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미학>은 사진 저편의 숨은 이야기를 말하는 책이다.  4


찍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찍기는 쉬지만 표현하기는 어렵다.  5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전면을 통해서 초상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초상사진의 전면성(前面性 앞전 낱면 성품성). 이것을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이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의 중심을 의미한다.  13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은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별한 초상사진일 경우에만 쓴다... 

정면은 물리적인 방향을, 전면은 심리적인 형상을 의미한다. 또 정면이 모델과 카메라 앵그로가의 관계라면, 전면은 모델과 관객의 시선과의 관계이다.  14


사진가가 단순히 카메라를 향해 정면으로 설 것을 요구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기 쉽다. 그러나 사진가가 인물의 전면에서 무언가를 읽고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된다. 기념사진의 경우도 단순히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정면성의 사진이 되지만 인물들 개개의 특징이 드러나도록 찍었다면 전면성의 사진이 되는 것이다.  15-16


"자신을 찍어 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찍을 수 있지?"  21


사진의 주요 형식에는 구성과 조형이 이싿. 이 두가지 요소는 비슷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구성(composition)은 화면 안 즉,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이에 비해 조형(modeling)은 화면 밖, 즉 카메라 밖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형식이다. 그러므로 구성과 조형의 가장 큰 차이는 촬영 이전이냐 이후이냐이다.  25


조형의 기초가 되고, 해체의 근간이 되는 해석이란 무엇일까? .. 페르낭 레제는 "스스로의 조형적 아름다움 속에서 피사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레제가 '스스로'를 강조하는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조형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사진에 대입하면 진정한 사진의 형식은 주어진 구성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에게 적합한 시점을 획득하는 것"이 된다. 고정불변의 규칙들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식이라는 말이다.  27-28


영화감독 마야 데렌은 구축의 형식과 해체의 형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구축의 형식은 사물을 조망하는 도구(카메라의 프레임)에서 파생되고, 해체의 형식은 조망된 이미지가 개인적인 경험과 관계된 철학과 정서 속에서 일체화된다."  28


에로티시즘은 정신적 관능이 육체를 통해서 발현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34


* 예술누드 - 미학은 안으로 정신과 영혼을, 그리고 밖으로 미의 형식과 표현을 다루는 철학이다... 미학이 예술누드에 부여한 품격과 숭고함은 무엇보다 정신의 관능이다.  35


사진의 깊이는 보는 자의 호흡에 의해 결정된다. 깊은 화면은 긴 호흡에서 나오고, 얕은 화면은 짧은 호흡에서 만들어진다.  49


세상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기계적인 눈이 인간의 눈을 침범하지 않았을 때, 그리고 고층빌딩이 인간의 시선을 가로막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언제나 롱 테이크, 롱 디스턴스의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고, 저 멀리로 점점 작아져 가는 인간의 형상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망원렌즈와 줌렌즈,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고층건물에게 그것들을 빼앗겨버렸다. 주변보다는 중심이 강조되고, 상황보다는 대상이 강조되는 사진들이 우리 주변에 확산되면서 우리는 깊은 숨쉬기, 길은 거리감을 박탈당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얕은 숨쉬기, 얕은 거리감에 그저 질식당했던 것이다.  52


사진의 형상은 결국 초덤을 어디에 두느냐 혹은 어떻게 선책하느냐에 달려 있다. 눈과 달리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부분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전체를 선명히 할 수도 있다.  56


초점이 맞았기에 형상이 존재하고, 형상이 있기에 시선을 받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물을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거리가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초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며, 또 초점이 있어야 형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곧 시선을 유도하는 '보는' 행위이자 사물이 드러나는 '보이는' 양태이다. 형상과 시선에 의해 사물은 존재성을 가지게 되며, 결국 인간의 감정을 이끌게 된다.  57


초점 안에 있으면 인포커스(in focus)라고 하고, 초점 밖에 있으면 아웃포커스(out of focus)라고 한다.  62


보인다고 해서 모두 읽히는 것이 아니듯이, 보아야 할 것이 적어질수록 때론 말해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64


사진은 참의 리얼리티를 잃지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은 새로운 표현을 확장해야 한다.  76


사진은 기억의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의 이미지이다. 이미지의 기억은 잔상이고 파편이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일시적 기억을 위한 이미지는 늘 밖으로 시간을 토하고 지우지만, 존재의 이미지는 언제나 시간을 삼키면서 시간 속에 산다. 사진은 영속적인 시간의 이미지이다. ..

사진과 디지털의 만남은 서로 약한 부분, 강한 부분을 보태고 나누는 데 의의가 있다. 사진은 바로 그것, 사물 그 자체를 지시하는 존재의 이미지이다. 디지털 프로세싱은 보다 쉽고 편리하게, 또 효과적으로 삶의 리얼리티를 발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77





한 장의 사진을 읽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말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한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도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다는 것일까. 정지된 역사 속에서 실존했다는 증거인가. 과거에 있었던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부재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대한 경의인가. 아마도 이 모든 것이리라.  91-92


'가까이 더 가까이 감동되어 셔터를 누르면 어둠이 가득한 자궁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 한 생명을 잉태하듯이 한순간의 빛과 만나 필름에 그 피사체의 감동이 잉태되는 것이다. 잉태된 생명이 10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나듯이, 한 장의 사진도 필름에 잠상이 맺혀 현상되기까지의 현상 시간을 거쳐 마침내 태어난다.' - 최광호 <나는 사진이다> 중에서  95


안도현 시인의 <사진첩>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추억이란 존재의 뿌리이다..."  100


타인의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을 찍은 작가의 본래 의도를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이다.  110


* 가다머 해석학 - 가다머는 사진의 수준, 내용, 의미, 가치는 사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노력하는 그림자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113


정치적 풍경(political landscape)이란 .. 언뜻 보았을 때 자연풍경, 현실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강한 정치적 동기, 정치적 의도를 내재한 인공적 혹은 가공적인 풍경이라는 것이다.  122


정치적 풍경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아름답거나 어떤 면에서는 달콤한 풍경사진일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진 속의 '기둥' 자체는 정치를 상징하지 않기 때문에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정치적인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진이 정치적인 풍경사진이라고 알아차리기 어렵다. 즉 정치적 업적을 상징하는 흰 기둥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둬짐으로써 상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곳곳이 공사 중이고 건설 중이다. 다리, 건물, 도로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대부분의 공공 건축물, 건축 구조물은 정치적 상징성을 띠는 정치적 풍경이다. 마찬가지로 사진 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기둥이지만 정치적 동기에 의해 세워지고, 또 드러나지 않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건설되고 있다는 사실을 장대한 구조물, 어둠 속엣 명명하는 교각이 말하고 있다.  123-124


* 사진의 정치성 - 사진의 권력은 대중들의 절대적 믿음에서 생겨났다. 발명 순간부터 사람들은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느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말보다 사진을 믿었기에 이를 역이용한 정치적 사진들이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기생해 왔다. 독재정권을 위한 조작된 홍보용 사진,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날조된 사진, 실재 이상으로 과장되게 연출한 선전용 사진. 지금도 정치 집단 혹은 행정 집단이 실적주의, 성과주의, 여론 고취를 위해 이런 사진들을 부단히 활용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맥락의 정치적 사진이 있다.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정치적 소재들을 활용하여 사회를 비판, 고발, 폭로하는 사진이다.  125


* 프레임 - 프레임에는 물리적인 프레임과 심리적인 프레임이 있다. 물리적인 프레임은 구성, 구도를 위한 파인더, 이미지 틀, 액자의 특이다. 대개 표현을 위한 물리적인 틀이다. 가장 오래된 프레임은 바늘구멍(pinhole, 원형)이다. 암상자(camera obscura) 소에서 세사을 보면 동그랗다. 이런 구형의 프레임이 점차 정사각형, 직사각형 모습으로 변해 갔다. 반면에 심리적인 프레임은 의미의 프레임이다. 보이지 않는 인식의 그릇과 같다. 물리적 프레임 못지 않게 중요한 프레임이다. 콘셉트와 의도는 심리적 프레임이다. 사진의 힘은 프레임에서 나온다.  131


들뢰즈는 추상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을 요구하면서, 추상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진정한 추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또 그래야만 추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으며, 진정한 추상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추상이 "구상적이지 않다, 서술적이지 않다, 자연적이지 않다, 문학적이지 않다"라는 말에 반대하며, 추상은 구상의 반대도, 구상과의 단절도 아닌, 구상의 혼성과 중첩일 뿐이라는 논리를 편다. 실제로 카메라를 통해서 추상을 표현할 때는 들뢰즈의 말처럼 추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된다. 추상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운 것, 혹은 구체적인 내용을 걷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진정한 추상을 만나기도, 형상화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한 추상사진은 추상회화처럼 조형의 기교가 아니다. 형상이 부재하거나 결여된 것은 더욱 아니다. 추상사진은 들뢰즈가 추상론에서 말했듯이 구체적인 형상에 대한 '아니오'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에 끊임없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를 반복해 가는 것이다.  133-134


들뢰즈는 "에너지가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사물)는 근본적으로 추상이다. 그들은 무(無 없을무) 구속적이고, 탈(脫 벗을탈) 중심적이다. 그것은 개연성 없이 우연히, 형식 없이 작동하는 순수한 자율성이다."  134-135


* 들뢰즈의 추상론 - 한마디로 형태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관념적, 인식론적 추상이다.  137





한 장의 사진을 느끼다


사진을 알게 되면 처음엔 누구나 사지능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세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이다...

사진을 알기 전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었는데, 사진을 알고부터는 오로지 사진적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이미지의 노예, 사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153


피사체가 스스로 말하는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이미지의 노예에서, 사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 사무로가 순수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다.  155


사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이런 것이 사진의 참 의미가 아닌가 한다. 무언의 사물과 말한다는 것, 그러니까 말없는 사물들에 다가서고, 귀 기울이고, 그리고 사진을 통해 인식의 통로를 여는 것, 이것이 사진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자 매력이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없다. 오로지순수한 눈과 마음을 지닌 작가만이 할 수 있다.  156


* 기억회로 - 사진은 기억을 재생시킬 뿐,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기록보다 우선하는 것이 '알아봄'이다.  


풍경이 사진가에게 한 장만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긴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풍겨을 여러 장 똑같이 찍었다는 말은 풍경과 호흡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86


풍경은 아무나 다가가서 찍을 수 있는 대상이지만 풍경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거나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지 못하면 그 풍경 사진은 단순 복제에 불과하다.  187


* 힐링 포토 - 치유에 활용되는 사진은 대개 고요한 풍경사진, 그 가운데서도 흑백사진이다... 흑백사진이 좋다는 것은 현실의 색을 제거해서 요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189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것은 언어의 자의성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성을 규정짓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삶을 경험하고,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도 저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해석해 버림으로써 의미의 혼란, 해석의 실종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판단이 사람들의 인식의 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각각이 경험한 삶의 리얼리티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드이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삶의 차이가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로 나타나고, 현실을 인식하는 차이가 세상을 해석하는 차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맨 먼저 알게 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란 삶의 리얼리티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리얼리티의 차이가 곧바로 사진의 차이, 감상의 차이, 해석의 차이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진을 보는 관객이 저마다의 리얼리티에 따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 작가와 관객이 같은 리얼리티를 공유하고 있으면 좋은 느낌, 좋은 사진이 되고, 다른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으면 느낌 없는 사진, 별 감흥이 없는 사진이 된다. 시각언어인 사진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모든 사진이 다 좋을 수 없고, 또 반대로 다 나쁠 수는 없다. 그 모든 좋고 나쁨의 선택은 관객의 리얼리티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은 다양한 리얼리티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이다. 학습을 통해서 작품과 관객 간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중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때론 음악이, 때론 설명이, 때론 주변 상황이 리얼리티의 차이를 극복하게 만든다. 처음 보았을 때 느낌이 없었던 사진이 오래 보면 좋아지는 것은 반복해서 보는 동안 그 사진과 친숙해지기 때문이다. 또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주변 환경이 리얼리티를 중재해 주었기 때문이다.  191-192


"사람들 속에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도 나를 모른다."(강상훈) 작가가 카탈로그에 썼듯이 우리는 서로 몰랐던 것이다. 서로의 리얼리티가 달라 그의 사진이 내게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이고, 감흥이 없었기에 사진보다는 글이나 한번 읽어 보자고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티를 공유하는 순간 이 사진은 내 마음에 와 닿았고, 새삼스레 진정한 리얼리티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193


진광불휘(眞光不輝 참진 빛광 아닐불 빛날휘), 참된 빛은 빛나지 아니한다. 통도사 주지이셨던 성파 큰스님은 순수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197


사진의 모드는 삶의 모드가 만들어 낸 형상이다.  210


작가는 자기 삶의 모드에 반하는 사진의 모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  211


* 치열함 - 작가(作家 지을작 집가)란 자기 집을 지슨 사람,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213


* 뒷모습 - 삶에서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진실일 경우가 있다. '뒷모습이 진실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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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교사였던가!  23


아이들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소소한 오락거리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학교의 탓이 크다. 일관성 없는 독서 지도, 시대착오적인 교과 과정, 교사들의 자질 부족, 시설의 낙후성, 도서관의 부족.

턱없이 부족한 문화부 예산!..  35


우리들의 대화는 이러했다. 그것은 세태의 어둠을 밝혀줄 언어의 영원한 승리이자,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금과옥조와도 같은 침묵이었다. 늘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온갖 정보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우리는 결코 이 시대에 기만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전 세계가 우리의 말에 담겨 있으며, 온 세상이 우리의 침묵으로 밝혀진다. 우리는 현명하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현명함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런데 대화를 마치고 나서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이 우울함은 무슨 까닭일까? 손님들이 가고 집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건만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이 침묵은? 단지 설거지 걱정 때문일까? 게다가... 저녁 모임을 마치고 수십 킬로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의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침묵이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흠뻑 취해 있던 그 현명함의 열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는 차 속의 부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 침묵은 마치 간밤의 취기가 서서히 가시는 떨떠름한 뒷맛처럼, 혹은 마취가 풀려날 때의 감각처럼, 의식이 깨어나면서 조금씩 제 자신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 느낌 같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한 대화 속에 진정한 우리는 없었음을 어렴풋이 느끼는 고통스런 자각인 것이다. 우리는 거기 없어싿. 거기엔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있었으며, 논지 또한 확고했으나 - 게다가 그 논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주장한 바가 전적으로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는 거기 없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명함이라는 자기 최면을 부단히 연마하느라 또 하루 저녁을 탕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서서히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속마음은 조금 전 식탁에 둘러앉아 하던 이야기들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핏발을 세워가며 독서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은 제 방에 틀어박혀 책이라곤 한 줄도 읽지 않는 아이의 언저리만 맴돌고 있었다. 아이로 하여금 책읽기를 싫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인들을 이것저것 늘어놓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와 아이를 갈라놓는 책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줄곧 책에 관해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오로지 아이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36-37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시대를 규탄하고, 텔레비전을 고발하면서... 필경 또 텔레비전 끄는 것도 잊은 채.

너무도 '비주얼'한 20세기라는 시대 탓인가? 그렇다면 19세기는 너무 묘사적이라고 할 참인가? 또 18세기는 너무 합리적이고, 17세기는 너무 고전적이라고? 16세기는 너무 르네상스적이고, 푸슈킨은 너무 러시아적이고 소포클레스는 너무 한물 갔다고? 마치 사람과 책의 관계가 소원해지기까지 수 세기가 필요했다는 소리 같다...

일단 지적 항해의 첫발을 내딛고 나면, 아무일도 없었던 듯 예전처럼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억제된 즐거움일지라도, 모든 독서에는 의당 읽기의 즐거움이 자리한다.  51-52


아이가 고작 몇 개의 단어에 흥미를 보인다고 하여 마치 당장 온갖 책을 섭렵할 수 있게 된 듯 착각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걸음마를 익히고 말을 배우듯, 책 읽는 습관도 때가 되면 저절로 익히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56


아이가 맨 먼저 배우는 것은 책읽기가 아니라, 책 읽는 시늉일 뿐이다.  57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60-61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되돌려주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없이, 될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61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아하는 마음'에 뭔가 손상을 입었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62


어른들은 읽기를 익히게 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는데에만 열을 올린다. 그럴듯한 공부방을 꾸며주고, 독서 카드를 만들고, 출판사를 무색케 할 만큼 온갖 전집류로 도배를 한다. 참 딱한 노릇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으니 말이다. 요는 아이에게 배움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는 일이다. 우선 아이에게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심어준 다음 책상을 마련해주어도 줄 일이다. 그제서야 어른들이 동원하는 온갖 방법이 제구실을 할 것이다. 

당장의 흥미, 이것만이 아이를 가장 확실하고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유일한 동인이다.  66-67


'조급하게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곧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얻는 길이다.' 루소  67


아이는 누구나 훌륭한 독자가 될 자질을 타고난다. 그리고 주위의 어른들이 몇 가지 지침만 잊지 않는다면 아이는 언제까지고 훌륭한 독자가 될 것이다. 우선은 어른들이 자신의 능력만을 내세우려 들기보다는, 아이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무조건 암기와 복습만을 강요할 게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아이의 열의를 북돋워주어야 할 것이다. 모퉁이에 서서 아이가 도착하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볼 일이다. 어떻게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들기보다는, 기꺼이 아이에게 저녁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 미래를 담보로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기보다는 아이의 현재가 한껏 펼쳐질 수 있도록 마음 써야 한다. 한때틑 아이의 더없는 즐거움이었던 일이 결코 마지못해 하는 고역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아이가 그 즐거움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적어도 아이 스스로가 그 즐거움을 의무로 사목자 할 때까지는 말이다.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무란 모든 교양이나 문화 수업이 그렇듯 무상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게 해서 어른들 자신도 그 무상의 즐거움에 다시금 새롭게 잠겨볼 일이다.  69-70




"여러분 스스로 경험에서 우러난 예증을 드시오"  94


다들 한결같은 의견이라는 건 어쨌든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01


학교는 능력과 기능만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  102


요즘의 우리들은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설파한다. 때로는 주석자, 해석가, 분석가, 비평가, 전기 작가, 해설자를 두루 자처하여 이루 다 할 수 없는 극진한 찬사로 작품의 위대함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작품들은 말이 없다. 워낙 우리의 역량이 차고 넘치다 보니, 어느샌가 우리의 말이 책 속의 말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124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다만 읽어도 모를까 봐 지레 겁을 먹었던 그 말 못할 두려움으로 인해 줄곧 사춘기 아이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151


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의 목소리 덕분에 다시 '글'과 친숙해지고,..

소설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작가와 나 사이에 형성된느 그 역설적인 친밀감을 발견하는 데 있다.  155


혼자만의 책읽기에 친숙해지려면, 읽어봤자 이해할 수 없으리란 강박증 말고도 또 다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즉 시간에 대한 공포감 말이다.  156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활은 독서를 가로막는 끝없는 장애물이다.  159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160


프랑스에서는 '읽다'를 속된 말로 '꼼짝없이 매였다'고 한다.  162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읽기에 길들게 하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163


일단 책과 가까워지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나설 것이다.  164





무엇을 어떻게 읽든... -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좋은 책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좋은 책들이 책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 책들을 읽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도를 한다.  205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다시 읽는다는 건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따르지 않는 무상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반복하여 읽는 즐거움,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친밀감을 새삼 확인하려고 다시 읽는다.  207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감상과 선전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를 하려 드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산업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그러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정해진 틀에 자 맞추어져 덩달아 우리들까지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드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209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 책을 통해서 전염되는 병

'보바리즘'이란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 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

독자라면 누구나 처음 한동안은 빠져들기 마련인.

더없이 감미로운 경험인 것이다.  212


자기 나름대로 독서의 한 단계를 거치고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다른 책을 쥐어준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겪었던 성장기로 부인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결국 아이와 우리 사이에 깊은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  213


보바리즘은 세상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보바리즘만을 맹렬히 몰아 세운다. 청소년들의 형편없는 독서 수준을 개탄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은 텔레지번에 자주 나오는 인기 작가를 맹종하다가 유행히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작가에 대해서 핏발을 세우기가 일쑤다.  214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어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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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척점, 더 정확히 말해 정반대의 극(極 다할극)은 자주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과 우리네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때, 우리와 유사한 것보다는 다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체념한 채 타인의 모습에 비친 자기 자신의 반영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고, 타인과 나를 동일시하면서만 살고 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의 공통된 세계를 이해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은, 벼랑 끝에서 포기 직전까지 어렵사리 자신의 연구를 밀고 갈 때보다 남들이 벌인 탐구를 관찰할 때가 아니던가. 독서가 우리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이다. 독서는 고통을 주는 굴곡 많은 글쓰기 과정에서 우리를 구해주고, 계속 나아갈 힘을 실어준다.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FYJ)  5-6


AE : 내겐 두 가지 형태의 글쓰기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리 계획된 텍스트들이 있고, 여기에는 [밖에서 쓰는 일기]와 [외적인 삶]도 포함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병행하여 오래전부터 행해온 잡다한 형태의 일기 쓰기가 있는데, 1982년 이래로 나는 내면일기와는 별도로 '글쓰기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와 의혹을 담는 일기로, 난 이것을 생략된 문장과 약자로, 이를테면 흘려쓰고 있습니다. 내 머릿속엣 이 두 형태의 글쓰기 방식은 조금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문학과 삶, 총체와 미완 사이의 대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용과 수동성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31


AE :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와 <탐닉>, 이렇게 단 두 권의 내면일기만을 출판했어요. 이 일기들은 모두 십 년 전에 씌어졌고, 실제로 그 기간에 살았던 삶은 이미 각각 <어떤 여자>와 <단순한 열정>이라는 자전적 이야기의 대상이 되었지요. 이 두 가지 상황- 십년이라는 유예기간과 그 기간에 상응하는 책의 존재 -가운데, 후자가 일기를 출판하도록 부추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유예기간도 중요하겠죠. 그 세월이 내가 나의 일기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50


AE : 내 작업방식은 주로 기억에 근거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기억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할 요소들을 환기시킵니다.... 나는 '보고' '듣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어요. 그런데 내게 그것은 '다시 보기'이며 '다시 듣기'를 의미합니다.  53


FYJ : 당신은 다른 형태의 글쓰기를 추구함으로써 상당히 멀리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이 소설이라는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20세기에 소설 형식이 극한까지 가버린 이 시점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소설이라는 형태의 퇴락을 인정하는지요? 

AE : '소설'과 관련지어, 항상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이상 나의 지평 위에 있지 않습니다. ...

문학 교과서에서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이나 중등교사 자격 시험의 문학 시험문제에서는 마치 '소설'이 하나의 본질인양, '예를 들면서' 소설에 관해 논술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책에 관해 빈번하게 벌어지는 대담에서 '소설'이라는 단어는 점점 더 확장된 의미를 지니면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거의 히스테릭한 태도로 '허구'를 옹호하는 자들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결국 품질인증표라고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지 않습니다.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강렬한 감동을 주고, 생각이나 꿈 혹은 욕망을 열어주고, 때로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이 있을 뿐입니다. 루소의 <고백록>,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브르통의 <나자>, 카프카의 <소송>,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애초에 인증표를 달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설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상실해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72-74

AE : 내가 나라는 개인의 암흑지대에 마침 별 관심이 없어서인지, 정신분석은 나와는 언제나 무관했습니다. 점처럼 고립된 몇몇 발견들이 내게 뭘 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글쓰기에서 그것들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독자들 가운데, 글을 쓰는 것 특히 자전적 글쓰기를 행하는 것이 정신 분석을 실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어떤 허망한 욕심이나 오해인 것 같아요. 자신의 문제로부터 전적으로 혼자서 스스로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 즉 어떤 심리적-상징적 복권에 당첨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뭐 그런 것 말이죠. 그건 오해예요. 글쓰기가 깊숙이 감춰진 무엇을 다시 찾으러 나서는 것이며 정신분석의 치료과정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는 거니까요.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모든 지식뿐 아니라 교양, 기억 등이 모두 연루된 어떤 작업을 통해, 외양을 넘어서는 나 자신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로, 따라서 타인들에게로 귀착되지요.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냐 하는 것은 내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과는 완전히 반대됩니다. 내가 어떤 것에서 치유되어야 한다면, 내게 그 치유는 오직 언어에 대한 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달하는 작업, 즉 하나의 텍스트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타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정신분석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데 기여한 내용-그것은 정말 엄청나지요-에 관해서나, 문학에 접근할 때 그것을 사용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떤 형태로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때때로 경찰처럼 구는 구석이 좀 있지요. 무슨 일이 있엉도 자가의 심리적 구성 요소들을 낱낱이 적발해내고야 말리라는 의지를 품고, 텍스트의 고백을 마치 피고인의 진술인 양 몰아가잖아요. 그러고는 이 모든 게 바로 이것 때문이고, 난 이걸 다 알고 있지! 하는 식이에요. 이땐 실망스러워요. ...

이따금 나는 아도르노처럼 생각한답니다. 그는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정신분석이 개인 실존의 고통스러운 비밀들을 의례적인 진부함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한 바 있지요.  78-80


AE : 대게 글쓰기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어느 순간, 어떤 충동이 일어나 몇 페이지를 쓰도록 나 자신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난 그 글에 아무런 목적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페이지들이 어떤 특정 텍스트의 도입부로 예정되어 있지는 않죠. 그 다음엔 멈춰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그 조각을 한동안 보류시켜 둡니다. 그러는 사이 계획은 좀 더 선명해지면서, 말하자면 그 조각에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조각은 그 계획 속에서 결정적 요소로 부각되기에 이릅니다. 이런식의 설명이 좀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책들이 각각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각 텍스트에 대한 구상(난 이것을 욕망이라고 말하겠어요)속에는 그러니까 각 텍스트에 대한 욕망 속에는 어쨌든 매번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183


FYJ : 글쓰기 작업의 구체적인 정황을 요약해보지요. 당신은 문단과 문장의 삭제와 덧쓰기, 첨가와 제거를 통해 일을 진행합니다. 어쨌든 덧쓰고 지우는 작업이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당신의 모든 텍스트에 적용되는 항구적 필요성에 부응한다면, 그 작업의 성격에 어떤 유형의 관념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첨가합니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작업을 합니까? 당신은 버전마다 '원고지 철'을 바꾸는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것 같은데요...

AE : 내 원고들은 마치 패치워크 같아요. 갈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원고가 씌어진 종이 위에는 단어들 위나 행간 혹은 여백에 각기 다른 색의 사인펜이나 검은 연필로 덧쓴 자국들로 온통 뒤범벅된 몇 개의 문단이 씌어 있어요. 그 문단들의 자리는 아직 결정되지 않아서, 그것드로가 연관지어 참조해야 할 페이지 번확 표기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10번 종이에는 10-2, 10-3 혹은 10-4 같은 식으로 종이들이 와서 붙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아주 최근에는 포스트잇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잘 떨어지기 때문에 크게 신뢰하는 편은 아닙니다. 난 모든 것을 간직하고 싶거든요. 어느 날은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이 그 이튿날에는 다시 좋게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은 계획, 즉 계획을 구성하는 데 내가 몰입했을때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죠. 한편으로는 아주 천천히 나아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제든 일상적 삶에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끊임없이 첨가하고 끌어들이는 식이죠. 삭제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마지막 단계에서 컴퓨터로 텍스트를 정리할 때는 많은 부분을 삭제합니다. 칠 년 전가지는 타자기를 사용했는데, 그때는 아무래도 정정하거나 수정하는 빈도에 한계가 있었죠. 텍스트가 인쇄되었을 때, 내 원고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종종 내가 이러저러한 것을 왜 지웠는지 스스로 물어본답니다. 그런데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수사본 연구가들이라면 과연 설명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의심스럽습니다. 텍스트를 매만지는 최종 단계에서, 나는 일종의 필연성에 따라 작업합니다. 하지만 일단 책이 완성되고 출판되면 그 필연성은 상실되고 말지요. 텍스트는 그 총체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 생명체처럼 고려되어야 합니다. 텍스트는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나와 한몸이지만, 결국 내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제거된 어떤 부분들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것입니다.  190-192


FYJ : 글을 쓴다는 것은 당신에게, 프루스트가 말했던 것처럼, "체험된 유일한 삶"이 되는 것입니까?

AE : 프루스트는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해명된' 삶. 따라서 실제로 체험된 유일하게 진정한 삶. 그것은 문학이다"라고 명시했습니다. 난 "발견되고 해명된 삶"이라는 이 말을 강조하고 싶어요. 내 느낌에 이 말이 핵심인 것 같아요. 혹 글쓰기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겠어요.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또한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글쓰기가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도래하게 하는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글쓰기에는 공포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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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의 만남은 항상 기대한 바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명성이 자자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찾아갔을 때 우리는 왜 예상했던 변화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면서 실망하고, 더 나아가 어리둥절함과 무능하다는 느낌을 품은 채 문을 나서기도 한다. 그럴 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탓하고, 문제의 뿌리는 분명 이해 부족이나 감성적 수용 능력의 부족에 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책은 문제의 뿌리가 일차적으로 개인에게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가르치고, 팔고,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명확히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높은 지위를 신비한 영역에 남겨두고 그와 동시에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4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개라고 제언한다.  5






방법론 


예술은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예술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 대상을 붙잡아둘 수 있다.  8


르노의 그림에서 여자가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것은 단지 곧 떠날 연인의 전체적인 형상이 아니다. 그녀는 더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것, 즉 그의 개성과 본질을 원한다.  8-10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16


어른과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와 놀고 있는 어른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아이의 기쁨은 천진난만하며, 그런 기쁨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어른의 기쁨은 삶의 고난을 회상하는 선에 머물고,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때로는 울게 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ㅇ낳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20


우리는 이상적 이미지를 일반적인 현실의 잘못된 묘사로 간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삶이 우리의 욕망에 얼마나 박한지 잘 알기 때문에, 부분적이지만 아름다운 광경은 우리에게 한층 소중할 수 있다.  22


많은 경우,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6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예바르게 행동하길 바라지만, 압력을 받으면 옆길로 샌다. 우리는 더 훌륭해지길 바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동기를 잃어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자신의 인격을 가장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격려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는 막대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37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42


어떤 것이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순간에 붙잡혀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곧 이해할 듯하면서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알쏭달쏭한 순간이 중요한 까닭은 성찰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찰의 과정을 포기한다. 우리는 사랑, 정의 또는 성공의 개인적 의미를 대부분 결정하지 못한 채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

예술은 자기 인식을 누적시켜, 타인에게 그 결실을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그럴 때 말은 서툴게만 느껴진다.  47


예술에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게 해주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주변에 어떤 예술작품을 둘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는 마냥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중요한 뭔가를 드러내보이길 원한다. 즉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48


예술에 대한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중요한 첫 단계는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이상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53


방어적 태도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날카롭게 주목하고, 어떤 것들에 강한 부정적 견해를 품게 되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라는 것을 너그럽게 깨닫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작품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외견상 이질적인 사고방식을 보다 편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방어적인 태도를 해소하는 세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아무리 미약하고 보잘것없더라도 예술가와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연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아주 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야망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충분히 탐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54-56


적절한 자극이 있다면 우리는 작품을 창조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치관 및 경험이 아주 잠깐이라도 설핏 겹치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56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해 고생하고, 매혹적인 것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종종 엉뚱한 갈망을 품는다.

문제의 한 원인은 상화에 익숙해지는 우리의 능력, 즉 우리가 습관화라는 기술의 달인이라는 데 있다. 습관이란 인간적 기능의 전 분야에 걸쳐 행동을 기계적으로 만다는 메커니즘이다. 습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그러나 습관은 꼭 그만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쉽다.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덜 중요한 것들을 삭제하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는 요소들을 삭제하고 만다.

예술은 습관에 반대하고, 우리가 경탄하거나 사랑하는 것에 갖다 대는 누금을 재 조정하도록 유도해 그 소중한 것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게 우리를 되돌려놓는다.  59


이미 그것들을 물리도록 확실히 봤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모든 것을 전면에 내놓음으로써 바로 그 선입견에 당당히 맞선다.  60


이미지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큰 원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해독제를 건네주어 면목을 세우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삶의 조건인 따분함과 무미건조함을 메스껍게 만드는 동시에 그 조건과 지적인 화해를 이끌어내는 예술의 힘 덕분이다.  62


예술이 심리적 취약점을 폭놃게 보완할 수 있는 도구. 그 취약점들을 요약해보자.

1.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중요하지만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좀처럼 붙들고 있지 못한다. 

2. 우리는 희망을 쉽게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삶의 나쁜 면들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어떤 것을 향해 계속 나아갈 합리적 이유를 깨닫지 못해 정당한 성공 기회를 놓쳐버린다.

3.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고립감과 피해의식에 쉽사리 이끌린다. 우리는 곤경의 의미를 잘못 판단하는 탓에 너무 쉽게 당황한다. 우리는 외롭다. 하지만 이것은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통을 충분히 깊이 있게, 정직하게, 인내심 있게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꾸준하지 못한 인간관계, 질투, 이루지 못한 꿈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보여주려 해도 그 방식때문에 자칫 상대방이 경멸감과 모욕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통을 겪고, 이 고통에는 존엄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4. 우리는 균형감이 없는데다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다수의 자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보다 나은 자아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대개는 우연히 그리고 너무 늦은 때에 만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꿈과 관련해 의지의 박약에 시달린다. 행동하는 법을 모르진 않는다. 다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형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최고의 통찰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뿐이다.

5. 우리는 어렵게 깨닫는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수께끼이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사랑받는 일에 대단해 서툴다. 

6.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많은 경험, 사람, 장소, 시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런 것들이 잘못된 포장에 싸인 채 다가오고 그래서 그것과 연결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판단의 먹이가 된다. 우리는 너무나도 수동적으로, 모든 것이 '낯설다'고 생각한다.

7. 우리는 친숙함 때문에 둔감해져 있으며, 화려함을 부각시키는 상업 지배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는 게 단조롭다며 불만족에 빠진다.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고민이 우리를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64


(위의) 일곱 가지 심리적 취약점과 예술을 연관시킬 때 예술은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게 되고, 우리에게 일곱 개의 보조수단을 제공한다.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술은 소중한 것과 우리가 찾은 최고의 통찰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예술에 우리의 집단적 성취를 안전하게 예치한다.

2. 희망의 조달자 : 예술은 즐겁고 유쾌한 것들을 시야게 붙잡아둔다. 예술은 우리가 너무 수비게 절망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 예술은 삶에서 슬픔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를 깨우쳐주고, 우리는 그로 인해 곤경 앞엣 덜 당황한다. 곤견을 고귀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4. 균형추 : 예술은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의 핵심을 특히 명료하게 암호화해 다양한 형태의 매개로 우리 앞에 내놓고, 그럼으로써 우리 본성의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고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아트 오브제를 집어들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이게 나야."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되어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훌륭하게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예술은 우리에게 다른 문화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가장 웅변적인 예들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예술작품과의 교유는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준다.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단지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 보다 나은 존재로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손닿는 거리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우리는 감수성을 회복하고,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예술은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막아준다.  65





사랑


유명한 격률에서, 17세기 프랑스의 도덕주의자 라 로슈푸코는 "사랑 같은 게 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들은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 강조한 바 있다. 이 격률은 사람들의 노예근성과 남을 모방하는 경향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 아닌 맥락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한 실제적 현상에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우리의 광범한 감정들 중 어떤 것을 진지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 결정할 때 개별적이 아니라 사회적이 된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단서에 이끌려 어떤 감정은 특히 중요하게 간주하고, 또 어떤 감정은 억누르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

만일 인간의 감성을 인도하는 것이 문명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정한다면, 문화는 정치와 더불어 그 주요한 메커니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듣는 음악, 우리가 보는 영화, 우리가 거주하는 건물,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 조각, 사진은 섬세한 길잡이이자 교육자 역할을 한다.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화가를 언급하며, 라 로슈푸코의 사랑에 대한 통찰을 미술에 적용해 명언을 만들어냈다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까지 런던엔 안개가 없었다." 와일드의 말은 사람들이 영국의 수도를 관통하며 흐르는 물 위에 떠다니는 짙은 수증기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정확한 요점은 화가가 풍부한 재능을 통해 안개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봐도 흥미나 짜릿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100-102  


예술의 사명을 정의하자면 그 임무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강의 연인이자 하늘의 연인, 고속도로의 연인이자 돌의 연인이 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의 연인이 된다.  102-103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르다. 감탄에는 왕성한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려 할 때 고개를 든다. 집, 자녀, 사업 및 가계 운영을,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땐 감탄스러웠던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저절 툭 튀어나오는 법이 거의 없고, 연습을 안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런 자질들로 인돟는 유능한 길잡이다.  107


인내는 스릴과 거리가 멀다. 사실 인내는 흥분하지 않고 지내고, 욕구 충족을 미루고, 지루함과 무덤덤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명백하지만 소홀히 다뤄지는 진리를.. 좋은 것들도 평범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이 진리를 온전히 내면화할 수 없다. 습관처럼 완전히 몸에 밸 때까지, 매일매일 이 따분한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110


레오나르도는 호기심이 충만한 위인이었다.

호기심은 모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

발견을 향한 그의 의지는 체계적이다. 그는 이해하길 원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업삳. 그는 중요한 것을 알기 원했고, 단 한 장의 명료한 지면에 자신의 통찰을 담아냈다.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정확한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당신의 문제는..." 또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라 말할 때, 우리는 허탈감을 느낀다. 그 견해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상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겐 아주 잘 맞을 수 있다(그의 전 애인, 그의 까다로운 형제, 그의 아버지 등, 현재를 깊이 조사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곧잘 과거의 이론을 현재에 투사한다). 레오나르도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진정한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112


불운하고도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진 않는다. 문제에 맞는 해결책은 어딘가에 있고, 예상치 못한 일은 적응하면 된다.  114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115


합리적이라는 건 정확한 설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  117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울한 양산은, 처음 알았을 땐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너무나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이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단지 이미 존재했지만 사람들이 무시하던 매력을 드러냈다. ..

오래된 연인 관계에서 현재에 안주하는 습관을 깨고자 할 때 우리는 마네가 그의 채소에서 발휘했던 변형의 상상력을 우리의 연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4


여행은 장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아야 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어색한 질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잘못 할고 있었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예상했어야 하는가? 당신은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며, 다음범에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사랑을 위한 준비가 거친 바다로 나가기 위한 항행 준비보다 조금이라도 덜 가혹하리라고 예상해선 안 된다. ..

우리의 문화는 빙하의 바다를 항해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없이 감상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너무 편향적이다.  126


가치 있는 여행이 쉬우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127





자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경계에 위치한 이구아수 폭포 사진이나, 푸른 알프스 계곡에서 바라본 융프라우가 담긴 엽서를 생각해보라. 이런 이미지들은 보는 즉시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러나 왜 그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하면, 적당한 대답을 떠올리기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과의 만남은 폐부를 찌르듯 아플 수 있다. 자연은 마음같아선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130





 


자본주의를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이 개혁의 본질을 가리키는 생생한 단서들을 미술의 영역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162


진짜 문제는 자신의 관심사를 모른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는 태도, 약점을 가리기 위해 뒤집어쓴 오만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 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169


어떤 것이 "굉장하다" "멋있다" "놀랍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의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내는 중이지, 설명을 하는 건 아니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170





정치


올바른 정치 미술은 사회의 맥박을 감지하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그 문제들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석하고, 선택한 예술 매체에 최상의 기술과 혼을 담아 관람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정치 미술의 범주를 기꺼애 확장시켜야 한다. 우선 경제적 불평등에만 폐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을 타락시키는 개인 간의 수많은 사소한 행동에도 폐해는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한 사회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그 시민이 점점 더 공격적이고 조급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정치 미술의 한 임무는 평온함과 용서를 독려하는 데 있을지 모른다.  199-200


세련된 문화는 국가적 자부심을 엄중히 적대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부심이 사그라지진 않았고, 다만 길을 잃고 미성숙한 채로 남았다. 자신의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픈 욕망은 본래 자연스럽고 좋은 충동이다. 예술가들은 이 욕망에 주목할 가치가 이싿. 예술의 임무가 반드시 또는 오로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비난하는 데 맞춰질 필요는 없다. 자부심을 느낄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예술의 임무다. 물론 무가치하거나 어리석은 대상에 자부심을 느낄 때는('우리에겐 철광산이 많기 때문에 우린 위대하다' 또는 '우린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위대하다') 위험하고 역겨워진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운 충동을 가장 지적이고 가치 있는 방향으로 흐르게 할 필요가 있다. 집단적 자부심이 중요한 것은 한 개인으로서는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의 심리적 약점은, 본성적으로 다소 불가피하게 집단적인 어떤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다.  204-205


자부심은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 자부심을 느끼려면, 먼저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 보여주는 긍정적이고 현대적인 자아상을 지닐 필요가 있다. 항상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정체성은 국가의 현재적 실체보다 몇 세대쯤 뒤처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208


예술은 목적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단서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예술작품을 마법의 물체로 취급하고, 그것이 가슴속에 박힌 소외, 질병, 혼란, 어려움을 저절로 치유해줄 거라 믿는다.  231


예술의 혜택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술을 언제 밀쳐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책 전체에서 우리는 예술의 혜택에 주목해왔다. 예술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우리의 능력들을 어떻게 증진시키고, 돈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개선하고, 우리의 본래적 자아에 대처하며 우리의 꿈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노력에 어떻게 일조하는지 살폈다. 이것만으로도 기존 예술계가 지금까지 권유해온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에서 성큼 벗어나는 첫걸음을 땐 셈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예술이 덜 필요하고 덜 예외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늘날 사람들이 미술관의 격리된 전시실에서 발견하고, 찬양하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가치들이 온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다면서도 사회가 언젠가는 예술때문에 야단법석 떨지 않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나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피룡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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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좋은 놀이터를 만드는 기준으로 다음의 6가지 언칙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놀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고, 기분이 좋아지며, 머물로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

둘째,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갖추고, 무엇보다 찾는 사람에게 완전히 개방할 것

셋째, 인식할 수 있고, 제어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느 ㄴ위험이 있을 것

넷째, 다양한 분위기, 관심, 욕구에 맞춰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할 것

다섯째, 바람, 시선, 소음을 차단할 것

여섯째, 지나친 '특별' 금지를 하지 말 것  9




여기는 일하는 곳, 저기는 생활하는 곳, 쇼핑센터, 문화센터, 스포츠센터, 더 나아가 휴양 지역까지 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실상 어디서든 놀 수 있게 해주면 아이들이 저절로 사회에 적응하고 통합할 수 있게 되는 자생적인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 활동이 자연스럽게 통합된 생활 구조 안에서는 따로 놀이터가 필요 없지요.  15


자동차나 비행기 소음보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더욱 화를 냅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야단치면서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17


이상적인 놀이터는 손대지 않은 야생이라는 것입니다.  18


재미없는 놀이는 일이고, 재미있는 일은 놀이입니다!  21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아이들은 놀이 공간이 없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22


어른들은 놀이를 주도하며 자신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활동만 허용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것은 결코 자유로운 놀이가 아닙니다.

어른이 아이와 함께 노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아이와 놀아준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23


















지금 우리 도시와 마을, 주거단지와 집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활환경을 꾸미거나 아이들에게 적합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습니다.  31


놀이터를 제도판 앞에 앉아 설계해서는 안 됩니다. 직접 현자에 찾아가서 체험하고 고안하고 구상해야 합니다.  47


아이들은 인공적인 조형을 가하지 않은 야생을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를 계획한다면 야생을 가능한 한 많이, 다듬고 계획된 조형물은 적은 놀이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49


어린이, 어린이 놀이 또는 어린이 장난감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좋은 장난감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 크게 달라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어른들이 보기에 유치하고 지루한 장난감인데 아이들은 기분에 따라 좋아하고 내다 버린 장난감을 찾아내 가지고 놀기도 하니까요.  89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색깔을 가장 좋아합니다. 알록달록한 색은 주의를 끄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당연히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색을 좋아할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요구에 적합한 놀이 기구에는 이런 주의를 끄는 특성이 필요 없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재미있는' 놀이 기구들의 대부분은 아이들이 전혀 재미있어 하지 않습니다. 놀이의 질이 재미를 만드는 것이지,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녀 넣는다고 재미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90-91


강철로 만든 동물, 집, 탈것들은 아이들이 보기에 그저 쇠로 만든 보기 싫은 구조물일 뿐입니다. 반면 통나무는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동물이 되고 탈것이 됩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통나무를 미리 탈것이나 동물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면 아이다운 상상력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이것은 놀이 공간을 더욱 악화시키는 폭력일 뿐입니다.  91


놀이의 기능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놀이 과정뿐 아니라 거기서 생겨나는 사회적 만남, 재미와 즐거움, 상상력 자극, 사고력 향상, 호기심, 발견의 기쁨, 체험 욕구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150


놀이 기구에서는 아이가 평소 주위에 있는 물건으로는 할 수 없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놀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51


우리 어른들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아이들이 무엇이 아름다운지 잘 모른다고, 그래서 아이들의 미적 감각을 키워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학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미학을 아름다움과 같다고 취급합니다. 하지만 미학을 뜻하는 독일어는 본래 '인지' '느낌'을 뜻하는 그리스마ㄹ에서 비롯됐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인지감각을 자지고 있습니다. 감각은 학습할 필요가 없지요. 인지 과정을 간단히 기술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모두 우리 감각기관에 입력되어 뇌로 보내집니다. 거기에서 이미 있던 경험과 비교하고 해석하지요.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아는(인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경험 도시기에 맞지 않는 것을 나쁘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면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생각의 다리를 놓아 다른 경험들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오해로 이어집니다. 잘 알려진 이중그림(두 얼굴과 화분)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지요. 하지만 눈이 네 개인 얼굴처럼 경험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면 우리의 인지 시스템이 불안해집니다.

물론 갓 태어난 아이는 아무런 경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기 뇌의 구조는 매일 새로운 것을 살갗으로 느끼고, 듣고, 보는 경험들로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과 인상을 자주 많이 가질수록 아이는 인식 구조를 더 잘, 더 빨리 발전시킵니다. 이렇게 인식 기관에 끊임없ㅇㅣ 인지를 입력하고 쌓아가는 활동을 우리는 학습이라고 부릅니다. 학습을 위해 아이에게는 어떤 요구도, 교사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만난 상황에서 스스로 배우니까요. 

놀이는 이런 학습의 자연스러운, 아이다운 형태입니다. 놀면서 아이는 인상과 경험을 모으고 쌓고 변형합니다. 사람의 내면에서는 학습을 포함해 많은 것이 쾌락에 의해 조종됩니다. 새로운 것을 할 수 있게 되면 쾌락을 느끼고 이것은 새로운 경혐과 새로운 인상을 느끼고 인지하는 행복감을 알게 해주지요. 그래서 아이는 어른이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압박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즐겁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압박한다면 쾌락은 짐이 되고 맙니다.

미적 감각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전에 이미 어떤 물건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거부하며 어떤 것에는 무관심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능적 미적 감각 같은 것이 있는 걸까요?

아이들이 거부하는 물건에서 시작해 볼까요. 아기는 아직 선입견이 없습니다. 손에 닿는 것은 모두 입으로 가져가 감각기능을 확장합니다. 어른이 지켜보지 않으면 아기는 뜨거운 것에 데고, 독성 물질에 중독되고, 잘못 삼켜 사레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스스로 인지하지요. 이렇게 입력된 인상들이 쌓여 아이는 사물들을 알아보고 분류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가 처음 보는 물건을 거부한다면 나쁜 경험을 했던 물건과 혼동하거나 그 기억과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다음 질문으로 가볼까요. 어른들이 보기에 아주 중요하거나 정말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놀랍다고 느끼는 것에 아이들은 왜 무관심할까요?

우리의 감각기관에는 아주 많은 인상들이 홍수처럼 밀려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수많은 인상들 가운데 어른들은 재미없어 보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걸러내고 극히 적은 부분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인지 구조는 아직 세밀하게 분화되지 않아 어름 만큼 빨리 사물들을 인식하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느끼기에 자신의 경험 세계 밖에 있는 것은 놀라움입니다.  265-268


우리 뇌 속에는 경험과 상관없이 어떤 행동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타고난 구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후 경험에 의해 각인되어 단단한 구조가 될 수도 있고 무시되고 억압될 수 있습니다. 이 기본 구조 가운데 하나는 다정함, 부비기, 살갗 만지기, 따뜻함, 부드러움, 신체적 접촉 등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곰돌이, 귀엽고 폭신한 인형, 부드러운 쿠션 등 '살에 닿는 물건'을 좋아하는 것으로 발전하지요. 이런 욕구는 청소년기 경험에 의해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거나 다른 욕구와 중첩됩니다.

또 하나의 기본 구조는 후손에 대한 보호 욕구입니다. 이 구조는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뚜렷해지고 어른이 되면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배려와 부모의 책임감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성향은 이미 아동기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작고 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사물과 동물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보호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비례가 다른 모습을 통해 알아봅니다. 일반적인 어른들의 크기가 아니라 몸집 전체에 비해 신체 각 부분의 비율이 다르다는 점이 경정적입니다. 다시말해 몸에 비해 머리가 크거나, 아주 큰 눈, 작은 코, 작은 입, 짧은 팔다리, 간당히 말하면 갓난아기와 같은 비율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기본 구조는 성별 확인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전형적인 여성적' 또는 '전형적인 남성적' 행동을 합니다. 성적 정체성의 확인은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자신이 원하는 성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여자아이는 빵빵한 가슴과 긴 머리칼, 날씬한 다리를 가진 바비 인형을, 남자 아이는 근육직의 액션  인형과 마초 세계의 부속물인 도구, 무기 등을 가지고 놉니다. 

또 하나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기본 구조는 두려워하면서도 으스스한 것을 가지고 놀면서 단련하려는 욕구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잔인한 것, 눈에 거슬리는 것, 오싹한 것에 아주 강하게 이끌리는 취향을 보고 매우 의아해 합니다. 어른들이 끔찍해 하는 것에 아이들이 이처럼 매혹되는 데는 분명 이것들이 특이하고, 새롭고, 무엇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괴물 캐릭터와 공포 만화, 영화, 책들이 요즘 시대의 특징만은 아닙니다. 옛날에도 가장 인기가 있던 것은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는 동화책이었지요. 많은 놀이 가운데 어른들이 아이들 정서에 나쁘니까 하면 안 되고, 아이들이 멀리하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는 놀이들의 바탕에는 으스스함의 짜릿한 매력이 깔려 있습니다.

영향을 크게 미치는 또 다른 기본 구조는 소속을 향한 욕구, 가족을 이루려는 소망입니다. 아이들은 주변 환경과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비판 없이 그대로 모바합니다. 금기시하고 금지하지만 발생하는 일이든, 사회가 허락하고 인정하는 일이든 똑같이 따라하고 흉내 냅니다.

더 자라서 유치원,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를 사귀고 다른 집단에 속하게 되면 아이는 새로운 집단의 행동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현재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습니다. 집단 안에서 힘세고 인정받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은 집단 안에서 특권적 가치를 지니는 물건과 행동방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요. 옷차림, 머리 염색, 귀걸이, 문신, 태도와 언어 표현 등은 그 집단의 특징이지만, 만약 집단이 없다면 부적절하고 번거롭다고 여길 것들입니다. 그런 특징 때문에 집단 구성원은 외부와 구별되고 다시 한 번 집단에 단단히 결속됩니다. 집단만이 그의 상징과 태도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동은 유행에 매우 민감해 상징물도 그만큼 빨리 바뀝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집단의 고유한 상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그라피티 같은 것을 너그럽게 봐줘야 합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종종 오해를 부르는 기본 구조는 상상의 세계에 푹빠져 사는 아이들의 특성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곧잘 다른 세계 속으로 옮겨갈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를 쉽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는 통나무가 오토바이가 되고 녹슨 하수관 하나가 말이 되었다가 공룡이 되기도 하고 우주선도 되고 돛단배나 마녀도 됩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상상력을 한껏 발휘해 놀ㅇ이를 하고 사물을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은 아이를 위한다며 자신의 해석대로 지레짐작해서 형상을 만들어줍니다. 오두막은 버섯 모양으로, 통나무는 트랙터나 용 모양으로, 벤치는 자동차 모양이 됩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그런 형상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어른들이 아이에게서 상상력을 맘껏 발휘해 변형할 자유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기분과 놀이에 따라 계속 새로운 것을 사물 속에 집어넣는 상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아이의 특징이며 아이가 원하는 것인데 말이지요. 다른 한편 어른들이 미리 해석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통나무는 세부까지 꼼꼼하게 모방한 근사한 트랙터나 용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만 엉성하게 흉내낸 모양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아이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고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이는 아직 추상적인 형태를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스스로 나무토막을 오토바이로 여기고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해 넣을 수는 있지만, 어른이 만든 바퀴 두 개가 달린 추상적인 나무 형상을 보고 오토바이라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어떤 아이들에게 세부까지 잘 만든 싸구려 플라스틱 오토바이와 귀한 목재를 써서 약간 추상적인 형태로 멋지게 만든 비싼 장난감 오토바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거의 모두 싸구려 플라스틱 오토바이에 손이 갈 것입니다. 아이들은 추상적 형태가 아니라 세부에 관심을 보입니다. 물론 아이는 한동안 플라스틱 오토바이를 가지고 논 뒤에는 싫증을 내기 시작하고 오토바이에서 금세 로켓이나, 비행기, 배, 말 또는 다른 것으로 관심이 옮겨갈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런 추상적인 형태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조종하는 행위일 뿐이지요. 아이는 상상하는 데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비슷한 오해는 우리가 아이의 체격에 비해 지나치게 거대한 비율로 만들어진 물건을 줄 때도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어른을 위해 만든 환경 안에서 살지요.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많은 것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난쟁이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이 물건들이 모두 너무 크지요. 아이들에게는 난쟁이 세상이 더 좋을 겁니다.

우리 어른들도 어린 시절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너무 크지 않았나요? 거실도, 문도, 정원도, 벤치와 곰돌이 인형도 다 컸습니다. 곰 인형은 거의 어른만 했지요. 감상적 기분에 빠져 조카나 친구 아이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 우리는 어렸을 때 곰돌이를 기억하며 커다란 곰 인형을 사곤 합니다. 하지만 이 선물을 받은 아이는 커다란 봉제 인형을 보고 무서워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 무겁고 다루기 힘든 것입니다.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본래 곰돌이를 어른이 되어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다른 곰돌이만큼 작다고 깨닫습니다. 그때는 우리 몸이 작아서 곰돌이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죠. 아이들은 자신에게 맞는 비율을 더 좋아합니다. 또 작게 축소되어 한눈에 볼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환경을 좋아합니다.

아이와 어른이 종종 다르게 느끼는 조형적 특징은 색상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색은 시대 흐름에 따라 유행을 많이 타고 햇빛과 조명 그리고 개인의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견해의 문제입니다. 아이의 지각 기관에 유입되는 주변의 인상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면, 호기심 많은 시기임에도 대부분의 사물과 인상에 무관심한 아이들의 태도가 이해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특이한 것, 반짝이는 것, 자극적인 것,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 것에나 주의를 기울이지요. 강렬한 색상, 대비되는 색상, 서로 반대되는 색상들은 아이들의 주목을 끄는 색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이나 반응을 유도하는 색이지요. 아이들의 즉각적인 반응만 보고 이 색상들이 아이들에게 좋은지 나쁜지,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오랫동안 기분 좋게 느낄지 그렇지 않을지 등의 물음에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반짝이지 않고 수수한 색상이 아이들에게 더 좋을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두 번, 세 번 보아야 그걸 깨닫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 다르게 느끼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인지 특징은 시간입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일 년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5분의 1입니다. 아이에게 세계가 시작됐던 과거, 즉 아이가 태어난 시점까지 돌이켜 보면 아이들이 쓰는 '옛날에', '그때는'이라는 말이 우리 어른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시간 감각이 없지요. 모두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하기를 원합니다. "그거 가진 지 30분밖에 안 됐잖아", "저녁때까지 기다려", "2킬로미터 더 가서... 해줄게" 등의 말을 아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말은 아이에게 '영원'을 의미하지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시간을 계살한 수 없으며 아이는 칭얼대고 떼쓸 것입니다. 아이에게 맞는 디자인은 아이에게 맞는 거리와 아이의 능력과 의지로 견딜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 간격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노인들은 과거에 살고, 장년층은 미래에 살지만, 아이들은 현재, 지금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이라는 문제에서도 우리가 아이들을 오해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여섯 달 전에 아이들은 지금보다 작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섯 달 뒤에는 지금보다 더 자라 있을 것이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라는 상태는 계속 변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지금 살고 있는 주변 세계는 점점 작게 느껴지고 아이의 세계는 점차 확장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는 계속 더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경험한 아이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터득합니다. 세계를 발견할 때 아이는 언제나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러면서 어제의 한계를 오늘 뛰어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요. 아이들은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안 돼", "너도 나중에 자라면 해도 돼"처럼 많은 한계가 하지 말라는 금지로 구속할 때 아이는 이런 금지사항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런 불복종은 아이 때의 특징입니다. 아이의 상태는 정체되지 않고 계속 흘러가는 과정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자신의 세계와 다른 미적 기준을 적용해 아이들의 세계를 만들어 줍니다. 아이들이 노는 세계를 디자인하고 만들 계기가 생기면 마침내 디자인 감각을 맘껏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아이들의 미학적 요구와는 거리가 먼 색다른 디자인을 구상하곤 합니다. 어린이를 위한다며 어른들이 보기에 재미있고 환상적이고 뛰어난 디자인, 교육적이라고 여기는 것 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미학을 고집합니다. 어른이 만든 디자인과 형상들이 아이들 마음에 드는지 그들의 욕구에 합당 한지를 별로 고려하지 않고 말이지요. 

어린이용 공간, 방, 가구, 놀이 기구를 구상하고 만드는 일은 우리 어른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욕구의 대상을 스스로 만들 수 없고 만들어서도 안 되지요. 다시 말해 언제나 결정하는 사람은 어른입니다. 

어린이 공간, 가구, 놀이 기구를 장려/억압/무시하는 것은 어떤 문화가 아이들과 그들의 욕구에 대응ㅇ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과도하게 조성한 어린이 공간은 아이들의 이해력에 맞지 않습니다. 단지 어른들 위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어린이게게 맞는 공간은 아이들에게 조형의 자유를 허용하고, 바꾸고, 장식할 여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에게는 종종 파괴, 낙서 또는 유치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얼니이에게 맞는 세계는 어린이 고유의 미학을 지닙니다.

내일이면 아이들은 오늘과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뻐하던 모습과 다르게 빨리 변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독립하고자 할 때 아이들은 어른에게서, 어른의 보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반항할 것이고 충격을 줄 것이고 의도적으로 우리와 다르게 사물을 대하고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마침내 아이들은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미학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 아이다운 모습입니다.  269-278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가지고 놉니다. 그래서 놀이터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모든 것을 가지고 놀 수 없다고 생각해서 어린이 놀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논다는 행위는 "개인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을 도모하는 활동"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놀이는 온갖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경계에 다가가고, 경험을 하고 배우는 일입니다.  279


좋은 놀이터란?

1. 놀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고, 기분이 좋아지며,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2.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갖추어야 하고, 찾는 사람에게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 우선이다.

3. 인식하 수 있고, 제어할 수 있고, 조정할 수 있는 위험을 허용해야 한다.

4. 다양한 분위기, 관심, 욕구에 맞춰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

5. 바람, 시선, 소음을 막는 시설을 갖춰야 한다.

6. 지나친 '특별' 금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나쁜 놀이터란?

1. 훈련장 같은 놀이터

2. 조경 장식이 많은 놀이터

3. 휴식 공간으로만 이용되는 놀이터

4. 단 하나의 사용 집단을 위한 중앙 집중적이며 단조로운 형태의 놀이터

5. 비좁은 공간, 너무 적은 선택 가능성, 단조로움, 안전하지 못하고, 너무 삭막한 놀이터

6. 지나치게 안전하고, 지나치게 막혀 있고, 지나치게 규제가 많은 놀이터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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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대한 물음표였고,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질문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4


겨울만 되면 따뜻한 곳으로 '피한'을 떠나고 싶었다. 치안이 좋아서 혼자라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고,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자연이나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사철 꽅이 피는 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산책도 하면서 한껏 게을러지고 싶었다.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꼭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꼭 봐야만 하는 것도 없는 곳, 덜 쓰고, 덜 가지고, 덜 만남으로써 느긋해지고 싶었다. 여행이 주는 긴장감은 덜고, 일상이 주는 지루함은 벗어나 여행과 일상 사이에 머무를 수는 없는 걸까.  5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8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해으, 공부하고 준비해서 떠나지만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않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9




발리


온갖 조건을 따지다 보니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해졌다.  20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29


발리에서는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 짓는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이름이 정해져 있으니까. 먼저 남자 이름 앞에는 I를, 여자 이름 앞에는 Ni를 붙인다. 첫째는 발리어로 와얀 혹은 뿌뚜, 둘째는 마데 혹은 까덱, 셋째는 뇨만 혹은 꼬망, 넷째는 끄뜻이 된다. 다섯 번째 후는 어떻게 하느냐고? 그때는 이름 뒤에 발릭(되돌아간다는 뜻)만 붙여 다시 돌아가면 된다. 마데 발릭, 뇨만 발릭 이런 식으로, 사실 이 뒤에 진짜 개인 이름이 하나씩 더 있는데, 이상하게도 다들 저렇게 부르고 소개를 한다.  36-37


돌아가면 입지도 못할 옷을 굳이 사 입는 이유는 뭘까. 현지인 혹은 다른 여행자들과 섞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조금 더 과감하게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지 편안해 보여서 일수도 있다. 어쨌든 여행지에서 옷은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되어준다.  52


여행이 우리가 품은 질문에 답을 주진 않지만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긴 하지. 일단 나아가면 결국 답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 평생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던져진 질문과 마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74


놀이와 노동이 분리되지 않은 삶..  97


남이 만들어놓은 것을 소비만 하는 삶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 창조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린다. 

내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들고 ..

인간이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충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손을 쓰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헨리 소로가 그랬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치기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조금 버는 대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쓰는 일상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의 은유 같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98


마사지는 자신의 좋은 기운을 상대에게 나눠주는 행위라는 것.  103


자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탁기, 청소기, 전기밥솥 등등 시간을 벌어주는 온갖 기계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늘 부족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시간이란 얼마나 다양한 속도를 가지고 잇는 것인지!  112


발리인들은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 며칠 전 이브의 남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종교의식에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고 하겠어?"

외국인이 무엇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는지 이곳 사람들은 잘 안다. 그래서 대대로 지켜온 무화를 외국인에게 비싸게 팔아먹는다. 이들은 우붓 중심가에 들어오려던 맥도널드 매장을 막아낸 경험도 있다. 발리에 개발 바람이 불던 1970년대, 발리 사람들이 정부에 요구했다. 야자 나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도록, 모든 건물은 전통 가옥의 구조를 따르도록 법을 만들어달라고. '5층 이하'라거나 '지상 20미터' 따위가 아닌 '야자나무보다 낮게'라니. 거기 깃든 시적인 마음과 유연함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발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거의 없어 어디서나 논과 야자나무가 보이고 숲과 계곡이 몸을 드러낸다.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다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플란플란'하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의연함이 엿보이니. 한마디로 발리는 자연을 파괴하며 돈에 영혼을 판 그런 흔한 휴양지가 아니다. 농지 정리라며 계단식 논을 싹 밀어버리고, 주택 현대화라며 초가집을 죄다 없애고, 무조건 개발만을 외치며 살아온 나라에서 온 나는 발리 사람들이 부럽기만 한다.  113-116





스리랑카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장면과 마주친다.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순간에 단정적으로 평가하고 불평하는 것은 쉽지만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 지금 여기에서 유럽에는 없고 스리랑카에만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좋은 여행자의 기본은 질문하는 능력과 겸허한 태도라는 사실도.  154


그날의 기분에 따라 차와 찻잔을 골라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 나는 좋다. 그렇게 차를 우리다 보면 내가 세상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든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차우리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162


폐허에 관한 근사한 글을 쓴 영국의 자각 제프 다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바라보는 것,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뿐이었다."  222





치앙마이


내 몸에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253


일상처럼 여행에도 지루한 순간, 쓸쓸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 순간에 책은 나를 구원한다. ..

생각해보면 여행과 책은 서로 닮아 있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일상과 그 일상을 둘러싼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렇게 가장 온순한 방법으로 자신이 쌓아온 세계를 부수고 더 넓은 세계를 열어 준다는 점에서.  254





라오스


'좋은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좋은 여행자인가.' 이런 질문에 천착해왔지만 내가 좋은 여행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375-377


한 도시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와 같다. 생겨나고, 번성하고, 쇠락하기도 한다. 나는 변해가는 어떤 장소의 짧은 순간을 함께할 뿐이다. 여행지가 보여주는 찰나의 얼굴. 그 얼굴이 때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민낯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그렇게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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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는 말했다. "고독이 두려우면 결혼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독이 두려우면 여행하지 마라."  9


이야기꾼의 의도는 언제나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에 사로 잡히도록 하는 것이며, 그의 눈을 반짝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햄릿>의 서두에서,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한 말은 여행 작가의 이런 의도를 이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볍디가벼운 한마디로 네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네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세울 수 있으리라.'  10-11


여행의 기쁨, 그리고 그것에 대한 글들이 이 모음집의 주제이다. 무론 여행의 고통도 일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고통은 서정적인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12


일단 움직여야하고 또 어디로 갈지를 알아야 한다. - D. H. 로렌스 <바다와 사르디니아>  16


관점은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변화한다. 길이 아주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변명의 여지도 없이 아주 단호하게 방향을 틀거나 급경사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보게 된다. - 제임스 볼드윈 <산 위에 가서 말하라>


오랫동안 떠난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 돌아온다. 당신은 결코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는다. - <아프리카 방랑>  17


여행은 마음의 상태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이국적인 곳에 있는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경험이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18


여행이 무엇이든 그것은 꿈꾸고 기억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무시무시하게 여겨졌던 온갖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때로는 낯선 침대에서 악몽을 꾸기도 하고, 수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사건들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혹은 재스민의 강렬한 향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시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인생의 다른 경험들도 그렇듯이, 여행에서도 한 번으로 족할 때가 많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여행을 하다 보면 나를 붙잡으려 하고 부모처럼 굴면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 <바다에 면한 왕국>  19


모든 여행은 순환적이다.. 장대한 여행이란 영감을 얻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뿐이다.- <유라시아 횡단 기행>


내가 방금 도착한 장소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것, 바로 이 감정 때문에 나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내가 어디론가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20


여행에는 삶을 바꿔놓는 마술적 가능성이 있다. 어떤 장소에 홀딱 빠져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행복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여행자에겐 진부한 주제일 뿐이다. - <아프리카 방랑>  21


여행 중에 발명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쁨]이라는 시에서 아름답게 표현한 견해와도 같다. 우리가 세상과 마주할 때 "모든 것은 처음으로 생겨난다." "여성을 끌어안는 남자는 모두가 아담이며" "어둠 속에서 성냠을 켜는 사람은 모두가 불을 발명하고 있다"라고 한 것처럼, 스핑크스를 처음으로 보는 사람은 모두가 그것을 새롭게 보고 있다. "사막에서 나는 방금 조각된 젊은 스핑크스를 보았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그러나 영원히 생겨난다." - <아프리카 방랑>


여행은 살면서 경험하느 가장 슬픈 기쁨 중 하나이다. - 슈타엘 부인 <코린느 혹은 이탈리아>  22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크든 작든 두 힘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하나는 은밀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로 나아가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내향성, 다시 말해 왕성한 사고와 환상의 내면세계로 향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외향성, 다시 말해 사람들과 구체적인 가치들이 존재하는 바깥 세계로 향한 관심이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23


최상의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다. 보고 조사하고 평가하기 위해 여행자는 홀로여야 하고 또 홀가분해야 한다. 여행자에게 타인은 방해가 될 수 있다. 타인은 자신의 두서없는 인상들을 여행자에게 밀어 넣기 때문이다. 말동무가 될 만한 사람들은 여행자의 견해에 방해가 될 것이다. 반면에 지루한 사람들은 "이것 봐, 비가 내리네" 또는 "여기 나무가 굉장히 많은데" 같은 허튼소리로 침묵을 망치고 주의를 흩뜨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사물을 분명히 보고 똑바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소 진부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비추어 특별하고 흥미로운 비전을 포착하기 위한 고독의 투명함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23-24


최고의 여해을 위해서는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있는 곳에 집중하라.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지 마라. 어떤 일거리도 떠맡지 마라. 연락 두절의 상태로 있어라. 떨어져 있어라.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당신과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곳만을 생각하라. 이것이 여행의 이론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4


여행에서 주용한 것은 홀로 도착하는 것, 유령처럼, 해 질 녘 낯선 지방에, 불이 훤한 중심지 대신에 뒷문으로, 대도시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나무가 울창한 시골에, 주민들이 이방인을 본 적이 별로 없지만 친절히 맞이해주는 곳에, 그러나 주민들이 방문객을 다리 달린 돈으로 보지 않는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5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은 날에는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은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틀 연속 말을 하지 않은 날에는 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빠졌다. 침묵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익명으로 남는 것은, 그런 상태로 흥미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것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그것은 중독된다. - <바다에 면한 왕국>  26


여행자의 또 다른 자만은 자신이 본 것을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나간 길로 풍경을 대체하고 자신이 겪은 사건만을 중요하다 여긴다. 이 점에서 여행자는 착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착각이 전혀 없다면 여행자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 <바다에 면한 왕국>  28


여행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 <동바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29


큰 도시들은 내게 도착지처럼 보인다. 여행자를 벽으로 둘러싸며 멈추게 하는 곳, 거대한 건물들이 여행자에게 "이제 도착했습니다"라고 속삭이는 종점의 의미 외에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보인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30


내게 최고의 여행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침범을 포함하고 있다. 위험은 여행자에게 도전이자 초대이다. 모험을 파는 것은 여행 산업의 한 주제가 되었으며, 여행은 전리품이 되었다. -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31


모든 장소는, 그곳이 어디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방문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방문객이 뜸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장소가 내게는 가장 가치 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이런 곳은 가장 응집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은 해독 가능했고, 거의 언제나 나를 고양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32


소설을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한 일은 낯선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이다. - <바다 괴물들을 지닌 일출>  35


보통 여행자들은 대담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죄스러운 비밀은 여행이 지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장 게으른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여행은 뼛속까지 게으른 일이며, 교묘하고 빈둥거리는 회피이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침범하면서 우리의 뚜렷한 부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방랑하는 식객으로서 아주 불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36-37


여행자는 낭만적인 관음증 환자 주에서도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여행자의 인격 속 꼭꼭 숨겨진 부분에는 허영과 건방짐,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허언증이 있다. 여행자의 최악의 악몽이 비밀경찰이나 주술사, 말라리아가 아니라, 다른 여행자와 만나는 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호기심도 있다. 심지어 가장 소심한 환상가들도 때때로 그들의 환상을 수행하는 만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때때로 신속히 떠나야만 한다. 무단침입은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움이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목적 없는 기쁨이야말로 순수한 기쁨이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37


여행은 편견, 완고함, 편협함에 치명타를 날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여행이 몹시 필요하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광범위하고 건전하며 누그러운 견해를 일생 동안 지구의 한 작은 구석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 마크 트웨인 <마크 트웨인 여행기>  38


여행자는 사람들의 누넹 그 본연의 모습으로 비쳐야만 한다. 하느님의 천국에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교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닳아빠진 셔츠를 입었지만 순수한 인간의 심장을 가졌으며 오래 고통받는 사람이다. 비록 길이 해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세계의 끝까지 여행할지도 모른다. - C. M. 다우티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여행>  39


여행기와 소설의 차이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것과 상상으로 아는 것을 발견하는 것의 차이이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인간적인 어떤 것이 기록될 때, 훌륭한 여행기가 탄생한다. - <지구의 끝으로>  41


나는 개가 걷는 속도로 여행했을 때 내가 최고의 여행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가드너 맥케이 <지도 없는 여정>  43


모든 진정한 연애가 그 나라 말을 거의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매혹적인 어둠으로 더 깊이 끄는 외국으로의 여행처럼 느껴진다면, 모든 외국 여행도 연애가 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를 골똘히 생각한다.. 모든 훌륭한 여행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옮겨져 공포와 경이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다. - 피코 아이어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46


그는 자신을 관광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여행자였다. 그는 그 차이가 부분적으로는 시간의 차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관광객이 일반적으로 몇 주 후나 몇 달 후에 집으로 서둘러서 되돌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한 장소나 그다음 장소에 똑같이 속해 있다. 여행자는 몇 년에 걸쳐 지구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 폴 볼스 <셸터링 스카이>


관광객은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고,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 <오세아니아의 행복한 섬들>


관광은 진짜 게으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관광은 고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엿듣는 학문과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47


여행은 휴가가 아니며, 대개는 휴식의 정반대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48


사치는 관찰의 적이며, 당신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좋은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비용이 많이 드는 탐닉이다. 사치는 우리를 망치고 어린애 취급하며 우리가 세계를 아는 것을 막는다. 이것이 사치의 목적이다. 또한 이것은 호화 유람선들이나 값비싼 호텔들이 마치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이유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부자들은 결코 경청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비싼 생활비에 대해 끊임없이 투덜댄다. 실제로 부자들은 대개 자신이 가난하다고 불평했다. - <동방의 별로 가는 유령 기차>  48-49


관광은 정적인 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추구되며, 대개 기동력 있는 부자들이 기동력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분별없고 서툰 방문이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사람이 큰돈을 벌고 나면 좋지 않은 청취자가 되고, 참을성 없는 관광객이 된다. - <헤라클레스의 원주>  49


도보로 아프리카의 국경을 넘은 일이 없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간 적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의 공항은 단지 신뢰를 얻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가장자리에 있는 먼 국경은 이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현실이다. - <아프리카 방랑>  52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은 여행이다. 그 밖의 탈것들, 특히 비행기를 타고 가는 과정은 그저 이동일 뿐이다. 여행은 비행기가 착륙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54


기차만큼 자세한 관찰을 유발하는 운송 수단은 없을 것이다. 비행기 여해에 대한 문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버스 여행에 대한 문학도 그리 많지 않다.

기차는 누구든 그 안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자고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다. 지나치는 풍경과 기차 자체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비행기 여행은 늘 똑같지만 기차 여행은 언제나 새롭다.  66


여행에서 해 질녘 기차에 올라 춥고 떠들썩한 도시에서 침대칸 문을 닫고는, 아침에 새로운 위도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것보다 멋진 일은 없는 것 같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재즈의 반은 철도 음악이며, 기차의 운동과 소음은 재즈의 리듬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재즈의 시대는 또한 철도의 시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은 기차로 여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여행을 하지 않았고, 약동하는 템포, 덜컹거리는 소시,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노래들 속으로 들어왔다. 노선이 지나가는 철도 주변의 소도시들도 노래들 속으로 들어왔다. - <낡은 파타고니아 특급>  67-68


기차는 운송 수단이 아니라 그 지방의 일부이며 일종의 장소이다. - <중국 기행>


기차는 최소한의 위험으로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한다. - <유라시아 횡단 기행>  70


즐거움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글 중에서 아마도 여행기나 항해기보다 즐겁거나 유익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그 글이 즐거움과 인류에 대한 정보라는 양 측면을 목적으로 쓰였다면 말이다. 거기에다가 여행자들의 대화가 열렬히 추구된다면, 전반적으로 더 교훈적이고 재미있어질 것이므로, 그들의 책은 훨씬 더 유쾌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 헨리 필딩 <리스본 항해기> 


인간의 관습과 풍속이 모든 곳에서 똑같다면, 언덕과 계곡과 강이 다르다고 해도, 여행만큼 따분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지구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시점들은 여행자에게 그의 노동에 걸맞은 만족을 거의 주지 못할 것이다. - 헨리 필딩 <리스본 항해기> 85


내가 여행 생활을 하면서 내내 존경해온 여행가는 작가 더블라 머피이다. ..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었지만 레이첼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딸을 홀로 키우면서 인도, 발티스탄, 남미, 마다가스카르 등 어디든지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이와 함께 있다는 것은 당신이 공동체의 선의를 신뢰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88-89


'여행할 나라를 선택하라

여행 안내서를 활용해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지역들을 확인하라

그런 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라'

이 조언은 정치적 정당성에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행자와 관광객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것이 '속물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또한 현실적이기도 하다. 현실 도피적인 여행자는 공간, 고독, 침묵을 필요로 한다. 비극적이게도 나는 길이 나면서 자연 서식자가 사라져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해왔다.  90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라'

어떤 종교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채 여행한다면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의 여행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 주리라고 믿는다 해도, 전문적인 사회학적 혹은 정치적인 연구는 불필요하다. 그러지 않아도 여행을 하다 보면 현 정치 상황이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여행하기 전에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금기 사항들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워라. 그런 뒤 이 금기들을 성실하게 존중하라. 선물로 돈을 주는 것이 부적절한 곳에서 어떤 대체물이 그 역할을 행하는지를 알아내라.  91-92


'혼자 여행하거나 사춘기 이전의 아이와 함게 여행하라'

어린이의 존재는 공동체의 선의에 대한 당신의 신뢰를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인종이나 문화적인 차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92


'주의하되 소심해지지 마라'

단지 용감하거나 무모한 사람들만이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곳을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 사실 현실도피주의자들은 극도로 주의 깊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며 생존 메커니즘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다. 그들은 출발 전에 가능한 위험들을 검토하고, 일어날 법한 위험에 대처할 준비를 한다. 

여기에 기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병이 반쯤 비었는가 혹은 반쯤 찼는가? 왜 집에 편안히 있지 않고 외국에서 당신의 뼈를 부러뜨리려고 하는가? 낙천주의자들은 재앙이 발생할 때까지 믿지 않고, 그래서 두려워하지도 않는데, 이는 용감함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96


존 스타인벡 : 여행에 대한 글쓰기는 개미탑을 쌓는 행위이다. 

그것은 형태도, 모양도, 목적도 없고, 심지어 요점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가장 예리한 사실주의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주위에서 보이는 것은 개미가 파낸 흙이 땅 위에 쌓인 개미탑처럼 목적과 요좀이 없기 때문이다. - 1961년 7월의 편지 <스타인벡:편지 속의 삶>  103


여행할 때, 지식을 집으로 가져오고 싶다면 몸에 지니고 와야 한다. - 새뮤얼 존슨의 말, 제임스 보즈웰의 <존슨의 생애>중에서  149


여행가의 조건 - 당신이 건강하고, 모험심이 강하며, 재산이 적당히 있고, 마음을 특정 대상에 집중할 수 있다면 여행하라. - 프랜시스 골턴  201


강력한 사람이 반드시 가장 뛰어난 여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일을 최상으로 이루는 데 관심을 갖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여행가가 된다. - 프랜시스 골턴


따분한 여행은 일행을 서로 화나게 하기 쉽다. 그러나 여행가는 힘든 상황에서도 그의 의무에 최선을 다한다. 그는 두 배로 친절하게 대하고, 모욕적인 말을 점잖게 받아들이며, 응수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을 의무라고 여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너무 딱딱하게 구는 것은 과잉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작 어려운 것은 말다춤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프랜시스 골턴  202


한두 가지 시련은 대부분의 위대한 여행기들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여행자는 유쾌하고 수월한 여행으로부터 벗어나 운 나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 뒤 시련은 책에 진지함과 깊이를 더해준다. 그 결과 우리는 여행자를,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한 사람의 본성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205


일반적으로 영국인의 여행의 역사는 햇빛을 찾아 떠난 역사이기도 하다.  220


여행자는 이방인이다.  228


이방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여행자는 아무 권력도 영향도 알려진 정체성도 없다. 이것은 여행자에게 낙천주의와 가슴이 필요한 이유이다. 왜냐하면 확신 없는 여행은 비참하게 끝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행자는 익명이고 무지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휘둘리거나 속기 쉽다. 여행자는 '미국인' 혹은 '외국인'으로 알려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떠한 권력도 없다.  230


나는 어떤 곳에 가기 위해 여행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여행할 뿐이다. 나는 여행을 위해 여행한다. 중요한 일은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과 장애물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끼기 위해, 문명의 이 깃털 침대로부터 내려오기 위해, 그리고 잘린 부싯돌들이 뿌려진 지구를 이 발밑에서 느끼기 위해.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당나귀와 함게한 세벤느 여행>


여행은 기껏해야 자서전의 단편일 뿐이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세벤느 일기:프랑스 고산 지대 여행에 대한 노트>  239


나는 기차 여행의 주된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차는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간다. 기차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거의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 지방의 차분함과 정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리고 날듯이 달리는 차량들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동안, 사념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인적이 드문 정거장에서 내린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질서 잡힌 남쪽>  240


모든 진지한 순례자는 순례의 장소를 발로 여행한다. 걷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행위이다. 홀로 걷기는 우리를 명상으로 이끈다. 순례를 가리키는 한자는 '산에게 경의를 표함'이라는 뜻이다.  244


보행자는 사물을 명료하게 본다. 보행자의 머리 위의 태양, 보행자의 얼굴을 스치는 바람, 보행자의 발밑에 있는 땅 등.  253


신성화된 걷기는 육체적인 운동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걷기는 요가나 정신적인 행위에 더 가깝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걷기는 병자가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아령이나 의자를 드는 운동과 전혀 다르다. 걷기는 하루 일과이며 모험이다." 걷기는 사고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걸을 때 반추하는 유일한 동물인 낙타처럼 걸어야 한다. 어떤 여행자가 워즈워스가 하인에게 그의 주인의 서재를 보여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가 그의 도서관이에요. 그러나 그의 서재는 야외랍니다.'"  261-262


모트 로젠블룸.. 나는 그가 40년 이상 먼 곳들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었던 몇 가지 여로의 규칙들을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셋 - 많은 메모를 하고, 해독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메모들을 재독하라. 아니면 그건 단지 나에게만 해당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녹음기가 신뢰할 만하다. 하나 가지고 다녀라. 당신이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놀랄 것이다. 

열 - 어떤 먼 곳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빠져나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아내는 것이다. 즉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 시간표를 체크하라. 어떻게 떠나는지를 미리 알아야 한다.  355-358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여행기인 <슬픈 열대>

그는 철학자로 훈련받았지만, 인류학과 언어학의 탁월한 이론가였다. 그는 또한 신화학의 해설자였고 구조주의의 서술자였다. ..

여행은 보통 공간의 이동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적절한 개념이다. 여행은 공간, 시간, 사회 계층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각각의 인상은 이 세 개의 축에 공동으로 연관될 때에만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은 본질적으로 3차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여행에 대해 적절한 묘사를 하려면 다섯 개의 축이 필요하다. - <슬픈 열대>


여행자가 여행을 통해 자신의 문며오가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문명과 접촉했던 시대가 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그러한 예는 점점 줄어들었다. 현대의 여행자는 인도를 방문하든 미국을 방문하든, 생각보다 덜 놀란다. - <슬픈 열대>


아마도 그때의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막보단느 내 마음의 사막에 대한 탐험이었다. - <슬픈 열대>  359-360



하나 - 집을 떠나라.

둘 - 혼자 가라.

셋 - 가볍게 여행하라.

넷 - 지도를 가져가라. 

다섯 - 육로로 가라.

여섯 - 국경을 걸어서 넘어라.

일곱 - 일기를 써라.

여덟 - 지금 있는 곳과 아무 관계가 없는 소설을 읽어라.

아홉 - 굳이 휴대전화를 가져가야 한다면 되도록 사용하지 마라.

열 - 친구를 사귀어라.  488-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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