은 일하는 삶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44

 

 

2 일이란 무엇인가?

 

일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은 일(work), 노동(labor), 수고(toil), 업무(job)와 같은 단어들의 뜻을 살펴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정의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어휘 사용이 시간이 지남따라 그 단어의 집합적인 이용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46-47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거나,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강력한 행위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48

 

일에 붙는 직함이나 사람들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은 직장에 대한 개념도를 형성한다. 고용주가 조직문화를 바꾸고자 할 때, 그들은 자주 재명명 방법을 사용한다. 49

 

필요성’.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51

 

모든 문화에서 일에 대한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태국어에서는 을 뜻하는 단어와 파티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

태국 사람들은 일이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며, ‘일 자체는 좋은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태국인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문화는 재미를 뜻하는 사눅(sanuk)’에 큰 가치를 둔다. 모든 활동은 사눅(재미있는)’마이 사눅(mai sanuk:재미없는)’로 구분된다. 사눅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을 뜻한다. 일이건 놀이이건 상관없이 어떤 활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속성이 바로 사눅이다. 가령 태국의 어느 마을주민에게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단조로운 업무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업무를 팽개치고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사눅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사람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마을이 사원을 짓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일에서는 사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태국에 처음 공장을 지었을 때, 그들은 사눅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사실 초기에는 태국인들이 그다지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침마다 차려 자세로 서서 사가(社歌)를 부르는 의식을 싫어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관습을 버리고 공장에서 음악을 틀어주기 시작했드며, 더 많은 휴식시간을 주고 작업중에 할 수 있는 놀이도 가르쳐주었다. 태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일이 사눅이 되자 생산성이 증가 했다. 일과 놀이에 대한 태국인들의 태도는 같다. , 작업 파티는 생일 파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53

 

(work)은 너무나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단어이다. 우리는 일(work)하고일터(work)간다.’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하는것이며, 우리가 만들어내는것이다. 미술 건축 음악 문학 작품(work)’도 있다. 우리는 의사, 회계사, 자동차 수리공이나 카펫 판매원의 솜씨(work)에 감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이나 나뭇조각, 빵 반죽, 고장난 자물쇠 등을 가지고도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의 해답을 내거나(work someone over), 운동을 하거나(work out), 좋은 일을 하거나(do good works), 누군가를 때려주거나(work someone over), 흥분하거나(get worked up), 자칫하면, 심지어 일벌레(workaholics)까지 될 수 있다.

이라는 단어는 동사이자 명사이며, 활동이자 활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55

 

노동(labour)’이라는 단어는 14세기 영어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

동사노서의 노동(labor)은 행위만을 나타낼 뿐 행위의 대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만, 우리는 그가 딸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안흔다. 비록 그의 행위가 딸기를 따는 이주 노동자보다는 훨씬 더 딸기를 만든 것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화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은 대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육체적인 일을 하지만 직접 그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56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노동,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필요한 물건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하인의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노동과 일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구분된다. 첫째, 노동은 일에 비해 육체적 노려고과 더 크게 관련된다. 둘째, 노동자와 노동 대상의 관계는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과의 관계와 다르다. ..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노동자의 첫번째 정의는 봉사행위로서, 혹은 생계를 위해 육체적인 노동을 행하는 살마인 반면 일하는 사람의 첫 번째 정의는 만들거나 창조하거나 생산하거나 고안해내는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노동이라는 단어가 로 격하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이 한 개인에 의해, 그리고 개인을 위해 행해지는 것인 반면 노동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거나 행하는 데 대한 개인의 기여를 암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라고 말했다. ‘은 노동의 산물을 나타내는 명사이지만 노동은 일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노동은 육체적인 일을 하는 살마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은 다양한 행위나 그러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일조합이 아닌, ‘노동조합을 결성한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일은 협동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터라는 말 대신 일터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집합적이고 육체적인 일보다는 개인적이고 비육체적인 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57

 

노동이나 수고같은 단어어비해 업무(job)’라는 단어는 상당히 유쾌하게 들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명사 ‘job’덩어리(gob)’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 17세기까지.. ‘업무란 영구적인 고용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을 의뢰받거나 잠시 고용되는 것을 가리켰다. 60

 

업무라는 단어는 대개 명사로 사용되는 반면 일하다라는 동사의 형태와 그들의 일에서와 같은 명사의 형태가 거의 비슷하게 사용된다. .. ‘업무의 또 다른 차이는 일은 보수를 받는 것과, 받지 않고 행하는 활동까지 가리키는 반면, ‘업무는 보수나 소득을 얻는 일에만 구체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다. 61

 

업무라는 단어는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도구적인 활동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 노동, 수고, 고역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업무의 정의는 일하는 살마과 그 산출물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 일의 양에 대해서 ..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이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한정된 양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62

 

 

3 일의 역사

 

살기 위해 일한다는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해서 일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까? 6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저주였다. ... 기원전 4세기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기록했다. 만약 일이 신들의 저주라면, 그것은 정복당한 적이거나 포로가 된 외국인, 혹은 노예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편이 가장 낫다. 노예는 부유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노예의 일로 여겼다. 노예제도는 인간의 지위를 강등시켰을 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도덕적 가치까지도 격하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이란 가능하면 노예들에게 떠맡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득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리 수 있다고 믿었다. 재산(땅과 노예들)을 소유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그가 생각한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 안에서 사용할 물건을 만드는 일과 상업적 이득을 위한 일을 구분했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필요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도 유한하다고 말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매업이나 금전적인 이득을 위한 일은 인간의 욕망(want)을 위해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욕망은 인간의 필요(need)와 달리 무한한것이다. .. 돈을 벌거나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는 것 자체에만 열중할 뿐 잘 사는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여가 활동의 정의이다. 게다가 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일은 결코 중단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65-6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생각과 견해가 그의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 평범한 거리의 그리스인은 유용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살맘들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하기 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원전 여러 동양 문화에서도 물질적인 세계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보다 덧없고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들이 을 경멸한 것은 아니다. 67

 

정신적 수양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일의 과정은 결과보다 더 중요했다. 부처에게는 바닥을 쓸고 닦고 연료를 모으는 것 같은 가장 비천한 일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었다. 68

 

종교나 문화에 따라 일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 내에서도,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은 상이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지닐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특정 유형의 일에 대한 고유한 편견이 존재한다. 68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른 살맘들에 대한 봉사와 일반적인 육체노동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학>에서 그는 장인과 노동자들은 공동체의 하인들, “꼭 필요한사람들이기 때문에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장인이 시민이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그들 대다수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조각의 황금기에 이 책을 저술했지만 조각가들이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각은 격렬한 육체노동을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조각을 노예 예술(servile art)’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육체노동자들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훌륭한 조각가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육체적인 노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학예(學藝)로 간주되었다. 학예는 깨끗하고 지적인 일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의 일을 암시했다. ..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그림이 학예와 노예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각은 여전히 노예 예술이었다. 69

 

생업이 목수였던 그리스도는 직업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교했다. ...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질서와 정당한 보상, 수양을 위한 일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을 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들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들에게 짐이 되지 말라.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일은 생활 리듬의 일부이며 사람들을 시끄러운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둘째, 개미에 관하 이솝 우화에서처럼 일하지 않는 자가 먹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71

 

교회는 을 세 가지 정도로 구분했다. 그것은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 개인적인 이득이나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일이다. 72

 

우리가 태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기력이라는 뜻의 아시디아(acedia)’를 대략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태만을 게으름이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디어의 본뜻이 아니다. 태만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게으름에 대한 비난이 아니며, 일의 가치에 대한 긍정도 아니다. 태만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73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던 이 두러지게 긍정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이다. .. 529년 성 베네딕트는 몬테 카시노의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

성 베네딕트 이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슬운 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육체적인 일에 보다 긍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규정집의 주제는 오라 에 라보라(ora et labora)’,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사들에게 신에 대한 헌신의 한 방버브으로서 무슨 일을 하든 착월함을 추구하라고 장려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완전하게 해주십사 하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하라.” 74

 

성 베네딕트에게 일은 직업이나 소명(calling)이 아니라, 일종의 눈에 보이는기도였다. .. 베네딕트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으며, 중세의 마으로과 도시를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사들은 중세 초기의 가장 능숙한 농부이자, 장인이자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수도사들 중 가장 낮은 지위로 간주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과 신앙심 사이에 일련의 관계가 있음을 발견햇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에서 비롯된 노동윤리는 기독교인의 영적 미덕을 수공업을 비롯한 다른 직업에 까지 확대시켰다. 75

 

12세기에 이르러, 그 사람의 직업과 동일시한 성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베이커(빵 굽는 사람), 카펜터(목수), 대처(이엉장이), 스미스(대장장이), 위버(베 짜는 사람), 골드스미스(금 세공인), (요리사). 77

 

개인 및 집단의 정체성이 직업에 따라 새로이 형성되자 교회의 정책도 자신들의 일에 대해 보다 존중해 달라는, 조합과 중산층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교회는 기꺼이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예로, 교회는 이 무렵 증가하는 중산층을 위한 중간 단계의 집으로서 연옥을 만들어냈다. 연옥은 중산층에게 천국과 지옥, 힘 있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존재하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연옥의 개념은 15세기 이전까지는 별로 유행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이르자 비록 비참하기는 해도 훌륭한 자금조달 장치(gimmick)인 연옥이 소곡(小曲)을 통해 찬미되었다. “금고에 동전 소리가 울리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78

 

일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가장 애용하는 묘사, 창조로서의 일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아름다운 거슬의 창조자이다. .. “예견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프로메테우스.. 고대인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고된 노동으로 몰아넣은 사기꾼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인류가 운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영웅이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의 섭리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일이 지니는 가치도 커졌다. 14세기의 피렌체는 우리에게 세계를 만들어내고 자연의 형태를 바꾸는 창조자로서의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 만약 종교가 중세의 아편이었다면 창조성과 미는 르네상스 시대의 각성제였다.

르네상스 시대는 고유한 노동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의 돈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되 구두쇠처럼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부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

육체와 정신을 룬련시켜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르네상스는 손을 훈련시키는 것을 더했다. 81-82

 

15세기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는 중세의 전통과 교황이 누리는 현세의 권력을 공격했다. 진정한 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저서 <쾌락에 대하여>에서 발라는 쾌락과 덕을 재정의함으로써 쾌락과 아름다움을 가득 찬 삶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소박함과 자기 절제를 명하는 스토아 학파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 그는 덕()쾌락으로 환원될 수 있는 요소(calculus pleasure)”라고 주장했다. 쾌락은 짐승 같은 충동이 아니라 이성과 통찰의 원리이며, 덕은 재능이자 인내하는 능력이었다. 82-83

 

1516년에 저술된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청소나 도살, 사냥과 같이 시민들이 비천하고 창피스럽게 여기는 일은 모두 범죄자와 노예들이 도맡아 했다. 따라서 시민들은 보다 흥미로운 일에 종사할 수 있으며, 하루에 여섯 시간만 일해도 된다. ..

1602년에 쓰여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공동체 생활과 과학적인 사회 질서를 강조했다. 캄파넬라의 이상향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캄판넬라는 가장 고귀한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일이 인간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일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성취를 이룬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 사라이다. 따라서 전형적이 르네상스인은 오늘날의 인간관과는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83

 

16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는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으로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이다. 84


루터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게으른 거지와 부랑자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집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바로 이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주요 종교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관점에서 크게 이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코란에서는 거지들을 세상의 자연스런 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선은 도덕적 영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85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개념과 휴식과 쾌락에 대한 혐오는 칼뱅과 루터로부터 비롯된 거이다. 이것은 노동윤리라고 불리는 것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85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노동자들을 똑같이 존중하도록 가르쳤다는 점이다. .. 루터와 칼뱅의 노동윤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람들을 구속해온 믿음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선하고, 일하지 않거나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이다. 86

 

종교 개혁가들은 모든 일을 베루프(Beruf, 시간을 차지하는 이르 직업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소명으로 정의했다. 소명은 일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를 일컫는다. ... 모든 일이 신의 명령이라는 생각은, 일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불쾌하며 보수가 적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다. ..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개념은 일에 영적인 차원을 부여했다. 그것은 결코 일이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소명이라는 개념은 이제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현재는 종교적인 직업을 일컫는 데 주로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소명이라는 말은 천직(vocation)’이라는 말로 세속화되었다. 우리는 때로 소명천직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창가 있다. 당신의 소명은 신이 결정하지만 천직은 당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87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가 일의 도덕적 가치를 형성해온 과정을 살펴보앗다. 고대인들은 일을 강제적인 것이자 저주로 보았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일에 단순한 위엄(simple dignity)’을 부여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은 일에 매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일을 의미와 정체성, 구원의 징표를 찾는 과정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일, 즉 소명으로서의 일 개념은 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특징을 강조했다. 일은 일종의 기도가 되었다. 일은 삶의 수단을 넘어 삶의 목저이 되어싸다. 일은 저주에서 소명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르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88

 

 

4 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우리가 물려받은 노동윤리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세 가지 개념이 융합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개념은 공정함과 사회적 책임의 원칙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루터와 칼뱅의 독특한 견해로 일 자체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일을 하도록 신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비천해도, 또한 보수가 얼마든 간에 좋은것이다. .. 공정함, 개인의 탁월성, 개인의 선함이라는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으로부터 일은 고역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일에 대한 낭만적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89-90

 

18세기,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로테스탄트의 관점과 계몽주의의 이상을 조합하여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사람들이 인도적인 방법으로 부를 사용하여 사회를 돕기 위해서는 우선은 부를 얻으려고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종교적 의무가 아닌,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일을 강조했다. 92

 

막스 베버는 프랭클린이 노동윤리로부터 윤리학을 이끄르어냈다고 생각했다. 프랭클린의 노동윤리가 낳은 윤리학은 두 가지 도덕적 개념에 기반하였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이다. .. 두 번째 도덕적 개념은, ‘유용성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92-93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성공을 위해 필요한 열한 가지 미덕을 열거하는데 절제 침묵, 규율, 결단, 성실, 중용, 청결, 평정, 순결, 겸손이 그것이다. 그는 현세에서의 금욕주의를 설교했지만 또한 돈이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 목적은 바로 생을 즐길 수 있는 자유였다. 93

 

1836년부터 1900년 사이에 모든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맥거피가 엮은 <간추린 어린이 독본> 시리즈를 읽었다. 이 시리즈는 칼뱅의 신학을 강조했으며 고된 노동과 근면, 검약의 윤리를 찬양했다. 94

 

메인 주 출신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자콥 애벗은 1832롤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 내에 자리잡은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윤리를 명확히 표명했다. 예를 들어 <일하는 롤로>에서 롤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 시간 동안 못을 분류하라고 했다. 롤로는 그 일이 매우 지루하다고 불평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한 가지 일에 꾸준히, 끈이 있게 몰두하는 능력을 가져야 해. 어린 소년들은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을 거라는 잘못된 기대를 하더구나.” 롤로의 아버지에 따르면, 진정한 남자는 일이 노력과 자제력을 요구하며, 고되고 지루한 것임을 안다.

1950년대 중반, 산업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아이들의 동화는 바뀌기 시작했다. ..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싸구려 소설은 올리버 옵틱을 비롯한 수많은 아동문학가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색채를 바꾸게 만들었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본격적인 모험소설만큼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옵틱은 범죄나 잃어버린 친척, 인디언 전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이들의 모험은 단지 주인고으이 도덕적 개선이라는 진짜 이야기이 배경이 뿐이라며 독자들을 설득한 것이다. 옵틱의 새로운 영웅들을 여전히 도덕적 모범이 되었지만, 그들의 규범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개인적인 절제에서 추진력으로 변화했다. 95

 

일에 대한 교훈이 가득한 아동용 동화들은 미국 남부에서는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땅과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돈보다 혈통을 더 중시했다. 97

 

경제 전문 기자(business jounalists)의 수가 증가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업가들을 추켜세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버티 찰스 포브스는 덕 잇는 사업가에 대한 찬양을 영구적인 예술의 형태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일과 미덕, 부는 행복과 사회적 이이긍로 이어진다는 프랭클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916<포브스>지를 창간하면서 그는 이 간행물이 사업과 인생 전반에 더 많은 인간애, 기쁨, 만족을 줄것이라고 설명했다. 98

 

위대한 사업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99

 

예일 대학교 출신의 콘웰은 1888년 필라델피아에 템플 대학교를 설립한 침례교 전도사였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동기부여자(motivational speaker)”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 콘웰 목사는 도덕적 충고와 사업상의 건전한 충고를 혼합했다. 그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어 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

18세기와 19세기의 노동윤리 옹호자들은 강한 도덕성이야말로 부에 이르는 열쇠라고 설교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쓴 <카네기 인간 관계론>에 나타나듯이 개인의 성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학이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된 것이다. 99-100

 

성공에 대해 이야기하는 19세기의 많은 작가들과 설교자들, 심지어 몇몇 정치가들은 상업을 칭송하고 정치를 비방했다.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869, 워싱턴 전문대학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고전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은 젊은이들의 직업 생활 준비에 완전히실패했다고 이야기했다. 100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미국인의 에너지와 근면성에 아연실색했다. 특히 그들은 유한계급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아워했다. 빈의 이민자인 프란시스 그룬트는 미국에서 상업이 주된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라는 데 주목했다.

활동적인 직업은 그들 행복의 주요 원천이자 그들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 그들은 돌체 파르 니엔테(dilce far niente : 게으름의 달콤함)’대신, ‘게으름의 공포만을 알고 있다. 상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수이다. ..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추구한다. .. ’. 101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스스로를 동일시했고, 심지어 자기 이름까지 일에 맞추어 지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일과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견해를 내세웟다. 일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

 

산업화 이후부터는 이리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견해가 존재했다. 첫 번째 견해는 계몽주의적인 것, 즉 과학과 지식이 진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 일은 거칠고도 육체적으로 고된 노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 두 번째 견해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비평가들이 말한 것으로, 일이 일종의 은총받은 상태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이다. ‘은총으로서의 일이란, 자율적인 장인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여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농부가 자신의 풍성한 녹색 들판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8세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산업 사회의 몇몇 문제점을 예견했다. 루소는 인류가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일의 황금기는 끝났다고 믿었다. ..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창조성과 일하고자 하는 욕구를 잃었다. .. <에밀>에서 루소는 최상의 삶의 방식으로서 장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그의 낭만적 이상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는 인간으로, 말에 편지를 박는 동안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목가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102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일로부터 얻는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보상과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을 사용하는 기쁨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겼는데,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하고 매우 세부노화된 일을 할 때 그러했다. .. 마르크스는 루소를 흉내내어 이러한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오른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세상, 사냥꾼이다. 어부, 소 치는 사람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마음먹은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에는 소를 사육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을 할수 있는 세상이다.’ 103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과 정체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극단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림 그리는 사람만 있을 뿐 화가는 없을 것이다. 103

 

마르크스의 이상적인 세계에는 단 한 사람의 전문가도 없는 것일까? 병을 고치는 사람만 있을 뿐 의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청소부로 고용되어 있는 동시에 교회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조각가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저 청소부로만 여기기를 원하겠는가?...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살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일이 유급고용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4

 

윌리엄 모리스는 당대의 르네상스인이자, 도이시대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일벌레였다. 그는 설계자, 장인, 시인, 번역가로서 탁월성을 발휘했다. 1884년 모리스는 사회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자본주의 노동체제와 생산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르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일 자체의 심미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편지에서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는 왜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살 수 없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네.... 정말이지 나는 행복하게 일한다네. 그런 나의 시간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운명지워진 것, 칭찬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단조로운 고역일 뿐인 것과 비교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네.’

산업화된 영국의 짙은 매연과 보기 흉한 건물을 보며 경악한 모리스는 작업장에 아름다운 정원을 꾸밀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흉한 모습을 조롱했다. 그는 기계가 노동을 절약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는 손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가 주는 심미적 가치는 유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서도 비롯된다고 믿었다. 104-105

 

일의 의미에 대한 모리스의 흥미로운 통찰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되리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105

 

가치 있는 일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일뿐 그 실현 가능성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리스의 논점은 만약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양한 창조적 기술을 이용하여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제각기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106

 

인간이 실제로 하는 에는 두 가지 이상적인 유형이 있다. ‘장인의 일혹은 손을 이용해서 하는 일과, ‘전문가의 일혹은 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그것이다. 106

 

전문가( professional)’ 라는 단어는 원래 성직에 들어가는 사람이 공식적인 선서를 하는데 사용된 공언하다(profes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107

 

중세의 유일한 전문직은 대개 학자이자 법률가이자 의사였던 성직자들이었다. 전문직의 근저에는 세 가지 기준이 존재했다(이러한 기준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첫 번째, 모든 전문직은 공식적인 기술교육과 그러한 훈련을 확인시켜주는 일정한 제도적 인증 과정을 요구했다. .. 두 번째 기준은 전문직에서 사용하기 위한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세 번째로, 전문가는 그 전문직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게 이용되도록 보장하는 일종의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증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뤄져야 한다. 미국의 변호사협회나 의사협회의 목적이 그러한 것이다. ..

사회학자 탈콧 파슨스는 “”기업인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상관없이 사리사욕만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반며느 전문가는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봉사한다.” 이것은 그가 50년 전에 쓴 글이다. ...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전문가들은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문가는 업무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을 보조받는것이기 때문이다. 108

 

대중이 전문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 서약을 맺는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09

 

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 혹은 얻고 싶은 것에 달려 있다. 일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일을 원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희망 혹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예와 농노들, 그리고 지독하게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윤리는 결코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111

 

 




PART TWO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바로가기



PART THREE 일과 삶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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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설령 천하는 얻었다 하더라도

학생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열심히 공부하며 온갖 능력을 쌓고 있는데, 대부분 아는 건 많은데 다룰 줄 아는 것은 없는상태로 후퇴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수많은 지식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할까? 이 무기력과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오력하며 자기를 계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퇴행하고 있을까? 왜 우리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기쁘기는 커녕 자기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을까? 13-14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사람이 천하와 반목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황은 정확히 정반대다. 14-15


이미 한국 사회는 세상을 돌보느라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망각하고 망친 채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세상을 만들었다. 18


훌륭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훌륭해지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도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이 훌륭해지도록 돕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역사 속의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을 의미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부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공부의 본질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 있다.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망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뭔지 알기 때문에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자 하는 그 노력이 바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20-21


철학자 존 듀이는 배움의 근본적인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하며 섣부른 독립을 경계했다. 그의 철학에 따르면, 살아간다는 게 곧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며 배우고 있다. 따라서 홀로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가 이미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의착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뿐이다. 이게 배움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교만이다. 공부는 홀로라는 교만에 저항한다.

그렇기에 공부(工夫) 공부(共扶)가 된다. 더불어 돕는 게 공부다. 22


공부와,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망가뜨린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이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공부를 통한 성장의 기쁨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공부가 어떤 기쁨을 주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24


나는 이 책을 통해 공부가 어떤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말하려 한다. 그것을 한계, 능수능란함, 자유, 탁월함, 멋짐, 향유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다. 25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01-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상당수 학생은 자기가 잘하는 것에 대해 잘한다는 평가를 공적으로 받아본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자기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고 싶은 것이 뭐냐?”라는 말에 하나를 꼽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런데 그 가장 긍정적이고 확정적인 하나를 찾고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이 경우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뭐냐?”, “‘어떻게는 살기 싫은가?”라는 질문이 좀더 합리적이다.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지난 경험 속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것이다. ..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을 피해 다른 것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의 범위를 좁혀가다 보면 마침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부정성에 기초한 합리적 사유의 방식이다. 37-38


가르치는 사람이 학교 안에 갇히면, 그는 학교에 적응하고 최적화된 학생들에게만 다가설 수 있다. 39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하고 미래를 기획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예측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과거를 보며 성찰하고 미래를 보며 기획한다. 성찰과 기획, 이것이 근대 사회에서 사유라고 불리는 것의 핵심을 차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성찰하여 그 과거로부터 나에게 주어진 것과 남은 것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밑천 삼아 내 삶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유. ...

기획은 늘 미래를 생각하게 해 사람을 허황되게 만들 수 있기에 기획 중심의 사유는 경할 필요가 잇다. 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삶을 나쁜 의미에서 공학적으로 바라보며 현재를 억압하거나 차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경계한다면 기획 역시 성찰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배움을 촉진할 수 있다. 40


존 듀이의 경험론. 듀이는 인간의 경험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우리가 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은 능동적인 경험이다. 반면 불에 손을 데는 것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불에 손을 넣으면 화상을 입는다. 그러니 다시는 불에 손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을 얻는다. 듀이는 이때 얻는 교훈이, 손을 데는 수동적인 겪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란 능동적인 이 아니라 수동적인 겪음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에 힘을 가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에게 힘을 돌려줄 때, 그 반발력을 느끼는 것이 바로 겪음이다. 무엇인가를 한 것이 튕겨 나올 때, 이 대상에 부딪쳐 반발되는 것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 이게 왜 이러지?’하며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상의 현존을 인식하며 그 대상의 힘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골똘히생각하게 된다. 그 힘의 실체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이 집중이 다름 아닌 생각이다. 이렇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겨우 가능한 게 신체를 최소한으로 활성화하는 산책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통해 교훈을 얻기 위해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생각하기 위해 멈출 줄 하는 몸, 이 몸이 공부하는 몸이다. 43-44


폴 윌리스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에서 영국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왜 역시 노동계급이 되는지 연구했다. 그 책에서 윌리스는 노동계급의 자식들은 일찌감치 교육의 이데올로기를 간파한다고 말한다. , 학교 공부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이 학교 권윙 순응하게 만드는 지배의 도구다. 그 약속은 개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노동계급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꿰둟어 본다.

학교의 체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간파한 학생들은 학교에 반항(counter)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은 학교를 떠나는 것과 같은 전면적인 거부는 아니다. 대신, 학교 안에 머무르며 학교의 권위에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깐죽거리고 개긴다거나, 짓궂은 질문을 하다거나, 수업을 교란한다거나 무단 조퇴를 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것 등이 반학교 문화의 특징이다. 학교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사회의 약속을 승인하기를 거부한다.

일차적으로 이들이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 권위의 원천인 지식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53


반학교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학생들의 교복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교복은 학교의 권위에 대한 순응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교복을 주어진 그대로 입는 것은 찐따같은 일이다. .. 교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학교의 권위에 얼마나 저항하는지가 드러난다. 55


반학교 문화가 가진 역설이 있다. 반학교 문화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반학교 문화에서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세계의 전부다. 학교 바깥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 56



01-2 자아 실현과 탈학교 문화

저항 담론이 형태로 공부의 새로운 목적을 제시하는 흐름이 제도교육 안팎에서 나타났다. 제도교육 안에서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과 참교육 학부모회로 대표되는 교육운동이 등장했다. 바깥에서는 공동육아, 대안학교와 같은 흐름이 만들어졌다. ..

이들은 교육이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공부가 좀 더 자유롭고 즐거운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공부가 절대다수의 학생이 자신의 꿈을 탐색하고 발견하고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9


신분 상승이 목적이던 시대에 욕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었다.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윤리적/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이었다. .. 단적으로, 의대나 법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부모의 바람과 달리 인기 없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부모로부터 이런 말이 돌아왔다. “너는 네 생각만 하냐?”

따라서 그 시대에 개인이 어떤 행동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기준은 욕망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62


나는 OO가 되고 싶은데라는 말로 교육의 권위와 정당성에 도전한 것은 이런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국가의 일원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의 원천이라며, 사람을 개인으로 해방하자는 강력한 요구가 바로 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65


학교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어른들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왔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오는 것이 일이고, 학교에 오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 교사들 역시 이들을 보며 오는 것만으로도수고했다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교사나 부모가 보기에 이들은 완전히 무기력했다. .. 학교를 벗어나면 이들은 살아났다. 71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자기 표현의 욕망을 드러냈지만, 학교는 여전히 획일주의적 군대 문화였으며 수업은 입시 위주의 암기식 공부였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에 몸을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니 교실에서 아무리 잠을 자고 팬클럽 활동을 한다고 해도, 학교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고 무의미하면서 고통만 유발하는 공간이었다. 학생들의 몸은 이 공간을 견디지 못했다.

이때부터 학교는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제도교육은 학교 붕괴, 교실 붕괴 담론에 시달렸다. 72-73


의사소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함께 알아내고 해결해가는 경험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었다. 서로를 준중해가며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니 학교내의 관계가 폭력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74


학교 폭력에 관한 담론도 폭증했다. 물론 이 말이 학생 간의 폭력이 이 시기에 급증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과는 달리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74-75


폭력에 관한 한 학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도고 있었다. 욕망이 분출되는 시기에 욕망을 억누르기만 하는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나중을 위해 지금 당장은 참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75


1990년대 후반부터, 저항과 해방의 언어였던 꿈을 위한 교육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인상을 찌푸리며 꿈이 없다고 말하거나 꼭 꿈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학생이 생겼다.

꿈이 해방의 언어가 아닌 새로운 억압의 언어가 된 이유는 꿈을 묻는 교육이 간과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꿈을 묻는 이들은, 이 꿈이라는 게 긴 인생 중 어느 시기에 묻고 찾고 발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기 않았다. 진보적인 사람도 보수적인 사람도 그것은 당연히 청소년 시기에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대학 가기 전에 꿈을 발견하고 준비까지 맟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지만, 생애사적 기획의 관점에서 보면 꿈을 묻는 교육을 말한 사람들조차 이 모든 것을 열여덟살, 즉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 이전에 해내야 한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75-76


나는 내 아이가 학교 공부를 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항변하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이 부모들 역시 다른 방면에서 자녀가 폭풍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기타를 치면 기타에서, 농사를 지으면 농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대가 되어서도 자기 자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고 싶다고 말한 그 무엇을 잘하지 못하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다. 자녀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때 부모가 집중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이 잘하는 것이 하나는 있어야지, 너는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

이런 부모에게, 자녀가 어느 정도 잘하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이 비슷하다. “일등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요.”라는 답이다.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다시 물어보면 최소 중간 이상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어느 정도하는 것이 된다 영역이 학교 공부에서 다른 분야로 옮겨간 것일 뿐, 명시적으로 일등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실상 중상위권 안에 들기를 바라는 일둥주의자들인 것이다.

그 결과, 탈학교 시대의 후반기로 갈수록 어린이/청소년을 해방하고자 한 언어인 은 본의 아니게 억압의 언어가 되었다. 꿈을 가지지 못하면 지질한사림이 되고, 꿈을 가지면 그 모든 준비를 열여덟 살 이전에 완수해야 하는 강압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히려 입시에 의한 압박보다 꿈에 의한 압박이 사람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만든다. 78-79



01-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경제 성장은 1997년의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 이른바 생존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82


아이도 부모도 신분 상승이 가능하지 않다는것을 분명이 알고 있었다.

신분 상승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생존과 계급 재생산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잘살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83


학벌이 아래로부터 붕괴했다. 상위권 대학 중심의 대학 서열은 여전히 강고한 듯 보였지만 그 아래의 학벌은 무의미해졌다. ..

서울데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취직을 통해 경제자본이 될 수 있는 교육자본이다. 그 이하의 교육자본은 자본으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교육이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는 증거다. 84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사회에서 중산층은 더욱더 교육에 올인했다. ..

부모가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이라 해도, 그 정도의 생활수준을 자식이 유지하려면 자식 역시 그런 전문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의 중산층은 자식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건다. 거기에 그 가족의 계급적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교육 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전문직 중산층도 그 비용을 대느라 허리가 휘는 지경에 이르렀다. 85


이들은 사교육비가 이 정도 비싼 것이 교육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여 시골의 못살지만 공부를 잘하는학생들을 아예 배제하는 좋은 전략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살인적인 사교육비를 기꺼이 지출한다.

이 상태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공부에만 투자하도록 강요한다. 이전의 부모 사대와 달리 이들은 자녀가 책을 읽는다고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그 책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유리할 때만 환영한다. ...

진보적인 부모가 바라는 것은 학교 공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입시와는 거리를 두지만, 그럼에도 자녀가 읽는 책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발달 단계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두고 평가하고 검열한다. “아직은 네가 볼 책이 아니야.”라거나 그거보다는 이 책이 나아.”라며 자녀가 읽을 책을 부모가 고르고 정한다. 86-87


정신의학자들은 사람의 성장이란 좌절을 경험하면서 좌절을 다루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능감은 어렸을 때 안정감을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깨진다. 자신을 만능의 존재로 바라보다 좌절을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좌절은 사람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부 이외의 것을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고 자기는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하며 늘 성과를 내다 보니, 만능감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며 좌절을 다루는 역량은 커지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93


<아이들의 숨겨진 삶>에서 저자는 또래집단을 통해 어린이/청소년이 추구하는 것은 인기와 우정이라고 말한다. 인기와 우정은 다른 것이다. 인기가 많다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저자는, 어린이/청소년의 세계에서 인기가 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라면 우정은 이면도로라고 말한다. 고속도로에서 서로 빨리 가기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인기를 얻기 위해 서로 우열을 가르고 경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정은 경쟁적이지 않다. 사람의 삶에 신뢰와 안정감을 주는 것은 우정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또래 집단에서 우정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기 역시 중요하다. 인기를 얻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정치를 배우기도 하고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내는 기술도 배운다. 1장에서 말한, 삶을 통해 배우는 과정 중 하나가 또래집단 내부의 위세 경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합이나 배제, 그리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 성향을 알게 되고 그 성향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94


다른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딱 중간이라고 불렀던 학생들이다. 과거에는 이들이야말로 학교에서 가장 고통받던 학생들이었다. ...

학교에서 이들은 존재감도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학교에서 사물함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사들이 자기 이름을 외우는 경우는 초등학교 이후로 거의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니니 교사들이 이들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10년 전부터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고통스럽지 않냐?”고 물어보면, 당황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에 관해, 다른 학생이나 교사는 그들이 전형적으로 딱 중간에 속하는 이들이하고 설명했다. 이들은 공부는 싫지만 그래도 학교 오는 것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고, 지루한 수업 시간에는 자면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학교는 밥도 주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맛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

이 학생들에게 학교가 천국이 된 이유가 있었다. 학생이 사고를 치지 않으면, 학교는 어지간한 일에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했다. .. 교장이나 관리자들도 굳이 문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공부하는 학생'들이 서울대데 가서 학교를 빛낸다면, 이들은 자기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하지만 않아도 학교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중심이 아니라 서로 가급적 덜 건드리고 덜 괴롭혀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심이 되었다. 104-106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 하는 대신 모른 척하면서 내버려두다 보니 '딱 중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학교가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총체적인 삶의 공간이 된 것이다. 자조적으로 말하면, 진보적인 교육계 일각에서 학교는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전혀 의도하지 앟게 뒤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107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02-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더 이상 과거처럼 성장이 가능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 살밍 전환되어야 한다. 공부가 그 전환을 슬기롭게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어떤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탐색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의 전환이다. 116


모든 것을 바꾸자면서 아무것도 안 바꾸는게 바로 폐기의 니리다. 116


쓸모를 지금 당장’ ‘이라는 말에 종속싴버리는 순간,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준비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지금 나의 수준에서 그것을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지금 당장의 평가에서 성과, 스펙이 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117-118


이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들이 하는 것은 일단 다 해놓고 봐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실제적이라는 명목으로 공부의 목적을 이처럼 단기화하는 것이 당장은 학생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어느 정도 공부로 유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긴 호흡의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만들지 못한다. 공부를 지속할 힘이 있는 몸 말이다.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견디고 즐기는 몸을 만드는 것이다. 118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해야 하는 것은 배울줄 아는 사람, 즉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배움의 주체다. 121


답을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제시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른다. ‘지금 당장 쓸모 있는 것을 요구하는 제자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스승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는 배울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당장 돌아가거라.”

이게 한국에서 스승은 찾지 않고 자기계발서만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다. 124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초조함이다, 단기간에 실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금 배운 것이 시간나이비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 좀처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 초조함이야말로 지금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조해서 긴 호흡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고민과 토론을 관념적인 탁상공론으로 여기게 한다. 여기서는 해법을 찾을 수가 없다. 125


지금의 교육이 학생들이 자기 미래를 발견하고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게 이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벌러진다. 실제적 도움을 강조하며 현재의 교육과정이나 교육 내용의 전면적 폐기 혹은 대대적 보완을 주장하는 입장은,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삶의 전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현재를 강화하는 공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현재의 미완의 무엇이지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바꾸자고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126


교육의 관점에서 노오력이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노오력이라는 말은 청년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청년들이 취직하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했을 때 그건 다 너의 잘못이라는 이 사회의 비난을 자조적으로 비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130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면 네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증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과를 내야만 내가 노력을 다한 것이 된다. .. ‘성과주의.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노력해서 안 되면 더 노력해야 나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노력의 사이에 자만 늘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노오력이다. ...

황당하겠지만, 를 무한대로 늘리면서 실패를 그 사람의문제로 돌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교육의 이상이다. ..

교육이 만든 말이 무한한 잠재력이다. 131


사람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는 이 교육적 배려의 마링 성과주의와 결합하면 지옥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노력을 하지 낞은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 서오과를 못 내고 그만둔다는 것은 바로 가장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한 것이므로, 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132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언어였던 무한한 잠재력, 이처럼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파괴하는 말로 돌변해 버렸다. 133


관건은 이 해도 안 된다는 것에 기초해 우리가 어떤 성장을 꿈꿀 수 있고 어떤 사회를 설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지금 교육의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발견하는 진로 교육보다 내가 어허게 살아야 내 삶을 돌볼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발견할 수 있는 전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을 자아실현에서 자기에 대한 배려/돌봄으로의 전환이라고 제안한다. 134



02-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자기 배려를 위한 공부이 중요한 두 측면.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자기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 자기에 관한 앎이 있어야 자기를 보호하고 배려할 수 있다. 자기에 관한 앎 없이는 자기에 대한 배려도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 ‘정신이다. 이것을 자기에 대한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자기 배려의 적이다. 137


자기 재능의 한계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금 허탈하겠지만, 잡은 충분히 햅았을 때. 내 한계까지 왔다는 것은 스스로 느낄 때까지 해보았을 경우에만 알 수 있다. 여기에 충분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그게 충분한지 아닌지를 자기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이 그것이 충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157


스승의 역할은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가 재능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동행하며 그것을 깨우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제자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158


현명한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삶을 노예의 삶이라고 불렀다. ‘하고 싶은것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대의 현자들은 욕망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쳤다.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제든 그것을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힘은 이루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만 둘 수 있는 힘이다. 161


최고가 아니라 해도 각자의 재능 역시 이런 선물처럼 주어진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각자 하늘로부터 얼마나 풍성한 선물을 받았는지 비교하는 게 아니다. 관건은 그렇게 선물로 받은 재능을 각자 얼마나 잘 쓰고 있는가다. 이렇되면 주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 그 선용의 정도가 탁월함의 기준이 되니다. 이것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는 탁월함이다. 162



02-6 자기를 배려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자기에 관한 앎자기에 대한 배려를 강보하면서 자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나에게 속한 것이며, 마지막이 자기/나에게 속한 것에 손한 것이다. 이를테면 내 몸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구두는 낭에게 속한 것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속한 것이지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 배려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나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럼 배려의 대상인 는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대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이다. .. 나에게 속한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무엇보다 우선 재산, 즉 소유가 잇다. .. 내가 나를 대하는 법은 배려. 반면, 나이게 속한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은 배려가 아니라 활용의 대상이다. .. ‘는 나의 목적이지만 나에게 속한 것은 나를 돌본다는 목적으 위해 활용하는 수단이다. .. 소유에 넋이 나가는 순간 내가 노예가 된다.

둘째, 육체가 있다. .. 육체를 잘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는 역시 육체로는 환원되지 않는 를 위한 것이다. 육체 자체가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육체 역시 배려의 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이 있다... 지위나 정체성 같은 것은 사회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거이다. 이것 역시 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은 나의 속성에 불과하다. ..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면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 욕망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

나를 곧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실현하려는 삶은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 불과하다. .. 모두가 바라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사는 삶은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아니라 자기 욕망이 주체인 삶이다. .. 이런 점에서 욕망은 배려가 아니라 다스림의 대상이다. 165-169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있다. 이름이다. ...

이름은 활용이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이다. .. 이름은 그 사람의 개체성과 그 개체성의 존엄을 보증한다. 나아가 이름에는 자기 자신의 뿌리와 터전의 존엄과 명예가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이름이야말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사회적 생명 전체라고 할 수 있다. 170-171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 이는 자기에 관해 생각해본 살맘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숭산 큰스님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다. .. 따라서 자기에 관해 안다는 착각이 자기를 망친다.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 반대로, 내가 나에 관해 모른다는 자각이 자기를 배려하게 한다. 여기서 자기 배려의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177-178


자기 배려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모르는 존재, 알 수 없는 존재, 즉 철학에서 하는 타자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가장 큰 특징이 도대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대할 다른 방법이 없다. .. 모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 자기 말을 듣기, 이것이 자기 배려의 출발인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원래 이 말은 너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를 알라는 말이었다. 그 모르는 것 중의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면, 이 말은 이렇게 된다. 너 자신이 스스로에 관해 모른다는 것을 알라. ..

모르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오직 그 아는 것을 활용하고 다룰 수 있다. .. ‘모름은 무지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다. 자신이 모르는 게 뭔지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아디인지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178-179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르며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낯선 자기와의 만남은 기쁜 일이 된다. 내가 나에 관해 알고 있다는 착각과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180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 모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르는 자기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를 안다는 것을 배움의 과정의 문제로 전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아니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중에서도 자기가 언제 세상을 배움의 자세로 대하는지에 관한 앎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존 듀이가 말한 성장과 배움에 관한 이론이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배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적응과 변용을 위해 현재의 상태와 변화를 읽어내고 적절한 대처법을 찾아내는 능력, 이것이 배움의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 아니 더 넓게 말해 생명체라면 모두 배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배우는 능력 자체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선물(gifted)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배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다르다. 각자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고 그 원리를 이해한 후 그것에 맞추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배우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을 중심에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 아는 사람만이 배움을 중심에 놓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배우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배우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것처럼, 무엇보다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 대상의 아름다움, 혹은 변화를 주고 싶은 대상에 넋이 나가버리면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배움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지식과 기술에 집중해 그것을 습득하는 속도에만 신경 쓰면, 그 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때 곧 흥미를 잃고 짜증을 내게 된다.

그게 아니다. 목적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에서는 자기가 어떻게 배우는지를 깨닫기가 좋다.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지금 배우고 있는 그 지식과 기술의 기량만 느는 것이 아니다. 배움의 기술 자체를 동원하고 배우면서, 배움의 기량이 향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배움의 과정에서는 내 배움의 기술을 관찰하고 파악하기가 좋다. ,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이 배움에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탁월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어려서부터 사물과 사태를 관찰하는 힘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한 이유다. 전통 사회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배우는 방법과 힘을 알게 하기 위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 권장했다. 예를 들어, 남자 어린이들이 주로 하던 전쟁놀이는 지형지물과 변화를 관찰하고 파악하고 이용하는 기예를 늘리는 데 탁월한 놀이였다. 어떤 놀이는 균형감각을 키워주고, 어떤 놀이는 협력의 기예를 키워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놀이를 해보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어떤 놀이를 특히 선호하고 선호하지 않는지 구분하게 된다. 이 선호는 놀이 자체의 재미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어린이가 자기 배움의 태도를 파악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반면, 어린이가 좋아하지 않는 놀이는 적응하고 파악하고 기예를 늘리는 데 서투른 놀이였다. 좋아하는 놀이는 재미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배움의 힘과 방법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놀이였다. 이렇듯 놀이의 역할은 자기가 배우는 태도와 힘을 파악하고, 그 힘과 태도를 선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놀이는 재미뿐만 아니라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182-185


스스의 역할이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를 자 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의외로 내가 나를 잘 알기는 힘들다.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스승은 제자의 기량과 그 한계뿐만 아니라 제자가 배워나가는 태도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전문인 사람이다. 185


세상을 대하고 집중하고 그 집중을 지속시키는 나의 태도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자신에 관한 앎이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자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알아간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듀이가 공부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한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승산 큰 스님의 화두인 오직 모를 뿐’ ... 스님의 화두를 디딤돌 삼아 궁리하다 발견한 내 배움의 힘이자 방법, 태도는 오직 물을 뿐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묻는 사람이었다. 질문이 주어지면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질문이 타당한 질문인지, 의미 있는 질문인지, 질문에 관해 질문을 할 정도로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였다. 185-186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기의 성장을 돌보고 지속적으로 도모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나의 삶이 서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서사적인 삶이 되어야 그걸 자기 삶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에 이미 자기가 없는데 자기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

자기를 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자기 태도를 안다는 말이 된다. 그래야 자신의 성장을 목적의식적으로 도모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자기를 배려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넋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190


부모들에게, 자식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괴롭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면 다들 괴롭다고 대답한다. 그럼 그 괴로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는가를 물어본다. 그 무엇보다 어렵다고 대답한다. .. 그래서 다시 아니, 자기 마음도 못 다스리는 분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바꾸겠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말문이 막힌다. 190-191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191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타자라고 하며, 타자의 ‘3대 마왕이 있다. 그 첫째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둘째가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며, 셋째가 이 둘을 합쳐놓은 존재인 자식이다. 이들을 만날 때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말이다. .. 완전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말이다. .

이 순간 사람은 타자의 끝판왕을 만난다. 3대 마왕의 뒤편에 숨어 있던 끝판왕 말이다. 그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타자의 끝판왕이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기예의 한계에 부딪치고 나서야 내가 내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나에게 집중할 때 이 문제를 다룸의 기예, 즉 자식이 아닌 내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

이것이 관건이다. 우리는 문제를 나 자신의 배움의 문제로 전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전환해야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기예의 문제로 전환할 때,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문제를 배움의 문제로 전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해결할 수도 없다. 이것이 자기 배려의 초점이다. 전환의 배움은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192-193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03-7 공부, 성장의 기쁨

해치우는 것으로서의 공부에는 해보는 것만 넘쳐난다. 더구나 이 해치우는 것에는 해보고 난 뒤 결과가 돌아와 나에게 교훔을 주는, 그런 겪음이 없다. ..

이런 공부에는 연속성이 없다. 앞에 한 공부와 뒤에 하는 공부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과 연속성이 없다. 197


삶에서 배움은 필연적인 것(necessity)이다. 듀이가 쓴 <민주주의와 교육>의 옮긴이인 이홍우가 주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necessity는 필요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필연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필요성으로 번역한다면, 이 말은 공부는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아 갈 수 없다.한편 필연성으로 번역한다면, 이것은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의식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공부가 함께한다는 뜻이 된다. 전자는 살아가기 위해 목적의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후자는 살아가는 한 자연발생적으로 사람은 배우고 있다는 말이 된다. ..

성장의 핵심은 연속성이다. 경험의 갱신을 통해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장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삶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목적의식적인 과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이란 자기 경험을 연속적으로 바라볼 줄 알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의 기쁨은 연속성에 있다. 198-199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는 것에 있다. 지금 일어나는/하는 일과 뒤에 벌어질 일을 관계 지어 생각하는 것이 지적 활동이다. ...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즉 연관성을 알게 될 때 무질서해 보이던 것의 질서가 보인다.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질서가보이면 내가 그 사이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 보여서 통재할 수 있다. 개입을 통해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힘이 지적 쾌감을 준다. ..

지적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다면 연관 짓지 못할 것을 연관 지음으로써,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기량이 늘어나는 데서 온다. 따라서 지적인 흥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결과에 관한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한 사람만이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에 지적인 흥미를 가질 수 있다. 결과에 관심이 있어야 결과를 예상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또한 가능한 대안들 사이에서 적절한 수단을 고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하고 궁리를 한다. 이것이 지적인 활동이다.

결국 지적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가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적 활동은 연속성에서 중간 과정을 발견한다. 사람이 지식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작 단계의 조건과 예상되는 결과 사이에 무엇인가있다는 것을 알 때다. 그 무엇을 알면 시작과 결과를 연결할 수 있다. ‘현재의 힘도달해야 할 목적사이를 연결하는 수단을 듀이는 중간 조건이라고 말한다. 듀이는 사람들이 중간 조건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현재 진행 중인 활동이 장차 예견되는 소망의 결과에 도달하는가의 여부가 그것에 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중간 조건을 알아야 과정을 통제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지적 활동이란 중간 조건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과정이다. 201-202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그저 경험의 수준으로 내버려두지 낞고 그 이치와 원리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지적 과정인 것이다. 203


초심자일수록 배움의 과정에서 그 배움의 결과가 자기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 예상되는 결과에 자신이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204


배우는 이의 기량으로 시작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하려면, 현재 배우는 이의 삶/수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을 시작점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중간 조건을 발견하는 것 또한 배우는 자의 기량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자의 한계와 기량을 파악하고 아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205


학교와 가튼 교육현장이 배우는 곳이고 배움을 장려하는 곳이라면, 모르는 자의 용기를 환대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배우는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는 곳이 배움의 공간이다.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모른다고 말할 때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보다 환대하며 기뻐해야 한다. 그 모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7


미래가 예측되지 않거나, 미래를 안다 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결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214


진지하다는 건 재미를 파괴하는 짓이고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설명충’, ‘진지충’, 나아가 씹선비라는 욕망 먹는다. 굳이 말을 하려면 세 줄 요약이 가능한 사이다같은 말만 해야 한다. 길게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고 복잡하게 말해서도 안 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이 서사적인 삶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괴로움을 감수할때만 가능하다. 자칫하면 고립되고 외로워질 수 있다. .. 공연히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좋은 자리를 망친다는 핀잔을 듣기 쉽다. ‘프로 불편러라는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제목처럼, 이 시대에 성장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215-216


나는 앞으로 두 가지 기쁨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는 자유와 창조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향유의 기쁨이다. 사람은 배움으로써 이 두 가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세상의 법칙을 알고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선용을 넘어, 그것을 변용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창조의 기쁨을 누린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능수능란한 기예를 배우고 익히며 연마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한편, 인간은 창조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공부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창조하고 향유하는 삶, 이것이 멋진 삶이며, 멋지게 사는 것은 삶의 목표이자. 공부의 쓸모다.

창조와 향유, 이 모두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성장의 기쁨이다. 216-217



03-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기예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가 얼마나 잘 다루는가의 문제다. 기예에서 탁월함은 다룸의 정도가 된다. 다룸에서 관건은 5분의 숨과 1분의 숨을 비교하는 게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인 1분의 숨을 얼마나 잘 다루고 그 숨으로 무엇을 하는지다. ...

그러므로 다룸은 능수능란함을 지향한다. 내게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 능수능란함이 주어진 것을 변용할 수 있게 하고, 그 변용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19


새로운 것의 탄생을 보는 것만큼 기뿐 일은 없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왕자든 거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220


사람이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지대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직면한 근원적인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므로, 이미 잇는 것, 주어진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이 무엇인가를 선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앎은 활용의 전제다. 221


우리는 주어진 것을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육체적 한계나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다. 신분이나 재산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정의를 요구해야 할 문제다.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셋째, 인간을. 넘어서 존재 전체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법칙이 있다. 자연법칙은 모든 존재에게 근원적인 한계로 주어진다. 221-222


앎은 활용의 출발점이다. 안다는 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출발점이 될 수 없다. ...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아는 것, 그게 바로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이다. 한계를 아는 사람만이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자기를 배려할 수 있다. 223-224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난 다음에 구분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주어질 수 있는 것과 주어질 수 없는 것의 구분이다. 만일 우리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만을 구분한다면, 사람의 삶에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 ..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어떤 경우에는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만 후자를 포기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224


노력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아느냐, 지레 포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이 충분히 시도해보는 것이다. 내가 충분히, 원 없이 시도해보고 난 다음에는 알 수 있다. ...

충분히 해보면서 자신에게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225


중요한 것은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 226


재능과 같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 주어진 것을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사회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반드시 제기해야 한다. 227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에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바로 활용의 불평등이며 이 불평등을 시정하는 것이다. 228


좋은 사회란 주어질 수 있는데 주어지지 않은 것을 평등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보정하는 사회다. 좋은 사회란, 사회만 훌륭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별 볼일 없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훌륭해지는 것을 공공선으로 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228


앎은 활용의 전제다. 문제는,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걸 해보려고 하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 이때 만나는 것이 서투른 자기.

이 서투른 자기는, 알기는 하되 활용할 줄은 모르는 상태다. ... 이때 그가 처하는 상태가 바로 부자유.. 자신이 전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이다.

능수능란하게 도구를 다루고 싶다는 갈망이다. 이게 바로 자유다... 자유란 멋대로 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란 내가 다루는 도구들의 결을 알고 흐름을 타면서 내몸의 일부처럼 이질감 없이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이다. 229-230


미국의 인류학자인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이것을 생각하는 손이라고 불렀다. .. 배움은 머리-앎을 넘어 손-다룸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움이 사변적인 것이라면 익힘은 그 배움을 육화, 즉 물질로 만드는 과정이다. 육화되지 않는 배움은 쓸 수 없는, 그렇기에 쓸모없는 배움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전환된다. 230


도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생각하는 손은 자유로운 손이다. 그 자유가 단지 자유자재와 동의어로서 능수능란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힌 존재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한계다. 자신의 육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통해 자신의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룸으로써 도구와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인간의 근원적. 한게를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231


능수능란함의 방법론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을 다루는 기본에 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손의 힘을 조절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면서 깨닫는 수밖에 업사다. 다룸은 익힘의 문제다. 익힘을 통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익혀가는 경험 없이 다룰 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다...

익힘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스승이다. 스승이라고 방법에 관해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제자가 익혀가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그가 주의해야 할 것과 좀 더 연마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보지 않고서는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이 익힘의 과정이다. 232-233


자연법칙에 관한 ... 법칙은 지키되 그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내가 법칙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자유의 척도가 된다. 234


생각하는 손이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이유는 이 자유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자유란 뻐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드는 것이라고했다. 법칙이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는 주어진 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그 주어진 것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여 걸림거침없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양식이 된다. 이런 활용을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예(技藝)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유로운 손을 만나 매혹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욕망은 성공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매혹 없이 사람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란 불가능하다. 236-237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를 성공으로 전도시킨 사회에서 살아간다.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를 배려하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꼭 묻는다. 한계를 인정함년 자기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요리사와 같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든다. 그러면 동네 중국집 요리사가 되는 것도 요리사이니 꿈을 이루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동네 중국집 요리사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자장면을 만드는데 그건 왜 아니냐고 물으면, 성공한 삶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답한다. 7성급 호텔 요리사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꿈과 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실체는 사실 성공이다. 자유에 대한 매혹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매혹일 때 그건 자기를 파괴하는 지름길이 된다. 237-238


매혹은 또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견디게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능수능란해져야 하고, 능수능란해지려면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익힘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그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누리기 힘들다.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생각하는 손의 능수능란함에 대한 매혹 없이는 이런 익힘의 과정을 견딜 수 없다. 배움은 미적 매혹에서 시작하고, 이 매혹이 배움을 견디게 한다. ...

배움에 이어 익힘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 자유러워지지 않는다. 238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239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 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답만 외우는 공부를 하다 보니 익힘의 과정이 없어지고, 익히는 게 없다 보니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참혹한 것은, 이렇게 익힘이 생략된 채 배우는 것만 많은 상태가 10년 넘게 이어진 결과, 익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이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240-241


사실 익힘의 과정은 지루하다. .. 익히려고 할 때마다 좌절하게 된다. ..

익힘의 시작 단계에서 이 지루함을 견디게 하는 것은 매혹이다. 그러나 매혹의 힘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익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히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익힘의 결과에서 과정으로의 전환이다. .. 익힘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기량이 생기는지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익힐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익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익힘의 결과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익힘의 과정에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차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넘어간다. 익힘 자체의 기예가 향상되는 것 말이다. 243


익힘의 과정에 있는 이는 익힘의 결과에 넋을 놓지 말고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 익힘의 기예에서 가장 중요한 견디는 힘이 생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견디는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견디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 한계를 생각해야 한다... 견딜 수 없는 지점, 견뎌서는 안 디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견딜 수 없다는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무작정 견디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

무작정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고 착취다... 많은 회사나 기관이 배우고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무시, 그리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다. 244-245


배움을 통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배우는 습관이 생긴 사람만이 계속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다. 245



03-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멋진 작품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경탄한다. 그것이 예술 작품이든 자연 작품이든 말이다. .. 그거 아름답다, 멋지다고 느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작품 너머에 있는 기예를 고민하게 된다. 사람의 기예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이, 어떤 과정으로 이런 멋진 것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 .. 이 기예에 눈이 가야 사람은 순간적인 경탄을 넘어 기예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경탄은 기예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출발점이다... 공부를 시작하게 하는 첫걸음은 바로 경탄이다. 249


먼저 경탄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250


너무 아름다워 위협감을 느끼게 하는 이 감정은 유쾌하지 않다. 미학에서 이야기하는 바로는 숭고미에 가깝다. 칸트는 인간의 미적 체험을 숭고미와 아름다움으로 나눈다. 아름다움은 사람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았을 때 나오는 쾌()의 감정이다. 쾌락의 캐다. 즐거운 감정이다. 반면 단적으로 큰 것을 만났을 때 느끼는 것이 경악이다. 내가 이전에 경험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만나면 사람은 경악하게 된다. 이 경악을 쾌가 아니라 불쾌의 감정이다....

그 괴로움은 그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것을 만났다는 흥분에 넘치는 괴로움이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미라고 볼 수 있다.

경탄 중에서도 이런 경악이 가장 강렬한 체험이며, 사람을 공부의 길로 이끄는 경탄이다. 공부라는 게 뭔가? 왜 그런지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보고 경악하는 것은 그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이나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 경악은 내가 모르는 것, 절대적으로 모르는 것과 만나는 경험이다. 251-252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이어서 놀랍긴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에 관련되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

경악이나 경탄의 실체는 바로 경이(驚異).(이 책에서 나는 경탄과 경악, 그리고 경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이 셋의 공통점은 말을 잊을 정도로 놀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알지 못하던 존재 타자이다. 254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분별의 결과다.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255


지식의 가장 큰 힘이 바로 분별력이다. 경이롭지만 아직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지식이 힘이다. 공부는 이 힘을 키우는 과정이다. 255


부는 분별의 힘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분별의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대상에 압도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불쾌에서 쾌로 나아갈 수 있다. ...

알면 향유할 수 있다. 향유하는 과정에 앎이 배치되어야 한다. 256


모르는 자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는 자에게는 그렇게 질서정연한 것이었다. .. 지식의 힘은 사물과 사리를 분별하는 것이고, 분별하는 자만이 경탄을 너어 향유할 수 있다. 257-258


무지하니 자유롭고 능수능란하게 향유하지 못한다. 충분히 즐길 수 없다. 그러니 무지하면 아름다움 앞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답답한 , 즉 슬픔을 느낀다. 이런 답답함이 공부를 시작할 마음을 먹게 한다. 258


자연은 경탄을 통해 향유로 나가게 하는 좋은 대상이며 향유의 언어는 수학적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분별하고 그 움직임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언어가 바로 수학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기하학을 모른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 말하는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없다. 알람브라궁전에 흐르는 물의 배치와 흐름, 그리고 궁전의 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기하학을 모른다면 결코 향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기하학이라는 지식이 필요하다. 258-259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가 그 경이로움을 배움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니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260


듀이는 인간의 경험을 해보는 것겪는 것으로 구분했대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겪는다. .. 그러나 겪는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겪는 것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저 지나간다. 이렇게 지나가는 겪음으로는 배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겪음을 통해 사람이 배운다고 할 때 그 겪음은 내가 예기치 못한 것, 알지 못하는 것과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압도할 정도로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261


이런 경험이 사람을 배움으로 이끈다.

겪는다고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중간에 또 다른 과정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째, 내가 예기치 못한 것을 겪었을 때 사람에게 반드시 떠오르는 것이 질문이다. “, 이게 뭐지?” “이게 왜 이렇지?” “어떻게 이렇게 되지?” 예상 하지 못한 것을 만나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 반응은 일단 질문의 형태로 떠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 겪음은 겪음이라고 할 수 없다. 겪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처럼, 사람은 아는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질문이 없다는 말이다. 질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해답으로 직행하게 된다. 262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가가하는 것은 이 과정 자체에 매혹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씨름하는 이 지적인 과정이 주는 쾌감, 즉 분별의 힘이 커지는 걸 경험한 사람만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다. 263

경이로움에 충분히 젖고 난 다음에, 그 경이로움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때 호기심을 갖는다... 경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끼고 질문이 떠오르면, 그것에 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264


경탄이 공부의 춟라점이라고 할 때, 경탄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좋은 이는, 다른 사람은 그저 그런 일로 넘어가는 것도 새롭고 경탄할 만한 일로 경험한다. .. 자극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바람에 역치가 높아져서, 어지간한 자극으로는 경탄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시시해져버려 경탄할 만한 것을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경우에도 배움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265-266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스펙터클, 즉 구경거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스펙터클은 시시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더 큰 크기로, 더 바른 속도로, 더 짜릿한 것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식으로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고 나면 다른 모든 것은 시시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펙터클 사회의 더 큰 문제는 모든 것을 스펫터클, 즉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해도, 구경거리가 되면 더 이상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구경, 즉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배움도 마찬가지로 소비가 되고 있다. 지금은 대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귀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

이처럼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배움의 과정이 구경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266


배우는 사람과 공부를 구경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지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배우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한다. 공부를 통해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이 잘 늘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배움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로부터 배우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게 배우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없다. 반대로,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특히 그가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에 집중하며, 그가 가르치는 것을 즐기고자할 뿐이다. 따라서 놀랍게도, 구경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장에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서 무엇이 성장하는지 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잘 접대(entertain)’ 하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다. 서비스가 좋으면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만을 제기한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품평이다. 말하는/가르치는 사람에게 집중하니 그 사람에 대한품평만 있지 자기 성장에 관한 말은 없다. ...

품평을 통해 마치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

이것이 많은 배움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인의 경우, 배우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배움의 현장을 구경거리로 만든다. 여기저기에서 인문학 강좌니 뭐니 듣고 배우는 자리는 많아졌지만, 그런 자리의 상당수는 공부를 구경거리로 만들어서 소비하고 품평하는 자리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그것이 뭘 배웠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강의에 관한 말만 넘쳐나는 게 그것이 구경이었다는 증거다. 267-268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기예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270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있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다. 향유와 문화자본의 관계에 대한 긴장이 없으면 먹방이나 보고 있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경멸하게 된다. 대신, 문화자본이 많은 이들만 향유의 기예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층 계급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대부분 이 문화자본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학교에서도 옷을 촌스럽게 입거나 친구들의 문화끼지 못하는 학생이 소외되고 따돌림당할 가능성이 크다. 271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

다른 하나는, 학교가 학생들의 경제적/사회적 차이와 상관없이 모두 여러 가지 문화적인 것을 즐기고 그 향유의 기예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제도교육은 교육이다. 공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를 걔급과 상관없이 보편적인 시민으로 양성한다는 점이다. 귀족만 데려다가 귀족 취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나라의 보편적인 시민으로서 누구나 어느 수준의 교양을 가지고 세상을 향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문학이며 음악을 가르치는 게 이런 이치 아니겠는가

이것은 학교만의 문제나 사명이 아니다. 사실 학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제 역학을 해야 하는 것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274


세상은 아름다움을 향유한 사람들이 바꾼다.’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불러오는 도심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슬럼화한 동네를 재생하는 곳에 가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다. 도시 재생이 재개발이나 그럴듯한 벽화 몇 개 그린 후 관광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나고 교류하며 그 만나을 가꾸는 것이며 그게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눈에는 추한 것이 바로 들어온다.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이 추하다. 벽화 몇 개 그려놓고 사람들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이 추하다. 이들에게는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이 정화’, ‘미관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추하게 진행되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 추함에 맞서는 일도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면 이런 저항이 가꿈, 돌봄, 재생의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의 목적으로 실제적으로 쓸모 있는 것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로 교육이니 실용 교육이니 하는 말로 공부의 쓸모를 직업과 돈벌이 수단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부의 의미와 목적을 너무나 도구화한다. 신분 상승이나 성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목적이다. 275-276


공부의 쓸모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276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푸코는 훌륭한 삶이란 주어진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형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 공부는 자유롭기 위해 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람을 해방하는 과정이다.

문제는현대 사회에서 자유가 처한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해방을 통해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자유를 억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통치한다. 각자에게 표준적인 삶을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장한다. 그렇지 못한 삶은 지질하다고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래서 우리는 개성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 각자 자기계발 하느라 노오력하며 살아야 한다.

여기에 이 시대의 자유의 딜레마가 있다. 한편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해방이 사람들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본문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노오력하며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잇느 것도 자유/해방이다. 마르크스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농노들이 얻은 자유는 굶어 죽을 자유라고 말한 거서럼, 이 자유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삶을 일회용으로 착취하고 폐기하며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다. 파탄에 몰린 이 자유로운사람들은 자기를 탓하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자기 노력과 능력의 부족을, 나중에는 많은 것을 물려주지 못한 부모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이번 생에서의 운명 탓으로 돌리며 죽어간다.

우리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처한 이런 공통의 운명에 관해 알아야 하고, 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81-282


이 시대의 교의인 신자유주의는 자유를 통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지만 동시에 자유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이 알고 다루며 스스로의 양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을 통치로 흡수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는 게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 되는 딜레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사회를 외면한 자기 배려, 타인의 해방을 저버린 자유란 또 다른 자기계발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282-283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선(共同善)이 되는 사회를 도모할 때 자유는 위험한 것도 아니고, 자유가 위험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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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의 치유와 자기 회복을 위해 언제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고립되어 있고, 고립된 시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신념이었다.  10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 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무엇이 가장 단단하게 묶을까? 완전히 잘라버릴 수 없는 밧줄은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선택된 부류의 인간에게 그것은 의무가 될 것이다. 젊음에 어울리는 외경심, 오랫동안 숭배하고 가치를 부여해온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 자신들이 성장했던 땅, 자신들을 이끌어주었던 손길, 숭배를 배웠던 성전 등에 대한 감사, 바로 그들의 최고의 순간 그 자체가 그들을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해방은 이처럼 속박된 것에 마치 지진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그러면 젊은 영혼은 단 한번에 동요되고 분리되어 떨어져버리고 만다 - 그들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충동과 혼란이 그 영혼을 지배하고 그에게 명령하는 주인이 되어 버린다 ; 의지와 소망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디로든 나아가려고 눈을 뜨게 된다 ;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시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시거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퍼진다. ‘여기’그리고 ‘집에’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가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와 의심, 의무로 불렸던 것에 대한 섬광 같은 멸시 그리고 방랑, 타향, 소외, 냉각, 환멸, 냉담에 대한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화산처럼 솟구치는 욕망, 사랑을 향한 증오심,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숭배했고 사랑했던 곳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신전모독과 같은 행동과 눈초리, 아마도 자신이 방금 한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수치심과 동시에 그 일을 해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 승리를 알림으로써 느끼는 더할 나위없는 내면적인 기쁨의 전율이다 - 승리라고?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승리란 말인가? 그것은 수수께끼 같이 의문스럽고 모호한 승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최초의 승리이다 : - 위대한 해방의 역사에는 이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해방은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하나의 병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의하고 스스로 가치를 정립시키려는 힘과 의지가 만드는 이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이 의지 : 그리고 풀려난 자, 해방된 자가 이제부터 자신이 사물을 지배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때 그의 거침없는 시도와 기묘한 행동에는 얼마나 많은 질병이 나타날 것인가! 그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무섭게 배회한다 ; 그의 긍지의 위태로운 긴장 상태는 그가 약탈하는 것으로 보상되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파괴해버린다. 그는 자신이 은폐하는 것, 부끄러움 때문에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악의에 찬 미소로 뒤집어버린다 : 그는 만약 이러한 사물들을 뒤집어버리면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평판을 받아온 것에 자신의 명예를 되돌려놓으려고 한다면, 그리고 호기심으로 시험해보려는 듯이 가장 금지된 것의 주위로 몰래 기어 들어가려 한다면 거기에는 자의와 자의에서 나오는 쾌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방황의 배후에는 더욱 위험한 호기심의 의문부호가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황야에서처럼 불안하면서도 정처없는 행로의 중간에 있는 것이므로. ‘모든 가치를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선은 악이 아닐까? 그리고 신은 악마의 발명품일 뿐이거나 악마를 더욱 고상하게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허위가 아닐까? 또 우리가 속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속이는 자가 아닐까? 우리는 속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 이런 생각이 그를 인도하고 더욱 멀리, 더욱 빗나가도록 그를 현혹한다. 고독이 그를 겹겹이 에워싼다. 저 무시무시한 여신이자 잔인한 정념의 어머니인 고독이 그를 더욱 위협하고 목을 조르고 심장을 짓누른다. - 그러나 고독이 무엇인지를 지금 어느 누가 알겠는가? ...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 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시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 정신이 자신의 길에서도 자신을 잃고 방탕하며 어느 한 구석에 취한 듯 주저앉아 버리게 될 위험을 몰아낼 수 있는 저 넘치는 풍요함의 내면적인 광대함과 자유분방함에 이르게 될 때까지의 길은 멀다. 그리고 위대한 건강의 표시인 저 유연하고 병을 완치하며 모조해내고 재건하는 힘이 넘쳐흐르기까지의 길도 아직 멀다. 그렇게 넘쳐흐르는 힘은 자유정신으로 하여금 시험에 삶을 걸고 모험에 몸을 내맡겨도 된다는 위험스런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유정신의 거장다운 특권이다! 그 사이에는 긴 회복기가 놓여 있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체로운 변화가 가득하여, 벌써 건강이라는 옷을 입고 위장을 한 강이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들이다. 거기에는 나중에 이러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을 감동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중간 상태가 있다 : 거기에는 창백하고 섬세한 빛과 태양의 행복이 속해 있다. 즉 새의 자유, 새의 조망, 새의 오만에서 나온 감정과 호기심과 갸날픈 멸시의 감정이 얽힌 제3의 감정이 있다. ‘자유정신’ - 이 차가운 단어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편안하며 따뜻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가까이 가고 멀어지며, 기꺼이 도주하고 피해다니며 날아다니고 다시 사라지거나 또다시 높이 날아오르며 사는 것이다 ;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 가운데에서 엄청난 다양성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변하게 된다. - 그러고는 자신과 무관한 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자유정신을 괴롭히지 않는 그런 것과 관계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


한 단계 더 회복되면, 자유정신은 다시 삶에 천천히, 거의 반항적으로, 거의 의심스러운 듯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주위는 다시 점점 따뜻해지고 마치 노란색 같은 빛을 띠게 된다 ; 감정과 공감은 깊어지고, 눈을 녹이는 듯한 온갖 바람이 그 위로 지나간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주위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놀란 채 조용히 앉아 있다 : 도대체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친근하고 가장 가까운 사물들 : 그 사물들이 그에게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 그것들은 그 사이에 어떤 솜털과 매력을 얻었는가! 그는 감사하며 뒤를 돌아본다 - 자신의 방랑과 고집, 자기소외, 자신이 차가운 하늘을 새처럼 날며 멀리 보았던 것에 감사하며. 그가 나약하고 우둔한 게으름뱅이처럼 언제나 ‘집에’, 언제나 ‘제정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는 자신을 잊고 있었다 :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 그때 그는 거기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가! 미지의 전율!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피로감과 오랜 질병 그리고 병이 재발한 가운데 느끼는 행복! 고통에 쌍 조용히 앉아 인내심을 키우는 일과 햇빛 아래 누워 있는 일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누가 겨울의 행복과 벽에 드리워진 햇빛의 얼룩을 그만큼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향하여 다시 몸을 반쯤 돌린 이 회복기에 있는 자, 즉 도마뱀이야말로 세사에서 가장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가장 겸손한 동물인 것이다 : - 그들 중에는 질질 끌리는 옷자락에 작은 찬가를 달고 다니지 않으면 하루도 못 견디는 자도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12-17



제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인류는 유래와 기원에 관한 질문을 의식에서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 반대의 경향을 자기 속에서 느끼게 되려며 ㄴ우리는 거의 탈인간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24


철학자들의 유전적 결함 - 철학자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근본적으로 극히 제한된 시기의 인간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다. 여갓적 감각의 결여는 모든 철학자가 지닌 유전적 결함이다.  .. 절대적 진리가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역사적으로 철학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와 동시에 겸양의 덕이 필요하다.  24-25


현상과 물 자체 -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점차 이처럼 이상할 정도로 다채롭고, 끔찍하게 의미심장하고 감정이 넘치게 되었다. 세계가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색을 칠한 사람은 우리였던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근본적인 자신의 해석을 사물 속으로 끌어들였다.  38


회의(懷疑 품을회 의심의)의 추정적 승리 - 한 번쯤은 회의적인 출발점을 인정해보라. 만약 다른 형이상학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세계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에서 나온 설명들이 전적으로 소용없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어떤 눈길로 인간과 사물들을 보게 될 것인가?  44


비교하는 시대 - 사람들이 관습에 묶이지 않을수록 그만큼 동기의 내면적 운동은 활발해지며, 그에 상응하여 외적 불안정, 인간의 뒤얽힌 혼란, 노력의 다성음악도 그만큼 커진다. 자기 자시이 있는 곳에 자신과 후손을 묶어두는 엄격한 강제성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아직도 무엇인가 엄격하게 속박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모든 종류의 예술양식이 나란히 모조되고 있다. 모든 단계나 모든 종류의 도덕, 관습,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시대는 서로 다른 세계관, 도덕, 문화가 비교될 수 있고 나란히 체험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 고뇌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과제를 우리는 가능한 한 크게 생각하도록 하자.  46-47


꽃잎의 향기에 취해서 - 종교와 예술은 세계의 꽃이지만, 그것이 줄기보다 세계의 뿌리에 더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종교와 예술로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류는 종교와 예술과 같은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인간을 깊고 섬세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53


추리할 때의 나쁜 습관들 - 사람들이 가장 흔히 범하는 오류 추리는, 어떤 사항이 실재하므로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53


비논리적인 것은 불가피하다 - 비논리적인 것이 인간세계에 필요하며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난다는 인식은 사상가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 중 하나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에 상당히 깊이 파고들어 가 있어서, 이들 아름다운 것들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지 않고는 비논리적인 것을 퇴치할 수 없다.  54


불공정함은 불가피하다 -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겪은 경험은 총체적 평가를 위한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만큼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평가는 성급하며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재는 척도, 즉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코 불변의 크기를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위기와 동요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한 어떤 사항의 관계를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확실한 척도라고 믿어야만 한다. 아마 이상의 모든 면에서 본다면 사람은 전혀 판단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지 않고, 혐오와 애착 없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혐오는 모든 애착과 마찬가지로 역시 평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따라서 불공정한 존재이며,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존재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이다.  55-56




제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개인과 민족에게 가벼움이 필요하듯, 마찬가지로 다른 부류에 속하는 매우 자극받기 쉬운 자와 동요하기 쉬운 자에게는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가끔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필요하다. 점점 불길에 휩싸여가는 시대의 우리 더욱 정신적인 인간들은 우리가 적어도 지금처럼 부단히 악의 없고 절도를 지키녀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이 시대에 거울과 자기반성으로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불을 끄고 식히는 존재하는 모든 수단들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야만 하지 않을까?  68


예지적 자유에 대한 우화 - 소위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첫째, 사람들은 동기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별 행위를 단지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런 명칭의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언어가 돌 자체를 단단하다고, 나무 자체를 푸르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함 또는 악함을 동기 속에 집어 넣고, 행동 자체가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람들은 선하다, 악하다는 술어를 개별 동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전체에 부여한다. 식물이 흙에서 자라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서 동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에는 행위에 대해서, 다음에는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이 본질 역시 필연적인 결과이며,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의 여러 요소와 영향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곧 인간은 어떤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본질, 동기, 행위, 나아가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로써 도덕적 감각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자 책임성에 관한 오류의 역사이며,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관한 오류에서 나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 불만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만은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므로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불만은 인간이 고칠 수 있는 습관이다.   69-70


친절의 경제학 - 인간의 교제에서 가장 효험 있는 약초이며 힘으로 간주되는 친절과 사랑은 대단히 가치 있는 발견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이 향기로운 약을 가능한 한 경제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친절의 경제학이란 가장 무모한 몽상가의 꿈이다.  76


동정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것 - 로슈푸코의 (그리고 플라톤의)판단에 의하면 동정이란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동정을 입증해야 하지만, 동정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낟. 왜냐하면 불행한 사람들은 어쨌든 동정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 동정에 대한 열망은 자기 만족을 향한 열망이며, 더욱이 이웃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동정심은 지극히 자기애에 빠져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 로슈푸코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음"때문은 아니다.  78


진리의 명목상의 단계들 - 흔히 있는 잘못된 추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서 진실하고 솔직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의 판단을 믿고 그리스도교도는 교회 창설자의 주장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행복과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옹호해온것이 모두 오류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의 단계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에, 사실은 단지 오류가 그를 부추겼을 뿐이었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과정은 영원한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민감한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정신과는 반대로 다음의 명제를 명령한다. 즉 도덕적 행위와 예지적 통찰 사이에는 철저하게 필연적이 ㄴ유대가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정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짓말 -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신이 거짓말을 금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날조, 위장, 기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위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자는 자신이 져야 할 무거운 짐에 관해서는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의 거짓말을 주장하기 위해서 또 다른 스무 개의 거짓말을 생각해내야 한다.) 다음으로 단순한 상황에서는 나는 이것을 원한다, 내가 이것을 했다 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리하며, 따라서 강제와 권위를 택하는 편이 교활한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한 어린이가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이와 같이 자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언제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말한다.  82


자기분할로서의 인간의 도덕 -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작가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일을 더 명확하게 표현해주고, 여기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남김없이 대답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해주기를 원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는 연인이 저지른 부정에서 자신이 사랑이 헌신적이며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인은 조국의 승리를 위해 전쟁터에서 쓰러지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최고 소원도 조국의 승리를 통해 승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수면과 가장 좋은 음식을, 사정에 따라서는 자신의 건강과 재산을 자식에게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이기적인 상황들일까? 쇼펜하우어의 말에 따라 이런 도덕적 행위들은 "불가능하면서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적일까? 이들의 경우에는 인간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나의 사상, 하나의 욕망, 하나의 작품 등을 자신의 다른 것보다 한층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가? 어느 고집 센 사람이 "내가 이 인간에게 한 걸음이라도 길을 양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총에 맞는 편이 낫다"고 할 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일까? 어떤 것에 대한 애착(소원, 충동, 욕망)은 앞서 말한 모든 경우에 존재하고 있다.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비이기적"이지 않다. 도덕에서 인간은 자신을 분할할 수 없는 것, 개체(individuum)로서가 아니라 분할할 수 있는 것(dividuum)으로서 다룬다.  85


약속할 수 있는 것 -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동은 약속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대체로 사랑, 증오, 충실함의 결과이지만, 한편 다른 동기에서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러 방법과 동기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익르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ㅇ낳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것은 사랑의 가상에 대한 외관상의 지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86


지성과 도덕 - 주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가져야 한다. 동정심을 가지려면 강력한 상상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도덕은 지성의 우수함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86


복수하기를 원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 -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복수를 실행하는 것은 격렬한 열병의 발작에 걸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가 없는데도 복수심을 품는 것은 만성병, 육체와 영혼의 중동증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 의도만을 중시하는 도덕은 두 경우를 양이 같은 것으로 평가하고, 통상적으로 전자의 경우를 더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복수의 행동이 수반할지도 모르는 나쁜 결과 때문일것이다). 두 가지 평가 모두 근시안적이다.  87


사랑과 정의 - 왜 인간은 정의를 손상시켜가면서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마치 정의보다 사랑이 더 고상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향해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정의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그만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어리석은 것이며, 풍부한 풍요의 뿐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이 뿔에서 자기의 선물을 누구에게나 나누어준다. 그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그것을 감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서와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피부 속까지 흠뻑 젖게 하는 비처럼 공평하다.  91


피해자와 가해자의 착각들 -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서 어떤 소유물을 (예를 들면 영주가 서민한테서 연인을) 빼앗을 경우, 가난한 자는 착각을 한다. 자신이 소유한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빼앗아갈 정도로 그 사람은 참으로 흉악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자느 ㄴ개개의 소유물의 가치를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심하 ㄴ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잘못된 표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 가장 분갷살 만한 권력자의 부정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것은아니다. 이미 물려받은 감각은 더 높은 것이 요구되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을 매우 냉정하게 만들고, 양심을 무디게 한다. 만약 우리와 다른 존재의 차이가 아주 크면, 우리는 모두 부정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예를들어 모기 한 마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이게 된다. 그래서 크세르크세스(Xerxes, 그리스 사람들조차 모두 그를 특별히 고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의 경우, 전체 원정군에게 불안하고 불길한 불신감을 조성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몸을 토막내게 한 것은, 그의 사악함의 표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에 한 개인은 마치 불쾌한 곤충처럼 제거된다. 세계의 지배자가 오래 느끼도록 자극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무가치한 존재다. 그뿐 아니라 어떠 ㄴ잔인한 자도 학대받은 자가 믿고 잇는 그런 정도로 잔인하지 않다.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당하는 괴로우모가는 같지 않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간과 사소한 부정직함으로 인해 세상의 여론을 오도하는 저널리스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는 이런 모든 경우에 잔혀 다른 감정과 사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반면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이 생각하며 느낀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 전제에 입각하여 한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특정한다  96-98


수치심의 예민함 - 사람들은 부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이런 부정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브끄러워할 것이다.  98


개개인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을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 앞에서 입증하고 싶어 한다. .. 그들은 다른 살마의 판단력을 자신의 판단력보다 신뢰하고 있다.  100


성숙한 개인의 도덕 -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여전히 개인적인 것을 너무 사소하게 여기는 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자. 우리의 감각은 오히려 강제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분리되었으며, 마치 개인적인 것이란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희생물로 제공되었다.  104-105


인륜과 윤리적인 것 - 도덕적, 윤리적, 윤리학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억지로 복종하는지 또는 기꺼이 복종하는지의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앟으며 그것을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대립은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방되어 있는가에 있다. 여기서 어떻게 관습이 성립된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쨌든 관습은 선과 악 또는 어떤 내재적 정언 명법을 고려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한 공동체, 한 민족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잘못 해석된 우연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모든 미신적 관례는, 그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관습을 강요한다. 즉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공동사회에서는 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해롭다. 모든 관습은 근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많이 잊혀질수록, 계속 더 존중할 만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관습에 바쳐지는 존중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쌓여, 관습은 마침내 신성한 것이 되며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경건의 도덕은 비이기적인 행위들을 요구하는 도덕보다 훨씬 더 오래된 도덕이다.  105-106


인륜 안에서의 쾌감 - 쾌감과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부분은 습관에서 생겨난다. ... 인륜이란 쾌적한 것과 유익한 것의 결합체이며, 게다가 그것은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  106-107


소위 악한 행위에서의 무죄함 - 모든 '악한' 행위들의 동기는 보존 본능, 더 정확히 말해서 개인은 쾌감을 지향하고 불쾌감을 회피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렇게 동기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고통을 주는 것'은 철학자들의 두뇌 속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 동정심)도 이와 마찬가지다. 국가 형성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나무로 모여들때 우리보다 먼저 그 나무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가 원숭이든 인간이든 죽였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불모의 땅에서 방랑하게 될 경우 동물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들은, 그런 행위를 우리에게 가하는 상대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의향에 따라 이런 나쁜 행동을 우리에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이 믿음은 증오, 복수심, 악의를 야기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손상시킨다. 반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격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존본능에서가 아니라 보복하기 위해 해를 가하는 것. 그것은 잘못된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뵈가 없다. 개인은 국가 이전의 상태에서는 위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힘을 위협적으로 시험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약한 자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 권력자, 최초의 국가 설립자는 그렇게 행동한다. 오늘날에도 국가가 여전히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에는 그럴 권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사회, 국가와 같은 더 큰 개체와 집단적 개체가 개인을 굴복시켜서 그들의 개별성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집단으로 흡수하게 되면, 비로소 모든 도덕성을 위한 토대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에는 강제가 선행한다. 또한 도덕성 그 자체는 잠시 동안은 여전히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순응하는 상제일 것이다. 나중에 그것은 인륜이 되고 훨씬 후에느 ㄴ자유로운 복종이 되며, 마침내는 거의 본느에 가까워지고 만다. 그때 그 도덕성은, 오랫동안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쾌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덕이라고 불린다.  109-110


판단하지 말라 - 앞서 간 시대들을 고찰할 때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노예제도의 불공정함, 인간가 민족들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잔인성은 우리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의의 본능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기주의는 악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웃' (이 말은 그리스도교적 기우너을 가진 것으로 진실에 일치하지 않느다)에 대한 표성이 우리에게는 극히 미약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마치 식물과 돌을 대하느 ㄴ것처럼 자유롭고 책임이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배울 수는 없다.  111-112


'인간은 항상 선하게 행동한다' - 자연이 뇌우를 내려 우리를 젖게 했다고 해서 자연을 비도덕적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도덕적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후자의 경우에는 자의적으로 타나타는 자유의지를, 전자의 경우에는 필연성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오류이다. 또한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에 대해 비도덕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기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의도적으로 죽이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범죄자를 의도적으로 처벌하고 그에게 고통을 준다. 첫번째의 경우는 개인이 자기 보존을 위해서 또는 자신이 불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가 되며, 두번째 경우에는 국가가 그러하다. 모든 도덕은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단 그것이 자기 보존의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가하는 모든 악행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자신으 ㄹ위해서 쾌감을 원하고 불쾌감을 없애고자 한다.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자기 보존의 문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은 타당하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선을 행한다. 즉 인간은 지성의 정도와 이성의 갖가지 척도에 따라 언제나 자신에게 선하게(유리하게) 보이는것을 행한다.  113


만약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개별적인 모든 행위는 미리 계산될 것이다. 인식의 모든 진보, 모든 오류, 모든 악의도 말이다.  118


많은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위들은 단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의미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모든 행위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현재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지성은 반드시 또 추월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120





제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느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167


예술가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젊은이인 채로 있으며 자신에게 예술 충동이 엄습했던  지점에 머물러 있다.  169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 - 재능과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라! 타고난 재능이 거의 없이도 위대해진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천재'가 되었다. 그런한 자질을 의식하고 있는 살마이라면 아무도 그것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만드는 일을 감행하기 전에, 우서 부분을 완전히 만든는 것을 배우는 숙련된 장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ㅏ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며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느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느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2페이지를 넘지는 않지만 거기에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할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개 이상 습작해보라. 가장 함축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배울 때까지 매일 일화를 쓰도록 하라.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거나 윤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 특히 주위의 다른 사람드에게 미치는 효과를 유심히 바라보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말을 자주 하고 남이 말하는 것을 귀를 쫑긋 세워 듣도록 하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도록 하라. 잘 표현되면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개개의 학문에서 발췌하도록 하라. 끝으로 인간 행위의 동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이 점에서 가르침을 주게 될 어떤 지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이런 것들의 수집가가 돼라.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그런데 대부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마 한 번은 선택이 적절하여 주목을 끌게 되지만 그때부터 항상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당연한 근거에서 나오는 일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욕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81-182


대중의 예술적 교육 - 동일한 주제가 서로 다르 거장에 의해서 수많은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소재에 관심을 갖는것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작업들에 의해 그 주제르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이 주는 매력과 긴장감의 매력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며느 결국에는 이 주제를 취급할 때의 어떤 뉘앙스, 섬세하고 새로운 발명도 파악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185


예술가와 그의 추종자는 보조를 맞춰야 한다 - 양식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행하는 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청중과 관중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예술가가 대중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이미 대중은 급속히 낮은 곳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186


집단정신 - 훌륭한 저술가는 자신의 정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의 정신까지도 가지고 있다.  192


학문에 대한 관계 - 학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학문을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던 사람은 모두 학문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193


작가의 역설들 - 소위 독자가 불쾌하게 느끼는 작가의 역설들은 그 자각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흔히 독자의 머리 속에 있다.  193


기지 - 가장 기지에 넘치 작가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는다.  194


문장가로서의 사상가 - 사상가는 대부분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사유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194


독자의 정신을 거역하는 죄 - 단지 독자와 같아지기 위해서 저자가 자신의 재능을 부인한다면, 그는 독자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 치명적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즈 독자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눈치채는 경우에 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모든 나쁜 욕을 해도 좋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말을 하는지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을 다시 바로 세워줄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194-195


글쓰기와 가르치기에서의 주의점 - 처음으로 글으 써보았거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글쓰기에 대한 정열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시도하고 체험하는 모든 것에서 문체상으로 전달할 수있느 것만을 배운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저술가와 독자들만을 생각한다. 통찰을 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기 일을 하는 데는 무능력하다. 그는 언제나 자기 학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가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 한 모든 인식은 그를 기쁘게 하낟.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리고, 지식의 한 통로, 흔히 수단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199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 - 언제나 아킬레우스와 호메로스의 관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한족은 체허모가 감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참다운 저술가는 남의 격정과 체험에 다만 단어들을 부여할 뿐이며, 자기가 경험했던 적은 것들에서 많은 것을 추측해내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들으 결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흔히 열정을 가진 인간으로 무의식적인 감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들의 삶이 예술의 영역에서 체험을 말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이 그렸더 열정을 더욱 신뢰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두고 자제하지 않으며 자신의 분노와 욕구를 위해 넓은 자리만 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 세상 사람은 저 사람은 얼마나 열정적인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깊이 파고드는, 개인을 소모시키며 때로는 잠식해 들어가는 열정인 경우에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열정을 체험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것을 극이나 음악 또는 소설에서 묘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예술가가 아니라면 흔히 방종한 개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205




제5장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 - 우리는 한 민족의 혈통은,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共同心 함께공 한가지동 마음심)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 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하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것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다닌다. 그와 같은 공동체의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체들에게 따라다닌다. 대개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한다. 새로운 그 무엇은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전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에는 어떤 부분적 약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들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비슷한 일이 개별적인 인간들에게도 일어난다. 일종의 퇴화, 불구, 나아가서는 악덕 그리고 신체적 또는 도덕적 결손까지도 다르 한편으로는 때때로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심하게 병든 인간들은 아마 호전적이고 침착하지 못한 종족 속에서 혼자 있으 계기를 더 많이 가지게 됨으로써 더욱 침착하고 현명해지며, 외눈을 가진 사람은 더욱 강한 한쪽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눈먼 사람은 한층 더 깊이 내부를 보고 어쨌든 더욱 날카롭게 듣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저 유명한 생존 경쟁이 한 인간과 종족의 진보와 강화가 해명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 것이 한데 합쳐져야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공통된 감정 안에서 정신들을 결합함으로써 정착된 힘을 증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퇴화해가는 본성들을 그리고 그 정착된 힘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좀더 여리고 섬세한 것으로서의 더 약한 이 본성들이 대체로 모든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민족은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교육의 과제는 전체적인 인간으로서의 그가 더 이상 자신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에 교육자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과 욕구가 생겨나면, 그 상처 입은 부분에 새롭고 고상한 그 어떤 것이 접종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자의 전체적 본성은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그 열매들 속에서 고상해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통치의 형식은 아주 사소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영속성이며, 이것은 자유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어 다른 모든 것을 능가 한다." 대체로 지속적인 발전과 고상하게 하는 접종은 확실하게 기초가 마련되고 영속성이 최대한 보증될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모든 영속성의 위험한 동료인 권위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그 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225-227


자유정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살할 수 있는 거소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부른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유정신의 자유로운 기본 원칙이란 눈에 띄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또는 속박된 도덕과는 전혀 화해할 수 없는 순전히 자유로운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고 자유정신을 비난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자유로운 기본 원칙들이 머리의 괴팍하모가 엉뚱함에서 나온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함으로써 단지 상처를 입히려는 악의를 가지고 잇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의 얼굴에는 보통 속박된 정신도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지성의 비범한 우수성과 예리함이 증거로서 역력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정신 활동의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은 공정하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많은 자유정신이 이러한 또는 저러한 양식으로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유정신이 그런 방법으로 성취한 원칙들은 속박된 정신의 원칙들보다도 더 진실하며 신뢰할 수 있다. 진리의 인식에서는, 어떤 충동에서 그것을 추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발견했는지가 아니라 그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자유정신이 정당하다면 따라서 속박된 정신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전자가 부도덕에서 진리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후자가 지금까지 도덕에서 비진리를 고집했는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자유정신이 정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관계 없이 그가 관습적이 ㄴ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 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  227-228

 

신앙의 기원 -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228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229


속박된 정신에서의 사항의 척도 - 속박된 정신들은 네 가지 종류의 사항에 대하여 그것들이 옳다고 말한다. 첫째, 영속성이 있는 모든 사항은 옳다. 둘째,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모든 사항은 옳다. 셋째,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모든 사항은 옳다. 넷째, 그것을 위해 우리가 희생을 치른 모든 사항은 옳다. 예를 들어 이 마지막 것은, 왜 국민의 의지를 거역하여 시작된 전쟁이 우선 희생이 치러지면 곧바로 열광적으로 게속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232


강한 정신 - 관습을 자기 편에 두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근거도 필요하지 ㅇ낳는 사람과 비교하면, 자유정신은 항상 약한 쪽이다. 특히 행동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들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확신이 없으며 미숙한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적어도 자신으 관철시키며 아무 성과도 없이 파멸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비교적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강한 정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것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천재의 생산에 대한 문제이다.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그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232-233


기적적 교육 - 사람들이 신과 신의 배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바로 그곳에서 교육의 관심은 비로소 크게 성장할 것이다. 마치 기적의 치료에 대한 믿음이 끝났을 때 비로소 치료술이 발전할 수 ㅇ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모두 기적적인 교육을 여전히 믿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엄청난 무질서, 목표의 혼란, 상황의 불리한 조건에서 가장 창작력이 풍부하고 가장 강한 사람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것이 당연한 일로 일어날 수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앞으로 이런 경우들을 좀더 상세히 관찰하고 세심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기적은 결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아래에서 많은 살맏르이 계속 멸망해간다. 대신 구제된 각 개인들은 대체로 훨씬 더 강력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타고난 강인한 힘으로 이 역경을 타개하고 이 힘을 더욱 훈련하여 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적은 설명될 수가 있다. 기적을 이미 믿지 않는 교육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첫째, 얼마나 많은 활력이 유전되는가? 둘째, 무엇을 통하여 새로운 활력이 점화될 수 있는가? 셋째, 어떻게하면 개인이 불안에 빠져 그 고유성을 파괴당하지 ㅇ낳고 문화의 다양한 요구들에 적응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어떻게 한 개인이 사적 문화와 공적 문화의 대위법 속에 참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곡조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그 곡조를 연주할 수 있을까?  242-243


학문의 미래 - 학문은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만족을 주고, 그 성과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극히 적은 만족밖에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학문의 모든 중요한 진리는 조금씩 평번하고 저속해지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조금밖에 없는 만족도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그 경탄할 만한 구구단을 일단 배우게 되면 이미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문이 스스로를 통하여 점점 더 작은 기쁨밖에 주지 못하게 되면, 그리고 위로를 주는 형이상학, 종교, 예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더 많은 기쁨을 빼앗게 되면, 인류의 거의 전부가 혜택을 입고 있는 쾌감의 가장 큰 샘이 고갈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좀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우선 학문을, 그 다음에 비학문을 느낄 수 있는 두 개의 뇌실 즉 이중 두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두뇌는 혼란 없이 병행하고 분리할 수도 있고 폐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건강상의 요구 사항이다. 한 영역에는 동력원이 있고 다른 영역에는 조절기가 있어서 환상, 편협, 정열로 가열되어야 하며 인식하는 학문의 도움으로 과열된 것의 나쁘고 위험한 결과들이 예방되어야 한다. 만약 좀 더 높은 문화의 이런 요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아픙로의 인간 발전의 경과는 거의 확실히 예언될 수 있다. 쾌감을 적게 제공하게 되면 참된 것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환상, 오류, 공상은 쾌감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땅을 단계적으로 쟁취해간다. 그 다음의 학문의 쇠퇴이며 야만으로의 역전이다.  250-251


흥미로운 것의 증가 - 좀더 높은 교양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흥미로워진다. 그는 자신의 사고의 빈 틈이 교양으로 채워질 수 있거나 사상이 교양으로 인해서 확인될 수 있는 곳에서는 재빨리 그 문제의 교훈적인 측면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지적할 줄 안다. 거기서 권태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지나친 감정의 흔분도 사라진다. 그는 마침내 식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자연 연구자처럼 인간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자기 자신을 단지 그의 인식 충동을 강하게 자극하느 ㄴ데 불과한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253


학문을 통해서 훈련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 인간이 어느 일정한 시간 동안 엄밀한 학문을 철저히 해왔다는 것의 가치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성과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바다에 비교한다면 사라져 없어질 만큼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활력, 추진력, 인내력의 강인함을 증대시킨다. 인간은 어떤 목적을 합목적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한 한에서, 언젠가 학문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 뒤에 하게 될 모든 일에서 볼 때 대단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54


거대한 것에 호의적인 편견 - 사람들은 분명히 모든 거대한 것과 뚜렷한 것을 과대 평가한다. 이는,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가지 분야에 전력투구하여 자신을 흡사 하나의 거대한 기관으로 만들 때, 이 일이 대단히 유익하다고 느끼게 되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통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 스스로에게는 자신의능력을 균형 있게 훈련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모든 재능은 다른 힘들에서 피와 힘을 빨아먹는 흡혈귀이며, 지나친 생산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까지도 거의 미치게 만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 안에서도 역시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주의를 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훨씬 낮은 문화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힘을 가지기를 원하는 모든 것에 굴복한다.  256-257


학교에서의 이성 - 학교는 엄밀한 사고, 신중한 판단, 일관성 있는 추론을 가르치는 것 외의 다른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학교는 이 작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종교를 무시해야 한다. 물론 학교는 인간적인 불투명함, 습관 그리고 욕망이 아주 팽팽하게 당겨진 사고의 활을 나중에 다시 느슨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는 그 영향력이 미치는 한, 인간에게 있는 본질적인 것과 탁월한 것을 강요해야 한다. 그것은 적어도 괴테가 판단하듯이, '인간의 이성과 학문은 최상의 힘'이다. 위대한 자연 탐구자 폰 베어(von Bear)는 동양인에 비해서 모든 유럽인이 뛰어난 점을,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근거들을 말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에서 찾고 있다. 동양인들은 이런 능력이 전혀 없다. 유럽은 일관성 있고 비판적인 사고의 학교로 나아갔고, 동양은 여전히 진리와 허구 사이에서 구별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호가신이 자신의 관찰과 규칙에 따른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또는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성은 유럽을 유럽으로 만들었다. 중세에 유럽은 다시 동양의 한 부분과 부속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즉 그리스인에게 감사해야 했던 학문적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63-264


좀더 높은 문화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 지적 충동 외에는 단지 습관이 된 종교적 충동만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학자들처럼, 자신의악기에 줄을 두 개만 매어놓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드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 낮은 사람들에 의하여 항상 잘못 해석되는 것은 많은 현을 가진 더 높은 문화의 본질에 속한다. 잘못된 해석은 예를 들어 예술이 종교적인 것의 가장된 형식으로 간주되는 경우에 일어나게 된다. 오로지 종교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마치 노아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닌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조차도 종교적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275-276


활동적인 사람들의 주요 결점 -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즉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 활동적인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의 활동이 거의 언제나 약간은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있는 은행가에게 그가 쉬지 않고 일하는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 이 활동은 비이성적인 것이다. 활동적이 ㄴ사람들은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 굴러간다. 모든 인간은 모든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노예와 자유인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그 누구, 즉 정치가, 상인, 관리, 학자이다.  277-278


활동적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태만한가 - 나는 다양한 의견이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개인은 스스로 다른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의 새로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를 차지하는 자기만의 그리고 일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의 마음속에 근본적으로 들어 있는 태만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샘에서 물을 깆는 것을 방해한다. 의견의 자유는 건강과 마찬가지다. 양쪽이 모두 개인적인것이며,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되는 보편 타당한 개념은 세워질 수 없다. 한 개인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다른 한 개인에게는 이미 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 자유를 향한 많은 수단과 방법이 더 높이 발달한 본성은 지닌 사람들에게는 부자유로 향하는 방법들과 수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279-280


부수 효과 -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런 억압이 없어도 결점과 악덕의 경향들을 버리게 될 것이다. 분노와 불쾌함이 그를 엄습하는 일도 좀더 드물어질 것이다. 즉 그의 의지는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기 위한 수단, 즉 그 안에서 그가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속적인 상태 외의 아무것도 더 절실히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280


앞으로 나아가라 -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으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네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잇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그 마력속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이쪽-저쪽'의 조심스러운 저울접시 놀이에도 정통해 있어야 한다.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밟아서 거꾸로 거닐어보라. 그러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너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속에서 남기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목표란, 스스로 문화의 고리의 필연적인 하나의 사슬이 되는 것이며, 이 필연성에서 보편적인 문화의 진행 속에 있는 필연성을 추론하는 일이다.  283-284




제6장 교제하는 인간 


호의적인 위장 -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흔히 우리가 마치 그들의 행위의 동기를 간파하지 못한 듯 호의적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87


평등의 두 가지 방식 - 평등의 욕구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까지 끌어내리려고 하거나(헐뜯거나 비밀로 하거나 다리를 걸어서) 또는 자신으 모든 사람과 함께 끌어올리려는(인정하거나 도와주거나 남의 성공을 기뻐함으로써)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288-289


신뢰와 친밀함 -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상대방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확신하는 사람은 친밀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289-290


사려 깊은 - 아무도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의로운 기질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많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292


논쟁하는 데 필요한 것 - 자신의 사상을 얼음 위에 놓는 법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쟁의 열기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92


교제와 자만심 - 사람들은 자신이 항상 공로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만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혼자 잇다는 것은 교만을 심는 결과가 된다. 젊은 사람들은 자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많은 것을 의미하려는 그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292-293


공격의 동기 - 사람들은 단지 누구에게 아픔을 주고 그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 자신의 힘을 의식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293


아첨 - 교제할 때 아첨을 통하여 우리의 조심성을 무디게 하려는 사람들은, 위험한 수단 즉 수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수면제가 잠이 들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만들 것이다.  293


침묵 - 양편 모두에게 가장 불쾌한 논쟁의 응수 방법은 화를 내고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격하는 편은 흔히 침묵을 경멸의 표시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295


대화를 하면서 -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함이나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습관의 문제다. 전자를 인정하는 것도 후자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  297


설명하는 사람 - 그 무엇을 설명하는 사람은 그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기 때문에 말하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차리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에 그는 과정을 하고, 최상급도 사용하며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반적으로 더 서툴게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실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지 못하지 때문이다.  300-301


모욕하는 것과 모욕당하는 것 -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다. 전자를 행하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고 그 뒤에 성격이 호의적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후자는, 만약 그가 비인간적이라고 인정받지 않으려면,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강박관념 때문에 상대방을 굴복시킨 데 대한 즐거움도 적어진다.  303


사교 모임 후의 양심의 꺼림직함 - 왜 우리는 일반적인 사교 모임 후에 꺼림칙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중대한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거나, 인물들에 대하여 논의할 때 완전히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는 말을 해야 했을 때 침묵했기 때문이며, 적당한 시기에 일어나서 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304


잘못 평가된다 - 자신이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에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우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미 잘못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ㄷ조차고 자신들의 언짢음을 때로는 시기하는 말들로 표출한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판단은 많은 아픔을 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아주 솔직하고 거의 사실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자인 어떤 사람이 우리가 비밀로 하고 있는 점을 우리 자신처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에 그 불쾌한 기분은 얼마나 크겠는가!  304


오해된 정직함 - 대화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인용하는 것은("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자만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반면 그것은 자주 이와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온다. 그것은 적어도 그 순간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속하는 묘안들로 장식하고 꾸미지 않으려는 정직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305


자만심의 징후로서 동정심의 요구 -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모욕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나쁘게 여기지 않기를,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극심한 발작에 지배당하고 있으므로 동정해주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자만심은 이렇게 멀리 나아간다.  306


소크라테스의 경험 - 인간은 한 가지 일에 대가가 되고 나면, 통상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대부분의 다른 일들에서는 완전히 무능해진다. 그러나 이미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처럼, 사람들은 정반대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이 대가들과의 교제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나쁜 상태다.  307-308


고귀함과 감사하는 마음 - 고귀한 사람은 감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의무를 가질 기회들을 소심하게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후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도 태연하다. 반면에 천박한 살마은 모든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를 표현하는 데도 과장된 행동을 하거나 너무 고의적으로 애를 쓴다. 그런데 후자의 행동은 더 낮은 혈통 또는 억압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에게 보여진 호의가 그들에게는 은혜의 기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309-310


우정을 위한 재능 - 우정에 대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가지 유형이 드러난다. 한 가지 유형은 끊임없는 상승 속에서 어떤 발전 단계에서도 잘 어울리는 친구를 발견한다. 그가 이런 방법으로 얻은 일련의 친구들은 그들끼리 관계를 가지는일이 드물고 때로는 알력과 대립 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나중의 발전 단계가 앞의 단계들을 지양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런 사람은 농담으로 사다리라고 불려도 좋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전혀 다른 성격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휘하여 하나의오나전한 동아리를 이룰 정도의 친구들을 얻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이 친구들은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서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으 ㄹ원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전혀 다른 성향과 본성들의 일체성이 어떻게든 이미 형성되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친구를 가지는 재능이 좋은 친구가 되는 재능보다 훨씬 가치 있다.  311


불만의 해소 - 어떤 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을 우연으로 돌리기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나쁜 의지로 돌리낟. 그의 화난 감정은 그가 실패한 게 사물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지만 우연에 의한 고통스러움은 억지로 삼ㅌ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의 측근은 어떤 일에서 실패하면, 어떤 한 사람을 명목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모든 궁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를 희생시키곤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영주느 ㄴ운명의 여신 자체에게는 복수를 할수가 없으므로 그의 불쾌감이 그들 모두에게 표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312


자만심 - 우리의 모든 좋은 수확을 망치는, 자만심이라 불리는 저 잡초가 자라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마우것도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은 진실한 마음에, 경의의 표현에, 호의적인 친근감에, 연애에, 친절한 충고에, 실수의 고백에, 남을 위한 동정에 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 잡초가 그 사이에서 자라나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이 반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자만하는 사람, 즉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계산을 잘 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만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보통 두려움 또는 편리함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정도의 존경을 그에게 표시하는 한, 순간적인 성과만은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나쁜 보복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에게 주었던 가치에서 그가 정도를 넘어서 요구한 만큼을 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만심을 꺾는 일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은 없다. 자만하는 사람은 자신의 참으로 위대한 업적도 다른 사람의 눈에 의심스럽고 사소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흙 묻은 발로 그것을 짓밟기도 한다. 자랑스러운 행동이라 할지라도 오해받지 ㅇ낳고 자만으로 보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곳에서만, 예를 들어 친구와 아내 앞에서만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살마들과의 관계에서 자만심이라는 평판을 초래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손히 거짓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쁘다.  314-315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ㅇ벗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고 ㄷ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ㅇ낳앗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이 ㄴ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두 사람 간의 대화 -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완전한 대화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말하는 모든 ㅓㅅ에는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엄격하게 고려한 자신의 특정한 색깔, 음성, 그것에 수반되는 몸짓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두 사람 간의 대화에서는 단 하나의 사상의굴절이 있을 분이다. 이 굴절은 우리가 그 속에서 우리의 사상을 가능한 한 아름답게 다시 바라보고 싶은 그러한 거울로 대화 상대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말 상대가 두 사람, 세 사람 그리고 더 많을 때는 어떠한가? 거기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섬세함을 상실하고 서로 다른 사정들이 엇갈려 와해되고 만다. ... 여러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대화를 세상의 가장 유쾌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희적인 인간미의 정기(精氣 정할정 기운기)는 화제에서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  315-316




제7장 여성과 어린아이


어머니로부터 - 모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얻은 여성상을 자신속에 지니고 있다. 그가 여성들을 대체로 존경하는가 또는 멸시하는가 또는 일반적으로 무관심한가 하는것은 이것에 의해 규정된다.  323-324


자연을 수정하는 것 - 훌륭한 아버지가 없다면, 그런 아버지를 자신에게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324


일종의 질투 - 어머니들은 아들의 친구들이 특별하고 뛰어난 성공을 하면 쉽게 그들을 질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들 그 자체보다도 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  325


서로 다른 탄식 - 몇몇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들이 눈이 맞아 달아난 것을 탄식했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아무도 자신의 아내들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을 탄식했다.  325


장소의 일치와 극 -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을 것이다.  326-327


명령하는 것을 가르친다 - 다른 어린아이들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한 가정의 어린아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327


잘 지속되는 결혼 -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하면 남편이 아내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경우처럼, 각자가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적인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결혼은 잘 지속되어간다.  328


좋은 결혼의 시험 - 결혼의 호의는 한 번쯤은 '예외'를 견뎌내는 것을 통해 지켜진다.  329


가면들 -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면적인 것이 없고 순전히 가면에 불과한 여성들이 있다. 이런  거의 유령 같은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존재와 관계하는 남성은 불평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의 요구를 가장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 남성은 그러한 여성들의 마음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항상 계속해서 찾을 것이다.  330


긴 대화로서의 결혼 -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에, 너는 이 여서오가 나이가 들 때까지 즐겁게 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결혼에서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관계의 대부분의 시간은 대화에 속한다.  330


소녀의 꿈들 - 경험이 없는 소녀들은 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의 힘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에 들떠 있다. 나중에 그들은 남성을 행복하게 하는 데 오직 한 소녀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을 경멸하는 것을 의미한다는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성들의 허영심은 남성이 행복한 남편 이상이 되기를 요구한다.  330-331


부모의 어리석음 - 한 인간을 평가하는 데 가장 중대한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부모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부모는 자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그것들을 통일할 수 없는 것인가? 낯선 민족들 사이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머무를 때의 초기에만 한 민족의 보편적이고 특징적인 경향들을 올바르게 파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 민족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그 민족이 전형적인 것과 특징적인 것을 보는 법을 그만큼 더 많이 잊어버리게 된다. 그들이 근시적이 되면 곧 그들의 눈은 더 이상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도 자식에게서 결코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하여 잘못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완전히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인간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부모의 습관적인 멍청함이 언젠가 그들의 자식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 그렇게 빗나간 판단을 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339


자유정신과 결혼 - 자유정신이 여성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나는, 자유정신이 고대의 예언하는 새처럼, 현재의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 자로 혼자 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  342


두 화음의 부조화 - 여성들은 봉사하고 싶어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정신은 봉사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345




제8장 국가에 대한 조망


문화와 사회계층 - 더 높은 문화는 사회의 서로 다른 두 계층, 노동하는 계층과 여가를 지닌 계층, 즉 참된 여가를 가질 자격을 지닌 계층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또는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강제노동 게급과 자유노동 계급이 있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있다. 좀더 높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는 행복의 분배에 대한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여가를 가진 계층이 고통을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계층이며 고통을 받는 계층이고 현존에 대한 그들의 즐거움은 더 적으며 그들의 과제는 훨씬 더 크다.  353


전복하려는 사람들 중에서 위험한 사람들 - 사회 전복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를 위해서 그 무엇을 달성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보면,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욕이 없다는 믿음과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들은 적당히 물리칠 수가 있다. 지배적인 사회는 그렇게 하기에 아직 충분할 정도로 부유하고 영리하다. 목표들이 비개인적인 것일 때, 위험은 즉시 시작된다. 비개인적인 관심을 가진 혁명가들은, 현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그들보다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다.  363


대중의 위대한 사람 - 대중에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게 주어져 있다. 모든 상황에서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마련해주거나 또는 먼저 머리 속에 이것저것이 아주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을 넣어주고 그 다음 그것을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곧바로 제공해서는 안 되며 최대한의 노력으로 그것을 쟁취하거나 아니면 쟁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좋다. 강력하고 게다가 정복하기 어려운 하나의 의지력이 거기에 있다는 인사을 대중이 받아야만 한다. 적어도 그러한 의지력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ㄱ상한 의지에는 누구나 다 감탄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은 만약 자신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더 이상 아무러 ㄴ한계가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강한 의지가 자신의 열망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대신 대중에게 아주 즐거운 그 무엇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감탄하고 그들 자신의 행복을 원한다. 그 밖에도 그는 대중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잇다 .그래서 대중은 그의 앞에서 그만큼 수치심을 덜 느끼게 되고, 그는 그만큼 더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따라서 그는 난폭하고 질투하고 착취를 즐겨하며 음모를 좋아하고 아첨을 잘하고 비굴하고 교만하며 사정에 따라서는 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367-368


전복에 대한 이론에서의 망상 -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인류의 신전이 저절로 드러나리라는 믿음 속에서 모든 질서의 전복을 열렬히 그리고 웅변적으로 촉구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공상가들이 있다. 이러한 위험한 꿈속에는 루소의 미신이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미신은 기적적이고 근원적이지만 묻혀진 채 있는 인간 본성의 장점을 믿고, 그 묻혀진 채 있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회, 국가, 교육에 나타나는 문화의 여러 제도에 돌리낟.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전복이 오래 전에 파묻혀버린 아득한 옛 시대의 처참함과 무절제 같은 가장 난폭한 에너지를 새로운 것으로 부활시킨다는 사실을 역사적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즉 전복은 아마 지쳐버린 인류에게는 일종의 힘의 원천일 수는 있겠지만, 결코 인간 본성을 정리하는 자, 건축가, 예술가, 완성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리하고 정화하며 개조하는 경향이 있는 볼테르의 절도 있는 본서잉 아니라, 루소의 정열적인 어리석음과 반쯤의 거짓말들이 혁명의 낙관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정신에 대하여 "그 비열한 자를 굴복시켜라!"고 외친다. 그 정신 때문에 계몽 정신과 진보적 발전의 벙신은 오랫동안 축출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그 정신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주시하자!  368-369


학교 제도 - 큰 국가들의 학교제도는 항상 기껏해야 평범한 수준일 뿐이다. 그것은 큰 부엌에서 기껏해야 평범한 정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370


행복의 시간들 - 행복한 시대가 전혀 불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개인은 그에게 조흔 날들이 찾아오면 틀림없이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운명은 행복한 순간을 맏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든 삶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대를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대는 '산의 저편'으로 그리고 조상들의 유산으로 인간의 상상속에 존속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한 시대라는 개념은 아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사냥과 전쟁으로 심하게 긴장한 후, 휴식에 몸을 맡기고 팔다리를 뻗으며 잠의 날개가 자신의 주위에서 소리내는 것을 듣는 그런 상태에서 추측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 오랜 습관에 따라서 그가 이제 고통과 수고의 모든 시간 후에도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상승과 지속 속에서 그 행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371-372


종교와 정부 - 국가 또는 좀더 명백히 말해서 정부가 미성숙한 많은 사람들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위해서 종교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폐지할 것인지를 숙고해보는 한, 정부는 항상 거의 확실히 종교를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상실, 결핍, 두려움, 불신의 시간들, 즉 정부가 개인의 마음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그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곳에서 개별적인 심정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편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우선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식량난, 금융위기, 전쟁들)에서까지도 종교는 진정시키고 기다리며 신뢰하는 태도를 대중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부의 필연적 또는 우연적 결함들이나 왕조의 관심사들이 낳은 위험한 결과들이 통찰력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그를 반항적으로 만드는 모든 곳에서,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신의 손가락을 보게 될 것으로 믿고 위의(이 개념에는 보통 신적 통치 양식과 인간적 통치 양식이 융합되어 있다) 지시들에 인내하면서 복종하게 될 것이다. .. 대체로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을 끌어들이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제들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혼의 교육이 필요하고, 겉으로 보아 외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관심을 대표하고 있는 시종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가 종교에서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스스로 끌어내서는 안 될 경우나, 종교적 조치를 취하느 ㄴ데 정부에게 같은 종류의 통일적인 방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될 정도로 국민이 종교적 사실들에 대하여 너무 다양하게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취급하고 각 개인의 양심과 습관에 넘겨야 하는 타개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제일 먼저 종교감각이 강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국가가 무심코 또는 고의적으로 생명의 공기를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던 은폐되고 억압된 종교감정의 동요가 이제 터져나와 극단적으로까지 무절제해진다. 나중에는 종교가 종파들로 뒤덮이게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그 순간에 용의 이빨이 뿌려졌다는 많은 사실이 입증된다. 싸움의 광경과 종교적 신조가 지닌 모든 약점에 대해 적개심에 차 폭로하는 것은 결국 더 뛰어난 자와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비종교성을 개인적인 무넺로 삼게 하는 타개책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러한 의향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도 역시 만연하게 되고, 거의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들이 하는 조처들에 반종교적인 성격을 주게 된다. 이 현상이 나타나면 곧 과거에는 국가를 반쯤 또는 완전히 신성한 그 무엇을 우러러보았던, 여전히 종교적으로 감동되어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반국가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그들은 정부의 조치에 대해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방해하고 충돌하며 교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와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항의의 열기를 통하여 국가에 대한 거의 광적인 감격으로 몰아넣는다. ...

모든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 단기간의 투쟁들이 보여주는 무익하고 소모적인 것에 대한 통찰은 사람들로 하여금 와전히 새로운 결심들, 즉 국가 개념의 폐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대립하는 것을 지양하도록 몰라갈 것이 분명하다. 사적인 단체들이 한 단계씩 국가의 업무들을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낡은 통치 활동에서 남아 있는 가장 끈질긴 잔여물(예를 들면 사적인 인간들이 사적인 인간들을 확실히 지켜야 하는 저 활동)까지도 언젠가는 사적인 기업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국각의 경시와 붕괴, 국가의 죽음 그리고 사적인 인간(모든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합리성과 불합리성을 잉태하고 있는)를 달성하고 오래된 병이 재발하는 것을 모두 극복하고 나면 인류의 이야기책에는 새로운 한 장이 펼쳐지고 거기서 사람들은 온갖 종료의 기이한 역사들과 아마 몇 개의 좋은 이야기도 읽게 될 것이다.  372-376


수단의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거의 노쇠해버린 전제주의의 뒤를 이르려는 공상적인 동생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노력들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만이 가졌던 것과 같은 국가 권력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개인의 진정한 파멸을 추구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것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주의에게는 자연의 부당한 사치로 나타나며 사회주의에 의해서 하나의 합목적적인 공동체의 기관으로 개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유사성 때문에 사회주의는 항상 고대의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플라톤이 시칠리아의 전제군주의 궁정에 나타났던 것처럼, 모든 권력 발전의 과도기적인 주변에서 나타난다. 사회주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저넺주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세기의 독재 권력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촉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산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주의에는 아직 한 번도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겸손한 복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국가에 대한 진부한 종교적 경건함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현존하는 국가들을 제거하는 데 힘써야 하므로 그러한 경건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는 단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인 테러리즘을 통하여 여기저기에 한 번씩 존재하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은밀히 공포정치의 조짐을 보이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에게 머리에 못을 박듯이 '정의'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박아둔다. 그것은 그들의 오성을 오나전히 빼앗아버리고 (오성이 이미 이 얼치기 교양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을 입은 뒤에), 그들이 해야 하느 ㄴ나쁜 장난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는 국가 권력의 모든 축적의 위험을 실로 난폭하고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그러한 한 국가 그 자체에 대한 불신삼을 품게 할 수가 있다. 만약 사회주의의 거친 목소리가 '가능한 한 많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으로 다가오면, 그 함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과 반대되는 '가능한 한 적은 국가를' 이라는 함성이 더 큰 힘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378-379




제9장 혼자 있는 사람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391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 어떤 일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일에 충실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들은 단지 그 깊이를 밝혔을 뿐이다. 항상 그곳에는 매우 불쾌한 것이 보인다.  392


의도하지 않은 고결함 -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들에게 항상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결한 행동을 하게 된다.  394


친구 - 동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친구를 만든다.  395


가장 고귀한 위선자 -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고귀한 위선이다.  396


인간의 운명 -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고 판단하더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당함을 알고 있다.  399


위대함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든느 것이다. 모든 정신의 위대함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그 많은 지류들이 뒤따라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가 처음부터 재능이 없는지 재능이 풍부한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400


너무 큰 목표들 - 공개적으로 큰 목표들을 세우고 그 후 비밀리에 자신은 그것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그 목표들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기에 충분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되어버린다.  405


강물의 흐름 속에서 - 세차게 흐르는 물은 많은 암석과 관목숲을 휩쓸고 가며, 강한 정신은 수많으 ㄴ어리석은 사람들과 명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휩쓸고 간다.  405


정신의 육체화 - 한 사람이 많이 그리고 현명하게 사고하면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현명한 모습을 얻게 된다.  406


잘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것 -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더 적게 보게 되고, 잘 듣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몇 가지를 더 듣게 된다.  406


허영심의 자기만족 -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406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 있는 - 보통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게 되면, 예외적으로 허영심에 차게 되며 평판과 칭찬에 대해 민감해진다. 그가 자신을 상실해가는 정도 만큼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 즉 외부에서 다시 자신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406-407


유일한 인간의 권리 - 관습적인 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비범한 것에 바쳐진 제물이다. 관습적인 것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관습적인 것의 노예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은 파멸하게 되어 있다.  408


얼치기 지식 - 외국어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훌륭하게 말하는 살마보다 외국어에 대해 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있다. 얼치기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만족이 있다.  408


의심을 품는 것 -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으려고 한다.  409


친구가 없는 것 - 친구가 없는 것은 질투와 자만심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가 질투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 덕으로 친구를 가지고 있다.  410


참회 -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  412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 인간은 사랑하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젊어서부터 배워야 한다. 만약 교육과 우연이 우리에게 이런 감각을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친절한 사람들의 섬세한 감각을 이해하는 데도 적합하지 못하게 된다.  424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만 - 우리가 원래는 자신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으면서, 흔히 그러듯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판단들을 흐리게 만들고 기만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후에 다른 사람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 이 불만에 동기를 부여하려 하고, 자기 자신을 보려 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가차없는 재판관이기도 한 종교적으로 엄격한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성 일반에 대해 가장 많이 나쁜 욕을 해왔다. 자신에게는 죄를, 다른 사람에게는 덕을 남겨주는 성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법도에 따라 자신의 선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자신의 악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426


고독한 사람들 -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 조용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자기 자신과 좋은 대화를 나누며, 게다가 웃음을 지으며 독자적인 삶을 엮어 나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구차하게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 관한 유익하고 정당한 의견을 남에게서 비로소 다시 배우도록 강요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배워 익힌 이 의견에서도 되풀이해서 조금 빼거나 값을 깎으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혼자 있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그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만 한다.  436


방랑자 - 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개별적인 것에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변화와 무상함에 대한 기쁨을 가진 방랑하는 그 무엇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함이 틀림없다.  449



Posted by W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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